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선생과 김현구씨 재판을 다룬 책으로 《우리안의 식민사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이덕일 선생에게 무죄가 되어 민족사 연구에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러한 맥락 없이 이덕일의 "학설 하나가 잘못 되었으니, 나머지도 문제 있을 것이다"라는 건 관망했던 사람 치고는 비겁함을 내비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반갑습니다~~이덕일 선생께서 식민사학 청산을 위해 선두에 서서 노력해 오신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갈석산 위치 문제는 우리 상고사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이 문제가 잘못되면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요원합니다. 이덕일 선생께서 '백석산 갈석산설'을 부정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난하 하류 갈석산설을 계속 주장하려면 저의 반론에 또 반론을 제기하면 됩니다. '백석산 갈석산설'이 옳다고 인정되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앞으로 학설을 그에 맞게 전개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에 있지 개인의 명예를 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덕일의 '학설 하나가 잘못되었으니, 나머지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TV-lj5ux제가 님에게 댓글을 단 이유는, 이덕일 선생이 유일하게 법정까지 가서 3차례에 걸친 판결 끝에, 단기 4356년(서기 2023년)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넘기셨습니다. '백석산 갈석산설'은 오환을 복속한 조조의 기록이나 『위략 (魏略)』, 『삼국지』, 『위서 (魏書)』 에서도 단서가 되리라 봅니다. 중국 삼국시대 오환 이웃이 선비인데, 그 지도자 중 한 이름이 '단석괴(檀石槐)'이며 그 한자 중 앞이 단(檀)이며, 박달나무를 뜻하기에 단군 조선(고대 조선/고조선)의 왕족 후예를 암시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걸 생각했을 때, 지금 군단급으로 무리지은 강단 사학에서 공세를 가한다면 이러한 현상 하나도 트집이 되기에 우려가 들어 말씀드린 겁니다. 역사 유투버라는 특수한 분야로 활동 이어가주신다니 힘이 됩니다.
중국에 한족은 없다 유전자 조사 발표 ㅡ 다음 검색 한족이 없는데 수많은 나라는 누가 건국햇을까요? 1920년 동아일보 창간호에 권덕규는 우리나라 영토를 6대주로 나누엇다 ㅡ 다음 검색 신라가 전세계를 통일. 고려가 이어받음. 1897년 고려에서 대한제국 연방으로 개명. 조선은 국호가 아니고 전세게를 부르는 이름. 조선왕조실록 원본의 실체 ㅡ 다음 검색 기미가요는 김해김씨 왕족을 찬양하는 노래 ㅡ 다음 검색
이글은 이덕일님을 폄하하려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자간에는 분명히 과학과 고서 어문학 지리 등을 근거로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래야만 어떤 국가도 우리 동이의 진정한 역사를 왜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정적인 잣대로 들이대면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도 하기전에 4분5열 하게될 것이다. 건전한 비판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반론을 제시해서 역사앞에 대동단결해야만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는것이 타당하고 또 발전이 되는거겠죠 일본이나 중국은 조금이라도 자기네 역사를 유리하게 가져가려 없는 사실도 꾸며내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일제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교과서를 달달 외며 연구안하는 대학교수들에게 절망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이런 역사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있고 이런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인신공격이 아닌 정교한 사실확인에 의한 역사복원 이런 것이 진정한 역사연구하는 자세가 아닐까요?@@TV-lj5ux
자유대한민국의 주인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이 확고한 사람들입니다. 한민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였던 나라가 1억 인구를 가진 다민족연방국가였던 고조선이였습니다. 고조선은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던 대제사장 겸 통치자로서 군사권과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으로서의 단제인 진한이 만주를 직접 통치하였고, 부단제인 번한이 황하이북지역을 직접 통치하였고, 부단제인 마한이 한반도와 열도를 직접 통치하였습니다. 3한연방의 대통령이 진한으로 '대한(대칸=대통령)'이였기때문에 이러한 고조선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고종황제가 국호를 '대한'으로 바꾼 것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된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고대부터 동방과 서방의 제천문명의 부모국으로서 그 상징적 유적이 바로 대한이신 단제왕검께서 나라를 개국하시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강화도 머리산의 참성단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개천절에 모든 종교대표들과 장관들을 데리고 강화도 머리산 참성단에서 우주하나님에게 감사제사를 드리는 것이 대한민국의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윤복현
