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인데도 왕이 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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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8 дек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51

  • @댕댕이냥이-q1n
    @댕댕이냥이-q1n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9

    오히려 서자라서 무사히 살아남아 왕이 됬네요.적자였던 큰형은 적자라서 역모에 엮여서 죽었으니....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8

    70년대 김세윤이 주연한 이란 드라마가 강화 시대의 철종을 주연으로 합니다. 코믹 픽션으로 꾸민 도 있는데 역사왜곡으로 욕을 많이 먹습니다. 중요한 점은 순조와 순원왕후가 은언군 집안에 대해 동정적인 시각이 많았는데 결국 그 집안에서 왕을 즉위시킵니다. 비록 실권이 없는 왕이긴 해도..

    • @이은주-e8g5r
      @이은주-e8g5r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임금님의 첫사랑을 아시다니. 와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이은주-e8g5r 70년대 대표적 남자배우가 김세윤인데 이분 안다고 하면 거의 50대 중반 이후,.,지금 미국에서 사심.

    • @이통영-y9v
      @이통영-y9v 5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중요한 것은 순조와 순원왕후가 은언군 집안을 동정했느냐 안했느냐가 아니라
      순조의 손자이자 조선24대 왕인 헌종이 3대독자인 관계로 그가 사망한 후 가장 가까운 친척은 재종숙(7촌 아저씨)인 철종(은언군의 친손자)과 또다른 재종숙이 되는 흥선대원군(은언군의 친동생 은신군의 족보상 손자 당시만해도 대원군 아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흥선군은 족보상으로는 헌종의 7촌이기는 해도 부친 남연군이 은신군(17세로 사망)의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실제 혈통상으로는 7촌이 아닙니다 그래서 혈통상으로 선왕 헌종과 가장 가까운 혈족이 되는 철종이 조선25대왕으로 즉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이도형-x9x
    @이도형-x9x 6 месяцев назад +8

    그리고 조선은 세계적으로 보면 서자에 대한 차별이 컸다고 보긴 곤란합니다
    당장 서양만 해도 서자가 아닌 사생아였으니까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헨리 8세의 딸 메리와 엘리자벳도 어머니가 폐위되었으니 서녀 신분에서 여왕이 됩니다. 헨리 8세의 말년에 여왕 승계가 가능하도록 법을 고칩니다.

    • @jykim2203
      @jykim2203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서양에서 첩 자식들은 왕이 총애했다면 그나마 작위와 재산을 받았지만 사실 아버지 성도 받을 수 없고 왕위를 이을 자격도 없었긴 함. 왕에게 아들이 없거나 아예 자식이 없어도 사생아인 첩 자식들이 아무리 많아도 계승자가 될 수 없었음

  • @나웃김
    @나웃김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와 국사학과 교수이세요? 어느 대학입니까?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8

    철종이 14세전까지 서울에 거주했슴에도 제대로 교육을 못받은 이유는 그의 부친 전계군자체가 서울에서도 한미한 생활을 한대다가 부친의 서자라는 측면에서 적자와 비교해서 더더욱이나 교육환경에 차등이 존재했슬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계속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왕이 되었더라도 교육을 제대로 못받은 상태는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시골에서 살아서 교육을 못받은 것이 아닙니다.

    • @hd9908
      @hd990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왕위계승 가능성이 높지 않는 왕족 대부분은 제대로 공부를 안시켰습니다. 아들 많은 왕이 모든 왕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공부 시키면 대부분 사단이 났습니다. 철종이 한문을 모르는게 극적일 지 모르지만, 철종은 그 정도 지위에 맞는 한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hd9908 철종의 원 신분은 왕족이라기 보다는 그냥 종친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종친과 비교해서도 그의 처지를 감안하면 혼전한 교육을 받지못했슴이 분명하죠. 서울에서 생활했슬때부터가 몰락하고 한미한 상태에서 특히나 서자이기에 더 그리했슬것입니다.

  • @2sdle112
    @2sdle112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왕실에는 서자가 없습니다. 서자는 일반 사대부에 있는 개념인거고(적서차별이 왜 생겼는지 얘기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 왕족은 사대부랑은 다릅니다. 왕실에서도 왕비소생과 후궁소생을 구분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왕의 씨를 받은 왕족에겐 서자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왕족은 왕이 될 수 있는 인재풀로 생각 하시면 됩니다. 알려진바와 달리 선조는 재위기간 내내 혈통에 대한 컴플렉스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그 시기 당쟁이 격화되어 왕에도 당파를 입히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흠을 잡아서 생긴거지 즉위하는데에 명분상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일반 사대부로 따니면 영조는 얼자이니 양인도 아닌 천한신분이지만, 숙종의 직계인 영조에게 그런 개념 자체가 적용이 안됩니다. 철종 즉위 시에도 철종이 서자에 서자라서 안된다는 의견은 있지도 않았고 조선시대에 왕족은 현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지위가 높습니다. 왕족이라는 신분 자체가 사대부 위에 있는 신분입니다.

