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시성 시안 한낙연 투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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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23 дек 2024
- 한낙연은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룽징[龍井]에서 자랐으며, 1914년 룽징[龍井] 길장도(吉長道) 해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룽징[龍井]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1920년 가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전차회사, 인쇄공장 직공으로 일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접근해 갔다.
1923년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릴 때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활동했으며, 1924년 2월 상하이에서 경호대 경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경호대는 상하이 불조계에 거주하는 한인은 물론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한인으로 일본인 집에 출입하는 자 등을 사찰하였다.
1923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손문주의(孫文主義) 혁명 단체 계명학사(啓明學社)에 참여했으며, 1928년 상하이에서 지하당 조직 활동에 종사했다.
1929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리용에서 미술 공부를 하는 동안 1931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유럽 거주 중국인들의 항일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7년 7월에는 파리만보 사진 기자로서 일제의 중국 침략을 폭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무한(武漢)에서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가했으며, 1938년 중국국민당 고급장교를 상대로 하는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1940년 봄 국민당 군대에 체포되어 시안 특종구류소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초 출옥했다.
이후 실크로드 소수민족의 민속과 석굴 벽화 모사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던 그는1947년 7월 30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시안특종구류소는 시안 태양묘문 거리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멸실되고 학교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제작 202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