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설화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삼국유사 전부를 허구라 폄훼하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 일부 설화적 부분이 있다고해서 전부를 허구라 봐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문화의 흐름과 군사력의 강약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문화적으로 미개했던 영국과 바이킹들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역사나, 몽골이나 만주족이 중국을 점령한 역사만 봐도 문화의 강약과 군사력의 강약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중국과 같이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가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왕족을 조선인의 조상인 잔인한 신라가 모두 죽였기 때문에 백제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 고구려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도 거기에 살던 농민과 노예는 살아남았다. 한국인은 백제의 노예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 영산강 지역 경주지역 여러등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쌍원분이 발견 되고 있죠 고구려 초기 쌍원분 형태는 많이 등장 하는데 우리 멍청한 학자들은 일본이 조작한 전방 후원부를 놓고 저울질 하니 뭐가 뭔지 몰라서 저런 주장을 하는겁니다 오사카에있는 일왕의 무덤은 일본 막부가 거치면서 거대하게 조작 해온것입니다 일본인이 쓴 사진 자료와 글이 증거로 있어요
백제의 충청권 세력에 밀려 지금 전남 해안가로 후퇴한 혹은 채 흡수되지 않고 잔존한 마한계 세력이 생존하기 위해서 규슈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묘제 또한 마한의 옛 주구묘제와 맞닿은 부분이 있어서 도입한 것이 아닐까요? 전남 해안 지방은 한 중 일 해상무역의 중계지로 적합하죠. 장고분 출토 유물들도 그런 점을 뒷받침해주고 그 장점을 바탕으로 쌓은 부를 이용해 백제에 끝까지 저항했지 않았을까요? 백제는 자신들이 중일 교역의 중계지가 되길 원했고 일본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자 편지를 갈취하기까지 했죠. 그래서 백제-야마토 / 마한-규슈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고 대립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광개토왕비'에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고 쓰여 있다. 일본 고유의 전방 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제11대 서인천황의 시대, 대가라국의 왕자도 노가 아라사 등이 내 아침해, 귀국시에 선대 숭신 천황의 諱의 일부 「미마나」( 임나, 야마나, 료마나)를 국명으로 하도록 사상했다는 설명이 있다.
백제가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왕족을 조선인의 조상인 잔인한 신라가 모두 죽였기 때문에 백제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 고구려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도 거기에 살던 농민과 노예는 살아남았다. 한국인은 백제의 노예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다.
공감합니다 말갈의 정체(한,러 고고학 탐사) 말갈은 한민족 건국사의 당당한 한축이며 한민족 문화사! 말갈은 한강 상류의 토착민 삼국사기' 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기타] 말갈은 한강상류 토착민 (학술논문) 한강유역에 나타나도 북방유목민이 공간이동을 해서 온겁니다. 아래는 원래 말갈의 근거지가 임진강과 한강상류였다는 연구발표입니다. 말갈은 한강상류강변에서 적석총까지 만든 정착민이었습니다. 말갈은 한강유역상류지역에 살던 정착민이지 유목민이 아닙니다. 이 한강상류사람들이 북상하여 함경도지역에 정착한 후에 신라왕족-발해왕비족과 함께 금나라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정복했으므로 한국사입니다. 고대 동북아의 종족과 문화' 학술회의 (서울=연합뉴스) ...고구려발해학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주최로 7일 부산 경성대에서 열리는 '고대 동북아의 종족과 문화' 학술회의는 이례적으로 말갈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발표자 중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4일 미리 배포한 자료를 통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은 임진강ㆍ한강 상류와 신라 북쪽에서 출몰하며 백제ㆍ신라와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며 "말갈로 불린 이들은 임진강과 한강 상류의 강변을 생활 근거지로 삼아 적석총을 조영한 집단"이라고 '삼국사기' 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광개토왕비'에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고 쓰여 있다. 일본 고유의 전방 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제11대 서인천황의 시대, 대가라국의 왕자도 노가 아라사 등이 내 아침해, 귀국시에 선대 숭신 천황의 諱의 일부 「미마나」( 임나, 야마나, 료마나)를 국명으로 하도록 사상했다는 설명이 있다.
@@hiroono1 일본 학자들은 광대토대왕 비문을 "왜가 신묘년에 백제 백성을 신민으로 삼았다"와 같이 임의적으로 해석했고 이노우에 키요시는 광개토대왕비문 중 일부를 일본이 위조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일본으로 광대토대왕비문 탁본을 가져간 일본군 장교 사카와 가게노부 중위가 비밀 공작업무를 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알려졌다. 그는 비석에 석회를 두껍게 바르고 작업을 한 다음에 종이에 문자를 따라 그리는 쌍구가묵본으로 탁본을 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의 탁본인 쌍구가묵본 원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버전이라고 해야 맞다. (쌍가구묵본 : 비석의 표면에 종이를 댄 후 먹이나 연필로 글자 윤곽선을 그리고 여백에 먹을 채워 넣는 기법) 한편 도쿄대 다께다 유끼오교수는 사카와의 탁본을 탁본에 종이를 대고 그린 묵수곽전본으로 보았다. 도교 명치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이진희는 일본 총참모부가 실제로 석회를 바르고 비문을 위조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중요한 위조 문제에 대해 극도로 침묵하고 있다. 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46
백제의 22담로 중 유력했던 담로 중 오사카,나라 지역의 야마토 (히마토;일본;왜=홰=해=히)가 좌현왕국이고, 큐슈의 세력이 우현왕(국)이 된 것이죠. 서열상 좌현왕으로 있던 왕족이 본국 왕좌의 계승 서열 1위가 되는 것이죠,그래서 고대 249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비류백제계가 가야세력을 접수하고, 이후 어느 시점부터(한성 백제가 망하고 곤지가 일본에 파견되어 좌현왕 교지를 받음)인가 온조백제의 왕자가 '오사카-나라' 지역에 담로 지배자로 파견 되었던 것으로 유추해 봅니다~~
@@서은열-b8v 백제가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왕족을 조선인의 조상인 잔인한 신라가 모두 죽였기 때문에 백제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 고구려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도 거기에 살던 농민과 노예는 살아남았다. 한국인은 백제의 노예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다.
임나가 아닌 일본규슈세력 입니다 영산강지역은 백제700년중 마지막 100 년 동안 만 백제에 귀속됩니다 독자세력이고 한반도 왜 라고 보시면됩니다 왜 라고 해서 일본혼슈가 아닌 영산강에서 시작 규슈로 번진후 규슈세력이 야마토에 정복당한후 그 문화가 다시 동일 문화권인 영산강으로 영향을 준것 입니다 삼국지 동이전 '왜는 백제와 접 해 있다`
부여계 논농사 선주민과 철기문화를 가지고 왔던 김일제 세력이 스쳐가듯 낙동강 수계로 옮겨갔고, 함께 왔던 오씨 세력이 남음. 이후 철기 기마세력인 백제계가 지배세력으로 '담로'로 지배하다가 직접통치 지역화 된 것으로 봅니다. 물론 부여계 쌀농사 세력의 일부가 북큐슈로 건너가 일본의 쌀농사가 시작된 것이죠. '요시노가리'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리(갈이)의 시작'이 되었던 곳이란 말이죠.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백제보다는 가야인들의 무덤이라는게 맞을듯 전방후원분 발굴은 일본학자들도 금지되었지만 주변에 가야 갑옷, 동경이 대량 발견됨 . 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미국박물관에 있는것도 가야유물 . 그리고 전방후원분 이전 형태의 일본무덤들도 발굴된거 보면 죄다 가야투구, 동경....
'광개토왕비'에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고 쓰여 있다. 일본 고유의 전방 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제11대 서인천황의 시대, 대가라국의 왕자도 노가 아라사 등이 내 아침해, 귀국시에 선대 숭신 천황의 諱의 일부 「미마나」( 임나, 야마나, 료마나)를 국명으로 하도록 사상했다는 설명이 있다.
