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j4664 저도 잘 모르지만, 거북선 설계도가 정확히 남은건 없어서, 그나마 기록을 모아보면 3층 형태와 2층 형태가 있어서 두가지 형태를 모두 반영한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산대첩은 영화처럼 긴장감있게 수싸움 하지는 않았고 조선의 압도적인 승리였다고 하더라구요. 영화적으로 각색하다보니 백프로 사실과 동일하게 진행하기는 어려웠을겁니다. 사실대로만 찍으려면 다큐멘터리 찍어야죠 뭐 ^^; 그래도 어린이들한테 역사교육이 중요한 이때에 저 감독이 이순신 내용으로 흥행해주면 임진왜란 교육하기도 좋고 다음세대에도 잊혀지지 않아서 장점도 있을것 같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길
이순신 장군은 문관 출신 집안의 양반이었고 실제로 20대 초반까지 문관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결혼 이후 장인(무관 장교)의 영향으로 20대 중반부터 무관시험을 준비하고 30대 늦은 나이에 무관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다른 무관들에 비해 기록(난중일기, 장계, 서신들)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도 어려운 병서도 다 섭렵하신 것도 과거시험을 오래 준비하며 글을 많이 공부했던 습관이 남아서라고 얘기 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특히 난중일기에서 보면 본인이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게 쓰셨지만 실제로 표현하지는 못 했다는 글이 많습니다. 그래서 박해일 배우의 절제되고 문관 선비같은 느낌의 연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배를 움직이던 격군들, 의병들, 이름 몰랐던 장군들이 잘 보여서 많이 감동했습니다.
ㅇㅈ 역사 지식도 사전 지식도 없이 리뷰 하면서 불만만 토로 하면서.. 뭐가 부족 하다 뭐가 부족 하다.. 하는데 진짜 최악 인 리뷰임..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ㅎㅎ 특히 나대용 에서.. 운에 맡긴건가요 ? 하는데 소름.. 어쩔수 없는 선택을 운에 맡기는 건가요 라니.. 진심 최악 처음에는 역사 고증 어쩌고 하더니.. 끝에는. .. 표현 을 고쳤어야 한다고.. ㅋ 판타지 영화인줄 ㅎ
평소 이순신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라이너님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이질적으로 느끼신 듯 합니다. 영화 속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저도 100% 공감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순신은 과하다싶을 정도의 기록광에 철저한 지략을 갖춘 전술전략가이기 때문에 저는 명량에서의 감정적인 이순신보다 훨씬 몰입하면서 봤어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재-p1g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좋은 리뷰고 대부분 공감했는데 박해일씨 연기 부분에 대한 평은 공감 가지 않네요. 깊은 맛이 우러나는 선비 같은 이순신 연기, 새로운 캐릭터 해석이 정말 좋았습니다. 흐릿하긴 커녕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박해일 씨가 연기하는 이순신을 계속 보고 싶어서 한산으로 연기가 끝나는게 아쉽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작품에 신파 장면이 1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부분도 이해가 가질 않네요.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는건 설득력이지 신파의 유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8:12 리뷰에 오점으로 보여집니다. 극중 완성된 학익진도와 '나대용은 보라' 라는 서신을 한장면에 잡습니다.(19:33 사진 좌측에 서신이 나오네요) 또 서신만 단독으로 비춰주기도, '보라'라는 자막을 뒤늦게 나타나게하여 강조까지 합니다. 이런 연출로 볼 때, 이순신이 거북선을 배제하고 전략을 세웠다고 해석하는것은 비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한장면 한장면 집중해서 보지않으면 놓치기 쉬울수는 있겠죠. 18:59 리뷰에서 제시한대로 비장에 카드로 연출을 한거죠. 감독은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hiroono1 보아하니 일본인인 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이순신 장군을 님은 받아들이지 못 하시네요,,, 날조는 님처럼 사실과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시는 걸 날조라고 하고요,,,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난중일기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아주 잘 남아있읍니다,,, 조선 수군의 패배는 거의 괴멸에 가까운 상황을 초래해 정유재란의 원인이 된 원균의 칠천량 해전 뿐이니 임진왜란사 공부를 좀 더 해보심이 어떨까 싶읍니다,,,
@@moonds1228 거북선은 천장을 판으로 덮는 구조상 시야가 매우 좁고, 또 가로폭에 대해서 세로 길이가 짧고,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속도가 느려, 진로 변경이 용이하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전복하는 위험이 있었다 . 그리고 밀폐된 선내에서 화포를 쏘자 그 검은 연기가 선내에 충만해 시야를 막고 승무원은 잠시 산소 결핍으로 고생했다. 즉 거북선은 방어력과 화력은 좋지만 배로서의 성능이 너무 낮다. 일단 목표를 놓치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것이 현대의 거북선의 기술평가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출동 장면은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이다.
귀선이 판옥선위에 지붕을 씌운것이다 예상을 한거지 그런 기록도 없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귀선과 설계도는 남아있지않은데 판옥선이라는 전함과 귀선으로 미리 정해놓고 과학적인 해석을 하다보니 귀선은 철갑선이 아니다 라는 결론부터 내는 전문가들이 너무 어이가 없다. 판옥선은 조선의 대표적인 전함으로 대량 생산되어 보급되는 전함으로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해선 만들어 졌다는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특수선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최첨단 스텔스기나 마찬가지 이므로 판옥선에 비해 규모나 크기가 다른 특수선으로 봐야 한다. 난중일기나 다른 기록들을 보면 거북선은 매우 빨랐고 화력이 대단했고 충파에도 매우 강했다고 하며 적의 두려움이 공포 그자체 였다고 하는것은 판옥선 위에 지붕을 씌우고 꼬챙이를 설치하고 적의 화공을 막기위해 적은 가마니를 쒸은 정도의 특수선이 아닌것은 여러기록에서 추정 할수있다. 분명 판옥선에 무거운철판과 철쇠꼬챙이로 덮는다면 기존 판옥선으로 만든 거북선은 무게로 인해 속도나 균형을 유지하는데 무리가 따르는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속도,충파,화력까지 깇춘 거북선은 기존 판옥선에 지붕을 씌우고 젓은가마니을 씌운것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 거북선은 기존 판옥선보다 좌우폭과 길이가 다르고 각층마다 높이가 다른 특수선으로 봐야 하고 한반도 고대국가로 부터 내려오는 철을 가공하는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쇠꼬쟁이가 있는 철판을 만들었을것이고 충판을 견디어 낼수있는 건조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좌우폭이 더 넓고 길이는 판옥선보다 조금더 길정도이며 판옥선보다 격군과 화포도 더 많을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과 거북선을 보유한 그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능력은 동북아 아니 그당시에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깊은바다와 태풍 그리고 삼면이 바다에 밀물과 썰물 그리고 조류 자연환경이 만들어준 한반도에 이어 내려오는 조선술과 삼한이후부터 내려오는 철가공기술 또한 철갑거북선을 만들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 조선의 목조 건축물과 그건축물에 박혀있는 철가공물들은 쇠꼬챙이가 연결되어 있는 철판은 그리 어렵지않게 만들수 있으며 판옥선의 크기가 아닌 새로운 거북선을 건조하면 지붕의 철갑의 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거북선은 천장을 판으로 덮는 구조상 시야가 매우 좁고, 또한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진로 변경이 쉽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전복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밀폐된 선내에서 화포를 쏘자 그 검은 연기가 선내에 충만해 시야를 막고 승무원은 잠시 산소 결핍으로 고생했다. 즉 거북선은 방어력과 화력은 좋지만 배로서의 성능이 너무 낮다. 일단 목표를 놓치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것이 현대의 거북선의 기술평가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gim56788 한국인의 역사인식은 그 정도다. 한국인이 믿고 있는 많은 사건은 근거가 없는 날조인 것이다. 731부대나 난징 사건에서는 조선인의 사망자는 한 명도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주장하는 수십만 명의 희생자는 유령인가? 한일 병합 때 일본이 조선인을 채찍으로 쳐 식량을 수탈했다고 하지만, 그 35년간 한반도 인구는 두 배로 늘고 있다. 이 급격한 인구증가는 조선인이 매일 섹스를 하고 있던 증거이지만 한국인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아 사정하고 물만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 당신은 조선인이 그런 민족이라고 생각합니까?
준사의 장면은 라이너님이 조금 오해한 측면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준사가 고문을 받다가 내 뱉은 말들에서 준사가 악에 바쳐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순신에게 대항하는 척 하면서 일부러 정보를 누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부하들을 시켜 준사를 다른 일본군들 모르게 나올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아무도 없게 만든 가운데 준사의 얘기를 듣고자 함이었던 것이죠.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도 라이너님처럼 국뽕 신파 치사량 맞을 각오하고 영화 봤는데 웬걸 오히려 ㅈㄴ 깔끔해서 좋았네요.. 초반 : 전술에 대한 고민 중반 : 전술에 대한 갈등과 첩보전 후반 : 전투신 끝.. 그리고 몇몇 장면은 대체 어떻게 찍었지는 하고 의문 들 정도로 잘 찍은 장면도 많았고...개인적으로 저는 박해일이 연기한 이순신이 더 좋았네요..담담하니..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hiroono1자~~역사적 증거다‼ 러일전쟁에 공을 세운 샤토 테츠타로 쓴책 1927년 "절세의 명장 이순신"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가 한 말이다‼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서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덕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사토가 망상쟁이더냐⁉️ 그리고 "제국국방사론"에는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해 서술했다
-전 '한산' 속 이순신이 징비록과 난중일기 속 이순신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껴서 너무 반가웠어요. (오히려 명량 속 이순신을 보고 책을 읽고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달라 좀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나이도 있으시고 너무 힘드신 시기였던지라 최민식배우님이 연기한 모습이셨을 수도 있지만). 실제 이순신 장군은 문인으로서 외모도 선비의 풍모로 고고했다 하였고 그의 측근조차 속내를 알 수 없었다고 하니 감정이 절제된 박해일의 연기가 적절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순신 장군께서 호령하셨다면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아니라 박해일처럼 크지 않고 단호하게 지휘를 하셨을 것 같기도 하구요. -시기에 맞게 한산을 먼저 했어야 한다는 의견에서도 저는 김한민감독이 이순신장군의 이미지 조율면에서 명량의 이순신을 먼저 보여준거라 생각합니다. 명량의 이순신 모습이 대중이 알고 있는 용맹하고 처절한 장군의 모습이고, 한산의 이순신이 징비록과 다른 고서에서 볼 수 있는 냉철한 문인의 모습이라 감독이 느꼈던 다양한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절대적 불리함과 여러 개인사로 처절하면서 극적인 승리에는 최민식의 이순신이, 모두가 아는 해상전술을 치밀하게 설계하여 완벽한 승리의 해전에는 박해일의 이순신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노량의 김윤석 배우님의 이순신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용도 인물이 아닌 전투 하나에 집중하여 담백했고 해전도 정말 멋있었고 관련 정보 제시나 자막처리로 관객에게 친절한 점도 너무 좋았기때문에 한번 더 볼 예정입니다. 내년 설 즈음에 노량이 개봉한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 기대되네요. (역사가 스포라 너무 슬프겠지만요) 1. 저는 전투가 일어난 지역 근처에 살기때문에 해전에서 구선이 갑자기 등장한게 전혀 놀랍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남해쪽 바다엔 진짜 조그만 섬이 많아서 거북선이 나왔을 때도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다 생각했거든요. 해전 초반에 안개가 자욱해서 그때 숨어 원균의 뻘짓이 끝나길 기다렸겠다고 가족들끼리 얘기했었는데.(실제 바다안개 끼면 지척이 안보이니까) 원균이 저럴거라고 이순신이 예상했기 때문에 기다렸을거라고, 역시 원균은 원균했고 이순신은 이순신했다고 얘기했었어요. 이순신이 전술 외 또 하나의 기별을 준비한 장면을 통해 나대용이 출정할 건 알고 있었으니까 반대쪽 왜군들 시선에선 갑자기 덩치 큰애가 신출귀몰하게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여서 당시 왜군들이 왜 바다괴물이라 부르고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2. 원균의 얘기에 다들 별말을 안했던 건 다른 이들은 원균보다 지위가 낮기도 했고, 처음엔 이순신도 한 장군으로 나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엔 난중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모든 행적에 어이없어 하시지만. 3. 준사와 독대한 장면은 모두가 있었던 초반 장면에서 준사의 몇마디 안되는 말과 눈빛만으로도 본질을 꿰뚫고 따로 불렀을거라 생각해서 역시 이순신 장군님은 사람을 제대로 보는 혜안을 가지셨군 생각을 했었는데, 상상 속 장면이었던 걸까요? 갑자기 궁금.
1번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같이 보러간 사람들도 거북선 갑툭튀 아니냐며 어이없어 하길래. 설전을 좀 했습니다. 남해에 섬이 유독 많다는걸 배타고 다녀보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이해를 못하더라구요. 진해에서 군생활 하는동안 아직도 기억에 또렷히 남아있는것이 섬 몇개를 끼면 중형 항모도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과 500미터 남짓인데 레이더로 나타날곳을 알고 빤히 보지 않는이상, 더군다나 배를 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넓은 시야를 한번에 볼수있는 사람은 몇 안될겁니다. 갑판을 돌아다니며 여유있게 풍경을 구경하는거라면 몰라도, 우현 좌현을 맡아서 예의 주시하는경우라면 시야는 좁아질수 밖에 없습니다.
저도 상상했던 장군님의 모습이 한산의 장군님이여서 감동했습니다 준사는 다른 일본인이 알지못하게 조선말로 일본의 정보를 크게 떠들고 자신이 총을 쏘았다는 것을 장군님 왼쪽어깨 부분을 밀치며 힌트를 주었고 그래서 장군님이 다른 뜻이 있는 자니 목숨을 거두지 말라 하신거 같습니다 그리고 세작의 목걸이를 받았으니 상상의 장면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장면 중에 이순신 장군이 쓴 학익진 전도에 각 위치마다 장수들의 특성과 성향을 고려한 배치에서 소름돋았었음...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전과를 세운 자신의 부하들을 장계로 써올려 포상해야한다고 기록에 많이 남기셨었죠. 아무래도 그덕에 영화에서도 여러 휘하장수들이 실명과 함께 등장한 게 아닐까하네요
@@화성달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꽤 많이 알고 있긴 하네요. 하지만 조선이나 한국의 역사와는 별개로 동아시아, 일본의 역사를 연구한 유럽 학자에게도 한산도 대첩은 살라미스(salamis) 해전으로 불리고 평가받는다는 점은 객관적 평으로서도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뛰어난 것이겠죠. 물론 저도 거북선이 정말 사용되었었는지에 대해선 조금 의문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명백한 사실
@@luminary3 한산도의 싸움은 와키자카가 군률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이겼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긴 싸움은 이것이 마지막이었고, 그 후는 일본군이 배에 대포를 장비해 곶에 포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모두 패전이었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한 싸움의 예와 그 증거가 되는 문헌이다. 1.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2.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3.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4.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선조실록.
