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공부햇던 사람입니다. 진짜 한국인은 재일교포들입니다. 거기서 같이 알바했던 교포3세 고등학생이 있었는데..그친구가 자랑스레 하는 말이 "형님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우리 조선학교 여학생들이나 학생 누구라도 일본애들 한테 맞으면 가서 숫자에 상관없이 박살을 내놓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울컥하더군요. 타국에서 차별받으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그 자긍심과 자존감이 절절이 느껴지더군요 ㅠㅠ
자존감을 희한한데서 느끼시네. 그리고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조선학교 이야기에 당신이 왜 동질감을 느낍니까?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은 전혀 다른 별개입니다 똑바로 아시길. 어디 김일성 따위나 추앙하는 재일조선인을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재일한국인들에 갖다댑니까? 정신차리세요.
@@user-hz5ru7iz2g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bittersteel5150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교가 가사를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열도의 정 중앙에 있으면서도 식민사관, 황국사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고 오히려 열도에 야마토라는 제후국을 세우고 문물을 내려줬던 백제인의 기상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일제의 일본서기를 단순히 노래 한 곡으로 압도해 버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낸 가사에 감격 했습니다. 반면 그 역사의 본토인 우리땅에서 광복 후 80년이 다 되도록 식민사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처참한 우리의 역사교육과 자연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저 교가를 우리 국사책에 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저 교장선생님을 우리의 교육부총리에 임명 한다면 다 망가진 우리 교육을 회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 교가는 식민사학을 완전하게 제압 할 한민족 국사의 극한 패러다임 전환 입니다. 여몽전쟁에서 항전 끝에 패한 삼별초가 건너간 류큐왕국인 현 오키나와 역사도 연구하고 발굴해야 할 우리의 역사
교또국제고는 타국에서도 그런 역사 의식으로 교육을 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역사를 반대로 가르치니 역사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설이라는 학문적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힘이 얼마나 공고한지 (교과서를 만들고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관련단체를 장악하니) 정치적 권럭은 되레 그들의 신하일 따름입니다. 이걸 정치적 권력이라는 정부나 당파의 판단문제로 보게 하는 게 그들이 바라는 바이고 그들이 이제껏 친일청산 없이 버젓이 살아남아 있는 방법이죠.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방법을 찾아주세요. 고맙습니다
@@sungkongcho8671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감동과 기쁨의 우승으로 너무 축하하고 '함께' 행복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한국인들이 기아타이거즈를 이어 (늦었지만) 다양한 성원과 응원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들이 애타게 부르고 자긍심을 갖는 이 조국은,,, 거룩한 땅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친일과 매국이 여전한 판에....이 기회를 빌어 진정으로 그들에게 거룩한 응원을 보여줍시다.......국제고는 물론 재일동포 만세 !!!
@@hanbaedal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김윤명-l5f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우승한 야구부원은 전부 일본인 학생들 이었다는 얘기도 합시다. 한국계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그들을 뭐라고 할건가요 ? 일본놈들 이라고 할건가요 ? 거기에 대해서도 한말씀 하시죠 도올선생님 ! 재일교포 학생들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학교 교가를 한국어로 불러서 더욱 감동적 이었죠 !
@@haedalbi-art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시진핑 찬양하는 친중 선생님 유튜브 알고리즘돌아다니는 짤 잘 봤습니다 미래를 통찰하는 능력이 한참 부족하신것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애국자는 국내주식투자자 장기로 묶여 반타작나서 팔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도 생각합니다 2차전지 사서 물린 나같은 경우도 진심으로 2차전지 회사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들이 윤석열이에게 정신차리라고 교토국제고의 승리를 보여주신 것 같다. 석열아, 우리민족 괜찮은 민족이란다. 너 개인의 열등함을 우리 민족에게 씌우지마라! 니 아비가 일본에게 돈받아 공부했다고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의존하고 살아야할 민족으로 착각하지마라 우리 한민족 너 같은 사람만 없으면 세상에 우뚝설 수 있는 나라란다! 하고....
