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편협한 역사인식이 큰 문제였네요... 천재라 칭해졌던 정약용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당대의 실학자들이 공유하였고 그러한 실학자들의 왜곡된 역사관과 기록들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악용한 것을 그 시대 식민사학자로부터 역사를 배웠던 한국인 학자들이 광복후 식민사관 학설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만들었고 오늘날 한국 고대사의 은폐와 왜곡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 원인이 되었네요 .. 안타깝습니다
공자와 그의 후손 공빈은 동방예의지국인 동이의 군자국, 대인국에서 살고싶다고 하였죠.. 그 동이의 군자국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BC 3세기 공빈이 쓴 홍사에 단군조선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공자와 공빈은 단군조선의 탄생 역사를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살던 당시에 만주에 있던 군자국을 단군이 다스리는 나라로 여기고 있었죠..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중국의 쇠락해진 예법 문화를 동이의 군자국은 바르게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공자는 단군조선을 동방 예의지국이라며 흠모하였던 것입니다... ... 산해경에 동이의 여러 나라중 군자국의 위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주입니다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이고 맥족은 밝음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었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동쪽에서 와서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이였지만 화하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불리며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동일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하북과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웠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웠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켰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 (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점차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 묵특에게 멸망당하였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고리, 탁리),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 진한, 대부여) 멸망후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었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되었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또는 동명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단군조선(대부여)의 뒤를 이은 북부여와 동명부여, 졸본부여는 사회, 문화, 종교적 측면에서 예맥 그 자체였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칭하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서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하게 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중국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자신들이 발원한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다시 차지한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과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며 마립간, 가한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지증왕에 이르러 신라는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일제 식민 사학자에 앞서서 조선의 유학자란 얼간이들에 의해서 우리의 고대사는 이미 왜곡되어 있었다는 이야기.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편협한 역사인식이 큰 문제였네요... 천재라 칭해졌던 정약용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당대의 실학자들이 공유하였고 그러한 실학자들의 왜곡된 역사관과 기록들을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악용한 것을 그 시대 식민사학자로부터 역사를 배웠던 한국인 학자들이 광복후 식민사관 학설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만들었고 오늘날 한국 고대사의 은폐와 왜곡이 끝없이 이어지게 된 원인이 되었네요 .. 안타깝습니다
일본 궁내성 숨겨진 우리고대문헌
반납
요구 🎉시민운동 합시다
공자와 그의 후손 공빈은 동방예의지국인 동이의 군자국, 대인국에서 살고싶다고 하였죠.. 그 동이의 군자국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BC 3세기 공빈이 쓴 홍사에 단군조선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공자와 공빈은 단군조선의 탄생 역사를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살던 당시에 만주에 있던 군자국을 단군이 다스리는 나라로 여기고 있었죠.. 주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중국의 쇠락해진 예법 문화를 동이의 군자국은 바르게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공자는 단군조선을 동방 예의지국이라며 흠모하였던 것입니다... ... 산해경에 동이의 여러 나라중 군자국의 위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주입니다