1. 와키자카의 전술 : 일본수군의 유일한 장점인 근접전을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빠른 일본배를 활용해 짧은시간 조선 판옥선에 배를 붙여야만 승산이 있습니다. 두줄로 학익진을 짜서 제자리 선회하며 연속으로 포를 쏘는 판옥선의 전술을 몰랐다면 다소 일부군선을 희생해서라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이었습니다. 실제로 견내량을 벗어나자마자 측면에 매복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있게 추격했다고 하죠. 상대 적수의 강력함을 합리적으로 풀어낼 수록 이순신 장군이 돋보인다는 당연한 도식을 위해서는 와키자카 장면이 많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2. 이순신 장군의 캐릭터 : 당시 남해안에서 4개함대(전라좌/우수영, 경상 좌/우수영) 중 전투를 벌이며 이겼던 것은 이순신의 함대가 유일했습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연합함대를 구성할 때 각 함대의 수장들의 부족한 경험과 판단력으로 아마 전략회의를 할 때 오만가지 의견이 난무할 것으로 상상이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런 중구난방 장수들을 이끌려면 절대 감정적이어선 안되고 냉철하고 단호한 판단, 구체적 전략전술, 그리고 자신감 있는 리더쉽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죠. 그래서 모든 배의 배치도를 직접 그려 디테일한 전술을 따르도록 알리고 훈련하면서 장수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리더쉽으로 일사분란한 함대를 구축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묘사가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3. 거북선의 등장과 나대용의 역할 : 아마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 거북선의 개량과 결정적인 순간의 등장으로 연출하다보니 따라온 과장(?)이겠죠. 그런데 이런 장치들이 거북선이 등장하는 장면을 소름돋을 정도로 극적으로 만들었던 걸 보면 성공한 설정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당연히 장군의 지시로 거북선이 돌격했다고 생각했어요. 멀리서 거북선이 날아왔을리도 없고 장군의 지시도 없이 멋대로 돌격할리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나대용을 매개로 2가지 거북선을 모두 등장시킨 갈등장면이 창의적 발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영상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증과 어긋나는 여러 장면들,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된 허구들에 대해서는 역시 평가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영상에도 나오지만 전작의 신파대사들과 뜬금없는 편집방식들 대부분이 개선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태평양 전쟁을 매우 건조하게 다룬 '도라도라도라'가 오버랩되며 전쟁영화를 효과적으로 다룬 매우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굳이 명량이랑 비교하자면 명량은 분위기도 너무 어두운데 전투씬 빼곤 좀 지루하기도 해서 딱 한번 보고 말았는데 한산은 지루하지도 않고 장면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계속 보고싶을정도로 재밌음. 이순신 명대사도 전투씬이랑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거같고 넘 공감가서 가슴이 더 벅차오르는 느낌. 배우들도 다 멋있고 어울리고 연기 개잘함. 4일 연달아 봄 ㅋㅋㅋ돈 하나도 안아까움 ㅋㅋㅋㅋ
말씀하신 단점들도 평소 라이너님이 말하시던 거에 비하면 그렇게 큰 단점들이 아니어 보이네요.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헤어질 결심 다음으로 최고로 재밌게 봤네요. 물론 흥행이 명량만큼 될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최근에 비상선언 같은 거 보면 관객들이 신파에 점점 더 멀어지고 같은 느낌은 드네요. 신파를 가득 넣었으면 오히려 더 흥행을 못했을 거 같은 느낌..
이번 리뷰는 라이너님과 이견이 많이 갈리네요. 밑에 댓글들 봐도 많은 분들이 같은 의견이신거 같은데 박해일의 이순신 좋았습니다. 라이너님이 그리는 이순신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영화 말미에 이순신장군이 말한 한산의 의미처럼 큰 산 같은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았습니다. 그래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네요. 나대용의 참전도 계획된 바로 느꼈구요. 준사와의 독대는 어떻게 저렇게 보셨나 싶을정도로 전혀 다르네요. 전 단지 의도된 독대가 이루어진걸로 느꼈거든요. 마지막으로 한산 전투 전 긴장감은 나름 고조되었다고 봅니다. 무려 수륙병진으로 이순신의 본진이 위협 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정에 급 출정을 결정한 이순신 장군의 혜안을 연출한 장면도 좋았습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이순신장군님 진짜 존경합니다..ㅠ 부모님이랑 영화관 가서 같이 봤는데 진짜 재밌더라구요 영화도 많이 발전한게 보이고 둘의 두뇌싸움도 꽤 볼만 했습니다 물론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서 명량때보단 긴장감이 없지만 잘 그려낸것 같아요 우리나라 판옥선이 일본군의 배보다 튼튼하고 포까지 있어서 이순신장군님이 더 유리해서 자주 이긴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그 좋고 대단한 판옥선을 이끌고 갔다가 진 원균을 보고 알았습니다.. 괜히 이순신 이순신 하는게 아니구나..
판옥선이 왜선보다 더 튼튼하고 함포의 이점이 있긴하지만 물살에 약하고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죠. 그리고 함포 사격의 사거리는 길지만 명중률 때문에 유효사거리는 200보 정도밖에 안되서 왜선의 접근을 막는게 쉬운게 아니었습니다. 결론은 이순신 장군이 진짜 대단한게 맞음
원래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죄송한데 월등하다 하셨는데. 영화 보고 온 입장에선 역으로 퀼리티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최민식이 왜 대배우인지 알게 될 정도였으니까요. 오히려 박해일 이순신은 영화에 들러리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인공인데 주인공 같지가 않아서 좀 아쉽더라고요. 아직 박해일이 이순신급을 역할을 맡기엔 부족한 배우인거 같았어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ㅋㅋㅋ 월등해? 뭐가? 영화상 상황이 그러한것이였고 실제 이순신 장군은 불같은 부분도 있었음 흔들리지않는 대쪽 같은 고집이 엄청난 분이셨지 남의 말을 한귀로 흘리고 어쩌라고 무시하며 내가 낸데를 제대로 실천하신 독고다이 성격이셨기에 원균이나 선조나 누가 지껄여도 오직 자기고집으로 밀어붙힌 분임
거북선 등장할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왜 부제가 용의 출현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작인 명량도 재밌게 보긴 했지만 약간 아쉬운 점들도 꽤 보였는데 이번 한산에서 김한민 감독이 피드백을 수용하고 개선한 부분이 많이 보여서 좋았습니다 해전 파트 미쳤으니 꼭 극장 가서 보세요!
거북선은 천장을 판으로 덮는 구조상 시야가 매우 좁고, 또한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진로 변경이 쉽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전복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밀폐된 선내에서 화포를 쏘자 그 검은 연기가 선내에 충만해 시야를 막고 승무원은 잠시 산소 결핍으로 고생했다. 즉 거북선은 방어력과 화력은 좋지만 배로서의 성능이 너무 낮다. 일단 목표를 놓치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것이 현대의 거북선의 기술평가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출동 장면은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이다.
@@V1NT0R3Z 미국과 일본은 진주만과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사실을 넘어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반면 한국은 증거가 전혀 없는 위안부, 731부대, 난징 사건 등을 날조하며 일본에 원한을 가진다. 그리고 한국인은 병합 시절 일본에서 받은 혜택을 잊고 전쟁 이후 받은 배상금을 잊고, 1998년과 2009년에 받은 경제원조도 잊고 더 돈을 달라고 울린다. 전혀 한국인의 머리에는 닭관이 있는 것일까? 배가 줄어들면 울리지만, 먹이를 받으면 받은 것을 잊어 버린다. 히데요시군을 조선인민이 환영하고 식량을 제공한 사실이 조선의 정식 역사서의 일부인 선조실록에도 적혀 있는데 한국인은 무시한다.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에 도달했다. 조선군이 거의 항전하지 않고 조선 민중의 협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속도다. 그것도 한국인은 무시한다. 그리고 이순신을 영웅으로 날조한다. 거북선의 출격 기록은 어디에도 쓰지 않았지만, 와키자카를 일본 측의 장군으로 파악해 해전을 날조한다. 실제로 그 당시의 와키자카는 병대를 1500명밖에 갖지 않는 지방의 소령주다. (단, 와키자카는 그 후 출세한다.) 한국인의 날조는 일본이 진주만에 원폭을 떨어뜨렸다고 하는 수준의 데타라메이다.
@@sindorim0417 당신은 한일 병합 시대의 한반도의 인구 추이를 아십니까? 35년간 1300만명에서 2500만명으로 배가 늘었다. 당신은 어떻게 인구가 증가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일본인이 전장에서 총을 쏘고 있는 동안 조선인은 잠자리에서 정자를 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이 조선인을 채찍으로 치고 식량을 수탈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아 사정하고 물만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당신은 조선인을 변태라고 생각합니까? 대답하십시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선은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 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을 영웅에게 날조한 것은 이승만이다.
18:58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어차피 한국사람이라면 거북선이 나온다는거 다 알고 있는건데, 굳이 박해일(이순신)이 '응 걱정마 곧 거북선 올꺼야~ 혹시나 첩자가 있을까봐 너네한테 말안했었어~' 라고 할필요가 없잖아요. 영화에서 거북선 등장만으로 다 해소되는건데... 너무 과도한 지적인거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순신을 영웅적으로 그려내면 또 국뽕이라고 지적할거 아닐련지... 대체 어쩌라는건지 모르겠음 ㅋㅋㅋㅋ
준사가 이순신과 독대하는 장면은 감독의 의도된 장면이라 생각합니다....준사가 감옥으로 들어왔을 땐 이미 도깨비(?)모양 목걸이를 한 상태였습니다. 독대하는 장면에선 준사가 목걸이를 하지 않은걸로 보아 감옥 들어오기 전 상황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준사와 이순신이 1:1로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준사와 이순신 둘만 존재하는 다른세계 공간인것처럼 연출함으로써 둘의 관계에 집중하는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너무 좋아해서 어쩌다 보니 3회차 관람했습니다.ㅋㅋㅋ 준사 장면은 편집때문에 헷갈릴순있지만 살려두라 명령한 직후에 이순신 홀로 따로 심문하고 목걸이를 건채로 감옥으로 끌고보냈던 것 같고 나대용분량 언급하신 부분은 학익진 짤 때 진도 옆에 나대용에게 따로 남겨둔 편지가 있었습니다.편지 내용은 모르겠지만 해전이 진행 될 때 상황을 보면 원균의 옆에서 지원하라는 내용이지않을까 싶네요ㅋㅋ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산 보고 나서 라이너님의 리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박해일의 이순신은 냉철한 지략가의 모습이 보여서 좋았습니다. 전작과 다른 캐릭터의 이순신을 보게 되어서 더 좋았습니다. 노량의 이순신은 또 다르게 묘사될테니 기대도 됩니다. 신파가 거의 없는 점도 좋았습니다. 점수가 좀 짜서 아쉽네요. 할리우드식 국뽕에는 점수가 후하시던데….물론 탑건도 무지 재미있게 봤습니다. 개연성은 완벽하지 않았지만요. 잘 봤습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선은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 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을 영웅에게 날조한 것은 이승만이다.
@@hiroono1웃긴넘 웃기는 것아‼ 늬덜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러일 전쟁의 해군장군 도고 헤이하치로 가 승전 기념사에서 말한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 장군님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수 없는 일이다." 도고가 구라 쟁이더냐⁉️ 그리고 지금도 일본 해사에는 이순신 장군님 사당이 있고 년중 행사로 해마다 제를 올린다‼ 이 잡것아‼‼
너무 잘만들었는데 2프로 부족한걸 느낀점을 정확하게 똑같이 설명해주셨네요 ㅋㅋㅋㅋㅋ 조금 다른점은 전 한산의 이순신이 훨씬 좋았습니다. 선비같고 고운 인상에 깊은 내면을 가진 장수가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진짜 엄하게 군기를 다루는 모습이 나왔으면 훨씬 좋았을거 같아요. 그 부분 말고는 이순신에 대해 완전 만족합니다. 그리고 독대한 장면은 고문할때 의미심장하게 이순신이 항왜를 바라보는데 그 이후에 독대 장면이 나와서 이순신이 따로 부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람은 처한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기어 두 이순신을 별개로 보지않고 같은 인물로 한 번 접근해서 보았습니다 한산에서는 근엄하고 태산같은 ..불필요한 말을 극도로 아끼는 그 이순신이 명량전투를 앞두고서는 장군들 뿐만 아니라 졸병들까지 다 모으고 일장연설을 할 정도로 , 불타는 거북선 앞에서 최고권자 체면도 버리고 울부 짖을 정도로 사람이 절박해졌구나 라고 해석하니 나름 비교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horang-horang 한국인은 사실과 픽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한 명도 없는 731부대의 인체실험과 남경에서의 학살을 날조해 그것을 믿고 있다. 한국인은 사실을 믿지 않을 때도 있다. 한일병합의 35년간 한반도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조선인은 일본의 보호에 만족하고 매일 섹스하고 있던 증거이지만, 한국인은 고려할 일도 없고, 일본인이 채찍으로 치고 식량을 수탈했다고 날조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아 사정하고 물만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당신은 조선인을 변태라고 생각합니까? 대답하십시오.
오늘 '한산'을 두번째 보러 갔습니다. 저번주에 한산을 보고 와서 너무 감동받아, 바로 그날 명량을 구매하여 다시 보고, 오늘 다시 한산을 보고, 돌아와서 또 다시 명량을 봤네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애초에 역사적 사실 여부는 영화상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역사적 잣대에 근거하여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역사에 대해서 맞네 아니네를 따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명량도 한산도 본 사람으로 명량이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명량에 너무 많은 신파가 들어갔다고 보는 분들이 꽤 계신 것 같지만, 전투 영화에서는 완벽히 없앨 수 없는 부분이고, 그게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이점이 된다면,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예술과 상업을그리고 역사까지 접목시켜 보시는 영화비평가들이나 신파를 싫어하시는 분들에게는 호불호가 확실히 될 수도 있지만, 전투영화에서는 단 한 장면이라도 전혀 신파가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전투의 목적성,지향성, 타당성,합당성 등을 관객들 ,특히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저라는 관객에게는 감정적으로 전투의 목적을 더 쉽게 와 닿는 계기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영화를 제차 몇번이고 관람하면서,감동했던 부분은 역사적 사실여부 보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이기적인 개체로써 , 나라면 저렇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전심을 다 할수 있을까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참 생각이 많네요. 제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제발 한산이 지금 상영하는 어떤 영화보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태어난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아무런 조건없이) 이런 영화들이 또 다시 만들어 질 수 있기 바라니까요... (전적으로 개인적 소견입니다)
이순신의 심리묘사는 거의 없으면서 주변인물이나 특히 일본장군의 심리묘사는 많은 그런 연출이 통쾌함과 이순신의 얼마나 대단한지를 더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고(주인공에 대한 다른사람들의 리액션이 좋을수록 더 흥미진진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이순신을 더욱 영웅처럼 보이게 하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하니(이미 역사적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만큼은 좀 오버하면 이순 '신' 처럼 보여서 독특하고 재밌다라고 느꼈던 부분중에 하나인거 같음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왜 이런댓글을 내 글에 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ㅋㅋ,,, 그래도 대답을 하자면,,, 최소한 이런 글을 쓸거면 그냥 이랬다 저랬다가 아니라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런말이 있다 이래이래서 이게 더 신빙성이 있다 등등,, 뭐 그런 걸 가지고 와서 얘기해야지 저런 말은 나도 내 하고 싶은데로 쓸라면 나도 하겠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사실 실제 역사가 어쨌든 관심 없음, 오늘 뭐먹을지가 더 중요함
@@소콜-o4k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쓰지 않는다. 선조 실록을 읽으십시오. 이씨 조선의 공식적인 역사다. 모순도 많지만 이승만에 의해 날조된 역사보다 진실에 가깝다. 내가 쓴 내용의 대부분은 선조실록에 쓰여져 있는 것이다. 일본군이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한 것도, 조선 민중이 서울을 벗어나 도망치는 선조에 돌을 던져 일본군에 식량을 헌상하고 환영한 것도 적혀 있다. 이순신이 출격 명령을 거부하고 적전 도망한 것도 적혀 있다. 그러나 거북선은 쓰여지지 않았다.
