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영 목사가 서재에서 전하는 말씀 101 하나님 나라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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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7 фев 2025
- 101. 하나님 나라 여권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좀 잘난 상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걸어 넘어뜨리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요사이 정치하는 분들 사이에도 보면, 좋은 정치를 해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생각 보다는 서로 상대편을 끌어내리느라 혈안이 되어서, 별의 별 것들을 다 들고 나와 물고 늘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런 험담 중에는 근거도 없이 만들어내거나, 정치와는 관계도 없는 것도 많고, 침소 봉대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도 바로 그런 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는 햇빛에 바랜 색종이처럼, 퇴색될 대로 퇴색이 되어서,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조차도 분간할 수가 없었었습니다. 알맹이는 다 빠져 버린 채, 빈 껍데기만 남아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모양이라도 유지하느라고, 형식과 격식에 억매여 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파라 고 불리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도 철저히 잘 지켰고, 툭하면 금식도 잘했고, 헌금도 잘 냈으며, 성전에 나아가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룩하게 소리를 높여 기도도 잘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못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미워하게 되었던 것은, 예수가 자기들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또 그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던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는 의미에서, 안식일이 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주자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며 시비를 걸어올 정도였습니다. 실은 호주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되면 모두가 걸어서 회당에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차를 운전하는 것 뿐 아니라 전차를 다는 것 조차도 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정도이니 2000년 전의 바리새파 사람들이야 얼마나 요란스러웠겠는 가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바리새파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질문 그 자체는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내지 않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신민지로, 있을 때이어서, 그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복자인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성서에서 암시하고 있는 구세주가 나타나, 마치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했던 것처럼, 자기들을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구하여 줄 것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혜성처럼 나타나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에게 말문을 열어주는가 하면,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어 내는 이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의 기대와 인기를 한 몸에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가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그 구세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이 세금에 관한 질문은 아주 민감한 사안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은 전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사건 이라 던지, 안식일에 밀밭은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서 허기를 면했던 제자들에 관한 일을 가지고, 예수께 여러 차례에 걸처 안식일에 대한 도전을 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번번이 참패를 당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만은 제 아무리 재치 있는 예수라 할지라도, 별 수 없이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는 내심 그들은 희희낙락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그는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것이니 즉시 체포되어 선동 죄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침략자에게 아부하는 친 로마제국의 매국노가 될 것이니, 그리 되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외면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양면에 날아 서있는 칼 을 드려 대는 것 같아서, 피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에게 동전을 하나 보여 달라고 하면서, 그 동전에 새겨진 초상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의 이름이 거기에 새겨져 있느냐고 반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의기양양해서 로마의 황제 가이사의 초상이며 그의 이름이라고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조용히 대답하십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했다면, 이것은 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대항하는 정치적인 반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를 것이며, 그는 전 이스라엘이 학수고대하던 이스라엘의 영웅적 지도자가 되어서, 모세가 이적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던 것처럼,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는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은 바로 그것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바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예수님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고, 예수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늘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세계를 무시한 하나님의 나라는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내게 탐탁하던 안 하던 간에, 현실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한다는 것과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타협하고 동조한다고 하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현실을 현실로 인정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는 현실위에 기초를 두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 자체를 비굴하다 거나,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차는 정치범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에서 지낸 날 수를 군대 같으면 계급장이나 훈장이라도 되는 양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경향마저 있던 웃지 못할 슬픈 시절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생각하던 하늘나라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하늘나라 였습니다. 예수의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 오늘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무시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교파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과 천국에만 온통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비근한 예가 어디서 어떻게 알아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날자까지 정하여 놓고 예수의 재림을 예견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후에나 갈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열심히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조용한 내적인 변화를 통하여 이 땅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결국 현실을 무시한 천국은 공중에 떠있는 공천국 空天國 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의롭지 못한 현실 개혁에 너무 집착을 한다면, 그 역시 알맹이 없는 공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편,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뒤죽박죽 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그 동전 속에는 가이사의 상이 그려져 있으니, 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담고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 하실 때 심어 주셨던 그 하나님의 상을, 잃어버리지 않고 우리 속에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 위 하여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라도, 내 속의 그 하나님의 상을 잃어버렸다면, 도로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사람 만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을 지니지 못한 피조물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슬픈 피조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동전에 가이사의 상이 없는 동전은 가이사가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상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여행하려면 여권이 필요하듯, 하늘나라에도 들어가려면 하늘나라의 여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상 여권에는 내 사진이 필요하지만, 하늘나라 여권에는 하나님의 상이 필요히기 때문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건간과 평안이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