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 이미자 이난영 목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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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2 ноя 2024
  • 난영 목포의 눈물 (1935년) / SIDE-A, 트랙1
    작사 : 문일석 작곡 : 손목인
    ◎ 이미자는 1982년
    남진은 1976년에 목포의 눈물 리메이크
    (*남진 앨범 표지에 같이 있는 여가수는 문주란)
    (앨범 부제가 남진 문주란 흘러간 노래)
    (이미자 SIDE-B, 트랙3 남진 SIDE-A, 트랙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안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LP & SP 정보
    ◎ 레코드판이라고 하면 흔히 LP로만 알고 있는데
    이전에는 SP가 있었다
    SP는 Standard Playing Record의 약자이며
    LP는 Long Playing Record의 약자입니다.
    ◎ LP와 SP의 차이점은 크기가 아니라
    한 면에 담기는 노래 수!
    (SP도 LP랑 같은 크기인 약 30cm도 있음)
    SP 수록시간은 한 면에 약 4분 30초 정도
    재질이 약해서 잘 깨졌고, 긴 시간 녹음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노래는 이 음반의 최대 재생시간인
    3~4분에 맞춰야 했고,
    오늘날 노래 한 곡이 평균 3~5분 정도인 것이
    여기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 이후에 발명된 게 LP인데 SP와 같은 크기인지만
    SP보다 10배에 달하는 30분을 녹음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장시간 들을 수 있는 음반으로
    당시에 널리 쓰이던 SP에 비해선
    훨씬 긴 재생 시간을 갖고 있어서 대중화가 됐다
    ※ 가수 & 노래 정보
    (1편은 이난영의 가수 인생 시작과 목포의 눈물 중심)
    이난영 데뷔
    ◎ 1916년 목포의 양동 육거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옥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퇴했고
    이후 16세 무렵에 태양극단의 순회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 다녔다
    이후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으로 데뷔
    명곡 목포의 눈물 탄생
    ◎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조선10대도시 찬가향토신민요 노랫말 공모’에서 당선작으로 뽑힌
    문일석의 시 목포의 사랑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노래로
    이난영은 이 노래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듬해 21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과 혼인
    일제강점기에 나온 이 노래는 당시에는
    나라를 잃은 국민들에겐 위안가였고
    1980·90년대 호남인들에게는 응원가였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목포를 널리 알린 노래
    목포의 눈물 가사
    ◎ 2절에 나오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라는 가사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커다란 산봉우리에
    볏짚을 쌓아서 많은 식량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장하여
    일본군을 속인 적이 있다.
    이걸 본 일본군은 조선의 군대가 아주 많이 숨어있다고
    판단해 물러났던 것이다. 그 후로 이 산봉우리는
    ‘노적봉’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러니, 이 가사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지 300년 지나서
    또다시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원한을 의미
    그렇다면 당시 이 가사는 어떻게 일제의 검열을 통과했을까?
    사실 이 가사를 처음 제출했을 땐
    1차 심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사가 문일석이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로
    가사를 고쳐서 제출했다. 그리고는 원안풍이 무엇인지 묻는
    일본인들에게 “바람의 이름이다”라고 대답해
    조선말을 잘 모르는 일본인 관리들을 속인 것.
    그리고 해방 후 ‘삼백년 원안풍’은
    ‘삼백년 원한 품은’으로 바뀌게 된다
    해방 후 이난영
    ◎목포의 눈물로 가요계의 샛별이 된 이난영은
    이듬해 21세의 나이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
    ** 작곡가 김해송은 1930~4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의
    ‘천재 뮤지션’으로 통했으며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 고운봉의 선창 등을 작곡
    이후 이난영은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

Комментарии • 4

  • @channelhoony6322
    @channelhoony6322 3 года назад +3

    이 노래 아니었음 오늘날 목포도 없었겠죠!^^ 정작 이난영가수의 삶은 순탄치 못했네요

    • @왕오전축국전
      @왕오전축국전  3 года назад

      네 꼭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을 애닮은 생애입니다...^^

  • @금한-v5j
    @금한-v5j 3 года назад +3

    신청곡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축음기로 듣는 sp음반이 아니라서 아쉽습니다 그래도 60년대 이난영 선생의 10인치 lp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음반을 모으고 있지만 현재 이난영 추억의 노래집 10인치 lp는 현재 가격이 50만원이라고 하더군요 50만원을 줘도 없어서 못구한다고 저도 lp음반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옛날 1930년대~1950년대 임방울.풍년가.농부가.사랑가.황금심.박단마.이화자.남인수.고복수 선생들의 그 당시 sp음반은 정말 구하기 어렵고 귀한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꼭 축음기로 듣는 sp음반을 듣고 싶습니다

    • @왕오전축국전
      @왕오전축국전  3 года назад

      10인치 lp가 그렇게나 귀하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0인치 엘피는 꽤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