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설 없이 논하는 고대사는 모두 사상누각입니다. 세종대왕은 에 우리의 수많은 고대 역사의 비밀을 비밀코드로 수없이 남겨 놓았습니다. 아직도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그런 고려의 역사에 대해 공부도 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를 논한다는 것은 우리의 삼국사를 크게 왜곡 시킬 가능성도 많고 본질을 벗어난 논의만 이어갈 가능성도 많습니다. 에 나와 있는 고려는 이렇습니다. 고려의 번국은 셋이다. 서번(서여진) 동번(동여진) 탐라국(대만)... 이 이야기가 어쩌면 고려의 초기 강역을 잘 이해하는 첫번째가 될지도 모릅니다. 왕건의 후삼국 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 기록을 보면 주로 북쪽보다는 남쪽에서 대부분 벌인 전투입니다. 그 북쪽의 땅은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의 유민들이 들고 고려에 귀부한 땅들입니다. 그곳이 서번(서여진) 동번(동여진)이 된 것입니다. 그런 서여진 동여진이 다시 그들의 땅에 윤관이 동북9성을 쌓자 독립을 하고 금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란과 북송을 멸망시키고... 고려와의 서열도 뒤바뀌게 됩니다. 그런 금나라도 몽골에 또다시 멸망을 당합니다. 고려는 이런 몽골과 42년을 전쟁을 했어요. 그리고 두 나라는 승패도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왕이 쿨하게 몽골왕에게 절 한 번 하고 39년동아 이어지던 전쟁을 끝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삼별초군들이 또 다시 3년동안 저항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몽골은 고려의 예전 강토를 대부분 회복시켜주고 그대로 인정도 해줬습니다. 고려의 이 강역은 홍건적 무리가 명나라가 되고 올라오고 이성계가 군사반란을 통해 고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사라지게 된 겁니다. 이게 500년 고려의 대강의 역사예요. 그래서 명나라가 남긴 의 고려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탐라에 대한 이야기도 고려국을 말하면서 따로 두었는데 이 글로부터 시작합니다. 탐라는 고려의 부용국이다. 서번(서여진) 동번(동여진)은 발해의 땅이였고 발해국의 유민들로 고려초 200년동안 조선의 제후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또 다시 금나라를 세우고 몽골에 멸망당하면서 몽골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갔던 것이고, 고려의 제후국은 마지막까지 만 남았던 것입니다. 삼별초의 난이 벌어지고 난 뒤 고려사엔 또 탐라를 제주로 바꾸고 고려의 직접 통치 하에 둔다.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탐라왕국(대만)에서 탐라(제주)를 떼어내 고려가 직접 통치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엔 탐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탐라국은 대만이라는 기록을 수없이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원사 고려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탐라왕국은 대만 제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여러 섬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들 해보세요. 고려의 강역이 절강성이나 복건성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면 이런 탐라(대만)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대만의 17세기 이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만의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들은 적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중세 고대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가 이고 입니다. 부터 공부들 하시고 부터 해설을 하세요. 그러면 그 이전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모든 것이 발해의 의미로 부터 파생합니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발해의 의미. 이기훈 선생의 최신 논문이 이란 역사 전문지 2024년 4월호에 실렸는데, 그 제목은 로써, 발해의 의미와 그 위치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이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현재는 황하가 개봉시로 부터 위로 꺽여 거대한 삼각주의 한 줄기로 흐르고 있는데, 고대에는 이 윗부분이 극심한 저지대로써 거대한 호수 (아마도 늪과 같은 얕은 호수) 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해라는 것이고, 발해가 끝나면 다시 강이 되어 북해로 (지금의 발해를 당시는 북해로 부름) 흘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 풀이의 핵심이며, 첫 단추라고 봅니다. 한편 중국인들이 쓰는 海의 의미가 바다는 물론 넓은 호수, 큰 강도 포함한다는 사실에 혼동이 없길 바라며.
중국 정사 지리지에 평주 기록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중국 땅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평주 자체가 고구려와 중국의 경계로 삼는 곳이었는데 식민사학의 결론과 같다는 비판은 잘못되어진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고 평주를 지금의 보정시 지역으로 보게 되면 역수가 있는 역현, 역주 또는 상곡군은 어디라고 볼 수 있나요 ? 그리고 사기 하본기 주석에 나오는 태강지리지 낙랑군 수성현을 보성시 지역으로 보는 근거로 그 곳에 수성진이 있다는 건데 수서 지리지 상곡군 조 수성현 주석에 의하면 북위가 설치한 남영주에 있던 군에 낙랑군이 있었고 전부 폐지했다가 일부 다시 설치하고 수나라 때 수문제가 개황 원년에 옮긴 것으로 기로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하북성 동쪽에서 지금의 보정시로 옮긴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황하 하구에 갈석이 있다는 것도 송나라 지도를 근거로 말하는건데 다른 송나라 지도는 지금의 노룡현 부근에 갈석산이 위치하고 있고요. 그리고 갈석산이 대륙에 있다고 말하는 사료도 상서정의 우공에 주석을 단 당나라 학자들이 동서남북 500리를 다 찾아도 못찾았고 당나라 학자들 또한 갈석산을 지금의 창려시에 있는 갈석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알아야 될게 서경 우공이나 상서 우공에 나타난 구주 관련 기록은 후대에 지리인식으로 아무리 빨라도 전한시기 지리인식이 반영된것이고 늦으면 무제때 지리인식입니다. 따라서 사기 하본기 기록은 하나라 당시 역사 기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고사변 학파들도 그렇고 현재 중국학계도 그렇고 하나라 강역이 아무리 커도 지금의 하남성 북부, 산서성 남부로 보고있고, 하나라 고고학 유적은 이리두 유적이 나타나는데 그 유적유물로 보면 하나라 우임금이 5400km나 되는 황하를 다스렸다는 건 모순이 됩니다.
