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도 사연이지만 저 편지가 현대에 전해질수 있었던것은 우리 전통 한지 덕분입니다 요즘같은 종이는 고작 100년만 지나면 누렇게 싹아 없어지는데 전통 한지는 천년이 지나도 싹아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발굴으로 사연도 사연이지만 당시의 문화와 풍습 복식등과 한지의 우수성도 다시금 알게되었습니다
땅이 석회질이라면 가끔 부패하지 않은 시신과 부장품이 보존되기도 합니다. 곽재우 장군 유해도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고요. 발굴 당시 제가 기사를 보고 놀란 것은 망자의 키가 180cm 라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한국 남자 평균신장이 152cm 라는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나 의사가 쓴 것은 아니고 복색 연구가가 쓴 것이기는 합니다만 일본 자료를 보면 당시 일본남자 신장은 145 -150 cm정도였다죠. 일본에 잔뜩 남아있는 당시 갑옷을 여자 중학생이 입으니까 대충 맞고 여대생은 작아서 입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 180cm 라면 거인에 속할 정도로 큰 체격입니다. 무장(군인)을 했다는 게 납득이 됩니다. . .
@@봄이오면_다시오리 1930년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산(장지락)을 취재하고 '아리랑' 을 쓴 미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님 웨일스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대개 잘 생겼다. 내가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가진 것 같았다. 나는 저렇게 키가 크고 잘 생긴 한국인들이 외모가 열등해보이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있는 사실에 의아한 느낌을 가졌다.'
@@윤성렬-u6t 몇몇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임.. 일제 시절 부터 시작해서 광복후에도 일본 장학금을 받은 학자들이 학계를 쥐고 있음. 그들의 눈 밖에 나면 학계에서 퇴출 당하는 수준입니다. 이완용이 아들이 서울대 총장을 하고 한국 고서 30만권을 불태운 놈 아들이 문화재 청장을 했던 나라입니다. 윤석열이 대권 후보에 오르 내리는 작금을 보면 세상은 말문이 턱하고 막힐 일들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 나고 있지요.
결혼한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라 부르는데 이렇게 칭하는 건 16세기에도 지금과 똑같았다는 게 신기하네요 원이 어머니가 순탄하게 아이들 잘 가르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을텐데 1586년이면 임진왜란 터지기 6년 전이고 안동이면 전쟁의 피해가 가볍지 않았을 지역인데 남편 잃은 젊은 어머니가 꽤 힘겨운 삶을 사시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네요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1940년생 고성이가입니다. 오늘 이 유투브 를 접하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의 어머니 편지를 제가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원이엄마의 편지와 흡사합니다. 한지에 쓴 것이라서 누렇게 바래었지만 귀한 편지라서 가보로 간직하려고 합니다. 귀한 영상 올려주신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한때 한글전용이냐, 한자병용이냐고 논쟁이 벌어졌고 그논쟁은 아직도 끝이 안났지만, 모든게 디지탈화된 세상이 되다보니 환자병용ㅈ논쟁은 이제는 아무런 논쟁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400년전의 한글과 지금의 한글을 비교해보면 표기 방법은 달라도 뜻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것. 정말 한글의 우수성을 말해주는것 같습니다.
키 180과 잘 보급돼 쓰이고 있는 훈민정음에 일단 오오... 감탄. 요즘이라면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는 병들도 당시에는 방법 없이 젊은 나이에 저렇게 떠나 보내곤 했겠지요. 6년 후 임진왜란 터졌을 때 원이 엄마는 남편이 전란을 피한 것에 작은 마음 위안이라도 얻었을까요 아니면 더 힘들었을까요. 다른 가족들의 편지들도 들어 있는 걸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었던 것 같네요...
@@김동섭-q8x 이게 사실.,.참 어려운것이...나무관을 쓰는 이유가 잘 썪으라고 하는것인데..석관을 하면 관안에 물이 차거든요.. 빗물이 묘위로 내려 관안으로 습이 차면서 가두어져 시신이 물속에 잠기는 상황이 됩니다 잘 썪지 않는 단단한 나무로 관을 해도 마찬가지가 되기 쉽상이죠.. 그래서 묘는 남향으로 하는데 화강암석관에 단지 탄소가... 석회로 매장하였다고 저렇게 보존이 되니..선조들의 지혜가 남다르다 싶습니다 아니면 원이 어머님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였을까요
그저 쉽게 생각해서 안주인이라는 아내를 부른 명칭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아내를 존중하는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였다는걸 생각해볼수 있을거 같습니다 조선초기는 고려의 문화권이라 사실은 여자를 위한 문화가 강했어요 중기이후로 지금의 우리처럼 갈등과 혐오로 질척이다 사람간에 계급을 나누고 배척하는 사회가 조선후기의 모습일뿐인거죠 우리도 후대에게 조선후기같은 시대를 보여주지 않으려 애써야 할 이유기도 하고... 이북에서는 아직도 아내를 안해라고 말한다죠
@user-zs5ul8zg9i저 편 지 보고도 그런 거짓말이 통 할거라 생각하니? 숙종때 한글로 쓰여진 사씨남정기 를 온 백성이 읽고 민심이 흉흉해져 어쩔수 없이 숙종 이 인현왕후 복위시킨 사실 도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릴한다~ 단 하루면 배우 는 한글인데 무슨 문맹률 90% ?? 미개한 일본어 쓰 는 일본인 머리에서나 나올 법한 생각!