@@소콜-o4k 한국은 국가 전체에서 거짓말을 한다. 조선인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일병합에 반대한 것이다. 일본의 교육에 의해 조선인은 소변으로 얼굴을 씻는 일과 길 옆에서 배설물을 멈추었지만 거짓말과 매춘은 멈추지 않았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응? 영화를 보다가 놓치신거 같은데.. 이미 나대용에게 서신이 와 있었습니다.. 신형 거북선이 완성되었다는거라고 다들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죠.. 그냥 변수가 아닙니다. 거북선이 등장한것도 당연히 당시에 뭐 레이더가 있는것도 아니고 유인해서 끌어오면서 왜군은 속도전으로 전진하는 와중에 측면이나 후방에서 다가오는거라 개연성이 충분하죠.
극중에 나온 가토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조선침략의 선봉장 이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아닌 가토 요시아키 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박해일의 이순신 연기는 어둡고 진중하고 무게감있는 극의 분위기를 그대로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 됩니다. 신중하고 치밀한 전투준비, 감정없이 군율을 엄히 적용하는 사례만 봐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차분하고 냉철한지 예상이 되는바 감정적이고 열정 넘치고 뜨거운 사람이라기 보다는 박해일처럼 차갑고 신중하고 차분한 인물일 거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바는 이순신이 아니라 한산대첩 그자체라 보여집니다. 비중만 봐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한산대첩의 전체적인 흐름에 집중한걸 알수 있습니다.
한 말씀 드리자면 견내량파왜병장에 중점을 둔 학익진만큼이나, 이순신 장군의 본인의 이야기인 난중일기에도 중점을 둬야하는 영화입니다. 김한민 감독이 명량의 비판을 가지고서 그 동안 칼을 갈면서 공부하면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난중일기의 임진년을 서점에서 잠깐만이라도 읽어보시면 이순신 장군의 감정선은 박해일의 그것과 잘 매치됩니다. 난중일기도 이순신 장군의 심신이 지쳐가면서 후반에는 감정선이 굵어지죠. 영상 잘 봤습니다. 노량이 기다려집니다. 제가 생각하고있는 노량이 얼마나 반영이 될지... 노량은 감정선이 분명 굵어지겠죠. 진린도 나와야하고 류성룡도 탄핵이 되어 정치적입지가 다시 줄어드니까요.
@@usb1023 무술년 11월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 올 때 한산도 앞 바다로 쫓아갔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뭔가 이 다음 날 계속 이어져야할 일기가 이것으로 끝납니다. 먹먹해집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박해일의 이순신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록으로 봤을때도 이순신장군은 외형도 곱상하고 사실상 문무 모두 출중하고 진중하고 소란스럽지 않았으니 박해일배우가 해석한 이순신장군이 이순순장군에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네요. 또 와키자카가 훌륭한 장군으로 묘사됨으로 상대적으로 더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이 돋보여서 미역먹었단건 다 아는 얘기라 굳이 극에 표현하지 않은것도 좋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박해일의 냉정하고 담담한 이순신 연기도 좋았습니다 큰 전쟁이 발발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아득히 먼데 원균의 횡포나 부하들의 동요에 일일히 대응하지 않았던 점이 눈 앞의 혼란이 아닌 전쟁의 큰 양상을 염두하고 흔들림없이 소신대로 가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영화 막바지에 일본배들이 코앞까지 진격해서 모든 부하들이 동요할때조차 태연하게 기다렸던 모습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보여준거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조용하고 차분한듯 싶지만 듬직한 리더의 이미지가 참 좋았습니다
장수의 기용 과정에 있어서 이순신 장군의 한수 한수에 많은 고뇌가 담겨있음을 잘 담아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전투씬에서 귀선의 활약이 통쾌하긴했지만 어색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산과 명량의 다른점이 분명히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유재란의 명량은 나라에 배신당하고도 오로지 나를 믿고 따르는 장수들과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영화이고 한산은 한 나라의 장수라면 무릇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아니,도대체 이런 성웅의 영화를, 이건 좀 아니다, 저건 좀 더 아니다, 대체 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걍 즐기고, 국뽕에 도취되면 우리나라 대단한 나라, 맞지요? 역사 고증 할려면 제대로 하고 아님 하지 마셔요. 역사의 한 두 장면을 어떻게 님들의 입맛에 다 맞추겠습니까? 유투버님! 조금 가려서 방송합시다. 깔려면 원균,선조,인조,,,,지나서 맹박,긍혜,서결, 지대루 까죠.
저는 첨에 박해일 배우의 이순신연기가 기대되지 않았는데, 보고나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어요. 담담하고 강인한 박해일만의 이순신 연기였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외에 굳이 왜 넣었는지 모르겠는 장면은 라이너님과 동일하게 준사의 서사였는데, 개연성이 너무 떨어졌고 계속해서 굳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다 후반에 신파사 나오면서 흐름이 깨지더라구요; 여튼 발포하라 + 거북선 나오면서 마스크 속의 입이 쩌억 벌어진채로 끝까지 다 봤네요. 너무 재밌었고 노량 빨리 나오면 좋겠어요 ㅠ ㅠ흑흑
난중일기 읽은 게 너무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담백하다'가 인간 이순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겁니다. 보기에 따라선 무관보다는 문관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러니 선비같디는 말도 틀리지 않죠. 사실 명량에서 몰입이 안 됐던 이유 중에 그게 컸어요. 영화 안에서는 절제된 모습을 보였지만 최민식 배우의 광기 넘치는 이미지를 도저히 떨쳐내고 볼 수가 없더군요
@@와그작-u5q 명량 때는 온갖 고문에 백의종군하신 때인데 최민식 배우의 볼이 넘 통통하고 이순신 장군의 절제된 이미지가 아니라 위에 글 쓴 분 말처럼 광기 어린 연기, 감정이 과잉된 연기에 몰입이 어려웠어요ㅠㅠ실제로 뵐 수 있다면 박해일 배우와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요^^
한산대첩축제의 도시가 고향인 30대 주부입니다. 판옥선을 2중으로 진열했던게 반영됐었으면.. 그게 진짜 멋진전략이거든요. 그게 아쉽네요. 학익진때 판옥선을 2중으로 감싼 형태였잖아요. 앞배가 모든면을 돌려 포를 쏘고, 포가 다 소진되면 뒤에있는 배와 앞의 배와 위치교환을 해서 뒤로 간 배는 다시 포장전하고, 앞으로 나간배는 또 포를 쏘구요...그런점도 좀 들어갔었으면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싶었어요ㅎ 하진짜...넘 잘봤네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 한산이 너무나 좋았습니다..오 라이너님..6점은 넘 짜네요..^^;;; 한산을 보고 명량을 또 다시 봤다는것 아닙니까..그것도 진짜 더 짜릿하고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2014년 처음 봤을때보다.. 이렇게 자랑스런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또 이토록 훌륭하게 만든 김한민 감독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21세기에 사는 후손으로써...
거북선 부분은 학익진 배치도를 짜는 장면에서 군관 나대용이라고 적힌 봉투를 보여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작전에서 거북선을 배제하고 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거북선을 작전에 투입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 중 전투에서 명령을 내렸던 사항들은 전부 거북선을 염두에 뒀었구나 했고요. 그리고 거북선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됐고 굳이 겁을 집어먹은 원균 쪽 날개에서 등장한 이유는 전작 명량에서 나왔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면 승리한다' 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김한민 감독이 그런이야기를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명량에서의 이순신장군은 다잃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의 처절하고 산전수전 다겪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할 그런 명장의 이미지 이지만, 한산도 대첩에서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하면 완벽하게 이길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 전략적인 즉 지장에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저도 영화를 n차로 봤지만, 박해일씨가 기다렸다가 말하는 “발포하라”라는 대사의 톤이 싱거운거 같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남더군요. 그리고, 이건 역사자체가 스포라, 즉 너무 완벽한 승리 이기때문에, 영화의 밸런스를 위해서 어쩔수 없이 일본군은 버프시키고, 조선군은 너프 시킨거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영화가 될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와키자카를 그렇게 띄어준거죠.
영화내용을 떠나서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이정도의 해상 전투를 그려낸것에 대해서 그 기술력과 연출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웅장하면서도 박진감 넘치고 그러면서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멋지게 카메라에 담은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의 업적과 그 위대함을 구구절절한 대사나 과도한 연출없이 담담하게 그려낸 부분도 저는 좋았습니다. 그런면에서 박해일 연기도 어울렸구요. 명량보다 훨씬 좋았고 마지막 3편도 기대가 됩니다.
이 리뷰는 고증과 해상전술에 대해서 너무 두루뭉실하게 말하면서도 비판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사실 라이너님 리뷰들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단점이 바로 두루뭉술하게 근거를 뭉개고 주장만 남는 다는 건데요. 그게 심하진 않지만 가끔 보다보면 마치 목적이 '비판'에 매몰된 느낌이 들 정도로 비판을 위해 주장을 먼저 꺼내고 근거를 뒤늦게 붙이는 느낌이 듭니다. 허술한 대학생 에세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느낌으로요. 1. "가토 요시아키도 나름 같은 칠본창인데" 칠본창이라는 말이 유난히 와키자카와 몇몇 장수들을 표현할 때 대단한 지위, 명성처럼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알기론 칠본창이라는 게 무슨 당대 최고의 일곱 장수 뭐 이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던 걸로 압니다. 애초에 칠본창이라는 표현 자체가 전국시대-왜란 당시에 자주 쓰이지도 않았고 훨씬 이후 시대에 오히려 더 쓰인 표현일 정도로 그 당시 장수들의 격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유의미한 표현이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키자카와 가토는 같은 칠본창이다'와 같은 표현은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영화에서 가토가 와키자카에 비해 너무 격하되었다'는 주장 자체는 이해가 가지만, 그 근거로 따라오던 이야기들 중 칠본창 얘기는 부실한 근거, 의미없는 근거로 보입니다. 2. "실제 한산도 대첩에서는 전혀 기록에 없는 왜군 대포"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과 같은 왜란 당시 해전들에 대해서는 한국, 일본 양측의 자료들을 조합해봐도 아직까지 해전이 어떻게 치뤄졌는지에 대해 100% 밝혀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학계의 사람이 '당시에는 그런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건 틀렸다'와 같은 뉘앙스의 발언을 쉽게 뱉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과학자가 '이 일은 100% 확률로 일어날 것입니다'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만큼, 확정적이기 힘든 것에 대해 확정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섣부른 일입니다. 라이너님이 역사적 고증,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신지, 관련 학계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설령 역사학자라 하더라도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섣불리 발언하는 건 개인의 주장을 확정된 역사적 사실로 오해하게 만들죠. 실제로 왜군은 당시에 대조총, 불랑기포와 같은 화포를 대량은 아니어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한산도 해전에서 쓰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쓰였다 하더라도 크게 무리있는 설정은 전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역사적 고증이 이 부분은 틀렸다' 라고 말하면서 꺼낸 왜군 대포 얘기는 잘못됐습니다. 왜군이 대포를 썼느냐 안썼느냐 에 대해서 틀렸다는 게 아니라 '왜군이 대포를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영화의 고증이 틀렸다' 라는 주장이 틀렸다는 거죠. 3. 와키자카의 멍청함, 착각 - "해상에서 어린진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이런 부분이 사실 리뷰에서 습관처럼 자주 나타납니다. 어린진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걸 바다에서 쓰는 건 멍청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라 감독이 너무 캐릭터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라고 하시지만 그 근거를 너무 뭉개버립니다. 그냥 '바다에서는 아무튼 육지보다 기동력에 제약이 있습니다' 로 적당히 넘기는데 물론 이 리뷰에서 갑자기 일일이 군사전술의 원리와 사례를 들면서 설명해버릴 필요는 전혀 없지만 주장을 강하게 한 것에 비해 근거가 너무 부실합니다. 다케다와 도쿠가와의 전투는 실제로 와키자카처럼 어린진을 쓰는 쪽의 병력이 더 많았기에 한산도 해전과 유사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빠른 돌파가 가능하면 학익진은 어린진에 카운터당해 그대로 녹아버리기 때문에 무의미하고 멍청한 전술이 아닙니다. 와키자카가 명장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균처럼 병법을 제대로 모르는 무능한 장수 또한 아닙니다. (물론 이순신의 라이벌 급으로 비비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한산도 해전 당시 와키자카는 다른 장수들의 병력과 합세할 수 있음에 독단적으로 치고 나가는 등의 잘못된 판단을 여럿 내리기도 했음) 전투선들이 기병에 비해 기동에 제약이 생기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기동력을 활용한 전술을 전혀 못 쓰는 게 아닙니다. 판옥선과 왜선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왜선은 배 가장 아랫부분이 좁아서 나아갈 때 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빠른 방향전환이 조선 배에 비해서는 어렵다는 점인데요. 전국시대 동안 많은 경험을 쌓으며 실제로 매우 강했던 왜의 해군 전력은 바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닙니다. 빠른 접근이 가능한 기동력으로 등선해 백병전을 벌이는 게 주 전술이니만큼 어린진의 성격은 왜군 전력의 강점을 활용하기 적합한 진법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물살만 받는다면 왜군의 쾌속접근전만큼 조선 수군에게 공포스러운 것도 없겠죠. 반대로 학익진은 최고의 전법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빠른 접근이 가능한 왜선이 어린진을 쓴다면 대파할 리스크는 분명히 있고, 바다에서는 기동력 제약이 있다는 건 조선 수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출렁이고 흔들리며 물살이 변화하고 암초도 있을 수 있는 바다에서 칼같은 기동과 선회로 일사불란하게 진영을 만들고 정확하게 간격을 유지하는 건 굉장히 어렵고 훈련이 많이 필요합니다. 솔직히 지휘자가 이순신 장군이었기에, 그 군대가 이순신 장군의 훈련을 받은 군대였기에 이만큼의 대승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론 어중간한 장수가 학익진을 썼다면 와키자카에게 대패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학익진에서 화포를 쏘고 선체를 돌려 또 쏜다는 표현이 영상 중간에 있는데, 이 부분은 저도 당시 전투에서 선체를 돌려 빠른 추가 사격을 했을 거라 추측은 합니다만 아직 학계에서 그게 확정된 사실로 결론지어지진 않은 걸로 압니다. 많은 학자들이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훈련을 이순신 장군이 한 기록이 있다'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산도 해전 당시에 그 전투기술을 썼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을 거에요. 이 부분이 가능한 건 제자리에서 선회가 가능한 판옥선의 특성(위에서 언급한 왜선과 반대로 기동력은 조금 떨어져도 선회가 쉬움)때문일 거고요. 어린진이 무슨 의미가 있냐, 멍청하다 라고 말하기에는 바다에서 어린진이 무의미한 전술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실하거니와 잘 알려진 왜군의 특성과는 오히려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에 저는 오히려 감독이 이것을 차용한 게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봤습니다. 실제 한산도 대첩에 승리 요인은 애초에 진법 원툴이 아니기도 하고요. (이순신 장군이 대충 진법 하나 잘 짜고 상대가 진법을 이상하게 짜서 졌다기 보다는 다양한 전술적 행동, 판단이 겹치면서 적장과의 전략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균은 100배는 더 쓰레기다' 라는 말은 저도 100배 공감합니다. 무능한데 질투심은 많고 책임감도 없는 역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트롤이었죠. 그대로 묘사하면 관객들이 너무 힘들어지니 적당히 사람구실은 하게 만들어준건가 싶었네요 ㅋㅋㅋㅋ
16:11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은 표정이 너무 없어서 부하들이 항상 곤란해했다고 합니다.. 영화적으로 표현이 부족했을수 있으나 고증에는 맞춘 것 같기도.. ㅋ
한산대첩 고증은 안된 감독 뇌피셜.. 보는 내내 짜증남.
