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영국이 패하고 거기서 철수했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소수의 영국 파견군에게 중동 각지에서 패배하고 최종 항복. 저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 반투르크 아랍반군 봉기를 유도하면서 소수의 영국군 투입으로 승리. 저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 현 아랍 왕국들이 오스만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팔레스타인-시리아-이라크 등은 위임통치령으로 바뀌면서 오스만투르크는 현 터키 영토로 쪼그라 든 것. 2차대전 후에 위임통치령에서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독립. 특히 쿠웨이트는 유전 밀집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석유 이권 통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에서 떼어내 별도록 독립시킴. 1990년 걸프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할 때, 애초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주였다면서 원래 자기 영토 찾겠다면서 침공. 영국은 삽질해도 어지간해선 전쟁에선 안집니다. 삽질했다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 보호령에서 자치령으로 바뀌고 독립된 국가로 나아간 계기. 갈리폴리 상륙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기념 행사, 영-호-뉴-터 4개국 공동 행사로 열리며 호주와 뉴질랜드 독립의 상징. 다른 국가들이었다면 갈리폴리급 대규모 삽질했다면 분명 중동에서 완전 축출되었을 것.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갈리폴리 전투를 지휘했던 오스만투르크의 장군이 바로 케말 파샤. 1차대전 패전 후 오스만투르크 왕정이 붕괴하고, 전쟁 영웅이었던 케말 파샤가 공화정 터키의 지도자가 됨. 케말 파샤는 1차대전 패전에서 서구화 방식의 근대화를 선택했고, 알파벳 사용과 이슬람의 정치 간섭을 철저히 배제. 그랬던 터키 공화국이 현 터키 대통령 취임과 함께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 이슬람화하는 터키를 다시 케말파샤의 공화정으로 되돌리려했던 쿠데타 시도가 터키 국민들의 개입으로 실패하기도. 오스만투르크의 1차대전 패전 트라우마로 인해, 2차대전 초중반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거듭된 동맹 요청에도 끝까지 거부하며 중립. 갈리폴리에서 영국을 막아냈지만 결국 소수의 영국군에게 중동 지역에서 패배해 제국이 해체된 충격 때문임. 그 깟 전함 2척 때문에 1차대전 독일에 줄섰다, 오스만투르크는 제국을 해체당했다면 좀 이상하죠. 즉 한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서 그 깟 전함 2척으로 결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 다른 더 결정적 요인들이 있는.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의 중동 아프리카 정책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독일의 3B 영국의 3C 정책. 독일의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비잔티움이 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 영국에 대한 트라우마는 터키만이 아니라 스페인도 강했죠. 2차대전 초기 독일이 깃발 날릴 때, 지브롤타 점령을 위한 육상 통로를 내달라는 요청 끝까지 거부. 독일이 제 아무리 승리하고 잘 나가도,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독일과의 군사동맹과 침공로 통과 모두 거부. 이유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 트라팔가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 충격. 스페인 프랑코 총통은 중립지킨 행운으로 전후에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고.
현 그리스-튀르키에 해안 도서 살펴보길. 튀르키에 코 앞의 섬 거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 에게해 거의 전부는 그리스 차지. ---------------------------------------------> 19세기 영국의 그리스 독립 지원 +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서 서구의 공세 및 영국이 이집트 속국화하며 ---------------------------------------------> 오스만은 북아프리카에서 사실상 퇴출 + 갈리폴리에서 패배 철수했지만 중동 다른 지역에 침투한 영국에게 오스만은 패배 결국 항복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리스는 에게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이 고대 그리스 문명권이었음을 내세우며 튀르키에 본토 상륙 꽤 넓은 영토 점령. ---------------------------------------------> 1차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왕정이 무너지고 케말 파샤 주도의 공화정이 성립하며 + 러시아-소련과 연합해 그리스와 투쟁 본토에서 그리스 축출 ---------------------------------------------> 저런 과정 거치며 최종 종전 협정, 상징성 큰 이스탄불을 지켜내는 댓가로 에게해 연안 거의 거의 거의 모든 섬들을 포기. ---------------------------------------------> 그리스 자체 힘으로 에게해 도서들 그리스령으로 만든 것 아닌 + 사실상 영국이 배후에서 강력한 해군력으로 오스만을 바다에서 찍어 누른 결과 ---------------------------------------------> 한국전쟁 정전협정 직전까지 서해 거의 모든 도서들을 점유했었지만, 정전협정과 함께 포기한 미-유엔-대한민국과 대비해보길. ---------------------------------------------> 1차대전 종전 후 그리스와 그리스를 지원한 영국은 해안 도서 점령 관해선 한국전쟁 정전 때 대한민국-미국과 달랐습니다. ---------------------------------------------> 2차대전 때도 1944년 그리스 상륙 + 공산 빨치산 토벌하며 그리스 공산화를 막아내고 + 유고 티토를 지원 탈소 중립 노선 걷도록 오스만의 1차대전 독일 동맹으로 참전 및 1차대전 이후 파멸 직전에 겨우 살아난 과정 살펴보길. ---------------------------------------------> 걸리폴리에서 승리했어도 오스만은 저렇게 되었습니다. 전투 승리와 전쟁의 승리는 다른 겁니다. 나폴레옹-프랑스 및 강력했던 1차-2차대전독일의 주특기. ---------------------------------------------> 수 많은 위대한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 전쟁에선 ( 특히 결정적 전쟁) 최종 패배 ---------------------------------------------> 나폴레옹프랑스-1차2차대전독일, 100전 99승 하더라도 단 1패만으로도 전쟁을 잃을 잠재 위협에 노출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수 많은 전투 패베에도 불구하고 ----------------------------------------------> 결정적 전쟁 ( 아니 사실은 거의 거의 모든 전쟁 )에서 승리. ----------------------------------------------> 전투에서 100전 99패 당하더라도 단 1승만으로도 그 1승의 성격에 따라 전쟁의 최종 승리가 가능한 행운? 실력? 아니면 둘 다??? 전투는 독일처럼 하는 것이 좋지만 + 전쟁은 절대로 독일처럼 해선 안되는 갈리폴리, 아무리 위대한 전투 승리라고 해도 + 전쟁의 패배를 막을 수 없었던 전형적 사례 ----------------------------------------------> 거의 거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갈리폴리급 참사를 겪고서 전쟁에서 승리하긴 어렵습니다.