원이 엄마 이야기는 편지나 메모 같은 손글씨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남기는 마음과 기록들이 400년쯤 흐른 뒤에 이처럼 전해질 수 있을까요? 편지 써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네요! 좋은 영상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그 안에.있었다는 시집 가족들의 편지도 보고싶네요. 그 가족이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난리를 겪으면서도 유복자를 낳은 며느리를 알뜰히 보살펴줬길 바라요. 그리고 아마 그랬을것 같습니다. 안동의 무가집안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은 됐을테고 부부사이가 저리도 애틋했다면 박한 시어른들은 아니었을 것 같으니까요. 지금은 부부가 함께 이 땅을 보시고 계시겠지요...
최근에도 아주 상태가 좋은 미라가 발견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그 분은 할머니이고 시아버지랑 친정 조부가 영의정 출신 친정 아버지는 병조판서 남편이 도승지라고 했나. 청풍 이씨이고. 이런 명문가에서 묘를 만들 때 엄청 두꺼운 석회암에 시신 두고 석회로 가득 채워서 묘 만드는데 석회가 당시에 굉장히 비싼 재료이고 석회가 외부 공기나 습기를 차단해서 미라가 될 수 있고 보존상태도 좋다고 나오던데 무덤 파는거랑 명망있는 무신집안이란 거 보니 그런 무덤 썼나 보다.
부인의 흔적을 알수가 없고 아들 한명 묘는 발견된...아들묘 밑에 이름모를 묘가 하나 있는데 그게 부인묘인지 맞다면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남존여비라는 조선의 생활모습은 바뀌어야할듯 자내라고 서로호칭하고 존칭쓰고 처가살이하고 재산도 똑같이 분배에 제사도 남녀구분없이 번갈아지내던것이 임란 호란 맞아 황폐해지고 외부문화들어오면서 변질된듯
@@sun4001 상황에 따라서 쓰는경우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생각해야합니다. 저렇게 절절한 사랑을 하였는데 안좋은 일을 당해 차마 남편 옆에 안가려고 유언을 남겼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간혹 어른이 밑에 있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산에 무덤을 못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몰래 부인 아래로 아주버님 남편 이렇게 한데도 있더군요.
좋은 마음은 소중히 지켜가는게 중요하지요... 처음엔 모두 다 저 부부와 같이 하지만, 나중엔 서로 상처를 상처주거나 해치게 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보통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라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것이고, 더 높은 것을 생각한다면 감정의 차원을 벗어나야 하지만, 어려운 일이죠...
애절한 옛조선에 부부에 마음을 담은 편지지만 지금 현대에 부부간에 마음들이 저리간절할까싶다 성격차이.. 이혼 경제력부재.. 이혼 시댁과 갈등.. 이혼 불륜.. 이혼 만남과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시대상을 보다 옛부부에 서로에대한 존중.배려가 다시금 현대에 부부들에게 찾아들까싶다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다양한 글귀에 원망하며 타박하는 내용도 다수 포함된 것에 놀랐습니다. 양반댁이라 풍요로운 생활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는지 경제적인 원망을 제외한 심적인 아픔을 중심으로 작성한 글귀에서 평민들 일상적인 모습과 다른 여유로운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이전 조선중기까지도 장가간다는 말처럼 남자가 아내의 집, 장인어른의 집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장성하는 20여년정도, 이후 남자의집 시댁으로 들어갔어요. 비슷한 시기에 강원도 강릉의 신사임당도 남편 이원수(덕수이씨)이 강릉 장인어른(신명화)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율곡 이이도 나고 4남3녀를 낳습니다. 여자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시집간다는 조선후기 인조반정후 집권한 성리학 절대주의자들인 서인-노론들이 국가권력으로 제도화 시킨것입니다.
번역찾다가 해가져옴 400years befor love letter to wons father jun 1, 1586 you always said. dear. lets live together until our hair turns gray and die on the same day. how could you pass away without me? who should i and our little boy listen to and how should we live? how could you gp ahead of me? how did you bring your heart to me and how did i bring my heart to you? whenever we lay down together you always told me. dear, do other people cherish and love each other like we do? are they really like us? how could you leave all that behind and go ahead of me? i just cannot live without you. i just want to go to you. please take me to where you are. my feelings toward you i cannot forget in this world and my sorrow knows no limit. where would i put my heart in now and how can i live with the child missing you? please look at this letter and tell me in detail in my dreams. because i want to listen to your saying in detail in my dreams i write this letter and put it in. look ciosely and talk to me. when i give birth to the child in me. who should it call father? can anyone fathom hoe l feel? there is no tragedy like this under the sky. you are just in another place. and not in such a deep grief as i am. there is no limit and end to my sorrows that i write roughly. please look closely ar this letter and come to me in my dreams and show yourself in detail and tell me. i believe i can see you in my dreams. come to me secretly and show yourself. there is no limit to what i want to say and i stop here.
