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과서와 텔레비젼 사극 등으로 통해 얻은 “인상” 에 의하면, 조선은 19XX 전까지는 한문만 알고 상투만 틀었던 것 같은데, 이런 얘기를 들어보면 17XX 에 서학, 즉 천주교와 서양과학은 이미 공기중에 섞여있었네. 18XX 에는 양반사회를 넘어 보통사람들도 얼마든지 설득되어 있었고, 그러니 박해가 나왔겠지. 1846 년에 세상을 떠난 김대건 신부가 이미 19 세기 전반에 얼마나 유창한 라틴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있었는지 알고는 충격을 받았음. 정조는 한문을 고전 스타일로 지어야만 한다고 이 모든 일을 벌였지만, 그가 죽은지 삼사십년 후 어떤 조선인은 이미 라틴어와 불어로 서신교환하는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참으로 바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자기가 싫다고 도외시하고 담쌓고 살았을 따름.
정조 시기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시대였습니다 서구에서는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으로 나아갔는데 왜 정조는 수구 보수반동으로 갔는지가 평소 궁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가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단상이라도 들을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중국과 교류금지를 내린게 혹시 부를 얻게 되는 민간의 교류가 유교 성리학 세계관이 무너지게 되기때문이었을까라는 생각이듭니다 민간에 부가 넘치게될때 성리학적 세계가 무너지기때문이었을까는 생각이 듭니다
정조시기에 대해 궁금한게 또 있습니다 제가 짧은 역사지식으로 찾아보았을때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정벌하느라 60년간 중국해안을 말그대로 비워버렸습니다 그결과 일본은 청나라와의 교역은 조선을 통해서만 할수있게 되었고 조선은 그 독점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고 일본에서는 은의 유출로 큰 위기가 왔다고 알고있습니다 그게 60여년간 이어졌고 조선은 엄청난 은의 유입으로 경제가 발전했었다고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정조때 청나라는 60년 동안의 반란을 끝내고 무역항을 재개하고 일본이 청과 무역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즉 일본은 조선 무역에서의 적자 종속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그 무역에서 축적된 부를 수원성쌓기와 청계천사업등으로 소비해버렸고 정조이후 조선의 경제는 암 흑으로 천천히 들어갔습니다 그 부분에대한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오늘 잠이 안오느라 문의댓글을 글적였습니다
반복해서 오늘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이제 왜 정조가 보수반동으로 돌아섰는지 단초가 느껴집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얻는 민간이 부의 증가로 백성들과 경제적 차이가 증가함으로인해 굶지않고 먹고 살기만하면 안정되는 경제사회관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조선이 무너진다고 정조가 느껐을까요 그래서 청과의 교류를 끊었지 않았을까요
(세종대왕은 업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정조를 왜 대왕이라고 하는지, 정조시기를 왜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오로지 자신의 왕권에만 집착하고, 자신들 정파의 출세에만 눈이 먼 사람들의 기록 만을 역사 교과서로 배우고, 안다는 것이 안타깝네요. 이번 특집을 통해서, 어려운 시대에도 선진 국가를 Benchmarking하여 나라/사회 발전을 생각 했던,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 널리 알리고자 했던 선각자 분들을 알게 되어 정말 감사 합니다.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조금만 천천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 사건을 이야기하실때 듣는 입장에서 일반인인 저는 옛날 40여전전 학창시절 공부할때의 기억을 되살려 사건을 떠올려 맞춰야 하기에 힘이 듭니다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님의 예전 강의에서 지나가면서 나온 이야기인데 정조가 보수반동의 인물이었다는 논조의 논문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적 있습니다 혹시 그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수 이시을까요?
@@박종인의땅의역사 부정적인 부분만 다루시니 댓글이 대부분 정조대왕님을 자신의 왕권만을 아는 그저그런 왕으로 착각들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정조의 위대한 업적이 무엇인지 아실것 같은데요.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정조의 모든 것들을 되돌렸고 이후 세도정치로 개판된 것도요. 마치 조선후기 나라가 개판된게 정조 때문인걸로 구독자들이 착각하고 있는것 같아 무척 안타깝습니다.