MAGAN 문화는 큰 호수, 높은 산, 태양을 함께 표시하는 것을 통해 죽어서라도 조상의 땅인 AN, 하늘에 닿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를 표현한 무덤 양식이 전방후원분 입니다. 이에 대해 이해하려면, AN - MAGAN - 마한 - 야마토로 이어진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임나는요 일본서기에서 밝힌대로 대마도를 말하는거구요 일본이라는 명칭은 국호가 아니라 해가뜨는 방향의 땅을 가리키는 지명이라는 것이 예군묘지명으로 밝혀졌지요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쪽에 있던 것이 아니라 대마도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임나일본부가 후일 일본 건국세력의 주체가 되고 그래서 현재의 국호인 일본도 임나의 일본부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본부의 모국이라고 할 수 있는 임나 즉 대마도가 신라에게 점령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이 임나와 일본부들의 큰 형님노릇을 하던 백제의 성왕을 중심으로 임나부흥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성왕은 목숨마저 잃게 됩니다 이렇게 임나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 때의 유민들을 백제의 남부 지역에 살게 해준게 아닌가 싶어요 현재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유적들은 그 흔적들이라고 보이고 그래서 탄소연대측정결과가 530년 근처가 나오는 것입니다
전방후원분이 일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압록강변에서 발견되는 적석전방후원분이 원조이고, 이것이 임진강변에서 적석 형태로 또 발견됩니다. 그리고 하남시에서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 수십 기가 또 발견되지만 지금 하남신도시3기 건설하면서 죄다 파괴되었다네요. 하남 전방후원분은 적석과 흙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서 적석에서 흙으로 진행되는 가교 유적으로 더욱 중요하답니다. 이것이 전라도에서 흙전방후원분으로 굳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인덕왕릉이 되고 전방후원분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ruclips.net/video/Douc0y7dlvA/видео.html
고분 주변에 해자를 구축하는것은 대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방후원분 자체는 일본이 원조인것이 맞습니다 전벙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을 후원까지 연결하는 구조는 독자적입니다 그리고 하남의 전벙후원분 추정은 이미 자연 동산으로 20년전에 확인 되었습니다 고대시대에 무조건 한반도가 우위에 있었다는것은 국뽕과 고정관념이라고 봅니다
@@mikeyw7415 일본의 주장을 그동안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마이키님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증거로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프레임을 덮어 씌워서 고대사에 국민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는 강단역사학참칭개소리소설학자들의 꼼수에 더이상 걸려들면 안됩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DavidLee-e2q열도가 백제의 부용국인데 여기서 기원할 게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열도는 가야계→백제계→고구려와 백제의 남북 대치(광개토태왕의 열도 정벌 사건)→이후 백제가 장악합니다. 이때부터 백제는 열도 총독인 관료 왜왕을 파견합니다. 왜왕 임기는 초기 3년에서 후기 7년으로 변동됩니다. 열도는 백제 패망(CE 660)까지 독립 고대국가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CE 660년까지 왕성과 도성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인 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백제 패망 후 신라가 지원하는 신라계 왕조가 들어서면서 최초의 독립 고대국가를 세웁니다.
영산강 지역은 마한의 정치 집단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마한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그 이전 신화로 내려오던 MAGAN 문화의 계승 움직임이 전방후원분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주지가 축소된 마한 세력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천왕가를 형성하면서 일본에 전방후원분이 등장하고 번성한 것입니다. 고인골 DNA 분석, 체형과 문화 유물, 시기 등이 이를 입증합니다.
4세기 말 5세기 초의 삼국관계, 왜의 실체 백제가 371년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고구려와 백제는 심각하게 대립한다. 373년 백제 독산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가 이들을 돌려 보내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77년에 고구려(삼국사기)와 신라(자치통감)는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중에서 더 강한 고구려와 동맹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81년 부견은 신라 사신에게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와 대립한 것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391년에는 고구려가 실성을 볼모로 삼았고, 서봉총 은합에서 보이듯이 391년 고구려의 제사에 신라 사신이 참석하며, 397년 충주 고구려비에서 보이듯이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며 신라왕을 이리저리 오라 할 정도로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백제는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듯이 391년부터 열도인들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다. 397년에는 열도에서의 동원을 강화하고자 태자인 전지를 왜왕으로 파견했다. 광개토대왕은 韓, 요동반도, 한반도에서 백제를 계속 공격하여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백제는 이에 대응하고자 동원을 강화하였다. 그러자 399년 백제의 주민인 전라도왜가 못살겠다고 대규모로 신라로 도망갔다. 전라도왜의 도주는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 북사에 공통으로 기술되어 있다. 400년 백제가 열도인들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대왕은 열도를 정벌하여 열도에 고구려 백제의 남북국시대가 도래하였다. 전쟁포로인 전라도왜는 신라의 소유였지만 광개토대왕이 403년 열도 고구려로 보내자,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고자 한다. 이 때 나라로 보내진 전라도왜가 사기꾼들이 야마토왜라고 거짓말하는 왜이다. 이들은 독자적 세력이 아니고 전쟁포로로 나라의 고구려계 국가인 안라국에 보내진 피지배민이다. 이들을 야마토라 부르지도 않았다. 사기꾼들이 삼국지에 나오는 가야계의 야마대국과 연결시키기 위해 야마토왜라고 사기치고 있다. 왜는 예이다. 왜는 배달국 성립시 바닷가 강어귀로 도망친 집단이다. 전라남도에도 영산강을 중심으로 왜가 정착하였고 이들은 백제의 주민이었다. 사기꾼들이 왜계 유물인 대형옹관묘를 마한의 것이라 사기치고 있다. 백제는 황하 요동반도 양자강 등 강어귀의 왜를 지배하며 환황해 무역을 하였다. 백제의 진평군인 광서성에서 전라도에서와 같은 외다리방아와 맷돌이 사용되고 있다. 왜는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다. 일본이라는 것이 백제가 망하기 전에는 없다. 일본은 백제의 별칭이었다. 왜=일본인≠한국인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식민사학이다. 한국에서 독립되었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거짓말이다. 열도는 7세기까지는 우리 역사강역이다. 일제와 조선총독부도 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절의 오나라 그리고 월나라가 연달아 패망하고 한반도남부와 서일본에 대량으로 도망가고 거기서 진국이 생기고 삼한이 생기고 왜가 정식으로 열도에 등장함 그리고 기원 3세기 즉 중국 후한 삼국지시대에 공교롭게도 고훈시대가 열리는데 그때도 상당수의 중국과 한반도인들이 일본에 도망감 일본복장 고후쿠가 바로 吴服임 그리고 분자인류학적으로도 중국동남부 양자강지역의 o1b1이 바로 한국 일본의 O1b2와 되게 가까운 친형제임 ㅋㅋ 고대 왜인들은 문신하고 전방후군 묘지를 사용하고 벼농사지었는데 바로 중국 강소남부 절강북부지역에 그유물들이 발굴됨
