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이박사님 덕에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의 우리 역사 언급한 부분들 한문 원문 찾아 읽고 있습니다(옥편도 새로 샀습니다) . 우리 역사가, 여러가지 이유로 역사서들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아 역사를 복원하는게 어려운 게 현실이겠습니다만, 중국 역사서들에 언급된 동이족, 동호, 부여, 고구려...등등만 세심히 취합하여 연구해도 우리네 고대사의 얼개는 맞출 수 있을 걸로 봅니다(실제 그런 분들이 여기저기 생기어서 책들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이 50 넘도록 이마니시류, 쓰다소키치, 쓰에마스 야스카스...류의 식민사학만을 배워왔다는 게 분할 뿐입니다.
"부여"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아니 심지어 대학생 때까지도 배운 게 거의 없어서(유일한 게 "영고", "형사취수제", "순장" 정도) 근년 내 손으로 책들 찾아읽기 전까지, 부여에 대해서는 드라마("주몽" 정도?)에 언급되는 것, 그마저도 작가의 창작의 나라이겠구나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소위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분들에 화가 나기도 하고...했었드랬습니다. 반대로 요며칠 읽고 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 언급된, 중국역사서상의 부여에 대한 기록, 동 선생의 역사적 추론 등..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문성재 박사 역, 이리 써 놓으셨더군요. "부여는 우리 겨레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국이었다.."). 직전,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문성재 박사의 한국 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이덕일 박사의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비판-한사군은 요동에 있었다..들의 책을 시리즈로 읽어보니, 비단 부여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대사에 얼마나 심대한 왜곡이 이루어져 왔는지 눈이 뜨이는 기분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제 아들들부터 시작해서 제 주위로 우리 역사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덕일 박사님께 늘 감사의 마음입니다. 닫혔던 눈을 띄워주셨으니요.
"이제 제가 할 일은 제 아들들부터 시작해서 제 주위로 우리 역사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네요.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늘 화가 났었는데, 이제야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한 방향를 찾은 것 같습니다. 저도 작게 실천해보겠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 좀 배우게 해주세요. 일본, 지나 꼬붕들이 짓밟은 우리 역사를 이제는 제발이지 바르게 세웁시다. 나라 대표님이 선두에서 이제까지의 고삐를 홱 낚아채서 바른 방향을 잡아줬으면 좋으련만. 역사교과서 이제는 바꿉시다. 딴 나라 앞잡이가 아닌 진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진짜 역사교과서로 우리 학생들에게 떳떳하게 가르칩시다.
진짜 이상하죠 부여하면 고구려와 백제의 모국 본국이 되는 오래 존속하면서 동쪽에 최강자로 군림하고있었던 국가인데 교과서엔 그 건국 시기 건국자는 쏙 빼놓고 부정적으로 읽힐수있는 것들만 무미건조하게 몇줄 서술해놓고 그냥 그런 부족국가 수준이었다라고 일축하고있음 말도 안되는 역사왜곡이지 수십년도 못버티고 픽픽 망하는 중원 약체 쓰레기 국가들은 위대하게 보면서 참 xx같은것들
요하문명이 동북아 문화의 시원이며 고조선이 요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한족의 유전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 Y유전자인 O2 에 단서가 있습니다. 일단 요하문명을 일군 주체들의 주요 Y-DNA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별 요하문명 1. 흥륭와문화: 6200~5400 BC -> 주요 Y-DNA: N 2. 조보구문화: 5400~4500 BC -> 주요 Y-DNA: N 3. 홍산문화: 4700~2900 BC -> 주요 Y-DNA: 왕족은 전부 O2, 평민은 N 4. 하가점하층문화: 2200~1600 BC -> 주요 Y-DNA: O2 진나라와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중국 본토에서 주를 이루고 있었던 중국인 DNA 는 O1(O1a + O1b1) 입니다. 화하족의 시원이라고 하는 주나라(기원전 1000년경) 때의 인골들을 분석한 결과 O1 이 주를 이루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단, 주나라 초기 서주시대 때의 주된 Y-DNA 는 Q). 한족이란 한나라 시대 이후 즉, 기원후의 중국인을 말하는데 바로 그때부터 황화지역의 O2 가 중국 대륙 전체로 급속히 퍼지면서 기원후 중국인은 O2(50~60%), O1(20~30%) 의 비율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경우는 O2(43~45%), O1b2(토착민, 35~40%) 이며 한국인의 O2 가 기원전 1000년경 이후 중국인의 이주에 의한 결과였다면, 당연히 한국인 중에 O1 의 비중도 크게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O2 와 O1 이 섞인 집단에서 자석처럼 O2만 쏙 빼내에 한반도로 옮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우 O1이 2% 미만으로 거의 없습니다. 한국인의 O2는 중원이 아니라 요하지역에서 왔음이 아주 확실하게 밝혀지는 셈입니다. 그럼 어떻게 홍산문명 세력이 몽골족, 선비족, 만주족 등이 아닌 한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쉽게 증명이 됩니다. 첫째, 홍산문명을 이룬 민족은 농경민족 이었습니다. 만주지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룬 민족은 고조선과 부여 밖에 없습니다. 