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초안산을 다녀왔음니다... 나이를 먹다보니 이젠 공동묘지를 가는것도 개의치 않은게 나이를 먹는 세월탓이란 생각이듭니다... 그곳 모습이 황량한게 봉분이 남아있는 묘지는 대여덜정도이었으며 그나마 복구된 몇몇 묘지들과 나머진 사라진 봉분과 도굴된듯한 구멍패인 묫자리들 그리고 상석이 토사와 함께 쓸려내려가고 문인석도 도랑에 묻히니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았을때 많은걸 생각해보았고 대를 잊는다는데 많은 고뇌를 불러온 하루였던것 같음니다...어차피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건 사라지는게 자연이치라 하지만 황량한 초안산에 널부러진 묫자리의 기막힌 현실을 보자면 대를 잊는다는건 살아서의 욕심일런지 널브러지고 짓잉겨지고 비석의 위치가 거랑을 뒤로하니 상석위로 고목이 자릴 잡고 말로 표현못할 그무엇이 밀려 오는듯 십더이다...참으로 나자신 사후의 가슴 시린 지난날과 미래를 보는듯하와 우거진 수풀사이로 뒹굴던 상석이 만은걸 생각케 한 하루였음니다... 다음은 이말산을 다녀와야 겠내요.. 주피디님의 해설을 듣자니 아마 그곳도 무언가 깨달음이 있을것만 같단 생각이 듭니다... 역사 여행 해설은 역시 주피디님만의 묘한 여운이 남는게 가슴을 울리는 보이지않는 가치의 무언가가 있음니다...
도봉구 녹천역 근처 초안산에도 내시들의 집단묘지가 있습니다, 궁녀나 내시나 성적인 욕구는 거세가 되었다고 해도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습니다. 고려가 원에 바친 환관과 공녀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일부러 고자를 만드는 예도 많았다고 합니다. 가문의 부귀를 위해 아들을 환관으로 보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문정왕후는 내시 박한종의 힘으로 명종을 지켜 그가 내정에 깊게 관여하고 명종은 내시 정번에게 집착하여 그에게 재물을 주거나 휴가를 못가게 하고 항상 옆에 두고 노는 경우가 많아 동성애 성향인가 의심하는 분도 있습니다. 후궁 6명도 임신 기록이 없고 적자 순회세자가 유일한 자녀입니다. 인종이 무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김처선 과는 달리 상전내관 김자원은 연산의 총애를 받아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명이 환관들의 국정농단으로 망한 것도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이방석의 세자빈 류씨가 내시 이만과 간통을 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의 내시는 남성의 기능이 있는 직책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 까지 내시는 승정원, 비서실과 같은 고급 관리이고 환관은 왕의 잡일, 심부름을 하는 하인인데 원 간섭기부터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더니 조선에선 환관이 내시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완전히 같은 직종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만 이란 내시는 고자가 아닌 고급 관리였던 것입니다. 인종대 김돈중도 내시였지만 고자가 아닙니다. 1363년 환관 안도치는 공민왕의 침실에서 반역자들에게 피살당합니다. 기황후의 후원자 고용보도 고려 출신의 환관이고 박불화도 고려 출신의 환관입니다.
❤❤❤❤
항상 고마운 영상 넘 감사합니다 ^^
오늘도 재미있게 많이 배우고 갑니다 고마워요~😊~
역시 아침 출근 지하철에서 한숨 잘때는 주피디 선생님 음성이 최고야!!
지난주에는 초안산을 다녀왔음니다...
나이를 먹다보니 이젠 공동묘지를 가는것도 개의치 않은게 나이를 먹는 세월탓이란 생각이듭니다...
그곳 모습이 황량한게 봉분이 남아있는 묘지는 대여덜정도이었으며 그나마 복구된 몇몇 묘지들과 나머진 사라진 봉분과 도굴된듯한 구멍패인 묫자리들 그리고 상석이 토사와 함께 쓸려내려가고 문인석도 도랑에 묻히니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았을때 많은걸 생각해보았고 대를 잊는다는데 많은 고뇌를 불러온 하루였던것 같음니다...어차피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건 사라지는게 자연이치라 하지만 황량한 초안산에 널부러진 묫자리의 기막힌 현실을 보자면 대를 잊는다는건 살아서의 욕심일런지 널브러지고 짓잉겨지고 비석의 위치가 거랑을 뒤로하니 상석위로 고목이 자릴 잡고 말로 표현못할 그무엇이 밀려 오는듯 십더이다...참으로 나자신 사후의 가슴 시린 지난날과 미래를 보는듯하와 우거진 수풀사이로 뒹굴던 상석이 만은걸 생각케 한 하루였음니다...
