제갈량은 형주를 일부 떼어 주고 라도 오를 달래어 위를 협공하잔 입장이어서 어찌보면 유비 죽고는 제갈량의 대전제 대로 된건데 사실 촉이 형주를 가지고 있었어도 촉국력으로 단독으로 2방면에서 위로 밀고 들어갈수 없기 때문에 1차 북벌때 국력이 더 안정된 오의 힘을 빌어 형주 방면으로 밀고 올라갔는데도 위가 너끈히 막아 냈죠 길게보면 유비가 맞았다고 봅니다 제갈량은 장안 낙양 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협천자 하면 명분이나 대의가 촉에 더 있을거고 일단 위를 무너뜨리고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자 였던거 같은데 사실 그시기쯤 되면 이미 장안 낙양이나 협천자 따위의 명분보다는 실질적인게 더 중요한데 당시 중국은 남북의 지역차보다 동서 차이가 더컸죠 위를 무너뜨리 기도 힘들었겠지만 무너 뜨렸어도 오나라가 알짜 는 다가져 가고 오와의 1:1 대결에서 도 밀렸을 확률이 큽니다..
이거 제가 앞영상에 댓글쓰다가 걍 포기했었던거랑 비슷한부분도 있네여 일단 융중대를 기초로할때 남형주를 가진 유비는입장에서는 동시진출할때 관우가 사실상 독자적인 친유비 군벌수준으로 군사를 자체적으로 동원해서 진출할수있습니다 손권의경우는 수도 건업의 지리적 특성상 남형주에 대규모 군사를 낼수가없고 호족집합체 성향이 강하다는 문제점이있죠 자연히 일부의 병력과 촉의 보급을 성도외에 추가적으로 보태주는 보조적인 역활을 하게될수밖에없습니다 이럴경우 결국 형주지역 진출은 촉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출할수가있죠 그러면 북형주 양양이북지역의경우 동시진출해 점령후 오와 형주를 분할할때 촉이 주도권을 가지고 점령한만큼 연의에나오는 북형주의 주요성인 양양과번성은 모두 촉이가져갈 가능성이높습니다 이곳은 상용과도 이어지기에 이렇게 형주가 점령되어버리면 이후 촉이뻗어나오는걸 막기위해 막대한 군사력이 위나라에게는 투입되어야하죠 이렇게진출해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분할하는 형태를 취할경우 촉은 량주 사례주병주를 오는 예주 서주 양주 청주 요정도를 먹을확률이높습니다 영토의차이가 촉이 압도적으로 넓은데 인구구조상 동쪽으로 치우쳣던 당시를 생각하면 진출이 생각보다 오나라가 힘들수있습니다 또한 육군이 강한 위나라고 촉의경우는 여기서 마초를이용한 유목민족들을 동원해 기병대를 강화할수있어 위에 대적이라도 해볼수있지만 오는 그게어렵기에 사실 4개주도 힘들수도있구여 여튼 여기서 두번쨰 중요한게 바로 기주인데 기주를 먹으면 유주까지도 진출하는 형태가 가능해집니다 즉 촉입장에선 형주가 반드시 있어야만 기주까지 뻗어나갈 동력원이 마련되는거고 이게없으면 설령 진출한다해도 영토의 형태가 너무 길어지는 형태가되다보니 기주지역 진출이 힘들수있고 이후 오와의 천하통일을위한 대전을 벌임에 너무 불리해집니다
차라리 입촉 전에 더 많은 인적 자원을 형주에 지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네요 그만큼 형주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가장 중요한 땅이기도 한만큼 관우를 양쪽에서 보필해줄 문무관료들을 더 남겼다면.. 미방, 부사인 등도 그렇고 좀 그 당시 형주 인적 자원을 보면 아쉽기도 한데 말이죠 ㅠ
어린 코찔찔이 때 삼국지 처음 읽었을 때는 일본 꺼 번안 수준이라서 관우 죽음이 엄청 슬펐는데 두세번 읽으면서 저샊 왜 혼자 급발진했지? 하면서 유비가 안타까웠고 더 읽다보니 유비나 조조나 하면서 다 까다가 나이 들고 다시 저런 똑똑한 사람들도 못해내는 게 있구나!로 바뀌는
영상에서도 여러번 나오지만 관우 패전이 큰 문제가 된게 형주 수군을 완전히 날려먹은거죠...보급을 육로로 하니 보급선이 길게 늘어져서 패망 원인이 됐죠.. 유비가 전투는 잘했어도 전략이 부재 한게 대체 수개월을 왜 대치 했는지 의문 입니다. 차라리 성을 짓던가 위나라와 공작을 펴던가 뭐가 있어야지..그냥 죽치고 보급선은 수백리에 육로로 하고.. 전략적 목적이 명확하지 않아서 시작부터 이기기 힘든 전쟁 같습니다.
유비는 운과 실력이 절묘하게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애매한 점은 많지만 유비가 계산에 목숨거는 인물이었다면 남하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함께 물리친 유비입니다. 오나라의 수군의 위용과 뽕을 함께했을텐데 얕보았을까요? 유비뽕일 수도 있지만 저는 조조를 더 좋아합니다. 유비는 적어도 가슴이 뜨거운 인물임은 맞습니다. 후대에 그의 선택들이 유비 그거 연극배우에 정치쇼를 아주 잘했어~ 라고 하는건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제갈량의 출사표에 남하를 막지못한 통탄과 본인의 부족했을지 모르는 절절한 충정을 보면 유비는 자신의 부하들과 같은 곳에서 잠도 자주 잔걸로 보이는데 생활 모두가 연기와 계산이었을까요? 우리가 기록으로 보기엔 몇마디 대화와 에피소드로 이러이러한 말을 나눴더니 이렇게 생각하더라~ 해석하고 끝이지만 실제로 친구 군대 회사 동료들을 매일매일 보면 그들의 좋은점 나쁜점들을 아주 잘알게 되지 않습니까? 제갈량처럼 중국 역사에 남을 기재가 유비의 몇번의 연기쇼를 보고 깜빡 속아서 평생을 속아넘어가서 평생을 녹였다면 제갈량도 한낱 헛똑똑이에 불과한거 아닐까요? 그냥 그럴수도 있고 유비의 고도의 계산일수도 있지만 유비는 인간관계 라는 대전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건 결국 감정이고 유비의 인물됨이 연의에선 과장 되었으나 그렇다고 모든게 정치적 계산적 인물이라고 보여지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며 관우 장비와의 오랜 우애나 말씀하신대로 제갈량의 유비 선택과 충정 또 한 유비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바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그가 관우를 잃은 분노로 오를 공격했다고 보는게 자연스러워 보이며 건재한 위나라를 남겨두고 형주를 되찾기 위해 어떤 외교적 정치적 전략적 활동 없이 오와 명운을 건 승부를 벌이는 일이 거시적이고 합리적 판단으로 보이진 않네요 당장 위나라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오지도 않은 후일 양자대결의 미래를 위해 형주를 되찾고자 촉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인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유비의 선택을 추정해보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였는지 그의 감정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보이며 관우 장비와의 사이는 충분히 유비가 평생에 쌓아온 것을 걸고서도 전쟁을 벌일 수 있던 관계였다고 생각되네요
근데 풍습은 정사 삼국지 촉서의 기록이 일부 남아있어요. 기록에는 유비가 형주를 먹자, 수하로 들어갔고 유비와 같이 입촉해 공을 많이 세웠다. 이릉대전에 참전해서 오반과 함께 유아, 이이, 육손(일부 기록)을 격파했으나 그는 연이은 승리에 적을 가벼이 보았다라는 기록은 있습니다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무릉(武陵)의 오계만이(五谿蠻夷)가 사자를 보내 군사를 청했다. 선주전에 있는거 그대로 복붙한거고 적을 가볍게 보았다는 내용은 없어요. 육손을 이겼다는것도 조금 잘못된 듯.
대패했으니 기록은 그렇게 적히는 것이 타당하죠 실제로는 육손의 존버와 연이은 패배, 손환 고립, 주요 거점은 촉이 다 먹었고 오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으며 촉이 유리한 상황으로 판단했음 오직 육손만이 촉군의 전력 파악을 정확하게 하여 약점을 찔렀고.. 조조가 형주로 남하했을 때 조조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약점을 찔러 대승한 것과 비슷함
유비는 관장의 변함없는 충성을 얻었고, 위연을 포함한 병졸들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변함없이 그를 찾아 돌아왔다. 백성들이 고향을 등지고서라도 그를 따르려 했으며, 그는 부인까지 잃어 가면서도 목숨을 걸고 백성들을 지켰다. 관장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위나라만 좋은 일임을 알았어도 기꺼이 이릉으로 갔다. 특히나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조조나 졸렬하기 그지없는 손권과 비교되어, 그의 생은 의로움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중국사에서 유비같은 이를 거의 알지 못한다.
제 생각에도 이릉에서는 육손이 유비보다 잘해서 유비가 망한 거지 당시 유비의 판단 자체는 큰 틀에서 딱히 엄청나게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봅니다. 유비가 열받아서 이릉대전 일으켰다는 인식이지만 실제로는 관우 죽은게 219년 말, 이릉대전이 211년 7월이니 유비는 1년 반 동안이나 전쟁 준비를 한 거고 마침 여몽도 죽었겠다 기회라고 생각했겠죠. 육손이 생각보다 뛰어났을 뿐
확실히 조비가 비웃을 정도로 대군의 진이 장사진에 조선으로 치면 진관체제 같은 독립된 대대급 군영급의 진영이 원호관계없이 나열된 상황인데, 이걸 화계로 타계한 육손이 대단할 뿐이죠. 험지에서 멀쩡히 대치하고 있기에 장기전 계산을 어느정도 하고 군영을 늘린것이었을텐데 이 이점이 순식간에 단점만 보이는 사지로 만들어 버렸으니, 솔짓히 육손의 군재 역량은 삼국지 올타임 라인 맞습니다.
@@닉네임꼭설정해야함정확합니다 육손이 전쟁 초반부터 존버를 택하며 다른 장수들을 강제로 억누른것만 봐도 촉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기는 법을 알았던 것이죠. 유비는 산지와 요충지를 점거하며 방비를 단단히 했기에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구요. 비단 유비만이 아니라 다들 그랬을 것이고..
글쎄요... 유비가 1년 반이나 전쟁 준비를 한 것 치고는 허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익주 내부에서 장강삼협으로 진출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수륙양병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수군은 대동하지 않았고 보급선이 너무 길어서 빨리 승부를 봐야 하는데 진군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습니다. 험지에서 군영을 길게 늘어뜨린건 그렇다 할 수 있는데 확실하게 동오의 군대를 격파할만한 비기? 히든카드가 있었느냐 물어본다면 회의적입니다. 전쟁에 있어 기본 토대는 망치와 모루인데 모루만 잔뜩 있고 망치는 전혀 보이질 않거든요. 육손도 물론 대단하긴한데 육손이 아니라 그냥 역대 동오의 도독급 라인업이었으면 누가 왔어도 막혔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이릉대전은 형주의 중요성과 함께 유비의 촉한에서 관우가 차지하는 입지를 보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죠. 촉한의 장수로 형주를 맡는다는 것은 독이 든 성배를 마신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죠. 형주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보면 조조와 손권의 협공은 동화손권, 북거조조를 아무리 잘 해도 손권의 형주에 대한 욕심, 조조도 형주에 대한 욕심을 가졌다고 보면 피할 수가 없죠.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취했을 당시 조비는 신하들에게 유비가 오나라에 보복할 건지를 묻자 모두들 촉에 명장은 관우 뿐이었고 작은 나라인데 그럴 여력은 없을거라 했으나, 오직 유엽만이 유비는 분명 오를 공격할 것이라며 그러지 않는다면 관우와의 평생의 정분이 부족한 것이라 했다죠. 당시 유비와 관우는 30년을 생사고락하며 가족보다 더 끈끈한 관계였죠. 관우와 형주를 잃은 것은 유비를 극대노하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그러면서 손권이 보낸 제갈근은 위나라에 잡혀있는 헌제와 관우, 천하와 형주를 비교해서 어느 것이 크고 작냐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죠.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은 전혀 잘못된 게 아니고 굉장히 합당했습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관우를 잃고 대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형주를 잃었으니 무조건 다시 수복했어야 했죠. 유비가 잡장들 상대할 때는 손쉽게 이겼으나 조조, 조인, 육손 등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에게 밀렸던 이유는 당연히 군재가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조조를 한중에서 이기는 등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꺾은 이유는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썼기 때문이죠. 법정과 황충, 위연 등이 그 사례. 비록 이릉대전을 일으켰을 당시 법정, 황충 등 재능이 출중한 인물들 대부분이 죽었으나 조조도 그 당시 죽었기에 유비 스스로도 이제 자기를 막을 인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오나라는 자기 혼자 정리가 가능했을 거라 생각했겠죠. 그러나 육손이란 미친 복병을 만나 폭망 .......
