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한국사 I 113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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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21 дек 2024
-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뒷받침하는 사상인 동양평화론을 일찍부터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총리대신을 네 번이나 지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한때는 친미파 관료였던 이완용은 이토를 만나 동양평화론을 따르는 추종자가 됐다. 친일파로 변신한 그는 고종을 버리고 대한제국과도 결별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알리며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다. 이완용은 안중근을 맹렬히 비난하며 조문사절단을 조직해 이토의 시신이 있던 중국 대련으로 달려갔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지금의 명동성당인 종현 가톨릭성당 앞에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한 20대 청년이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을 노려보고 있었다. 청년은 단칼에 인력거꾼을 쓰러뜨리고 이완용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23살의 이재명이었다. 이완용은 치명상을 입고도 살아남았다. 이완용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재명은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러나 이완용이 살아있는 동안 그를 제거하려는 수많은 ‘이재명’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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