차이나 단주지역 왜 임나(任那) 위치는 가라가 중국 사서에서 최초이고 유일하게 항목으로 기록된 것이 남제서(南齊書)인데 한의 일부라 하였으니 "韓"의 위치에 의하여 가라의 위치가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삼국지 후한서 동이(東夷)에서 "韓"은 북평, 태원의 고구려와 남월, 주애, 회계동야현, 이주, 단주의 왜 사이에 있었으니 한의 일부였던 가라의 위치 또한 그 사이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가라가 있는 곳에 임나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韓)의 일부였던 가라(加羅)의 위치는 북평(北平)과 주애(朱崖) 사이에 있어야 한다. 한(韓)이 고구려의 북평(北平 : 阜平) 어양, 상곡, 태원(漁陽 上谷 太原)과 왜의 남월, 주애, 이주, 단주, 회계, 태(南越 朱崖 夷洲 洲 會稽 台)의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가라(加羅)도 한(韓)의 일종이니 당연히 그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 고지도 에는 남부지역에[扶餘]부여섬이 있고, 다음에 조그만 일본日本섬있다,왜노倭奴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夫餘]북만주지역에 있는 부여夫餘 [扶餘]부여,남부지역에 있는 부여 달리 표기되어 있다 모인毛人 일본어로 아이누인을 蝦夷(하이) 또는 毛人(모인)이라 써놓고 에비스(衣 比 須 ,エ ビ ス)라 읽는데, 이것은 아이누어로 ‘남자’를 뜻한다고 한다 모인(毛人)과 하이(蝦夷) 지금의 일본은 왜노倭奴와 모인毛人이 원주민 것이다 (창국昌國 은 대만) 옆에는 류구琉球(오키나와) 중국 고지도에서 보듯히 일본日本은 원래 조그만 섬에서 부터 시작된 이름 왜노倭奴와 모인毛人이 원주민 살고 있던곳을 점령 [양직공도] 양직공도에 나오는 나라들 백제에 부속된 나라로 반파(叛波) 이하 9개국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주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실려 있다. 일본 사학계의 초기 논리의 문제점은 임나일본부를 왜왕권의 외교기관이나 가야 제국을 통제·지배한 기관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서기』의 기록도 모순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 킨메이(欽明) 2년, 5년조의 이른바 '임나 부흥 회의'를 보면, 백제왕이 '제왜신'과 가야 제국의 사자·대표를 소집하여 남가라·금관가야의 부흥책에 관해 협의하고 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① 백제왕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점, ② '제왜신'이 왜왕권의 외교권을 체현(體現)하고 있지 않은 점 삼국사기의 가야(伽耶)와 일본서기가 말하는 가라加羅 는 분명 다른 지명 입니다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를 잘못 해석하려는 무지, 망각. 왜곡.있었습니다 임나(任那)지역 어느지명을 의미하는가,(那)한자 나짜를 주목해야 ................... 현재는,동중국해.남중국해 칭하지만 1970년대 까지도 박정희 대통령 월남 패망과 관련 특별담화 에서도 인도지나 반도 印度支那 半島 라는 용어를 흔히 언급 했었죠. Indo-China [한] 印度支那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를 차지한 옛 프랑스령 연방 아시아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인도지나 반도에는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 등.. 동남아 국가나 지역을 지칭하는 지역 입니다 . [支那]지나. 중국의 옛일컬음. (支那)지명이나 범어 [산스크리트어 Sanskrit, 梵語]
큐슈 가라(加羅)는 경남 김해에만 있었던게 아니라 큐슈 북부에도 있었던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마츠라(松浦)와 가라츠(唐津)는 바로 옆에 붙어있다. 먼 곳 사람들이 임나(=마츠라)와 가라(=가라츠)를 혼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가라] 역시 [가라토]라고도 했다. 그리고 [가라토]를 “加羅都(가라도)”라고 음차하여 적었다. 한자 都를 일본에서는 “츠(つ)”라고 읽는다. 加羅都 를 “가라츠”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가라츠]를 “唐津(당진)”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일본어로 唐을 ‘가라(から)’라 하고, 津을 ‘츠(つ)’라고 한다. 현재 큐슈의 북쪽에 있는 “가라츠(唐津)”가 바로 그것이다. 북큐슈 "히코산을 비롯한 일본 북규슈의 여러 산에서 백산신白山神을 모 시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 산악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의 산악신앙이란 단군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나가노 교수, 벳부대학 문학부 북부 큐슈에 단군신화가 들어온 것은 5~6세기 때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5세기 한국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왔습니다. 북큐슈 히코산 신궁에 문수보살암 환웅의 초상과 비천상(飛天像)있다 고대 큐슈에는 7세기 말까지 야마토 정권과는 독립적인 왕권이 있었다고하는 설 ( 규슈 왕조 설 )도있다.(가야세력 또는 신라세력 존재) 일본인 자료 발췌 축자국筑紫國의 국조 반정磐井은 원래 가야 (출신 백제왕조 실록 중에서) 반정磐井의 아들 치쿠시군갈자筑紫君葛子 "백제 삼근왕이 사망해 동성왕이 귀국했는데 치쿠시코쿠(筑紫國ㆍ북부 규슈계) 군사 500인이 호위했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243년조의 기록이다. 또한 고대 큐슈에는 7 세기 말까지 야마토 정권과는 독립적인 왕권이 있었다고 하는 설 ( 규슈왕설 )도있다.(가야세력 또는 신라세력 존재) 치쿠시군반정筑紫君磐井 筑紫(九州地方北部)큐슈의왕 야마토국 치쿠시 왕조 倭国筑紫王朝 야마토의 무왕倭の武王 반정의 난磐井の乱 큐슈는 한반도계 (이와이)가 지배했던 영토 입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치쿠시군갈자는"아버지 (이와이)의 죄에 연좌해 처벌을 두려워하고 糟屋의 屯 곳간을 헌상하고 사형을 면할 것을 애원했다"라고 적고 있다 , 이와이는 이 시기에 적어도 큐슈의 북쪽 절반을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서기"는 적고 있다. 축자국 각라도 임나큐슈任那九州의 축자국筑紫國 북큐슈 축자 각라도筑紫 各羅嶋 축자의 각라도(가카라시마 섬) 가카라섬 Kakara-shima, 加唐島(가당도) 옛날부터 한반도와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백제 무령왕이 탄생한 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섬 남서부에 위치한 오야비 포구에 있는 동굴 안에는 '무령왕생탄 전승(傳承)의 땅'이라고 새겨진 비(碑)가 세워져 있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과 일본 규슈는 사실상 동일한 한반도의 왜 세력이라고 보면 되고 처음에는 영산강 지역세력이 주류를 이루다가 규슈가 일본 본토의 야마토세력에 벙합되면서 역으로 영산강 지역까지 아먀토 형식의 분묘형태가 들어 온것 임나일본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기도 그래요 임나가 과거 가야지역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면 임나 일본부설이 힘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팩트과 증거로 봐야지 어떻게 일본이 한반도에 오래전에 왔었나 그건 말이 않된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가가 아닌 정치인 이죠
일본에 인덕일왕 묘 라고 알려져 있는 최대 규모의 열쇠구멍 모양 고분이 있단다. 전방후원분 무덤 양식이지. 근데 몇십년전에 비가 많이 와서 고분 한쪽이 무너졌는데 그곳에서 백제계 유물이 쏟아져 나왔단다. 그리고 고분을 관리하는 일본 궁내청은 일반인은 커녕 고고학자, 일왕족들도 고분에 못들어가게 막고 있고. 왜 발굴 조사도 못하게 하고 일왕족 마저 지네 조상 묘에 못들어 가게 막을까?
임나일본부설은 그 뿌리인 일본의 기록 자체가 허구에 가깝습니다 문화가 전해지는 건 대륙--->섬으로 이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입니다
삼국유사에 설화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삼국유사 전부를 허구라 폄훼하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 일부 설화적 부분이 있다고해서 전부를 허구라 봐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문화의 흐름과 군사력의 강약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문화적으로 미개했던 영국과 바이킹들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역사나, 몽골이나 만주족이 중국을 점령한 역사만 봐도 문화의 강약과 군사력의 강약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중국과 같이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뭔 말도 말도 안되는 소리
그건 맞지
마사토 세력의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 장고분의 유물을 공개를 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중국 일본 한국측 기록이 모두 신라 백제가 왜에 복속했다고 되어있는데도 이런 선입관을 사진에 웃긴다
임나일 본부설...이 아니고
임나 일본부 설....이라고 발음을 해야지... 너무하네
국가유산이 아니라고 생각하나봅니다...
지금 이거 ktx에서 계속 주기적으로 틀어주고있음.
외국인들 보라고...
괴롭네요 우린 언제까지 이런 거짓된 내용을 배우는걸 넘어서 내부에서 거짓된 내용을 전파하는 인간들이 공공연하게 퍼트리는 허황으로부터 벗어날수있을까요
양식에서 보면 일본의 고분이며 일본인의 무덤이다. 한반도 남방에 일본인의 지배자가 있던 명확한 증거이다. 한편 일본에 있는 조선인의 무덤은 닭장과 같은 작은 사당이다. 이에 따라 일본이 임나와 백제를 직할지 혹은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실은 명확하다.