오스만 1차대전 독일 쪽에 참전한 이유로, 영국의 오스만 전함 2척 인도 거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전함 2척 인도 거부만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1차대전 직전 일본에 인도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원래 브라질이 주문했었지만 브라질이 경제 위기로 포기했던 배를 오스만이 구입. 브라질이 포기하고 오스만이 새로 계약하는 시간 딜레이가 없이 브라질이나 오스만이 처음 계약자였다면 1차대전 직전에 인도되었을 가능성 무시할 수 없는. 1. 영국의 일본 공고급 순양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영국에서 1차대전 직전 건조되었습니다. 기공-1911년 1월, 진수-1912년 5월, 완공 후 일본에 인도-1913년 8월 -------------> 1914년 8월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1번함만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3척은 일본에서 영국 기술 지원하에 전부 완공되었습니다. 만일 나머지 3척도 영국에서 건조중에 1차대전 터졌다면 아마 일본 동의하에 일부는 영국해군용으로 전용되었을 수도. 영국이 브라질 주문받아 건조하던 브라질-전함 리우데자이네루, 1913년 브라질 디폴트 선언으로 인도 중지. 주인 없던 그 전함에 대해, 1914년 1월 오스만-영국-브라질 협의로 오스만과 계약. 오스만과 계약한 날짜와 영국이 인도 거부하고 오스만 승무원 퇴함시킨 날을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겁니다. 분명 계약 이후에도 건조 진행되었다고 나옵니다. 즉 시간이 좀 더 흘렀을 겁니다. 1차세계대전 발발은 1914년 7월입니다. 즉 오스만과 계약한 이후 국제 정세 급변하면서 오스만의 독일 동맹 가능성이 커진 상황 고려해야. 계약할 때 이미 전쟁 발발 가능성이 확고부동했다면 영국이 사기친 계약이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영국-독일-러시아 국왕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사촌간에 어린 시절 부터 왕래하고 교류했던 사이기도. 발칸반도 불안정성으로 강대국들이 동맹 관계로 얽혀 긴장이 커지곤 있었지만 세계대전 터질 것이라 1월에 예상??? 사실 1차대전 발발 방아쇠 자체는 발칸 반도에서의 암살 사건 탓도 있었기에. 영국이 1월에 이미 전쟁 알면서도 사기쳤을지... 만일 이런 추론의 배경이 되는 사실 관계에 별 오류가 없다면, 영국은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직전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일 수도. 오스만은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을 수도. 만일 그 전함이 이미 완공되어 오스만과 계약하고 바로 인도될 상태였다면 오스만도 인도받았을 겁니다. 공고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아 브라질 디폴트 선언이 몇 달만 빨라 오스만과 계약과 인도 시점이 1913년 하반기였다면 공고 처럼 인도되었을 것. 2. 2차대전 프랑스 항복 직후 영국의 프랑스 함대 공격 영국측이 비시 정부에 요구한 것은 지극히 냉철한 겁니다. 얼마 전 까지 동맹이었지만 독일에 항복한 이상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 군사력에 보탬이 되어선 안된다는. 프랑스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세계대전 상황에서 영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항복 전, 프랑스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 이태리 함대 항복 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 함대 + 이태리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영국은 무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3가지 중 택하라고 요구했고, 마감시간 때 까지 답변 없자 바로 공격. a. 함대를 영국으로 이동 대독 전쟁 계속 수행 b. 함대를 중립국으로 이동 무장 해제하고 철저한 중립 c. 함대를 자침시켜 독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 개인적으로 프랑스 주력함 다수가 비시 정부 명령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정도가 최선. 물론 프랑스 함대 거의 대부분은 탈출하지 않았고 항복한 정부에 복종했습니다. 드골 역시 비시 정부 입장에선 반역자. 이미 80년 세월이 흐른 뒤, 당사자도 아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완벽한 제3자 입장에선 뒤통수 때린 것일 수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길, 대한민국이 만일 그런 국가 운명이 걸린 순간을 맞이했을 때, 항복했지만 그 동안 동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겨눌 가능성 있는 예리한 창을, 상대방의 선의 약속만 믿고서 그냥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지켜지겠습니까? 영국은 강력하게 선포한 겁니다. 이 전쟁은 끝까지 간다, 이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만 끝나야 한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 당시 약 20년을 투쟁하면서 끝내는 승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영국입니다. 신대륙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과 영연방인 캐나다가 있고 호주 역시 준대륙급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에 강하게 요청한 겁니다. 항복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믿고 지원해달라. 물론 당시 공격당해 희생된 프랑스 해군 장병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런던에 망명했던 드골 임시정부 역시 기분 좋지 않았겠지만 그 사안으로 영국과 적이 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정리하죠. 1번 사안, 2번 사안 모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의 가치 판단이 유일하고 올바른 시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그 국가의 독자적 판단과 주권 행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냉정한 완벽한 제3자 관찰자 시점 역시 본의 아닌 편견일 수 있는 겁니다.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했던 전함 2척 인도 거부 과정 및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정리. 오스만 전함 2척 영국해군에 징발 제안, 1914년 7월 28일 (발칸에서 1차대전 방아쇠 당겨진 후군요. 아직 영-독 선전포고 없는.) -------------------------->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징발할 것을 각의에 제의, 전쟁 확전 대응 차원. --------------------------> 그러자 오스만은 2척 전함을 매각하겠다면서 독일 정부에 의사 타진. 즉 아직 영-독 모두 1차대전 적성국 아님. --------------------------> 그 때 독일은 그 2척의 전함을 사줄테니, 동맹을 맺자고 요구 --------------------------> 1914년 8월 2일, 영국 각의는 오스만 전함 2척 징발. --------------------------> 그러자 독일은 오스만에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줄테니 사용하라며 미끼 던짐. --------------------------> 독일이 러시아 선전포고한 직후인 1914년 8월 3일, 오스만은 공식적으로 중립 선언. 