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은 이땐 마무리였음. 그리고 님께 물어보고싶은것이 있어요. 왜 신동수가 타팀에서 2선발급입니까? 1993년은 해태 삼성이 코시에서 붙었는데 이때 삼성 10승 선발투수가 4명이었습니다. 1994년 엘지트윈스에서 뛰었으면... 그리고 신동수보다도 김정수가 큰 경기에서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1992년 플옵때 2번이상 나왔던것이었구요
@@Jimmy-bc3tc 라디오로 들었을때가 많았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이,청소년을 의식했었던 만화를 tv에서 해줬던때가 많았는데 5시 30분~6시 30분에 해줬던 경우가 많았는데 상당수의 집은 tv가 1대였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2명(특히 형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싸웠던것으로 기억하고있구요. 그리고 중학생 1,2학년이었던 사람은 그래도 야구를 볼수있었는데 중 3하고 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은...말 안해도 아시겠죠?
93은 해태 치고는 꽤 어렵게 이룬 우승이었음 정규시즌에도 삼성에게 상대전적이 열세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기아 통틀어 11번의 우승가운데 유일하게 4차전까지 열세였던 시즌 2009슼전도 7차전가긴 했지만 그때도 기아는 항상 앞서가는 위치였는데 93은 어떤면에서 가장 힘들게 우승한 시즌이었다고 봄 그리고 오리지널 해태 로고와 유니폼으로 이룬 마지막 우승이기도 했고 동렬이와 종범이가 함께 이룬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음 이후엔 유니폼 마크가 좀 트렌디하게 영문으로 바뀌고 호랑이도 좀 귀여워졌음
09기아에 비하면 양반임. 09기아는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누가 1위를 할지 몰랐던 상황이었고 팀 핵심멤버였던 김광현,박경완이 빠졌었던 sk에게 코시에서 질뻔했음. 그리고 해태시절만 놓고보면 96년이 93년보다 더 힘들게 우승했음. 그당시 성적이 안좋았던 인천연고 야구팀(현대 유니콘스)이 엄청난 기세로 치고 올라오더니 플옵에서 쌍방울에게 리버스 스윕하고 코시에서 노히트노런을 했음. 이강철,이종범,홍현우가 없었으면 이때 해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하위권을 맛보는 굴욕을 맛봤을 가능성이 높았고
해태 잘 모르는 인간들 많네. 요즘 선수들은 매 타석마다 집중해서 쳐야하는 안타카운 현실이지만 저때는 개인의 상이 우선이 아니라 팀성적이 말해주는 시대였다는 점, 그 점부터 이해들하고 라인업을 좀 봐라. 해태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찬스에 강했다는 사실이다. 전 경기를 통틀어 슬렁슬렁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찬스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빛 부터 달랐던 그들. 타자들은 투수들을 믿었고 투수들은 기회만 오면 타자들이 필요한 점수는 뽑아 줄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호투와 호수비로 경기를 끌어 갈수 있었다는 사실을 해태가 어떤 팀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깎아내리려는 무지한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글이니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인지의 폭을 넓히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조계현은 프로 커리어하이 시즌이었지만, 개인 커리어로 보면 제 2의 전성기였죠. 군산상고 시절부터 강속구에 수준급의 슬라이더, 커브를 구사하는 초특급 투수였지만, 혹사로 패스트볼 구속이 140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올림픽때문에 프로로 바로 오지 못하고 농협을 거쳐 90년에 프로에 입단합니다. 당시엔 워낙 투고타저 시즌이어서 타선은 정말 물타선이었네요. 장채근 대신 정회열이나 박병호도 출장이 늘어났던 시즌이었죠. 이건열은 김성한때문에 아마추어시절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프로 생활을 했죠.ㅠㅠ 원래 주포지션은 1루였습니다. 해태에 입단하면서 포수로 입단, 그 후로 여러 포지션을 전전하다가 91년 한국시리즈를 계기로 외야수로 자리를 잡았죠. 이 외에 소개 안된 이경복, 정성룡, 전성철, 김신, 김병조, 김병두, 구한성같은 백업 멤버들도 있었습니다.
96년엔 김정수가 마무리였고, 97년엔 임창용이 최연소 마무리로 자리를 잡습니다. 임창용의 진짜 뱀직구는 이 때입니다. 우타자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질듯 날아가다 홈플레이트 뒤쪽 모서리를 스치며 꽂히는 패스트볼에 수 많은 타자들이 멍하니 삼진 당하는 장면을 수도없이 연출했죠. 특히 바깥쪽에 강했던 타이론 우즈도 임창용한테는 한 마리 순한 양이었죠.