@@요론거 평소 정조가 공개적으로 천명한 인사정책은 우현좌척입니다.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고 친인척을 배제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말년에 "이 원칙을 포기한다"고 김조순에게 말한 뒤 김조순을 자기 사돈으로 낙점합니다. "세자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요. 김조순이 의아해할 정도의 원칙 포기였습니다. 그 김조순이 세도정치시대 첫번째 권세가가 된 겁니다. 성리학 이외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것과 함께 정조가 행한 대표적인 부정적인 조치입니다. '정조대왕'이 한 위대한 업적이 뭐가 있는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 정조시기를 다룬 사극 드라마에서 정조가 걸핏하면 동궁 나인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했던 근거가 있었군요.
그러고 보면 팥을 심은 곳에 콩이 날 리가 절대 없죠!
조부인 영조에게서 배운 것이 결국 정치질로 왕권 강화하는 것이 전부였다니 뒷맛이 매우 씁니다.
아직 못자고 있었는데 영상올라오니 너무 좋습니다. 보고 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역사가가 아닌 박종인, 김용삼 두 분이 왜곡된 이 나라 역사를 바로 잡는데 분투 하심에 감사 드리고, 이 노력이 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되기를 갈망 합니다
정조는 개혁군주가 아닙니다 역사왜곡을 바로잡아야합니다
알면 알수록....한심했던 조선의 왕들.........지금도 그걸 이으려는 김씨 조선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
문체반정은 한국과 일본과의 격차를 확연하게 뒤떨어지게 한 정조의 실정입니다.
정조대왕을 폭넓게 알수있어서 강의잘듣고 공부많이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조대왕이라 떠드는者들은 뭔가요.
정조는 가까이 할수록 답답한 왕이네요 이런 왕을 고종이 롤모델 로 삼았다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국으로 치달았나 봅니다 그런왕 휘하에서 북학파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요 수고하셨습니다.
정조대왕 다른 곳에서 제대로 배우시고 말씀하세요!!
그야말로 정조에 대해 제대로 좀더 배우신다음 저한테 선생님(???)하시죠.
애시당초 정조는 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령과 동일한 자입니다. 사상을 억압하고 독단적인 통치기술 이루말할 수 없는 비상식적 정치행위... 결국 이러한 악행이 쌓여 정조사후 세도정치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정조의 한계가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한계 아님?
정조가 십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은.. 이런 평가를 여기저기서 듣고 진심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허망한 진실이네요
잘볼게요 작가님
국사교과서와 텔레비젼 사극 등으로 통해 얻은 “인상” 에 의하면, 조선은 19XX 전까지는 한문만 알고 상투만 틀었던 것 같은데, 이런 얘기를 들어보면 17XX 에 서학, 즉 천주교와 서양과학은 이미 공기중에 섞여있었네. 18XX 에는 양반사회를 넘어 보통사람들도 얼마든지 설득되어 있었고, 그러니 박해가 나왔겠지.
1846 년에 세상을 떠난 김대건 신부가 이미 19 세기 전반에 얼마나 유창한 라틴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있었는지 알고는 충격을 받았음. 정조는 한문을 고전 스타일로 지어야만 한다고 이 모든 일을 벌였지만, 그가 죽은지 삼사십년 후 어떤 조선인은 이미 라틴어와 불어로 서신교환하는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참으로 바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자기가 싫다고 도외시하고 담쌓고 살았을 따름.
싸이코패스에 견줄영조
狂人처럼산 아들과 노론
배다리와 수원성으로 아무근거도 없는 일떠벌려 백성의피,눈물이 보이는듯.
역사왜곡이 심하네요 우리가 알던
정조의 실체가 이렇다니요
진실이 파헤치는 순간입니다 !
ㅣ빠 ?
한밤중에 영상 올리셨습니다
대박 ㅡ ㅋ ㅋ
감사히 잘 듣겠습니다
정말 잘 보고 들었습니다 ㆍ왜 ? 연암박지원
정신에 이끌림이 있었던지 또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제 조금 은 알것 같습니다 ㆍ
주필님 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를 ᆢ♡♡♡
극 미화된 정조시대 Reset. 즉을때까지 모를 뻔..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인 역사를 겨우 접하였으니..
깊은 밤 좋은 영상 고맙습니다.
역사가 정조를 개혁세력이라고 비호하는 이유는 청및서양문물을 배척하고 중화존명을 천명하면서 양반,수구및그 자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해준 때문일까요?