아직까지는 냉철히 대처. --------------------------> 독일이 오스만에 인도하겠다는 2척 전함은 당시 독일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지중해에 있었던. --------------------------> 그 2척의 독일함은 러시아 깃발로 위장하고 알제리의 프랑스 해안 요새 포격, 프-러 사이 분열시키기 위한 위장 공격 --------------------------> 알제리 해안 위장 포격 후 이동 중 영국 전함과 만났지만, 아직 선전포고 없었기에 전투 없이 서로 무사 통과. --------------------------> 위장 포격 확인 후 영국은 즉시 독일에 선전포고, 그 2척의 독일 전함 추격. --------------------------> 영국은 그 2척이 오스만에 인도되는 것 몰랐고, 독일이 지브롤타 해협 밖으로 탈출한다고 판단 그 쪽으로 추격. --------------------------> 결국 그 2척이 동쪽 오스만으로 갔다는 것 알고 6일간 추격전. --------------------------> 1914년 8월 10일 독일 전함 2척은 오스만의 다다넬스 해협 진입, 거기서 추격하던 영국해군은 오스만에 저지당함. --------------------------> 그 시점 직전 까지 오스만은 중립이었지만, 그 때 오스만은 영국해군의 해협통과를 봉쇄하며 중립 깨질 조짐. --------------------------> 1914년 8월 16일, 콘스탄티노플 도착한 2척 전함은 이름을 술탄 셀림, 미달리로 바꿈. --------------------------> 독일이 제공한 2척은 공식적으론 오스만 선적, 하지만 독일 함장과 승무원이 탑승한 독일 함정으로 전쟁 수행. -------------------------->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한 함정의 가격은 당시 가격 600만 파운드. --------------------------> 영국은 종전 때 까지 매일 1,000달러씩 지연 이자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오스만은 거부 --------------------------> 1914년 10월 27일, 독일 전함 2척 앞세워 오스만은 흑해 오데사-세바스토폴-얄타 등 러시아 항구 기습 --------------------------> 1914년 11월 1일, 그 때문에 러시아는 오스만에 선전포고. --------------------------> 러시아의 대오스만 선전포고로 오스만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 봉쇄 --------------------------> 당시 대영국 중립 상태였던 오스만이 영국해군의 항행자유를 거부 해협봉쇄에 나서자 영국 해군 갈리폴리 포격 경고 --------------------------> 1914년 11월 11일, 오스만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대해 지하드 선포. 저 과정을 살펴본다면, 관련국들의 오해와 우연적 요소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영국은 아직 세계대전 아닌 발칸에서의 전쟁 발발로, 혹시 모를 확전 대비 차원에서 징발령. 2. 오스만은 그렇게 징발될 바엔 그냥 다른 나라에 매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독일에게 구입 요청. -----------------------------> 즉 저 때 까지도 아직 영국-독일이 전쟁 위기라는 것 모른 오스만은 영국이 독일에게 판매할 수도 있다고 판단. 3. 오스만의 저런 상황 판단과 달리 영독은 전쟁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에, 독일측은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주겠다면서 오스만 회유. 아틀라스, 1차 세계대전 8편 - 처칠이 자초한 오스만 수렁 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0 제목 보면 알겠지만 영국 처칠에 대해 우호적 시각은 전혀 없습니다. 내용 중에는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관련 정확한 시점들이 나열되면서 소개됩니다. 내용을 보니 영어 위키 등 사진 제목 한글로 해서 첨부되기도. 이 한글 기사의 바탕이 된 해외 원본 자료 아직 못찾았습니다. 나름 영어로 검색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해군 역사 및 1차대전 때 오스만 전함들 원본 자료는 많았지만, 아직 저렇게 상세하게 날짜 별로 언급된 전함 인도 거부 및 오스만 참전 과정 원본 자료를 못 찾았습니다. 공고급 순양전함 건조와 인도 시기는 영어로 검색한 자료 참조했습니다. 공고급 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비교하면, 영국의 의도적 사기성 계약 파기 아니라는 근거 정도는 될 것. 오스만 전함 2척 관련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영국과 독일은 나름 냉정하게 판단한 겁니다. 오스만은 당시 국제정세를 오판? 했고, 독일측 회유 미끼에 걸려들었던 척?. 물론 영국도 전함 2척 징발로 오스만이 독일의 미끼를 물도록 재촉한 부분 있지만, 영국-오스만 관계에서 영국이 관련된 그리스 독립, 이집트 상실, 아랍봉기 등을 고려했을 때 오스만이 중립지키기는 사실상 불가능. 사실 이미 당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스만에 주둔하며 오스만군 훈련 및 보스포러스 해협 요새 건설도 지원. 오스만은 아마도 독일의 힘을 이용해 중동에서 오스만을 궁지로 몰아넣던 영국 위협을 제거하려 했을 수도 있기에 독일이 내민 미끼를 문 오판이라고 보기도 힘든. 영국이 전함 2척 이득 챙기려다 중립국을 적국으로 만들었다는 판단은 극단적으로 피상적인 겁니다. 전함 2척 인도 거부당한 분노 때문에 독일의 동맹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주장 역시 지극히 피상적인 겁니다. 영국은 발칸반도의 전쟁이 어떻게 확대될지 몰라 최악을 고려했던 것이고, 오스만 역시 기회를 잡아 자국 국가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 --------------------------------------> 오스만 전함 관련 영국의 최악은, --------------------------------------> 오스만에 전함을 인도한 이후 + 오스만이 독일의 동맹이 되는 것
디에프 상륙 42년 8월, 어리석은 실패 자체? 1942년 8월 당시 지중해-북아프리카 및 독소전 상황을 살펴본다면, 추축국이 깃발 날리면서 진군하던 시절입니다. 영국은 지중해-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쥐어터지고 있었고, 41년 겨울 모스크바 코 앞에서 후퇴했던 독일군은 42년 하계 공세로 소련군 두들겨 패고 있었던. 저런 시기에 디에프 상륙, 정말 독일을 패배시키기 위한 대륙 침공 작전이었겠습니까?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붕괴 위험 속에서도, 독일을 패배시킬 최종 북서유럽 침공을 위한 독일 해안 방어선 테스트라고 판단해야.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해도 전쟁 자체를 잃지는 않고 단지 자존심만 뭉개지는 정도. 이집트 잃는다고 항복하겠습니까?) (인도를 잃는다고 해도 항복과는 거리가 먼. 대륙 크기의 캐나다와 호주가 버티고 있고 영어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이 있기에 그냥 자존심만 무너지는 정도.) 디에프 상륙, 독일 방어선 테스트. 왜 캐나다 군을 동원했겠습니까? 캐나다는 국민 구성상 영 + 프 연합 상태였고,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본토 수복에 가장 적합한 연합국. 캐나다군은 노르망디 상륙에서 상당한 역활을 했습니다. 병력 수만 적었지 맡았던 역활은 지극 중대했습니다. 영국은 나폴레옹-프랑스, 1차-2차대전독일과는 완전히 다른 전략적 이점을 가졌습니다. 전투에서 100전 99패 당해도, 전쟁에 진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는 유리함. 영국의 적들은 100전 99승 단 1패만 하는 위대한 승률을 기록해도, 그 1패 성격에 따라 전쟁에서 질 수 있는 위태로움. 워털루에서 웰링턴이 패배한다고 영국은 패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존심 한 번 더 뭉개진 정도고 다음 번 침공 준비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의 최종 승리한다는 아무런 보장 없었고, 워털루의 패배로 결국 종말. 2차대전에서 영국이 버티면 결국 독일의 최종 운명은 패배입니다. 영국은 패배가 사실상 불가능한 입장, 독일의 최선은 최대한 오래 버티다 패전. 북미 대륙 전체인 미국-캐나다 및 준대륙급인 호주를 배경으로 한 영국을 패배시킬 수단이 없는 독일. 