건흥(建興) 원년(223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부서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개부치사 開府治事) 얼마 후 또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영 익주목) 대소 정사(政事)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吳)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맺어 마침내 여국(與國-우호국, 동맹국)이 되었다. 223년이 유비가 죽은 해임. 그닥 재미도 감동도 없는 내용 뿐인데. 이거 엄청 고대역사예요. 무려 400년이 지난 후 일어난 안시성 싸움에서 우린 자랑스런 승리를 이끈 성주의 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거의 비슷한 시대의 을지문덕의 경우는 이게 진짜 본명인지 살수대첩 후에 이 명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게 현실이예요.
이건 좀 말이 안되는게 형주가 그렇게 중요했으면 제갈량이 먼저 형주를 수복해야한다고 했겠죠 삼분지계 융중대 전략을 제안한게 제갈량이었을테니 그 전략 실행에 있어서 유비보다 더 앞장서야 했지만 오히려 유비를 말렸습니다. 그리고 유비의 평생 성격으로 보아 유비는 이익을 따져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명분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많은 인물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는데 형주가 이익이 되니 오나라를 친다 라는건 유비의 성격 상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비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인물이 아닙니다. 유비는 복수심의 출정한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성격을 알고 조운은 유비를 따랏으나 와 여기서 통수를 치고 안따라가는 개눔시키!
근데 이릉치기 전에 위나라 상대로 촉오 연합하면 이길 확률이 이릉 치고 촉오 연합해서 위나라 상대로 이길 확률보다 작지 않나요 촉오 전력이 온존된 상태에서도 열세인거로 아는데 본인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텐데 촉오 연합해서 천하 이분할 했을때 불리하다고 이릉대전을 일으켰다는게 적절한 설명일까요 완전히 멸망시키는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차라리 거의 몰아 넣고 배신을 하는게 합리적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이릉대전은 유비 입장에서 나름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동이 아닐까 싶음. 관우가 뻘짓에 뻘짓을 거듭하다가 죽었다 한들, 어쨌건 자신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2인자가 오나라에게 죽은 상황인데 이건 유비 입장에선 본인의 대전략인 융중대를 떠나서 당장 그냥 눈앞에 엄청 큰 정치적인 위기였겠지 당장 이릉대전을 앞두고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다고 하는데, 반대한 인물들 중에서 조운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형주계와 익주계 사람들임 원래부터 앞뒤 꽉 막혀서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조운을 제외하면, 유비군 원로들 중에서 이릉대전을 반대한 인물은 거의 없었고 여기서 유비가 관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후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나라와 화친을 맺는다고 한다면 유비군의 올드비와 원로들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지, 설령 가만히 있었다고 한들 유비에 대한 저 사람들의 지지는 어떻게 되는지, 그 이후에 유비의 정치적인 입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함 그리고 만약 유비가 진짜 관우의 죽음에 빡돌아서 복수때문에 앞뒤 안가리고 전쟁할 것 같았으면, 전쟁 준비고 나발이고 관우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 바로 군대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어야 정상인데 실제로는 관우의 죽음 이후 이릉대전에 이르기까지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리면서 전쟁을 준비했음. 빡치는 상황에서는 은근 한성깔 하던 모습을 보여줬었던 유비가 이때는 생각보다 냉정하지 않았나 싶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아마 이 일년 반 동안의 기간동안 유비는 오나라가 전쟁을 멈출 수 있는 명분을 던져주길 바라지 않았나 싶음 물론 이게 되려면 오나라가 촉에게 바싹 엎드리는 제스쳐를 취했어야 하는데, 정작 오나라도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었을거고 그래서 유비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된 상황에서, 어쨌거나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져버렸고,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유비군 올드비와 원로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혹은 저들이 죽어서 없어졌거나 세가 약해지면서) 오나라의 화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이 되었기에 유비도 이를 군말없이 받아들이고 뒤끝없이 끝난게 아닐까 싶다.
제 생각과 거의 비슷 하네요 유비는 일단 관우의 죽음보다도 형주 탈환이 1 목표였을 겁니다 제갈량 조운 이런 애들이 만류 했으나 유비는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거죠 그리고 이릉대전이 촉에 너무나 치명적인 이유는 자라나는 새싹들이 다 당했다는 점입니다 ㅠㅠ 2세대 장수들이 거의 다 죽어 가지고 국력에 크리티컬을 맞아 버렸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장비가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보나... 육손이 너무 넘사벽이라...ㅋㅋ 어째건 형주는 너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 위촉오 전부 탐을 냈을 거예요 이릉대전은 촉나라에 있어 너무나 뼈와 살이 아파버린... 결과적으로 3국중 하나의 운명이 나락 가게 만든 원인이 된 안타까운 전쟁이라 봅니다 그렇다고 유비도 나름 생각을 하고 군을 일으킨거라 보기에 유비 너 때문이야~! 할 수 도 없는... 다음은 제갈량 북벌 위연의 자오곡 계책 어떠신가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오곡 계책 쓸만해 보였거든요 ㅎㅎ
유비가 살아있을 적 시호를 받은 인물은 오로지 법정뿐입니다. 익후란 시호를 받았죠. 방통, 황충, 장비, 마초는 260년에 관우와 함께 시호를 받습니다. 조운은 그 다음 해에 받구요. 제갈량과 장완, 비의, 진지는 죽은 해에 바로 받습니다. 하후패는 멀리 귀순해왔기에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감사하게 잘 보고있습니다. 만 가끔 너무 단정적인,단호적으로 해석해주시는 부분이 있어 조금 불안하여 댓글을 답니다. 말씀하셨듯이 여러 권한을 가졌던 부분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조진처럼 오해했다 라고 해석될만한 추가 사료도 부족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다만 관우,장비 를 손찬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인지적 이라는게 그저 군통솔력,전투에서 잘한다는게 아닌 어느정도 문무겸비, 즉 통치도 나름 할 수 있으니 만명을 끌 수 있는 인물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의 경향샹 장비는 좀더 군사령관 스타일이였고 그것을 유비는 늘 걱정했다 라고 확인 가능하죠. 통치의 능력이 아주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어느정도 가능하니 만명의 군사를 이끌정도로 즉 한두 군의 문제가 아닌 한 영역을 이끌 수 있다 라고 평가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영상내용대로 저또한 형주파 의견도 있다 생각합니다만 이미 익주에서 달달 끌어모아 모랄빵 내는건 전 조상님 부터 유명한 방법이니 형주와 익주의 양면공격을 택하지 않는 이상 촉의 유비 입장에서는 회복 할 수 없는 손해였겠죠. 어찌됐든 저 또한 유비의 형주침공은 그전의 스토리든 현재의 명분이든 결과론 적으로는 실패한 전략이기 때문에 이걸 옳았다 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손찬님께서 좀 더 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그럼으로써 발생한 유비 집단의 치명적인 결함 을 설명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애독자인 아무개가 말씀 올립니다 ㅎㅎ
유비가 우려했던 촉의 전략적 한계는 결국 유비가 별세한후 뼈아플 정도로 현실화 되엇습니다. 험한 산길로만으로 한중에서 위를 위협하기는 생각보다 아주 힘들었습니다. (반면 산악 수비전으로 위군의 발목을 잡기엔 좋은 땅. 그러나 촉은 수비로만 절대로 위에 치명타를 가할수 없읍니다.) 결국 공명도 촉의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별세했지요. 공명다음에 군사를 사령한 비위, 등지, 장완, 그리고 강유도 결국 촉의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촉의 이릉대전후 역사는 참 우울합니다.
관우의 북벌은 관우 혼자 생각 한게 아나라 촉의 상황때문에 복합적으로 시작 한거 같습니다. 한중대전이 217~219년입니다. 관우의 출병은 219년이구요. 정확히는 위나라 철군은 3월 관우는 7월에 거병.한중대전이 삼국지에서는 비중이 적은데 촉으로서는 최고의 승리이자 3년이나 지속된 국운을 건 전쟁였습니다. 촉나라는 국력을 다해서 겨우겨우 위나라와 싸우고 있어서 군사적 압박을 덜기 위해서 관우한테 양양을 치라고 한거 같습니다. 기록을 보면 218년10월에 남양군에서 후음이 위나라 반란을 일으켰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우는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북벌을 하려면 차라리 이때가 더 좋았을것입니다. 다음해 정월에 진압이 됩니다. 그만큼 한중대전이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황 였습니다. 위나라와 한중대전을 급박 하게 하고 있어서 전선을 추가로 열지 못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3월 철수가 위나라가 완전 철군을 한건지 전술적 후퇴한건지 유럽국들 처럼 조약을 맺지 않았으니 촉에서는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니 관우가 북벌 하게 하면서 한중을 정비 하려고 한게 아닌가 생각 됩니다. 위에서 후음 반란때가 북벌 하기엔 더 좋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관우 패망을 보면 한중대전이 끝나고 위나라에서 한중대전에서의 병력이 여유가 있어서 장안에서 정비한 후에 서황이 대규모 지원군을 계속 보내서 지게된겁니다... 관우가 한중대전을 승리로 끝났다는 정보를 입수 하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우금의 3만 위나라 포로를 데리고 형주로 귀환했어야 했는데 놀라운 승리로 번성와 양양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니 욕심을 내다가 패망한거 같습니다. 또한 맥성 위치가 강릉 바로 옆입니다. 관우가 양양에서 패하고 바로 촉으로 도망갔으면 살았을텐데 강릉을 다시 탈환 하려고 가까운 맥성에 가서 한달넘게 전투를 하다가 도망가다가 죽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도망가다 잠시 버려진 맥성에 들렀다 라고 나오는데 실제는 규모도 어느정도 있는 성입니다. 도망가다 들렀다기 보단 강릉성및 형주 재탈환을 하기 위해서 두달 가까이 있었다고 보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다가......
형주는 강남의 중원이죠. 형주에 이어 익주까지 장악했기에 오나라따위는 시간문제였습니다. 2국 남북대결이 가능했을터인데 관우의 오판으로 유비는 패자의 지위를 상실해 버렸죠. 그 이전에 방통까지 잃어 버렸으니 유비의 운도 이미 다한셈. 방통을 잃지 않고 형주를 지켰으면 촉은 망할래야 망할수 없고 사마의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촉한의 삼국통일은 기정사실인건데 유비의 운이 다한 것.