거북선 3척에 개량형 거북선. 와.. 진짜.. 쓰레기 감독.
소설을 썼는데. 왜. 이순신장군 이름을 빌리는지.. 감독 흥행위해 이순신장군 팔아먹은 놈임.
@@jtj4664 저도 잘 모르지만, 거북선 설계도가 정확히 남은건 없어서, 그나마 기록을 모아보면 3층 형태와 2층 형태가 있어서 두가지 형태를 모두 반영한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산대첩은 영화처럼 긴장감있게 수싸움 하지는 않았고 조선의 압도적인 승리였다고 하더라구요.
영화적으로 각색하다보니 백프로 사실과 동일하게 진행하기는 어려웠을겁니다.
사실대로만 찍으려면 다큐멘터리 찍어야죠 뭐 ^^;
그래도 어린이들한테 역사교육이 중요한 이때에 저 감독이 이순신 내용으로 흥행해주면 임진왜란 교육하기도 좋고 다음세대에도 잊혀지지 않아서 장점도 있을것 같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길
"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거이 움직여라
무슨개소리냐
몬재인
=윈균 =선조야
이순신 장군은 문관 출신 집안의 양반이었고
실제로 20대 초반까지 문관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결혼 이후 장인(무관 장교)의 영향으로 20대 중반부터 무관시험을 준비하고 30대 늦은 나이에 무관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다른 무관들에 비해 기록(난중일기, 장계, 서신들)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도
어려운 병서도 다 섭렵하신 것도 과거시험을 오래 준비하며 글을 많이 공부했던 습관이 남아서라고 얘기 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특히 난중일기에서 보면 본인이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게 쓰셨지만 실제로 표현하지는 못 했다는 글이 많습니다.
그래서 박해일 배우의 절제되고 문관 선비같은 느낌의 연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배를 움직이던 격군들, 의병들, 이름 몰랐던 장군들이 잘 보여서 많이 감동했습니다.
ㅇㅈ..
ㅇㅈ 역사 지식도 사전 지식도 없이 리뷰 하면서 불만만 토로 하면서.. 뭐가 부족 하다 뭐가 부족 하다.. 하는데 진짜 최악 인 리뷰임..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ㅎㅎ 특히 나대용 에서.. 운에 맡긴건가요 ? 하는데 소름.. 어쩔수 없는 선택을 운에 맡기는 건가요 라니.. 진심 최악
처음에는 역사 고증 어쩌고 하더니.. 끝에는. .. 표현 을 고쳤어야 한다고.. ㅋ 판타지 영화인줄 ㅎ
동감10000박네요! 박해일의 이순신 넘 좋았어요!
몰랏네요ㅠㅠㅠㅠ
다 좋았지만 이번 한산은 왜군쪽 그리는 방식이 진짜 좋았음 명량에서 구루지마처럼 무지성으로 돌격만하는 방식이 아니라 철저한 지략가로 그리다보니 극 자체의 긴장감이 더욱 올라감
ㅇㅇ 이기는지 다 알고 봤는데도 긴장감 쩖
결과를 알고있음에도 그 결과까지 가는 과정이 좋았음 ㅇㅇ
왜구가 아니고 왜군;;
한산은 어느정도 상대할만한 전력은 되었고 명량은 전력차이가 워낙 커서
그런거 아닐까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소름+전율이... ㄷㄷ
이순신의 냉철한 전략가적인 모습에 집중한 느낌인듯 워낙 엄청난 인물이니만큼 각 배우들의 다각적인 해석도 좋게 느껴지네요
평소 이순신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라이너님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이질적으로 느끼신 듯 합니다. 영화 속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저도 100% 공감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순신은 과하다싶을 정도의 기록광에 철저한 지략을 갖춘 전술전략가이기 때문에 저는 명량에서의 감정적인 이순신보다 훨씬 몰입하면서 봤어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감정적이면 안 되죠. 전쟁에선.
그래서 고된거고.
박해일의 연기는 이순신의 깊은 내면을 보는듯 정말 좋았습니다
나대용에 대해서 잘 설명해줘서
한국사를 더욱 관심를 가졌습니다^^
제작발표회때 김한민 감독이 어느 기록에서 이순신 장군을 선비 같다고 표현한 걸 보고 선비같은 이순신을 보여주기 위해 박해일을 캐스팅 했다고 들은 거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박해일씨가 지장으로서의 이순신을 잘 연기해 준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진실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날조이다.
억지 끼워 맞추기식 쉴드에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이번 작품에서 박해일 연기에 대한 논란은 피할수 없다고 봅니다..애초에 우려했던 바이기도 하고..
@@hiroono1 번역기 꺼라
@@재-p1g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여러분 신고박고 무시합시다. 관종은 병먹금이 보약이에요.
좋은 리뷰고 대부분 공감했는데 박해일씨 연기 부분에 대한 평은 공감 가지 않네요. 깊은 맛이 우러나는 선비 같은 이순신 연기, 새로운 캐릭터 해석이 정말 좋았습니다. 흐릿하긴 커녕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박해일 씨가 연기하는 이순신을 계속 보고 싶어서 한산으로 연기가 끝나는게 아쉽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작품에 신파 장면이 1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부분도 이해가 가질 않네요.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는건 설득력이지 신파의 유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감합니다. 차분하고 꼼꼼한 지장의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고 느꼈습니다
공감합니다.전 라이너의 리뷰를 좋아하진않는데 신파만나오면 왜그리 싫어하는지
너무 웅얼웅얼거려서 전 잘 안 들렸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평가할만한 사람인가 그걸 논하는데있어 객관적인가를 봤을때 충분히 불편하고 점점더 마음에 안드는 채널 ㅠㅠ
신파는 어느나라 어느전쟁영화에나 있는건데 이걸 한국적이라고 표현하며 아쉬워하는건 저도 이해가안가네요 물론 명량은 과하긴했지만 애초에 이순신 시리즈를만든 의도자체가 국민으로서 성웅 이순신을보고 감동에 취해보자 아니었겠습니까? 너무 과하게 신파를 빼야된다면 차라리 배우만 남기고 제3국의 제작사 영화사와 감독에게 맡기면돼요
18:12 리뷰에 오점으로 보여집니다.
극중 완성된 학익진도와 '나대용은 보라' 라는 서신을 한장면에 잡습니다.(19:33 사진 좌측에 서신이 나오네요) 또 서신만 단독으로 비춰주기도, '보라'라는 자막을 뒤늦게 나타나게하여 강조까지 합니다.
이런 연출로 볼 때, 이순신이 거북선을 배제하고 전략을 세웠다고 해석하는것은 비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한장면 한장면 집중해서 보지않으면 놓치기 쉬울수는 있겠죠.
18:59 리뷰에서 제시한대로 비장에 카드로 연출을 한거죠. 감독은
여기서 지적하신 단점이 안느껴 질 정도로 재밌다는게 장점.....
보고 극장에서 나오면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계속 듦
이순신 장군 이미지는 문관이나 조용하고 치말하고 난중일기를 쓸 정도로 선비적인 분인데 연기 잘했다고 봄
@@ANIMAL_FARM 원균 후손임?
@@user-a3n6g7el 원균 후손 맞나봐요. 질투시기탐욕 그 유전자 어디 안가나봅니다 ㅎㅎ
@@ANIMAL_FARM 에이요 균균쓰~~
질투는 아니고 잘잘못을 말한거고 부하들 죽인거는 전쟁에서 도망치고 잘못한 놈들 죽인거임
김한민이라는 감독이 명량에 이어서 한산을 만드는데 이순신 장군과 한산대첩을 그냥 국뽕 돈벌이로 봤던게 아니라 진짜 그때 그 전투와 영웅을 더 깊게 관찰하고 신경썼던것이 이번에 보였습니다
명량 때처럼 신파를 강제 주입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감동과 국뽕은 더 차오르는 가슴 벅찬 경험과 쓰나미박의 절제된 선비 이순신 연기가 좋았읍니다,,, 한산을 보고 명량을 다시 보니 절박한 상황에서의 최민식의 처절한 이순신도 더 와닿았읍니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한산을 보고 나니 명량이
또 새롭게 보이더군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hiroono1 보아하니 일본인인 것 같은데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이순신 장군을 님은 받아들이지 못 하시네요,,, 날조는 님처럼 사실과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시는 걸 날조라고 하고요,,,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난중일기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아주 잘 남아있읍니다,,, 조선 수군의 패배는 거의 괴멸에 가까운 상황을 초래해 정유재란의 원인이 된 원균의 칠천량 해전 뿐이니 임진왜란사 공부를 좀 더 해보심이 어떨까 싶읍니다,,,
@@moonds1228 나가 쓴 내용을 잘 읽고 확인하십시오. 모두 진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쓰지 않는다.
@@moonds1228 거북선은 천장을 판으로 덮는 구조상 시야가 매우 좁고, 또 가로폭에 대해서 세로 길이가 짧고,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속도가 느려, 진로 변경이 용이하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전복하는 위험이 있었다 .
그리고 밀폐된 선내에서 화포를 쏘자 그 검은 연기가 선내에 충만해 시야를 막고 승무원은 잠시 산소 결핍으로 고생했다. 즉 거북선은 방어력과 화력은 좋지만 배로서의 성능이 너무 낮다. 일단 목표를 놓치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것이 현대의 거북선의 기술평가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출동 장면은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이다.
자극적이면서 맛잇게 음식을 만드는건
어렵지 않죠.
허나 약간 심심하고 담백하면서도
맛잇게 만드는건 어렵습니다.
고로 저는 한산이 잘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매운탕보다 지리로 맛을 내기 더 어려운 것 처럼요?
근데 정말 김한민 감독말고, 한국 영화 감독들 중에서 전작의 비판점을 수용하고 이렇게까지 발전시킨 경우가 있었나요?
대부분 본인의 방식이 맞다고 생각을 하기 마련인데요,,
심지어는 1700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의 감독이니ㅋㅋ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귀선이 판옥선위에 지붕을 씌운것이다 예상을 한거지 그런 기록도 없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귀선과 설계도는 남아있지않은데
판옥선이라는 전함과 귀선으로 미리 정해놓고 과학적인 해석을 하다보니 귀선은 철갑선이 아니다 라는 결론부터 내는 전문가들이 너무 어이가 없다.
판옥선은 조선의 대표적인 전함으로 대량 생산되어 보급되는 전함으로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해선 만들어 졌다는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특수선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최첨단 스텔스기나 마찬가지 이므로
판옥선에 비해 규모나 크기가 다른 특수선으로 봐야 한다.
난중일기나 다른 기록들을 보면 거북선은 매우 빨랐고 화력이 대단했고 충파에도 매우 강했다고 하며 적의 두려움이 공포 그자체 였다고 하는것은
판옥선 위에 지붕을 씌우고 꼬챙이를 설치하고 적의 화공을 막기위해 적은 가마니를 쒸은 정도의 특수선이 아닌것은 여러기록에서 추정 할수있다.
분명 판옥선에 무거운철판과 철쇠꼬챙이로 덮는다면 기존 판옥선으로 만든 거북선은 무게로 인해 속도나 균형을 유지하는데 무리가 따르는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속도,충파,화력까지 깇춘 거북선은 기존 판옥선에 지붕을 씌우고 젓은가마니을 씌운것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
거북선은 기존 판옥선보다 좌우폭과 길이가 다르고 각층마다 높이가 다른 특수선으로 봐야 하고
한반도 고대국가로 부터 내려오는 철을 가공하는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쇠꼬쟁이가 있는 철판을 만들었을것이고 충판을 견디어 낼수있는 건조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좌우폭이 더 넓고 길이는 판옥선보다 조금더 길정도이며 판옥선보다 격군과 화포도 더 많을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과 거북선을 보유한 그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능력은 동북아 아니 그당시에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깊은바다와 태풍 그리고 삼면이 바다에 밀물과 썰물 그리고 조류 자연환경이 만들어준 한반도에 이어 내려오는 조선술과 삼한이후부터 내려오는 철가공기술 또한 철갑거북선을 만들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다.
조선의 목조 건축물과 그건축물에 박혀있는 철가공물들은 쇠꼬챙이가 연결되어 있는 철판은 그리 어렵지않게 만들수 있으며
판옥선의 크기가 아닌 새로운 거북선을 건조하면 지붕의 철갑의 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화 정말 잘만들죠.. 최종병기 활도 진짜 존잼임
@@truelight8368 그거 아포칼립스 완전 표절입니다.옛날에 논란좀 있었음
와키자카의 조카인 사헤에가 거북선에게 공격받기전 작은 목소리로 “복카이센…”이라고 하는 장면이 좋았습니다. 원래는 장님 배,눈이 먼 배라고 했지만 거북선에 위용을 보고 괴물선이라는걸 인정하는것 같은 장면이였습니다.
압도적인 공포를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괴물이라고 중얼거린다... 크
거북선은 천장을 판으로 덮는 구조상 시야가 매우 좁고, 또한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진로 변경이 쉽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전복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밀폐된 선내에서 화포를 쏘자 그 검은 연기가 선내에 충만해 시야를 막고 승무원은 잠시 산소 결핍으로 고생했다. 즉 거북선은 방어력과 화력은 좋지만 배로서의 성능이 너무 낮다. 일단 목표를 놓치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것이 현대의 거북선의 기술평가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hiroono1 거북선의 출전활약상 기록은 차고 넘칩니다만...