무엇보다 한글로 편지를 썼다는 게 더욱 감동입니다.
세종대왕이 감정표현을 할수 있고 쉽게 쓸수있는 한글을 창제하시니 또 이렇게 백성들이 훗날 빛을 보는 군요.
한글로 썼다는것도 감동이고 여인이 글을 알고 편지를 쓸수있는 시대였다는것도 놀랍네요!
저 여인이 한글을 몰랐다면
저 편지는 존재하지도 못했어요.
세종대왕이 28 자를 만든 이유가
명백해지는 거죠.
400년전 사신분하고 감정을 느낄수 있는것이 참...... 한글 참 위대하다
현재의 한글문법은 일제시대때 일본인 언어학자와 교육학자들이 체계화 한거다.띄어쓰기도 일제시대때 처음 만들어졌다.조선백성 90프로가 글을 못읽었으며 1913년에 오구라쇼헤이 가나자와박사에의해 한글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널리 보급됐다.
@@moclykim8220
거짓말쟁이 일인야만!
조선시대 키가 180cm. 우리 조상님들 정말 키가 크셨네요.
그시대 키가 6척은보통이고 8척장신이란 말이있섰지요.
무관양반집안 이란걸 감안하긴 해야겠지요
@@고인돌이-k8b 구척장신이라는 말이 익숙한데요...
제가 아는 도라지님 ? 털이님 ᆢ
사연도 사연이지만 저 편지가 현대에 전해질수 있었던것은 우리 전통 한지 덕분입니다
요즘같은 종이는 고작 100년만 지나면 누렇게 싹아 없어지는데
전통 한지는 천년이 지나도 싹아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발굴으로 사연도 사연이지만
당시의 문화와 풍습 복식등과
한지의 우수성도 다시금 알게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ㅡ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동시에 출토된 것들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하셨군요. ~~^^♡♡
땅이 석회질이라면 가끔 부패하지 않은 시신과 부장품이 보존되기도 합니다.
곽재우 장군 유해도 미라 상태로 발견되었고요.
발굴 당시 제가 기사를 보고 놀란 것은 망자의 키가 180cm 라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한국 남자 평균신장이
152cm 라는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학자나 의사가 쓴 것은 아니고
복색 연구가가 쓴 것이기는 합니다만
일본 자료를 보면 당시 일본남자 신장은
145 -150 cm정도였다죠.
일본에 잔뜩 남아있는 당시 갑옷을 여자 중학생이 입으니까 대충 맞고 여대생은 작아서 입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 180cm 라면 거인에 속할 정도로 큰 체격입니다.
무장(군인)을 했다는 게 납득이 됩니다.
.
.
@@tunguslisan8878 조선말기 서양인들의눈에비친 조선사람들의키가 일본인보다 머리하나정도 더있었다.. 동양의3국중 가장똑똑하며 인물이좋았다고하더군요
@@봄이오면_다시오리
1930년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산(장지락)을 취재하고 '아리랑' 을 쓴 미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님 웨일스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희며 대개 잘 생겼다.
내가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가진 것 같았다.
나는 저렇게 키가 크고 잘 생긴 한국인들이 외모가 열등해보이는 일본의
지배를 받고있는 사실에 의아한 느낌을 가졌다.'
현재의 한글문법은 일제시대때 일본인 언어학자와 교육학자들이 체계화 한거다.띄어쓰기도 일제시대때 처음 만들어졌다.조선백성 90프로가 글을 못읽었으며 1913년에 오구라쇼헤이 가나자와박사에의해 한글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널리 보급됐다.
고성이씨는 석주 이상용선생 나신 가문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들보같은 집안이다. 저런 효부가 있어 그 후손들이 현출하였구나 하고 감탄을 자아냅니다.
고성 이씨 가문은 한민족의 고대사의
기록인 태백일사 필사본을 소장해
온 가문이기도 합니다.
한민족의 정통성을 확립시켜주는
고대사의 기록입니다.
안중근은 독립운동 했고, 안중근 아들은 친일했죠.
집안이 무슨 상관?
개인의 선택일뿐.
@@davidjacobs8558 그 개인의 선택에 집안이라는 환경의 영향을 무시할수 없으니까 하는말이라는걸 생각 못할까?
@@박상욱-u7v 연좌재 적인 논리지.
집안이 무슨 상관?
왜 같은 집안, 형제, 부자 도 어떤 사람은 친일파,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나왔는데?
여보세요! 조선시대 들어와서 맨날 이씨 김씨 박씨 따지다가 말아먹은 우리나라 역사네요.
임진왜란 6년전이라니.....남겨진 가족들이 평안했기를 기원합니다.
진짜 그렇네 애들도 아직 어렸을 나이인데.