문화를 의미하는 Culture 가 Agriculture 에서 유래되었듯 문화는 보통 농경의 시작과 함께 피어납니다. 둘째, 홍산문화와 한반도 문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유물로써 밝혀졌습니다.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 증거인데 북방족들 중에서 홍산문화의 주체인 O2 유전자를 주된 Y-DNA 로 갖고 있는 민족은 한민족 뿐입니다. 다른 북방족들은 C2 위주의 집단들입니다. 또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조양시에서 기원전 1000년경에 최초로 고조선 비파형동검이 시작이 되며 이 동검이 수백년에 걸쳐 만주지역으로 퍼지고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이 세워질 무렵인 기원전 200년 경에 세형동검의 형태로 퍼집니다. 이는 고조선의 이주 역사와 일치합니다. 역사적 증거 - [삼국지위서동이전]: “많은 (고조선) 유민들이 마한의 고토로 흘러들어 마한이 세워지게 되었다”, [후한서]: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깨져 이에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 후 스스로 ‘한왕(韓王)’에 올랐다” 기원후에는 부여가 한반도로 남하하여 고구려, 백제, 가야를 세우게 되고, 고려시대 때부터는 만주지역에 유목민과 수렵채집인들만 남게 됩니다. 즉, 요하문명(홍산문화)을 일군 농경 세력들이 만주를 거쳐 전부 한반도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 북방 이주민(O2, 43~45%)의 수가 토착민(O1b2, 35~40%)의 수를 능가함과 동시에 한반도 최초의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우리는 북방 홍산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튜브 'KBS역사스페셜 - 대성동 고분의 비밀, 가야인은 어디서 왔는가' 의 25:50 부터 보시면 부여가 조양시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옵니다. 중국의 유명한 학자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었고, 후한서에 언급된 부여의 풍습이 상나라 풍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을 보면, 분명 우리 한민족은 하가점하층문화(초기 고조선) -> 상나라 -> 후기 고조선, 부여 -> 고구려, 백제, 신라 로 이어지는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 가지 의문점은 1. 진수의 『삼국지』「오환선비동이열전」에서 "마한(馬韓) 54국(國)의 종주국은 월지국(月支國)"이란 기사가 나오고, 월지국은 한국고전용어사전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있던 국가였다고 나오는데 마한(馬韓)이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 또 54년 동안 제위에 있었던 한무제 유철(재위 서기전 141~87)이 장건의 군대를 보내 월씨국(大月氏國)을 멸망시킨 기사가 『한서』에 나옴. 김부식의 『삼국사』 「최치원열전」에서도 마한(馬韓)에서 고구려가 진한(辰韓)에서 신라가 나왔다는 기사가 나옴. 2.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깨져 이에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 후 스스로 ‘한왕(韓王)’에 올랐다” 여기서 바다로 들어가 도망했다고 하는데, 고대에는 황허와 장강도 발해와 함께 바다인 해(海)로 불렸음. 3. 거기다 김부식의 『삼국사』 「신라본기」 일식기록을 미항공우주국(NASA)의 일식 시뮬레이터로 돌려봤을 때에 의하면 서기 201년까지 신라의 강역은 안휘성 부근 팔공산 경주로 현재도 그 지명이 남아 있고 경주 인근의 지명들이 역시 안휘성 경주 팔공산 인근의 지명들과 지금도 일부가 같음. 4. 서기 261년 김미추 이사금(신라의 제13대 왕, 재위 262∼ 284)이 즉위한 때쯤에 만들어졌을 걸로 보이는 황남대총에는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공개한 동시대 로마제국에서 만들어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유리세공품들이 발굴되고 진흥왕(신라의 제24대 왕, 재위 540~576)이후로 위진남북조(서기220~589)의 상황에서 수나라가 통일한 이후로는 더 이상 로마제국 유물들이 발굴되지 않음. 5. 김부식의 『삼국사』 에는 백제는 북부여에서 나온 고구려(하북성 북경 조양구)에 부용(속국)되어 있었고, 신라는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백제의 강역은 진평(요서, 내몽골)과 산동반도를 차지한 기사가 나오고, 「최치원열전」에는 "고리, 백제의 전성기에 강병 100만이 있어 북으로 유연제노 남으로 오월을 정복하여 중국(장안과 낙양에 도읍한 국가들)에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옴. 그렇다면 초기 신라인들은 제(濟) 땅이었던 산동성에서 강소성을 거쳐 안휘성까지로 이동했다는 결론이 나옴. 그 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60년간 한반도 남부인 경상북도 팔공산 경주로 이주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부여인들이 한반도 남부로도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산동, 강소, 안휘에는 김(金)씨 집성촌이 나옴. 그리고 서기 787년 이후 신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는 한반도 경상북도 경주일대에서만 일식을 관측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중간 과정에서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꺼임? 다시 말해 하북성 북경 조양구쪽에 자리잡았던 조선-북부여-고구려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로만 간 것이 아니라 중원쪽으로도 이동한 기록들이 나오고 삼국의 실질적인 수도와 강역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원(유연 제노 오월의 땅)에서 시작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반도로 밀린 걸로 나오는데?