오죽하면 일본왕이 무령왕릉에 가보고싶다고 했겠냐… 자신의 역대 조상왕들의 고향땅에 가보고 싶다고 말을 해도 말귀를 이해 못하니….ㅉㅉ..
일본의 선조가 조선인인걸 왜 모를까요
그건 다른개념임. 일본 천왕가의 어미니쪽에 무령왕쪽과 혈연 연관이 있음. 일본 천왕가 모계가 백제왕계임. 사실 외척으로 고대 일본의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기간도 있음
무령왕과 계체천황이 원래 막역했던 사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제가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왕족을 조선인의 조상인 잔인한 신라가 모두 죽였기 때문에 백제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 고구려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도 거기에 살던 농민과 노예는 살아남았다. 한국인은 백제의 노예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다.
오사카에 저러모양 고분이 있지요...
한반도 영산강 지역
경주지역
여러등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쌍원분이 발견 되고 있죠
고구려 초기 쌍원분 형태는 많이
등장 하는데 우리 멍청한 학자들은 일본이 조작한 전방 후원부를 놓고 저울질 하니 뭐가 뭔지 몰라서
저런 주장을 하는겁니다
오사카에있는
일왕의 무덤은 일본 막부가 거치면서 거대하게 조작 해온것입니다
일본인이 쓴 사진 자료와 글이 증거로 있어요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니 민감한 것 서로 가까운 거리 이쪽 사람이 저쪽으로 넘어가고 저쪽 사람들이 이쪽으로 넘어와 흔적을 남기는 건 당연한 건데 이걸 정치적으로 봐 버리니 ㅉ
하남교산택지지구에 전방후원분하고 비슷한형태가 있는데 택지개발하면 유물이라도 나오면 진짜 역사를 바꿀 대박이 나올텐데 기대대는군
아파트로 다 밀어버렸죠...
묘라는 것은 음양의 이치를 기본으로 한 망자의 집이다
음과 양은 둥근 태양과 둥근 지구의 자전과 공전 축으로 동기를 유발 선대의 유골과
동기감응 즉 천지 기운을 득하기 위한 구조물이기에 지구를 반 자른 것처럼 둥글게 지어야만 효과를 본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려는 입장으로 일에 임하고있다는것자체가 싫다 뭐든지 가능성을 열어보고 하는거지
미리 답을 정해놓는거부터가 왜곡을 하려는것으로뿐이 안보인다. 신뢰가 가질 않는다. 강력한 증거가 나와도 숨길것같은 강력한 의심이 든다
임나일본부라기보다는 전남지방의 세력들 삼한 혹은 그 이전의 세력 중에서 일부 경쟁에서 밀렸거나
떠날 이유를 가진 자들이 일본 섬으로 건너가서
기존에 살고 있던 일본인과 융화되거나 문화를 전파하는 식으로 건너간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래 BC1만년부터 BC5천년까지 한반도에 사람은 살지 않았다. 그 후 북쪽에서 여진족 등이 남쪽에서 조몬인이 도래해 혼혈한 결과가 조선인이다.
@@hiroono1 한반도에 구석기 유물이 나오는데요?최소 30만년 전부터 유물이 나옵니다.
@@chordzin 30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는 없다. 그것은 원숭이의 유물이다. 한국인의 날조는 분명하다.
@@hiroono1 절레절레
@@chordzin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배우십시오. 아니면 조선인은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말하는가?
나레이터 발음뭐냐 임나일 본부설 ?
백제의 충청권 세력에 밀려 지금 전남 해안가로 후퇴한 혹은 채 흡수되지 않고 잔존한 마한계 세력이 생존하기 위해서 규슈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묘제 또한 마한의 옛 주구묘제와 맞닿은 부분이 있어서 도입한 것이 아닐까요? 전남 해안 지방은 한 중 일 해상무역의 중계지로 적합하죠. 장고분 출토 유물들도 그런 점을 뒷받침해주고 그 장점을 바탕으로 쌓은 부를 이용해 백제에 끝까지 저항했지 않았을까요? 백제는 자신들이 중일 교역의 중계지가 되길 원했고 일본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자 편지를 갈취하기까지 했죠. 그래서 백제-야마토 / 마한-규슈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고 대립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광개토왕비'에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고 쓰여 있다. 일본 고유의 전방 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제11대 서인천황의 시대, 대가라국의 왕자도 노가 아라사 등이 내 아침해, 귀국시에 선대 숭신 천황의 諱의 일부 「미마나」( 임나, 야마나, 료마나)를 국명으로 하도록 사상했다는 설명이 있다.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 열도의 백제죠. 대륙백제가 본거지이고 나머지는 담로
옛 경상도 어르신은 전라도는 죽어도 안된다 하셨던걸로보아 종족이 오랑캐임이 분명하다
백제가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왕족을 조선인의 조상인 잔인한 신라가 모두 죽였기 때문에 백제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 고구려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도 거기에 살던 농민과 노예는 살아남았다. 한국인은 백제의 노예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다.
마한은 우리말 말갈 중국 고대문헌에 최초의 왜는 열도가 아니고 지금의 영상강 유역으로 나옵니다 고구려의 세력들이 한강으로 내려오면서 한강에 있던 마한 세력들이 지금의 영산 강 유역으로 내려오면서 왜가 얼도로 가게 됐을것으로 추정
영산강유역으로 나오는 근거는요?
공감합니다
말갈의 정체(한,러 고고학 탐사)
말갈은 한민족 건국사의 당당한 한축이며 한민족 문화사!
말갈은 한강 상류의 토착민
삼국사기' 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기타] 말갈은 한강상류 토착민 (학술논문)
한강유역에 나타나도 북방유목민이 공간이동을 해서 온겁니다.
아래는 원래 말갈의 근거지가 임진강과 한강상류였다는 연구발표입니다. 말갈은 한강상류강변에서 적석총까지 만든 정착민이었습니다. 말갈은 한강유역상류지역에 살던 정착민이지 유목민이 아닙니다.
이 한강상류사람들이 북상하여 함경도지역에 정착한 후에 신라왕족-발해왕비족과 함께 금나라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정복했으므로 한국사입니다.
고대 동북아의 종족과 문화' 학술회의
(서울=연합뉴스) ...고구려발해학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주최로 7일 부산 경성대에서 열리는 '고대 동북아의 종족과 문화' 학술회의는 이례적으로 말갈만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발표자 중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4일 미리 배포한 자료를 통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은 임진강ㆍ한강 상류와 신라 북쪽에서 출몰하며 백제ㆍ신라와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며 "말갈로 불린 이들은 임진강과 한강 상류의 강변을 생활 근거지로 삼아 적석총을 조영한 집단"이라고 '삼국사기' 본기에 나오는 말갈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일본왕실은 가야-> 백제계로 이동했다보면됨 참고로 히로히토 죽었을때 일본 궁내청에서 한국정부에 백제 장례절차 문의함
'광개토왕비'에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고 쓰여 있다. 일본 고유의 전방 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제11대 서인천황의 시대, 대가라국의 왕자도 노가 아라사 등이 내 아침해, 귀국시에 선대 숭신 천황의 諱의 일부 「미마나」( 임나, 야마나, 료마나)를 국명으로 하도록 사상했다는 설명이 있다.
@@hiroono1
일본 학자들은 광대토대왕 비문을 "왜가 신묘년에 백제 백성을 신민으로 삼았다"와 같이 임의적으로 해석했고
이노우에 키요시는 광개토대왕비문 중 일부를 일본이 위조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일본으로 광대토대왕비문 탁본을
가져간 일본군 장교 사카와 가게노부 중위가 비밀 공작업무를 했다는 사실이 최근에 알려졌다. 그는 비석에
석회를 두껍게 바르고 작업을 한 다음에 종이에 문자를 따라 그리는 쌍구가묵본으로 탁본을 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그의 탁본인 쌍구가묵본 원문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버전이라고 해야 맞다.