일본에서 공부햇던 사람입니다. 진짜 한국인은 재일교포들입니다. 거기서 같이 알바했던 교포3세 고등학생이 있었는데..그친구가 자랑스레 하는 말이 "형님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우리 조선학교 여학생들이나 학생 누구라도 일본애들 한테 맞으면 가서 숫자에 상관없이 박살을 내놓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울컥하더군요. 타국에서 차별받으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그 자긍심과 자존감이 절절이 느껴지더군요 ㅠㅠ
대한민국의 친일매국병자들 때문에 나라의 장래가 걱정입니다 일본 문회를좋아하고 즐겨도 역사인식 민족적 정체성을 올바로 해야겠다 특히 젊은 세대들 나라를 잃으면 먹고사는 게!
ㅢ😂😢
자존감을 희한한데서 느끼시네. 그리고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조선학교 이야기에 당신이 왜 동질감을 느낍니까?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은 전혀 다른 별개입니다 똑바로 아시길. 어디 김일성 따위나 추앙하는 재일조선인을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재일한국인들에 갖다댑니까? 정신차리세요.
@@leopolis3516
엄청 똑똑하시고 잘나셨네요
혼자 대단한걸 아시네요.
매국짐
댓글부대 ㄱㅅㄲ
열폭 지뢀발광하내 ㅎ
교포들도 이렇게 민족의식이 살아있는데 ㅜㅜ 지금 이놈의 나라는 이모양 이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역사, 철학등 인문 교육이 사라진 것이 이유라고 봅니다.
그래요 여기 한 사람 추가요
윤튜브 영상...민족 같은건 없어. ........하나더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입니다...시청하시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겁니다
상정이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러게 선거 잘 합시다
교토국제학교
어린 학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국본토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워쥤네요
고마워요
전원 일본인이고 선수랑 감독은 학교측에 교가를 바꿔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어요. 학교하고 사이가 안좋습니다. 도올도 여기 구독자도 나이든 국뽕들이라서 착각하고 자기들끼리 민족주의 착각하고 있어요
뉴라이트 퇴출운동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적절할때 참 잘 이겼어요. 이 나라가 어찌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시기에~~~
응원합니다 교토국제학교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올바른 역사관이 중요합니다
@@user-hz5ru7iz2g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ライダイハンには謝罪と賠償したの?
그런 말을 한적이 없어 다시 찾아봐 완전 다른 말이니까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땅은 거룩한 우리조상 옛적꿈자리 학생들의 눈물 가슴 뭉클합니다 🎉🎊
한국계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갑자원 개장 100주년, 제106회 하계 갑자원대회 우승을 축하합니다!
갑자원이 한국에서 아무의미가 없고 아무뜻도 없으니 고시엔이라 불러라...왜? 한자글대로 읽나?
우리 국민 수준이 낮고 이기적인 판단이 국가의 장래를 망치고 미래를 어둡게 하네요 .
제발 양심 회복과 진정으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정치가 서길 빕니다 .언론이 바로 서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서로 후회 할때가 올듯
@@user-wc2nk5jy3l 국민 수준은 그 나라의 교육방식에 따라 결정되어진다고 봅니다.
도울선생님 옳은말씀입니다 ~늘 깨어있게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조심하세요
도올.
한반도 본토에 사는 우리가 부끄럽습니다.
한반도라는 명칭은 일제가 심어놓은 반도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대륙을 지배하고 호령하던 민족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부끄러우면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본토는 무었인가요.
@@user-qj3tj3es1o 대한민국 헌법 제3조(영토조항)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조문은 대표적인 일본제국 식민주의 산물로서 하루빨리 개정하여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영토가 어찌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뿐이겠습니다.
응원합니다 도올님
도올 선생님 같은 분이 많아져야 하는데, 진짜 도올 선생님은 사(師)라는 단어가 어울리시는 분입니다🏅
좋아요 수고 하십니다
울나라 교과서는 백제의 일본역사에 대한 것들을 쉬쉬하는데 교가에 아예 박아놨네요 ㅎㅎ 일본은 백제 패망 후에 시작이니 정확한 것이지요. 그 전에는 백제 왕자들이 있었던 하나의 담로~ 자랑스럽습니다 ㅎㅎ
나의 남동생 왜왕 아무개에게 잘빚은 동거울을 하사하노라~~
일본이 백제 맞죠?미국애들이 영국에서 온거처럼?
팩트입니다!!!