  • @하닷사-s2q
    @하닷사-s2q 6 месяцев назад +5

    왕가엔 서자가 왕을 하면서 일반인들은 서자가 종으로 전락...

  • @cube6808
    @cube680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2

    건국 이후 명종 때까지는 적자로 이어져 왔으나 방계 출신 첫 왕이 선조.. 그래도 선조는 자기 집안 내에서는 엄연히 적자였음. 단종 이후 정통성의 끝판왕 숙종.... 경종이 좀 아리까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모후가 중인 출신이래도 중전까지 올랐었으니.... 가장 출신이 비천한 첫 왕이 영조... 모후가 천민이라는 건 엄청난 핸디캡이었음. 모계의 출신까지 따지는 고려 때라면 도저히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음. 여말 명덕태후가 친손자인 우왕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었음. 이인임이 우겨서 된 거.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선조는 일단 생부 덕흥군으로 부터는 적3자이지만 조부 중종을 기준하면 서손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 광해군도 서자 인조는 생부 정원군으로 부터는 적장자이나 조부 선조로부터는 서손이 됩니다. 그 다음 효종 현종 숙종은 적자이고 경종은 아리까리한것이 아니라 엄연히 서출입니다. 생모 장희빈이 후궁신분에서 출생했기에 명백한 서왕자입니다. 그 다음 영조도 숙종의 서자이고 정조는 사도세자로부터는 적장자이나 사도세자도 서출이기에 조부로 기준하면 서손입니다. 이리하여 생부로부터는 적자이지만 조부를 기준하면 서손이 되는 경우는 선조, 인조, 정조 이 세명이 해당됩니다. 그 다음에 순조도 서자, 헌종은 순조의 적손입니다. 철종을 건너띄고 고종은 너무먼 방계승통이니 가까운 전대왕계로 부터 정통성을 따질 사안이 아니죠. 순종은 고종의 적자. 그렇기에 후대로 갈수록 서왕자가 왕위계승하는 경우가 흔해졌습니다. 즉 적자가 귀했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 @살구꽃-p5u
      @살구꽃-p5u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정재성-c1l영영조는 숙종의 얼자죠. 양인 출신 첩의 소생은 서자, 천민 출신 첩의 소생은 얼자입니다.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살구꽃-p5u 연잉군은 숙종의 얼자가 아닙니다.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숙빈최씨에게는 연잉군의 동복형인 영수가 첫 아들로 숙종에게 승은을 입어서 영수를 임신한 상태에서 후궁이 되었기에 영수가 얼자로 볼수는 있서도 연잉군은 이미 숙빈이 후궁신분인 상태에서 잉태를 했기에 흠결없는 완벽한 서왕자입니다.