(쌍가구묵본 : 비석의 표면에 종이를 댄 후 먹이나 연필로 글자 윤곽선을 그리고 여백에 먹을 채워 넣는 기법)
한편 도쿄대 다께다 유끼오교수는 사카와의 탁본을 탁본에 종이를 대고 그린 묵수곽전본으로 보았다.
도교 명치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이진희는 일본 총참모부가 실제로 석회를 바르고 비문을 위조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일본의 전문가들은 중요한 위조 문제에 대해 극도로 침묵하고 있다.
www.sejongk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46
열쇠 구멍모양은 서쪽 바다에 해지는 모습과 똑 같아요
왕이 가셨다는 모양 아닐까요
백제가 아니라 백제연합국??? 즉, 지금으로치면 일본일부도 백제하에 있는 지방분권국정도가 아닐까?? 그리하여 백제왕자중 한명이 통치권을 행사하지않았을까?? 그래서 일분에 있던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는 일이 일어나지않았을까???
백제의 22담로 중 유력했던 담로 중 오사카,나라 지역의 야마토 (히마토;일본;왜=홰=해=히)가 좌현왕국이고, 큐슈의 세력이 우현왕(국)이 된 것이죠. 서열상 좌현왕으로 있던 왕족이 본국 왕좌의 계승 서열 1위가 되는 것이죠,그래서 고대 249년? 전후로 한 시기부터 비류백제계가 가야세력을 접수하고, 이후 어느 시점부터(한성 백제가 망하고 곤지가 일본에 파견되어 좌현왕 교지를 받음)인가 온조백제의 왕자가 '오사카-나라' 지역에 담로 지배자로 파견 되었던 것으로 유추해 봅니다~~
@@서은열-b8v 백제가 일본인의 조상의 일부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남은 백제왕족을 조선인의 조상인 잔인한 신라가 모두 죽였기 때문에 백제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같은 것이 고구려도 말할 수 있다. 고구려는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도 거기에 살던 농민과 노예는 살아남았다. 한국인은 백제의 노예의 후손인 것은 확실하다.
한반도에 온 것이 아니라 마한 세력들이 일본에 간 것이겠죠.
최근 발견된 전방후원분의 유물 시기, 인골의 DNA 분석 결과가 증거입니다. 영산강 세력이 우선합니다.
임나가 아닌 일본규슈세력 입니다
영산강지역은 백제700년중 마지막 100 년 동안 만 백제에 귀속됩니다
독자세력이고 한반도 왜 라고 보시면됩니다
왜 라고 해서 일본혼슈가 아닌
영산강에서 시작 규슈로 번진후
규슈세력이 야마토에 정복당한후
그 문화가 다시 동일 문화권인 영산강으로
영향을 준것 입니다
삼국지 동이전 '왜는 백제와 접 해 있다`
전방후원분은 아니지만
나주 아파트형 고분에서 나온 인골의 DNA
조사결과 일본규슈인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월자장-s7n
그 인골이 나주 아파트형 고분에서 나온것 입니다 현대 일본규슈인과 동일한 DNA
나주 아파트형 고분 검색하면 역사저널 KBS나옵니다
현대 전남 해안가 주민과 규슈인 일부에서
동일한 CIS AB형 혈액형 증거도 있습니다
고대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inseokmoon7921국가가 형성되기 전이기때문에 한국인이라는 국적의식은 옳지 않습니다.
1:28 이 할아버지 목소리 존나 젊다 에너지가 있어보인다
임나일본부설 지지하는 역사학자라니 ㅋㅋ 그냥 백제 제후의 무덤양식이다. 일본도 백제의 제후국이니 제후장고분이 나올수밖에...
부여계 이주세력과 백제계 지배세력을 통치한 백제계 왕의 무덤이다
부여계 논농사 선주민과 철기문화를 가지고 왔던 김일제 세력이 스쳐가듯 낙동강 수계로 옮겨갔고, 함께 왔던 오씨 세력이 남음. 이후 철기 기마세력인 백제계가 지배세력으로 '담로'로 지배하다가 직접통치 지역화 된 것으로 봅니다. 물론 부여계 쌀농사 세력의 일부가 북큐슈로 건너가 일본의 쌀농사가 시작된 것이죠. '요시노가리'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리(갈이)의 시작'이 되었던 곳이란 말이죠.
양식에서 보면 일본의 고분이며 일본인의 무덤이다. 한반도 남방에 일본인의 지배자가 있던 명확한 증거이다. 한편 일본에 있는 조선인의 무덤은 닭장과 같은 작은 사당이다. 이에 따라 일본이 임나와 백제를 직할지 혹은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실은 명확하다.
이때만 해도 한반도도 통일 되지 않고 일본도 기마 세력들이 진출 해서 막 나라만들던 시기임.
서로 오고 가고 하는게 당연함.
남들에게 역사를 자랑하기 좋아하는 일본이 천왕도 저 무덤어 못들어가게 한것은 백제의 왕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무녕왕보다 큰 무덤이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이 백제의 부모였던 것 같다.
이쪽에서 넘어간게지 들어온게 아니라~~한심한
thank you there is always so much to learn ! history is passionating !
무덤이 백제보다 많으면. .
문화가 넘어간거지 . .
그럼 백제인이 넘어간거고
오히려 일본에 있는 장고형 무덤어서 백제유물 나온걸로 안다
한자 아닐까요 ..또우 자가 아닌가 봅니다 ..다시 태어 난다는 이런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나 봅니다
Informative news to share!🍀
🤗💞
참고로 지구는 수만년에 헌번씩 지구축이동으로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함 ㅡ소위 지구 리셋설의 근거임
백제에서 내려온 일본 관료는 무슨 소리인가요?
장고분이 있는건 한국에서 ->왜구로 간거임 섬나라는 어딜 갈수가 없음 가야계 백제계가 왜 구로 가서 왕이된거임
열쇠구멍 모양 무덤은 한국에서 일본으로간 사람들의 세력을 뜻하는 것이고 그들이 일부가 한국으로 다시 온것입니다.
그 반대겠지요
가능성 있네,일본 왕족이 백제 후손?일본과 백제가 유독 가깝고..왜가 백제와 연합해 신라 고구려를 치고..
그걸 고구려가 제압하고..
그거 뭐 굳이 핏대 세우며 따질 이유가?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백제보다는 가야인들의 무덤이라는게 맞을듯 전방후원분 발굴은 일본학자들도 금지되었지만 주변에 가야 갑옷, 동경이 대량 발견됨 . 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미국박물관에 있는것도 가야유물 . 그리고 전방후원분 이전 형태의 일본무덤들도 발굴된거 보면 죄다 가야투구, 동경....
'광개토왕비'에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했다고 쓰여 있다. 일본 고유의 전방 후원분이 한반도 남부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제11대 서인천황의 시대, 대가라국의 왕자도 노가 아라사 등이 내 아침해, 귀국시에 선대 숭신 천황의 諱의 일부 「미마나」( 임나, 야마나, 료마나)를 국명으로 하도록 사상했다는 설명이 있다.
1970년대 발견해서, 1991년에 도굴 신고가 들어 왔다면, 저 큰 고분을 발견하고도 방치 했구만! 관리도 못한 나쁜 사람들!
전방후원인겨
오사카 옆
나라현과 와까야마현에
임나와 사군(
1878년 이름 바꿈)이
있었다는 증거를
많은 학자들이
이미 제시 했음에도
계속 쎄우는 이유는
뭘까?
가야가 선진국으로 일본을 정복해 개척한 거다 영산강세력도 마찬가지로 여기세력이 일본으로 진출한 거다
선진문화는 대륙에서 섬으로 전파되는 것이 바른 흐름이다
영산강 유역은 아메리카 신대륙이였음. 백제 신라 영향력이 미치지 못 했고 지방 호족들이 다스리던. 가야 왜도 섞여 살고.