편지의 중인공 원이엄마는 임진왜란중에 두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출발했는데, 몇년전에 방송국에서 이후 행적과 기록을 찾아봐도 알수 없다네요. 변란중에 세식구가 험한 일을 당하지 않았기를 바랄뿐이죠. ㅠ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한글을 가르쳤다고 하는 분들 잘 보세요 저 편지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 400년 전에도 한글은 잘 쓰여지고 있었읍니다
몇몇 미친 토착왜구들이 하는 말은 미친애들 헛소리로 생각하세요
을사오적과 동급인 넘들 이니깐요
@@윤성렬-u6t 몇몇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임.. 일제 시절 부터 시작해서 광복후에도 일본 장학금을 받은 학자들이 학계를 쥐고 있음. 그들의 눈 밖에 나면 학계에서 퇴출 당하는 수준입니다. 이완용이 아들이 서울대 총장을 하고 한국 고서 30만권을 불태운 놈 아들이 문화재 청장을 했던 나라입니다. 윤석열이 대권 후보에 오르 내리는 작금을 보면 세상은 말문이 턱하고 막힐 일들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 나고 있지요.
읍니다......ㅜ.ㅜ;;
예전엔 '읍니다'가 표준이었어요~*
@@picoerror ㅠㅠ..
진짜 400년 넘었는데 저렇게 멀쩡한 한지가 대단하다
원한지가 별로없다던데.. 정밀하게 찍어조사해서 성분 기록했으면 좋겠네요.
오리지날 기술은 남아있는게 없고 중국이 가져갔으니. .중국기술에서 유추해볼수있다 정도인데.. 중국은 아직도 한지를 극비취급하고있지요 ㅋㅋ
한지의 가치는 세계 최고.
일본, 중국은 절대 못따라 옴.
한지의 우수성도 한몫했어요
😄 😄 😄 👌 👌 👌 👌 👌 그래요!!!ㅡ
같이 출토된 것들이 갖는 가치/ 의미를 주목하는군요. 멋지십니다.
안동한지의 품질은 매우 유명하지요
400년전에 키가 180정도로 무척이나 건장한거라는거에 놀랍고 31세에
요절한내용또한 안타깝고 아이둘과 남은 아내의 절절한 사랑이 안타깝고 ㅠㅠ
부디 천국에서 조우하셨기를 바랄께요
바랄게요
임진왜란 6년전인게.. 더 가슴아프다
아이가 6살때 전생이 난거잖아 ㅠㅜㅠㅜ
결혼한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이름 대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라 부르는데 이렇게 칭하는 건 16세기에도 지금과 똑같았다는 게 신기하네요
원이 어머니가 순탄하게 아이들 잘 가르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을텐데 1586년이면 임진왜란 터지기 6년 전이고 안동이면 전쟁의 피해가 가볍지 않았을 지역인데 남편 잃은 젊은 어머니가 꽤 힘겨운 삶을 사시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네요
당시의 편지 한 장이 여러 측면으로 얘기하네요. 멋집니다 👍!!!ㅡ
그때가 지금과 똑같은게 아니라..지금도 그때와 변함없이 똑같다..라는 표현이 맞을거 같아요..
현재의 한글문법은 일제시대때 일본인 언어학자와 교육학자들이 체계화 한거다.띄어쓰기도 일제시대때 처음 만들어졌다.조선백성 90프로가 글을 못읽었으며 1913년에 오구라쇼헤이 가나자와박사에의해 한글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널리 보급됐다.
@@moclykim8220 1896년 서재필, 주시경,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허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는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한 것으로 알려짐. 자료를 가져와 일본이 한글 말살 정책을 펼쳤는데, 무슨 체계화
@@moclykim8220 욕이 절로나오는데 참아본다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1940년생 고성이가입니다. 오늘 이 유투브 를 접하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의 어머니 편지를 제가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원이엄마의 편지와 흡사합니다. 한지에 쓴 것이라서 누렇게 바래었지만 귀한 편지라서 가보로 간직하려고 합니다. 귀한 영상 올려주신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역사스페셜 원이아버지)를 검색해서 전부를 보세요.. 이 분은 임진란때 아이와 함께 돌아가신듯 ㅠㅠ
😂
400 년전에도 한글이 널리 보급 되었다는게 신기하네
양반가에서 한글은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당연히 가르치는것으로 여겨져 누누히 전해졌습니다. 양반 여인네들은 대부분 언문이란 이름으로 한글을 교육받았고 일반 평민들도 여력이 있는 집안은 한글을 가르키고 사용했습니다. 선비들도 사용은 안했지만 한글은 대부분 알고잇는경우가 많았음. 쉬워서 조끔만 신경쓰면 금방 쓸수있으니까..
왕과 왕세자도 썼었음
양반가에서도 쉬운 한글을 많이 써 오히려 양반가 자제 들의 한문실력이 그전보다 낮다고 한탄하는 옛글도 있
습니다~
창제된지 40년만에 다 보급되었던데요. 양반이 부인에게 쓴 편지 발견됨.
한때 한글전용이냐, 한자병용이냐고 논쟁이 벌어졌고 그논쟁은 아직도 끝이 안났지만,
모든게 디지탈화된 세상이 되다보니 환자병용ㅈ논쟁은 이제는 아무런 논쟁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400년전의 한글과 지금의 한글을 비교해보면 표기 방법은 달라도 뜻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것. 정말 한글의 우수성을 말해주는것 같습니다.
한자는 박물관에나 가야 할 문자가 되고 있죠...