반갑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것이고, 과연 난하 하류 갈석산까지 황하가 흘렀냐는 것입니다. 송나라 주자학파들은 '구하윤해설'을 주장하면서 본래는 난하 하류까지 육지여서 황하가 난하 하류 갈석산까지 흘렀기 때문에 난하 하류의 산이 갈석산이 맞다는 것이지요. 종민님은 황하가 난하 하류 갈석산까지 흘렀다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그리고 458년 북위 문성제가 평주를 순행하여 갈석산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는데, 난하 하류 갈석산을 주장하면 난하 하류 일대가 북위의 땅이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덕일 선생의 다른 유튜브 영상을 보면, 이 때 고구려 강역을 북경 일대까지로 보고 있거든요. 앞 뒤가 안맞다는 겁니다. 종민님은 이 때는 고구려 장수왕 시절인데, 이 때 고구려 서쪽 강역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나요? 보정시 수성遂城은 전국시대 무수성武遂城이 있던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지명이 3글자인 경우, 앞의 글자 ‘무武’를 생략하고 수성遂城이라 부르든지, 또는 뒤의 글자 성城을 생략하고 무수武遂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수와 수성은 같은 곳입니다.
@@TV-lj5ux 저는 황하 하류에 갈석산이 있다는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황하 하류 갈석을 주장하는 핵심은 협우갈석 입우해(사기 하본기), 협우갈석 입우하(상서 우공)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기록의 전체내용은 우임금이 9주를 치수하는 기록인데요. 아시겠지만 갈석이 나오는 내용은 기주지역을 치수하고 우임금이 황하를 거슬러서 들어와 자신의 도읍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사기 하본기내용은 갈석에 도착해서 바다로 들어갔다는 내용으로 주석은 이 갈석에 대해 바닷가에 있었다고 말하고 구체적으로 요서, 북평, 낙랑군 수성현을 말하는데요. 이 지역과 관련된 지명과 사료는 고대 요동지역인 하북성 동쪽과 관련되어있지 하북성 남쪽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상서 우공의 기록은 조이가 피복을 입은곳에 들렸는데 그곳에 갈석산이 있었고 바다를 통해 황하 하구로 거꾸로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이는 상서정의 주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서정의에서 당나라 학자들은 바닷가 갈석만 인정하고 직접 답사를 통해 대륙갈석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핵심은 상서에 나오는 우임금이 9주 치수하는 기록을 보면 하나라 당시 지리인식이 아닙니다. 바이두에서도 전한때 확립된 지리인식이라고 하고있어요.
@@TV-lj5ux @TV-lj5ux 북위 때 고구려의 최대 서쪽강역은 모르겠지만 수나라때 고구려의 서쪽강역은 고수전쟁 당시 국경이였던 요수를 찾아야되는데요. 저는 이를 난하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나라군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는데 삼국사기와 중국 사료는 요동성을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으로 보는데 이는 후한서 주석에 평주 노룡현지역이라고 정확하게 나옵니다. 따라서 그 부근에 있던 난하가 요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조선과 중국의 국경) 그리고 수나라가 집결한 탁군을 수서 지리지에서 찾아보면 연나라 수도인 계가 나타납니다. 이때는 북경부근을 말하죠. 그러면 당시 평주가 보정시 부근이면 북경에 집결해서 북경 남쪽을 공격하므로 모순이 됩니다. 이는 당나라 때 그대로 이어집니다. 또한 보정시 수성현은 수서 지리지 상곡군 조에 수성현이 나오는데요.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역수랑 관련된 현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수성현 주석에는 옮긴걸로 나옵니다. 이는 당나라 때 역주에 있는 수성현을 말합니다. 그리고 수서지리지 북평군 조에는 갈석산이 있고 장성도 나타납니다. 당나라 사료들은 갈석산이 있던 곳을 평주로 보기때문에 평주가 보정시 부근이면 역주의 위치가 어디인지 현단위로 현재 지명과 관련해서 어디인지 설명해주셔야되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이는 역수랑 관련되어있습니다. 역수는 역사적으로 지명이 바뀐적이 없는 유명한 강이거든요.. 또한 전국시대 무수성은 사기 주석에 의하면 당나라때 역주 수성현을 말하는데요. 전국시대 무수성은 조나라 장수 이목이 연나라 남쪽을 쳤던 곳으로 나옵니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무수는 한서에 하간국으로 나오네요. 한서에서 그러면 하간국과 낙랑군을 각각 설명하는데요. 하간국이 있던 곳이 기자조선이 있었고 낙랑군이 있었던 곳이면 하간국의 속한 현들의 위치를 현재 지명과 연관지어서 설명해주셔야됩니다. 그리고 중국사료에 의하면 기자조선은 연나라 남쪽이 아니라 연나라 동쪽에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전국시대 연나라 동쪽은 요동과 조선이 있었고 이때 조선은 기자조선을 말합니다. 만약 보정시에 기자조선 또는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다고 설명하려면 연나라가 산서성에 있어야되는데 이를 설명해주셔야되고 연나라가 산서성에 있게되면 조나라와 진나라가 이동하는데 이를 또 설명해주셔야됩니다.