디에프-도데카니사-마켓가든-갈리폴리, 국가 운명이 걸린 치명적 삽질 아닌, 하부 전투 전술 차원의 삽질. 그나마 다른 국가들과 비교한다면 전쟁의 패배나 전선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 삽질. 특히 갈리폴리는 규모 면에서 영국 기준으로 엄청난 삽질이었지만, 그런 삽질에도 불구하고 중동에서 오스만은 항복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삽질, 국민방위군 삽질과 비교해보길. 규모 면에서 안드로메다급 격차 확인할 것. 1951년 초 한겨울, 중공군 공세 때 보충역으로 징집된 국민방위군 병력 약 50만 중 추정 약 10만 병력이, 상상초월하는 전시 대규모 국방비리로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한겨울 후퇴 행군 도중,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영국군 최대 패배급 전투 중 하나인 마켓가든. 총 인명 피해, 영국 + 미국 + 폴란드, 총 전사 + 행불 + 포로 = 약 1만8천 특히 전사는 극도로 제한된, 영 공수부대 전사 약 1천1백 + 영 30군단 전사 약 5천5백. 영국군 인명 피해 최대는 공수부대 포로 약 6천. 사상 최대급 전투 패배를 저렇게 당하기도 쉽지 않은 겁니다. 마켓가든 패배했었어도 딱 거기서 전선이 멈추는 정도, 전선 붕괴나 전쟁 패배로 이어지지 않은.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 삽질 없이 + 언제나 깔끔하게 승리만 하는 국가 군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삽질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면, 벌어지더라도 부작용 최소화 교양 있는 삽질이 되어야.
칠칠한 넘 + 칠칠하지 못한 넘, 단어 자체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져야 하지만, 일상에선 둘 다 부정적 늬앙스. 좀 더 확실하게 비교하자먼, 일상의 언어는 흐리멍텅한 측면이 매우 강합니다, 논리적으로 치밀한 수학과 달리. 수학에서는 결코 겹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모든 정수는 이 3개의 카테고리 중 하나로 결코 겹치지 않습니다. --------------------------------------------------------------> 모든 정수는, 0 이거나 + 0 보다 크거나 + 0 보다 작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에서는 겹침이 발생하며 + 심할 경우엔 모두가 동일한 의미가 되는 황당함 예를 들면, 개 + 개같은 + 개 보다 더한 + 개 보다 못한 + 개만도 못한 ... ----------------------------------------------------------------> 어떤 표현을 골라 잡아도, 그 의미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마찬가지로, 칠칠한 넘 + 칠칠하지 못한 넘, 표현 보다는 조금 더 우아? 예리? 하게 처칠 이름 살짝 변형한 삽칠을 추천합니다. 전에 어디서 보고 참신하다 느꼈던 표현. chill 자 돌림자로 처칠-삽칠, 의미 전달의 명확성 측면에서 칠칠한-칠칠하지못한 흐리멍텅함 없는. 그렇다면 정말 처칠은 삽칠이기만 했을까요?
오스만 1차대전 독일 쪽에 참전한 이유로, 영국의 오스만 전함 2척 인도 거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전함 2척 인도 거부만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1차대전 직전 일본에 인도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원래 브라질이 주문했었지만 브라질이 경제 위기로 포기했던 배를 오스만이 구입. 브라질이 포기하고 오스만이 새로 계약하는 시간 딜레이가 없이 브라질이나 오스만이 처음 계약자였다면 1차대전 직전에 인도되었을 가능성 무시할 수 없는. 1. 영국의 일본 공고급 순양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영국에서 1차대전 직전 건조되었습니다. 기공-1911년 1월, 진수-1912년 5월, 완공 후 일본에 인도-1913년 8월 -------------> 1914년 8월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1번함만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3척은 일본에서 영국 기술 지원하에 전부 완공되었습니다. 만일 나머지 3척도 영국에서 건조중에 1차대전 터졌다면 아마 일본 동의하에 일부는 영국해군용으로 전용되었을 수도. 영국이 브라질 주문받아 건조하던 브라질-전함 리우데자이네루, 1913년 브라질 디폴트 선언으로 인도 중지. 주인 없던 그 전함에 대해, 1914년 1월 오스만-영국-브라질 협의로 오스만과 계약. 오스만과 계약한 날짜와 영국이 인도 거부하고 오스만 승무원 퇴함시킨 날을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겁니다. 분명 계약 이후에도 건조 진행되었다고 나옵니다. 즉 시간이 좀 더 흘렀을 겁니다. 1차세계대전 발발은 1914년 7월입니다. 즉 오스만과 계약한 이후 국제 정세 급변하면서 오스만의 독일 동맹 가능성이 커진 상황 고려해야. 계약할 때 이미 전쟁 발발 가능성이 확고부동했다면 영국이 사기친 계약이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영국-독일-러시아 국왕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사촌간에 어린 시절 부터 왕래하고 교류했던 사이기도. 발칸반도 불안정성으로 강대국들이 동맹 관계로 얽혀 긴장이 커지곤 있었지만 세계대전 터질 것이라 1월에 예상??? 사실 1차대전 발발 방아쇠 자체는 발칸 반도에서의 암살 사건 탓도 있었기에. 영국이 1월에 이미 전쟁 알면서도 사기쳤을지... 만일 이런 추론의 배경이 되는 사실 관계에 별 오류가 없다면, 영국은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직전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일 수도. 오스만은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을 수도. 만일 그 전함이 이미 완공되어 오스만과 계약하고 바로 인도될 상태였다면 오스만도 인도받았을 겁니다. 공고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아 브라질 디폴트 선언이 몇 달만 빨라 오스만과 계약과 인도 시점이 1913년 하반기였다면 공고 처럼 인도되었을 것. 2. 2차대전 프랑스 항복 직후 영국의 프랑스 함대 공격 영국측이 비시 정부에 요구한 것은 지극히 냉철한 겁니다. 얼마 전 까지 동맹이었지만 독일에 항복한 이상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 군사력에 보탬이 되어선 안된다는. 프랑스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세계대전 상황에서 영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항복 전, 프랑스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 이태리 함대 항복 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 함대 + 이태리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영국은 무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3가지 중 택하라고 요구했고, 마감시간 때 까지 답변 없자 바로 공격. a. 함대를 영국으로 이동 대독 전쟁 계속 수행 b. 함대를 중립국으로 이동 무장 해제하고 철저한 중립 c. 함대를 자침시켜 독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 개인적으로 프랑스 주력함 다수가 비시 정부 명령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정도가 최선. 물론 프랑스 함대 거의 대부분은 탈출하지 않았고 항복한 정부에 복종했습니다. 드골 역시 비시 정부 입장에선 반역자. 이미 80년 세월이 흐른 뒤, 당사자도 아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완벽한 제3자 입장에선 뒤통수 때린 것일 수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길, 대한민국이 만일 그런 국가 운명이 걸린 순간을 맞이했을 때, 항복했지만 그 동안 동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겨눌 가능성 있는 예리한 창을, 상대방의 선의 약속만 믿고서 그냥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지켜지겠습니까? 