@@historyreadman 중원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기원전 1000년 ~ ) 이미 중국 본토 (중남부) Y유전자 O1(O1a + O1b1) 이 기존 황화강 유전자인 O2 와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은 O1(O1a + O1b1) 유전자가 2% 미만이므로 백제, 신라인들이 중국 중남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후에 현지 중국인들과 섞여버렸고 한반도로 건너오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즉, 한반도로 진출했던 백제, 신라 세력은 한반도 주도 세력으로 살아남고, 중국 본토로 진출했던 백제, 신라 세력은 중국화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중국 중남부로 이주한 백제, 신라인들이 한반도로 다시 회귀했다면 중국 본토 유전자인 O1도 섞여서 들어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인들은 O2 와 O1 이 섞여있지 않았던 지역 즉, 하북성을 포함한 하북성 위쪽 (요하) 농경 세력이 이주했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는 역사적 기록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한나라 때까지 조양시 및 고죽국 (갈석산 부근) 에 위치했던 부여와 고조선인들이 베이징에 위치했던 연나라의 위만에게 요서지역을 내주고 (그 지역에 곧바로 한나라 한사군이 들어섬), 만주 및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사실과 부합합니다. 조선왕 ‘준’ 이 위만에게 나라를 뺏기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도달했다는 기록에서의 ‘바다’ 는 당연히 발해만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고조선은 갈석산 부근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韓(삼한) 에 대해 삼국지 위지동이전, 후한서 모두 사방 4천리 (동서, 남북으로 각각 4천리) 라고 명백히 적혀 있으므로, 삼한 또한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만주) 지역까지 넓게 퍼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뭐가중헌디-g9c 졸본부여는 동명제가 세운 부여이고요, 나중에 고주몽이 졸본으로가 졸본부여의 공주(소서노)와 결혼하고 이후 나라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고, 이후 국호를 고구려로 변경 한것이지요. 동부여(가섭원부여)는 해모수의 후손인 해부루가 기존 북부여땅을 떠나 동해쪽으로 가서 다시 세운 부여이지요. (동부여는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죠)
와... 이 ㄱ 같은 것들 난 부여가 여태 고구려보다 기껏해야 100년 일찍 건국됬는줄 알았는데; 저런 기록이 있었다니;; 서기전 1000년 전이면 고구려보다 적어도 1000년 전이란 소리잖아 어이가 없구만; 예전에 진이였는지 한이였는지 부여왕이 죽으니 옥갑을 선물했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었는데 구라인가 했는데 이정도의 나라라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얘기같은디 ㅡㅅㅡ
자주(소신있는)민 역사(시민의 의지) 를 자주민의 혼으로 역사정신으로 주체도 자주민적 사고와 의지로 기록하고 배워야 하며 혹독한 비평과 함께 목숨걸고 무엇을 위해 행함인지 정확하게 교육받아야. 밣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우리민족의 역사 미래를 위하여 자주민국의 교육교서를 진실된 시민이 주인인 (주체) 로 기록 배울 권리(의무) 기록(교과서) 어떻게 해야 하나.
문사님이 운영하시는 채널에 백제 관련 영상 추천합니다. 지금 이 영상에서 이덕일 소장님이 말씀하시는 만리장성 북쪽의 부여의 위치와 고구려 백제가 낙랑군을 공격하는 위치 백제의 초기 건국 위치와 이동 루트가 대략 맞아 떨어집니다. ruclips.net/video/RvJdnC4uB9g/видео.html ruclips.net/video/J2vKA62N_N8/видео.html ruclips.net/video/RZ4GsZM3tdM/видео.html
@@krauskim7662 그건 아님. 단군왕검에게 아들이 넷이었는데, 맏아들 부루(扶婁)와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로 특히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삼형제를 삼랑(三郞)이라 불렀다.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塗山會盟)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또한 백제(百濟) 때 지은 부여(扶餘)에 있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단군왕검의 네 아들 중 부소(扶蘇)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 「백제본기」동성왕 22년(서기500년)경에 산 정상을 둘러쌓는 테뫼식 산성을 쌓았고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서기538년)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의 성벽을 쌓았다. 무왕6년(605년)경에 포곡식 복합산성인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남해 부소암((扶蘇庵)에는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가축의 이름이라기보다 고대의 중요했던 것들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삼은것은 아닐까요? 말을 많이 키우웠던, 또는 소를 키웠던 사람들, 기마민족에게 중요햇던 것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붙인 성씨가 아니었을까요? 많은 말을 소유한 마씨, 많은 소를 소유한 우씨, 많은 돼지를 소유한 저씨..등 이렇게 6개 성씨가 지배자 아래, 지배층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김가 이가 박가 하듯이 말입니다.
신분제가 실질적으로 붕괴되는 것이 6.25 를 거쳐서 붕괴 됬듯이, 대한민국 교과서가 바뀌는것은 6.25에 준하는 상황이 되어야 바뀔 것으로 보입니다. 1996년에도 동북공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교과서를 현재 상태로 가르쳐야 이익을 보는 집단이 단순히 조선사편수회 계열학자들만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똑똑한 사람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정치합니다.
우리 교과서는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덕일 교수님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하여 새롭게 민족사를 써야 한다.
이박사님 응원합니다 ~
박사님 국민 들이 빠르게 무능한 역사 에서 눈을 뜹니다 고맙습니다 꾸뻑
부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는 영상입니다 국민 역사 유튜브 되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지금 고등학생인데요. 학교에서 부여는 꼴랑 지도 한장에 한번 나올까 말까일 정도고 북부여니 동부여니 이런건 당연히 있지도 않구요. 고조선도 건국신화가 다인 마냥 기록해 놓은 역사책을 보면서 매번 궁금했던 것을 여기서 알고 갑니다.
현재의 역사는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기존 강단사학자들이 역사를 반도사관으로 축소.왜곡해서 국민들에게 가르치니 그동안 올바른 우리역사를 알수가 없었지요.
역사샘과 주변 지인에게 알리면 좋겠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동부여 북부여가 등장하는데 우리 강단사학계에선 그런 기록들을 믿을 수 없다고 무시하는 것이겠지요. 중국 사서에도 나오는 것들인데 도대체 교과서 편찬하는 인간들...유명 대학교수들이겠지만요.....도대체 뭘 연구하는지 아주 궁금합니다.
뷰트레이야=부여 오오츠크=옥저 라는 말도 있어요
제가 고등학생때는 동부여북부여 교과서에 나왔는데 신기하네요
한국역사의 줄거리가 필요합니다 존경하는 이덕일박사님!!
감사합니다.
이박사님 덕에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의 우리 역사 언급한 부분들 한문 원문 찾아 읽고 있습니다(옥편도 새로 샀습니다)
.