동북공정은 조선시대 실학자들로 부터😊
吉田東伍(요시다 토고) 토고 요시다 X
'이'는 한국어로 사람을 의미한다(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고대 중국내륙 중원보다 문명이 앞섰던 홍산, 요하 문명의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사람들은 모두 '이' 였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이'를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동이의 예맥족이다... 맥이란 밝다는 의미이고 맥족은 밝음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예는 만주의 예수 지역으로 옮겨 살았던 맥족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예맥은 모두 같은 족이다... 예족은 북만주 부여의 중심이 되었고 맥은 남만주, 발해만, 요서지역, 한반도에 널리 분포한 농경민들이었다... 예맥은 모두 신시배달, 단군조선의 중심이었다... 신시배달 시기 요하의 예맥족은 일부가 황하지역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중국의 3황이라 일컬어지는 복희, 신농, 수인 등은 중원의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동이의 지배계층이었다... 5제도 역시 동이족이다... 3황5제는 동쪽에서 와서 문명을 전수해 준 사람들이었고 수천년의 기간이 지나며 언어적으로 다수의 토착민들과 동화되면서 중국 내륙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동이였지만 화하의 시조가 된것이다
정통 동이족인 발해만, 만주 그리고 일부 산동반도의 예맥 동이족은 신시배달로부터 단군조선까지 동아시아 문명의 가장 앞선 국가로 천제의 나라, 천독국, 군자국으로 불리며 주변 토착민들에게 문명을 전수하고 동일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방계 동이족인 요,순,우의 당,하나라는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황하의 치수를 관리하며 독자적 황하문명의 시초를 이루는 나라를 세웠고 이후 하나라 걸왕의 폭주로 하북과 산동반도 지역 동이의 백성들이 일어나 상나라를 세웠다... 상은 동이족이 세운 왕조로 단군조선의 거수국에 불과하였으나 중원의 많은 인구와 토지 등 경제적 이점으로 발해만, 만주지역과 문화적으로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상나라 말기 은주왕의 폭주로 서쪽의 주문왕이 일어나 은을 멸하고 주를 세웠다... 사료에 주문왕 세력을 '서이'로 기록하였으며 당시까지 '이'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서이의 주나라 세력은 지금의 관중땅 서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였고 그들이 중원의 패권을 잡으면서 은나라, 산동반도 지역의 동이 사람들은 상당수가 발해만의 고죽, 조선으로 돌아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중원은 서안 지역의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제후 봉건국가로 화하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화하는 관중지역 화산의 화족과 황하유역 하나라의 하족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어란 것이 중국인들의 주류 관점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제도, 문화, 예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황하문명을 발전시켰다... 춘추시대 공자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문제 해법은 주나라의 문화와 예법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그것이 그가 말한 유교의 핵심 원리이다... 공자는 죽기전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 왕족출신이었고 송나라는 은나라 왕족인 미자계가 세운 주의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 '동이' 라는 명칭은 주나라 이후 서서히 고유명사화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의 동쪽지역에 사는 이민족들을 모두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라는 말이 사람이라는 보통명사가 아닌 외부 특정 이민족의 의미를 갖게된 것이다... 당대 사료적 관점에서 화하가 바라본 동이는 3부류가 있었다... 1. 자신들과 인접한 발해만의 고죽, 번조선 등 예맥 집단 2. 내몽골 동부 유목민 집단 3. 만주의 군자국,대인국 (군자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대인국은 부여를 의미한다) ... 화하족이 동이를 오랑캐로 멸시한 것은 대부분 유목민 집단들이다... 산융(북융), 동호, 선비, 오환, 거란... 내몽골 유목민은 산융때까지 단군조선의 거수국으로 통제되었으며 춘추시대 고죽과 연합하여 연,노,제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단군조선이 점차 쇠퇴하여 bc238년 망하면서 내몽골 동부 유목민 동호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강성하게 되었으나 흉노 묵특에게 멸망당하였다... 유목민 집단인 동호는 예맥 농경민 집단인 조선이 아니다... 고죽(고리, 탁리),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진조선, 진한, 대부여) 멸망후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단군조선은 열국으로 분열되었다.... 한반도의 마한과 수십개 소국들도 정치적 구심점을 잃고 분열하게 되었다... 한무제에 의한 위만조선 침공은 발해만의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이 열국으로 분열된 북부여와 만주, 한반도 북부의 기타 중소국가들과의 무역을 방해하여 중개 이권을 차지한데 대한 보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번조선 정권을 찬탈한 위만조선에 대한 열국들의 이간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고 본다... 