    • @이통영-y9v
      @이통영-y9v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도대체 얼마나 무식하면 이런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당당하게 할수 있는지 그대의 황당무식함과 용기에 재삼 경의를 표합니다 애당초 적서차별이란 것이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조선에서만 있었는데 중국은 아예 적서차별이 있지도 않았고 일본은 극도의 장남 우선주의로 장남만이 아버지의 신분과 재산을 독점상속하는 시스템이라서 적서차별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때까지는 일부다처제라서 처첩을 구분하지 않고 부인들의 위상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기에 굳이 적서차별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선시대 시각으로 본다면 고려2대왕 혜종과 그 이복동생들인 3대 정종 4대 광종(이 두명은 동복형제) 모두 서출이 됩니다 5대 경종은 광종의 적자지만 6대 성종은 경종의 사촌동생이자 처남이 되는데요 그는 적자지만 그의 아버지 대종 왕욱은 태조 왕건의 7남으로 서자입니다
      그리고 성종의 생질이 되는 7대 목종(성종의 친동생 헌애왕후 즉 천추태후의 아들)또한 5대 경종의 서자가 됩니다
      8대 현종은 성종의 또다른 여동생이자 역시 경종의 사촌동생이자 또다른 후처가 되는 헌정왕후가 남편이자 사촌오빠가 되는 경종이 사망한 후 삼촌뻘 되는 태조 왕건의 8남 안종 왕욱과 사통을 해서 낳은 사생아가 됩니다
      당시 헌정왕후는 출산도중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안종은 전 왕후와 사통한 죄로 경남 사천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처음부터 사생아로 태어난 현종은 그를 불쌍히 여긴 성종에 의해 궁에서 자라다가 성종 사망후에는 위협을 느낀 천추태후에 의해 삼각산(북한산) 신혈사에 보내 강제로 승려가 되었다가 후일 쿠데타를 일으킨 강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됩니다
      이처럼 고려는 왕이나 귀족 일반백성을 막론하고 처첩구분을 하지 않는 일부다처제라서 당연히 적서차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일부일처제하에서 본처를 제외한 나머지 부인들을 첩으로 강등시켰기에 그 아들들에 대해서도 적서차별을 한 것일뿐입니다 그나마 조선초기에는 의식적인 차별만 있을 뿐 거의 정승급 예우를 받았던 유자광의 경우를 보더라도 시스템적인 차별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자가 점점 늘어나는 관계로 양반들의 진입장벽을 둘 필요가 대두되자 적서차별이 심해진 것입니다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정재성-c1l 정조에겐 의소 라는 형이 있었는데 정조가 태어난 해에 죽습니다. 정조도 차남이고 그 다음 서자가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입니다. 장조도 효장세자 라는 이복형이 있었는제 정조가 양부라서 진종으로 추존합니다. 순조도 문효세자 라는 이복형이 있어서 서차남입니다. 후궁의 신분으로 서자, 얼자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최숙빈이 무수리 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침방나인의 하녀로 추정합니다.

  • @Sudhana77
    @Sudhana77 6 месяцев назад +7

    왕손을 서자로 칭했나요? 그건 현대적 관점이나 사가의 시각에서 붙인 것이라 맞지 않습니다. 실록도 보면 누가 몇 번째 왕자를 출산하였다 하였지 서자 누가 태어났다 안합니다. 왕위 계승 서열 차이가 있을 뿐 왕의 자손은 무계였어요...그래서 후궁인 생모보다 품계가 높았어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적자가 아닌 서자입니다. 은언군의 적자는 상계군과 풍계군인데 홍국영에 연루되어 죽습니다. 적자와 서자는 따로 카운트를 합니다. 서장자, 서차자 중종의 장남은 복성군인데 서장자라 하고 적장자는 인종입니다. 선조의 서장자는 임해군, 적장자는 영창대군입니다.

    • @hd9908
      @hd990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서왕자도 중전의 아들로 입양되고 친모도 아들에게 존대를 써야하니 그런 생각할 수 있지만, 명칭 자체가 대군/군, 공주/옹주로 나뉩니다. 왕이 되면 무계가 되는 지 모르겠으나 왕가에서도 명칭, 왕위계승 우선권 등 적서차별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 @에델바이스-j9y
      @에델바이스-j9y 5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왕위계승자인 세자를 제외하고 대군과 공주는 무품상계 군과 옹주는 무품하계로 서열은 다소 구별되지만 왕의 자녀들은 적자 서자 할것없이 다 왕비의 소생으로 간주되어 품계를 초월한 존재 즉 무품입니다.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5 месяцев назад

      @@에델바이스-j9y 왕비에게 입적한다고 적자가 되진 않습니다. 불임인 인현왕후, 의인왕후의 소생이 경종, 광해군인가요? 입적의 의미는 왕. 세자가 될때 필요한 형식적 절차입니다. 적자가 없는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정조의 양부가 진종, 철종의 양부가 순조, 고종의 양부가 문조인 것과 비슷합니다.

  • @정숙-i4w
    @정숙-i4w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철종이 아닌 대원군이 왕이 됐음 명성왕후와 무당진령군이 국정농단을 벌이고 국고를탕진하고 나라를 아작내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게죠

  • @하닷사-s2q
    @하닷사-s2q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풍양조씨의 대왕비가 의도적으로 무식한 사람을 왕으로 올려놨다고요.....똑똑한 이씨 귀족들이 많았어도...

    • @hd9908
      @hd990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사실이 아닙니다. 조선후기 왕족이 귀해서 철종이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습니다. 똑똑한 왕족을 선택할 인재풀 자체가 없었습니다. 남연군, 흥선군 가계는 양자로 가서 왕족유지한 거지 왕족이 많이 있던 시기 기준으로는 왕족이 될 수 없는 헌종과 혈연적으로 무척 먼 친척입니다.