영국은 강력하게 선포한 겁니다. 이 전쟁은 끝까지 간다, 이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만 끝나야 한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 당시 약 20년을 투쟁하면서 끝내는 승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영국입니다. 신대륙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과 영연방인 캐나다가 있고 호주 역시 준대륙급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에 강하게 요청한 겁니다. 항복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믿고 지원해달라. 물론 당시 공격당해 희생된 프랑스 해군 장병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런던에 망명했던 드골 임시정부 역시 기분 좋지 않았겠지만 그 사안으로 영국과 적이 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정리하죠. 1번 사안, 2번 사안 모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의 가치 판단이 유일하고 올바른 시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그 국가의 독자적 판단과 주권 행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냉정한 완벽한 제3자 관찰자 시점 역시 본의 아닌 편견일 수 있는 겁니다.
오스만군은 진인사대천명했으니 행운이 온거고 영프군은 동네북처럼 털려왔던 그 나라가 우스워보이니 적군도 허접이겠지 하며 방심해서 뼈아픈 대가를 치뤘다. 지형적 불리함을 감내하고도 갈리폴리로 상륙한것도 따지고보면 기뢰 맞고도 정신 못차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인천상륙작전도 좋은 지형은 아니었으나 사전에 준비를 잘했으니 성공한거였지 갈리폴리처럼 북한군을 옐로우몽키로 보고 막무가내로 밀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스만 1차대전 독일 쪽에 참전한 이유로, 영국의 오스만 전함 2척 인도 거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전함 2척 인도 거부만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1차대전 직전 일본에 인도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원래 브라질이 주문했었지만 브라질이 경제 위기로 포기했던 배를 오스만이 구입. 브라질이 포기하고 오스만이 새로 계약하는 시간 지연 없이 브라질이나 오스만이 처음 계약자였다면 1차대전 직전에 인도되었을 가능성 무시할 수 없는. 1. 영국의 일본 공고급 순양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영국에서 1차대전 직전 건조되었습니다. 기공-1911년 1월, 진수-1912년 5월, 완공 후 일본에 인도-1913년 8월 -------------> 1914년 8월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1번함만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3척은 일본에서 영국 기술 지원하에 전부 완공되었습니다. 만일 나머지 3척도 영국에서 건조중에 1차대전 터졌다면 아마 일본 동의하에 일부는 영국해군용으로 전용되었을 수도. 영국이 브라질 주문받아 건조하던 브라질-전함 리우데자이네루, 1913년 브라질 디폴트 선언으로 인도 중지. 주인 없던 그 전함에 대해, 1914년 1월 오스만-영국-브라질 협의로 오스만과 계약. 오스만과 계약한 날짜와 영국이 인도 거부하고 오스만 승무원 퇴함시킨 날을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겁니다. 분명 계약 이후에도 건조 진행되었다고 나옵니다. 즉 시간이 좀 더 흘렀을 겁니다. 1차세계대전 발발은 1914년 7월입니다. 즉 오스만과 계약한 이후 국제 정세 급변하면서 오스만의 독일 동맹 가능성이 커진 상황 고려해야. 계약할 때 이미 전쟁 발발 가능성이 확고부동했다면 영국이 사기친 계약이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영국-독일-러시아 국왕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사촌간에 어린 시절 부터 왕래하고 교류했던 사이기도. 발칸반도 불안정성으로 강대국들이 동맹 관계로 얽혀 긴장이 커지곤 있었지만 세계대전 터질 것이라 1월에 예상??? 사실 1차대전 발발 방아쇠 자체는 발칸 반도에서의 암살 사건 탓도 있었기에. 영국이 1월에 이미 전쟁 알면서도 사기쳤을지... 만일 이런 추론의 배경이 되는 사실 관계에 별 오류가 없다면, 영국은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직전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일 수도. 오스만은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을 수도. 만일 그 전함이 이미 완공되어 오스만과 계약하고 바로 인도될 상태였다면 오스만도 인도받았을 겁니다. 공고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아 브라질 디폴트 선언이 몇 달만 빨라 오스만과 계약과 인도 시점이 1913년 하반기였다면 공고 처럼 인도되었을 것. 2. 2차대전 프랑스 항복 직후 영국의 프랑스 함대 공격 영국측이 비시 정부에 요구한 것은 지극히 냉철한 겁니다. 얼마 전 까지 동맹이었지만 독일에 항복한 이상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 군사력에 보탬이 되어선 안된다는. 프랑스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세계대전 상황에서 영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항복 전, 프랑스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 이태리 함대 항복 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 함대 + 이태리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영국은 무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3가지 중 택하라고 요구했고, 마감시간 때 까지 답변 없자 바로 공격. a. 함대를 영국으로 이동 대독 전쟁 계속 수행 b. 함대를 중립국으로 이동 무장 해제하고 철저한 중립 c. 함대를 자침시켜 독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 개인적으로 프랑스 주력함 다수가 비시 정부 명령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정도가 최선. 물론 프랑스 함대 거의 대부분은 탈출하지 않았고 항복한 정부에 복종했습니다. 드골 역시 비시 정부 입장에선 반역자. 이미 80년 세월이 흐른 뒤, 당사자도 아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완벽한 제3자 입장에선 뒤통수 때린 것일 수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길, 대한민국이 만일 그런 국가 운명이 걸린 순간을 맞이했을 때, 항복했지만 그 동안 동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겨눌 가능성 있는 예리한 창을, 상대방의 선의 약속만 믿고서 그냥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지켜지겠습니까? 영국은 강력하게 선포한 겁니다. 이 전쟁은 끝까지 간다, 이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만 끝나야 한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 당시 약 20년을 투쟁하면서 끝내는 승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영국입니다. 신대륙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과 영연방인 캐나다가 있고 호주 역시 준대륙급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에 강하게 요청한 겁니다. 항복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믿고 지원해달라. 