이종범이 93년도부터 해태에 있어서 93년을 해태의 역대 최고 전력으로 선정하신 것 으로 유추되는데요. 93년의 해태보다 91년의 해태가 더 강했고 이때가 해태 타이거즈 역사상, 가장 강했던 시즌이었습니다. 93 시즌은 3할 타율 타자들이 단 1명도 없었고 (규정 타석 기준) 타선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상대팀에게 완봉패, 완투패를 자주 헌납했던 시즌이었습니다. (규정 타석 기준으로 팀내 최고 타율이 2할 8푼대의 이종범이었을 정도이니 93년으로만 한정해서는 해태 타선은 그저그랬던 수준) 또 김성한, 박철우, 장채근, 이호성 등의 성적이 91년과 비교해서 성적, 기록이 형편없이 크게 곤두박질쳤고, 한대화, 이순철 등은 위의 4명 만큼, 성적이 크게 곤두박질친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노쇠화의 기미가 역력, 91년과 비교해서 폼 자체가 내리막길, 하락세의 길로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타선은 솔직히 1번 타자 이종범의 역동성, 재치, 다재다능, 창의성, 기민함으로 2번, 3번 타순에게 일종의 시너지, 연쇄파급 효과를 전파했던 요인이 컸을 뿐, 강력한 투수력에 비해서 타선은 당시 리그 2위팀 삼성 라이온즈 (양준혁, 김성래, 강기웅으로 이뤄진 3-4-5 막강 클린업 트리오), 1번 타자 야구 엘리트 류중일, 2번 호타준족 좌타자 동봉철, 6번 중장거리포 이종두 등으로 구성된 삼성 타선보다는 훨씬 약했던 것이 팩트입니다. 그런데도 해태가 93년 정규시즌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능했던 이유는 89년에 입단했던 조계현이 89 ~ 92년 시즌까지는 10승 미만 또는 10승을 겨우 넘기는 정도의 준수한 수준의 투수였다가, 93년부터 17승으로 승수가 89 ~ 92년보다 훨씬 큰폭으로 월등히 상향되고 (89~92년 시절의 해태 강타선과 비교해 뚜렷하게 약했던 3할 타자가 단 1명도 없었던, 타순을 데리고 피칭했음에도 자그만치 17승으로 슈퍼 에이스급으로 등극) 군산상고-연세대 시절의 슈퍼 에이스, 야구천재 모습을 되찾고 2차 각성한 조계현의 대활약, (명실공히 리그 TOP 1선발 최강투수로 등극) 선동열의 전문 구원투수.마무리 전향이 해태 팀 특성에 맞게 아다리가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고, 여기에 그해 신인 이종범의 신선한 돌풍, 팀 전체에 커다란 활력소를 제공하면서 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능했던 것 이지, 전체적인 전력은 91년의 해태가 93년의 해태보다 확실하게 강했습니다. 또 93년은 삼성의 박충식이 연장 15회까지 완투했던 그 전설의 한국시리즈 4차전 대구 경기에서 해태가 우여곡절끝에 겨우 간신히 비겼는데 그 경기를 내주었으면 시리즈 3차전 까지는 2승 1패로 앞서면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삼성에게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서 93년 한국시리즈는 삼성이 우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충식이 연장 15회까지 완투했던 그 경기에서 삼성이 이기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났던 것이 삼성에게 분위기, 흐름 상 매우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지요. 삼성이 다 잡은 경기였음에도 박충식에게 연장 15회 완투라는 불멸의 엽기적인 대기록을 선사(?)해주었고, 당시 1등 주역은 양준혁이었는데 정말 좋은 득점 찬스에서 팀배팅안하고 욕심 잔뜩 들어간 양준혁의 영웅심리, 풀 스윙만으로 일관하며 그 이전에 끝낼 수 있었던 경기를 연장 15회까지 끌고 갔었죠. 반대로 해태는 거의 다 진 경기를 무승부로 기사회생하여 분위기가 삼성과는 정반대로 급반전되서 5, 6, 7차전을 연달아 승리하여 시리즈 최종전적 4승 2패 1무로 우승을 차지했던 것 인데, 93년을 역대 해태 최강으로 잘못 알고 계신 이유를 그냥 이종범 때문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93년 해태의 주전포수는 장채근이 아닌, 정회열이었습니다. 93 시즌 초반부터 확연하게 큰폭으로 기량 하락을 보이면서 벤치, 후보로 밀려나서 그해 시즌 초.중반부터는 스타팅 멤버로 출전도 못해서 정회열에게 완전히 주전포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1할 7푼대의 타자가 당시 해태의 주전 포수라는 부분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못받으셨는지요? 아무튼 93년 해태의 우승이 가능했던 가장 근본적인 진짜 이유의 첫번째는 조계현의 아마 시절 특유의 슈퍼 에이스 면모를 완전히 되찾은 대각성이었고, (준수한 레벨의 투수➡리그 전체를 평정하는 리그 TOP 슈퍼 에이스로 빅 점프 레벨 업, 양자 도약한 조계현의 피칭. 93년 리그 최강 타선이었던 삼성 타선을 데리고 경기했거나 그 다음 해 였던 94년 LG 신바람 타순을 데리고 피칭했으면 조계현은 17승이 아닌, 20승을 분명 달성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도 LG 이상훈은 95년 20승으로 이러한 추측을 간접 증명. 최전성기 정점 때의 조계현, 이상훈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대등한 레벨이라서) 솔직히 이종범의 입단, 출현보다도 비중도가 오히려 더 컸던 요인, 이유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디테일한 내막임을 강조해요. 둘째 이유가 바로 이종범의 신선한 센세이션, 바람, 활력이었다는 디테일한 내막을 부연 설명으로 이야기합니다.