@@개똥이세상 지나친 표현입니다
한글은 익히기 쉬우나 한국어는 어렵다는 외국인들의 말처럼
우리의 언어는 매우 다채롭죠
눈물 나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남편을 향한 부인의 애틋한 사랑
대단 합니다.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이거 오래전 TV에서 방영한 거 직접 봤었는데 그게 진짜 감동과 애틋함이 넘치더라구요.너무 너무. .
1.한글2.한지3.석회바른돌무덤4.절절한사랑 5. 가족 6.무신의가족 7.남성키 8.아빠호칭 9.한글의 보급 10.머리카락으로 만든 신, 놀라운게 한두가지가 아님에 놀랍다~♡
키 180과 잘 보급돼 쓰이고 있는 훈민정음에 일단 오오... 감탄. 요즘이라면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는 병들도 당시에는 방법 없이 젊은 나이에 저렇게 떠나 보내곤 했겠지요. 6년 후 임진왜란 터졌을 때 원이 엄마는 남편이 전란을 피한 것에 작은 마음 위안이라도 얻었을까요 아니면 더 힘들었을까요. 다른 가족들의 편지들도 들어 있는 걸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었던 것 같네요...
묘가 관리되지 않고 합장된 무덤이 없다는 것이 이후 부인과 자식이 편안하게 살지 못했다는걸 얘기해주네요
6년후 임진왜란이니.. 편하진 않았겠죠..
에공..
안타깝네요. ㅜㅜ
오지랍도 넓네,,,,,,,,,,,,,,자꾸 over하지마,,,,,,,,,,,,,,
환생해서 다시 연을 맺어 사랑하고 현생에서는 흰머리 나고도 행복하게 살면서 함께 가시길 바랍니다
부부가 부부이기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편지에서 느껴지는군요. 부럽습니다.
편지를 쓰다가 글쓸 여백이 모자라 결국 옆으로 돌려가며 글을 이어 썼다는 사실....
그녀가 남편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서둘러 전하고자 하는 것이...... 맘이 아프네요. 이거 전에 보고 안동 까지 간 기억이...
그 오랜 시간 보존되었다는게 너무 놀랍다
그것도 무덤 속에서
우리나라엔 왜 이리 역사적 가치를 가진 사건들이 많고 유물들이 잘 보존되었을까?
헤~~ 옛날에도 아빠라고 불렀구나...그리고 한글 퍼진지 얼마 안되었건만..저리 붓글씨를 잘쓰네...여자는 언문이라고 한글을 배웠다지만..여러가지 옛날을 알수있는 소중한 문화재군요...
과거를 기반으로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음을 조상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요.
화강암에 석탄을 체우고 석회로 주변을 막아 나무뿌리나 해충으로 부터 방비했다고 합니다...
@@김동섭-q8x 이게 사실.,.참 어려운것이...나무관을 쓰는 이유가 잘 썪으라고 하는것인데..석관을 하면 관안에 물이 차거든요..
빗물이 묘위로 내려 관안으로 습이 차면서 가두어져 시신이 물속에 잠기는 상황이 됩니다
잘 썪지 않는 단단한 나무로 관을 해도 마찬가지가 되기 쉽상이죠..
그래서 묘는 남향으로 하는데 화강암석관에 단지 탄소가... 석회로 매장하였다고 저렇게 보존이 되니..선조들의 지혜가 남다르다 싶습니다
아니면 원이 어머님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였을까요
1500년도에도 키가 180이 넘는 다니 한반도는 키가 작지 않았구나 머리카락으로 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실화였구나
북방 기마 민족의 후손이니까요.
수탈당하던 일제강점기에도 키가 컸지요.
서양인들과 비슷했습니다.
허허야 이를 어쩌나. 내 눈동자가 빨갛게 되버렸어. 400년전 젊은 두 부부의 영혼에 기도드립니다.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못다이룬 사랑을 재 확인하셨기를.....
훈민정음이 1448년에 반포되었는데 140년후에 한글이 얼마나 일반화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네요. 한글이 없었다면 평범한 서민이 쓴 이런 글을 오늘날 읽을 수 있을까.
1500년대에 한글로 쓴 편지조차 감동스럽다. 남존여비사상을 갖고 있는 가부장적인 남편이었으면 누가 시켜도 저런 편지는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안타깝다. 부디 남편의 분신들과 오래오래 살다가 남편 곁으로 가셨길 바래본다.
남존여비 사상은 조선 후기에요.
오히려 조선 초기 남녀가 평등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재산 상속할때도 남녀 구분 없이 분배했을 정도 였으나. 임진왜란 후부터 차츰차츰 후기들어 남존여비 사상이 정착됐다고 합니다
그저 쉽게 생각해서 안주인이라는 아내를 부른 명칭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아내를 존중하는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였다는걸 생각해볼수 있을거 같습니다
조선초기는 고려의 문화권이라 사실은 여자를 위한 문화가 강했어요
중기이후로 지금의 우리처럼 갈등과 혐오로 질척이다 사람간에 계급을 나누고 배척하는 사회가 조선후기의 모습일뿐인거죠
우리도 후대에게 조선후기같은 시대를 보여주지 않으려 애써야 할 이유기도 하고...
이북에서는 아직도 아내를 안해라고 말한다죠
부부 사이에 예를 다해 애뜻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라...