우리 역사가, 여러가지 이유로 역사서들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아 역사를 복원하는게 어려운 게 현실이겠습니다만, 중국 역사서들에 언급된 동이족, 동호, 부여, 고구려...등등만 세심히 취합하여 연구해도 우리네 고대사의 얼개는 맞출 수 있을 걸로 봅니다(실제 그런 분들이 여기저기 생기어서 책들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이 50 넘도록 이마니시류, 쓰다소키치, 쓰에마스 야스카스...류의 식민사학만을 배워왔다는 게 분할 뿐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실천에 강하시네요.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에 한 몫 하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부여"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아니 심지어 대학생 때까지도 배운 게 거의 없어서(유일한 게 "영고", "형사취수제", "순장" 정도) 근년 내 손으로 책들 찾아읽기 전까지, 부여에 대해서는 드라마("주몽" 정도?)에 언급되는 것, 그마저도 작가의 창작의 나라이겠구나 생각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소위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분들에 화가 나기도 하고...했었드랬습니다. 반대로 요며칠 읽고 있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 언급된, 중국역사서상의 부여에 대한 기록, 동 선생의 역사적 추론 등..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문성재 박사 역, 이리 써 놓으셨더군요. "부여는 우리 겨레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대국이었다..").
직전,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문성재 박사의 한국 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이덕일 박사의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비판-한사군은 요동에 있었다..들의 책을 시리즈로 읽어보니, 비단 부여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대사에 얼마나 심대한 왜곡이 이루어져 왔는지 눈이 뜨이는 기분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제 아들들부터 시작해서 제 주위로 우리 역사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덕일 박사님께 늘 감사의 마음입니다. 닫혔던 눈을 띄워주셨으니요.
"이제 제가 할 일은 제 아들들부터 시작해서 제 주위로 우리 역사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네요.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늘 화가 났었는데, 이제야 우리가 해야할 일에 대한 방향를 찾은 것 같습니다. 저도 작게 실천해보겠습니다.
감사 수고
정말 애써십니다. 권력에 빌붙어 역사를 왜곡한 놈들에 맞서서 왜로운 싸움을 하시는 노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권력에 빌붙지 않고 자발적으로 친일하는 역사학자들이 문제 입니다.
힘차게 뜨겁게 응원합니다
식민사학자들 싹 갈아 엎읍시다.
주먹쥐고 거리로 나섰으면 하는 분개함이 치솟습니다.
식민사학 강단역사학자 모조리 축출되는 그 날까지 행진을....
식민사학자 뿐만 아니라 친일정치인들도 싹 갈아엎어야 합니다...뉴라이트라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윤석열. 나경원 등등 친일역사정치인들 쳐내야 하는데...이덕일이 정권 교체하자고 난린친건 뭐여?
맞습니다. 이나라가 모자라고 부족한게 이리 많은줄을 그동안 잘 몰랐네요...지금부터라도 옳바르게 고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 좀 배우게 해주세요.
일본, 지나 꼬붕들이 짓밟은 우리 역사를 이제는 제발이지 바르게 세웁시다.
나라 대표님이 선두에서 이제까지의 고삐를 홱 낚아채서 바른 방향을 잡아줬으면 좋으련만.
역사교과서 이제는 바꿉시다. 딴 나라 앞잡이가 아닌 진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진짜 역사교과서로 우리 학생들에게 떳떳하게 가르칩시다.
교수님 건강하세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일어날 날이 올겁니다.
교수님의 열정에 늘 응원할게요..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늘 사료에 근거해 강의해 주셔서 좋습니다!!!!!
빨리 10만 구독 가고 100만 구독 가야죠 !!!!!
국민유튜브 됐으면 좋겠습니다.
곧 통일한류문화 TV도 만드신대요. 기대되네요
@@해같이-g9f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가 이 채널 구독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고소미-n9s
우와!!!! 정말 기대되네요
나이 50이 넘어서 역사를 바로압니다 ᆢ그간 역사를 배우면서 이상하다 생각햇거든 ᆢ
저두요 교과서는 이상하더라구요
여기 한사람 또 추가요.
진짜 이상하죠 부여하면 고구려와 백제의 모국 본국이 되는 오래 존속하면서 동쪽에 최강자로 군림하고있었던 국가인데 교과서엔 그 건국 시기 건국자는 쏙 빼놓고 부정적으로 읽힐수있는 것들만 무미건조하게 몇줄 서술해놓고 그냥 그런 부족국가 수준이었다라고 일축하고있음 말도 안되는 역사왜곡이지 수십년도 못버티고 픽픽 망하는 중원 약체 쓰레기 국가들은 위대하게 보면서 참 xx같은것들
위대한 선조들의 나라. 부여!
우리들이 잘 밝혀서 소중한 역사를 복원해야겠습니다.
이덕일 박사님 고맙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이덕일 교수님 존경합니다 힘내세요
단군조선 말기에 국가명을 대부여로 바꿈.
해모수께서 북부여를 건국함.
북부여는 대부여의 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의미임.
반드시 국사교과서를 바꾸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 화이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루속히 좋은 소식있길 빕니다.
감사드려요,***
선생님같이
이나라를
진정사랑하고 걱정하시는분이계셔서
감사합니다
예전국사시간
뭔가이상한점이
많다는느낌이있었지만
나이육십이넘어
속 시원히 역사이야기하시는
선생님을우연하게
시청하니
가슴이 먹먹하네요
우리역사에
모두가
관심을가져야할때라고
생각함니다
부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강의 감사합니다.