이 RUclips Channel에서 발표하는 의견은 논리적이고 내용의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이런 내용과 의견을 발표하는 분의 소개도없고 해서 왜 자기자신을 감추면서 이런 내용을 유포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요지음 가짜뉴스와 가짜의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자기를 감추는 의견은 몹시 의심스려 보입니다.
반갑습니다. 마고역사 TV 운영자 김봉열입니다. 유튜버는 콘텐츠로 독자와 소통합니다. 콘텐츠가 바로 자기 소개가 아닐까요??? 그리고 홈페이지에서 밝혔듯이 마고역사 TV는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왜곡축소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자 만들었습니다.~~ 아직 유튜버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부족한 부분도 많을 줄 압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신지요??
성함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그 성함은 고대역사학에 공헌한 업적을 찾을수 없었읍니다. 같은 성합에 건축역사에 연관된분은 찾을수 있었읍니다. 깥은분이신지는 확인할수 없었읍니다. 과학적인 근거라는 것은 BC200넌도에 바다의 수위가 높아 해안선이 이곳 까지 갔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약 13m가 더 높았다는 노리인것 같음니다. 우실하교수에 의 하면 수면이 그렇게 올랐을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허나 그것은 더많은 서양의 전문 논문들에 비하여 거진 3매나 (5m 정도) 높은 것이라 지금 그 출처를 찾고 있읍니다. 우실하교수의 수면 정보는 중국 과학계의 나온것 같읍니다. 그리고 수면이 높았던 시기도 서양과 중국 논문들은 일치하고 있읍니다. 그 시기는 BC5000년과 BC6000년 사이였읍니다. 진시황때, 대략 BC200년근처에는 수면이 현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것이 동서양 과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김봉열선생은 약 5000-6000년의 전에 있던 해수면을 전제로한 과학을 인용해서 이렇한 논리를 전개 하시는것 같읍니다.
폭넓은 영역에서 합리한 근거로 정리하신 영상 정말로 좋은 공부가 되였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영상들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힘이 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 잘 보았습니다. 해안선과 황하하류의 흐름이 과학적근거가 충분하다면 거의 부정못할 명확한 해석 같네요
반갑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과학이 발달할수록 역사의 진실은 더 이상 은폐할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덕일 선생과 김현구씨 재판을 다룬 책으로 《우리안의 식민사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이덕일 선생에게 무죄가 되어 민족사 연구에 물꼬가 트였습니다. 이러한 맥락 없이 이덕일의 "학설 하나가 잘못 되었으니, 나머지도 문제 있을 것이다"라는 건 관망했던 사람 치고는 비겁함을 내비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반갑습니다~~이덕일 선생께서 식민사학 청산을 위해 선두에 서서 노력해 오신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갈석산 위치 문제는 우리 상고사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이 문제가 잘못되면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요원합니다. 이덕일 선생께서 '백석산 갈석산설'을 부정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난하 하류 갈석산설을 계속 주장하려면 저의 반론에 또 반론을 제기하면 됩니다. '백석산 갈석산설'이 옳다고 인정되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앞으로 학설을 그에 맞게 전개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에 있지 개인의 명예를 논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덕일의 '학설 하나가 잘못되었으니, 나머지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TV-lj5ux제가 님에게 댓글을 단 이유는, 이덕일 선생이 유일하게 법정까지 가서 3차례에 걸친 판결 끝에, 단기 4356년(서기 2023년)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넘기셨습니다. '백석산 갈석산설'은 오환을 복속한 조조의 기록이나 『위략 (魏略)』, 『삼국지』, 『위서 (魏書)』 에서도 단서가 되리라 봅니다. 중국 삼국시대 오환 이웃이 선비인데, 그 지도자 중 한 이름이 '단석괴(檀石槐)'이며 그 한자 중 앞이 단(檀)이며, 박달나무를 뜻하기에 단군 조선(고대 조선/고조선)의 왕족 후예를 암시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걸 생각했을 때, 지금 군단급으로 무리지은 강단 사학에서 공세를 가한다면 이러한 현상 하나도 트집이 되기에 우려가 들어 말씀드린 겁니다. 역사 유투버라는 특수한 분야로 활동 이어가주신다니 힘이 됩니다.