요즘 편견(여자, 어린아이만 썼다는 주장)과는 다르게 당대에 모든 계층에서 한글을 일상생활에 잘 활용했다고 들었어요
애틋한 사랑이다. 드라마로 볼수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고려시대 최루백과 염경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 두분 이야기 외에도 고려시대 이야기도 조명되었으면 좋겠네요
언문이라고 천대받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학틀딱의 주장이 생각난다.
임진왜란 직전 편지에 한글 써있구만.
식민사학자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죠.
400년전 한글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세종대왕님
그저 감사 감사 합니다.
한민족 종이 만드는 기술 또한 감사감사 합니다.
내가 대한민국 한민족 으로 태어난게 너무도 자랑 스럽다.
조상님 감사 합니다.
@user-zs5ul8zg9i저 편
지 보고도 그런 거짓말이 통
할거라 생각하니? 숙종때 한글로 쓰여진 사씨남정기
를 온 백성이 읽고 민심이 흉흉해져 어쩔수 없이 숙종
이 인현왕후 복위시킨 사실
도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릴한다~ 단 하루면 배우
는 한글인데 무슨 문맹률 90% ?? 미개한 일본어 쓰 는 일본인 머리에서나 나올
법한 생각!
와 저 당시 키180ㅎㄷㄷㄷ
그나저나 편지ㅠ 눈물나네ㅜㅜㅜㅜㅜㅜ
우와~ 저 이야기까지 알려진거야? 대단하네~~~
나도 저 미라 나왔을 때 엄청 놀라면서 KBS 봤었는데....
슬프긴 엄청 슬프더라, 부럽기도 하고....
암튼 기록의 나라답구먼. 허허
서로 다시 태어나 못다이룬 사랑을 마침내 이루고 한 날 한 시에 하늘의 별이 되었기를 바래봅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위대한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거 십년전쯤 아니 그보다 더 전에 뉴스에 나왔었는데...ㅠㅠ울 남편이 감동 받아 펑펑 울더라...자긴 왜 저런 사랑 못 받는가...하고 울었나뵤ㅠㅠ
앜ㅋㅋㅋㅋ 마지막줄..ㅋㅋㅋㅋㅋ웃고갑니다
사랑안했으면 니 옆에 아내가 있었겠냐고 하세요..
ㅋㅋ
남편이 꿈에 나오지 말라고 하네요. 놀라서 깬다고
ㅋㅋㅋㅋ
아내의 사랑이 애절하면서도 뱃속에 아이가 태어나면 들려줄 이야기가있다고 하는 남편또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사랑이 전해집니다
사람많은 서울숲 공원에서 보고있어서 눈물을 억지로 참고있는데 가슴과 목이 메여오네요ㅜㅜ
원이 엄마 이야기는
편지나 메모 같은 손글씨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남기는 마음과 기록들이 400년쯤 흐른 뒤에
이처럼 전해질 수 있을까요?
편지 써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네요!
좋은 영상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그 안에.있었다는 시집 가족들의 편지도 보고싶네요. 그 가족이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난리를 겪으면서도 유복자를 낳은 며느리를 알뜰히 보살펴줬길 바라요. 그리고 아마 그랬을것 같습니다. 안동의 무가집안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은 됐을테고 부부사이가 저리도 애틋했다면 박한 시어른들은 아니었을 것 같으니까요. 지금은 부부가 함께 이 땅을 보시고 계시겠지요...
이리 가슴저린 글을 그 시대에...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수 있어요.
지금은 우리가 언뜻 인지를 못해서 그렇지 해방, 전쟁,분단 ..이후 불과 몇 십 년 밖에 안 지난 ...모든 것이 회복되지 못한 시점이지요.
부럽다. 저런 가정을 만들수 있는 사람을 만날수 있었어서. 요즘은 이성이 다들 그냥 장난감 처럼 만나고 즐기고 버리는게 당연한 세상이라 누구도 믿을수 없어 결혼도 의미가 없어진 시대인데 저런 순수한 영혼들이 인연을 소중하고 귀중하게 대한 그 시대가 부럽다.
대단한 글솜씨,
위대한 세종대왕님,
400년 견디는 한지,
당시의 교육열,
가슴에이는 사랑의 표현
한지는 천년 간다네요.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지네요.
조금 전에 충남 유성 무덤에서 나신걸 무관의 부인에게 보낸 서신을 보았는데 이 보다 앞선 한글 서신이 있더군요!
한글이 세종대왕께서 반포 후 빠르게 국민들이 썼다는 게 놀랍습니다!
한글 보급도 세계로 빠르게 해서 문화적인 자랑거리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감탄이네!
한글 문학솜씨 키180 한지 400년세월 순애보 사랑
이 이야기는 소설 능소화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서로의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져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부디 저승에 가서라도 다시 만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제 처를 지금 부터라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난 그냥 얘기만 들었는데
정말로 머리카락으로 만든 짚신이 실존했구나
그냥 한스러워서 하는 말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미투리라는 말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그때시절에도 부부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을 보면 정말 아름답고 안타까운 편지같습니다. 사랑과 영혼...산자와 죽은자를 가르지 않고 그 영혼이 아직 내곁에 있을거라는 믿음...그렇게 살아야 겠다..