늘 잘 보고 있는 채널이라 몇 마디 달아봅니다 ... 먼저는 추정 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에 대해 종종 너무 결론으로 단정지어 얘기 하시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런저런 추정을 해볼 수 있다라는 정도로 얘기 하시는게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 대한 다른 의견을 피력해보자면 아직 위나라가 건재한 상황에서 오지도 않은 미래의 양자대결을 위해 촉의 명운을 걸고 오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이기든 지든 위나라의 득이 커질 상황이고 지면 그야말로 촉의 거시적 상황 자체에 커다란 패착이며 몇 번 이긴다 한들 그걸로 오나라가 양보하고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며 전쟁이 길어지면 위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오나라가 위를 끌어들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촉은 멸망 할 수도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제갈량을 비롯한 신하들이 융중대를 모르고 거시적 판단을 못해서 말렸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으며 훗날의 양자대결을 위한 판도 같은걸 고려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안듭니다 ;;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당장의 명운을 건 도박이 누가 봐도 이성적이고 옳은 판단은 아니라고 보이네요 더구나 일생을 함께 해 온 관우나 장비와의 사이 역시 유비가 충분히 생애를 걸고 전쟁을 벌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보이며 유엽이 조비에게 말했듯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관우와의 평생의 정이 부족한 것이라고 얘기한 것부터 그 정으로 인해 전쟁을 벌였다는걸 알려주며 오히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오를 치지 않는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걸 얘기해주는 바라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패전 후 유비의 병사 역시 단순히 형주를 되찾는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병사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며 직접 친정하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서 패전후 급작스러운 병사는 이미 관우와 장비를 잃은 슬픔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황에 복수전의 패배로 천하가 멀어져가버리니 결국 삶의 실패에 대한 충격으로 병을 못이기고 죽었다고 보는게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부분은 청화수 유튜버님의 이릉대전 해석도 참고하심이 좋을듯합니다 여기서 손찬이형님이 언급안한 오나라의 꾸준한 촉에 대한 도발과 여론전이 꾸준히있어왔고 그에호응하여 촉은 아직도 반유비파가 계속 여론을벌이고 꾸준한 반란모의가 있었고 오는 그점을 계속노리고 유장을 익주태수에 봉하는 치졸한짓을 벌였습니다. 유비는 해야할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저는 그부분에서 많이 와닿았습니다 청화수님의 유비의 이릉대전해석을 꼭 참고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유비가 오랑 싸워서 형주를 되찾고 다시 융중대로 복귀하는 것을, 오에게 형주를 양보하고 이후에 천하를 다투는 것보다 상책으로 봤을 거 같지가 않아요. 물론 어느정도 개연성은 있지만 당시 배신당해 격앙된 상황 속에서도 참모들이 만류할 정도로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 여겨졌다고 보이는데, 유비가 어부지리도 모르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황권을 못 믿어서 졌다고 생각하네요. 긴 장사진하려면 연락책과 보급이 필수인데 수군과의 연계가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었죠. 수군이 약하더라도 이들을 쓰는게 맞는건데 익주 차지한지도 얼마 안 되어서 당시 촉 내부는 파벌문제가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황권을 중용하는데 유비가 껄끄러워해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충성심과 별개로 괜히 황권이 위나라로 투항하는 선택을 한게 아니었죠
1:44 '유비는 그의 계산대로라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판단했을 것이고, 개인적인 제 생각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부분은 주관을 치환 시켜버리는 문장이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엔-관우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유비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는 주장을 유비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형주가 아무리 중요지역이라곤 해도 위가 건재한데 오랑 건곤일척을 벌인다? 2차 대전에서 일제랑 나치가 이기면 미국 갈라먹기로 했는데 갈라먹기로 합의 한 내용이 일제가 불리해서 미국과 전쟁 도중에 나치 뒤통수를 때린다는 생각 같군요. 무다구치 렌야도 안할 발상 같습니다. 차라리 무리수를 둘거면 내가 이릉에서 비참하게 지면 위가 오를 칠거고 그럼 위오 동맹이 결렬될 거다. 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을 거 같아요. 요 몇달 재밋게 보고 있습니다만 이번 편은 좀 무리수에요.
공감합니다 이번 유비 영상은 좀 무리가 있다고 보이네요 영상에 너무 단정지어 추정을 결론으로 내려버리는 뉘앙스의 말투도 아쉬움이 있으며 무엇보다 위나라가 건재한데 오지도 않은 양자대결의 미래를 위해 촉의 명운을 건 전쟁을 벌인다는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보이진 않죠 더구나 유엽이 조비에게 한 말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유비는 반드시 오를 공격할 것 이고 그렇지 않으면 관우에 대한 평생의 정이 부족한것이다 라고 했을만큼 유비에게 관우 장비는 평생을 함께 한 각별한 사이였고 유비가 관우에 대한 분노로 오를 공격 한 것으로 보는게 훨씬 자연스럽다고 보입니다
형주의 중요성 뿐만이 아님. 그건 영상에서 다룬거고 애초에 손권은 유비 정통성까지 흔들면서 촉한을 분열시키는 막후공작까지 대놓고 했던거라 유비의 대오원정은 불가피했음. 오나라 입장에서도 강남 지방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형주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 간에 평화협상의 여지는 적었는데 심지어 양쪽 모두 강경파인 관우랑 여몽이 득세. 지정학적으로 오나라는 강남 정권 유지, 유비는 북벌을 위해서 둘다 필요한 걸 양보하지 못한거고
사실이 아닙니다. 촉나라는 위나라한테 직접적으로 공격을 당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고요? 위나라는 조조-조비-조예 3대가 오나라를 적극적으로 정벌 시도를 했거든요. 오나라만 완전 정벌에 성공하면 촉은 거진 공짜니까 동오에만 집중을 한겁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오나라는 위나라의 침공을 받으면서 동시에 북벌도 같이해야되는 촉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은 상황이에요. 그렇다고 오나라가 북벌을 안했느냐? 그냥 정사 기록만 봐도 제갈량 죽기 전까지 오나라가 촉보다 북벌 시도한 회수가 더 많습니다. 물론, 손권이나 제갈량이나 북벌의 성과는 미미한건 맞아요. 그런데 안한게 아니란거죠.
주인장님의 견해에 더해서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 아니면 손권이 형주를 완전 정복한다.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입니다. 형주의 민심이 손권을 따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남군을 유비에게 내어주고 유비를 손권의 북방 방어막으로 삼는 방식을 택했던 걸보면 유비 입장에서는 형주 민심이 아직 손권을 따르지 않았을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좀더 낙관적으로보면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갔을때 유비를 해방군으로 환영해줄 여지도 있기에 조속히 쳐들어가야 쉽게 탈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먼저 위를 쳐야한다는 조운과 제갈근의 제언을 안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조속히 쉽게 탈환해야하고 또 할 수있는 가능성이 많은 형주와 유비와 그다지 인연이 없는 양주, 관중쪽을 놓고 봤을 때 유비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던거죠. 그나저나 조운이 참 너그럽고 인내심많은 인물이구나 싶습니다. 계속 승진 밀리다 급기여 한참 새까만 후배한테 승진에서 꺼지 밀렸음에도 별 불만 표출이 없이 받아들였던 걸보면 말이죠. 위연같았으면 당장 쿠데타 했을텐데요. 시호가 순평후 인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유비가 황제에 오르고 유지한게 몇년 된 일은 아니라 속단하긴 이릅니다. 아시다시피 호족과 명문가의 사회라 유비는 당장에 챙겨야 할 인물이 더 많아ㅛ음. 그리고 당장 해야할 일도 산더미이고 결전준비도 해야 했는데, 시호니 주물거리고 있을수 있어ㅛ겠음? 그렇게 따지면 관장황마와 방통 전부 유선대에 시호가 나왔는데, 이건 유비가 이들을 다 싫어한거임? 법정은 그럼 뭐냐고 물을텐데, 법정이 익주정벌에 어떤 역할 했는지를 보면 시호 안줄수가 있었을까요?
그렇게 형주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제갈량을 남겼겠죠. 오히려 삼국통일을 위한 상황에서 오나라에게 먹히는 상황이 되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라고 생각합니다. 123등이 있는 상황에서 3등이 우승하는 시나라오는 극히 적기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3등이 되는 걸 막고 싶었던거죠.
형주가 좋긴했지만 솔직히 오와 전쟁을 할만큼 좋은곳은 아닌거 같습니다. 둘이 합쳐도 위나라에게 안되는데.... 위나라를 쳐서 이겼을 경우 형주 가진쪽이 유리하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건 어불성설이죠.... 오랑 싸워서 이긴다 한들 다시 둘이 합쳐서 위와 싸워 이길수 있다는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100번 양보해도 그냥 유비가 관우의 죽음에 삽질했다 라고 보는게 정사입니다
형주의 중요성 뿐만이 아님. 그건 영상에서 다룬거고 애초에 손권은 유비 정통성까지 흔들면서 촉한을 분열시키는 막후공작까지 대놓고 했던거라 유비의 대오원정은 불가피했음. 오나라 입장에서도 강남 지방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형주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 간에 평화협상의 여지는 적었는데 심지어 양쪽 모두 강경파인 관우랑 여몽이 득세. 지정학적으로 오나라는 강남 정권 유지, 유비는 북벌을 위해서 둘다 필요한 걸 양보하지 못한거고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전략적 계산만으로 오를 토벌하려했다 하기에도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1. 삼국이라는 형세상 강자에 대항한 약자들의 연합이 중요한데 유비에 대항해 위오가 손을 잡는다면 최악이었습니다. 손권이 스스로 숙이며 위와 영원한 동맹을 할 인물 역시 아니긴 하지만, 단순히 정벌이 실패하는 리스크에 더해 위오가 촉을 동시에 공격했다면 촉은 명운이 끊길수도 있었습니다. 2. 어쨌던 형주에서 관우의 번성전투가 실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군량을 보급하려 오의 보급소를 턴 것도 그렇고 이전부터 오와의 관계를 계속 깎아먹었던 것은 관우였고 오가 단순히 100퍼센트 잘못인 뒤치기를 했다 하기에는 그 명분을 너무 많이 줬습니다. 그렇기에 이릉대전에서도 내 의형제를 죽였다! 외에는 딱히 전쟁명분 역시 부족해 공공의 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3. 관우 장비 법정 황충 마초 등이 죽으면서 윗 라인에 큰 구멍이 생겨 안정적인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기였죠. 제갈량과 조운이 오 정벌을 반대한 것이 그저 오와 협력해야 한다하기에는 촉 내부의 상황 역시 좋지는 못했습니다. 인재 라인에 구멍이 너무 생겼고, 현재 점령하는 지역을 안정화 시키기 위한 S급들의 내부배치를 제외한다면 풍습, 정기, 장남 등의 유망주들만 끌고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찬이 형이 이야기하신 거시적 시점에서도 불리한 것 역시 유비도 계산을 못할 인물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 리스크 역시 계산이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이릉대전을 개전한 이유라면 한 평생을 억누르고 참고 참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빛을 발하나 싶을 때, 관우와 장비의 죽음이라는 평생을 함께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촉 인재라인의 붕괴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앞으로의 촉의 미래를 보았을 때 어두운 전망에 결국 평생을 참게 만들던 인내심이 버티지 못하고 그 분노가 전쟁으로 터져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전 영상 댓글에도 적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입체적인 인물이라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이기에 이런 장황한 댓글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번 영상도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이거에 동의합니다. 전략적으로는 당시 참모들이 만류한 것처럼 이겨도 이기는 싸움이 아니었죠. 관점을 바꿔서 황건적부터 한중왕 즉위까지 유비의 일생을 따라오다 오의 침공에 의해 한순간에 융중대가 좌절되고 평생 지기였던 관우가 죽는다면 그냥 모든걸 던져버리고 싶지 않을까요.
@@WhythisGGoraji 형주를 뒤통수 맞아서 뺏기고 관우까지 모가지 날라갔는데 가만히 있으면서 오랑 다시 손잡으면 촉 내부의 형주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가 없어요. 게다가 형주파 뿐만 아니라 내부 정치에서 중요한 영토를 잃은 것이기 때문에 회복하려는 모션을 취하지 않으면 결국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문을 가지는 내부 정치 세력이 늘어나게 될겁니다. 이는 내부 정치의 상황으로 이해해야 납득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유비의 실책은 오나라가 대군에 쫄아서 형주 절반을 다시 뱉어냈을 때 못이기는 척 하면서 관우 죽음에 책임있는 장수 중 하나의 모가지 받고 물러나거나, 죽은 여몽의 단독행동으로 뒤집어씌워서 죽은 여몽의 모가지를 받아가고 철수하는 식으로 적당히 빠져나가는게 맞았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더 급발진한거 이게 패착이라고 봅니다.