역시 좋은 영상이군요
알면 알수록 꼰대도 그런 꼰대가 없고,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괴기를 뿜어낸 인물이 바로 정조죠
신하들이 죽을 맛이었을겁니다
정조라는 녀석이~~
무슨 책(장)그림을 그린 병풍을 소장하라고 했는데
소장을 안했다고,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조때가 문화의 전성기가 아니라
사실은 암흑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짠가요?
사이코패스 ??
이런 그림을 ~~책가도라고 한답니다,
정조가 신하들한테 책가도를 집집마다 비치하라고 했는데
그렇게 안한 신하들을 죽였다는 겁니다,
정말 웃기는건
그런 책가도가 청나라에서 유입된 그림이란거지요,ㅋㅋ
정조가 개혁군주라고 추앙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의 서사가 주는 동정심인지 뭔지.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저 맹랑한 자화자찬으로 다 설명이 되는 인물.
정조가 책가도 관련 살인은 몰라도 궁중화가를 귀양보낸 기록은 있네요. 자유시험인데도 책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요.그 화가가 또 신윤복의 부친이네요. 아집에 편집증 왕인건 맞는것같습니다.
관련 자료나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선생님? 굉장히 궁금합니다.
계속 댓글이 자동삭제되요ㅜ.특정단어,링크가요
그냥 검색창에 '정조 책가도'이렇게 치면 중앙,동아기사가 나와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당거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해당 기사들, 그리고 해당 사료도 다 찾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서양문물 배우고 했다면
조선이란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학문의 발전 및 분열 이라는 양면성이 일어났죠.
선생님. 그동안 알고 있던 과문한 지식에 선생님의 조선일보 연재와 영상을 숨가쁘게 따라가는 중입니다. 기회된다면 백동수와 김광택의 관계도 듣고 싶네요. ㅡ기남자 박제가를 흠모하며^^
새벽에 올리셨군요..
근데 제가 생각했던 정조와 다르네요?
다음에 또 기대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부국강병을 싫어하는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나 나라라기보단 그냥 거대한 노예시장이었던듯 하아
기타소리도 박기자님 솜씨인가요? 😮
네^^
정조 시기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시대였습니다 서구에서는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으로 나아갔는데 왜 정조는 수구 보수반동으로 갔는지가 평소 궁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가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단상이라도 들을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중국과 교류금지를 내린게 혹시 부를 얻게 되는 민간의 교류가 유교 성리학 세계관이 무너지게 되기때문이었을까라는 생각이듭니다 민간에 부가 넘치게될때 성리학적 세계가 무너지기때문이었을까는 생각이 듭니다
기득권이 깨어지고 권력이 세분화가 되는것을 납득할수가 없었을까요?
제 생각 입니다,
정조는 실학자들과 사신들을 통해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정조시기에 대해 궁금한게 또 있습니다 제가 짧은 역사지식으로 찾아보았을때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정벌하느라 60년간 중국해안을 말그대로 비워버렸습니다 그결과 일본은 청나라와의 교역은 조선을 통해서만 할수있게 되었고 조선은 그 독점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었고 일본에서는 은의 유출로 큰 위기가 왔다고 알고있습니다 그게 60여년간 이어졌고 조선은 엄청난 은의 유입으로 경제가 발전했었다고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정조때 청나라는 60년 동안의 반란을 끝내고 무역항을 재개하고 일본이 청과 무역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즉 일본은 조선 무역에서의 적자 종속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그 무역에서 축적된 부를 수원성쌓기와 청계천사업등으로 소비해버렸고 정조이후 조선의 경제는 암 흑으로 천천히 들어갔습니다 그 부분에대한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오늘 잠이 안오느라 문의댓글을 글적였습니다
반복해서 오늘 들으면서 생각해보니 이제 왜 정조가 보수반동으로 돌아섰는지 단초가 느껴집니다 일본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얻는 민간이 부의 증가로 백성들과 경제적 차이가 증가함으로인해 굶지않고 먹고 살기만하면 안정되는 경제사회관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조선이 무너진다고 정조가 느껐을까요 그래서 청과의 교류를 끊었지 않았을까요
또 일본에서 난학이 발전하게 되는 이유도 네덜란드와 포루투갈과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도 청과의 무역등의 교류가 끊어지고 조선에 종속된 무역역조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요?