한무제는 흉노 등 북방 유목민 집단에 대한 보복으로 강력한 토벌을 하였으나 발해만의 번조선 등 이민족 농경민 집단인 예맥에 대해서는 적대하지 않았고 서로가 오랜기간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위만조선에 대한 침공은 여러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 멸망 이후에도 당시 만주에 있던 북부여를 사마천은 조선이라 칭하고 기록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의 아들과 조선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자 북부여(또는 동명부여)와 통하였고 그것이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다... 위만조선 유민들과 통하였던 북부여를 당대의 중국인들은 조선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단군조선(대부여)의 뒤를 이은 북부여와 동명부여, 졸본부여는 사회, 문화, 종교적 측면에서 예맥 그 자체였다
발해만 위만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조선 유민들을 모아 쇠퇴해가는 북부여를 대신하여 동명국을 세워 동명성왕이라 불리운 고두막한이 한사군을 몰아내어 얼마못가 한사군은 한나라와 인접한 낙랑군만 남게 된다... 낙랑 지역에 살던 조선유민들은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 낙랑국을 세운것으로 보인다... 한사군을 몰아내고 세력을 떨친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단군 해우루를 압박하여 나라를 옮겨갈것을 요구한다... 고두막한은 자신을 진조선(대부여)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며 무력에 의한 시위와 더불어 단군의 정통성을 내세운 것이다... 해우루가 얼마후에 죽고 동생 해부루가 나라를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고두막한은 동명국을 동명부여, 홀본부여라 칭하고 단군을 계승한다... 고두막한의 딸 파소는 미혼으로 임신을 하여 왕가에서 쫓겨나 한반도 남부로 가서 박혁거세를 낳고 혁거세는 사로 6촌의 고조선 유민들의 추대로 어린나이에 신라의 왕이 된다... 혁거세가 왕이 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천제 단군의 외손자라는 혈통에 기인한 것이며 박혁거세의 왕호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또는 대부족장의 호칭인 가한(거서간)이라고 칭하게 된다...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는 동부여에서 도망쳐온 고주몽과 재혼한다... 고주몽은 정략결혼으로 아들이 없는 고무서의 홀본부여를 소서노의 도움으로 접수하며 어렵지 않게 나라를 세우게 되고 자신은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후손임을 칭하며 홀본부여의 정통성을 버리고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세운다... 북부여 해모수의 4세손인 고주몽은 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 하였으며 단군조선, 진조선, 대부여의 정통성을 잇고자한 홀본부여는 고무서 단군에서 끊어지게 되고 소서노는 홀본부여의 정통을 잇고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요서지역 패대의 땅으로 옮겨가서 살다가 한반도 남부 마한지역으로 다시 옮겨 백제를 세우게 된다... 후에 백제는 홀본부여를 이은 남부여를 칭하게 된다... 백제의 왕들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료 기록이 있다... 중국 5호16국 혼란기에 백제는 자신들이 발원한 요서지역을 경략하여 다시 차지한다... 고구려는 부여의 정통성을 자신들에게 두고자 홀본부여를 지우고 북부여를 잇고자 하였다...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홀본부여가 망하게 되자 신라 혁거세의 손자 3대왕 유리는 가한, 차차웅의 칭호를 버리고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을 왕호로 삼는다... 북부여를 이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예맥과 부여의 정통성을 잇는 나라가 되었으나 홀본부여와 북부여라는 2개 부여의 정통성의 차이에서 역사적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훗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역사에 무지한 인간이므로 이런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부식은 동명성왕과 고주몽을 동일 인물인 것으로 왜곡하였다... 신라는 고조선 유민이 나라를 세우고 천제 단군(밝은임금)의 제후국인 가한의 나라임을 표방하였으나 후에 스스로 임금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왕 시기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속국임을 자처하며 원군을 청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속국, 제후국으로 삼고 왜를 물리쳤다... 내물왕은 고구려를 천제의 나라로 받들며 마립간, 가한의 칭호를 다시 사용한다... 내물왕 이후 신라는 1백년 이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간섭과 비호를 동시에 받으며 내부적으로 골품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으로 김씨 왕위세습을 유지한다... 그후 지증왕에 이르러 신라는 마립간 칭호를 버리고 '왕'을 칭한다... ... 이로서 만주와 발해만, 한반도의 동이가 세운 국가와 구성원들은 모두 예맥족이 정통이었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과 북부여, 홀본부여 등 만주, 한반도의 수십개 크고 작은 열국들은 모두 예맥이 지배층이요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후 중국 사료에는 동쪽의 이민족을 모두 동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핵심은 예맥이다
역사가 많이 왜곡되어 있어서 알기 힘들었을듯 학자들끼리모여 백제의 담로가 어디까지 인지 논쟁하기도 했다고 하던데
최영장군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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