저도 이게 맞다고 봅니다 .. 관우를 잃은 분노보다 형주 때문에라고 하기에는 아직 오지도 않은 먼 미래의 양자대결을 위해 당장의 더 큰 위협인 위나라를 두고 오나라와 승부를 본다는게 이성적인 판단으로 여겨지진 않고 제갈량을 비롯해 만류한 신하들이 융중대를 모르고 거시적 관점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헤아려 볼 수 있는걸 몰랐다고 더욱이 생각하긴 힘들며 유엽이 조비에게 얘기하길 유비가 오를 공격하지 않으면 관우에 대한 정이 부족했던거라고 할 정도였으니 형주 수복은 목표의 하나일 뿐 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 자체는 관우를 잃은 분노가 가장 컸다고 생각됩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일으켰다고 하기엔 전쟁에 지면 지는대로 큰 패착이고 이겨도 오가 순순히 항복 할 것도 아니고 전쟁이 길어지면 위에 큰 이득이요 이 분 말씀대로 오가 위를 끌어들이면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에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였다고 봅니다 게다가 패전 후 곧 병들어 그대로 병을 못이기고 병사하게 된 것도 이미 관우 장비를 잃은 상황에 복수전까지 실패하고 촉의 전력만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니 그 심적 타격으로 그대로 병사하게 되었다고 보여지기에 더욱이 관우 장비를 잃은 슬픔과 분노가 컸다고 보이네요 단순히 관우에게 시호를 내려주지 않았다 이걸로 관우에 대한 분노보다 형주 수복을 위한 촉의 명운을 건 전쟁을 벌였다고 보긴 힘든 것 같습니다
형주의 중요성 뿐만이 아님. 그건 영상에서 다룬거고 애초에 손권은 유비 정통성까지 흔들면서 촉한을 분열시키는 막후공작까지 대놓고 했던거라 유비의 대오원정은 불가피했음. 오나라 입장에서도 강남 지방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형주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 간에 평화협상의 여지는 적었는데 심지어 양쪽 모두 강경파인 관우랑 여몽이 득세. 지정학적으로 오나라는 강남 정권 유지, 유비는 북벌을 위해서 둘다 필요한 걸 양보하지 못한거고
촉나라와 오나라가 연합해서 위에 대항한다는 전략(융중대-제갈량, 노숙등)이 유효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파토낸게 유비, 관우, 손권, 여몽등등이었고.... 이릉대전 이후에도 소극적인 공격전략을 취한 제갈량과 군사적으로 무능한 손권이 위나라에 크게 유효타 먹인적도 없었고.... 예로부터 동업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라는 말이있는데... 촉한과 오나라가 좋은 예인것 같습니다.
풍습 그는 요절하지 않았으면 넥스트 위연이었을지도?? 솔직히 유비의 전쟁 이유에는 저게 가장 핵심인건 맞습니다. 사실 그거 말고도 손권이 유장가지고 하는 짓을 보면, 전쟁 안 할래야 안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전쟁을 1번쯤은 했어야 함. 사실 손권측에서 하는 공공의 적 위나라 패야지 왜 전쟁함? 이런 말하는 거도 유비 입장에서는 내로남불로 들렸을테니까. 그렇다고 유비측에서 형주 분할 없이 꿀꺽했냐면 그거도 아니고, 관우가 가진 영토라고 해봐야 강릉과 무릉일대가 전부였고, 그 외 주요 요충지라 볼 수 있는 강하와 형주 3군 전부 손권에게 주기도 했으니, 사실 그냥 허울좋은 명분이라는거 서로가 잘 알고 있었을거임.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오나라가 이렇게 백도어를 쳐서 관우의 역할을 사실상 무력으로 계승해서 형주 방면에서 딱히 위나라를 공격해서 이뤄낸게 관우에 비해 딱히 크다고 말하기는 애매하기 때문에, 후세에 촉한정통론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더 두고두고 까이는 일이라고 생각은 함.. 물론 형주를 먹는게 장차 위나라 멸망후의 판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문제는 그건 일단 위나라를 무너뜨린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오나라가 한 행위는 더도말고 덜도말고 위나라 어부지리 시켜주는 결정타였다고 생각함. 그리고 그 오나라가 생각하던 천하이분은 결국 벌어지지 못하고 삼국지는 사실상 위나라의 승리로 끝났다는 점에서, 너무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행동 잘못하면 진짜 미래를 잠식할수도 있다고 느껴짐
이릉대전의 발발원인이 [형주자사 '관우']의 죽음 보다도 ['형주'자사 관우]의 죽음이 더 큰 원인이라는 영상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새롭네요... !
오늘 특히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맵 센터 못먹으면 말라 죽을 게 뻔하다는 걸 직시한 제왕의 촉.........못먹으면 어차피 망하는데, 무능한 아들놈은 지가 센터를 먹을 깜이 안되는 것 같고 내가 못먹어도 고 해야한다는 제왕의 생각이었을지도
결과론적이지만 결국 형주를 잃은 촉은 국력한계로 삼국통일에 실패했죠 유비는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요 형주를 잃으면 훗날을 기약할수 없다는것을
이건 생각좀더 해봐야될듯 유비의 관점이지만 1차북벌가는 제갈량 관점도 봐야됨 이릉대전에 갈아넣은 병사들만 있어도....
제갈량은 형주를 일부 떼어 주고 라도 오를 달래어 위를 협공하잔 입장이어서 어찌보면 유비 죽고는 제갈량의 대전제 대로 된건데
사실 촉이 형주를 가지고 있었어도 촉국력으로 단독으로 2방면에서 위로 밀고 들어갈수 없기 때문에 1차 북벌때 국력이 더 안정된 오의
힘을 빌어 형주 방면으로 밀고 올라갔는데도 위가 너끈히 막아 냈죠 길게보면 유비가 맞았다고 봅니다 제갈량은 장안 낙양 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협천자 하면 명분이나 대의가 촉에 더 있을거고 일단 위를 무너뜨리고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자 였던거 같은데 사실 그시기쯤 되면
이미 장안 낙양이나 협천자 따위의 명분보다는 실질적인게 더 중요한데 당시 중국은 남북의 지역차보다 동서 차이가 더컸죠 위를 무너뜨리
기도 힘들었겠지만 무너 뜨렸어도 오나라가 알짜 는 다가져 가고 오와의 1:1 대결에서 도 밀렸을 확률이 큽니다..
@@블랙록-f7k +마량 왕보 황권 등 촉의 2세대 문무관료들도 살아있었으면 북벌에 대한 부담도 덜었을 텐데 말이죠..ㅠ
@@AdamSmasher2077ㄹㅇ
퇴근하고 저녁먹으면서 보기 가장 좋은 채널! 정말 위대합니다 선생!
유비의 감정적 모험이 아닌 계산된 모험이었다는 해석 완전 공감합니다. 오늘 구독자 1.27만명, 127만명 될 때까지 일단 구독 시작합니다. 화이팅!
이거 제가 앞영상에 댓글쓰다가 걍 포기했었던거랑 비슷한부분도 있네여
일단 융중대를 기초로할때 남형주를 가진 유비는입장에서는 동시진출할때 관우가 사실상 독자적인 친유비 군벌수준으로 군사를 자체적으로 동원해서 진출할수있습니다
손권의경우는 수도 건업의 지리적 특성상 남형주에 대규모 군사를 낼수가없고
호족집합체 성향이 강하다는 문제점이있죠
자연히 일부의 병력과 촉의 보급을 성도외에 추가적으로 보태주는 보조적인 역활을 하게될수밖에없습니다
이럴경우 결국 형주지역 진출은 촉이 주도권을 가지고 진출할수가있죠
그러면 북형주 양양이북지역의경우 동시진출해 점령후 오와 형주를 분할할때 촉이 주도권을 가지고 점령한만큼
연의에나오는 북형주의 주요성인 양양과번성은 모두 촉이가져갈 가능성이높습니다
이곳은 상용과도 이어지기에 이렇게 형주가 점령되어버리면 이후 촉이뻗어나오는걸 막기위해 막대한 군사력이 위나라에게는 투입되어야하죠
이렇게진출해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분할하는 형태를 취할경우
촉은 량주 사례주병주를 오는 예주 서주 양주 청주 요정도를 먹을확률이높습니다
영토의차이가 촉이 압도적으로 넓은데 인구구조상 동쪽으로 치우쳣던 당시를 생각하면
진출이 생각보다 오나라가 힘들수있습니다
또한 육군이 강한 위나라고 촉의경우는 여기서 마초를이용한 유목민족들을 동원해
기병대를 강화할수있어 위에 대적이라도 해볼수있지만 오는 그게어렵기에
사실 4개주도 힘들수도있구여
여튼 여기서 두번쨰 중요한게 바로 기주인데 기주를 먹으면 유주까지도 진출하는 형태가 가능해집니다
즉 촉입장에선 형주가 반드시 있어야만 기주까지 뻗어나갈 동력원이 마련되는거고
이게없으면 설령 진출한다해도 영토의 형태가 너무 길어지는 형태가되다보니
기주지역 진출이 힘들수있고
이후 오와의 천하통일을위한 대전을 벌임에 너무 불리해집니다
익주와 형주사이는 너무나 멀고 험한 길이어서 관우와 유기적인 협력을 하는게 불가능하죠..그냥 손권도 걱정되고 조조도 걱정되니까 넌 지키기만해라..
이랬다면
차라리 입촉 전에 더 많은 인적 자원을 형주에 지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네요 그만큼 형주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가장 중요한 땅이기도 한만큼 관우를 양쪽에서 보필해줄 문무관료들을 더 남겼다면.. 미방, 부사인 등도 그렇고 좀 그 당시 형주 인적 자원을 보면 아쉽기도 한데 말이죠 ㅠ
정치적이유도 있지 않았을까요? 형주파가 익주를 점령한 상황인데 형주터전을 잃으니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고 , 손권이 유장을 익주목에 임명하기도 하고.. 이부분은 설화수님이 잘 다뤄주긴 했습니다.
설화수는 화장품 아닌가요? ㅋ
청화수 그 양반은 뇌피셜이 너무 심한 양반이라..
풍습이 이릉대전때 안죽었으면 얼마나 큰일을 했을지 궁금하내요. 사람 잘보는 유비가 임명했을정도니까
풍습만의 문제가 아님, 당시 잃은 장수가 수백명 정도라고 하니 촉한 멸망 때까진 그들도 수명으로 버티진 못했겠지만 최소 제갈량 북벌 때까진 요긴하게 써먹었을듯
@@ArtJoHistory 그당시 촉나라 체급에 장수 수백명 잃은거면 대장 중장급 뿐만 아니라 대위~대령급 지휘관 레벨 장수 풀도 박살났다는 소리라 진짜 타격이 엄청 크죠.
위연 정도는 충분히 됐겠죠. 위연이야말로 유비가 마음먹고 밀어준 장수였으니.
@@hsh6036거의 스탈린 대숙청급으로 장군들 사라졌다고 보면 될듯
@@likephoenix659 촉이 주 하나밖에 없는 나라라 장군급이 많아봤자 100명 이하일텐데 수백명 증발이면 장군급+대위~중령급도 씨가 말라서 남은 위관급과 영관급들 중 머리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람들 어거지로 특진시켜서 자리 메꿔야 하는 수준...
매번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형주는 정말 전설이다 괜히 코로나19의 발원지가 아니다
형주가 우한이었군요😅😅😅😅😅
대충 강하 정도? 완벽히 강하는 아닌데 그 부근임
진짜 조오오올라 재밌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융중대가 깨진 시점에서 유비가 살길을 찾은건 맞는데 시기가 문제였음 지금은 아니다 다 말렸는데 간 이유는 관우의 복수가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밖에 없음
어린 코찔찔이 때 삼국지 처음 읽었을 때는 일본 꺼 번안 수준이라서 관우 죽음이 엄청 슬펐는데 두세번 읽으면서 저샊 왜 혼자 급발진했지? 하면서 유비가 안타까웠고 더 읽다보니 유비나 조조나 하면서 다 까다가 나이 들고 다시 저런 똑똑한 사람들도 못해내는 게 있구나!로 바뀌는
결국 젊은 금수저가 과실 다 따먹는 엔딩꼬라지까지도 비슷
@@izumiaco5079 그리고 꿀꺽 삼키다 배탈나서 갈갈이 찢어지는 것도
영상에서도 여러번 나오지만 관우 패전이 큰 문제가 된게 형주 수군을 완전히 날려먹은거죠...보급을 육로로 하니 보급선이 길게 늘어져서 패망 원인이 됐죠.. 유비가 전투는 잘했어도 전략이 부재 한게 대체 수개월을 왜 대치 했는지 의문 입니다. 차라리 성을 짓던가 위나라와 공작을 펴던가 뭐가 있어야지..그냥 죽치고 보급선은 수백리에 육로로 하고.. 전략적 목적이 명확하지 않아서 시작부터 이기기 힘든 전쟁 같습니다.