야마토를 세운게 백제계인데 당연히 백제로 못가지ㅋㅋ
영산강 유역에 망명이던 백제 일본인 관리던 일본출장소 이던 일본인이 잠시 산건 사실이네
일왕이 백제계라고 하고 백제 왕이 일본에서 태어났다하고
신라 지배계층이 북방 기마민족이라 하고...
다 그런거 아님?중한일은 한자 쓰는디..그랬구나 하고
나레이터가 엄청 무식하군요. 작품을 망치고 있네요.
임나일 본부설이라고 읽다니. 사람이름인줄 알고 있는 것 아닐까싶습니다.
성은 임이요 이름은 나일 임나일
참고로 일본왕실에서 모시는 게히신궁의 주신은 신라왕자 천일창임..그리고 그 후손이 임나일본부설로 유명한 신공황후
말이 안되는데 일본과 신라는 철천지원수로 삼국유사 사기는 물ㅈ론 일본서기서도 큰적이자 원수로 묘사하는데
1:10
3:05 임나일본부설 : 야마토정권이 가야지역(낙동강 유역)을 200년동안 지배 했다는 설.
일본정부도 철외한설
4:25
5:40 장고분이 영산강유역에 있는 이유.
6:00 추론
7:25
식민사학자의 유사사학?? 양직공도에 기록된 백제의 담로로 소개된 지명 중 '사로'를 신라로, 사로 좌쪽 지명은 영산탐라권으로 마한 세력이라 주장~~마한이 5세기까지 있었다 주장함. 삼국사기 기록은 뭐지?
MAGAN 문화는 큰 호수, 높은 산, 태양을 함께 표시하는 것을 통해 죽어서라도 조상의 땅인 AN, 하늘에 닿기를 기원했습니다. 이를 표현한 무덤 양식이 전방후원분 입니다. 이에 대해 이해하려면, AN - MAGAN - 마한 - 야마토로 이어진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고기 자리 시대에 쌍어문을 여러 유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일수도 있습니다
무녕왕과 왜의 관계를 보면 전라도와 왜의 인적 교류가 많았고
현재의 전라도에 왜의 후손이 많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영국처럼, 프랑스 셀틱 게르만 바이킹족 로맞고 들이 잉글랜드 차치하고, 힘없 토착민 스코틀랜드 웨이즈 , 아일랜드인 전라디언처럼 본토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 도망갔지, 또 미국으로 도망가고, 나라가 힘이 없음 도망 이민가야지
MAGAN계 문화 유적지랍니다. 마간은 기원전 9000년대부터 서해에 있던 문화영역으로 기원전 5700년대 해수면 상승으로 쇠퇴한 문화입니다. 그 후, 동북아의 중심은 요하로 이동합니다. 그 생존자들이 마한으로 이어져 마타난 유적지입니다.
일본에 잇는 큰전방후원분 파보면 되지
찔리는게 잇으니 못파겟지~
한국인DNA는 중앙아시아,만주 쪽과 비슷함 얼굴도 북방계지 일본이랑 비슷하지가 않음
전라도는 아님
답답하네요 아직도 일본이만든 한국역사를 믿고있으니 이사람들….
임나는 경상도
장고분은 전라도
그리고 이건 지금 일본것으로 정리 되었음
왜.. 여기 있을까가 지금은 연구과제
임나는요 일본서기에서 밝힌대로 대마도를 말하는거구요
일본이라는 명칭은 국호가 아니라 해가뜨는 방향의 땅을 가리키는 지명이라는 것이 예군묘지명으로 밝혀졌지요
따라서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쪽에 있던 것이 아니라 대마도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임나일본부가 후일 일본 건국세력의 주체가 되고 그래서 현재의 국호인 일본도 임나의 일본부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본부의 모국이라고 할 수 있는 임나 즉 대마도가 신라에게 점령 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이 임나와 일본부들의 큰 형님노릇을 하던 백제의 성왕을 중심으로 임나부흥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성왕은 목숨마저 잃게 됩니다
이렇게 임나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 때의 유민들을 백제의 남부 지역에 살게 해준게 아닌가 싶어요
현재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유적들은 그 흔적들이라고 보이고 그래서 탄소연대측정결과가 530년 근처가 나오는 것입니다
백제가 중국남부 한반도서남부 일본남부에 걸친 국가인 설이 유력함
일본의 전방 후원분 하고 완전히 틀린데 뭐가 똑같다는 건지
중국 에서 망하면 거의 우리나라 일본 많이 간다 똑바로 좀 일해라 무슨 임나 일본설을 거론하냐 ㅉㅉ
전방후원분이 일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압록강변에서 발견되는 적석전방후원분이 원조이고, 이것이 임진강변에서 적석 형태로 또 발견됩니다. 그리고 하남시에서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 수십 기가 또 발견되지만 지금 하남신도시3기 건설하면서 죄다 파괴되었다네요. 하남 전방후원분은 적석과 흙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서 적석에서 흙으로 진행되는 가교 유적으로 더욱 중요하답니다. 이것이 전라도에서 흙전방후원분으로 굳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인덕왕릉이 되고 전방후원분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ruclips.net/video/Douc0y7dlvA/видео.html
고분 주변에 해자를 구축하는것은 대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방후원분 자체는 일본이 원조인것이 맞습니다
전벙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을 후원까지 연결하는 구조는 독자적입니다
그리고 하남의 전벙후원분 추정은 이미 자연 동산으로 20년전에 확인 되었습니다
고대시대에 무조건 한반도가 우위에 있었다는것은 국뽕과 고정관념이라고 봅니다
@@mikeyw7415 일본의 주장을 그동안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마이키님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증거로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프레임을 덮어 씌워서 고대사에 국민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는 강단역사학참칭개소리소설학자들의 꼼수에 더이상 걸려들면 안됩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에서 기원한것이 맞습니다.
@@DavidLee-e2q열도가 백제의 부용국인데 여기서 기원할 게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열도는 가야계→백제계→고구려와 백제의 남북 대치(광개토태왕의 열도 정벌 사건)→이후 백제가 장악합니다. 이때부터 백제는 열도 총독인 관료 왜왕을 파견합니다. 왜왕 임기는 초기 3년에서 후기 7년으로 변동됩니다. 열도는 백제 패망(CE 660)까지 독립 고대국가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CE 660년까지 왕성과 도성이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일본인 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백제 패망 후 신라가 지원하는 신라계 왕조가 들어서면서 최초의 독립 고대국가를 세웁니다.
조사 후 30년이나 지난 뒤에 보고서를 내다니 사실을 왜곡할라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모양이구나.
영산강 지역은 마한의 정치 집단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마한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그 이전 신화로 내려오던 MAGAN 문화의 계승 움직임이 전방후원분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주지가 축소된 마한 세력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천왕가를 형성하면서 일본에 전방후원분이 등장하고 번성한 것입니다. 고인골 DNA 분석, 체형과 문화 유물, 시기 등이 이를 입증합니다.
한반도로 온 세력...결국 지배자라는걸 주장하고픈 이들
조상이 야마토일까요.
임나일 본부설????
개판이노
천지인을 상징하는 거지...
일본에 전방후원분은 한국에 있던 원주민이 만든거겠지...
임나일본부가 아니고 한국한국부가 아이고...
일본 역사서는 반대로 보면 정사가 됨...
인정하자. 형제 나라는 터키가 아니라 일본이다. 근데 우리가 형 일본이 아우. 혹은 한국이 신라, 일본이 백제.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유럽의 모국어 라틴어, 전라도 사투리 열도 모국어, 아따성님=아따시오님. 냠마=야마=산
고대 거인족이 살았다는 장인국이 바로 일본입니다
꺼꾸로 설명을 하네…참내…. 전방후원분의 초기 형식이 밝혀진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에 관한 영상은 거의 없네… 답답한 인간들 많아서 돈 벌기 편하다던 내 형의 말이 기억나네….. 개돼지가 많아야 일하기 편한 것이여…..