문체반정은 학교 다닐 때도 배웠는데 왜 ? 뭐 때문에 이들이 반성문을 써야 하며 맑은 글의 기준이 뭐지?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영재교육을 받았던 정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요? 즐겁게 들었습니다.
연산군만 악행이 아니라
정조 역쉬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네요 감사합니다!
(세종대왕은 업적으로 이해가 가지만) 정조를 왜 대왕이라고 하는지, 정조시기를 왜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오로지 자신의 왕권에만 집착하고, 자신들 정파의 출세에만 눈이 먼 사람들의 기록 만을 역사 교과서로 배우고, 안다는 것이 안타깝네요. 이번 특집을 통해서, 어려운 시대에도 선진 국가를 Benchmarking하여 나라/사회 발전을 생각 했던,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엮어 널리 알리고자 했던 선각자 분들을 알게 되어 정말 감사 합니다.
정조 롤 개혁군주 라 할까 ?왜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조금만 천천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 사건을 이야기하실때 듣는 입장에서 일반인인 저는 옛날 40여전전 학창시절 공부할때의 기억을 되살려 사건을 떠올려 맞춰야 하기에 힘이 듭니다 참고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영훈 교수님의 예전 강의에서 지나가면서 나온 이야기인데 정조가 보수반동의 인물이었다는 논조의 논문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적 있습니다 혹시 그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수 이시을까요?
오른쪽 위에 나사표시가시면 재생속도 조절하는 것있습니다. 그거 조절하시면 됩니다. 지금 속도가 딱 좋습니다.
속도 참고하겠습니다 선생님.
@@보고보고-x3q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종인의땅의역사 고맙습니다
@@waterfront3098 나름 그 기능이 유용합니다. 자막표시 버튼도 있으니 영어영상 보실때 유용하기도 하고요.(저는 듣기가 약해서) 그럼 즐감하세요.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최고의 문장이라고 김택영이 언급한 '야출고북구기'와 '일야구도하기'도 전기수편에서 읽어주셨으면...
이순신관련사업도 좀 소개를 하시지요. 노론 일색의 정치환경에서 어쩔 수없는 정치적 선택도 필요했으리라 봅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니까요.
교과서에 나오는 흔히 아는 개혁군주의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일들이 있었네요..몰랐습니다.
선정도 같이 소개함이 객관적이 아닐런지요.
정조의 선정은 우리나라 역사책 등에 엄청나게 나와 있는데
구지 "선정도 같이 소개함이 객관적이 아닐런지요."라고 하는 이유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의도인가?
정신차리시요! 영정조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 라는 택도 아닌 얘기를 믿고 있는 어리석음을 왜 모르는가!
그럼 당신은 정조대왕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분인가요?
아니오.
개혁성을 부정합니다.
@@박종인의땅의역사 부정적인 부분만 다루시니 댓글이 대부분 정조대왕님을 자신의 왕권만을 아는 그저그런 왕으로 착각들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정조의 위대한 업적이 무엇인지 아실것 같은데요.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정조의 모든 것들을 되돌렸고 이후 세도정치로 개판된 것도요. 마치 조선후기 나라가 개판된게 정조 때문인걸로 구독자들이 착각하고 있는것 같아 무척 안타깝습니다.
@@요론거 평소 정조가 공개적으로 천명한 인사정책은 우현좌척입니다.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고 친인척을 배제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말년에 "이 원칙을 포기한다"고 김조순에게 말한 뒤 김조순을 자기 사돈으로 낙점합니다. "세자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요. 김조순이 의아해할 정도의 원칙 포기였습니다. 그 김조순이 세도정치시대 첫번째 권세가가 된 겁니다. 성리학 이외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것과 함께 정조가 행한 대표적인 부정적인 조치입니다.
'정조대왕'이 한 위대한 업적이 뭐가 있는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요론거 군사적으로 무가치한 화성에 군사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조선 국내에 비축돼 있던 은을 고갈시켰습니다. 왕의 효성의 상징이라고 미화만 하기에는 그 역효과가 너무 컸습니다. 동시대 일본과 청 지도자들이 국가를 경영한 방식과 너무 다릅니다 선생님.
진시황은 "분서갱유" VS 정조는 "분서숭유"
주취감경의 시작은 이산!
부국강병을 싫어하는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나 나라라기보단 그냥 거대한 노예시장이었던듯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