북벌하려면 형주가 꼭필요하긴했음 도박은 어쩔수없었다고 봅니다 익주만으로는 산을 뚫고 가야해서 너무 난이도가 높음
🎉😢
그리고 1선급 엘리트들이 조조가 사망하는 시기 및 이후 3년동안에 대거 저승으로 호적을 이적하는등 인재풀 감소로 인한 타격도 실패의 원인중 하나라고 봅니다. 마초는 병에 걸렸고, 황충 사망, 장비도 암살, 법정도 사망등 이때 삼국의 인물들이 대거 죽었죠.
원래 조운정도 되면 은퇴해야하는데 장수가 다 죽어서 죽을때까지....
칠십넘은 노인을 풀세팅시켜서 전장내보내는나라... 얼마나 인재풀이 줄어들었으면
유명 역사강의 호소인보다 역사를 잘아는 똑똑한 사람
하.. 너무 좋습니다
결국 유비는 형주를 잃은 시점에서 형주를 되찾지 못하면 촉은 결국 멸망하리란걸 알았던 것 같네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힘을 다 내봤지만 하필 육손이... 육손이 아니었으면 오나라에 유비를 박살낼 만한 인재는 없었다고 봅니다. 막아내는건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유비는 운과 실력이 절묘하게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애매한 점은 많지만 유비가 계산에 목숨거는 인물이었다면 남하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함께 물리친 유비입니다. 오나라의 수군의 위용과 뽕을 함께했을텐데 얕보았을까요? 유비뽕일 수도 있지만 저는 조조를 더 좋아합니다. 유비는 적어도 가슴이 뜨거운 인물임은 맞습니다. 후대에 그의 선택들이 유비 그거 연극배우에 정치쇼를 아주 잘했어~ 라고 하는건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제갈량의 출사표에 남하를 막지못한 통탄과 본인의 부족했을지 모르는 절절한 충정을 보면 유비는 자신의 부하들과 같은 곳에서 잠도 자주 잔걸로 보이는데 생활 모두가 연기와 계산이었을까요? 우리가 기록으로 보기엔 몇마디 대화와 에피소드로 이러이러한 말을 나눴더니 이렇게 생각하더라~ 해석하고 끝이지만 실제로 친구 군대 회사 동료들을 매일매일 보면 그들의 좋은점 나쁜점들을 아주 잘알게 되지 않습니까? 제갈량처럼 중국 역사에 남을 기재가 유비의 몇번의 연기쇼를 보고 깜빡 속아서 평생을 속아넘어가서 평생을 녹였다면 제갈량도 한낱 헛똑똑이에 불과한거 아닐까요? 그냥 그럴수도 있고 유비의 고도의 계산일수도 있지만 유비는 인간관계 라는 대전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건 결국 감정이고 유비의 인물됨이 연의에선 과장 되었으나 그렇다고 모든게 정치적 계산적 인물이라고 보여지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며
관우 장비와의 오랜 우애나 말씀하신대로 제갈량의 유비 선택과 충정 또 한 유비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바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그가 관우를 잃은 분노로 오를 공격했다고 보는게 자연스러워 보이며
건재한 위나라를 남겨두고 형주를 되찾기 위해 어떤 외교적 정치적 전략적 활동 없이 오와 명운을 건 승부를 벌이는 일이 거시적이고 합리적 판단으로 보이진 않네요
당장 위나라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오지도 않은 후일 양자대결의 미래를 위해
형주를 되찾고자 촉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인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유비의 선택을 추정해보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였는지 그의 감정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보이며 관우 장비와의 사이는 충분히 유비가 평생에 쌓아온 것을
걸고서도 전쟁을 벌일 수 있던 관계였다고 생각되네요
근데 풍습은 정사 삼국지 촉서의 기록이 일부 남아있어요.
기록에는 유비가 형주를 먹자, 수하로 들어갔고 유비와 같이 입촉해 공을 많이 세웠다.
이릉대전에 참전해서 오반과 함께 유아, 이이, 육손(일부 기록)을 격파했으나 그는 연이은 승리에 적을 가벼이 보았다라는 기록은 있습니다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무릉(武陵)의 오계만이(五谿蠻夷)가 사자를 보내 군사를 청했다.
선주전에 있는거 그대로 복붙한거고 적을 가볍게 보았다는 내용은 없어요. 육손을 이겼다는것도 조금 잘못된 듯.
대패했으니 기록은 그렇게 적히는 것이 타당하죠
실제로는 육손의 존버와 연이은 패배, 손환 고립, 주요 거점은 촉이 다 먹었고
오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으며 촉이 유리한 상황으로 판단했음
오직 육손만이 촉군의 전력 파악을 정확하게 하여 약점을 찔렀고..
조조가 형주로 남하했을 때 조조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약점을 찔러 대승한 것과 비슷함
조비마저 유비가 패할걸 짐작하고 있었다죠 황권.마량이 있었을건데 유비의 이러한 단점을 해걀해주지 못하다니..
사실 말씀하신대로 기록이 나오기는 하나, 이릉대전 총괄에 설만큼 기록이 두드러지게 나오진 않았죠. 입촉하고 무슨공을 세웠는지 나와있지 않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조금 미스테리한 기용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ㄹㅇ 그나마 호응했을때가 손권 있을때랑 제갈각이었는데 융중대가 참... 실행되기가 힘들긴하죠
손찬형 업로드속도 쩐다♡
삼국지를 알면 알수록 관우가 급발진하지 않아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촉이 승리의 역사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들이 옛날사람들을 빡대가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들여다보면 다 합리적인 이유와 선택이 있죠
물시계 만들 줄 암? ㅋㅋㅋㅋ 누가 그런 생각을 행
@@Asian_American_Christian_Love ㅈㄴ 많이 함
특히 역사적으로 욕 먹는 군주나 인물 있으면 꼭 지들이 더 나은 것처럼 얘기함
유비는 관장의 변함없는 충성을 얻었고, 위연을 포함한 병졸들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변함없이 그를 찾아 돌아왔다.
백성들이 고향을 등지고서라도 그를 따르려 했으며, 그는 부인까지 잃어 가면서도 목숨을 걸고 백성들을 지켰다.
관장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위나라만 좋은 일임을 알았어도 기꺼이 이릉으로 갔다.
특히나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조조나 졸렬하기 그지없는 손권과 비교되어, 그의 생은 의로움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중국사에서 유비같은 이를 거의 알지 못한다.
형주를 굳건하게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는데요.. ㅜ ㅜ 현덕이 애초에 관공에게 그러한 점을 잘 상기시켜 주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인간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나 봅니다..
제 생각에도 이릉에서는 육손이 유비보다 잘해서 유비가 망한 거지 당시 유비의 판단 자체는 큰 틀에서 딱히 엄청나게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봅니다.
유비가 열받아서 이릉대전 일으켰다는 인식이지만 실제로는 관우 죽은게 219년 말, 이릉대전이 211년 7월이니 유비는 1년 반 동안이나 전쟁 준비를 한 거고 마침 여몽도 죽었겠다 기회라고 생각했겠죠. 육손이 생각보다 뛰어났을 뿐
확실히 조비가 비웃을 정도로 대군의 진이 장사진에 조선으로 치면 진관체제 같은 독립된 대대급 군영급의 진영이 원호관계없이 나열된 상황인데, 이걸 화계로 타계한 육손이 대단할 뿐이죠. 험지에서 멀쩡히 대치하고 있기에 장기전 계산을 어느정도 하고 군영을 늘린것이었을텐데 이 이점이 순식간에 단점만 보이는 사지로 만들어 버렸으니, 솔짓히 육손의 군재 역량은 삼국지 올타임 라인 맞습니다.
@@닉네임꼭설정해야함정확합니다 육손이 전쟁 초반부터 존버를 택하며 다른 장수들을 강제로 억누른것만 봐도 촉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기는 법을 알았던 것이죠. 유비는 산지와 요충지를 점거하며 방비를 단단히 했기에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구요. 비단 유비만이 아니라 다들 그랬을 것이고..
육손이 괜히 무패 지휘관이 아닌 이유..
글쎄요... 유비가 1년 반이나 전쟁 준비를 한 것 치고는 허점이 너무도 많습니다. 익주 내부에서 장강삼협으로 진출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수륙양병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수군은 대동하지 않았고 보급선이 너무 길어서 빨리 승부를 봐야 하는데 진군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습니다.
험지에서 군영을 길게 늘어뜨린건 그렇다 할 수 있는데 확실하게 동오의 군대를 격파할만한 비기? 히든카드가 있었느냐 물어본다면 회의적입니다.
전쟁에 있어 기본 토대는 망치와 모루인데 모루만 잔뜩 있고 망치는 전혀 보이질 않거든요.
육손도 물론 대단하긴한데 육손이 아니라 그냥 역대 동오의 도독급 라인업이었으면 누가 왔어도 막혔을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haga6762 1년 반은 짧은 기간인데 그동안 수군을 어떻게 만들어내냐
손제리가 왜그렇게 형주에 집착했는지도 이영상으로 이해할수있네요.
이릉대전은 형주의 중요성과 함께 유비의 촉한에서 관우가 차지하는 입지를 보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죠. 촉한의 장수로 형주를 맡는다는 것은 독이 든 성배를 마신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죠. 형주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보면 조조와 손권의 협공은 동화손권, 북거조조를 아무리 잘 해도 손권의 형주에 대한 욕심, 조조도 형주에 대한 욕심을 가졌다고 보면 피할 수가 없죠.
저도 공감함… 관우의 오판을 도와줬어야할 오가 오히려 관우목을따고앉았으니 유비도 뒤통수를 어루만지고있을거라고생각함… 전략면에서도 물론 그렇구용
그럼에도 형주를 먹은 건 개이득
어차피 다른세력이니 유비한테 형주주고 나중에 따이느니 이기회에 형주먹어보고 나중에 유비까지따서 내가 천하일통할 가능성을 본거겠죠.
@@izumiaco5079 맞져 오입장에선 전략적으로라도 후일을 위해선 형주가필요했구 … 촉이생각하는걸 오도 생각했을테니까요. 물론 결국 손제리가 이궁해버려서 오도 망국의길로 가게됬지만……
@@중독제조 음 대략맞지만 익주자체가 유비한테 넘어간 상황에선 천하통일까지는 생각못했지않았을까요? 갠적인 생각인데 아마 형주를 취하더라도 촉은 오를 버리지못할것이다고 생각하지않았을까싶어용 나중되선 실제로도 그렇게됬고요… 또 아마 오에서도 이릉대전을 예상하진못했을거라고도 생각하는데 본영상에서 말하듯 형주수군을 다잃은 유비가 육지군을 끌고 동진을 하기엔 리스크가 엄청 클텐데 결국 유비도 어쩌지 못할거다 생각했을듯해용
시비는 촉이 먼저 걸었음.
땅을 때줘야 하는데 안 때주지,
관우가 번성 공략할 때 자체 보급물자가 부족해서 그걸 오나라 진지에 쳐들어가서 마구잡이로 다 뺏어옴.
이걸 참는 나라가 어디있음?
소년의 내가 간직하던 환상은 계속해서 금이 가고 있지만 진실을 마주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습니다. 채널 감사하빈다. 언젠가 꼭 손찬이형 납치해서 7일 7영상 만들게 하겠습니다.
손권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취했을 당시 조비는 신하들에게 유비가 오나라에 보복할 건지를 묻자 모두들 촉에 명장은 관우 뿐이었고 작은 나라인데 그럴 여력은 없을거라 했으나,
오직 유엽만이 유비는 분명 오를 공격할 것이라며 그러지 않는다면 관우와의 평생의 정분이 부족한 것이라 했다죠.
당시 유비와 관우는 30년을 생사고락하며 가족보다 더 끈끈한 관계였죠. 관우와 형주를 잃은 것은 유비를 극대노하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그러면서 손권이 보낸 제갈근은 위나라에 잡혀있는 헌제와 관우, 천하와 형주를 비교해서 어느 것이 크고 작냐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죠.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은 전혀 잘못된 게 아니고 굉장히 합당했습니다.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관우를 잃고 대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형주를 잃었으니 무조건 다시 수복했어야 했죠. 유비가 잡장들 상대할 때는 손쉽게 이겼으나 조조, 조인, 육손 등 재능이 출중한 사람들에게 밀렸던 이유는 당연히 군재가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조조를 한중에서 이기는 등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꺾은 이유는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잘 썼기 때문이죠. 법정과 황충, 위연 등이 그 사례.