용병이 아닐까
도래인의 나라 일번....플메이슨
모든 한반도고서를 일본이 가져가 보관한다는 말이 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끈질기게 주장한것은 그들이 고서를 바탕으로 주장을 만들어내기때문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반도 서남부 영산강 유역에 " 왜"가 존재했던 겁니다. 중국사서의 기록과도 일치합니다.
4세기 말 5세기 초의 삼국관계, 왜의 실체
백제가 371년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고구려와 백제는 심각하게 대립한다.
373년 백제 독산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가 이들을 돌려 보내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77년에 고구려(삼국사기)와 신라(자치통감)는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중에서 더 강한 고구려와 동맹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81년 부견은 신라 사신에게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엇 때문인가?”라고 물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하여 백제와 대립한 것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391년에는 고구려가 실성을 볼모로 삼았고, 서봉총 은합에서 보이듯이 391년 고구려의 제사에 신라 사신이 참석하며, 397년 충주 고구려비에서 보이듯이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하며 신라왕을 이리저리 오라 할 정도로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백제는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듯이 391년부터 열도인들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다. 397년에는 열도에서의 동원을 강화하고자 태자인 전지를 왜왕으로 파견했다.
광개토대왕은 韓, 요동반도, 한반도에서 백제를 계속 공격하여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백제는 이에 대응하고자 동원을 강화하였다. 그러자 399년 백제의 주민인 전라도왜가 못살겠다고 대규모로 신라로 도망갔다. 전라도왜의 도주는 광개토대왕비, 삼국사기, 북사에 공통으로 기술되어 있다.
400년 백제가 열도인들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자, 광개토대왕은 열도를 정벌하여 열도에 고구려 백제의 남북국시대가 도래하였다.
전쟁포로인 전라도왜는 신라의 소유였지만 광개토대왕이 403년 열도 고구려로 보내자,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고자 한다. 이 때 나라로 보내진 전라도왜가 사기꾼들이 야마토왜라고 거짓말하는 왜이다. 이들은 독자적 세력이 아니고 전쟁포로로 나라의 고구려계 국가인 안라국에 보내진 피지배민이다. 이들을 야마토라 부르지도 않았다. 사기꾼들이 삼국지에 나오는 가야계의 야마대국과 연결시키기 위해 야마토왜라고 사기치고 있다.
왜는 예이다. 왜는 배달국 성립시 바닷가 강어귀로 도망친 집단이다. 전라남도에도 영산강을 중심으로 왜가 정착하였고 이들은 백제의 주민이었다. 사기꾼들이 왜계 유물인 대형옹관묘를 마한의 것이라 사기치고 있다. 백제는 황하 요동반도 양자강 등 강어귀의 왜를 지배하며 환황해 무역을 하였다. 백제의 진평군인 광서성에서 전라도에서와 같은 외다리방아와 맷돌이 사용되고 있다.
왜는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다. 일본이라는 것이 백제가 망하기 전에는 없다. 일본은 백제의 별칭이었다.
왜=일본인≠한국인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식민사학이다. 한국에서 독립되었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거짓말이다. 열도는 7세기까지는 우리 역사강역이다.
일제와 조선총독부도 이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춘추전국시절의 오나라 그리고 월나라가 연달아 패망하고 한반도남부와 서일본에 대량으로 도망가고 거기서 진국이 생기고 삼한이 생기고 왜가 정식으로 열도에 등장함 그리고 기원 3세기 즉 중국 후한 삼국지시대에 공교롭게도 고훈시대가 열리는데 그때도 상당수의 중국과 한반도인들이 일본에 도망감 일본복장 고후쿠가 바로 吴服임 그리고 분자인류학적으로도 중국동남부 양자강지역의 o1b1이 바로 한국 일본의 O1b2와 되게 가까운 친형제임 ㅋㅋ 고대 왜인들은 문신하고 전방후군 묘지를 사용하고 벼농사지었는데 바로 중국 강소남부 절강북부지역에 그유물들이 발굴됨
차이나 단주지역 왜
임나(任那) 위치는
가라가 중국 사서에서 최초이고 유일하게 항목으로 기록된 것이 남제서(南齊書)인데 한의 일부라 하였으니 "韓"의 위치에 의하여 가라의 위치가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삼국지 후한서 동이(東夷)에서 "韓"은 북평, 태원의 고구려와 남월, 주애, 회계동야현, 이주, 단주의 왜 사이에 있었으니 한의 일부였던 가라의 위치 또한 그 사이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가라가 있는 곳에 임나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韓)의 일부였던 가라(加羅)의 위치는 북평(北平)과 주애(朱崖) 사이에 있어야 한다.
한(韓)이 고구려의 북평(北平 : 阜平) 어양, 상곡, 태원(漁陽 上谷 太原)과 왜의 남월, 주애, 이주, 단주, 회계, 태(南越 朱崖 夷洲 洲 會稽 台)의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가라(加羅)도 한(韓)의 일종이니 당연히 그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 고지도 에는 남부지역에[扶餘]부여섬이 있고, 다음에 조그만 일본日本섬있다,왜노倭奴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夫餘]북만주지역에 있는 부여夫餘
[扶餘]부여,남부지역에 있는 부여 달리 표기되어 있다
모인毛人 일본어로 아이누인을 蝦夷(하이) 또는 毛人(모인)이라 써놓고 에비스(衣 比 須 ,エ ビ ス)라 읽는데, 이것은 아이누어로 ‘남자’를 뜻한다고 한다
모인(毛人)과 하이(蝦夷)
지금의 일본은 왜노倭奴와 모인毛人이 원주민 것이다
(창국昌國 은 대만) 옆에는 류구琉球(오키나와)
중국 고지도에서 보듯히 일본日本은 원래 조그만 섬에서 부터 시작된 이름
왜노倭奴와 모인毛人이 원주민 살고 있던곳을 점령
[양직공도] 양직공도에 나오는 나라들
백제에 부속된 나라로 반파(叛波) 이하 9개국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주로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실려 있다.
일본 사학계의 초기 논리의 문제점은 임나일본부를 왜왕권의 외교기관이나 가야 제국을 통제·지배한 기관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서기』의 기록도 모순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 킨메이(欽明) 2년, 5년조의 이른바 '임나 부흥 회의'를 보면, 백제왕이 '제왜신'과 가야 제국의 사자·대표를 소집하여 남가라·금관가야의 부흥책에 관해 협의하고 있는데, 이 회의에서는 ① 백제왕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점, ② '제왜신'이 왜왕권의 외교권을 체현(體現)하고 있지 않은 점
삼국사기의 가야(伽耶)와 일본서기가 말하는 가라加羅 는 분명 다른 지명 입니다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역사를 잘못 해석하려는 무지, 망각. 왜곡.있었습니다
임나(任那)지역 어느지명을 의미하는가,(那)한자 나짜를 주목해야 ...................
현재는,동중국해.남중국해 칭하지만 1970년대 까지도 박정희 대통령 월남 패망과 관련 특별담화 에서도
인도지나 반도 印度支那 半島 라는 용어를 흔히 언급 했었죠.
Indo-China [한] 印度支那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를 차지한 옛 프랑스령 연방
아시아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인도지나 반도에는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 등.. 동남아 국가나 지역을 지칭하는 지역 입니다 .
[支那]지나. 중국의 옛일컬음.
(支那)지명이나 범어 [산스크리트어 Sanskrit, 梵語]
큐슈
가라(加羅)는 경남 김해에만 있었던게 아니라 큐슈 북부에도 있었던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마츠라(松浦)와 가라츠(唐津)는 바로 옆에 붙어있다. 먼 곳 사람들이 임나(=마츠라)와 가라(=가라츠)를 혼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 있다.
[가라] 역시 [가라토]라고도 했다. 그리고 [가라토]를 “加羅都(가라도)”라고 음차하여 적었다. 한자 都를 일본에서는 “츠(つ)”라고 읽는다. 加羅都
를 “가라츠”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가라츠]를 “唐津(당진)”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일본어로 唐을 ‘가라(から)’라 하고, 津을 ‘츠(つ)’라고 한다. 현재 큐슈의 북쪽에 있는 “가라츠(唐津)”가 바로 그것이다.