@@hiroono1 거북선 출전기록이 없다니...;;;
@@gim56788 한국인의 역사인식은 그 정도다. 한국인이 믿고 있는 많은 사건은 근거가 없는 날조인 것이다.
731부대나 난징 사건에서는 조선인의 사망자는 한 명도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주장하는 수십만 명의 희생자는 유령인가? 한일 병합 때 일본이 조선인을 채찍으로 쳐 식량을 수탈했다고 하지만, 그 35년간 한반도 인구는 두 배로 늘고 있다. 이 급격한 인구증가는 조선인이 매일 섹스를 하고 있던 증거이지만 한국인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아 사정하고 물만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 당신은 조선인이 그런 민족이라고 생각합니까?
명량 보다 한산이 더 무게 있으면서 말로 표현하지못할 웅장함 박해일 연기가 대박임
준사의 장면은 라이너님이 조금 오해한 측면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준사가 고문을 받다가 내 뱉은 말들에서 준사가 악에 바쳐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순신에게 대항하는 척 하면서 일부러 정보를 누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부하들을 시켜 준사를 다른 일본군들 모르게 나올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아무도 없게 만든 가운데 준사의 얘기를 듣고자 함이었던 것이죠.
그런거 같네요 고문당하면서 이순신에게 협력하고자 말하면 옆에 같이 고문받던 부하들에게 겁쟁이로 낙인되고 그동안 쌓아론 높은 신뢰를 무너뜨릴수있기에 혼자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거같네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도 두분 말에 동의하고 그렇게 이해해서 위화감 안느꼈는데 영상 주인께서 놓치셨거나 의도를 눈치 못채신거 같네요.
@@skykong12s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날조이다.
그런거였나요 ㄷ
저도 라이너님처럼 국뽕 신파 치사량 맞을 각오하고 영화 봤는데 웬걸 오히려 ㅈㄴ 깔끔해서 좋았네요..
초반 : 전술에 대한 고민
중반 : 전술에 대한 갈등과 첩보전
후반 : 전투신 끝..
그리고 몇몇 장면은 대체 어떻게 찍었지는 하고 의문 들 정도로 잘 찍은 장면도 많았고...개인적으로 저는 박해일이 연기한 이순신이 더 좋았네요..담담하니..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도 박해일님의 담담한 이순신 장군이 인상 깊었어요. 맹수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거든요. 사회생활 해보니 오히려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보다 표정 변화없이 똑부러지게 일처리 잘 하는 분들이 더 무섭고 어렵더라구요.
@@ivory8411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진실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날조이다.
@@hiroono1 마치 너희 좆본에서 배우는 역사처럼? 미국한테 원자빵 두번맞고 패전한 주제 종전이라고 우기고 나치즘을 옹호하는 너희 역사처럼?
@@hiroono1자~~역사적 증거다‼
러일전쟁에 공을 세운
샤토 테츠타로 쓴책
1927년 "절세의 명장 이순신"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가 한 말이다‼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서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덕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사토가 망상쟁이더냐⁉️
그리고
"제국국방사론"에는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대해 서술했다
명량은 졸작과 범작 사이 어딘가에 있었는데 한산은 진짜 담백하니 좋았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소재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국뽕이 조금이라도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최대한 절제한 게 좋았어요. 다만 몇몇 조연 캐릭터는 왜 있는지 싶더라고요. 전혀 필요 없어보였는데.
대부분이 명량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 때문이 아닐가 싶긴 하네요. 실제로 이 영화의 대부분의 단점은 명량과의 연계 부분이거든요.
진짜 딱 담백하다는 표현이 좋네요..
국뽕국뽕 그런소리 그만해라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 한건데 뭔 국뽕타령이 어쩌구 저쩌구 등신들아 그렇케 열등하냐 니들이? 국뽕에 냄새만 맡아도 창피해하는 것들이 더 열등한거 아니가?
너무 담백해서 평냉이죠… 흥행 할수 없어요 한그릇으로는 꾸준히 섭취하고 중독 되면 몰라도..
조연 캐릭터는 왠지 코믹씬이 있는데 다 잘라낸 기분이던데요.. 코믹씬이 없으면 조연들이 있을 이유가 없던데요
@@boondangmangahgi 개봉 12일만에 3백만이 넘는데, 3백만이 넘는 영화가 흥행한 게 아니면 도대체 어떤 영화여야 흥행한건가요? ㅋㅋㅋㅋ
히어로영화는 빌런이 강해야함 와키자카가 얼마나 강한지를 설명해서 좋았음 그런 와키자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장군
-전 '한산' 속 이순신이 징비록과 난중일기 속 이순신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고 느껴서 너무 반가웠어요. (오히려 명량 속 이순신을 보고 책을 읽고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달라 좀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나이도 있으시고 너무 힘드신 시기였던지라 최민식배우님이 연기한 모습이셨을 수도 있지만). 실제 이순신 장군은 문인으로서 외모도 선비의 풍모로 고고했다 하였고 그의 측근조차 속내를 알 수 없었다고 하니 감정이 절제된 박해일의 연기가 적절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순신 장군께서 호령하셨다면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아니라 박해일처럼 크지 않고 단호하게 지휘를 하셨을 것 같기도 하구요.
-시기에 맞게 한산을 먼저 했어야 한다는 의견에서도 저는 김한민감독이 이순신장군의 이미지 조율면에서 명량의 이순신을 먼저 보여준거라 생각합니다. 명량의 이순신 모습이 대중이 알고 있는 용맹하고 처절한 장군의 모습이고, 한산의 이순신이 징비록과 다른 고서에서 볼 수 있는 냉철한 문인의 모습이라 감독이 느꼈던 다양한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절대적 불리함과 여러 개인사로 처절하면서 극적인 승리에는 최민식의 이순신이, 모두가 아는 해상전술을 치밀하게 설계하여 완벽한 승리의 해전에는 박해일의 이순신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노량의 김윤석 배우님의 이순신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용도 인물이 아닌 전투 하나에 집중하여 담백했고 해전도 정말 멋있었고 관련 정보 제시나 자막처리로 관객에게 친절한 점도 너무 좋았기때문에 한번 더 볼 예정입니다. 내년 설 즈음에 노량이 개봉한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 기대되네요.
(역사가 스포라 너무 슬프겠지만요)
1. 저는 전투가 일어난 지역 근처에 살기때문에 해전에서 구선이 갑자기 등장한게 전혀 놀랍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남해쪽 바다엔 진짜 조그만 섬이 많아서 거북선이 나왔을 때도 어딘가에 숨어 있었겠다 생각했거든요. 해전 초반에 안개가 자욱해서 그때 숨어 원균의 뻘짓이 끝나길 기다렸겠다고 가족들끼리 얘기했었는데.(실제 바다안개 끼면 지척이 안보이니까) 원균이 저럴거라고 이순신이 예상했기 때문에 기다렸을거라고, 역시 원균은 원균했고 이순신은 이순신했다고 얘기했었어요. 이순신이 전술 외 또 하나의 기별을 준비한 장면을 통해 나대용이 출정할 건 알고 있었으니까 반대쪽 왜군들 시선에선 갑자기 덩치 큰애가 신출귀몰하게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여서 당시 왜군들이 왜 바다괴물이라 부르고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2. 원균의 얘기에 다들 별말을 안했던 건 다른 이들은 원균보다 지위가 낮기도 했고, 처음엔 이순신도 한 장군으로 나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중엔 난중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모든 행적에 어이없어 하시지만.
3. 준사와 독대한 장면은 모두가 있었던 초반 장면에서 준사의 몇마디 안되는 말과 눈빛만으로도 본질을 꿰뚫고 따로 불렀을거라 생각해서 역시 이순신 장군님은 사람을 제대로 보는 혜안을 가지셨군 생각을 했었는데, 상상 속 장면이었던 걸까요? 갑자기 궁금.
영상올리신분이 이순신과 나대용이 편지주고받는 장면을 놓치신듯
저도 개인적으로 명량의 이순신이 제가 상상한것과 달라서 실망...한산에 박해일 보고서는 씽크로완벽하다 생각했네요
@@박지현-e3o 박해일 배우가 한산을 찍은 게 감사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님 그 자체였어요
1번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같이 보러간 사람들도 거북선 갑툭튀 아니냐며 어이없어 하길래. 설전을 좀 했습니다.
남해에 섬이 유독 많다는걸 배타고 다녀보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이해를 못하더라구요.
진해에서 군생활 하는동안 아직도 기억에 또렷히 남아있는것이
섬 몇개를 끼면 중형 항모도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과 500미터 남짓인데
레이더로 나타날곳을 알고 빤히 보지 않는이상, 더군다나 배를 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넓은 시야를 한번에
볼수있는 사람은 몇 안될겁니다.
갑판을 돌아다니며 여유있게 풍경을 구경하는거라면 몰라도, 우현 좌현을 맡아서 예의 주시하는경우라면 시야는 좁아질수 밖에 없습니다.
저도 상상했던 장군님의 모습이 한산의 장군님이여서 감동했습니다 준사는 다른 일본인이 알지못하게 조선말로 일본의 정보를 크게 떠들고 자신이 총을 쏘았다는 것을 장군님 왼쪽어깨 부분을 밀치며 힌트를 주었고 그래서 장군님이 다른 뜻이 있는 자니 목숨을 거두지 말라 하신거 같습니다 그리고 세작의 목걸이를 받았으니 상상의 장면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장면 중에 이순신 장군이 쓴 학익진 전도에 각 위치마다 장수들의 특성과 성향을 고려한 배치에서 소름돋았었음...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전과를 세운 자신의 부하들을 장계로 써올려 포상해야한다고 기록에 많이 남기셨었죠. 아무래도 그덕에 영화에서도 여러 휘하장수들이 실명과 함께 등장한 게 아닐까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진실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날조이다.
@@hiroono1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화성달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꽤 많이 알고 있긴 하네요. 하지만 조선이나 한국의 역사와는 별개로 동아시아, 일본의 역사를 연구한 유럽 학자에게도 한산도 대첩은 살라미스(salamis) 해전으로 불리고 평가받는다는 점은 객관적 평으로서도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뛰어난 것이겠죠.
물론 저도 거북선이 정말 사용되었었는지에 대해선 조금 의문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명백한 사실
@@luminary3 한산도의 싸움은 와키자카가 군률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이겼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긴 싸움은 이것이 마지막이었고, 그 후는 일본군이 배에 대포를 장비해 곶에 포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모두 패전이었다. 이순신이 23전 23승이었다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실제로는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이순신이 명확하게 패한 싸움의 예와 그 증거가 되는 문헌이다.
1.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2.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3.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4.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선조실록.
학익진도를 그릴때 이순신장군 왼손에 나대용의 서한이 와 있있습니다. 아마도 감독은 나대용이 귀선을 이미 만들어 어떻게 출전할 수 있다고 썼을것이고 이미 이순신은 나대용과 그 작전을 공유했다라고 계속 보여주는듯 했습니다.
맞아요! 저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게 정답
맞습니다! 영화상에서 서신에
"군관 나대용은 보라"
라고 자막이 나왔었네요 ㅎㅎ
가끔 리뷰가 보여주는 상황과 전혀 이상하게 말하는 때가 잇어서 갸웃 할 때가 잇어요
바로 그거죠
1. 와키자카의 전술 : 일본수군의 유일한 장점인 근접전을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빠른 일본배를 활용해 짧은시간 조선 판옥선에 배를 붙여야만 승산이 있습니다. 두줄로 학익진을 짜서 제자리 선회하며 연속으로 포를 쏘는 판옥선의 전술을 몰랐다면 다소 일부군선을 희생해서라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이었습니다. 실제로 견내량을 벗어나자마자 측면에 매복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있게 추격했다고 하죠. 상대 적수의 강력함을 합리적으로 풀어낼 수록 이순신 장군이 돋보인다는 당연한 도식을 위해서는 와키자카 장면이 많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2. 이순신 장군의 캐릭터 : 당시 남해안에서 4개함대(전라좌/우수영, 경상 좌/우수영) 중 전투를 벌이며 이겼던 것은 이순신의 함대가 유일했습니다. 전투 경험이 부족한 연합함대를 구성할 때 각 함대의 수장들의 부족한 경험과 판단력으로 아마 전략회의를 할 때 오만가지 의견이 난무할 것으로 상상이 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런 중구난방 장수들을 이끌려면 절대 감정적이어선 안되고 냉철하고 단호한 판단, 구체적 전략전술, 그리고 자신감 있는 리더쉽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죠. 그래서 모든 배의 배치도를 직접 그려 디테일한 전술을 따르도록 알리고 훈련하면서 장수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리더쉽으로 일사분란한 함대를 구축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묘사가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3. 거북선의 등장과 나대용의 역할 : 아마도 극적인 효과를 위해 거북선의 개량과 결정적인 순간의 등장으로 연출하다보니 따라온 과장(?)이겠죠. 그런데 이런 장치들이 거북선이 등장하는 장면을 소름돋을 정도로 극적으로 만들었던 걸 보면 성공한 설정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당연히 장군의 지시로 거북선이 돌격했다고 생각했어요. 멀리서 거북선이 날아왔을리도 없고 장군의 지시도 없이 멋대로 돌격할리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나대용을 매개로 2가지 거북선을 모두 등장시킨 갈등장면이 창의적 발상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영상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고증과 어긋나는 여러 장면들,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된 허구들에 대해서는 역시 평가가 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영상에도 나오지만 전작의 신파대사들과 뜬금없는 편집방식들 대부분이 개선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태평양 전쟁을 매우 건조하게 다룬 '도라도라도라'가 오버랩되며 전쟁영화를 효과적으로 다룬 매우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류성룡의 기록에 따르면 박해일의 이순신 연기가 좀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선비처럼 고아한 모습이 있었다고 기록했거든요.
아무리 선비 같아도 장군의 무서움이 있다고 했어요. FM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행하면서 장군을 빼고 보면 그냥 선비처럼 보이면서 곱다했지 여기서 기본 장수의 역량만 보여줬으면 완벽했죠
이순신역으로 박해일의 캐스팅에 좀 갸웃했는데, 오늘 직접 보니...탁월한 캐스팅이었다고 생각되네요. 뭐랄까, 패도적인 인물이 아니라, 내향성이 잘 갈무리된 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군대 안갔다온 티좀그만....저렇게 너무 말없는 지휘관은 무능력하고 그저 답답할뿐임..지휘관은 앞장서서 선도하고 장병들을 아우러야지..니가 알아서 해...묵묵답답 ..이건 그냥 무능력자임..
