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악 명인 허용업의 해금 염불풍류, 길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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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сен 2024
  • #허용업 #해금 #무속악사
    해금독주: 염불풍류, 06'55''길군악
    음원제공: 허용업
    허용업 명인은
    1947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에서 허상천의 3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서울의 가까운 시외지역인 "담터"(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갈매리)에서 주로 성장하였다. 그의 부친 허상천은 민속악(피리)연주자 였으며 백부인 허상복 또한 해방전후 민속악연주의 대가로 크게 활동하던 명인이었다. 이렇듯 허용업은 전통 민속악연주자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부친은 그당시 국악인에 대한 사회적 지위와 열등감, 그리고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젖어 자신의 후손인 허용업만은 국악연주자로 키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물려받은 집안의 음악적 혈통과 천부적인 재질은 어쩔수 없는지 그는 부친몰래 피리관대를 훔쳐내어 뒷동산 호젓한 곳에 앉아 "김"(피리를 배우는 필수적인 첫단계로 피리의 8개 구멍을 모두막고 그대로 내부는 법)을 드리곤 하였다. 그러다 그의 부친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부친의 분노가 얼마나 깊었던지 허용업은 온 전신에 매자국이 돌아 한달여 동안이나 가시지 않았으니 그것은 아들 용업으로 하여금 두번 다시 악기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분발하여 밤이고 낮이고 기회만 있으면 피리관대를 입에서 떼지 않았으니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
    그가 15세 되던해 평소 음주습관이 심했던 부친은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백부인 허상복은 조카의 뛰어난 음악적 소양을 인정하여 그의 지기이자 선배인 당대의 이름높은 연주자 이충선선생에게 허용업의 수련을 부탁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허용업의 천부적인 재질은 한층 더 빛을 보게 되었다. 이충선선생은 수하에 많은 제자를 두고 가르쳐 왔으나 허용업과 같은 총명한 제자는 처음 보았다고하며 그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는 이충선선생으로부터 2개월 여의 짧은 기간에 삼현악곡의 기본곡과 무악 전반에 걸쳐 수업을 완료하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피리의 명인으로 이름 높은 강학수선생을 찾아가 또다시 수련을 하게 되었다. 강학수선생은 조선조 말엽 궁중전악인 김여관선생의 수제자로 피리의 여러가지 독특한 기교와 주법을 거의 완전무결하게 구사하는 이름 높은 분으로 허용업의 음악적 재능은 더욱 더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그가 구사하는 피리주법은 바로 강학수선생의 기예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니 전통적인 피리 주법상의 여러기교가 점차로 소멸되어 가는 현시대에 있어서 허용업의 존재는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의 음악적 욕망은 이에 그치지않고 당시 삼현악곡의 중요곡목인 염불타령의 겹튀김 주법으로 유명한 이일선 선생의 피리주법 또한 전수받게 되었으니 오늘날 그의 피리연주는 전대의 유명한 피리 명인들의 주법이 거의 망라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허용업의 음악적 욕구는 끝이 없어 당시의 유명 연주자라면 그 누구에게도 찾아가 수업 받기를 소원 하였으니 그의 열의에 많은 스승들이 그를 기꺼이 가르쳤던 것이다.
    여기서 그가 구사하는 여러 악기의 스승들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전대의 각계명인이 거의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적(태평소)/최인서, 정규남
    피리/이일선, 강학수, 이충선, 지영희
    대금/허상복, 이충선, 한범수
    해금/지영희, 허상복
    장고/지갑성, 이정업
    이상의 학습을 연마한 허용업명인은 각 악기마다의 특성을 가급적 그대로 명인들로부터 이어받아 그 특색을 그대로 간직하여 연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음악적 예술성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수 없다.
    무속악의 명인 허용업 기악독주집 김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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