북큐슈
"히코산을 비롯한 일본 북규슈의 여러 산에서 백산신白山神을 모 시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 산악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의 산악신앙이란 단군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나가노 교수, 벳부대학 문학부 북부 큐슈에 단군신화가 들어온 것은 5~6세기 때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5세기 한국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왔습니다.
북큐슈 히코산 신궁에
문수보살암 환웅의 초상과
비천상(飛天像)있다
고대 큐슈에는 7세기 말까지 야마토 정권과는 독립적인 왕권이 있었다고하는 설 ( 규슈 왕조 설 )도있다.(가야세력 또는 신라세력 존재)
일본인 자료 발췌
축자국筑紫國의 국조 반정磐井은 원래 가야 (출신 백제왕조 실록 중에서)
반정磐井의 아들 치쿠시군갈자筑紫君葛子
"백제 삼근왕이 사망해 동성왕이 귀국했는데 치쿠시코쿠(筑紫國ㆍ북부 규슈계) 군사 500인이 호위했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243년조의 기록이다.
또한 고대 큐슈에는 7 세기 말까지 야마토 정권과는 독립적인 왕권이 있었다고 하는 설 ( 규슈왕설 )도있다.(가야세력 또는 신라세력 존재)
치쿠시군반정筑紫君磐井 筑紫(九州地方北部)큐슈의왕 야마토국 치쿠시 왕조 倭国筑紫王朝 야마토의 무왕倭の武王
반정의 난磐井の乱
큐슈는 한반도계 (이와이)가 지배했던 영토 입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치쿠시군갈자는"아버지 (이와이)의 죄에 연좌해 처벌을 두려워하고 糟屋의 屯 곳간을 헌상하고 사형을 면할 것을 애원했다"라고 적고 있다 , 이와이는 이 시기에 적어도 큐슈의 북쪽 절반을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서기"는 적고 있다.
축자국 각라도
임나큐슈任那九州의 축자국筑紫國 북큐슈
축자 각라도筑紫 各羅嶋
축자의 각라도(가카라시마 섬)
가카라섬
Kakara-shima, 加唐島(가당도)
옛날부터 한반도와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백제 무령왕이 탄생한 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섬 남서부에 위치한 오야비 포구에 있는 동굴 안에는 '무령왕생탄 전승(傳承)의 땅'이라고 새겨진 비(碑)가 세워져 있다.
백제 전라도 지역 왜
차이나 단주지역 왜
야마토 왜
는 구분 해야
차이나 왜가 자주 등장 하죠
학자라면 가치중립적으로 조사해야지.
발굴하기 전부터 일본한테 유리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꼴은뭐냐? 저게 정상임??
혹여 일본에 유리한 유물이라도 나오면 아주 폐기하겠다?ㅋ
솔직하게 왜인의 무덤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임나일본부도 역사적 사실이고...
일본의 열쇠구멍 무덤을 공개 안하지
모든게 들통 날까봐
왕 에게도 공개안함~
무덤 주인은. . . 선비족. .
간단하다 문화라는게 섬에서 먼저 태통할 수가 없어 대륙에서 섬으로 전해진느거면 몰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저거 왜자꾸 임나 임나 하는거야
식민의식쩌내
연구원이라는자가
저렇게 아둔하니
보소 일본으로가서 사시오
장고형의 고분의 원형은 3-4c 충남이하로 남하해
영산강지방으로 이동
전방후원분은 4-5c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건너간 문화이다 즉 영산강문화가
9州로 진출한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것이 아니다
자갈치 같네
백제왕이 일본에 간거지 뭔소리야
백제왕자들은 인질로 일본에 갔는데 무슨 소리하는거지
왜인들 고유의 무덤. 즉,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통일하기 전까진 왜의 임라4현 지역 이었잖아요?
문화는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인데 일본의 국수주의 때문에 역으로 흐른다는 궤변을 말하는데
이에 대하여 동조하는 골때리는 학자들이 있으니 역사가 말이 안된다.
영산강 유역의 마한 과 일본 규슈는 사실상 동일한 한반도의 왜 세력이라고 보면 되고
처음에는 영산강 지역세력이 주류를 이루다가
규슈가 일본 본토의 야마토세력에 벙합되면서 역으로 영산강 지역까지 아먀토 형식의 분묘형태가 들어 온것
임나일본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기도 그래요
임나가 과거 가야지역이라고 한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면 임나 일본부설이 힘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팩트과 증거로 봐야지
어떻게 일본이 한반도에 오래전에 왔었나 그건 말이 않된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가가 아닌 정치인 이죠
전라도는 왜의 식민지야❤
전북 남원도 기문국으로 임나의 식민지😂
가설이 아니고 팩트❤
저런 수준으로 말하는거 한심하다
전방후원분, 앞은 이승,뒤는 저승세계. 기본이잔아. 이런문화.
저런 수준 학자 tv 나오다니 한삼해가지고 수준하곤
가야가 한반도에 존재하지않았기 때문에 흔적이 없는것이고 그 시기 한반도 남부에는 영산강빼고 세력을 뻗칠데가 없었어
아 말도 못하겠고.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지.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오.
임나 일본부의 실체 이니라.
일본식 고분이 일부 남아있는것과
일본사의 표지유물인 곡옥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는것을 관련지을수도있나요?
곡옥은 일본사의 표지유물이 아닙니다. 일본의 주장일뿐이고, 곡옥은 한국 청동기시절부터 그 형태가 나타납니다.
제대로좀 알고 공부좀 합시다 참~
곡옥, 청동거울, 환두대도는 한반도계 유물로 가야, 신라, 백제의 일본열도 정복의 표지유물이라 할 수 있슴.
@@아라바바 곡옥(마가타마) 는 일본계 표지유물로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다.
@@世重 전혀 그렇지 않다. 곡옥은 중국에서도 발견되고있는데, 중국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그러시지?
영산강유역의 마한.백제계 유민들이 일본 열도에 이주해 정착하며 오사카 지역에도 전방후원 무덤을 만든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영산강유역은 옛 탐라국의 영토입니다
담라는 백제의 '담로' 아닐까요? 22개나 되었다던~~
근거없는 말은 삼가하세요
아니면 근거를 대든지
아니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바로 이해가 가는데...... 백제에서 일본으로 넘어간거지, 그 일본 고분은 백제왕일것이고, 기본적으로 알거같은데
역시 한국쪽에 있어서는 안 되는 뭔가가 있었길래 30년간씩이나 발간 못 했을거군요
일본 고분이 먼저 생겼다는것도 확실하니 당연히 한국에서는 못내는 결과...
일본에 인덕일왕 묘 라고 알려져 있는 최대 규모의 열쇠구멍 모양 고분이 있단다. 전방후원분 무덤 양식이지. 근데 몇십년전에 비가 많이 와서 고분 한쪽이 무너졌는데 그곳에서 백제계 유물이 쏟아져 나왔단다. 그리고 고분을 관리하는 일본 궁내청은 일반인은 커녕 고고학자, 일왕족들도 고분에 못들어가게 막고 있고. 왜 발굴 조사도 못하게 하고 일왕족 마저 지네 조상 묘에 못들어 가게 막을까?
스스로의 머리로생각하지말고 자료와 근거를 찾아보세요
미친소리를 세금들여서 만드냐
전방후원분 자체가 야마토가 원조인데
그에 대항한 규슈세력이 영산강에 와서 전방후원분을 축조? 무슨 소리를 하는것인지?
야마토에 복속하고 그들의 승인아래 전방후원분의 분묘형태를 쓰는데?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인이 되면 않되지요
5世紀6世紀の日本人を描くのに侍の格好させないでよ笑
日本には古墳たくさんあるけど全然観光地になってないのよね。
歴史も古いし、昔の形をそのまま残してるところはすごくいいんだけど、基本はただの丘だから行っても面白くないんだよな。
임나일본부설 일본역사학자들은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정치계들은 인정안하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