크... 남들도 우리처럼 사랑을 할까? 하는 속삭임이
얼마나 찐한 사랑을 했는지 눈에 훤하네요.
사랑의 향기가 지금 나에게까지 느껴지네요.
남편은 분명 아내의 꿈 속에 나왔을거라 봅니다
그리운 사람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현몽으로 나오기도 하지요
조상님들의 DNA가 입증하나봐요 사랑에 목마른건 ㅎㅎ..
사랑이 식어 서로 각방쓰고있는 저에게 몆백년전에도 가부장적인 유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저렇게 사랑을 했구나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감동적이네요 ㅠ
그시대에 키가 180이라...작은키가 아니었네.
우리조상 키가 쪼그라든 시대는 조선말과 일제시대, 6.25때가 아닌가싶다.
하아.... 미이라보다도 키가 작다니 .....
갑자기 키 타령..ㅠㅠ
임진왜란하고 일제 강점기가 우리 키를 줄였다. .일본이 문제야!!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만든 여인의 뼈아픈 마음을 헤아려 본 들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리오.
최근에도 아주 상태가 좋은 미라가 발견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그 분은 할머니이고 시아버지랑 친정 조부가 영의정 출신 친정 아버지는 병조판서 남편이 도승지라고 했나. 청풍 이씨이고.
이런 명문가에서 묘를 만들 때 엄청 두꺼운 석회암에 시신 두고 석회로 가득 채워서 묘 만드는데 석회가 당시에 굉장히 비싼 재료이고 석회가 외부 공기나 습기를 차단해서 미라가 될 수 있고 보존상태도 좋다고 나오던데 무덤 파는거랑 명망있는 무신집안이란 거 보니 그런 무덤 썼나 보다.
한글을 한문과 섞지않고 써져있네요 그시절에도 전부 한글로 쓰였다는 거네
조상님들 대단하고 저때문맹율이 낮았을듯 하네요~
이 편지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게 하지만 영원한 이 부부의 사랑은 아름답고,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이 동영상은 역사스페셜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다시 보니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끼지네요.
부인의 흔적을 알수가 없고 아들 한명 묘는 발견된...아들묘 밑에 이름모를 묘가 하나 있는데 그게 부인묘인지 맞다면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남존여비라는 조선의 생활모습은 바뀌어야할듯 자내라고 서로호칭하고 존칭쓰고 처가살이하고
재산도 똑같이 분배에 제사도 남녀구분없이 번갈아지내던것이 임란 호란 맞아 황폐해지고 외부문화들어오면서
변질된듯
일단 자식의 묘밑에 부모의 묘를쓰는일은 없습니다
@@sun4001 상황에 따라서 쓰는경우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생각해야합니다.
저렇게 절절한 사랑을 하였는데 안좋은 일을 당해 차마 남편 옆에 안가려고 유언을 남겼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간혹 어른이 밑에 있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산에 무덤을 못쓰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몰래 부인 아래로 아주버님 남편 이렇게 한데도 있더군요.
원이 엄마 테마공원 조형물 좀 함 봐라 정말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 있는지 기가 차다 공무원들아 정신 차려라 제발!!
좋은 마음은 소중히 지켜가는게 중요하지요... 처음엔 모두 다 저 부부와 같이 하지만, 나중엔 서로 상처를 상처주거나 해치게 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보통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라서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것이고, 더 높은 것을 생각한다면 감정의 차원을 벗어나야 하지만, 어려운 일이죠...
예전에 여러번 나온 내용인데요
들을 때 마다 절절하네요
한국남자 원이 아빠 키 180
옳다
조선시대 거인 ㅡㅡㅋ
셰익스피어 동시시대에
우리 조상님 여성이
이런 연서를 한글로 쓰셨다니 놀라움 자체입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이전에 한국역사에 이런 여성이 계셨다니 자랑스럽습니다.
16세기 조선엔 '허난설헌'
이라는 천재 여류시인도 있
었죠 중국에서도 그녀의 시
집을 갖고자 문의가 쇄도했
다죠~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말없이 그냥 눈물이 흐르네요
글씨 너무 우아하고 아름답다.
kbs역사스페셜 400년 전의 편지 그때 실시간으로 봤는데 감동 이었음.
애절한 옛조선에 부부에 마음을 담은 편지지만
지금 현대에 부부간에 마음들이 저리간절할까싶다
성격차이.. 이혼
경제력부재.. 이혼
시댁과 갈등.. 이혼
불륜.. 이혼
만남과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시대상을 보다
옛부부에 서로에대한 존중.배려가
다시금 현대에 부부들에게 찾아들까싶다
뉴스로 보고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물질의 풍요와 편의는 과거와 비교할바가 아니지만.. 400년전 편지가 지금의 저를 부끄럽게 하네요.
와 ~ 너무 감동적 내용이네요 .
이런 문화재가 일제 시대, 6.25에도 도굴, 파손되지 않아서 천만 다행입니다.
몇 백년의 시공간을 뛰어 넘어,
2022년도 우리들에게 그 옛날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전해 주다니.. 참으로 감격과 감동입니다 ~ !
어오 눈물나네 진짜
무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전의 시체와 편지
그리고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것에 놀라울 따름.