물론 당시 공격당해 희생된 프랑스 해군 장병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런던에 망명했던 드골 임시정부 역시 기분 좋지 않았겠지만 그 사안으로 영국과 적이 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정리하죠. 1번 사안, 2번 사안 모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의 가치 판단이 유일하고 올바른 시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그 국가의 독자적 판단과 주권 행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냉정한 완벽한 제3자 관찰자 시점 역시 본의 아닌 편견일 수 있는 겁니다.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했던 전함 2척 인도 거부 과정 및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정리. 오스만 전함 2척 영국해군에 징발 제안, 1914년 7월 28일 (발칸에서 1차대전 방아쇠 당겨진 후군요. 아직 영-독 선전포고 없는.) -------------------------->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징발할 것을 각의에 제의, 전쟁 확전 대응 차원. --------------------------> 그러자 오스만은 2척 전함을 매각하겠다면서 독일 정부에 의사 타진. 즉 아직 영-독 모두 1차대전 적성국 아님. --------------------------> 그 때 독일은 그 2척의 전함을 사줄테니, 동맹을 맺자고 요구 --------------------------> 1914년 8월 2일, 영국 각의는 오스만 전함 2척 징발. --------------------------> 그러자 독일은 오스만에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줄테니 사용하라며 미끼 던짐. --------------------------> 독일이 러시아 선전포고한 직후인 1914년 8월 3일, 오스만은 공식적으로 중립 선언. 아직까지는 냉철히 대처. --------------------------> 독일이 오스만에 인도하겠다는 2척 전함은 당시 독일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지중해에 있었던. --------------------------> 그 2척의 독일함은 러시아 깃발로 위장하고 알제리의 프랑스 해안 요새 포격, 프-러 사이 분열시키기 위한 위장 공격 --------------------------> 알제리 해안 위장 포격 후 이동 중 영국 전함과 만났지만, 아직 선전포고 없었기에 전투 없이 서로 무사 통과. --------------------------> 위장 포격 확인 후 영국은 즉시 독일에 선전포고, 그 2척의 독일 전함 추격. --------------------------> 영국은 그 2척이 오스만에 인도되는 것 몰랐고, 독일이 지브롤타 해협 밖으로 탈출한다고 판단 그 쪽으로 추격. --------------------------> 결국 그 2척이 동쪽 오스만으로 갔다는 것 알고 6일간 추격전. --------------------------> 1914년 8월 10일 독일 전함 2척은 오스만의 다다넬스 해협 진입, 거기서 추격하던 영국해군은 오스만에 저지당함. --------------------------> 그 시점 직전 까지 오스만은 중립이었지만, 그 때 오스만은 영국해군의 해협통과를 봉쇄하며 중립 깨질 조짐. --------------------------> 1914년 8월 16일, 콘스탄티노플 도착한 2척 전함은 이름을 술탄 셀림, 미달리로 바꿈. --------------------------> 독일이 제공한 2척은 공식적으론 오스만 선적, 하지만 독일 함장과 승무원이 탑승한 독일 함정으로 전쟁 수행. -------------------------->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한 함정의 가격은 당시 가격 600만 파운드. --------------------------> 영국은 종전 때 까지 매일 1,000달러씩 지연 이자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오스만은 거부 --------------------------> 1914년 10월 27일, 독일 전함 2척 앞세워 오스만은 흑해 오데사-세바스토폴-얄타 등 러시아 항구 기습 --------------------------> 1914년 11월 1일, 그 때문에 러시아는 오스만에 선전포고. --------------------------> 러시아의 대오스만 선전포고로 오스만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 봉쇄 --------------------------> 당시 대영국 중립 상태였던 오스만이 영국해군의 항행자유를 거부 해협봉쇄에 나서자 영국 해군 갈리폴리 포격 경고 --------------------------> 1914년 11월 11일, 오스만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대해 지하드 선포. 저 과정을 살펴본다면, 관련국들의 오해와 우연적 요소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영국은 아직 세계대전 아닌 발칸에서의 전쟁 발발로, 혹시 모를 확전 대비 차원에서 징발령. 2. 오스만은 그렇게 징발될 바엔 그냥 다른 나라에 매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독일에게 구입 요청. -----------------------------> 즉 저 때 까지도 아직 영국-독일이 전쟁 위기라는 것 모른 오스만은 영국이 독일에게 판매할 수도 있다고 판단. 3. 오스만의 저런 상황 판단과 달리 영독은 전쟁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에, 독일측은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주겠다면서 오스만 회유. 아틀라스, 1차 세계대전 8편 - 처칠이 자초한 오스만 수렁 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0 제목 보면 알겠지만 영국 처칠에 대해 우호적 시각은 전혀 없습니다. 내용 중에는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관련 정확한 시점들이 나열되면서 소개됩니다. 내용을 보니 영어 위키 등 사진 제목 한글로 해서 첨부되기도. 이 한글 기사의 바탕이 된 해외 원본 자료 아직 못찾았습니다. 나름 영어로 검색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해군 역사 및 1차대전 때 오스만 전함들 원본 자료는 많았지만, 아직 저렇게 상세하게 날짜 별로 언급된 전함 인도 거부 및 오스만 참전 과정 원본 자료를 못 찾았습니다. 공고급 순양전함 건조와 인도 시기는 영어로 검색한 자료 참조했습니다. 공고급 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비교하면, 영국의 의도적 사기성 계약 파기 아니라는 근거 정도는 될 것. 오스만 전함 2척 관련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영국과 독일은 나름 냉정하게 판단한 겁니다. 오스만은 당시 국제정세를 오판? 했고, 독일측 회유 미끼에 걸려들었던 척?. 물론 영국도 전함 2척 징발로 오스만이 독일의 미끼를 물도록 재촉한 부분 있지만, 영국-오스만 관계에서 영국이 관련된 그리스 독립, 이집트 상실, 아랍봉기 등을 고려했을 때 오스만이 중립지키기는 사실상 불가능. 사실 이미 당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스만에 주둔하며 오스만군 훈련 및 보스포러스 해협 요새 건설도 지원. 오스만은 아마도 독일의 힘을 이용해 중동에서 오스만을 궁지로 몰아넣던 영국 위협을 제거하려 했을 수도 있기에 독일이 내민 미끼를 문 오판이라고 보기도 힘든. 영국이 전함 2척 이득 챙기려다 중립국을 적국으로 만들었다는 판단은 극단적으로 피상적인 겁니다. 전함 2척 인도 거부당한 분노 때문에 독일의 동맹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주장 역시 지극히 피상적인 겁니다. 영국은 발칸반도의 전쟁이 어떻게 확대될지 몰라 최악을 고려했던 것이고, 오스만 역시 기회를 잡아 자국 국가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 --------------------------------------> 오스만 전함 관련 영국의 최악은, --------------------------------------> 오스만에 전함을 인도한 이후 + 오스만이 독일의 동맹이 되는 것