천황가는 백제계이고 일본국호이전의 왜는 백제가야 신라고구려의 분국내지 제후국이고 그이후 일본이라는 나라로 독립한거죠!
근대 영국과 미국의 관계로보면 거의 정확합니다...
뭔헛소리해... 중국놈들 침튀기며 숟가락 얹을소리하네. 일본은 일본 우리는 우리다
@@bittersteel5150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건강 꼭 지키시고 얼마안있음 저 쓰레기들 치울날이 올거라 믿습니다
정치인들이 팔아 먹었지 국민이 팔아 먹었나 ... 아직도 반성을 못하는 것들이 ㅉㅉㅉ
국민이 세워 놓으면 또 거들먹 거리는 게 똑 같군 !
정말 이 아이들에게 머리숙여 존경함과 감사를 한없이 바치고 또 바칩니다.
교가 가사를 보는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열도의 정 중앙에 있으면서도 식민사관, 황국사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고 오히려 열도에 야마토라는 제후국을 세우고 문물을 내려줬던 백제인의 기상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일제의 일본서기를 단순히 노래 한 곡으로 압도해 버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낸 가사에 감격 했습니다.
반면 그 역사의 본토인 우리땅에서 광복 후 80년이 다 되도록 식민사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처참한 우리의 역사교육과 자연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저 교가를 우리 국사책에 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저 교장선생님을 우리의 교육부총리에 임명 한다면 다 망가진 우리 교육을 회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 교가는 식민사학을 완전하게 제압 할 한민족 국사의 극한 패러다임 전환 입니다.
여몽전쟁에서 항전 끝에 패한 삼별초가 건너간 류큐왕국인 현 오키나와 역사도 연구하고 발굴해야 할 우리의 역사
존경합니다 페이미 국회의원 아웃
Ok
존경합니다!!!
🎉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맞습니다
후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미국에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후배님들덕분에 우리학교가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학교덕분에지금내가있습니다.후배님들 존경합니다.
자랑하나생겼네😁
가슴속이 먹먹해졌어요 도올 선생님 존경합니다 ❤
올림픽도 그렇고 교토국제고도 그렇고...민초(선수)들은 최선을 다하는데,,,더러운 웃대X리 (협회,정부)때문에 피곤하다...도올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교또국제고는 타국에서도 그런 역사 의식으로 교육을 하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역사를 반대로 가르치니 역사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설이라는 학문적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힘이 얼마나 공고한지 (교과서를 만들고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관련단체를 장악하니) 정치적 권럭은 되레 그들의 신하일 따름입니다. 이걸 정치적 권력이라는 정부나 당파의 판단문제로 보게 하는 게 그들이 바라는 바이고 그들이 이제껏 친일청산 없이 버젓이 살아남아 있는 방법이죠.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방법을 찾아주세요. 고맙습니다
웅장하고 뭔가 애잔함이 베어있는 교가입니다~
교가 2절을 보면 '서해를 울리도다'도 나옵니다. 감동적입니다.
결국 일본 야마도 교토땅은 우리것이네...우리땅이다^^
그리고 피가 섞였으니 선조가 같으니 형제국입니다 피로얼룩진 형제국으로 보시면 되요 우리가 어버이나라인대 어버이나라 등에 칼꼿은거죠!!! 그래서 벌받고 있는중!!!
거룩한 조상의 은덕이 두나라의 있습니다
@@user-vp6js7mm2s 부디 그렇길...
중국 본토도 고려때까지 우리 땅이었습니다. 유투브 책보고 함 보세요~
@@last7years 그냥 지구조선이 맞아요 ㅎㅎ 초창기 인류 태호복희때!!! 지구촌은 하나죠 ㅎ호
나라가 얼마나 엉망인지
국민들은 대통령이 임기 중
독도 넘길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만 제정신으로 돌아가면 대한민국은 한층
더 발전될겁니다~~
선생님 영상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쇼!
광복 후에도
이 나라가 얼마나 역사교육을
개떡같이 해왔는지 요즘에 너무 절실히
느껴요...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합니다...
진짜 심각해요 ㅠㅠ
제대로 된 동영상을 보게 되네요.
늘 고맙습니다.
재탕 삼탕 겉핥기 복사 붙여넣기 질려버리는 세상에....
