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한국사 I 031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고종의 통리기무아문 설치와 개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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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15 ноя 2024
- 고종의 친정체제가 시작된 직후, 일본의 국교 재개 요구가 국정 현안으로 떠올랐다. 일본의 국서를 접수해야 무력충돌을 피할 수 있다는 고종과 개화파의 주장은 대원군파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19세기 조선의 대외관계 주요기사를 수록해 놓은 『용호한록』에는 일본의 국서 접수 요구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입장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대원군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요구를 받아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박규수가 대원군 설득에 나섰지만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이미 정계를 은퇴한 후였음에도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1876년 2월 3일, 조선은 강화도에서 무력을 앞세운 일본과 외교통상 조약을 체결한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고종은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세계와 교류하며 근대화된 문물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통리기무아문은 그러한 고종의 구상을 실현할 국제통상업무 전담기구였다. 해외시찰단을 파견할 때, 고종은 개인 사재까지 내놓았다. 무기 제조기술을 배울 유학생들을 청의 천진기기국에 보냈다. 또 별기군을 창설해 신식군대로 훈련시켰다. 이러한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유림들의 위정척사운동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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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힘이있어야 뜻을펼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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