갈리폴리 영국이 패하고 거기서 철수했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소수의 영국 파견군에게 중동 각지에서 패배하고 최종 항복. 저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 반투르크 아랍반군 봉기를 유도하면서 소수의 영국군 투입으로 승리. 저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 현 아랍 왕국들이 오스만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팔레스타인-시리아-이라크 등은 위임통치령으로 바뀌면서 오스만투르크는 현 터키 영토로 쪼그라 든 것. 2차대전 후에 위임통치령에서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독립. 특히 쿠웨이트는 유전 밀집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석유 이권 통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에서 떼어내 별도록 독립시킴. 1990년 걸프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할 때, 애초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주였다면서 원래 자기 영토 찾겠다면서 침공. 영국은 삽질해도 어지간해선 전쟁에선 안집니다. 삽질했다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 보호령에서 자치령으로 바뀌고 독립된 국가로 나아간 계기. 갈리폴리 상륙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기념 행사, 영-호-뉴-터 4개국 공동 행사로 열리며 호주와 뉴질랜드 독립의 상징. 다른 국가들이었다면 갈리폴리급 대규모 삽질했다면 분명 중동에서 완전 축출되었을 것.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갈리폴리 전투를 지휘했던 오스만투르크의 장군이 바로 케말 파샤. 1차대전 패전 후 오스만투르크 왕정이 붕괴하고, 전쟁 영웅이었던 케말 파샤가 공화정 터키의 지도자가 됨. 케말 파샤는 1차대전 패전에서 서구화 방식의 근대화를 선택했고, 알파벳 사용과 이슬람의 정치 간섭을 철저히 배제. 그랬던 터키 공화국이 현 터키 대통령 취임과 함께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 이슬람화하는 터키를 다시 케말파샤의 공화정으로 되돌리려했던 쿠데타 시도가 터키 국민들의 개입으로 실패하기도. 오스만투르크의 1차대전 패전 트라우마로 인해, 2차대전 초중반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거듭된 동맹 요청에도 끝까지 거부하며 중립. 갈리폴리에서 영국을 막아냈지만 결국 소수의 영국군에게 중동 지역에서 패배해 제국이 해체된 충격 때문임. 그 깟 전함 2척 때문에 1차대전 독일에 줄섰다, 오스만투르크는 제국을 해체당했다면 좀 이상하죠. 즉 한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서 그 깟 전함 2척으로 결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 다른 더 결정적 요인들이 있는.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의 중동 아프리카 정책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독일의 3B 영국의 3C 정책. 독일의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비잔티움이 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 영국에 대한 트라우마는 터키만이 아니라 스페인도 강했죠. 2차대전 초기 독일이 깃발 날릴 때, 지브롤타 점령을 위한 육상 통로를 내달라는 요청 끝까지 거부. 독일이 제 아무리 승리하고 잘 나가도,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독일과의 군사동맹과 침공로 통과 모두 거부. 이유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 트라팔가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 충격. 스페인 프랑코 총통은 중립지킨 행운으로 전후에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고.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후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은 미국과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현 그리스-튀르키에 해안 도서 살펴보길. 튀르키에 코 앞의 섬 거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 에게해 거의 전부는 그리스 차지. ---------------------------------------------> 19세기 영국의 그리스 독립 지원 +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서 서구의 공세 및 영국이 이집트 속국화하며 ---------------------------------------------> 오스만은 북아프리카에서 사실상 퇴출 + 갈리폴리에서 패배 철수했지만 중동 다른 지역에 침투한 영국에게 오스만은 패배 결국 항복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리스는 에게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이 고대 그리스 문명권이었음을 내세우며 튀르키에 본토 상륙 꽤 넓은 영토 점령. ---------------------------------------------> 1차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왕정이 무너지고 케말 파샤 주도의 공화정이 성립하며 + 러시아-소련과 연합해 그리스와 투쟁 본토에서 그리스 축출 ---------------------------------------------> 저런 과정 거치며 최종 종전 협정, 상징성 큰 이스탄불을 지켜내는 댓가로 에게해 연안 거의 거의 거의 모든 섬들을 포기. ---------------------------------------------> 그리스 자체 힘으로 에게해 도서들 그리스령으로 만든 것 아닌 + 사실상 영국이 배후에서 강력한 해군력으로 오스만을 바다에서 찍어 누른 결과 ---------------------------------------------> 한국전쟁 정전협정 직전까지 서해 거의 모든 도서들을 점유했었지만, 정전협정과 함께 포기한 미-유엔-대한민국과 대비해보길. ---------------------------------------------> 1차대전 종전 후 그리스와 그리스를 지원한 영국은 해안 도서 점령 관해선 한국전쟁 정전 때 대한민국-미국과 달랐습니다. ---------------------------------------------> 2차대전 때도 1944년 그리스 상륙 + 공산 빨치산 토벌하며 그리스 공산화를 막아내고 + 유고 티토를 지원 탈소 중립 노선 걷도록 오스만의 1차대전 독일 동맹으로 참전 및 1차대전 이후 파멸 직전에 겨우 살아난 과정 살펴보길. ---------------------------------------------> 걸리폴리에서 승리했어도 오스만은 저렇게 되었습니다. 전투 승리와 전쟁의 승리는 다른 겁니다. 나폴레옹-프랑스 및 강력했던 1차-2차대전독일의 주특기. ---------------------------------------------> 수 많은 위대한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 전쟁에선 ( 특히 결정적 전쟁) 최종 패배 ---------------------------------------------> 나폴레옹프랑스-1차2차대전독일, 100전 99승 하더라도 단 1패만으로도 전쟁을 잃을 잠재 위협에 노출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수 많은 전투 패베에도 불구하고 ----------------------------------------------> 결정적 전쟁 ( 아니 사실은 거의 거의 모든 전쟁 )에서 승리. ----------------------------------------------> 전투에서 100전 99패 당하더라도 단 1승만으로도 그 1승의 성격에 따라 전쟁의 최종 승리가 가능한 행운? 실력? 아니면 둘 다??? 전투는 독일처럼 하는 것이 좋지만 + 전쟁은 절대로 독일처럼 해선 안되는 갈리폴리, 아무리 위대한 전투 승리라고 해도 + 전쟁의 패배를 막을 수 없었던 전형적 사례 ----------------------------------------------> 거의 거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갈리폴리급 참사를 겪고서 전쟁에서 승리하긴 어렵습니다.