중국에 한족은 없다 유전자 조사 발표 ㅡ 다음 검색
한족이 없는데 수많은 나라는 누가 건국햇을까요?
1920년 동아일보 창간호에 권덕규는 우리나라 영토를 6대주로 나누엇다 ㅡ 다음 검색
신라가 전세계를 통일.
고려가 이어받음.
1897년 고려에서 대한제국 연방으로 개명.
조선은 국호가 아니고 전세게를 부르는 이름.
조선왕조실록 원본의 실체 ㅡ 다음 검색
기미가요는 김해김씨 왕족을 찬양하는 노래 ㅡ 다음 검색
이글은 이덕일님을 폄하하려고 제작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합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자간에는 분명히 과학과 고서 어문학 지리 등을 근거로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래야만 어떤 국가도 우리 동이의 진정한 역사를 왜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감정적인 잣대로 들이대면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도 하기전에 4분5열 하게될 것이다.
건전한 비판에 대해서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반론을 제시해서 역사앞에 대동단결해야만 할 것이다.
@@syc0180 역사 앞에 대동단결이라는 말씀 좋네요.
이런 수고스러움 노고에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반갑습니다. 격려 댓글 감사합니다.
정성이 느껴지는 방송감사드립니다.
갈석산은 중요한데
많은 도움되었습니다.
고조선,단군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됩니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윤내현 교수님도 난하 갈석산설을 주장한걸로 알고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는것이 타당하고 또 발전이 되는거겠죠 일본이나 중국은 조금이라도 자기네 역사를 유리하게 가져가려 없는 사실도 꾸며내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식민사관에 사로잡혀 일제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교과서를 달달 외며 연구안하는 대학교수들에게 절망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이런 역사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있고 이런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인신공격이 아닌 정교한 사실확인에 의한 역사복원 이런 것이 진정한 역사연구하는 자세가 아닐까요?@@TV-lj5ux
보정시 갈석산에 고죽국이 있었다.그후 고구려장수왕이 회복한 고죽국의 옛땅을 다물정신으로 계승해 가길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보정시 갈석산을 주장하는건 무리입니다.ㅡ 베이징시쪽이 낙랑군이고 보정시쪽이 대방군이라야 이곳의 남쪽에 요서백제가 존재할수 있습니다.ㅡ 베이징시 당산시쪽이 지리로 볼때 동서남북의 길목입니다.ㅡ
웃기고들 있네 황하서쪽이 백석산이다.
동이족이라 자칭하지 말고 예맥족 또는 배달족이라 자칭합시다
자유대한민국의 주인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이 확고한 사람들입니다. 한민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였던 나라가 1억 인구를 가진 다민족연방국가였던 고조선이였습니다. 고조선은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던 대제사장 겸 통치자로서 군사권과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으로서의 단제인 진한이 만주를 직접 통치하였고, 부단제인 번한이 황하이북지역을 직접 통치하였고, 부단제인 마한이 한반도와 열도를 직접 통치하였습니다. 3한연방의 대통령이 진한으로 '대한(대칸=대통령)'이였기때문에 이러한 고조선을 회복하자는 의미로 고종황제가 국호를 '대한'으로 바꾼 것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된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고대부터 동방과 서방의 제천문명의 부모국으로서 그 상징적 유적이 바로 대한이신 단제왕검께서 나라를 개국하시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강화도 머리산의 참성단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면 개천절에 모든 종교대표들과 장관들을 데리고 강화도 머리산 참성단에서 우주하나님에게 감사제사를 드리는 것이 대한민국의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윤복현
반갑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난하 하류 갈석산은 그서쪽 연산산맥이라고 보입니다. 고북구시 쪽에 갈석산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서쪽 조백하가 요수이고 베이징시가 낙랑군입니다.
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설 없이 논하는 고대사는 모두 사상누각입니다.
세종대왕은 에 우리의 수많은 고대 역사의 비밀을 비밀코드로 수없이 남겨 놓았습니다.
아직도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그런 고려의 역사에 대해 공부도 하지 않고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를 논한다는 것은 우리의 삼국사를 크게 왜곡 시킬 가능성도 많고 본질을 벗어난 논의만 이어갈 가능성도 많습니다.
에 나와 있는 고려는 이렇습니다.
고려의 번국은 셋이다. 서번(서여진) 동번(동여진) 탐라국(대만)... 이 이야기가 어쩌면 고려의 초기 강역을 잘 이해하는 첫번째가 될지도 모릅니다.