  • @이도형-x9x
    @이도형-x9x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강화도령 시절도 많이 과장된 것이 ....
    철종은 헌종이 즉사할 경우 차기 왕 1 순위라서 막 나무하고 농사짓고 살지 못합니다
    게다가 자기 죄로 유배된 것도 아니라서요 ....
    아마 그냥 자유롭게 알바 삼아 나뭇짐 좀 하고 농사일 좀 했다 정도로 보면 됩니다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유배된 자는 왕손인든 양반이듯 자기 스스로 농사를 짓든지 생계를 이어가야 합니다. 누가 양식을 주고 책이나 읽으라고 보내는게 아닙니다. 유배간 화완옹주도 남의 집 제사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다니 이게 무슨 옹주입니까? 강화도에 유배된 왕손에게 아무도 쌀을 보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은언군 가족과 사도세자의 후궁 임씨도 영조가 생계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아 외상을 지고 그 죄로 유배를 갑니다. 은언군 대부터 버림받은 집안입니다.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서자에 대한 차별은 조선시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 @이통영-y9v
      @이통영-y9v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개소리를 작작하시고요 우리역사에서 서자에 대한 차별이 생긴 것은 조선 이후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적서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습니다
      고려때까지는 일부다처제였기에 부인들간의 위상이 동등했지만
      조선개국후 일부일처제하에서 본처를 제외한 나머지 부인들의 지위를 첩으로 강등시켰기에 처첩간의 지위가 달라지면서 적자와 서자간의 차별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조선초기까지는 서자에 대한 차별이 그리 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유자광의 경우 조선 중종때까지 생존한 인물이지만 반정공신에까지 올랐고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거의 정승급 예우를 받은 것 입니다
      이로써 추정컨대 이때까지만해도 서자에 대한 의식적 차별은 있었지만 제도적 차별은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 왕조까지는 왕비와 후궁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고 왕자들에 대한 차별도 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명의 왕비가 동시에 존재하여 조선과 같이 1명의 왕비가 있는 제도가 아닙니다. 적서차별은 태종대에 갑자기 강화되는데 신덕왕후를 폐위하면서 후궁으로 격하시키기 때문입니다.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inyeobseo9369 왕이 정실부인을 한명만 두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 제도이고 왕이던 일반백성이던 무조건 1부1처제이기때문에 그러합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양반과 일반 백성은 1부1처제를 하도록 하면서 왕만 다처가 가능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왕에게서도 엄밀히 처와 첩의 구분이 있습니다.
      왕후와 왕비는 모두 정실부인으로 즉 정실부인을 2명이상 둘수 있고 이와 별도로 후궁을 들이게 됩니다.
      현종 다음 덕종 정종 문종의 모친인 원경왕후 원예왕후는 살아생전에 궁주신분이었습니다. 사망후에 왕비로 승격되고 그후 왕후로 승격하죠. 그러니 현종의 아들 3명의 왕은 모후가 궁주신분에서 출생한것이 됩니다.
      다만 궁주가 조선시대 후궁에 해당되는지 아니면 왕비보다 한단계 낮은 정실부인인지에 따라서 적서의 여부가 갈리게 됩니다.

  • @sukjunseo2598
    @sukjunseo259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정말 혈통 안 좋은 왕조 조선 ㅋㅋㅋ

    • @정재성-c1l
      @정재성-c1l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그것도 말기로 갈수록 심각해지는데 고려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왕 창왕 신씨설 소문이 나도는 것 부터가 그러하고.

    •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6 месяцев назад

      태조실록에 , 훈요십조 에 예언된 바로 그 백제 출신 반역자기 이성계 였다는걸 조선왕실도 사대부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써있씀.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혈통 문제가 아니라 왕조가 망하려면 손이 귀해지고 개나 소나 왕을 시키는 경우가 생깁니다. 서태후때의 청황실도 똑같습니다. 정조 이후 손이 귀해져 망할 징조가 보입니다.

    • @cheongwa4994
      @cheongwa4994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혈통이 뭔데 사람은 똑같은 피다

    • @jykim2203
      @jykim2203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자기네 가문 핏줄만 고귀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근친혼 했던 합스부르크 정도는 돼야 혈통이 좋은거임?? ㅋㅋㅋㅋ 백제혈통을 이은 섬나라 왕가 혈통이 좋긴 하지. 세월에 따라 섬나라 애들 피가 끼어들어서 외모가 망했지만 ㅋ

  • @pchone3011
    @pchone3011 6 месяцев назад +2

    성리학은 우주운행의 원리를 탐구하는 열린 학문입니다.

    • @awesome-mz2lj
      @awesome-mz2lj 6 месяцев назад +3

      우주 운행의 원리를 우기는 학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