비록 이릉대전을 일으켰을 당시 법정, 황충 등 재능이 출중한 인물들 대부분이 죽었으나 조조도 그 당시 죽었기에 유비 스스로도 이제 자기를 막을 인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오나라는 자기 혼자 정리가 가능했을 거라 생각했겠죠. 그러나 육손이란 미친 복병을 만나 폭망 .......
오 맞는말인거같네요
최훈의 삼국전투기도 유비가 동오를 공격하기로 한건 동오를 지금 처리 못하면 망하겠다 생각을 했는거로 다루었죠
다른 채널에서 손권이 유장을 통해 기존 익주파의 배반을 꾀했다는 관점과 이 관점을 통합하면 거의 완벽한 듯
형주가 지리적 요충지였다고 하나 물자는 기주 연주가 가장 풍부했죠
예주만 취하면 익주 기주 연주 생산량으로 오를 압도했을거라 봅니다 물론 상상회로일 뿐이지만요
이릉에서 졌을때 뒤가 없는건 왜 계산하지 못한건지..
조조의 경우 순욱.정욱.곽가등 참모가 즐비했는데 유비의 경우는 성도를 제갈량이 지키는 가운데 오공격에는 참모가. 이 이릉대전에서 거의 전멸한 촉은 회복이 힘들었다는
유비에게 서서가있었거나 방통이나 법정이오래살았다면 촉이나 제갈량의운명은 어떻게되었을까요?
이릉대전 나온김에 제갈량의 나라 재건 과정도 자세히 다뤄주실수 있나요~~
건흥(建興) 원년(223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부서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개부치사 開府治事) 얼마 후 또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영 익주목) 대소 정사(政事)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吳)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맺어 마침내 여국(與國-우호국, 동맹국)이 되었다.
223년이 유비가 죽은 해임.
그닥 재미도 감동도 없는 내용 뿐인데.
이거 엄청 고대역사예요.
무려 400년이 지난 후 일어난 안시성 싸움에서 우린 자랑스런 승리를 이끈 성주의 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거의 비슷한 시대의 을지문덕의 경우는 이게 진짜 본명인지 살수대첩 후에 이 명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게 현실이예요.
역시 삼국이 1타강사
기름기 싹뺀 내용에서 그 당시 상황과 원인이 현실적으로 그랫을 법합니다.
이건 좀 말이 안되는게 형주가 그렇게 중요했으면 제갈량이 먼저 형주를 수복해야한다고 했겠죠 삼분지계 융중대 전략을 제안한게 제갈량이었을테니 그 전략 실행에 있어서 유비보다 더 앞장서야 했지만 오히려 유비를 말렸습니다. 그리고 유비의 평생 성격으로 보아 유비는 이익을 따져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명분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많은 인물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는데
형주가 이익이 되니 오나라를 친다 라는건 유비의 성격 상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비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인물이 아닙니다.
유비는 복수심의 출정한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성격을 알고 조운은 유비를 따랏으나 와 여기서 통수를 치고 안따라가는 개눔시키!
풍습보다 하내요를 하네요라고 쓰는 궁금함부터 가지심이 어떨까요?
너무재밋다진짜
주유도 유비처럼 노형주 노천하 라고 생각했을까요?
ai 일러 생성프로그램 뭐 쓰세요?
무엇보다도 조급함때문에 이릉에서 물러나지 못한 거 아닐지 유비정도 되는 경험자가 산지에 길게 진영을 늘어뜨리는 게 위험하다는 걸 모를리가 없었겠지만 거기서 물러나면 자기 생애 다음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던게 아닐까 싶네요
잘 생각해보면 유비가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자가 되어 회전을 해보는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럴수도
제일궁금한게 화공을 생각한 촉장은있었는지가 궁금...
항상 너무 감사하게 잘 보고있습니다😀
근데 이릉치기 전에 위나라 상대로 촉오 연합하면 이길 확률이 이릉 치고 촉오 연합해서 위나라 상대로 이길 확률보다 작지 않나요
촉오 전력이 온존된 상태에서도 열세인거로 아는데
본인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텐데 촉오 연합해서 천하 이분할 했을때 불리하다고 이릉대전을 일으켰다는게 적절한 설명일까요
완전히 멸망시키는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차라리 거의 몰아 넣고 배신을 하는게 합리적으로 보이는데
이기는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출병이 어쩔수없다는 의견은 동의하기 힘드네요
이번거 진짜재밌었습니다
손권이 형주 다시 돌려준다고 한건
당장 급한 불 끄고
시간벌려는 구라라고 봐야겠죠?
개인적으로 이릉대전은 유비 입장에서 나름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동이 아닐까 싶음.
관우가 뻘짓에 뻘짓을 거듭하다가 죽었다 한들, 어쨌건 자신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2인자가 오나라에게 죽은 상황인데
이건 유비 입장에선 본인의 대전략인 융중대를 떠나서 당장 그냥 눈앞에 엄청 큰 정치적인 위기였겠지
당장 이릉대전을 앞두고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다고 하는데, 반대한 인물들 중에서 조운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형주계와 익주계 사람들임
원래부터 앞뒤 꽉 막혀서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던 조운을 제외하면, 유비군 원로들 중에서 이릉대전을 반대한 인물은 거의 없었고
여기서 유비가 관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사후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나라와 화친을 맺는다고 한다면
유비군의 올드비와 원로들이 과연 가만히 있었을지, 설령 가만히 있었다고 한들 유비에 대한 저 사람들의 지지는 어떻게 되는지,
그 이후에 유비의 정치적인 입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함
그리고 만약 유비가 진짜 관우의 죽음에 빡돌아서 복수때문에 앞뒤 안가리고 전쟁할 것 같았으면,
전쟁 준비고 나발이고 관우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 바로 군대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어야 정상인데
실제로는 관우의 죽음 이후 이릉대전에 이르기까지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리면서 전쟁을 준비했음.
빡치는 상황에서는 은근 한성깔 하던 모습을 보여줬었던 유비가 이때는 생각보다 냉정하지 않았나 싶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아마 이 일년 반 동안의 기간동안 유비는 오나라가 전쟁을 멈출 수 있는 명분을 던져주길 바라지 않았나 싶음
물론 이게 되려면 오나라가 촉에게 바싹 엎드리는 제스쳐를 취했어야 하는데, 정작 오나라도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었을거고
그래서 유비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된 상황에서, 어쨌거나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져버렸고,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유비군 올드비와 원로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혹은 저들이 죽어서 없어졌거나 세가 약해지면서)
오나라의 화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이 되었기에 유비도 이를 군말없이 받아들이고 뒤끝없이 끝난게 아닐까 싶다.
제 생각과 거의 비슷 하네요
유비는 일단 관우의 죽음보다도 형주 탈환이 1 목표였을 겁니다
제갈량 조운 이런 애들이 만류 했으나 유비는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거죠
그리고 이릉대전이 촉에 너무나 치명적인 이유는 자라나는 새싹들이 다 당했다는 점입니다 ㅠㅠ
2세대 장수들이 거의 다 죽어 가지고 국력에 크리티컬을 맞아 버렸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장비가 살아 있었더라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보나...
육손이 너무 넘사벽이라...ㅋㅋ
어째건 형주는 너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 위촉오 전부 탐을 냈을 거예요
이릉대전은 촉나라에 있어 너무나 뼈와 살이 아파버린... 결과적으로 3국중 하나의 운명이 나락 가게 만든 원인이 된
안타까운 전쟁이라 봅니다 그렇다고 유비도 나름 생각을 하고 군을 일으킨거라 보기에
유비 너 때문이야~! 할 수 도 없는...
다음은 제갈량 북벌 위연의 자오곡 계책 어떠신가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오곡 계책 쓸만해 보였거든요 ㅎㅎ
신삼국 드라마에서도 언급이 되죠. 손권의 입을 빌어서 유비는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냄. 점령지에다가 일일히 관원들을 배치시킨댔나
자오곡계책은 영상이있습니다. 찾아서 보시면됩니다.
촉한의 중추인 형주파들의 근거지를 되찾아주자는 명분이 80%이상임
@@빨간헬멧옥루 아 찾아봐야 겠네요 감사 합니다
관우도 연의에 의해 과대포장된 장수인듯
그건 너의 망상
유비가 관우 죽고서 시호도 안줬다 라고 하는데 장비나 황충 마초는 챙겨줬나요? 죄다 유비보다 먼저 죽었잖아요
유비가 살아있을 적 시호를 받은 인물은 오로지 법정뿐입니다. 익후란 시호를 받았죠. 방통, 황충, 장비, 마초는 260년에 관우와 함께 시호를 받습니다. 조운은 그 다음 해에 받구요. 제갈량과 장완, 비의, 진지는 죽은 해에 바로 받습니다. 하후패는 멀리 귀순해왔기에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형 고마워
나작가 당신은 도대체
이릉대전은 유비의 실책이라기보단 상대가 육손이었던게 컸다는 생각이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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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형주 탈환전 시나리오 그려지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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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구로 마속이 가정을 지키는건 애시당초 불가능했다란 말이 있던데 실은 북벌에 대한 정치적 실패로 마속을 죽였다는데 사실인가요? 한번 여기에 대해 올려주세요
근데 형주는 너무 벌판이라 방어가 어려워서 공격하는 쪽이 무한물량이면 뚫리는 곳이지요....,
유비가 익주를 누군가에게 빨리 가서 유장의 항복을 받아오라고 하든 아니면 그냥 포기했어야 합니다
감사하게 잘 보고있습니다.
만 가끔 너무 단정적인,단호적으로 해석해주시는 부분이 있어 조금 불안하여 댓글을 답니다.
말씀하셨듯이 여러 권한을 가졌던 부분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조진처럼 오해했다 라고 해석될만한 추가 사료도 부족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다만 관우,장비 를 손찬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인지적 이라는게 그저 군통솔력,전투에서 잘한다는게 아닌 어느정도 문무겸비, 즉 통치도 나름 할 수 있으니 만명을 끌 수 있는 인물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의 경향샹 장비는 좀더 군사령관 스타일이였고 그것을 유비는 늘 걱정했다 라고 확인 가능하죠.
통치의 능력이 아주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어느정도 가능하니 만명의 군사를 이끌정도로 즉 한두 군의 문제가 아닌 한 영역을 이끌 수 있다 라고 평가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영상내용대로 저또한 형주파 의견도 있다 생각합니다만
이미 익주에서 달달 끌어모아 모랄빵 내는건 전 조상님 부터 유명한 방법이니 형주와 익주의 양면공격을 택하지 않는 이상 촉의 유비 입장에서는 회복 할 수 없는
손해였겠죠.
어찌됐든 저 또한 유비의 형주침공은 그전의 스토리든 현재의 명분이든 결과론 적으로는 실패한 전략이기 때문에 이걸 옳았다 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손찬님께서 좀 더 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그럼으로써 발생한 유비 집단의 치명적인 결함 을 설명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애독자인 아무개가 말씀 올립니다 ㅎㅎ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평생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가 왕을 거쳐 황제자리까지 올랐는데 십수년을 함께했던 최측근 지인이 개판치고 본인도 망함을 직감했을때 저 영웅의 심정은 어땠을까…
유비가 우려했던 촉의 전략적 한계는 결국 유비가 별세한후 뼈아플 정도로 현실화 되엇습니다. 험한 산길로만으로 한중에서 위를 위협하기는 생각보다 아주 힘들었습니다. (반면 산악 수비전으로 위군의 발목을 잡기엔 좋은 땅. 그러나 촉은 수비로만 절대로 위에 치명타를 가할수 없읍니다.) 결국 공명도 촉의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별세했지요. 공명다음에 군사를 사령한 비위, 등지, 장완, 그리고 강유도 결국 촉의 전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촉의 이릉대전후 역사는 참 우울합니다.
북방의 이민족들이 그당시 정리된점도 위나라 방어에 큰 요인이라고 생각드는데 이민족담당은 전예였나요? 진나라도 멸망시킨 이민족들이 제갈량북벌시기에는 잠잠했는지 궁금하네요.