세종대왕의 위대성..한글 그리고 조선역사중 가장 찬란히 빛나는것 하나를 꼽는다면 엄청나고 방대한 조선실록 아닐까 아직도 해독중이라는 그 기록의 문화는 세상 어느왕조를 봐도 유례가 없다
한글이 없었다면 아내의 편지가 존재했을까요.정말 갓세종!!
그 실록이 왕조차 고칠수 없었다는 기록이기에
그 진실을 향한 올곧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가슴 절절하네요..ㅠㅠ
일주일간의 사랑을 이야기의 로미엣과 줄리엣따위가 감히 여기에 비할까.....
자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을텐데...
감동이네요
옛 선현들의 문학적 감각은 지금의 세대라 하더라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는구나 !
내셔널 지오그래피 영어교재에도 실려있지요.
꿈속에서라도 사랑하는 남편을 만났었기를 바랍니다 6년후 임진왜란 이었으면 젊은 엄마가 어린 두자녀와 남편없이 힘든 삶이지 않았을까 예상이 되네요 너무 큰 고생이 아니었길 바랍니다
편지의글귀가너무이쁨니다..저렇게마음을표현한건..원이엄마의심성이느껴집니다..두분만나아직도행복하신가요?
오랜만에 눈물 흘려보네요
그 이후 원이 엄마의 삶이 좋았길 바라는바지만 임진왜란을 앞두고 있어 더욱 가슴 아파지네요
이런 사랑이 정말 존재했다니… 놀랍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안타깝지만 신화같은 이야기…
임진왜란 6년전이라니..원이 엄마와 아이들은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보냈을꼬..ㅠㅠ
남편분이 아프지 않고 건강했다면...어쩌면 이순신 장군님의 한팔이 되셨을지도 모를텐데...살아서 가족을 슬프게 하지도 않고 죽어도 어쩌면 불멸에 가까운 이름으로 남았을수도 있는 안타까움이...
애닯다. 이 사랑.... 현생에서 다시 만나기를....
아… 이거 역사 스페셜에서 봤었는데 너무 절절했음 ㅜ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만들었던거 같은데 아 뒤에 나오네용 ㅜ ㅋ
안타깝게 이후 남편의 무덤에 원이엄마는 합장도 되지못했고 원이라는 자식도 족보에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걸보면 몇년후 일어난 임진왜란때 희생되셔서 더이상 기록이 남겨진게 없는것 아닌가 하는 추측들이 있더군요.
반갑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좋은 밤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베플TV님^^♡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다양한 글귀에 원망하며 타박하는 내용도 다수 포함된 것에 놀랐습니다. 양반댁이라 풍요로운 생활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는지 경제적인 원망을 제외한 심적인 아픔을 중심으로 작성한 글귀에서 평민들 일상적인 모습과 다른 여유로운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님 키도 엄청 컸다고 해요.
시댁에서 혼자 남편도 없이 살았을 여인이 안타깝다. 몇 년 안 있어 임진왜란이었다니 순탄한 삶이었길...
조선후기 이전 조선중기까지도 장가간다는 말처럼 남자가 아내의 집, 장인어른의 집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장성하는 20여년정도, 이후 남자의집 시댁으로 들어갔어요. 비슷한 시기에 강원도 강릉의 신사임당도 남편 이원수(덕수이씨)이 강릉 장인어른(신명화)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율곡 이이도 나고 4남3녀를 낳습니다.
여자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시집간다는 조선후기 인조반정후 집권한 성리학 절대주의자들인 서인-노론들이 국가권력으로 제도화 시킨것입니다.
서정주의 귀촉도 일부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시에만 있는 수사인줄 알았는데...
아름답고 슬픕니다.
♡베플TV♡♡ 여성진행자님의♡ 국제적인감각 냉철한분석 해박한지식 혜안 명쾌한해설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대한민국만세♡♡♡
번역찾다가 해가져옴
400years befor love letter
to wons father
jun 1, 1586
you always said. dear.
lets live together until our hair turns gray and die
on the same day. how could you pass away without me?
who should i and our little boy listen to and how should
we live? how could you gp ahead of me? how did you
bring your heart to me and how did i bring my heart to you?
whenever we lay down together you always told me.
dear, do other people cherish and love each other like we do?
are they really like us? how could you leave all that behind
and go ahead of me? i just cannot live without you. i just want
to go to you. please take me to where you are.
my feelings toward you i cannot forget in this world and my
sorrow knows no limit. where would i put my heart in now
and how can i live with the child missing you?
please look at this letter and tell me in detail in my dreams.
because i want to listen to your saying in detail in my dreams
i write this letter and put it in. look ciosely and talk to me.
when i give birth to the child in me. who should it call father?
can anyone fathom hoe l feel? there is no tragedy like this
under the sky. you are just in another place. and not in such
a deep grief as i am. there is no limit and end to my sorrows
that i write roughly. please look closely ar this letter and come
to me in my dreams and show yourself in detail and tell me.
i believe i can see you in my dreams. come to me secretly
and show yourself. there is no limit to what i want to say
and i stop here.
울 조상님들에게 놀라는것중 하나가 진~~짜 1.기록 2.보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