영상 몰린 사람이 어리거나 수준이 너무 낮네... 내가 알기론 93년에 해태 10승 투수 5명이 아니라 7명이었을걸?? 물론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기록이고,,, 저기 선발투수라고 소개된 투수중 송유석은 선발이 아니라 중간계투로 10승 올린거고, 선발은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신동수, 이대진이었음,,,모두 10승 올렸고 중간계투 송유석과 마무리 선동렬까지 10승 올려서 총 7명 10승 투수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올린것임,,, 참고로 난 해태팬도 아니고 원년부터 야구 본 사람인데, 내가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중반쯤까지 적어뒀던 야구노트가 있었음,,,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기록 메일 볼수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내가 구독하던 스포츠신문으로 기록및 성적으로 확인할순 있었지만 한번에 내거 보기엔 불편해서 내가 보기 편하게끔 매일매일 각구단 승리투수까지 기록해뒀음,,, 군대 제대하고 취업하고 사는게 바빠지다보니 그후론 기록 못하게 됐고 그때 적어둔 노트도 다 버렸는데, 지금 시대로 생각해보면 그거 안 버리고 보관했으면 야구박물관에 기증하기엔 쪽팔린 자료인가? ㅋㅋ 조영상1승, 김홍명 6승, 김인권 8승, 요렇게 다 기록했었는데.... 참고로 조영상은 태평양, 김홍명, 김인권은 빙그레,,
이호준이 다음해인 94년에 투수로 입단해서 선발자리 들어가고 싶었지만 비벼볼수 없었다고 했을 정도로 해태 선발은 아무나 들어갈수 없는 자리였음 ㅋㅋ 결국 이호준은 중계나 패전처리 뛰다가 타자전향하고 2017년까지 뛰고 은퇴식까지 했으니 타자하길 잘했지 ㅋ 마침 타자들도 세대교체할 시기라 이호준의 타자전향이 시기가 너무 좋았었고
해태는 원년부터 선수들 개개인의 외형적 성적이 그리 뛰어난 팀은 아니었다 초창기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가 타격3관왕을 놓고 다투던 시절 제외하고는. 꼭 점수가 필요한 상황에서 타자들의 응집력이 좋았고 큰 경기에서 팀원들의 결속력이 타팀보다 월등했기에 왕조를 일궈낼 수 있었던거다 투수력은 뭐 단연 타팀보다 압도적이었고
해태 역사상 제일 셌던 팀은 88,89,91입니다.이때의 해태는 2005~2006 삼성때처럼 1~2점차 승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투수들의 포텐셜이 한꺼번에 터졌었던 연도이기도했구요.타선은 상당히 약했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다만 이때 크보는 역대급 타저투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것은 준우승팀 삼성에서 mvp하고 신인왕이 동시에 나왔다는것입니다. Mvp :김성래,신인왕 : 양준혁 다만 이 삼성은 코시때 조계현하고 이종범에게 막혔는데 수비형 포수였던 박선일의 한국시리즈 이탈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까봐 말씀드리자면 1993년 시즌은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 시즌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3할타자는 꼴랑 7명이었고 이 와중에 양신이 신인임에도 타율왕에 20+홈런 치니까 이종범을 밀어내고 걍 신인왕 됐을 정도죠. 저당시에 홈런왕에 딱 3할을 친 김성래는 시즌 MVP가 되구요(당시 WAR수치는 선동열이 김성래의 1.5배가 넘는수준으로 압도적이었음) 그리고 타율 30걸에 당시 해태 선수가 7명이 들었습니다. 이거 참고하세요 www.statiz.co.kr/stat.php?mid=stat&re=0&ys=1993&ye=1993&se=0&te=&tm=&ty=0&qu=auto&po=0&as=&ae=&hi=&un=&pl=&da=1&o1=AVG&o2=TPA&de=1&lr=0&tr=&cv=&ml=1&sn=30&si=&cn=
너무 잘해서 얄미웠던팀.. 하지만 시간 지나고 보니 역대 최강임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뤄취
투수 라인업이 사기 ㅋㅋㅋㅋ
지금 투수 국대를 한팀에 다 가져다 논격
저때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송유석 ㄷㄷㄷ했죠
지금 투수들 국대를 모아도 저 정도는 아닐 듯
@@Jimmy-bc3tc ㅇㅈ
마무리에 선동열까지 ㅎㄷㄷ
그런데 1993해태 투수력은 씹사기가 맞긴한데 타력은...도리어 1991해태가 1993해태보다 더 셀것입니다
선수들도 무섭지만
유니폼 검빨강ㄷㄷㄷ
이 유니폼을 보는순간
한수접고 시작한다
유니폼보고 쪼는 야구팀이 양키스 말고는 있을까?
검은바지 보기만해도 상대팀이 무서워했다능..
정작 해태선수들은 더워서 싫어했다능..
내가 이래서 슬러거 할때도 역대 해태덱을 버리질 못했다...지고 이기고 떠나서 너무 매력적인 라인업
선발이던 조계현, 선동렬, 이강철, 이대진은 타팀에서는 1선발급 선수들이었고
선발과 불펜을 오고간 2진급 투수들인 문희수, 신동수, 김정수, 최향남은 타팀에서도 최소 2~3선발급 투수들이었음. 훗날 최향남은 LG에이스로 성장...
최향남이 2선발급은 아니었음 연습투구때는선동열급인데 실전만 나가면 새가슴
LG로 트레이드되고나서 꽃을 피웠죠
선동열은 이땐 마무리였음.
그리고 님께 물어보고싶은것이 있어요.
왜 신동수가 타팀에서 2선발급입니까?
1993년은 해태 삼성이 코시에서 붙었는데 이때 삼성 10승 선발투수가 4명이었습니다.
1994년 엘지트윈스에서 뛰었으면...
그리고 신동수보다도 김정수가 큰 경기에서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1992년 플옵때 2번이상 나왔던것이었구요
3:29 성님 나오신다
빨간유니폼 마운드에 나타났다하면 상태팀 사시나무 떨듯 다리 휘청휘청.
무서운 호랑이 , 겁을 안먹을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Miss you 해태호랑이💕
평자 0.78 ㅋㅋㅋ. 미쳤다 동렬이형.
86년이 더 심했죠. 262이닝을 던지고도 24승 6패 0.99 방어율. WAR 14.89 탈인간적 기록, 물론 저시즌도 마무리투수인데도 말도안되는 기록을 세웠지만서도 투고타저 극심으로 인하여 MVP는 홈런왕에 3할을 친 김성래에게 돌아갔지만요
@@75cherrypie mvp 안준건
말이안됨--;;;;;
@@이영중-z3i 맨날받아서 한번 다른사람준걸로암
@@호윤-j4k ㅇㅇ
일설에 의하면,술을 밤세 마시고 등판해도 승리한다는 소문이...ㄷㄷㄷ
이때는 케이블 없어서 정규방송에 해태만 편성해줘서 해태팬들은 야구 다볼수있었지
그럼 다른팀 경기는 어떡했나요
@@Jimmy-bc3tc
그땐 주말에 야구 편성해줬어요 mbc kbs
평일에는 할때있고 안할때있고 대부분 해태위주로 방송했어요
@@Jimmy-bc3tc 라디오로 들었을때가 많았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이,청소년을 의식했었던 만화를 tv에서 해줬던때가 많았는데 5시 30분~6시 30분에 해줬던 경우가 많았는데 상당수의 집은 tv가 1대였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2명(특히 형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주 싸웠던것으로 기억하고있구요.
그리고 중학생 1,2학년이었던 사람은 그래도 야구를 볼수있었는데 중 3하고 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은...말 안해도 아시겠죠?
와 미쳤다 선발 전부 10승에다 마무리 선동열 ㅋㅋㅋ 미친팀이다. 역시 타이거즈는 투수
마무리 선동열이 10승 31세이브임 ㄷㄷ
마무리투수가 규정이닝을 채운 말도안되는 시즌...