@@Optimus2022 본인 생각이랑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에 대해 모르면서 군대를 갔다왔니 마니 하는 못배운 티는 그만...꼴같지 않은 비아냥은 제작진에 가서 해보는게 어떨지...? 너희 군대갔다 왔냐고
굳이 명량이랑 비교하자면 명량은 분위기도 너무 어두운데 전투씬 빼곤 좀 지루하기도 해서 딱 한번 보고 말았는데 한산은 지루하지도 않고 장면 하나하나가 흥미롭고 계속 보고싶을정도로 재밌음. 이순신 명대사도 전투씬이랑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거같고 넘 공감가서 가슴이 더 벅차오르는 느낌. 배우들도 다 멋있고 어울리고 연기 개잘함. 4일 연달아 봄 ㅋㅋㅋ돈 하나도 안아까움 ㅋㅋㅋㅋ
저도 두번 봣어요 눈물흘리고 박수도치고..ㅎ
알바생아 고생한다 ㅉ
말씀하신 단점들도 평소 라이너님이 말하시던 거에 비하면 그렇게 큰 단점들이 아니어 보이네요.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헤어질 결심 다음으로 최고로 재밌게 봤네요. 물론 흥행이 명량만큼 될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최근에 비상선언 같은 거 보면 관객들이 신파에 점점 더 멀어지고 같은 느낌은 드네요. 신파를 가득 넣었으면 오히려 더 흥행을 못했을 거 같은 느낌..
올해는 박해일의 해인듯 하네요 ㅎㅎ
영화보몀서 단점 자체를 생각못함;;;;;; 진짜 개재밋음
이번 리뷰는 라이너님과 이견이 많이 갈리네요. 밑에 댓글들 봐도 많은 분들이 같은 의견이신거 같은데 박해일의 이순신 좋았습니다. 라이너님이 그리는 이순신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영화 말미에 이순신장군이 말한 한산의 의미처럼 큰 산 같은 느낌을 그대로 전달받았습니다. 그래도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네요. 나대용의 참전도 계획된 바로 느꼈구요. 준사와의 독대는 어떻게 저렇게 보셨나 싶을정도로 전혀 다르네요. 전 단지 의도된 독대가 이루어진걸로 느꼈거든요. 마지막으로 한산 전투 전 긴장감은 나름 고조되었다고 봅니다. 무려 수륙병진으로 이순신의 본진이 위협 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정에 급 출정을 결정한 이순신 장군의 혜안을 연출한 장면도 좋았습니다.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져놓고 말이 많네
@@댓-w5g 한국인은 사실을 잘 배워야 한다.
@@hiroono1 너부터 배워
@@재-p1g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쓰지 않는다.
날조된 역사를 배우고 믿는 한국인은 활기차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이순신장군님 진짜 존경합니다..ㅠ 부모님이랑 영화관 가서 같이 봤는데 진짜 재밌더라구요 영화도 많이 발전한게 보이고 둘의 두뇌싸움도 꽤 볼만 했습니다 물론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서 명량때보단 긴장감이 없지만 잘 그려낸것 같아요 우리나라 판옥선이 일본군의 배보다 튼튼하고 포까지 있어서 이순신장군님이 더 유리해서 자주 이긴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그 좋고 대단한 판옥선을 이끌고 갔다가 진 원균을 보고 알았습니다.. 괜히 이순신 이순신 하는게 아니구나..
나라를 망치게 한 놈들이 누구인지가 중요
하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지킨거야?
조선을 지킨거지 그 이후 조선은 일본이 식민지 했자나요 그리고 원균은 지상전에
서 이순신 보다 더 잘싸웠습니다.
판옥선이 왜선보다 더 튼튼하고 함포의 이점이 있긴하지만 물살에 약하고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죠.
그리고 함포 사격의 사거리는 길지만 명중률 때문에 유효사거리는 200보 정도밖에 안되서 왜선의 접근을 막는게 쉬운게 아니었습니다.
결론은 이순신 장군이 진짜 대단한게 맞음
원래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불의 이순신 최민식님보다 물의 이순신 박해일이 월등하다고 평가합니다. 전작이 신파에 집중한 나머지 살짝 이순신장군님을 오버액션하게 만드는듯한 느낌이 적잖이 들었는데, 금번작은 영화관을 나오는동안에도 장군님이 그 당시에 저렇게 했었을 것이라는 현실감이 느껴졌네요. 전작보다 훌륭한 후작은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끗하게 깨뜨려버린 작품이었다고 감히 생각됩니다^^
죄송한데 월등하다 하셨는데. 영화 보고 온 입장에선 역으로 퀼리티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최민식이 왜 대배우인지 알게 될 정도였으니까요. 오히려 박해일 이순신은 영화에 들러리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인공인데 주인공 같지가 않아서 좀 아쉽더라고요. 아직 박해일이 이순신급을 역할을 맡기엔 부족한 배우인거 같았어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hiroono1 원균 후손이세요?
ㅋㅋㅋ 월등해? 뭐가? 영화상 상황이 그러한것이였고 실제 이순신 장군은 불같은 부분도 있었음 흔들리지않는 대쪽 같은 고집이 엄청난 분이셨지 남의 말을 한귀로 흘리고 어쩌라고 무시하며 내가 낸데를 제대로 실천하신 독고다이 성격이셨기에 원균이나 선조나 누가 지껄여도 오직 자기고집으로 밀어붙힌 분임
@@최태-b4j 입이 무거운 사람이 더 무서운 법임....
전작보다 깔끔하고 해상전투신은 정말 헐리웃 못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전략적 분석과 전술과 전술이 맞닿은 대결..
나름 좋은구도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진실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날조이다.
@@hiroono1 뉘예뉘예 그러시겠죠 어떻게 해서든 날조라 믿고 싶겠죠 이해해요 그런데 현실을 좀 사세요
이순신 장군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부장들이 보채는 조언을 할 때에도 절대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고 해서 감정을 숨긴 모습이 되려 고증에 맞지 않나 싶어요
거북선 등장할 때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왜 부제가 용의 출현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작인 명량도 재밌게 보긴 했지만 약간 아쉬운 점들도 꽤 보였는데 이번 한산에서 김한민 감독이 피드백을 수용하고 개선한 부분이 많이 보여서 좋았습니다
해전 파트 미쳤으니 꼭 극장 가서 보세요!
거북선은 천장을 판으로 덮는 구조상 시야가 매우 좁고, 또한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진로 변경이 쉽지 않고, 조종을 잘못하면 전복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밀폐된 선내에서 화포를 쏘자 그 검은 연기가 선내에 충만해 시야를 막고 승무원은 잠시 산소 결핍으로 고생했다. 즉 거북선은 방어력과 화력은 좋지만 배로서의 성능이 너무 낮다. 일단 목표를 놓치면 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다.
이것이 현대의 거북선의 기술평가다. 그래서 실전에서 활약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출동 장면은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이다.
@@hiroono1 답글목록 보니 중국인이신거 같은데 남의 나라 역사 폄훼하지 마시고 문화대혁명 같이 본인 나라 문화 파괴에 더 신경쓰시는게 어떨까요
@@V1NT0R3Z 미국과 일본은 진주만과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사실을 넘어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반면 한국은 증거가 전혀 없는 위안부, 731부대, 난징 사건 등을 날조하며 일본에 원한을 가진다. 그리고 한국인은 병합 시절 일본에서 받은 혜택을 잊고 전쟁 이후 받은 배상금을 잊고, 1998년과 2009년에 받은 경제원조도 잊고 더 돈을 달라고 울린다. 전혀 한국인의 머리에는 닭관이 있는 것일까? 배가 줄어들면 울리지만, 먹이를 받으면 받은 것을 잊어 버린다.
히데요시군을 조선인민이 환영하고 식량을 제공한 사실이 조선의 정식 역사서의 일부인 선조실록에도 적혀 있는데 한국인은 무시한다. 일본군은 불과 3주 만에 부산에서 서울에 도달했다. 조선군이 거의 항전하지 않고 조선 민중의 협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속도다. 그것도 한국인은 무시한다. 그리고 이순신을 영웅으로 날조한다. 거북선의 출격 기록은 어디에도 쓰지 않았지만, 와키자카를 일본 측의 장군으로 파악해 해전을 날조한다. 실제로 그 당시의 와키자카는 병대를 1500명밖에 갖지 않는 지방의 소령주다. (단, 와키자카는 그 후 출세한다.)
한국인의 날조는 일본이 진주만에 원폭을 떨어뜨렸다고 하는 수준의 데타라메이다.
@@hiroono1 친구야 저기 저 쓰레기통 보이지? 저기 들어가
@@sindorim0417 당신은 한일 병합 시대의 한반도의 인구 추이를 아십니까? 35년간 1300만명에서 2500만명으로 배가 늘었다. 당신은 어떻게 인구가 증가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일본인이 전장에서 총을 쏘고 있는 동안 조선인은 잠자리에서 정자를 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이 조선인을 채찍으로 치고 식량을 수탈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아 사정하고 물만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당신은 조선인을 변태라고 생각합니까? 대답하십시오.
우와 라이너가 이렇게 평할 정도면
진짜 김한민 감독님이 전작의 말도 안 될 정도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칼을 갈고 만드신 모양이네요.
내일 보러가는데 너무 기대됩니다
기대해도 될만함.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선은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 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을 영웅에게 날조한 것은 이승만이다.
잼잇어요 아류작만들어서 영화업게에서 욕듣던 시절에 비해서요
그냥 무난하니 볼만했던듯.
@@가래뜨억 이순신에 관한 한국인의 날조는 일본이 진주만에 원폭을 떨어뜨렸다고 하는 수준의 데타라메이다.
18:58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어차피 한국사람이라면 거북선이 나온다는거 다 알고 있는건데, 굳이 박해일(이순신)이 '응 걱정마 곧 거북선 올꺼야~ 혹시나 첩자가 있을까봐 너네한테 말안했었어~' 라고 할필요가 없잖아요. 영화에서 거북선 등장만으로 다 해소되는건데... 너무 과도한 지적인거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순신을 영웅적으로 그려내면 또 국뽕이라고 지적할거 아닐련지... 대체 어쩌라는건지 모르겠음 ㅋㅋㅋㅋ
준사가 이순신과 독대하는 장면은 감독의 의도된 장면이라 생각합니다....준사가 감옥으로 들어왔을 땐 이미 도깨비(?)모양 목걸이를 한 상태였습니다. 독대하는 장면에선 준사가 목걸이를 하지 않은걸로 보아 감옥 들어오기 전 상황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준사와 이순신이 1:1로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준사와 이순신 둘만 존재하는 다른세계 공간인것처럼 연출함으로써 둘의 관계에 집중하는것 같이 보였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감독이 일부러 집어넣은 장치라고 생각했어요.
독대하는 장면으로 다른 설명, 인물들 없이 연출시키는 것으로 끝낸 게 아닌가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너무 좋아해서 어쩌다 보니 3회차 관람했습니다.ㅋㅋㅋ 준사 장면은 편집때문에 헷갈릴순있지만 살려두라 명령한 직후에 이순신 홀로 따로 심문하고 목걸이를 건채로 감옥으로 끌고보냈던 것 같고 나대용분량 언급하신 부분은 학익진 짤 때 진도 옆에 나대용에게 따로 남겨둔 편지가 있었습니다.편지 내용은 모르겠지만 해전이 진행 될 때 상황을 보면 원균의 옆에서 지원하라는 내용이지않을까 싶네요ㅋㅋ
그니깐요 나대용에게 앞에서는 나는 이번 전투에서 구선을 배제하겠다고했지만. 제발 사용해달라는 나대용의 회상씬이나 나대용에게 남긴 편지가 그 전술의 답이 되었음. 그리고 들이닥칠떄 이순신이 흡족해하는 모습도 그정도로 설명이 충분하다고 봄
진정한 리더는 들어주는것이라고 했다 나는 박해일의ㅡ연기가 진짜 좋았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쉽게 보이면 원균이랑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거지
다 좋은데 6점은 너무짭니다.
이 양반이 원래 짭니다. 이 양반 기준이면 수작이라는 점수...
애매한부분이없진않죠 스파이게임이랑 신파는 조금..
“일당백”이라는 팟케스트를 듣고 박해일 연기는 철저한 고증이구나 싶었음.
항상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준비를 하는 성향이라 표정에 변함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카리스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준비해 두는 사람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딱 이순신
지금 보고 왔는데 넘넘 깔끔하고 지루하지 않고 잘 만들었네요. 긴박하지만 담담한 박해일 이순신역 넘 잘 어울렸고. 감동스러웠어요.
꼭 다들 보시길~~!
주인공의 위치에 와키자카를 두고 이순신을 그가 넘어야 할 최종 목표의 구도로 인물을 배치한 점,
이길 수 있을까? 가 아닌 어떻게 이길까? 라는 궁금증을 처음부터 쫙 끌고가 클라이막스에서 터뜨리는 구성이 탁월했다고 봅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 탑건보다도 재밌게 봤습니다 ㅎㅎ 잘 보고 갑니다!!!
한산 보고 나서 라이너님의 리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박해일의 이순신은 냉철한 지략가의 모습이 보여서 좋았습니다. 전작과 다른 캐릭터의 이순신을 보게 되어서 더 좋았습니다. 노량의 이순신은 또 다르게 묘사될테니 기대도 됩니다. 신파가 거의 없는 점도 좋았습니다.
점수가 좀 짜서 아쉽네요. 할리우드식 국뽕에는 점수가 후하시던데….물론 탑건도 무지 재미있게 봤습니다. 개연성은 완벽하지 않았지만요. 잘 봤습니다.
6점이면 잘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탑건 때는 좀 후하지 않았나 생각하지만요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선은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 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을 영웅에게 날조한 것은 이승만이다.
10점 만점 6점은 진짜 아님 8점이상이지 않나요
@@userininin 가짜이므로 3 점으로 충분합니다.
@@hiroono1웃긴넘
웃기는 것아‼
늬덜이 영웅으로 떠받드는
러일 전쟁의 해군장군
도고 헤이하치로 가 승전 기념사에서 말한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 장군님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수 없는 일이다."
도고가 구라 쟁이더냐⁉️
그리고 지금도 일본 해사에는 이순신 장군님 사당이 있고 년중 행사로 해마다 제를 올린다‼
이 잡것아‼‼
너무 잘만들었는데 2프로 부족한걸 느낀점을 정확하게 똑같이 설명해주셨네요 ㅋㅋㅋㅋㅋ 조금 다른점은 전 한산의 이순신이 훨씬 좋았습니다. 선비같고 고운 인상에 깊은 내면을 가진 장수가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진짜 엄하게 군기를 다루는 모습이 나왔으면 훨씬 좋았을거 같아요. 그 부분 말고는 이순신에 대해 완전 만족합니다. 그리고 독대한 장면은 고문할때 의미심장하게 이순신이 항왜를 바라보는데 그 이후에 독대 장면이 나와서 이순신이 따로 부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람은 처한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기어 두 이순신을 별개로 보지않고 같은 인물로 한 번 접근해서 보았습니다
한산에서는 근엄하고 태산같은 ..불필요한 말을 극도로 아끼는 그 이순신이
명량전투를 앞두고서는 장군들 뿐만 아니라
졸병들까지 다 모으고 일장연설을 할 정도로 , 불타는 거북선 앞에서 최고권자 체면도 버리고 울부 짖을 정도로 사람이 절박해졌구나 라고 해석하니 나름 비교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주주-y6i 그런시점에서 보는것도 신선하네요 !! 확실히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ㅋㅋ
@@horang-horang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진실의 역사와는 관계가 없는 날조이다.