왕건의 후삼국 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투 기록을 보면 주로 북쪽보다는 남쪽에서 대부분 벌인 전투입니다. 그 북쪽의 땅은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의 유민들이 들고 고려에 귀부한 땅들입니다.
그곳이 서번(서여진) 동번(동여진)이 된 것입니다.
그런 서여진 동여진이 다시 그들의 땅에 윤관이 동북9성을 쌓자 독립을 하고 금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란과 북송을 멸망시키고... 고려와의 서열도 뒤바뀌게 됩니다.
그런 금나라도 몽골에 또다시 멸망을 당합니다.
고려는 이런 몽골과 42년을 전쟁을 했어요. 그리고 두 나라는 승패도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왕이 쿨하게 몽골왕에게 절 한 번 하고 39년동아 이어지던 전쟁을 끝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삼별초군들이 또 다시 3년동안 저항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몽골은 고려의 예전 강토를 대부분 회복시켜주고 그대로 인정도 해줬습니다.
고려의 이 강역은 홍건적 무리가 명나라가 되고 올라오고 이성계가 군사반란을 통해 고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조선을 건국하면서 사라지게 된 겁니다.
이게 500년 고려의 대강의 역사예요.
그래서 명나라가 남긴 의 고려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탐라에 대한 이야기도 고려국을 말하면서 따로 두었는데 이 글로부터 시작합니다.
탐라는 고려의 부용국이다.
서번(서여진) 동번(동여진)은 발해의 땅이였고 발해국의 유민들로 고려초 200년동안 조선의 제후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또 다시 금나라를 세우고 몽골에 멸망당하면서 몽골의 직접 통치 하에 들어갔던 것이고, 고려의 제후국은 마지막까지 만 남았던 것입니다.
삼별초의 난이 벌어지고 난 뒤 고려사엔 또 탐라를 제주로 바꾸고 고려의 직접 통치 하에 둔다.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탐라왕국(대만)에서 탐라(제주)를 떼어내 고려가 직접 통치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엔 탐라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탐라국은 대만이라는 기록을 수없이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원사 고려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탐라왕국은 대만 제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여러 섬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들 해보세요. 고려의 강역이 절강성이나 복건성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면 이런 탐라(대만)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대만의 17세기 이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만의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들은 적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중세 고대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가 이고 입니다.
부터 공부들 하시고 부터 해설을 하세요. 그러면 그 이전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모든 것이 발해의 의미로 부터 파생합니다.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발해의 의미. 이기훈 선생의 최신 논문이 이란 역사 전문지 2024년 4월호에 실렸는데, 그 제목은 로써, 발해의 의미와 그 위치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이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현재는 황하가 개봉시로 부터 위로 꺽여 거대한 삼각주의 한 줄기로 흐르고 있는데, 고대에는 이 윗부분이 극심한 저지대로써 거대한 호수 (아마도 늪과 같은 얕은 호수) 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해라는 것이고, 발해가 끝나면 다시 강이 되어 북해로 (지금의 발해를 당시는 북해로 부름) 흘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 풀이의 핵심이며, 첫 단추라고 봅니다. 한편 중국인들이 쓰는 海의 의미가 바다는 물론 넓은 호수, 큰 강도 포함한다는 사실에 혼동이 없길 바라며.
갈석산은 황하와 가까이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갈석산은 난하 현 갈석산도 아니고 백석산도 아니다. 태행산맥 왼쪽에 강이 흐르는데 태원, 평요고성, 임분을거쳐 요동성도 있고 안시성도 있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치기전에 갈석산을 올라 폐수를 거쳐 안시성에 도착했으니 갈석산은 황하를 건너기전에 있는것이다.
국운이 상승할때 곁가지로 빠지지 말고 의견을 한테 모으는게 어떨는지? 동북공정 식민사관 판치는데 . . .
배운 사람들이 왜 이럴까? 안타깝다!
반갑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마고역사 님,
아래 우리역사 님의 자료도 보아주세요.
ruclips.net/video/6Z8a_TA4lCg/видео.html
갈석산의 위치는 동일하게 확정하셨는데
'바다'에 대한 견해가 다르시네요.