당시 선동렬 자책점이 0.78로 역대 최고로 기록됨
송유석은 완전선발이 아니라 롱 릴리프정도
@@유키_히힣 방어율 0.76
3:57 장채근 포수 80년대 중후반부터 해태 안방마님이었습니다.
1986-1993까지 해태에서 활약했고, 1988년에는 홈런 26개로 리그 2위였습니다
위에 보면 3할타자가 없음.. 근데 왜 해태가 그리 강하냐.....-_-;; 타점을 찍을 때 다같이 몰아치는 응집력이 당대최고의 팀이었음..그래서 진짜 해태는 원팀이라고 불리는 ..
3:30 기다리고 있었다 ㅋㅋㅋ
얼마전 김응룡 전감독 인터뷰내용
"앞으로도 8.90년대 해태타이거즈 같은
선수구성은 힘들것이다"
일주일에 2~3일은 무등경기장
직관했던...해태아줌마, 응원단장
임갑교성님 보고잡네요😢😢
초등학교때 야구장가면
껌팔던 해태아줌마 삘받으면 응원주도하시고
응원단상에서 푸!푸! 하셨던 응원단장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86년 호랑이 띠 팬입니다~^^
@@고독한라이더-q7e 해태아줌마 가끔 술이과해서 탈의하고 그래서 직윈들이 다음날 입장안시켜줘서 경기장 밖에서 껌팔고 그랬죠 팬들이 항의하면 또입장시켜주고 그때저는 껌한통 무조건 2천원에 사드리고 했던기억이 새롭네요ㅠㅠ
이강철 조계현 신동열 이대진만봐도 말다했지
거기에 신동수,송유석 추가요...
진짜 리그 1선발급 투수가 4명있으니 우승을 못할수가 있나...
신동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93은 해태 치고는 꽤 어렵게 이룬 우승이었음
정규시즌에도 삼성에게 상대전적이 열세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기아 통틀어 11번의
우승가운데 유일하게 4차전까지 열세였던 시즌
2009슼전도 7차전가긴 했지만 그때도 기아는
항상 앞서가는 위치였는데 93은 어떤면에서
가장 힘들게 우승한 시즌이었다고 봄
그리고 오리지널 해태 로고와 유니폼으로 이룬 마지막 우승이기도 했고 동렬이와 종범이가 함께 이룬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음 이후엔 유니폼 마크가 좀 트렌디하게 영문으로 바뀌고 호랑이도 좀 귀여워졌음
해태 86체제 구 멤버들의 사실상 마지막 불꽃이었죠.
이 우승이후 투수진은 이대진 타선은이종범 홍현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임창용 정회열 김종국 박재용 같은 신예들이 세대교체에 성공하며 96-97우승을 이끌게 됩니다
영어 해태보단 한글 해태가 더 위압적
09기아에 비하면 양반임.
09기아는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누가 1위를 할지 몰랐던 상황이었고 팀 핵심멤버였던 김광현,박경완이 빠졌었던 sk에게 코시에서 질뻔했음. 그리고 해태시절만 놓고보면 96년이 93년보다 더 힘들게 우승했음. 그당시 성적이 안좋았던 인천연고 야구팀(현대 유니콘스)이 엄청난 기세로 치고 올라오더니 플옵에서 쌍방울에게 리버스 스윕하고 코시에서 노히트노런을 했음. 이강철,이종범,홍현우가 없었으면 이때 해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하위권을 맛보는 굴욕을 맛봤을 가능성이 높았고
내가 한국 최고 명문팀 팬인게 자랑스럽다 그냥 저 유니폼은 무자비해보일뿐이다 타이거즈 선수들 모두 자부심 가지고 뛰고있다고 확신함
저게 무슨 해태야? 국대지!
93년은 정말 투수로 우승했던 시즌 .. 타자들이 줄 노쇠화가 와서 이종범 없었으면 진짜 어쩔뻔 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 ..
해태 잘 모르는 인간들 많네.
요즘 선수들은 매 타석마다 집중해서 쳐야하는 안타카운 현실이지만 저때는 개인의 상이 우선이 아니라 팀성적이 말해주는 시대였다는 점, 그 점부터 이해들하고 라인업을 좀 봐라.
해태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찬스에 강했다는 사실이다.
전 경기를 통틀어 슬렁슬렁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찬스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빛 부터 달랐던 그들.
타자들은 투수들을 믿었고 투수들은 기회만 오면 타자들이 필요한 점수는 뽑아 줄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호투와 호수비로 경기를 끌어 갈수 있었다는 사실을
해태가 어떤 팀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깎아내리려는 무지한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글이니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인지의 폭을 넓히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이종범이랑 이순철만 합치면 100도루넘네 ㅎㄷㄷ
93년 한국시리즈 5차전 잠실 삼성전
ㅡ이순철.이종범이 루상에서 둘다아웃
ㅡㅡ어느관중의말 치타 두마리가 한꺼번에 죽엇다
조계현은 프로 커리어하이 시즌이었지만,
개인 커리어로 보면 제 2의 전성기였죠.
군산상고 시절부터 강속구에 수준급의 슬라이더, 커브를 구사하는 초특급 투수였지만,
혹사로 패스트볼 구속이 140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올림픽때문에 프로로 바로 오지 못하고 농협을 거쳐 90년에 프로에 입단합니다.
당시엔 워낙 투고타저 시즌이어서 타선은 정말 물타선이었네요.
장채근 대신 정회열이나 박병호도 출장이 늘어났던 시즌이었죠.
이건열은 김성한때문에
아마추어시절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프로 생활을 했죠.ㅠㅠ 원래 주포지션은 1루였습니다.
해태에 입단하면서 포수로 입단,
그 후로 여러 포지션을 전전하다가
91년 한국시리즈를 계기로 외야수로 자리를 잡았죠.
이 외에 소개 안된 이경복, 정성룡, 전성철, 김신, 김병조, 김병두, 구한성같은 백업 멤버들도 있었습니다.