존경합니다 도올선생님. 항상 건강하시여 좋은 말씀 오랫동안 들려 주세요. 고맙습니다.
좋은말씀 선생님 의 애국심이 존경스럽습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도쿄 국제고 교가를 들으니까 울컥하는 그 무었이 있더라구요
쿄토 국제고 입니다
국회는 민족반역자와 부역자들을 추방하거나 무기징역으로 강력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뉴라이트 같은 것들이 다시는 설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감격스럽다. 재일 한국인들이 힘모아 세운 자랑스런 학교.
우리나라도 역사교육을 다시 되돌려야 합니다.
@@sungkongcho8671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퇴출운동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감동입니다. 교수님 늘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늘 선생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대한민국은 도올 선생님 때문에 정신적으로 한차원 성숙한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이 나라는 오디로 가는지, 독도 마저 지키지못한 선조들에게 죄송하기.
교토국제고 야구부 학생들이 큰일 해냈네요
교가를 작가하신분이 누구실지 궁금합니다
독도가 한국 땅인데 뭘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지?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땅은
거룩한 우리조상 옛적 꿈자리
남해바다 건너서 조선땅은 거룩한 우리조상 옛적꿈자리
감동과 기쁨의 우승으로 너무 축하하고 '함께' 행복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한국인들이 기아타이거즈를 이어 (늦었지만) 다양한 성원과 응원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들이 애타게 부르고 자긍심을 갖는 이 조국은,,, 거룩한 땅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친일과 매국이 여전한 판에....이 기회를 빌어 진정으로 그들에게 거룩한 응원을 보여줍시다.......국제고는 물론 재일동포 만세 !!!
국제고윤도라이가 괴롭히지안을까 걱정되네요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슬픕니다.
제자리에 있어요 용산 멧돼지하고 암놈만 지랄할뿐 ㅎ
도울선생님 강의감사합니다 지금 역사적으로 가장 무모하고 무도하고 무식한 통치자가 나온듯 합니다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국민은 그런 통치자 독재자에 어느 민족 보다 강한 국민입니다
선생님 강의 역사에
국민에 위익하고
윤 석열 정부 깨워처 주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시대 어른이 없는데 도올선생님이 그래도 어른이십니다.
천지는 소산적 자연, 귀신은 능산적 자연. 아주 적절한 매치입니다. 또하나 배웠습니다.
교가 몇글자에 우리나라 국사교과서보다 더 장대한 역사가 담겨있다.
@@hanbaedal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이래가지고는. 전쟁질이나. 하겠습니까. 전쟁나면. 먼저도망 가거나. 숨겠지요
😀
윤총독 때문에 답답한 요즘에 … 교토국제고 우승이 카타르시스를 주네요. 😊
도울 선생님 감사합니다.
승여리 열마나 짜증 났을ㄹ까 본토학생이 우승 못하고 제일 한국인 학생 학교가 우승 했우나
그대는 자국의 대통령 을 총독으로 부르는가
그러면 당신은 어느나라 식민인인가
@@user-se9ow4wb1q 그대는 일본과 동맹을 맺는 사람을 일의 총독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가?
일제강점기 우리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을 같이 하는가?
@@user-yj8qy3gr5z 누가 일본과 동맹을 맺어요? 동맹 뜻 알아요? 허위사실유포 말아요
일제때 우리선조들은 주권이 없었던건 기정사실입니다
@@user-se9ow4wb1q 이 양반 아무것도 모르시네. 국회 청문회 아직도 안 보셨나!
고맙습니다 ~^^ 국민 모두가 깨어날 수 있도록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콜걸이 삼킨 대한민국!!!!
한국인이 야구 방망이로 한 대 세게 맞았네요~
도올선생님 있는것 그대로만 축해해주세요~~^^ 거기에 꽂꽂이까지 하시네요~^^
왜 우리는 자력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김윤명-l5f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잘 봅니다
이번에 우승한 야구부원은 전부 일본인 학생들 이었다는 얘기도 합시다.
한국계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그들을 뭐라고 할건가요 ?
일본놈들 이라고 할건가요 ?
거기에 대해서도 한말씀 하시죠 도올선생님 !
재일교포 학생들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학교 교가를 한국어로 불러서 더욱 감동적 이었죠 !