그만큼 중요했기에 형주를 관우에게 맡겼는게 결국 악수가 되버렸네요
그렇긴 한데 맡길만한 인물이 관우 밖에 없었던것도 문제기도 하져ㅜㅜ
저랑 생각이 많이 다르네요
넌 뭔데. 너 뭐 돼?
이런거 볼때 마다 참... 제갈량이 군략은 몰라도 내정은 미쳤구나 라는 생각이 듬
내정 정치력이 중국사 통틀어 손꼽힐듯.
군사가 아니고 명재상이죠.
관우의 북벌은 관우 혼자 생각 한게 아나라 촉의 상황때문에 복합적으로 시작 한거 같습니다.
한중대전이 217~219년입니다. 관우의 출병은 219년이구요. 정확히는 위나라 철군은 3월 관우는 7월에 거병.한중대전이 삼국지에서는 비중이 적은데 촉으로서는 최고의 승리이자 3년이나 지속된 국운을 건 전쟁였습니다.
촉나라는 국력을 다해서 겨우겨우 위나라와 싸우고 있어서 군사적 압박을 덜기 위해서 관우한테 양양을 치라고 한거 같습니다.
기록을 보면 218년10월에 남양군에서 후음이 위나라 반란을 일으켰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우는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북벌을 하려면 차라리 이때가 더 좋았을것입니다. 다음해 정월에 진압이 됩니다.
그만큼 한중대전이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황 였습니다. 위나라와 한중대전을 급박 하게 하고 있어서 전선을 추가로 열지 못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3월 철수가 위나라가 완전 철군을 한건지 전술적 후퇴한건지 유럽국들 처럼 조약을 맺지 않았으니 촉에서는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기니 관우가 북벌 하게 하면서 한중을 정비 하려고 한게 아닌가 생각 됩니다.
위에서 후음 반란때가 북벌 하기엔 더 좋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관우 패망을 보면 한중대전이 끝나고 위나라에서 한중대전에서의 병력이 여유가 있어서 장안에서 정비한 후에 서황이 대규모 지원군을 계속 보내서 지게된겁니다...
관우가 한중대전을 승리로 끝났다는 정보를 입수 하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우금의 3만 위나라 포로를 데리고 형주로 귀환했어야 했는데 놀라운 승리로 번성와 양양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니 욕심을 내다가 패망한거 같습니다.
또한 맥성 위치가 강릉 바로 옆입니다. 관우가 양양에서 패하고 바로 촉으로 도망갔으면 살았을텐데 강릉을 다시 탈환 하려고 가까운 맥성에 가서 한달넘게 전투를 하다가 도망가다가 죽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도망가다 잠시 버려진 맥성에 들렀다 라고 나오는데 실제는 규모도 어느정도 있는 성입니다. 도망가다 들렀다기 보단 강릉성및 형주 재탈환을 하기 위해서 두달 가까이 있었다고 보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다가......
주요 장군이 거의 전사하면서 이후 제갈량은 인재난에 시달렸다는. 이후 촉의 최고 맹장은 위연 .
하지만 말을 참 더럽게도 듣지 않았죠. 자의식 과잉에 유비만 통제 가능했음
형주는 강남의 중원이죠. 형주에 이어 익주까지 장악했기에 오나라따위는 시간문제였습니다. 2국 남북대결이 가능했을터인데 관우의 오판으로 유비는 패자의 지위를 상실해 버렸죠. 그 이전에 방통까지 잃어 버렸으니 유비의 운도 이미 다한셈. 방통을 잃지 않고 형주를 지켰으면 촉은 망할래야 망할수 없고 사마의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촉한의 삼국통일은 기정사실인건데 유비의 운이 다한 것.
형주가 그렇게 중요한데 왜 제걸량은 출진을 반대했을까요????????,?
오나라와 싸울때가 아니니까 기다리는거징
조운은 결국 준위급이었나요😅
군통솔권으로 확실히 급이 나뉘는거같기는 하네요.
일단 일본 게임에서 나오는 무패의 명장 그런 건 절대 아님.
이거 달리하면 형주 먹고도 위나라 먹지도 못한 오나라 ㅋㅋㅋ
늘 잘 보고 있는 채널이라 몇 마디 달아봅니다 ...
먼저는 추정 할 수 밖에 없는 부분들에 대해 종종 너무 결론으로 단정지어 얘기 하시는 부분들이 많은데
이런저런 추정을 해볼 수 있다라는 정도로 얘기 하시는게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 대한 다른 의견을 피력해보자면
아직 위나라가 건재한 상황에서 오지도 않은 미래의 양자대결을 위해 촉의 명운을 걸고 오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이기든 지든 위나라의 득이 커질 상황이고 지면 그야말로 촉의 거시적 상황 자체에 커다란 패착이며 몇 번 이긴다 한들 그걸로 오나라가 양보하고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며
전쟁이 길어지면 위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오나라가 위를 끌어들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촉은 멸망 할 수도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제갈량을 비롯한 신하들이 융중대를 모르고 거시적 판단을 못해서 말렸다고 생각이 들지도 않으며
훗날의 양자대결을 위한 판도 같은걸 고려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안듭니다 ;;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당장의 명운을 건 도박이 누가 봐도 이성적이고 옳은 판단은 아니라고 보이네요
더구나 일생을 함께 해 온 관우나 장비와의 사이 역시 유비가 충분히 생애를 걸고 전쟁을 벌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보이며
유엽이 조비에게 말했듯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관우와의 평생의 정이 부족한 것이라고 얘기한 것부터 그 정으로 인해 전쟁을 벌였다는걸 알려주며
오히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오를 치지 않는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걸 얘기해주는 바라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패전 후 유비의 병사 역시 단순히 형주를 되찾는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병사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며
직접 친정하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상황에서 패전후 급작스러운 병사는 이미 관우와 장비를 잃은 슬픔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황에
복수전의 패배로 천하가 멀어져가버리니 결국 삶의 실패에 대한 충격으로 병을 못이기고 죽었다고 보는게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부분은 청화수 유튜버님의 이릉대전 해석도 참고하심이 좋을듯합니다
여기서 손찬이형님이 언급안한 오나라의 꾸준한 촉에 대한 도발과 여론전이 꾸준히있어왔고 그에호응하여
촉은 아직도 반유비파가 계속 여론을벌이고 꾸준한 반란모의가 있었고 오는 그점을 계속노리고 유장을 익주태수에 봉하는 치졸한짓을 벌였습니다.
유비는 해야할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저는 그부분에서 많이 와닿았습니다
청화수님의 유비의 이릉대전해석을 꼭 참고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지금도 형주에 속한 중국 행정구역에서도 중요함
유비가 오랑 싸워서 형주를 되찾고 다시 융중대로 복귀하는 것을, 오에게 형주를 양보하고 이후에 천하를 다투는 것보다 상책으로 봤을 거 같지가 않아요. 물론 어느정도 개연성은 있지만 당시 배신당해 격앙된 상황 속에서도 참모들이 만류할 정도로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 여겨졌다고 보이는데, 유비가 어부지리도 모르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저는 황권을 못 믿어서 졌다고 생각하네요. 긴 장사진하려면 연락책과 보급이 필수인데 수군과의 연계가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었죠. 수군이 약하더라도 이들을 쓰는게 맞는건데 익주 차지한지도 얼마 안 되어서 당시 촉 내부는 파벌문제가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황권을 중용하는데 유비가 껄끄러워해서 패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충성심과 별개로 괜히 황권이 위나라로 투항하는 선택을 한게 아니었죠
그랬으먄 유비가 황권의 처자식을 바로 처형했겠죠. 하지만 유비나 황권이나 이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합니다. 유비는 황권이 한 선택에 대해 자기 잘못이라고 했는데,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발언이라기에는 좀 다르죠?
@@닉네임꼭설정해야함 조조와 같은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엎지른 물인데다가 처자식 죽여봤자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살려놔야 나중에 황권을 다시 부려먹을 기회가 생기죠. 강유의 가족들을 위나라에서 안 죽인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황권이 한중전의 실질적 설계자입니다. 그리고 황권이 위로 투항하자 유비가 황권을 감싸는 말도 했는데 황권을 믿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이견해입니다 명분은 관우의 복수지만 어차피 형주를 잃으면 천하를 도모할수 없으니 그나마 전성기때 가져다 박은건데 항상 전쟁은 급한쪽이 지죠 그걸 잘 파고든게 육손이고
유비같은 사람이 관우가 죽었다고 저렇게 이성잃은 사람처럼 급발진하는 게 아주 의아하긴 하죠..
빌린 형주를 지꺼라고 생각하는게 염치없는게 유방 후손다운 유비
1:44 '유비는 그의 계산대로라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판단했을 것이고, 개인적인 제 생각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부분은 주관을 치환 시켜버리는 문장이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엔-관우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유비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는 주장을 유비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형주가 아무리 중요지역이라곤 해도 위가 건재한데 오랑 건곤일척을 벌인다? 2차 대전에서 일제랑 나치가 이기면 미국 갈라먹기로 했는데 갈라먹기로 합의 한 내용이 일제가 불리해서 미국과 전쟁 도중에 나치 뒤통수를 때린다는 생각 같군요. 무다구치 렌야도 안할 발상 같습니다. 차라리 무리수를 둘거면 내가 이릉에서 비참하게 지면 위가 오를 칠거고 그럼 위오 동맹이 결렬될 거다. 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을 거 같아요. 요 몇달 재밋게 보고 있습니다만 이번 편은 좀 무리수에요.
공감합니다 이번 유비 영상은 좀 무리가 있다고 보이네요
영상에 너무 단정지어 추정을 결론으로 내려버리는 뉘앙스의 말투도 아쉬움이 있으며
무엇보다 위나라가 건재한데 오지도 않은 양자대결의 미래를 위해 촉의 명운을 건 전쟁을 벌인다는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보이진 않죠
더구나 유엽이 조비에게 한 말에서도 유추 할 수 있듯이 유비는 반드시 오를 공격할 것 이고 그렇지 않으면 관우에 대한 평생의 정이 부족한것이다 라고 했을만큼
유비에게 관우 장비는 평생을 함께 한 각별한 사이였고
유비가 관우에 대한 분노로 오를 공격 한 것으로 보는게 훨씬 자연스럽다고 보입니다
형주의 중요성 뿐만이 아님. 그건 영상에서 다룬거고 애초에 손권은 유비 정통성까지 흔들면서 촉한을 분열시키는 막후공작까지 대놓고 했던거라 유비의 대오원정은 불가피했음. 오나라 입장에서도 강남 지방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형주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 간에 평화협상의 여지는 적었는데 심지어 양쪽 모두 강경파인 관우랑 여몽이 득세. 지정학적으로 오나라는 강남 정권 유지, 유비는 북벌을 위해서 둘다 필요한 걸 양보하지 못한거고
@@신종섭-g2c 채널 구독자인데 댓글 잘 보고 있습니다. 혹시 이릉대전이 왜 일어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근데 이해가 안가는게 오나라는 형주를 취한뒤 딱히 적극적으로 북벌을 안함
천하통일을 위해 형주를 취했다기보다는 형주의 호족들이 유비가 아닌 손권을 택한거뿐인듯
사실이 아닙니다. 촉나라는 위나라한테 직접적으로 공격을 당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고요?
위나라는 조조-조비-조예 3대가 오나라를 적극적으로 정벌 시도를 했거든요.
오나라만 완전 정벌에 성공하면 촉은 거진 공짜니까 동오에만 집중을 한겁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오나라는 위나라의 침공을 받으면서 동시에 북벌도 같이해야되는 촉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은 상황이에요.
그렇다고 오나라가 북벌을 안했느냐? 그냥 정사 기록만 봐도 제갈량 죽기 전까지 오나라가 촉보다 북벌 시도한 회수가 더 많습니다.
물론, 손권이나 제갈량이나 북벌의 성과는 미미한건 맞아요. 그런데 안한게 아니란거죠.