@@hiroono1 다큐도 아니고 그냥 영웅서사 영화인걸요 뭐 ㅋㅋㅋ 오히려 긴장감을 주기위해 한산에서는 이순신을 더 약하게 표현했어서 어느정도는 감안해야합니다 ㅋㅋㅋ
@@horang-horang 한국인은 사실과 픽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한 명도 없는 731부대의 인체실험과 남경에서의 학살을 날조해 그것을 믿고 있다.
한국인은 사실을 믿지 않을 때도 있다. 한일병합의 35년간 한반도 인구는 두 배로 늘었다. 조선인은 일본의 보호에 만족하고 매일 섹스하고 있던 증거이지만, 한국인은 고려할 일도 없고, 일본인이 채찍으로 치고 식량을 수탈했다고 날조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조선인은 채찍을 받아 사정하고 물만 마시고 모유를 낸 것이다. 당신은 조선인을 변태라고 생각합니까? 대답하십시오.
실제 역사대로 만들면 너무 긴장감이 없어서 감독님이 머리 쥐어짜서 긴장감을 만들어낸 작품
실제로는 갖고 놀았기 때문에 노긴장
ㅋㅋ ㄹㅇ
@@applecar6684 ㅋㅋ ㄹㅇ
영화가 원래 그런거 아냐? 그리고 본인은 임진왜란 한산대첩때 직관가서 본것처럼 이야기하노 ㅋㅋㅋㅋㅋ
이렇게 갖고 놀정도의 병력을 원균이 다 말아 처드셨지
19:25 지금처럼 연출했기에 가슴이 찌릿한거임. 이게 카타르시스인데, 이걸 이렇게 연출하는게 최선임
오늘 '한산'을 두번째 보러 갔습니다.
저번주에 한산을 보고 와서 너무 감동받아, 바로 그날 명량을 구매하여 다시 보고, 오늘 다시 한산을 보고, 돌아와서 또 다시 명량을 봤네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애초에 역사적 사실 여부는 영화상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역사적 잣대에 근거하여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역사에 대해서 맞네 아니네를 따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명량도 한산도 본 사람으로 명량이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명량에 너무 많은 신파가 들어갔다고 보는 분들이 꽤 계신 것 같지만, 전투 영화에서는 완벽히 없앨 수 없는 부분이고, 그게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이점이 된다면,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예술과 상업을그리고 역사까지 접목시켜 보시는 영화비평가들이나 신파를 싫어하시는 분들에게는 호불호가 확실히 될 수도 있지만, 전투영화에서는 단 한 장면이라도 전혀 신파가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전투의 목적성,지향성, 타당성,합당성 등을 관객들 ,특히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저라는 관객에게는 감정적으로 전투의 목적을 더 쉽게 와 닿는 계기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영화를 제차 몇번이고 관람하면서,감동했던 부분은 역사적 사실여부 보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이기적인 개체로써 , 나라면 저렇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내가 목표하고 있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전심을 다 할수 있을까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참 생각이 많네요.
제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제발 한산이 지금 상영하는 어떤 영화보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태어난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아무런 조건없이) 이런 영화들이 또 다시 만들어 질 수 있기 바라니까요... (전적으로 개인적 소견입니다)
정말 공감합니다. 의 상황의 비장함과 당시 조선백성의 절박함을 왜 신파 라고 비난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명량은 볼 때마다 소름돋고 최민식 배우님의 이순신 절대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aloakidstv3870 진짜 절박함을 표현했으면 몰라 그냥 신파니깐 욕먹는것
흥행을 다수 포기하면서도 신파를 철저하게 배제하려는 모습이 저는 좋았다고 봅니다. 충분히 극장에서 볼만한 돈이 아깝지 않을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순신의 심리묘사는 거의 없으면서 주변인물이나 특히 일본장군의 심리묘사는 많은 그런 연출이 통쾌함과 이순신의 얼마나 대단한지를 더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고(주인공에 대한 다른사람들의 리액션이 좋을수록 더 흥미진진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이순신을 더욱 영웅처럼 보이게 하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하니(이미 역사적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만큼은 좀 오버하면 이순 '신' 처럼 보여서 독특하고 재밌다라고 느꼈던 부분중에 하나인거 같음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을 때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순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공격, 쿠마가와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hiroono1 마치 너희 좆본에서 배우는 역사처럼? 미국한테 원자빵 두번맞고 패전한 주제 종전이라고 우기고 나치즘을 옹호하는 너희 역사처럼?
@@hiroono1 왜 이런댓글을 내 글에 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ㅋㅋ,,, 그래도 대답을 하자면,,,
최소한 이런 글을 쓸거면 그냥 이랬다 저랬다가 아니라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런말이 있다 이래이래서 이게 더 신빙성이 있다 등등,, 뭐 그런 걸 가지고 와서 얘기해야지 저런 말은 나도 내 하고 싶은데로 쓸라면 나도 하겠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사실 실제 역사가 어쨌든 관심 없음, 오늘 뭐먹을지가 더 중요함
@@소콜-o4k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쓰지 않는다.
선조 실록을 읽으십시오. 이씨 조선의 공식적인 역사다. 모순도 많지만 이승만에 의해 날조된 역사보다 진실에 가깝다. 내가 쓴 내용의 대부분은 선조실록에 쓰여져 있는 것이다. 일본군이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한 것도, 조선 민중이 서울을 벗어나 도망치는 선조에 돌을 던져 일본군에 식량을 헌상하고 환영한 것도 적혀 있다. 이순신이 출격 명령을 거부하고 적전 도망한 것도 적혀 있다. 그러나 거북선은 쓰여지지 않았다.
@@소콜-o4k 한국은 국가 전체에서 거짓말을 한다.
조선인을 신용할 수 없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일병합에 반대한 것이다.
일본의 교육에 의해 조선인은 소변으로 얼굴을 씻는 일과 길 옆에서 배설물을 멈추었지만 거짓말과 매춘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너님 영상 마지막 원균에 대한 평가 속 시원합니다. 악역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현대의 트랜드이긴 하지만 재해석의 여지가 없는 인물도 분명 있으니 말입니다.
근데 또 그대로 다 담았다가는 영화가 19금이 될게 백퍼라 약간의 밸런스 패치는 어쩔수 없었을거 같음....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난중일기를 읽어보시면 이순신은 박해일이연기한 캐릭터가 더 맞습니다. 이순신은 선비같은 면모가 더 강했습니다.
???아닌데요 원균하고 이순신 사이가 좋지않아서 기록에도 아주좋지않게 썼고 어렸을때도 아주 난폭하게 굴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 자신이 써서 자기폄하는 당연히 적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제3자의 눈에서 봐야 뭐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동의 동의!!
부수고 싸우는 전쟁 영화는 좀 꺼려하는 편인데 전쟁에서의 전략 싸움(?)이 부각되어서인지 엄청 흥미롭더라구요 재밌게 잘 보고 왔어요 보기 전 눈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보고싶을 정도ㅋㅋㅋㅋㅋ 거북선 나오는 장면은 괜히 내 가슴이 웅장..
응? 영화를 보다가 놓치신거 같은데.. 이미 나대용에게 서신이 와 있었습니다.. 신형 거북선이 완성되었다는거라고 다들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죠.. 그냥 변수가 아닙니다. 거북선이 등장한것도 당연히 당시에 뭐 레이더가 있는것도 아니고 유인해서 끌어오면서 왜군은 속도전으로 전진하는 와중에 측면이나 후방에서 다가오는거라 개연성이 충분하죠.
극중에 나온 가토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조선침략의 선봉장 이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아닌 가토 요시아키 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박해일의 이순신 연기는 어둡고 진중하고 무게감있는 극의 분위기를 그대로 아주 잘 표현했다고 생각 됩니다.
신중하고 치밀한 전투준비, 감정없이 군율을 엄히 적용하는 사례만 봐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차분하고 냉철한지
예상이 되는바 감정적이고 열정 넘치고 뜨거운 사람이라기 보다는 박해일처럼 차갑고 신중하고 차분한 인물일 거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바는 이순신이 아니라 한산대첩 그자체라 보여집니다.
비중만 봐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기보다 한산대첩의 전체적인 흐름에 집중한걸 알수 있습니다.
와카자키가 진짜 멋있는걸 넘어서 섹시하게 묘사 되긴함 각나라의 명장들이 두뇌싸움하는것도 흥미진진함
한 말씀 드리자면 견내량파왜병장에 중점을 둔 학익진만큼이나, 이순신 장군의 본인의 이야기인 난중일기에도 중점을 둬야하는 영화입니다. 김한민 감독이 명량의 비판을 가지고서 그 동안 칼을 갈면서 공부하면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난중일기의 임진년을 서점에서 잠깐만이라도 읽어보시면 이순신 장군의 감정선은 박해일의 그것과 잘 매치됩니다. 난중일기도 이순신 장군의 심신이 지쳐가면서 후반에는 감정선이 굵어지죠. 영상 잘 봤습니다. 노량이 기다려집니다. 제가 생각하고있는 노량이 얼마나 반영이 될지... 노량은 감정선이 분명 굵어지겠죠. 진린도 나와야하고 류성룡도 탄핵이 되어 정치적입지가 다시 줄어드니까요.
동감합니다. 갖은 고초와 나라에 배신당한 이순신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지만 나라를 지켜야하는 부담은 더욱 커져가는 명량에서 감정선이 굵어지는 이유죠. 노량은 아마 울면서 보지 않을까 싶네요.
@@usb1023 무술년 11월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 올 때 한산도 앞 바다로 쫓아갔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뭔가 이 다음 날 계속 이어져야할 일기가 이것으로 끝납니다. 먹먹해집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막내 아들을 보내는 상황에도 나라를 위해 살아내셨습니다. 어쩌면 노량까지 살아내주신 것도 기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량은 김윤석배우가 맡는걸로 아는데 기대되네요
아직 최초 공개 전이라 한산 하네요
ㄴ⊙0⊙ㄱ !!
ㅋㅋㅋㅋㅋㅋㅋ
하하 정말 재밌다~~
부장님 최고
88올림픽 대학생때보셨죠?
비교하는게 아니다 명량은 명량 나름대로 잘보여주었고 한산은 그나름대로 잘 보 여준 대한민국 영웅이자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인정하는 성웅 이신 위대한 장군
실제로 박해일의 이순신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기록으로 봤을때도 이순신장군은 외형도 곱상하고 사실상 문무 모두 출중하고 진중하고 소란스럽지 않았으니 박해일배우가 해석한 이순신장군이 이순순장군에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네요. 또 와키자카가 훌륭한 장군으로 묘사됨으로 상대적으로 더 이순신장군의 위대함이 돋보여서 미역먹었단건 다 아는 얘기라 굳이 극에 표현하지 않은것도 좋았습니다.
실제 전투 당시 이순신장군의 나이가 40대 중반이였어서 더 잘어울리거 같았어요 ㅎㅎ
와카자카 쪽에서 스토리가 진행되어서 긴장감이 있었던것같아요. 그리고 박해일 이순신 최고였어요. 출정하라 발포하라 위엄있고 카리스마 있었어요
저는 오히려 박해일의 냉정하고 담담한 이순신 연기도 좋았습니다
큰 전쟁이 발발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아득히 먼데
원균의 횡포나 부하들의 동요에 일일히 대응하지 않았던 점이
눈 앞의 혼란이 아닌 전쟁의 큰 양상을 염두하고
흔들림없이 소신대로 가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영화 막바지에 일본배들이 코앞까지 진격해서
모든 부하들이 동요할때조차 태연하게 기다렸던 모습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보여준거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너무 조용하고 차분한듯 싶지만
듬직한 리더의 이미지가 참 좋았습니다
당신의 영상은 10점만점에 1점입니다
ㅋㅋㅋ
그렇게 자자하게 칭찬해놓고
마지막에 반전 10만점에 6점
입니다ㅋㅋ 뿜었네요
장수의 기용 과정에 있어서 이순신 장군의 한수 한수에 많은 고뇌가 담겨있음을 잘 담아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전투씬에서 귀선의 활약이 통쾌하긴했지만 어색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산과 명량의 다른점이 분명히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유재란의 명량은 나라에 배신당하고도 오로지 나를 믿고 따르는 장수들과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영화이고 한산은 한 나라의 장수라면 무릇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아니,도대체 이런 성웅의 영화를, 이건 좀 아니다, 저건 좀 더 아니다, 대체 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걍 즐기고, 국뽕에 도취되면 우리나라 대단한 나라, 맞지요? 역사 고증 할려면 제대로 하고 아님 하지 마셔요. 역사의 한 두 장면을 어떻게 님들의 입맛에 다
맞추겠습니까? 유투버님! 조금 가려서 방송합시다. 깔려면 원균,선조,인조,,,,지나서 맹박,긍혜,서결, 지대루 까죠.
오늘 극장가서 한산 보고 왔습니다... 저는 극장가서 보든 아니면 컴퓨터로 다운 받아서 보든... 영화를 보고 나면 무조건 라이너님의 컬쳐 쇼크를 봅니다... 저에게는 너무 재밌고 유익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활동 하시길 응원합니다!!!!!!
두편을 다 보고 나니 이런 맞춤형 연출에 또 감탄이 나오네요
한산에서 보여준 이순신의 성격 덕분에
명량에서는 진짜 절박했구나라고
더 감정이입 할 수 있었습니다
어제 봤는데 재밌더라구요
이순신이 마지막 학익진 작전 쓸 때, 옆에 나대용에게 따로 서를 쓴 봉투가 있었던거 같은데요. 저는 내부 장수들에게도 비밀로 한 작전이라고 이해했어요.
솔직히 명량때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저는 호평보단 악평하는 쪽이 더 컸었는데 이번 한산은 정말 감독이 신경써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확 나더라구요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첨에 박해일 배우의 이순신연기가 기대되지 않았는데, 보고나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어요. 담담하고 강인한 박해일만의 이순신 연기였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외에 굳이 왜 넣었는지 모르겠는 장면은 라이너님과 동일하게 준사의 서사였는데, 개연성이 너무 떨어졌고 계속해서 굳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다 후반에 신파사 나오면서 흐름이 깨지더라구요;
여튼 발포하라 + 거북선 나오면서 마스크 속의 입이 쩌억 벌어진채로 끝까지 다 봤네요. 너무 재밌었고 노량 빨리 나오면 좋겠어요 ㅠ ㅠ흑흑
영상 잘봤습니다. 저는 신파에 알러지가 있어서 깔끔하게 빠진 한산에 만족합니다만 급 등장한 준사와 의병의 신파는 당황스러웠습니다. ㅎㅎ 더 큰 스크린으로 재관람할 생각입니다.
어제 영화로 봤었는데 스토리가 너무 재밌었어요. 꼭 보셨으면 해요
정말 지루함 없이 잘보았습니다
왜군을 멋있게 그린다음 그들을 철저하게 격파하는 고독한 충무공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박해일과 자라의 두번째 콜라보도 재밌었슴돠 ㅎㅎㅎㅎㅎ
난중일기 읽은 게 너무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담백하다'가 인간 이순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겁니다. 보기에 따라선 무관보다는 문관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러니 선비같디는 말도 틀리지 않죠.