우리역사 님과도 교류를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우리역사님 자료 잘 보고 이습니다. 동영상 만드는 능력이 뛰어 나네요~~
중국 정사 지리지에 평주 기록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중국 땅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평주 자체가 고구려와 중국의 경계로 삼는 곳이었는데 식민사학의 결론과 같다는 비판은 잘못되어진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고 평주를 지금의 보정시 지역으로 보게 되면 역수가 있는 역현, 역주 또는 상곡군은 어디라고 볼 수 있나요 ? 그리고 사기 하본기 주석에 나오는 태강지리지 낙랑군 수성현을 보성시 지역으로 보는 근거로 그 곳에 수성진이 있다는 건데 수서 지리지 상곡군 조 수성현 주석에 의하면 북위가 설치한 남영주에 있던 군에 낙랑군이 있었고 전부 폐지했다가 일부 다시 설치하고 수나라 때 수문제가 개황 원년에 옮긴 것으로 기로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하북성 동쪽에서 지금의 보정시로 옮긴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황하 하구에 갈석이 있다는 것도 송나라 지도를 근거로 말하는건데 다른 송나라 지도는 지금의 노룡현 부근에 갈석산이 위치하고 있고요. 그리고 갈석산이 대륙에 있다고 말하는 사료도 상서정의 우공에 주석을 단 당나라 학자들이 동서남북 500리를 다 찾아도 못찾았고 당나라 학자들 또한 갈석산을 지금의 창려시에 있는 갈석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알아야 될게 서경 우공이나 상서 우공에 나타난 구주 관련 기록은 후대에 지리인식으로 아무리 빨라도 전한시기 지리인식이 반영된것이고 늦으면 무제때 지리인식입니다. 따라서 사기 하본기 기록은 하나라 당시 역사 기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고사변 학파들도 그렇고 현재 중국학계도 그렇고 하나라 강역이 아무리 커도 지금의 하남성 북부, 산서성 남부로 보고있고, 하나라 고고학 유적은 이리두 유적이 나타나는데 그 유적유물로 보면 하나라 우임금이 5400km나 되는 황하를 다스렸다는 건 모순이 됩니다.
반갑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갈석산은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것이고, 과연 난하 하류 갈석산까지 황하가 흘렀냐는 것입니다. 송나라 주자학파들은 '구하윤해설'을 주장하면서 본래는 난하 하류까지 육지여서 황하가 난하 하류 갈석산까지 흘렀기 때문에 난하 하류의 산이 갈석산이 맞다는 것이지요.
종민님은 황하가 난하 하류 갈석산까지 흘렀다는 것을 인정하시나요?
그리고 458년 북위 문성제가 평주를 순행하여 갈석산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는데, 난하 하류 갈석산을 주장하면 난하 하류 일대가 북위의 땅이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덕일 선생의 다른 유튜브 영상을 보면, 이 때 고구려 강역을 북경 일대까지로 보고 있거든요. 앞 뒤가 안맞다는 겁니다.
종민님은 이 때는 고구려 장수왕 시절인데, 이 때 고구려 서쪽 강역은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나요?
보정시 수성遂城은 전국시대 무수성武遂城이 있던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지명이 3글자인 경우, 앞의 글자 ‘무武’를 생략하고 수성遂城이라 부르든지, 또는 뒤의 글자 성城을 생략하고 무수武遂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수와 수성은 같은 곳입니다.
@@TV-lj5ux 저는 황하 하류에 갈석산이 있다는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황하 하류 갈석을 주장하는 핵심은 협우갈석 입우해(사기 하본기), 협우갈석 입우하(상서 우공)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기록의 전체내용은 우임금이 9주를 치수하는 기록인데요. 아시겠지만 갈석이 나오는 내용은 기주지역을 치수하고 우임금이 황하를 거슬러서 들어와 자신의 도읍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사기 하본기내용은 갈석에 도착해서 바다로 들어갔다는 내용으로 주석은 이 갈석에 대해 바닷가에 있었다고 말하고 구체적으로 요서, 북평, 낙랑군 수성현을 말하는데요. 이 지역과 관련된 지명과 사료는 고대 요동지역인 하북성 동쪽과 관련되어있지 하북성 남쪽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상서 우공의 기록은 조이가 피복을 입은곳에 들렸는데 그곳에 갈석산이 있었고 바다를 통해 황하 하구로 거꾸로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이는 상서정의 주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서정의에서 당나라 학자들은 바닷가 갈석만 인정하고 직접 답사를 통해 대륙갈석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핵심은 상서에 나오는 우임금이 9주 치수하는 기록을 보면 하나라 당시 지리인식이 아닙니다. 바이두에서도 전한때 확립된 지리인식이라고 하고있어요.
@@TV-lj5ux @TV-lj5ux 북위 때 고구려의 최대 서쪽강역은 모르겠지만 수나라때 고구려의 서쪽강역은 고수전쟁 당시 국경이였던 요수를 찾아야되는데요. 저는 이를 난하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나라군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하는데 삼국사기와 중국 사료는 요동성을 한나라 요동군 양평현으로 보는데 이는 후한서 주석에 평주 노룡현지역이라고 정확하게 나옵니다. 따라서 그 부근에 있던 난하가 요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조선과 중국의 국경) 그리고 수나라가 집결한 탁군을 수서 지리지에서 찾아보면 연나라 수도인 계가 나타납니다. 이때는 북경부근을 말하죠. 그러면 당시 평주가 보정시 부근이면 북경에 집결해서 북경 남쪽을 공격하므로 모순이 됩니다. 이는 당나라 때 그대로 이어집니다.