주인장님의 견해에 더해서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 아니면 손권이 형주를 완전 정복한다.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입니다. 형주의 민심이 손권을 따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남군을 유비에게 내어주고 유비를 손권의 북방 방어막으로 삼는 방식을 택했던 걸보면 유비 입장에서는 형주 민심이 아직 손권을 따르지 않았을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좀더 낙관적으로보면 유비가 군대를 이끌고 갔을때 유비를 해방군으로 환영해줄 여지도 있기에 조속히 쳐들어가야 쉽게 탈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먼저 위를 쳐야한다는 조운과 제갈근의 제언을 안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조속히 쉽게 탈환해야하고 또 할 수있는 가능성이 많은 형주와 유비와 그다지 인연이 없는 양주, 관중쪽을 놓고 봤을 때 유비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던거죠. 그나저나 조운이 참 너그럽고 인내심많은 인물이구나 싶습니다. 계속 승진 밀리다 급기여 한참 새까만 후배한테 승진에서 꺼지 밀렸음에도 별 불만 표출이 없이 받아들였던 걸보면 말이죠. 위연같았으면 당장 쿠데타 했을텐데요. 시호가 순평후 인 이유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관우가 북벌을 추진할때 형주에 지킬 장수 한명을 파견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여몽이나 육손 상대로 미방 부사인이 말이 됩니까?
유비가 관우에게 시호를 주지않은 이유도 이 영상에서 설명이 되네요
삼국지 게임할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형주를 다 먼저 먹으면 방향의 제약을 받지 않고 죄다 공략이 가능해지는 이점이 있죠
현실은 방향의 제약받지 않고 죄다 공격옴 ㅋㅋ
유비가 황제에 오르고 유지한게 몇년 된 일은 아니라 속단하긴 이릅니다. 아시다시피 호족과 명문가의 사회라 유비는 당장에 챙겨야 할 인물이 더 많아ㅛ음. 그리고 당장 해야할 일도 산더미이고 결전준비도 해야 했는데, 시호니 주물거리고 있을수 있어ㅛ겠음?
그렇게 따지면 관장황마와 방통 전부 유선대에 시호가 나왔는데, 이건 유비가 이들을 다 싫어한거임? 법정은 그럼 뭐냐고 물을텐데, 법정이 익주정벌에 어떤 역할 했는지를 보면 시호 안줄수가 있었을까요?
이게 전부 촉 정벌떄 낙봉파에서 방통이 장임에게 죽임당한 나비효과같긴함
그렇게 형주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면 제갈량을 남겼겠죠.
오히려 삼국통일을 위한 상황에서 오나라에게 먹히는 상황이 되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라고 생각합니다. 123등이 있는 상황에서 3등이 우승하는 시나라오는 극히 적기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3등이 되는 걸 막고 싶었던거죠.
관쪽이는 진짜 전설이다
촉 팬덤이 아무리 손권을 이궁으로 까내려도 ^이릉^ 불바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유비입장에서 형주는 언제가는 탈환해야할 땅이었지만..시기나 타이밍이 안 좋았음..
관우도 죽고 장비도 죽고 방통이며 법정도 죽은 마당에..😢
제가 유튜브 영상에 좋아요 거의 안누르는데 선생님영상에는 누르게됩니다
형주가 좋긴했지만 솔직히 오와 전쟁을 할만큼 좋은곳은 아닌거 같습니다. 둘이 합쳐도 위나라에게 안되는데.... 위나라를 쳐서 이겼을 경우 형주 가진쪽이 유리하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건 어불성설이죠.... 오랑 싸워서 이긴다 한들 다시 둘이 합쳐서 위와 싸워 이길수 있다는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100번 양보해도 그냥 유비가 관우의 죽음에 삽질했다 라고 보는게 정사입니다
형주의 중요성 뿐만이 아님. 그건 영상에서 다룬거고 애초에 손권은 유비 정통성까지 흔들면서 촉한을 분열시키는 막후공작까지 대놓고 했던거라 유비의 대오원정은 불가피했음. 오나라 입장에서도 강남 지방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형주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 간에 평화협상의 여지는 적었는데 심지어 양쪽 모두 강경파인 관우랑 여몽이 득세. 지정학적으로 오나라는 강남 정권 유지, 유비는 북벌을 위해서 둘다 필요한 걸 양보하지 못한거고
유익해요 ㅎㅎ
소설의75만인가70마은허구였구요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전략적 계산만으로 오를 토벌하려했다 하기에도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1. 삼국이라는 형세상 강자에 대항한 약자들의 연합이 중요한데 유비에 대항해 위오가 손을 잡는다면 최악이었습니다. 손권이 스스로 숙이며 위와 영원한 동맹을 할 인물 역시 아니긴 하지만, 단순히 정벌이 실패하는 리스크에 더해 위오가 촉을 동시에 공격했다면 촉은 명운이 끊길수도 있었습니다.
2. 어쨌던 형주에서 관우의 번성전투가 실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군량을 보급하려 오의 보급소를 턴 것도 그렇고 이전부터 오와의 관계를 계속 깎아먹었던 것은 관우였고 오가 단순히 100퍼센트 잘못인 뒤치기를 했다 하기에는 그 명분을 너무 많이 줬습니다. 그렇기에 이릉대전에서도 내 의형제를 죽였다! 외에는 딱히 전쟁명분 역시 부족해 공공의 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3. 관우 장비 법정 황충 마초 등이 죽으면서 윗 라인에 큰 구멍이 생겨 안정적인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기였죠. 제갈량과 조운이 오 정벌을 반대한 것이 그저 오와 협력해야 한다하기에는 촉 내부의 상황 역시 좋지는 못했습니다. 인재 라인에 구멍이 너무 생겼고, 현재 점령하는 지역을 안정화 시키기 위한 S급들의 내부배치를 제외한다면 풍습, 정기, 장남 등의 유망주들만 끌고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찬이 형이 이야기하신 거시적 시점에서도 불리한 것 역시 유비도 계산을 못할 인물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 리스크 역시 계산이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이릉대전을 개전한 이유라면 한 평생을 억누르고 참고 참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빛을 발하나 싶을 때, 관우와 장비의 죽음이라는 평생을 함께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촉 인재라인의 붕괴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앞으로의 촉의 미래를 보았을 때 어두운 전망에 결국 평생을 참게 만들던 인내심이 버티지 못하고 그 분노가 전쟁으로 터져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전 영상 댓글에도 적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입체적인 인물이라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이기에 이런 장황한 댓글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번 영상도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이거에 동의합니다. 전략적으로는 당시 참모들이 만류한 것처럼 이겨도 이기는 싸움이 아니었죠.
관점을 바꿔서 황건적부터 한중왕 즉위까지 유비의 일생을 따라오다 오의 침공에 의해 한순간에 융중대가 좌절되고 평생 지기였던 관우가 죽는다면 그냥 모든걸 던져버리고 싶지 않을까요.
@@WhythisGGoraji 형주를 뒤통수 맞아서 뺏기고 관우까지 모가지 날라갔는데 가만히 있으면서 오랑 다시 손잡으면 촉 내부의 형주파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가 없어요. 게다가 형주파 뿐만 아니라 내부 정치에서 중요한 영토를 잃은 것이기 때문에 회복하려는 모션을 취하지 않으면 결국 지도자의 리더십에 의문을 가지는 내부 정치 세력이 늘어나게 될겁니다.
이는 내부 정치의 상황으로 이해해야 납득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유비의 실책은 오나라가 대군에 쫄아서 형주 절반을 다시 뱉어냈을 때 못이기는 척 하면서 관우 죽음에 책임있는 장수 중 하나의 모가지 받고 물러나거나, 죽은 여몽의 단독행동으로 뒤집어씌워서 죽은 여몽의 모가지를 받아가고 철수하는 식으로 적당히 빠져나가는게 맞았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더 급발진한거 이게 패착이라고 봅니다.
저도 이게 맞다고 봅니다 .. 관우를 잃은 분노보다 형주 때문에라고 하기에는 아직 오지도 않은 먼 미래의 양자대결을 위해 당장의 더 큰 위협인 위나라를 두고
오나라와 승부를 본다는게 이성적인 판단으로 여겨지진 않고 제갈량을 비롯해 만류한 신하들이 융중대를 모르고 거시적 관점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헤아려 볼 수 있는걸 몰랐다고 더욱이 생각하긴 힘들며 유엽이 조비에게 얘기하길 유비가 오를 공격하지 않으면 관우에 대한 정이 부족했던거라고 할 정도였으니
형주 수복은 목표의 하나일 뿐 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 자체는 관우를 잃은 분노가 가장 컸다고 생각됩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일으켰다고 하기엔 전쟁에 지면 지는대로 큰 패착이고 이겨도 오가 순순히 항복 할 것도 아니고 전쟁이 길어지면 위에 큰 이득이요
이 분 말씀대로 오가 위를 끌어들이면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에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였다고 봅니다
게다가 패전 후 곧 병들어 그대로 병을 못이기고 병사하게 된 것도 이미 관우 장비를 잃은 상황에 복수전까지 실패하고 촉의 전력만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니
그 심적 타격으로 그대로 병사하게 되었다고 보여지기에 더욱이 관우 장비를 잃은 슬픔과 분노가 컸다고 보이네요
단순히 관우에게 시호를 내려주지 않았다 이걸로 관우에 대한 분노보다 형주 수복을 위한 촉의 명운을 건 전쟁을 벌였다고 보긴 힘든 것 같습니다
형주의 중요성 뿐만이 아님. 그건 영상에서 다룬거고 애초에 손권은 유비 정통성까지 흔들면서 촉한을 분열시키는 막후공작까지 대놓고 했던거라 유비의 대오원정은 불가피했음. 오나라 입장에서도 강남 지방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형주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 간에 평화협상의 여지는 적었는데 심지어 양쪽 모두 강경파인 관우랑 여몽이 득세. 지정학적으로 오나라는 강남 정권 유지, 유비는 북벌을 위해서 둘다 필요한 걸 양보하지 못한거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전쟁이라기엔 너무 무리수가 많았음
촉나라와 오나라가 연합해서 위에 대항한다는 전략(융중대-제갈량, 노숙등)이 유효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파토낸게 유비, 관우, 손권, 여몽등등이었고.... 이릉대전 이후에도 소극적인 공격전략을 취한 제갈량과 군사적으로 무능한 손권이 위나라에 크게 유효타 먹인적도 없었고.... 예로부터 동업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라는 말이있는데... 촉한과 오나라가 좋은 예인것 같습니다.
풍습 그는 요절하지 않았으면 넥스트 위연이었을지도?? 솔직히 유비의 전쟁 이유에는 저게 가장 핵심인건 맞습니다. 사실 그거 말고도 손권이 유장가지고 하는 짓을 보면, 전쟁 안 할래야 안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전쟁을 1번쯤은 했어야 함. 사실 손권측에서 하는 공공의 적 위나라 패야지 왜 전쟁함? 이런 말하는 거도 유비 입장에서는 내로남불로 들렸을테니까. 그렇다고 유비측에서 형주 분할 없이 꿀꺽했냐면 그거도 아니고, 관우가 가진 영토라고 해봐야 강릉과 무릉일대가 전부였고, 그 외 주요 요충지라 볼 수 있는 강하와 형주 3군 전부 손권에게 주기도 했으니, 사실 그냥 허울좋은 명분이라는거 서로가 잘 알고 있었을거임.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오나라가 이렇게 백도어를 쳐서 관우의 역할을 사실상 무력으로 계승해서 형주 방면에서 딱히 위나라를 공격해서 이뤄낸게 관우에 비해 딱히 크다고 말하기는 애매하기 때문에, 후세에 촉한정통론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더 두고두고 까이는 일이라고 생각은 함.. 물론 형주를 먹는게 장차 위나라 멸망후의 판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문제는 그건 일단 위나라를 무너뜨린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오나라가 한 행위는 더도말고 덜도말고 위나라 어부지리 시켜주는 결정타였다고 생각함. 그리고 그 오나라가 생각하던 천하이분은 결국 벌어지지 못하고 삼국지는 사실상 위나라의 승리로 끝났다는 점에서, 너무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행동 잘못하면 진짜 미래를 잠식할수도 있다고 느껴짐
천하이분지계같은 과감하고 발칙한 야망은 결국 주유가 있었을때 주유만이 가능한 구상 및 발상이였던거라고 봅니다.
주유 감녕정도 아니면 아무도 이야기도안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