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3강 정의를 찾는 자, 용기 앞에 울부짖는 자는 누구인가?[선순환시대 인문학 힐링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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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4 янв 2025
  • #정의 #용기 #정신문화 #역할 #양심 #인간관계 #생각 #마음 #수행 #입장 #선순환
    강의 장소 : 봉화도량
    강의 일자 : 2024.12.08.
    문의 전화 : 봉화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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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소: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로 127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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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는 누가 찾고 용기 앞에 울부짖는 자는 또 누구일까? 정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정의를 얼마만큼 알고 살까요?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여야를 앞에 두고 이념 논쟁을 앞에 두고, 지금 여기서 정과 사 논쟁을 벌이는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나중에 역사가 알아줄 것이다. 1천 년 전의 역사 5백 년 전의 역사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과연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얼마만큼 행복할까요? 얼마만큼 자기 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저 나 먹고 살기 위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 육 건사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 내 자리 지키기 위해 발발발 떨면서 비겁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근데 여기서 비겁한 삶이란 내가 지금 이 자리를 떠나면 내 식구들은 어떡합니까? 내 자식들은 어떡합니까? 이런 볼멘소리해요. 인간은 저마다 삶을 뒤돌아보면 그만한 삶의 무게와 이유와 원인을 가지고 산다라는 얘기에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서 일들을 당면한 삶들을 살아가야 하느냐? 왜 그 자리에서 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느냐? 그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무엇이 정일까요? 여야. 이념 논쟁으로 할까요? 무엇이 정일까요? 무엇이 치우친 사일까요? 진정한 용기는 무엇일까요? 양심이 무엇이냐는 얘기예요. 내 편으로 들어오면 양심 있는 이들이라고 그럴 것이고, 내 편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양심이 없다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안 좋은 사적인 일들을 벌려 놓고 한결같이 한다는 소리가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 알 것이다. 역사가 흐르면 알 것이다.
    육생의 물질 문명은 컴퓨터가 AI로 바뀌는 데까지 인간의 육생량에 대한 걱정 없는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매일같이 육생량에 대한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만큼 쏠림이 양극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어디에서 있나? 정신 문화다. 그만큼 받쳐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이라는 얘기에요.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나의 업은 내가 사해야 하는 것이고, 너의 업은 네가 사해야 하는 것이다. 치우친 사행을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바른 정행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치우친 사행을 하는 이들이 없다라면 바른 정행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없다라는 것이죠. 우리의 중심을 중앙에 놓고 보자는 얘기에요. 왼쪽과 오른쪽, 왼발과 오른발. 저마다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주어졌고, 그 역할을 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치우친 이들이 있기 때문에 치우쳐 살아가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치우친 편에 선 이들은 그게 치우쳤는지 안 치우쳤는지 그들은 모릅니다. 그게 그 편에 들어가면 그게 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또 그렇게 치우쳤다라고 생각하는 이들 편에 선 이들은 그게 치우쳤기 때문에 우리는 옳은 정의가 또 옳은 정의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행위를 하는데 과연 그들이 그렇게 해대는 행위가 과연 옳은 정의의 행위인가를 또 뒤돌아봐야 한다는 것이죠.
    저마다 자기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어진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이죠. 내 앞에 인연 나 하기 나름이라고 했어요. 어떤 이들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소리가 있어요.
    양심이란 뭐라고 그랬어요? 밝은 陽자의 양심도 돼요. 음심과 양심. ‘음심은 나쁘고 양심은 좋다’이것은 순수 인간 논리에 따른 개념입니다. 음심이 왜 나쁩니까? 음심이 있기에 양심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음심이 나쁜 것입니까? 도와달라 찾아온 너를 도와주지 않는 게 나쁜 겁니까? 도와줄 수 없는 입장이 돼서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고, 그대는 ….
    음심과 양심. 양심 가진 그대는 정의를 알고 있을까요? 음심을 가진 그대는 사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이에요. 내 앞에 인연 나 하기 나름이라고 그랬습니다. 누가 운용주체이고, 누가 활동주체인가? 아쉬워 찾아가는 이가 누구이고, 이로워 맞이하는 자는 누구인가? 왜 대자연은 너한테는 많이 주고 나한테는 적게 줬느냐? 그러한 이들끼리 만나 살아가는데 누구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냐? 누구 하기 나름이겠어요?
    정의가 뭐예요? 용기가 뭐예요? 자기 양심이라는 거. 양심은 제가 가르쳤죠. 생각과 마음. 생각은 나를 위해 내가 하는 것이고, 마음은 너를 위해 내가 쓰는 것이에요. 생각 넘어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쓸 수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1단계, 1단계를 넘어설 때 2단계의 마음에 들어서는 것이지. 생각 없이 너를 위한 2단계를 살아갈 수 없는 것이에요. 여기에는 숱한 함정이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좀 더 나은 길을 위해 오늘날에 이러한 모순이 빚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잘못이 나타나는 것이빈다. 잘못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너는 내 눈에 나는 짓 했다고 내가 너를 미워만 해야 할까요? 그러다가 내 눈에 난 이가 어느 날인가 나한테 호의적으로 다가왔다. 어떡할 것인가? 그래서 인간은 간사한 거야. 그래서 인간은 인간관계가 지긋지긋하게 힘들다고 하는 것이지.
    왜 지긋지긋한 인간관계가 있는데 왜 인간은 인간관계를 이루어 나가지 못하는 삶을 살지 못할까? 저마다 자기 욕심으로 내 앞에 인연을 맞이하기 때문인 것이죠. 자기 정당, 자기 도파, 자기 종교, 자기 신앙, 자기 믿음, 자기 논리. 순 자기 것 밖에 없다는 말이죠. 이 생각 차원을 넘어 너를 위한 차원으로써 세상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이는 깨우친 현자들이나 가능하다 얘기를 하겠지만 이제는 육생살이 육생의 모순이 훤히 다 드러났어요.
    뭐든지 드러난다는 것은? 거기에 대한 잘못된 사항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잘못을 알지 못하면 삶은 더 나아질 수 없는 것이죠. 더 나아질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너는 거기서 그 역할을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를 통해 나아갈 길을 밝혀낼 수 있는 그 지혜로운 자가 누구인가? 이러한 가르침을 누가 가르쳐줘서 한 발 앞으로 더 나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을까? 저마다 나 하기 나름에 따라 내 옆에 인연은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어뜯으면 뜯을수록 서로가 더 물어뜯으려고 할 것이에요.
    수행이란? 나의 이성적, 이상적인 나의 감정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푹푹 튀어나와서 앞에 있는 인연 가슴만 헤집어 놓으면 되는데, 인간은 꼭 자기 근기가 넘어가면 꼭 헤집어 놔. 그래서 너를 적으로 만들어 놓걸랑. 그 이가 진정 깨우친 현자라면 그러한 그대의 입장을 알고서 그냥 넘어가잖아.
    같은 입장이라면 내 가슴속에 네가 해 왔던 행위를 알고 있어. 그래서 그대는 발전하지 못하는 거야. 왜 헤집어 놓느냐는 얘기지. 왜 적을 만들어 놓느냐는 얘기지. 그대는 나 하기 나름에 따라 행위를 그렇게 거기에서 해댈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무엇을 배워 나의 삶을 바꾸어 나갈 것인가? 이것이 제가 가르치는 공부고, 선순환을 일으키기 위한 기초적인 공부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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