93년 10승8패 기록한 까치 김정수가 빠진게 아쉽네요
추가로 한국시리즈에서 활약은 대단했했죠. 96,97년도 한국시리즈는 마무리로 나와 선동렬 없는 빈자리를 잘 메꾸어준걸로 기억해요.
96년엔 김정수가 마무리였고,
97년엔 임창용이 최연소 마무리로 자리를 잡습니다.
임창용의 진짜 뱀직구는 이 때입니다.
우타자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질듯 날아가다 홈플레이트 뒤쪽 모서리를 스치며 꽂히는 패스트볼에
수 많은 타자들이 멍하니 삼진 당하는 장면을
수도없이 연출했죠.
특히 바깥쪽에 강했던 타이론 우즈도 임창용한테는 한 마리 순한 양이었죠.
어!!! 처음 보는티비대 진짜 제밌다
이야 타자 타율이 저거밖에 안되는데 우승을 했다고? 저건 진짜 투수진이 미쳤다는건데... 대단하네요
저때가 전체적으로 극강의 투고타저였습니다.
팀방어율 자체가 2점대가 3팀이었고, 꼴지 쌍방울도 4.00이었을만큼..
선발 좌완 김정수도 있고 포수는 신인정회열 지명대타 정성룡 도 있죠
정회열은 90시즌 입단했습니다
김정수는 왜 없나요?
그시절 야구는 해태처럼,,
너무 좋은데 많이 해줬으면 해요 아님 제가 체널사서 계속 하고 싶은 심정
김정수와 이건열은 가을야구맨
93년 주전 포수는 장채근에서 정회열로 거의 넘어갔죠...
정회열도 부상으로 93 94시즌만 주전이고
장채근하고 트레이드된 최해식이 95~99주전
이종범이 93년도부터 해태에 있어서 93년을 해태의 역대 최고 전력으로 선정하신 것 으로 유추되는데요.
93년의 해태보다 91년의 해태가 더 강했고 이때가 해태 타이거즈 역사상, 가장 강했던 시즌이었습니다.
93 시즌은 3할 타율 타자들이 단 1명도 없었고 (규정 타석 기준) 타선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상대팀에게 완봉패, 완투패를 자주 헌납했던 시즌이었습니다.
(규정 타석 기준으로 팀내 최고 타율이
2할 8푼대의 이종범이었을 정도이니 93년으로만 한정해서는 해태 타선은 그저그랬던 수준)
또 김성한, 박철우, 장채근, 이호성 등의 성적이 91년과 비교해서 성적, 기록이 형편없이 크게 곤두박질쳤고,
한대화, 이순철 등은 위의 4명 만큼, 성적이 크게 곤두박질친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노쇠화의 기미가 역력,
91년과 비교해서 폼 자체가 내리막길, 하락세의 길로 접어든 시점이었습니다.
타선은 솔직히 1번 타자 이종범의 역동성, 재치, 다재다능, 창의성, 기민함으로 2번, 3번 타순에게 일종의 시너지, 연쇄파급 효과를 전파했던 요인이 컸을 뿐, 강력한 투수력에 비해서 타선은 당시 리그 2위팀 삼성 라이온즈 (양준혁, 김성래, 강기웅으로 이뤄진 3-4-5 막강 클린업 트리오), 1번 타자 야구 엘리트 류중일,
2번 호타준족 좌타자 동봉철,
6번 중장거리포 이종두 등으로 구성된 삼성 타선보다는 훨씬 약했던 것이 팩트입니다.
그런데도 해태가 93년 정규시즌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능했던 이유는
89년에 입단했던 조계현이 89 ~ 92년 시즌까지는 10승 미만 또는 10승을 겨우 넘기는 정도의 준수한 수준의 투수였다가,
93년부터 17승으로 승수가 89 ~ 92년보다 훨씬 큰폭으로 월등히 상향되고 (89~92년 시절의 해태 강타선과 비교해 뚜렷하게 약했던 3할 타자가 단 1명도 없었던, 타순을 데리고 피칭했음에도 자그만치 17승으로 슈퍼 에이스급으로 등극)
군산상고-연세대 시절의 슈퍼 에이스, 야구천재 모습을 되찾고 2차 각성한 조계현의 대활약, (명실공히 리그 TOP 1선발 최강투수로 등극)
선동열의 전문 구원투수.마무리 전향이 해태 팀 특성에 맞게 아다리가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고,
여기에 그해 신인 이종범의 신선한 돌풍, 팀 전체에 커다란 활력소를 제공하면서 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능했던 것 이지,
전체적인 전력은 91년의 해태가 93년의 해태보다 확실하게 강했습니다.
또 93년은 삼성의 박충식이 연장 15회까지 완투했던 그 전설의 한국시리즈 4차전 대구 경기에서 해태가 우여곡절끝에 겨우 간신히 비겼는데 그 경기를 내주었으면 시리즈 3차전 까지는
2승 1패로 앞서면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삼성에게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서 93년 한국시리즈는 삼성이 우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충식이 연장 15회까지 완투했던 그 경기에서 삼성이 이기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났던 것이 삼성에게 분위기, 흐름 상 매우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지요.
삼성이 다 잡은 경기였음에도 박충식에게 연장 15회 완투라는 불멸의 엽기적인 대기록을 선사(?)해주었고,
당시 1등 주역은 양준혁이었는데 정말 좋은 득점 찬스에서 팀배팅안하고 욕심 잔뜩 들어간 양준혁의 영웅심리, 풀 스윙만으로 일관하며 그 이전에 끝낼 수 있었던 경기를 연장 15회까지 끌고 갔었죠.
반대로 해태는 거의 다 진 경기를 무승부로 기사회생하여 분위기가 삼성과는 정반대로 급반전되서 5, 6, 7차전을 연달아 승리하여 시리즈 최종전적 4승 2패 1무로 우승을 차지했던 것 인데,
93년을 역대 해태 최강으로 잘못 알고 계신 이유를 그냥 이종범 때문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93년 해태의 주전포수는 장채근이 아닌, 정회열이었습니다.