저희 세대는 쓰레기 역사를 배웠군요. 삼별초의 항쟁을 "삼별초의 난"이라고 배울 때부터 누가 쓴 역사인지 의심을 하긴 했어요.
가짜 역사를 써 놓은 지금의 국사 교과서를 바꿔야 합니다.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진정한 독립은 역사바로세우기
부터입니다
비로서 진정한 역사 선생님을 만나다.
미래의 등불
돈과 명예에 굴하지 않고
오직
조상의 얼을 기리고자 하시는 이덕일 선생님의 마음고생..
감사합니다.
존경을 표합니다.
국사가 바로서야 나라가 섭니다
우리학생들이 배울 역사교과서 빠른시일내 만들어 주세요
강단사학 학술대회, 고조선 해체론 까지 등장... (2016.10.10 기사)
매국동북아역사지도집 제작에 참여한 인사들이 학술대회 주도...
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이덕일 교수님, 감사합니다.
부여사를 좀더 알수있는 계기가 된것에 감사드립니다
부여가 미천한 수준의 국가였다면 백제가 남부여를 칭하고 고구려가 시조를 북부여 출신이라 하지 않았겠죠.
중학시절에 이해 안된체로 중력과 고대역사를 배웠습니다.
부여가 은나라 망할때도 있었군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해외 나갈때 '금계'를 입고 모피를 덧입었다 ㅡ고도의 제직 기술보유와 풍부함도 증명되거든요.
고구려의 화려한 금직물만 봐도. 우리 금직물은 한나라 흐느적거리는 얇은 차이나실크와는 비교가 안되지요.
요하문명이 동북아 문화의 시원이며 고조선이 요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 한족의 유전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 Y유전자인 O2 에 단서가 있습니다. 일단 요하문명을 일군 주체들의 주요 Y-DNA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별 요하문명
1. 흥륭와문화: 6200~5400 BC -> 주요 Y-DNA: N
2. 조보구문화: 5400~4500 BC -> 주요 Y-DNA: N
3. 홍산문화: 4700~2900 BC -> 주요 Y-DNA: 왕족은 전부 O2, 평민은 N
4. 하가점하층문화: 2200~1600 BC -> 주요 Y-DNA: O2
진나라와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 중국 본토에서 주를 이루고 있었던 중국인 DNA 는 O1(O1a + O1b1) 입니다. 화하족의 시원이라고 하는 주나라(기원전 1000년경) 때의 인골들을 분석한 결과 O1 이 주를 이루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단, 주나라 초기 서주시대 때의 주된 Y-DNA 는 Q). 한족이란 한나라 시대 이후 즉, 기원후의 중국인을 말하는데 바로 그때부터 황화지역의 O2 가 중국 대륙 전체로 급속히 퍼지면서 기원후 중국인은 O2(50~60%), O1(20~30%) 의 비율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경우는 O2(43~45%), O1b2(토착민, 35~40%) 이며 한국인의 O2 가 기원전 1000년경 이후 중국인의 이주에 의한 결과였다면, 당연히 한국인 중에 O1 의 비중도 크게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O2 와 O1 이 섞인 집단에서 자석처럼 O2만 쏙 빼내에 한반도로 옮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우 O1이 2% 미만으로 거의 없습니다. 한국인의 O2는 중원이 아니라 요하지역에서 왔음이 아주 확실하게 밝혀지는 셈입니다.
그럼 어떻게 홍산문명 세력이 몽골족, 선비족, 만주족 등이 아닌 한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쉽게 증명이 됩니다. 첫째, 홍산문명을 이룬 민족은 농경민족 이었습니다. 만주지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룬 민족은 고조선과 부여 밖에 없습니다. 문화를 의미하는 Culture 가 Agriculture 에서 유래되었듯 문화는 보통 농경의 시작과 함께 피어납니다. 둘째, 홍산문화와 한반도 문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유물로써 밝혀졌습니다.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 증거인데 북방족들 중에서 홍산문화의 주체인 O2 유전자를 주된 Y-DNA 로 갖고 있는 민족은 한민족 뿐입니다. 다른 북방족들은 C2 위주의 집단들입니다.
또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조양시에서 기원전 1000년경에 최초로 고조선 비파형동검이 시작이 되며 이 동검이 수백년에 걸쳐 만주지역으로 퍼지고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이 세워질 무렵인 기원전 200년 경에 세형동검의 형태로 퍼집니다. 이는 고조선의 이주 역사와 일치합니다. 역사적 증거 - [삼국지위서동이전]: “많은 (고조선) 유민들이 마한의 고토로 흘러들어 마한이 세워지게 되었다”, [후한서]: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깨져 이에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 후 스스로 ‘한왕(韓王)’에 올랐다”
기원후에는 부여가 한반도로 남하하여 고구려, 백제, 가야를 세우게 되고, 고려시대 때부터는 만주지역에 유목민과 수렵채집인들만 남게 됩니다. 즉, 요하문명(홍산문화)을 일군 농경 세력들이 만주를 거쳐 전부 한반도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 북방 이주민(O2, 43~45%)의 수가 토착민(O1b2, 35~40%)의 수를 능가함과 동시에 한반도 최초의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우리는 북방 홍산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튜브 'KBS역사스페셜 - 대성동 고분의 비밀, 가야인은 어디서 왔는가' 의 25:50 부터 보시면 부여가 조양시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옵니다. 중국의 유명한 학자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었고, 후한서에 언급된 부여의 풍습이 상나라 풍습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을 보면, 분명 우리 한민족은 하가점하층문화(초기 고조선) -> 상나라 -> 후기 고조선, 부여 -> 고구려, 백제, 신라 로 이어지는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5 가지 의문점은 1. 진수의 『삼국지』「오환선비동이열전」에서 "마한(馬韓) 54국(國)의 종주국은 월지국(月支國)"이란 기사가 나오고, 월지국은 한국고전용어사전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있던 국가였다고 나오는데 마한(馬韓)이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 또 54년 동안 제위에 있었던 한무제 유철(재위 서기전 141~87)이 장건의 군대를 보내 월씨국(大月氏國)을 멸망시킨 기사가 『한서』에 나옴. 김부식의 『삼국사』 「최치원열전」에서도 마한(馬韓)에서 고구려가 진한(辰韓)에서 신라가 나왔다는 기사가 나옴.
