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선생님, 채널 여신 이래로 꼬박꼬박 강의 듣고있는 온라인 학생 정윤준입니다. 여쭤볼 것이 있어 댓글 남깁니다. 향가가 신라[실라O,신나X]의 노래라면,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향가는 없는건가요? 그렇다면 향찰은 신라만이 가지고있는 독자적인 체계였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국도 사용하였으나 발견이 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1.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향가는 없는가? - '향가'라는 단어는 , 에 나옵니다. 그리고 , 에서 쓰인 '향가'라는 단어는 신라라는 나라와 관련된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에서 '仍命與大矩和尚, 修集郷歌, 謂之三代目云((진성왕이) 이에 대구화상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에서 '釋永才性滑稽不累於物善郷歌(스님 영재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향가를 잘 하였다)' 등과 같은 기록인데, 여기서의 '향'은 당나라에 대응하여 신라를 일컫던 말로, 모두 '신라의 노래', 혹은 '우리나라의 노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 외의 다른 나라에서 '노래'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이를 '향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2. 향찰은 신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체계였던 것인가? - 잘 구분해야 하는게, '향가'는 '노래'고, '향찰'은 '표기 체계'라는 것입니다. 향찰은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향찰 말고도 '이두'라는 방식이 있고, 사실 향찰과 이두는 동일한 방식입니다. 다만 공문서 등의 산문을 적을 때 사용된 것을 주로 이두문이라고 하고, 향가를 기록할 때 쓰인 것을 향찰이라고 나눌 뿐, 방식 자체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아래 설명부터는 '향찰'과 '이두'를 그냥 '이두'로 합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두문은 삼국 시대부터 쓰이던 차자 표기법이었습니다. 다만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에서 훨씬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진흥황 순수비에도 이두문이 나옵니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은 삼국 시대부터 존재한 표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향찰은 일연이 에서 향가를 기록하기 위해 창시한 표기가 아니라, 이전부터 널리 쓰이진 않았지만 명백히 존재하여 이어져 온 표기법을 계승하여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덧붙여서, 고구려나 백제는 이두와 같은 차자표기법이 퇴조하였는데 신라에서만 유독 적극적으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우선 신라가 고구려/백제에 비해 한문을 도입한 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한문 작성 능력의 부족으로 차자표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에는 신라가 7세기에 이르러서도 당나라에서 온 한문 서간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은 신라는 주로 '구두(입말)'로 명령이 하달되는 체계였기 때문에, 우리말의 입말을 반영하기 위해서 이두 체계를 발전시켰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해가 너무 잘되네요 감사합니다!
다음 영상들 안올려주시나요?ㅜㅜ 너무 잘 가르처주셔서 이해가 잘되는데,,, 이후로 영상이 없네요ㅠㅠㅠㅠㅠ
고전이 어렵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배경 설화를 알고 나니 재미있습니다
정리를 너무 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용가도 강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재파일 : drive.google.com/file/d/175eQ_bdIdYncnVCv9rexvPTsqeyzFOEA/view?usp=sharing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채널 여신 이래로 꼬박꼬박 강의 듣고있는 온라인 학생 정윤준입니다.
여쭤볼 것이 있어 댓글 남깁니다.
향가가 신라[실라O,신나X]의 노래라면,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향가는 없는건가요?
그렇다면 향찰은 신라만이 가지고있는 독자적인 체계였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국도 사용하였으나 발견이 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1.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향가는 없는가? - '향가'라는 단어는 , 에 나옵니다. 그리고 , 에서 쓰인 '향가'라는 단어는 신라라는 나라와 관련된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에서 '仍命與大矩和尚, 修集郷歌, 謂之三代目云((진성왕이) 이에 대구화상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에서 '釋永才性滑稽不累於物善郷歌(스님 영재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향가를 잘 하였다)' 등과 같은 기록인데, 여기서의 '향'은 당나라에 대응하여 신라를 일컫던 말로, 모두 '신라의 노래', 혹은 '우리나라의 노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 외의 다른 나라에서 '노래'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이를 '향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2. 향찰은 신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체계였던 것인가? - 잘 구분해야 하는게, '향가'는 '노래'고, '향찰'은 '표기 체계'라는 것입니다. 향찰은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한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향찰 말고도 '이두'라는 방식이 있고, 사실 향찰과 이두는 동일한 방식입니다. 다만 공문서 등의 산문을 적을 때 사용된 것을 주로 이두문이라고 하고, 향가를 기록할 때 쓰인 것을 향찰이라고 나눌 뿐, 방식 자체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아래 설명부터는 '향찰'과 '이두'를 그냥 '이두'로 합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두문은 삼국 시대부터 쓰이던 차자 표기법이었습니다. 다만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에서 훨씬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진흥황 순수비에도 이두문이 나옵니다.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방식은 삼국 시대부터 존재한 표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향찰은 일연이 에서 향가를 기록하기 위해 창시한 표기가 아니라, 이전부터 널리 쓰이진 않았지만 명백히 존재하여 이어져 온 표기법을 계승하여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덧붙여서, 고구려나 백제는 이두와 같은 차자표기법이 퇴조하였는데 신라에서만 유독 적극적으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우선 신라가 고구려/백제에 비해 한문을 도입한 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한문 작성 능력의 부족으로 차자표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에는 신라가 7세기에 이르러서도 당나라에서 온 한문 서간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은 신라는 주로 '구두(입말)'로 명령이 하달되는 체계였기 때문에, 우리말의 입말을 반영하기 위해서 이두 체계를 발전시켰다는 설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