93 시즌 초반부터 확연하게 큰폭으로 기량 하락을 보이면서 벤치, 후보로 밀려나서 그해 시즌 초.중반부터는 스타팅 멤버로 출전도 못해서 정회열에게 완전히 주전포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1할 7푼대의 타자가 당시 해태의 주전 포수라는 부분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못받으셨는지요?
아무튼 93년 해태의 우승이 가능했던 가장 근본적인 진짜 이유의
첫번째는 조계현의 아마 시절 특유의 슈퍼 에이스 면모를 완전히 되찾은 대각성이었고,
(준수한 레벨의 투수➡리그 전체를 평정하는 리그 TOP 슈퍼 에이스로 빅 점프 레벨 업,
양자 도약한 조계현의 피칭.
93년 리그 최강 타선이었던 삼성 타선을 데리고 경기했거나 그 다음 해 였던 94년 LG 신바람 타순을 데리고 피칭했으면 조계현은 17승이 아닌, 20승을 분명 달성했을 것 입니다. 실제로도 LG 이상훈은 95년 20승으로 이러한 추측을 간접 증명. 최전성기 정점 때의 조계현, 이상훈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대등한 레벨이라서)
솔직히 이종범의 입단, 출현보다도 비중도가 오히려 더 컸던 요인, 이유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디테일한 내막임을 강조해요.
둘째 이유가 바로 이종범의 신선한 센세이션, 바람, 활력이었다는 디테일한 내막을 부연 설명으로 이야기합니다.
박수드리고 갑니다
이건 인정..
일목요연하네요. 확실히 타선은 91년을 정점으로 선수들이 내리막을 타고 있었죠 ㅎㅎ
이사람 그냥 삼성팬인거 같은데?
제일 어이없는게 조계현한테 만약~
이부분임 그럼머머 10이대호한테 이대형의 다리가 있었으면 타격8관왕임?
야만없 야만없 신나는 노래~
뭐 길게 쓰셨지만 승률이 93 시즌이 더 높았어요.
이호성도 사업이 아니라 타격코치를 했다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 않았을듯...
야구팬들이라면 공감할만한게 홈런이 오로지 힘만으로 만들기 어렵고 기술도 있어야하는데 그런 기술적인걸 가르쳤다면...
생긴게 딱 포악한 조폭임.
재산 노리고, 남의 집 생떼같은 아이들
셋과 여자도 죽였으니,
죽어서도 죄를 감당 못하지.
쯧.쯧.
기아 애들 죽어나갔을듯...
선동열이 너무 강해서 몸만 풀어도 상대편 기가 죽었다죠 ㅎㅎ 안타치면 재수고 못쳐도 본전이라는 ㅎ
호남 양키스.. 이때도 대단했지만.김일권.성한.봉연.종모.준환.무종.있을때도 대단햇지요~^
이때가 최고의 타이거즈
93年 이종범 선수
해태 타이거즈 입단 했나요 ?
네 한국시리즈 mvp
신인왕 양준혁 연도
나는 이호성 하나 데리고 야구한다.. 김응용감독 ... 이 자막은 무슨 갬성인가.
영상 몰린 사람이 어리거나 수준이 너무 낮네...
내가 알기론 93년에 해태 10승 투수 5명이 아니라 7명이었을걸??
물론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기록이고,,,
저기 선발투수라고 소개된 투수중 송유석은 선발이 아니라 중간계투로 10승 올린거고,
선발은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신동수, 이대진이었음,,,모두 10승 올렸고 중간계투 송유석과
마무리 선동렬까지 10승 올려서 총 7명 10승 투수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올린것임,,,
참고로 난 해태팬도 아니고 원년부터 야구 본 사람인데,
내가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중반쯤까지 적어뒀던 야구노트가 있었음,,,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기록 메일 볼수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내가 구독하던 스포츠신문으로
기록및 성적으로 확인할순 있었지만 한번에 내거 보기엔 불편해서 내가 보기 편하게끔 매일매일 각구단
승리투수까지 기록해뒀음,,,
군대 제대하고 취업하고 사는게 바빠지다보니 그후론 기록 못하게 됐고 그때 적어둔 노트도 다 버렸는데,
지금 시대로 생각해보면 그거 안 버리고 보관했으면 야구박물관에 기증하기엔 쪽팔린 자료인가? ㅋㅋ
조영상1승, 김홍명 6승, 김인권 8승, 요렇게 다 기록했었는데....
참고로 조영상은 태평양, 김홍명, 김인권은 빙그레,,
93년 해태 10승 투수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김정수 송유석 선동열. 6명
송유석은 5선발겸 롱릴리프
선발이 초반에 무너지면 송유석이 투입해서 후반 역전하면
선동열이 마무리 하는 시스탬
신동수는 10승을못했어요 1-4선발이 모두10승이상이고 중간계투랑5선발을 왔다갔다한 송유석이 10승.... 이중 3승만선발승이고 7승이 구원승일겁니다... 선동열도 마무리로 10승인데 구원승으로 기록한거죠 이해 조계헌이 다승왕이었고... 이비슷한 커리어시즌이 고 김상진선수 데뷔해일거에요.. 해태타선은 막강타선이라기보단 1-9번까지 다들 한방이 있죠 다득점내는팀이라기보단 투수전으로 한두점 승부인데 발빠르고 작전수행능력좋은 이순철과 이종범 일발장타 홍현우,김성한,이호성,이건열등이죠
본인 수준이 떨어지네요. 6명인데 7명이라고 하고. 기분 나쁘시죠? 님 글 보면 영상 올리신 분도 기분 많이 나쁠거에요. 참고로, 저도 원년부터 야구 본 타이거즈 골수 팬입니다. 내년이면 프로야구만 40년차네.
송유석은 중간계투로 10승을 했고
93해태는 김정수 신동수 양승철 등 4.5선발은 땜방이 많았음.그리고 주전포수 마스크는 93시즌은 장채근 보다 정회열이 더 많이 게임 뛰었음
저도 지적하고 싶었어요. 선발은 송유석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명타자도 실질적으로는 박철우가 아니라 정성룡이었지요.