2.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깨져 이에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 후 스스로 ‘한왕(韓王)’에 올랐다” 여기서 바다로 들어가 도망했다고 하는데, 고대에는 황허와 장강도 발해와 함께 바다인 해(海)로 불렸음.
3. 거기다 김부식의 『삼국사』 「신라본기」 일식기록을 미항공우주국(NASA)의 일식 시뮬레이터로 돌려봤을 때에 의하면 서기 201년까지 신라의 강역은 안휘성 부근 팔공산 경주로 현재도 그 지명이 남아 있고 경주 인근의 지명들이 역시 안휘성 경주 팔공산 인근의 지명들과 지금도 일부가 같음.
4. 서기 261년 김미추 이사금(신라의 제13대 왕, 재위 262∼ 284)이 즉위한 때쯤에 만들어졌을 걸로 보이는 황남대총에는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공개한 동시대 로마제국에서 만들어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유리세공품들이 발굴되고 진흥왕(신라의 제24대 왕, 재위 540~576)이후로 위진남북조(서기220~589)의 상황에서 수나라가 통일한 이후로는 더 이상 로마제국 유물들이 발굴되지 않음.
5. 김부식의 『삼국사』 에는 백제는 북부여에서 나온 고구려(하북성 북경 조양구)에 부용(속국)되어 있었고, 신라는 백제에 부용(속국)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백제의 강역은 진평(요서, 내몽골)과 산동반도를 차지한 기사가 나오고, 「최치원열전」에는 "고리, 백제의 전성기에 강병 100만이 있어 북으로 유연제노 남으로 오월을 정복하여 중국(장안과 낙양에 도읍한 국가들)에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옴. 그렇다면 초기 신라인들은 제(濟) 땅이었던 산동성에서 강소성을 거쳐 안휘성까지로 이동했다는 결론이 나옴. 그 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60년간 한반도 남부인 경상북도 팔공산 경주로 이주했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부여인들이 한반도 남부로도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산동, 강소, 안휘에는 김(金)씨 집성촌이 나옴. 그리고 서기 787년 이후 신라가 멸망하는 935년까지는 한반도 경상북도 경주일대에서만 일식을 관측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중간 과정에서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꺼임?
다시 말해 하북성 북경 조양구쪽에 자리잡았던 조선-북부여-고구려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로만 간 것이 아니라 중원쪽으로도 이동한 기록들이 나오고 삼국의 실질적인 수도와 강역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원(유연 제노 오월의 땅)에서 시작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반도로 밀린 걸로 나오는데?
@@historyreadman 중원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기원전 1000년 ~ ) 이미 중국 본토 (중남부) Y유전자 O1(O1a + O1b1) 이 기존 황화강 유전자인 O2 와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은 O1(O1a + O1b1) 유전자가 2% 미만이므로 백제, 신라인들이 중국 중남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후에 현지 중국인들과 섞여버렸고 한반도로 건너오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즉, 한반도로 진출했던 백제, 신라 세력은 한반도 주도 세력으로 살아남고, 중국 본토로 진출했던 백제, 신라 세력은 중국화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중국 중남부로 이주한 백제, 신라인들이 한반도로 다시 회귀했다면 중국 본토 유전자인 O1도 섞여서 들어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인들은 O2 와 O1 이 섞여있지 않았던 지역 즉, 하북성을 포함한 하북성 위쪽 (요하) 농경 세력이 이주했다는 결론이 나오며, 이는 역사적 기록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한나라 때까지 조양시 및 고죽국 (갈석산 부근) 에 위치했던 부여와 고조선인들이 베이징에 위치했던 연나라의 위만에게 요서지역을 내주고 (그 지역에 곧바로 한나라 한사군이 들어섬), 만주 및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사실과 부합합니다. 조선왕 ‘준’ 이 위만에게 나라를 뺏기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도달했다는 기록에서의 ‘바다’ 는 당연히 발해만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고조선은 갈석산 부근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韓(삼한) 에 대해 삼국지 위지동이전, 후한서 모두 사방 4천리 (동서, 남북으로 각각 4천리) 라고 명백히 적혀 있으므로, 삼한 또한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만주) 지역까지 넓게 퍼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교수님이 교과서 먼저 만들어서 제대로된 역사배우기 운동 합시다.
인쇄와 편집은 제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치만 개혁할께 아니라 이제 역사를 개혁해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너무 기가막히네요...교과서가 개정되어야...역사의 진실에 눈이 열려서...한국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데...사실에 입각한 역사서술이 빨리되고...식민사학자들과 중화사관에 찌들은자들이 개망신 당해야하는데....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 안타깝습니다.. 21세기 한국독립한지도 80년가까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역사독립은 못한것 같습니다..이박사님 말씀대로 2022년에는 국사교과서를 반드시 수정해야
합니다.. 박사님이 문화부장관으로 가셔야하는데... 정말
대부여(진조선), 북부여, 졸본부여(동명부여), 동부여(가섭원부여), 갈사부여, 연나부부여(서부여), 남부여(백제)
고조선=부여 가요 ???