사실 명량에서 몰입이 안 됐던 이유 중에 그게 컸어요. 영화 안에서는 절제된 모습을 보였지만 최민식 배우의 광기 넘치는 이미지를 도저히 떨쳐내고 볼 수가 없더군요
저도요. 그래서 명량을 다시 보고 싶다가도 안 보게 됩니다. 박해일 배우가 딱이었어요
남편은 최민식
전 박해일로 갈렸는데 둘이 같은 마음인게 바로 노량의 김윤석배우.
과연 어떤 모습의 이순신 장군님일지 걱정 반 기대반
@@와그작-u5q 명량 때는 온갖 고문에 백의종군하신 때인데 최민식 배우의 볼이 넘 통통하고 이순신 장군의 절제된 이미지가 아니라 위에 글 쓴 분 말처럼 광기 어린 연기, 감정이 과잉된 연기에 몰입이 어려웠어요ㅠㅠ실제로 뵐 수 있다면 박해일 배우와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요^^
일반 관람객의 수준인 저는 진짜 재밌게 봤습니다…전작 명량도…
박해일 별로 안 좋아했는데, 한산 보고 마음이 바뀔 정도임. 그토록 무거운 고뇌를 깊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데, 답답하고 로봇같다는 리뷰에 깜놀.
그냥 잼있었습니다 단한차례도 눈을땔수없었습니다
의와불의의싸움의 감동은 의병싸움으로 승화시켰다 생각됩니다
'한산: 용의 출현 리뷰' 잘 봤습니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산대첩축제의 도시가 고향인 30대 주부입니다. 판옥선을 2중으로 진열했던게 반영됐었으면.. 그게 진짜 멋진전략이거든요. 그게 아쉽네요.
학익진때 판옥선을 2중으로 감싼 형태였잖아요. 앞배가 모든면을 돌려 포를 쏘고, 포가 다 소진되면 뒤에있는 배와 앞의 배와 위치교환을 해서 뒤로 간 배는 다시 포장전하고, 앞으로 나간배는 또 포를 쏘구요...그런점도 좀 들어갔었으면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싶었어요ㅎ 하진짜...넘 잘봤네요.
봐야겠다~
왜군의 세키부네와 안택선의 기동과 판옥선의 기동차이를 보여준 암초장면도 너무 좋았네요. 거기에 스승과 제자를 기용한 이순신 장군의 깊은 생각까지도…
한국의 역사교육은 날조이므로 의미가 없다. 조상실록과 중국문헌을 읽어주세요. 조상실록에도 모순은 많지만, 현재 한국인의 근거가 없는 망상보다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군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조선민중이 선조에 돌을 던지고 왕궁에 방화하여 반대로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하라.
당초 일본이 조선수군의 힘을 가볍게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배는 무장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기습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9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하여 배에 대포를 장비했다. 그러자 조선 수군은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영화 같은 전투 장면은 없다.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명예를 빼앗겨 병사에게 떨어졌다. 한국인은 이순신이 내부 항쟁의 희생이었다고 강조하지만 이순신이 전투 포기한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이긴 것은 초기 '옥포해전'과 '한산도 해전'뿐이다. 대표적인 싸움만으로도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제2차 당 항포 해전', '장문포·영등포 해전', '부산포 공격', '명량해전', '순천성 전투' 등 이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많은 조선인 장교를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 패배는 그가 죽은 '노양해전'이다. 각 싸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수군이 패전을 계속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순신에게 살해된 일본인 장교는 크루시마뿐이다. 조선측의 사망한 장교의 수는 셀 수 없다. 이순신의 전적은 2승 20패 정도다. 이순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으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성격과 성향을 가진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 한산이 너무나 좋았습니다..오 라이너님..6점은 넘 짜네요..^^;;; 한산을 보고 명량을 또 다시 봤다는것 아닙니까..그것도 진짜 더 짜릿하고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2014년 처음 봤을때보다.. 이렇게 자랑스런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또 이토록 훌륭하게 만든 김한민 감독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21세기에 사는 후손으로써...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른거죠ㅋㅋ
한산을 보고 다시금 명량을보니 새롭고 다시금 한산이 보고싶어지네요 이렇게 이순신 장군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 현재의 나는 없었을꺼라는생각이 드네요
이순신 장군님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해상 전투씬에서 웅장함에 가슴이 울컥 했습니다 2천만 가면 좋겠습니다
장점이 많아 단점 따윈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보고 왔는데 진짜 명량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게 보이더라구요
꼭 보십쇼 꼭
저는 오히려 학익진 지도에서 나대용의 이름을 지도 왼쪽에 빼놓은 것이 나중에 거북선이 돌격하면서 나타난게 "와 이게 비장의 한 수라는 건가"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거북선 부분은 학익진 배치도를 짜는 장면에서 군관 나대용이라고 적힌 봉투를 보여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작전에서 거북선을 배제하고 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거북선을 작전에 투입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 중 전투에서 명령을 내렸던 사항들은 전부 거북선을 염두에 뒀었구나 했고요.
그리고 거북선 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됐고 굳이 겁을 집어먹은 원균 쪽 날개에서 등장한 이유는 전작 명량에서 나왔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면 승리한다' 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바람앞의 등불같았던 조선을 구한 성웅 이순신.
절재된 감정표현과 웅장한 전투장면이 압권.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잘 묘사한 좋은 영화였습니다.
부모님이랑 너무 재미있게 보고 왔어요
저는 영화관에서 소리지르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지르고 싶더군요. 성웅이라 불리시기에 합당하신 이순신 장군님의 한산도 대첩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
마지막에 원균덩어리에 대해 다시 한번 짚어 주신점 무척 감동입니다
리뷰 잘봤어요!
명량해전은 신파가 나올 수밖에 없는 처절한 전투였고 한산은 전략적 진을 강조하기에 냉철하게 그려낸 것일 뿐. 둘다 명작임
명쾌하네요 👍
김한민 감독이 그런이야기를 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명량에서의 이순신장군은 다잃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의 처절하고 산전수전 다겪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할 그런 명장의 이미지 이지만, 한산도 대첩에서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하면 완벽하게 이길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 전략적인 즉 지장에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저도 영화를 n차로 봤지만, 박해일씨가 기다렸다가 말하는 “발포하라”라는 대사의 톤이 싱거운거 같지만, 머릿속에는 계속 남더군요.
그리고, 이건 역사자체가 스포라, 즉 너무 완벽한 승리 이기때문에, 영화의 밸런스를 위해서 어쩔수 없이 일본군은 버프시키고, 조선군은 너프 시킨거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영화가 될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와키자카를 그렇게 띄어준거죠.
그리고 신파 국뽕, 한국영화의 한계라는 말에 웃음이 나온게, 물론 우리나라 영화가 헐리우드같은곳에 비해서 떨어지는건 맞지만, 신파하면 헐리우드 영화인데, 한국영화의 한계라는 말은 참 ㅋㅋㅋ 그냥 웃습니다
@@라움-w2q 그냥 팝콘영화나 볼줄 모르는 애들이 끄적이는 소리죠..무시하는게 답 ㅋㅋㅋㅋㅋ
영화내용을 떠나서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이정도의 해상 전투를 그려낸것에 대해서 그 기술력과 연출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웅장하면서도 박진감 넘치고
그러면서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멋지게 카메라에 담은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의 업적과 그 위대함을 구구절절한 대사나 과도한 연출없이 담담하게 그려낸 부분도 저는 좋았습니다.
그런면에서 박해일 연기도 어울렸구요.
명량보다 훨씬 좋았고
마지막 3편도 기대가 됩니다.
어제 보고 왔는데, 제가 생각했던 부분들을 너무나 그대로 짚어주셔서 좋았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이 리뷰는 고증과 해상전술에 대해서 너무 두루뭉실하게 말하면서도 비판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사실 라이너님 리뷰들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단점이 바로 두루뭉술하게 근거를 뭉개고 주장만 남는 다는 건데요. 그게 심하진 않지만 가끔 보다보면 마치 목적이 '비판'에 매몰된 느낌이 들 정도로 비판을 위해 주장을 먼저 꺼내고 근거를 뒤늦게 붙이는 느낌이 듭니다. 허술한 대학생 에세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느낌으로요.
1. "가토 요시아키도 나름 같은 칠본창인데"
칠본창이라는 말이 유난히 와키자카와 몇몇 장수들을 표현할 때 대단한 지위, 명성처럼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알기론 칠본창이라는 게 무슨 당대 최고의 일곱 장수 뭐 이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던 걸로 압니다. 애초에 칠본창이라는 표현 자체가 전국시대-왜란 당시에 자주 쓰이지도 않았고
훨씬 이후 시대에 오히려 더 쓰인 표현일 정도로 그 당시 장수들의 격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유의미한 표현이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키자카와 가토는 같은 칠본창이다'와 같은 표현은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영화에서 가토가 와키자카에 비해 너무 격하되었다'는 주장 자체는 이해가 가지만, 그 근거로 따라오던 이야기들 중 칠본창 얘기는 부실한 근거, 의미없는 근거로 보입니다.
2. "실제 한산도 대첩에서는 전혀 기록에 없는 왜군 대포"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과 같은 왜란 당시 해전들에 대해서는 한국, 일본 양측의 자료들을 조합해봐도 아직까지 해전이 어떻게 치뤄졌는지에 대해 100% 밝혀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학계의 사람이 '당시에는 그런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건 틀렸다'와 같은 뉘앙스의 발언을 쉽게 뱉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과학자가 '이 일은 100% 확률로 일어날 것입니다'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만큼, 확정적이기 힘든 것에 대해 확정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섣부른 일입니다.
라이너님이 역사적 고증,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신지, 관련 학계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설령 역사학자라 하더라도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섣불리 발언하는 건 개인의 주장을 확정된 역사적 사실로 오해하게 만들죠.
실제로 왜군은 당시에 대조총, 불랑기포와 같은 화포를 대량은 아니어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한산도 해전에서 쓰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쓰였다 하더라도 크게 무리있는 설정은 전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역사적 고증이 이 부분은 틀렸다' 라고 말하면서 꺼낸 왜군 대포 얘기는 잘못됐습니다.
왜군이 대포를 썼느냐 안썼느냐 에 대해서 틀렸다는 게 아니라 '왜군이 대포를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영화의 고증이 틀렸다' 라는 주장이 틀렸다는 거죠.
3. 와키자카의 멍청함, 착각 - "해상에서 어린진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이런 부분이 사실 리뷰에서 습관처럼 자주 나타납니다. 어린진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걸 바다에서 쓰는 건 멍청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라 감독이 너무 캐릭터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라고 하시지만 그 근거를 너무 뭉개버립니다. 그냥 '바다에서는 아무튼 육지보다 기동력에 제약이 있습니다' 로 적당히 넘기는데
물론 이 리뷰에서 갑자기 일일이 군사전술의 원리와 사례를 들면서 설명해버릴 필요는 전혀 없지만 주장을 강하게 한 것에 비해 근거가 너무 부실합니다.
다케다와 도쿠가와의 전투는 실제로 와키자카처럼 어린진을 쓰는 쪽의 병력이 더 많았기에 한산도 해전과 유사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 빠른 돌파가 가능하면 학익진은 어린진에 카운터당해 그대로 녹아버리기 때문에 무의미하고 멍청한 전술이 아닙니다.
와키자카가 명장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균처럼 병법을 제대로 모르는 무능한 장수 또한 아닙니다. (물론 이순신의 라이벌 급으로 비비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한산도 해전 당시 와키자카는 다른 장수들의 병력과 합세할 수 있음에 독단적으로 치고 나가는 등의 잘못된 판단을 여럿 내리기도 했음)
전투선들이 기병에 비해 기동에 제약이 생기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기동력을 활용한 전술을 전혀 못 쓰는 게 아닙니다.
판옥선과 왜선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왜선은 배 가장 아랫부분이 좁아서 나아갈 때 속도가 매우 빠르지만 빠른 방향전환이 조선 배에 비해서는 어렵다는 점인데요.
전국시대 동안 많은 경험을 쌓으며 실제로 매우 강했던 왜의 해군 전력은 바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닙니다. 빠른 접근이 가능한 기동력으로 등선해 백병전을 벌이는 게
주 전술이니만큼 어린진의 성격은 왜군 전력의 강점을 활용하기 적합한 진법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물살만 받는다면 왜군의 쾌속접근전만큼 조선 수군에게 공포스러운 것도 없겠죠.
반대로 학익진은 최고의 전법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빠른 접근이 가능한 왜선이 어린진을 쓴다면 대파할 리스크는 분명히 있고, 바다에서는 기동력 제약이 있다는 건 조선 수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출렁이고 흔들리며 물살이 변화하고 암초도 있을 수 있는 바다에서 칼같은 기동과 선회로 일사불란하게 진영을 만들고 정확하게 간격을 유지하는 건 굉장히 어렵고 훈련이 많이 필요합니다. 솔직히 지휘자가 이순신 장군이었기에, 그 군대가 이순신 장군의 훈련을 받은 군대였기에 이만큼의 대승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론 어중간한 장수가 학익진을 썼다면 와키자카에게 대패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학익진에서 화포를 쏘고 선체를 돌려 또 쏜다는 표현이 영상 중간에 있는데, 이 부분은 저도 당시 전투에서 선체를 돌려 빠른 추가 사격을 했을 거라 추측은 합니다만
아직 학계에서 그게 확정된 사실로 결론지어지진 않은 걸로 압니다. 많은 학자들이 '충분히 그러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훈련을 이순신 장군이 한 기록이 있다'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산도 해전 당시에 그 전투기술을 썼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을 거에요.
이 부분이 가능한 건 제자리에서 선회가 가능한 판옥선의 특성(위에서 언급한 왜선과 반대로 기동력은 조금 떨어져도 선회가 쉬움)때문일 거고요.
어린진이 무슨 의미가 있냐, 멍청하다 라고 말하기에는 바다에서 어린진이 무의미한 전술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실하거니와 잘 알려진 왜군의 특성과는 오히려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에
저는 오히려 감독이 이것을 차용한 게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봤습니다. 실제 한산도 대첩에 승리 요인은 애초에 진법 원툴이 아니기도 하고요. (이순신 장군이 대충 진법 하나 잘 짜고 상대가 진법을 이상하게 짜서 졌다기 보다는 다양한 전술적 행동, 판단이 겹치면서 적장과의 전략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균은 100배는 더 쓰레기다' 라는 말은 저도 100배 공감합니다.
무능한데 질투심은 많고 책임감도 없는 역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트롤이었죠. 그대로 묘사하면 관객들이 너무 힘들어지니 적당히 사람구실은 하게 만들어준건가 싶었네요 ㅋㅋㅋㅋ
ㅍ
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ㅊㄹㄹㅊㅊ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
되게 정성껏 잘 쓴 댓글인듯. 보면서 즐거웠어요!!
올해 최고의 영화임 진짜 여친이랑 보고 왔는데....
둘다 너무 재밌었음 ㅠㅠ 꼭 보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