다음은 이말산을 다녀와야 겠내요..
주피디님의 해설을 듣자니 아마 그곳도 무언가 깨달음이 있을것만 같단 생각이 듭니다...
역사 여행 해설은 역시 주피디님만의 묘한 여운이 남는게 가슴을 울리는 보이지않는 가치의 무언가가 있음니다...
쉽게 설명하는 능력자. 목소리도 너무좋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말산.. 많은 사람들이 묻힌곳인지 몰랐습니다. 또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ㆍ주피디 님 ^^~
PD님 목소리가 너무
좋아용 ~~~
역사공부 많이 하고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
조선시대 내시의 삶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주셔서 여러므로 유익한 도움이 되어 감사 드립니다.!!🙏🙆♂️🙋♂️💕💕
최고 유익한 내용에 주피디님 영상 👍 👍 👍 👍 👍 👍 🫶🫶🫶
성저십리ㆍ이곳은 평생을 궁궐에서 근무하다 묻힌 내시들의 공동묘지,이들은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고 있죠.
후손이 없으니 훼손이 심하죠
트레킹겸 자주 다니는곳입니다. 숙빈 최씨의 부묘 묘도 잘 꾸며져있죠
잘 봤습니다
도봉구 녹천역 근처 초안산에도 내시들의 집단묘지가 있습니다, 궁녀나 내시나 성적인 욕구는 거세가 되었다고 해도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습니다. 고려가 원에 바친 환관과 공녀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일부러 고자를 만드는 예도 많았다고 합니다. 가문의 부귀를 위해 아들을 환관으로 보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문정왕후는 내시 박한종의 힘으로 명종을 지켜 그가 내정에 깊게 관여하고 명종은 내시 정번에게 집착하여 그에게 재물을 주거나 휴가를 못가게 하고 항상 옆에 두고 노는 경우가 많아 동성애 성향인가 의심하는 분도 있습니다. 후궁 6명도 임신 기록이 없고 적자 순회세자가 유일한 자녀입니다. 인종이 무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김처선 과는 달리 상전내관 김자원은 연산의 총애를 받아 악행을 저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명이 환관들의 국정농단으로 망한 것도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이방석의 세자빈 류씨가 내시 이만과 간통을 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의 내시는 남성의 기능이 있는 직책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시대 까지 내시는 승정원, 비서실과 같은 고급 관리이고 환관은 왕의 잡일, 심부름을 하는 하인인데 원 간섭기부터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더니 조선에선 환관이 내시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완전히 같은 직종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만 이란 내시는 고자가 아닌 고급 관리였던 것입니다. 인종대 김돈중도 내시였지만 고자가 아닙니다. 1363년 환관 안도치는 공민왕의 침실에서 반역자들에게 피살당합니다. 기황후의 후원자 고용보도 고려 출신의 환관이고 박불화도 고려 출신의 환관입니다.
주피디님 ㆍ댓글 달아 주시고 ㆍ더더욱 훌륭하신분 이시군요 ㆍ유투브 하시나요 ?
내시 대단한 분들인거 같아요
남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거세 선택을 한다는게.....😢
방가워요
말씀중에 문석인이란 표현을 쓰시던데 문안석을 그렇게 말씀하신거군요. 하긴 그 표현도 틀린 말은 아닐듯 합니다. 좋은 얘기 흥미롭군요.
뭔가 음기가 가득하네요
참 아줌마 말끝에 혈연관계라고 하는데 혈연관계래도 한세대 지나면 지금 내시동산처럼 돼요 그건 아소!
무지님 ㅎ어찌 그리 무식한 말씀기는ᆢ
혈연은 대대로 유전인자가 대물림ㆍ
핵심을 모르는 무식한 말씀ㅎ ᆢ
@@std3786뭔개소리인지? 혈연관계가 대물림인지 모르요? 모르면 댓글 달지마소
세월지나 세대 지나가면 찾아가지 않는단 말인데 왜 그쪽은 안동가문이요? 무식아
내가 아는 선배 한분 이 조부 가 내시 였다고 합니다.어려서 (60년대 초) 조부 와 같이 순종 비 생신 때에 순정효 황후 뵈러 같이 같다 하더군요.조모 는 궁녀 출신 이었고.
고난한삶
고려때는 황제국인대 속국조선 자청한 이씨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