@@뭐가중헌디-g9c 고조선말기에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꿨습니다. 이때 부여라는 이름을 처음 쓴거지요.
이와 관련해서 해모수가 처음 부여를 건국할때 과거 대부여지역 북쪽에 나라를 세우면서 "북부여" 라 한것이지요.
@@뭐가중헌디-g9c 졸본부여는 동명제가 세운 부여이고요,
나중에 고주몽이 졸본으로가 졸본부여의 공주(소서노)와 결혼하고 이후 나라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고, 이후 국호를 고구려로 변경 한것이지요.
동부여(가섭원부여)는 해모수의 후손인 해부루가 기존 북부여땅을 떠나 동해쪽으로 가서 다시 세운 부여이지요.
(동부여는 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죠)
이덕일소장님 강의 항상 잘듣고있습니다..
여기서 역사를 배웁니다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일단 대학은 가야하니..암기식역사는 현 교과서를보고 시험치고나면 교과서는 버리고, 잊어버리고 이 채널에서 참 역사를 배워라..라고 얘기합니다 ㅎ
잘보고 갑니다.
고조선-부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국사가 제대로 쓰여집니다.
그러게요 ㅜㅜ 사기꾼들 때문에 제대로 못배웠어요 ㅜㅜ
와... 이 ㄱ 같은 것들 난 부여가 여태 고구려보다 기껏해야 100년 일찍 건국됬는줄 알았는데; 저런 기록이 있었다니;; 서기전 1000년 전이면 고구려보다 적어도 1000년 전이란 소리잖아
어이가 없구만; 예전에 진이였는지 한이였는지 부여왕이 죽으니 옥갑을 선물했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었는데 구라인가 했는데 이정도의 나라라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얘기같은디 ㅡㅅㅡ
고대조선(산융) ㅡ 대부여(동호) ㅡ 북부여ㆍ고구려 ㆍ요서백제
왜가 뿌려 놓은 길을 가고 있는 이 땅의 많은 학자들 보고 있나
우와'. 교과서가 엄청 왜곡해 놓았네요. 기가 막힙니다. 이런 일을 한 자들은 마땅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국사교과서를 반드시 바뀌야된다 대찬성입니다
자꾸 언론화가 되어야 될듯합니다
크 쩐다
현재 진행형인 역사.
QR코드가 있는 투표용지를 보고
멍!해졌습니다.
짝 짝 짝............
이덕일 교수님
감사합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자부심 넘치는 역사로
올바르게 알려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역사를 재미없고 관심 딸어지게 만드는 식민 교육을 아직도 하고 있네요. 교사들도 얼마나 답답할까요. 제 정신으로는 못할 짓 같아요.
깽단 사학자들을 전부 체포해서 요덕 수용소로 보내면 안 되나?
서기전1046년 부여 건국은 색불루가 후조선(삼한 삼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록산 별칭 부여로 옮겨간 해가 전조선(삼한조선)을 건국한지 1048년 되는 해와 비슷한데요.
자주(소신있는)민 역사(시민의 의지) 를 자주민의 혼으로 역사정신으로 주체도 자주민적 사고와
의지로 기록하고 배워야 하며 혹독한 비평과 함께 목숨걸고 무엇을 위해 행함인지 정확하게 교육받아야. 밣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우리민족의 역사 미래를 위하여 자주민국의 교육교서를 진실된 시민이 주인인 (주체) 로
기록 배울 권리(의무) 기록(교과서) 어떻게 해야 하나.
충청남도에 부여가 있는데 남부여이어서 부여였군요
형수취수혼은 히브리인들과 풍습이 비슷하네요.
대가 끝나지 않도록 배려하고(히브리인들은 형님이 아들없이 죽었을때 형수에게 들어가 태어난 아이는 형님의 아들로 하고 대를 잇게 함) 그 당시 남편이 사망시 살아가는데 너무 힘들어하니 ...
국사교과서를 바꾸는 일 참 중요합니다. 식민사관에서 탈피하여.
그런데 일반인들은 국사에 크게 관심없어도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부여의 법을 보니 참 가혹하고 인권을 생각지 않는 법이었군요. 바람직하지는 않았다고 보입니다
영상 본 거 맞니?
부여와 후연과 고구려는 어떤 관계일까요? 백제 건국 세력의 이동 루트도 궁금합니다.
문사님이 운영하시는 채널에 백제 관련 영상 추천합니다. 지금 이 영상에서 이덕일 소장님이 말씀하시는 만리장성 북쪽의 부여의 위치와 고구려 백제가 낙랑군을 공격하는 위치 백제의 초기 건국 위치와 이동 루트가 대략 맞아 떨어집니다.
ruclips.net/video/RvJdnC4uB9g/видео.html
ruclips.net/video/J2vKA62N_N8/видео.html
ruclips.net/video/RZ4GsZM3tdM/видео.html
웹툰 작가님들 선생님 찾아가세요. 대박 칠 겁니다.
정말 중요한 진실입니다.
그만큼 아직도 역사학쪽이나 정치쪽이나 친일이 넘치고넘쳐있고 뿌리가 깊다는거
선생님 강의 들으면서 하나하나 바른 역사를 배워 나가겠습니다.
응원합니다~
이게 가만히 보니까 중국땅 역사의 시작은 동이족이었음 동이족이 곧 우리만은 아니지만 황하문명 보다 오래된 홍산문명 부터 은나라 까지 전부 동이족이고 최소 하화족은 송나라 가야 등장함
부처님 오신날 사월초파일 4.8 이 부여랑 관계있다고 들은거 같은데;;;해모수인가 해부루인가? 이것도 까먹었네 ㅠㅠ
부여는 지방자치제의 원조네요
배달은 너무 세계사적인 뿌리라서 그렇다고 쳐도 고조선 역사는 배워야 되는게 아닐까 싶네요 진한 마한 번한의 3조선 역사를 확고히 해야 뿌리가 강하게 설 듯 단지 기원 1000년전 부여는 처음 본거라 기자조선이나 마한하고 관계 있을까 생각도 드네요
우리의 기원은 고조선이 아니고 부여라고 봐도 되겠네요.