93 박철우는 정성룡한테 밀리고 장채근은 정회열에게 밀리고 그다음해 두명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었죠.
대려온게 해태왕조 마지막 주전 안방마님 최해식
30경기 26선발 나온 김정수를 땜빵선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하지 않을까요
이호준이 다음해인 94년에 투수로 입단해서 선발자리 들어가고 싶었지만 비벼볼수 없었다고 했을 정도로 해태 선발은 아무나 들어갈수 없는 자리였음 ㅋㅋ 결국 이호준은 중계나 패전처리 뛰다가 타자전향하고 2017년까지 뛰고 은퇴식까지 했으니 타자하길 잘했지 ㅋ 마침 타자들도 세대교체할 시기라 이호준의 타자전향이 시기가 너무 좋았었고
그거말고 88 91 해태 타자들 성적좀 올려주세요.. 93은 정말 형편없습니다.. 3할 20홈런 타자가 하나도 없어요..
93시즌이 심각한 투고타저 시즌이었죠. 3할타자가 7명밖에 안되던. 이종범이 신인왕 못받고 양신이 받은게 이런 투고타저 시즌에 신인이 타율왕 먹은거 때문이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와중에 이종범 유격수 16홈런 73도루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리고 1993해태가 최강이면 1996~1997 해태도 최강입니다.
참고로 1997 이종범은 홈런 2위였고 코시 mvp였습니다
해태는 원년부터 선수들 개개인의 외형적 성적이 그리 뛰어난 팀은 아니었다 초창기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가 타격3관왕을 놓고 다투던 시절 제외하고는. 꼭 점수가 필요한 상황에서 타자들의 응집력이 좋았고 큰 경기에서 팀원들의 결속력이 타팀보다 월등했기에 왕조를 일궈낼 수 있었던거다 투수력은 뭐 단연 타팀보다 압도적이었고
원년부터 16년간 9번 코시 우승한 괴물모드 기간....
지금보니까
진짜 신구 조화가 완벽하네...
88해태도 한번 해주셨음 좋겠습니다
해태 유니폼은 누구작품인지
정말 최고의 디자인
해태 엠블럼이 또 빠질수없지
지금 유니폼이니 엠블럼 해태것 못 따라옴
검빨은
82당시 해태 구단주가 영국 왕궁 근위대 복장을
모티브로 만든 디자인이죠
홈 유니폼은 일본 요미우리 스타일로 제작했습니다
@@byundal8383
감사 하모니다~~^^
김동엽 감독님이 제안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ㅋㅋㅋㅋ
1회에 1번타자 이종범 나가는 순간 최소 1점 내주고 시작함.
5회까지 1점이라도 이기면 선동렬이 몸 풀고, 상대는 경기 포기하는 분위기로...
팀타율은 낮았지만 응집력이 뛰어나서 팀득점 2위였어요.
동큐님 수전본좀 올려주세요.
지명은 박철우가 아니라 정성룡 포수는 장채근 아니라 정회열
ㅎㄷㄷ 지금 있어도 통할 것 같은 느낌....
솔직히 해태는 투수진이 ㄹㅈㄷ 세자릿수 안타 못치고 타율 낮은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선발투수 이강철 조계현 송유석 이대진 그 때 당시에는 걍 핵이었던 선동열 ㅎㄷㄷ 하지만 최강 라인업은 15삼성
ㅇㅈㅇㅈ
해태유니폼 기아타이거즈 입혀라..
그것이 현실이 돼었습니다..
냉정하게 타선은 세대교체가 안되어서 다음해 우승을 못함
3할 넘기는 선수가 드물지만
투고타저시대에서
투수빨로 압도해버린 시즌이 아니었을까
73도루면 이종범 출루하고 다음 타자가 얼마나 마음편했을까... 병살타 부담이 확 줄거 같은데...
선발 김정수가 없습니다. 선발 라인이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이대진에 송유석은 중간계투 아니던가요?
해태 라인업은 깔 것이 없는데, 영상 편집은 좀 그러네요. 글은 다 보기도 전에 슉슉슉~ 사라지네요.
혹시 10롯데도 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92,10롯데도 극강이죠~ 물론 올릴 생각입니다^^
@@odqo 17기아는 어때여
@@odqo 11삼성은어때요?
@@karlchalemagne1628 //////기아는 17보다 09가 더 셉니다.
10롯데가 극강은 아니죠;; 저도 많이 좋아하는 시즌입니다만..
선수들은 레전드, 국대, 최강의 선수단이지만 해태 그룹은.........
전설의 이호성이 나오네 ㄷㄷㄷㄷ
@LA GO 이래서 통구이 돼지들이 문제라니까 ㅋㅋ
@@가로수-w1o 네다홍
@@가로수-w1o 살인자 새끼 팀 빠는 주제에 지역 차별 드립까지 하네 못 배워먹은 놈 ㅋㅋ
살인 저지르기 전에 기록도 기록이니,
어쩌겠나?
얼굴 삭제하고 올려라.
어떻게 4모녀를 죽일 수 있나?
인면수심의 더러운 놈.
자기 혼자 죽으면 될 것을.
악업을 쌓고 갔네.
수준봐라 니들이 그러니 나라가 발전이없는거야 ㅋ
93년도 삼성도 개무서웠는데 그런팀을 떡실신시킨 팀이 해태 그정도로 막강했지
93 삼성 타선이 역대급 ㅎㄷㄷ했죠
미친 선동열 0.78 ㄷㄷ
진짜 선수구성 미쳤냐고....
현질했냐는소리듣겠네 게임이면
진짜 8~90년대는 시대도 시대인데,
야구는 진짜 해태 타이거즈였다.
투수들도 괜찮았고,
타선도 좋았지.
나는 그중에 개인적으로 김준환이 아버지 닮아서 좋았지.
ㅋㅋ.
해태 1순위.
청룡 2순위.