스스로 깨달아 얻으신 오묘한 이치를 통한 明悟의 힘.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응원합니다 교토국제학교
좋은강의 잘 봤습니다.
고센에 있는 우리민족고교 정신을 우리가 배워야 하네요!!! 그학교 교가도 배워서 부릅시다~~
윤석열 같이 근본이 천한 인간을 대한민국의 대표로 뽑았다는 사실은 아직 우리 민족 스스로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 입니다.
진정한 한국인 이십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존경합니다
도올 교수님은 88년도 신동아 월간지 때부터ㆍㆍ공감하고 있슴다.
히로부미 윤이 총독으로 있는 우리나라 현실
대단한 한민족임에 틀림없다 우리만 모를 뿐이지 교수님 감사합니다
@@haedalbi-art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서기 49년)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서기 49년)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서기 55년)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요동과 요서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서기 488년)
[자치통감] 영명 6년(서기 488년)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북위)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도올샘 감사합니다.
일본땅에살면서 뿌리을 잊지안은 교포들 너무대단하다 ~존경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독도도 내줄려고하는데 ~윤석열탄핵만이답이다
우리나라는 동해를 우로건넜다고 할 것이고. 일은 좌로 건넜다고 할 것 이므로 유의해야 할 듯 합니다
야마토는 고대 일본 땅을 가리키기에 '동해바다 건너서'를 일본이 좌로 건넜다는 해석은 어렵다 봅니다.
동해바다를 건넜다는 건 서쪽(한반도)에서 동쪽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죠.바다의 동쪽(일본)에서 봤을 때는 해당 바다를 동해라고 부를수는 없지요.서해라고 해야지 말이 되지요.
😂😂😂 좌.우 따질필요 없어요 😅 이나라에서만 헷갈려 하는데? 그들은 분명하게 명확히 ( 교가4절에) 자신들을 대한의 자손,이라고 당당하게 노래하고 있답니다 ㅎㅎ 😊
선생님, 건강하세요.
역사를 감정적으로 보지말고, 정직하게 봅시다.
노래도 잘부르시네요 ㅎㅎ
가끔 들어도 이렇게 분통이 터지는데 저렇게 역사와 철학을 꿰고 살면 저렇게 훤히 알고 있으면 그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궁금타
우리 학생들 한국에서 초대 바랍니다 🙏
윤가
요농빨리
탄핵해야
답
인데요
선생님 대학때 스파이더 라고 혼자 칠판하고 얘기하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땅 대마도를 찾읍시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이 정도 역경은 금방 극복해 나갈거라고 생각합니다 !
동해를 당당하게 부르는걸 듣고 너무 감동 받았습니다.
100회쪠 교토국제고의 우승의 의미는 이 시점을 계기로
한일관계에 커다란 전환점을 예시합니다 🎉 ❤ 😅
- 길이보전하세.~~!!!???,
시진핑 찬양하는 친중 선생님
유튜브 알고리즘돌아다니는 짤 잘 봤습니다 미래를 통찰하는 능력이 한참 부족하신것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애국자는 국내주식투자자 장기로 묶여 반타작나서 팔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도 생각합니다 2차전지 사서 물린 나같은 경우도 진심으로 2차전지 회사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말하는 동해와일본이 말하는동해가 같은것인지?어데서 츨발해서동해를 건너서 가는건지?
5:45 국민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그 정권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밖에 없다.
전쟁을 불러일으켜서 위기 상황을 만듦으로서 그 위기 상황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국제화가 의타심으로 오해하기 쉽네요.
우리역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도울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십시오 교가를 듣는 순간 울컷해습니자
조선총독부를 제거하라
할아버지가 일본국적이면, 나도 일본사람입니까? 학자께서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user-se9ow4wb1q 그대는 일본과 동맹을 맺는 사람을 일의 총독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가?
일제강점기 우리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결을 같이 하는가?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들이
윤석열이에게 정신차리라고
교토국제고의 승리를 보여주신 것 같다.
석열아, 우리민족 괜찮은 민족이란다.
너 개인의 열등함을 우리 민족에게 씌우지마라!
니 아비가 일본에게 돈받아 공부했다고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의존하고 살아야할 민족으로 착각하지마라
우리 한민족 너 같은 사람만 없으면
세상에 우뚝설 수 있는 나라란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