또한 보정시 수성현은 수서 지리지 상곡군 조에 수성현이 나오는데요.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역수랑 관련된 현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수성현 주석에는 옮긴걸로 나옵니다. 이는 당나라 때 역주에 있는 수성현을 말합니다. 그리고 수서지리지 북평군 조에는 갈석산이 있고 장성도 나타납니다. 당나라 사료들은 갈석산이 있던 곳을 평주로 보기때문에 평주가 보정시 부근이면 역주의 위치가 어디인지 현단위로 현재 지명과 관련해서 어디인지 설명해주셔야되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이는 역수랑 관련되어있습니다. 역수는 역사적으로 지명이 바뀐적이 없는 유명한 강이거든요..
또한 전국시대 무수성은 사기 주석에 의하면 당나라때 역주 수성현을 말하는데요. 전국시대 무수성은 조나라 장수 이목이 연나라 남쪽을 쳤던 곳으로 나옵니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무수는 한서에 하간국으로 나오네요. 한서에서 그러면 하간국과 낙랑군을 각각 설명하는데요. 하간국이 있던 곳이 기자조선이 있었고 낙랑군이 있었던 곳이면 하간국의 속한 현들의 위치를 현재 지명과 연관지어서 설명해주셔야됩니다. 그리고 중국사료에 의하면 기자조선은 연나라 남쪽이 아니라 연나라 동쪽에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전국시대 연나라 동쪽은 요동과 조선이 있었고 이때 조선은 기자조선을 말합니다. 만약 보정시에 기자조선 또는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다고 설명하려면 연나라가 산서성에 있어야되는데 이를 설명해주셔야되고 연나라가 산서성에 있게되면 조나라와 진나라가 이동하는데 이를 또 설명해주셔야됩니다.
@@TV-lj5ux mdb.cyberseodang.or.kr/mobile2/bookList/titleList.do?bnCode=jti_1b0101
위에 링크는 상서정의 번역본이니 관심있으시면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요하문명을 통채로 뺏길뻔 했군요.
반갑습니다~~ 하북성 보정시 백석산이 고조선의 갈석산이라는 것을 알면, 태행산맥 동쪽에서 태동한 문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지요~~
문헌과 과학적 근거를 적절히 활용하시니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이덕일은 고대사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운동가로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딱! 떨어집니다.
이제부터 우리 한민족 상고사의 기준은 마고역사입니다.
힘이나는 댓글 감사합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상형문자 쓰고 돼지 잡는 나시족..
이 RUclips Channel에서 발표하는 의견은 논리적이고 내용의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이런 내용과 의견을 발표하는 분의 소개도없고 해서 왜 자기자신을 감추면서 이런 내용을 유포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요지음 가짜뉴스와 가짜의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자기를 감추는 의견은 몹시 의심스려 보입니다.
반갑습니다. 마고역사 TV 운영자 김봉열입니다. 유튜버는 콘텐츠로 독자와 소통합니다. 콘텐츠가 바로 자기 소개가 아닐까요??? 그리고 홈페이지에서 밝혔듯이 마고역사 TV는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왜곡축소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자 만들었습니다.~~ 아직 유튜버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부족한 부분도 많을 줄 압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신지요??
성함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나, 그 성함은 고대역사학에 공헌한 업적을 찾을수 없었읍니다. 같은 성합에 건축역사에 연관된분은 찾을수 있었읍니다. 깥은분이신지는 확인할수 없었읍니다. 과학적인 근거라는 것은 BC200넌도에 바다의 수위가 높아 해안선이 이곳 까지 갔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약 13m가 더 높았다는 노리인것 같음니다. 우실하교수에 의 하면 수면이 그렇게 올랐을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허나 그것은 더많은 서양의 전문 논문들에 비하여 거진 3매나 (5m 정도) 높은 것이라 지금 그 출처를 찾고 있읍니다. 우실하교수의 수면 정보는 중국 과학계의 나온것 같읍니다. 그리고 수면이 높았던 시기도 서양과 중국 논문들은 일치하고 있읍니다. 그 시기는 BC5000년과 BC6000년 사이였읍니다. 진시황때, 대략 BC200년근처에는 수면이 현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것이 동서양 과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김봉열선생은 약 5000-6000년의 전에 있던 해수면을 전제로한 과학을 인용해서 이렇한 논리를 전개 하시는것 같읍니다.
@@JoungCook 의견 감사합니다. 진시황 이전에 해수면이 보정시 일대까지 였던 것은 당시의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아서이기도 하지만 더 큰 요인으로는 그곳이 본래 바다였는데 황하와 여러 강들이 실어나르는 토사의 퇴적으로 그 지역이 육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우리역사 갈석산 쳐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