93년 김정수도 10승 해서 총 6명인데 기록 좀 잘 보고 하시길
1993 해태투수진+2017 기아타선=우승
ㅅㅂ 개무섭겠다
144경기에서 최소 7~80승을 할 뜻
사실 선발에는 송유석보다 김정수가 들어가야 하겠는데…
이호성은 과대평가 아닌가? 4번타자인데 홈런 3개는뭐냐 이종범이 16개로 팀홈런 1위네 ;;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걸 증명해준 극강의 팀
이상 그 당시 매일 스포츠 중계석 고 하일성 아저씨 해설 듣는 맛으로 잠을 청한 40대
하일성씨 마지막이 허무.
해설 하일성, 캐스터 유수호
이 두분의 중계가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선동열 감독님 과거 해태 마무리 투수선수 시절입니다.
동렬이도 있고, 종범이도 있던 유일한 우승
해태 역사상 제일 셌던 팀은 88,89,91입니다.이때의 해태는 2005~2006 삼성때처럼 1~2점차 승리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투수들의 포텐셜이 한꺼번에 터졌었던 연도이기도했구요.타선은 상당히 약했던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다만 이때 크보는 역대급 타저투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것은 준우승팀 삼성에서 mvp하고 신인왕이 동시에 나왔다는것입니다.
Mvp :김성래,신인왕 : 양준혁
다만 이 삼성은 코시때 조계현하고 이종범에게 막혔는데 수비형 포수였던 박선일의 한국시리즈 이탈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습니다
막강투수진때문이었는지 한두점내면 이기는 경기....
선동렬 이종범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이강철 이대진 조계현 ㅋㅋㅋ 이게 가능한 멤버입니까?
10승 6명일거에요
조계현, 이강철, 김정수, 이대진, 송유석, 선동렬. 이렇게 6명이 10승 이상을 거뒀죠.
@@baseboy5152 김정수가 아니고 신동수 선수 이었지 않나요??
@사랑해맢크루 93년은 김정수 10승8패이나
신동수 1승1패입니다. 92년에 13승9패였기에 93년도 성적이 아쉽네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까봐 말씀드리자면 1993년 시즌은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 시즌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3할타자는 꼴랑 7명이었고 이 와중에 양신이 신인임에도 타율왕에 20+홈런 치니까 이종범을 밀어내고 걍 신인왕 됐을 정도죠. 저당시에 홈런왕에 딱 3할을 친 김성래는 시즌 MVP가 되구요(당시 WAR수치는 선동열이 김성래의 1.5배가 넘는수준으로 압도적이었음) 그리고 타율 30걸에 당시 해태 선수가 7명이 들었습니다. 이거 참고하세요
www.statiz.co.kr/stat.php?mid=stat&re=0&ys=1993&ye=1993&se=0&te=&tm=&ty=0&qu=auto&po=0&as=&ae=&hi=&un=&pl=&da=1&o1=AVG&o2=TPA&de=1&lr=0&tr=&cv=&ml=1&sn=30&si=&cn=
검.빨 유니폼 개간지네.....대부분 메자구단 유니폼 비수무리 만드는데 해태건 완전 개성적이네....
당시 구단주가 캡틴큐 양주의 그림이 맘에 들어서 선정했다고 해요...
(말탄 나폴레옹 이였나?)
@@상머슴-r8e 영국 근위병 그림이 있었다 하죠
초기 해태 왕조의 임팩트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 같다.
10승투수 6명 아니었는지요
근데 92년 라인업 영상이 없네요 90년도 도 보고싶은데
진짜 저 라인업은 지금 올스타도 저어어어엉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대 못이김 ㄹㅇ
투수는 진짜 ㅈ렸고 타자는 별로로 보일수 있겠지만 당시 엄청난 기록들을 뽑아내던 선수들이고 한방한방이 있는 타자들임 이종범과 홍현우의 콤비와 주장 이순철, 레전드 한대화, 김성한이면 말 다했음
이때 이호성이 4번타자였지요 공포의 4번타자
???나랑께 문좀 열어보랑께
은퇴 후 사업하다가 빚때문에 그 미친짓을 했죠.
자신만 사라지면 될 것을.
공포의 빨검 유니폼
특히 8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죽은 공명을 선동렬에, 사마중달을 빙그레에 비유했을 정도로 선동렬만 보면 벌벌 떨었던 일화가 있었죠.
투수에 비하면 타자가 너무 약해보이는데 저 시즌에,우승한게 놀랍네
저 당시 문희수도 중간계투로 잘 던졌었음 ㅎ
10승투수 6명이었는데 김정수가 빠졌네..
투수라인업이 와
호성형님이빠졋네
93보단 91이 극강이었던걸로 기억 홈런신기록도 세우고
뭐야 이팀 무서워...
한대화선수는 김응용감독과의 불화로 해태를 떠난게 아닙니다
장채근 멋있다
그때의 투고타저의 여파인지 지금 단장님이.... 다 똑딱이만....
역대최고 중견수
이순철 그립다
빵형...
팩트 : 해태는 역대 최고의 투수하고 유격수를 가진 팀이었지 중견수를 가진 팀은 아니었음.
사실 해태가 있었던 때에 역대 최고의 중견수를 가졌던 팀은 삼성 라이온즈 또는 빙그레 이글스였음
@@유영민-f9x그건 팩트가 아니라 니 혼자만의 생각이지.
이순철 백인호 김성한 한대화 박철우 이호성 김종모 장채근 피해갈 타선이 없었죠. 윤재호가 젤만만
우승못하면 이상한 레전드 넘사벽라인업
저때 해태가 박충식 놓친걸 아쉬워 했는데
나중에 해태왔더니 시설 너무 열악하다했다고..
근데 해태 역대 가장 강했던 해는 93년보다도 88년 아니었을까남....
93해태는 해태시절 팀 최다승이지만 86, 88,91이 이 시즌들이 최고였다고 봅니다.
@@adobemastertutorial4924 뭐요? 이보시오! 으사양반~~! 아이구~
해태는 항상 강했음.
91
@@adobemastertutorial4924 실제로는 91해태가 제일 셉니다.
경기수가 126경기였는데 정규시즌 6할 4푼7리였고 코시에서 빙그레 이글스에게 4:0으로 이겼기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