고조선이라고 축소한것도 식민사관일수도 있겠
역사학자들이 모여 힘을합쳐서 역사찾기에 힘쓰고 역사를 바꾸는데 애쓰는것이 정상적인 학자입니다 후세가 걱정됩니다
발해역사도 자세히 알려주세요
단군조선, 위만조선, 과 부여와의 관계, 백성들의 구성과 영역차이
조선이 잇을 당시 , 부여도 잇다가, 조선이 망하면서, 부여가 대표자가 된 것인지
고조선이 망하고 부여라는 세력이 만들어지고, 성장한 것인지,, 구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 모르겟어요
역(역사)적(적폐대상을)끌어내자
서울대와 연대의 식민사학자들~!!!
굥스러운것들이 권력을 잡고,,,
자랑스런 우리의 고대역사를
이유도없이 최대한 축소시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깨부수고 쫒아내서,,,
제대로된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찿아야 합니다~!!!
일제 조작 식민사관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하셨네여...교과서 내용 개편해야 할 듯...
가야 6가야 랑 비슷하 는제도네요
6부 제도가 부여에서 시작했나보네요...
그래도 강단사학자들이 부여를 우리나라 역사인 국사책에서 논하는 것만은 불행 중 다행이네요. 중국사 또는 세계사로 기술하지 않은 것이 희안합니다^^
형사취수혼은 노동력이 중요한 고대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제도입니다. 미망인이 아무 대책없이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구약에도 이스라엘족에 이런 제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혹시 발해라는 명칭도 기원전 1천년경 주 무왕이 상나라를 극복하던 시기에 있었을까요?.
조선때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들었는데 조선의 정규군은 얼마나 되었는지 아시는분 아르켜주세요
거의 은나라=고조선계가 세운 중원의 국가로 보는게 맞는듯.
서기전 1046년에 주나라가 상나라를 이길 당시에 해동의 여러 이민족들이 부여에 속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면 고조선도 있을 때 아닌가요?
고조선과 부여가 별개의 나라로 존재했던건지, 아니면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고조선이 부여인건지가 궁금합니다.
기록들 보면 부여가 먼저인듯 보이네요.
고조선도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봐도 될듯
한국 고조선 기원도 식민사관일수도 있겠
@@krauskim7662 거꾸로 얘기하고 있군요. 어디에 부여가 먼저라고 나왔는지 기록을 좀 알려주시지요.
@@krauskim7662 그건 아님.
단군왕검에게 아들이 넷이었는데, 맏아들 부루(扶婁)와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로 특히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삼형제를 삼랑(三郞)이라 불렀다.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塗山會盟)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또한 백제(百濟) 때 지은 부여(扶餘)에 있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단군왕검의 네 아들 중 부소(扶蘇)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 「백제본기」동성왕 22년(서기500년)경에 산 정상을 둘러쌓는 테뫼식 산성을 쌓았고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서기538년)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의 성벽을 쌓았다. 무왕6년(605년)경에 포곡식 복합산성인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남해 부소암((扶蘇庵)에는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듣다 듣다 보니까 ㅈ ㄴ ㄱ 열받네 강단 사학이든 식민사학이든 사대사학이든 이놈들은 지네들이 태어나고 자란곳이 어디며 조상들이 어느 뿌리에서 나왔는지 그 뿌리가 의심스러운 족속들이 아닌가 ???????
아주 옛날 읽은 기억이 나요
그놈들은 왜 여기서 사는 거냐
숭일 아가리 파이터가 역사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가축의 이름이라기보다 고대의 중요했던 것들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삼은것은 아닐까요? 말을 많이 키우웠던, 또는 소를 키웠던 사람들, 기마민족에게 중요햇던 것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붙인 성씨가 아니었을까요? 많은 말을 소유한 마씨, 많은 소를 소유한 우씨, 많은 돼지를 소유한 저씨..등 이렇게 6개 성씨가 지배자 아래, 지배층이었던 것은 아닐까요? 김가 이가 박가 하듯이 말입니다.
정확하게 일본의 천황가의 형태였다는 이야기네요..
천황은 수도 주변을 다스리고, 일본 사방은 수십의 영주가 다스렸고, 형식적인 복종을 하나 서로 땅을 탐하며, 싸운 것이 일본이며.
지금도 영주 개념이 남아있어 정치가가 세습되는 것처럼
영상 다시 보세요. 부여왕이 하부 관직을 직접 임명했다고 하자나요.인사권을 직접 행사했는데 어떻게 일본의 천황과 지방영주 관계와 같습니까.
왕이 직접 군사력을 가지고 휘둘렀는게 일본 천황이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영주를 공격했나요? 이상하게 이해를 하시네요. 다시 보세요.
@@패미박멸 이 영상을 안 보거나 주류역사만 믿는 사람이겠죠..
신분제가 실질적으로 붕괴되는 것이 6.25 를 거쳐서 붕괴 됬듯이, 대한민국 교과서가 바뀌는것은 6.25에 준하는 상황이 되어야 바뀔 것으로 보입니다.
1996년에도 동북공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교과서를 현재 상태로 가르쳐야 이익을 보는 집단이 단순히 조선사편수회 계열학자들만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똑똑한 사람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 정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