영화 갈리폴리 알비뇨의 아다지오 선율속 터키 기관총 참호로 돌격하기전 호주군 그걸 막으려 필사적으로 뛰는 전령 20대의 멜깁슨 그리고 실패와 절규 영화 1917은 이 영화의 마이너 아류작이라고 나는 감히 평함, 이영화 이 후 멜깁슨은 모든영화에 달리기 신을 연기하고 결국 그는 달리기 영화의 끝판왕 아포칼립토를 만듬
아는 터키 지인 있는데 자기네 나라는 인재가 없었다고 투덜거리다가 무스타파 케말 얘기 나오니까 진짜 좋아함 ㅋㅋ
억..담주 심중령님 불참이신가? ㅜ
아 오늘도 한창 재밌는 와중에 끝났음요ㅜ 한 2시간씩 해주면 좋겠어요
처칠아~다음 생엔 상륙작전하지말고 행복하게 살아야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기하며)
그리고 디에프 상륙작전으로 또 불행해지는...
그럼 공수작전은?
아냐 그것도 안돼....
그냥 미국 기다려...
이거보고 마켓가든 하기로 했다
매일 저녁에 퇴근해서 챙겨봤는데 빨간날에 보니까 더 꿀잼이네요 ㅋㅋ
더좋은거는 그다음날도 빨강날.ㅋㅌㅌㅋ
오스만 제국을 코미디로만 생각했는데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이었군요.
오늘도 풀참!! 너무 즐겁습니다
국방티비 각성하라 2시간씩 방송해라
왔구나.. 미스터 갈리폴리..
토전사에서 갈리폴리 전투 다루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굿굿굿
태평양전쟁부터 정주행 쭉해서 벌써 다 보고 1차 대전까지 왔는데 한 회차가 넘 빨리 끝나여 ㅜㅜ 오늘도 넘 잘 봤습니다!!
그런데 다음주 예고편에 심중령님 안계신건가여 ㅜㅜ
아프신가.... ㅠㅠ
심소령님 어디 계세요? 다음시간 예고에 빈자리가 ㅜㅜ
갈리폴리는 못참지
드디어 갈리폴리! 넘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토전사에서도 보고 여기서도 보는 갈리폴리
역시 설날에두 꿀잼입니다
감사합니다 ❤❤
와... 설날에도 방송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주 심중령님 안나오시나요? 건강이 안좋으신건가...;;;
진짜 이 방송은 30년 이상은 하셔야 합니다. 여기 출연자 분들 건강 챙기세요~
느무느무 재밌다 😁
다행이야... 이번 주는 그렇게 길지 않았어...
하아 근대 또 한주 기다려야 하네...
이거보고 바로 토전사 갈리폴리편 다시 보로갑니다
갈리폴리전투 직전에 아르메니아 방향에서 일어났던 사르카무쉬 전투에서 오스만은 이미 러시아군에게 대패한 상태였습니다. 오스만 쪽에서도 가용병력을 단기간에 끌어모으기 힘든 상황이었지요.
알찬 설날 선물 감사합니다
집 돌아와서 보는 역전다방 꿀잼이네여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아타튀륵크가 드디어 등장하네요.
국방부는 이 네사람 가둬놓고
하루 5시간씩 찍어내도록
처칠의 정적들이 처칠을 조용히 만들고 싶을때마다, '갈리폴리' 이야기를 했다죠 ㅋㅋㅋ
미스터 갈리폴리 ㅋㅋㅋㅋㅋㅋ
발작버튼 딸각?
아는 얘기 나와서 반갑니
나왔다 그분의 그전투
설에도 올라오는구나
오오오 이제 바로 그 지상 최고의 상륙작전, 가장 위대한 상륙작전인 갈리폴리가 나온느건가요? ㄷㄷ 그리고 상대도 심지어 무스타파 케말 ㄷㄷ
갈리폴리 영국이 패하고 거기서 철수했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소수의 영국 파견군에게 중동 각지에서 패배하고 최종 항복.
저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 반투르크 아랍반군 봉기를 유도하면서 소수의 영국군 투입으로 승리.
저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 현 아랍 왕국들이 오스만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팔레스타인-시리아-이라크 등은 위임통치령으로
바뀌면서 오스만투르크는 현 터키 영토로 쪼그라 든 것. 2차대전 후에 위임통치령에서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독립.
특히 쿠웨이트는 유전 밀집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석유 이권 통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에서 떼어내 별도록 독립시킴.
1990년 걸프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할 때, 애초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주였다면서 원래 자기 영토 찾겠다면서 침공.
영국은 삽질해도 어지간해선 전쟁에선 안집니다.
삽질했다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 보호령에서 자치령으로 바뀌고 독립된 국가로 나아간 계기.
갈리폴리 상륙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기념 행사, 영-호-뉴-터 4개국 공동 행사로 열리며 호주와 뉴질랜드 독립의 상징.
다른 국가들이었다면 갈리폴리급 대규모 삽질했다면 분명 중동에서 완전 축출되었을 것.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갈리폴리 전투를 지휘했던 오스만투르크의 장군이 바로 케말 파샤.
1차대전 패전 후 오스만투르크 왕정이 붕괴하고, 전쟁 영웅이었던 케말 파샤가 공화정 터키의 지도자가 됨.
케말 파샤는 1차대전 패전에서 서구화 방식의 근대화를 선택했고, 알파벳 사용과 이슬람의 정치 간섭을 철저히 배제.
그랬던 터키 공화국이 현 터키 대통령 취임과 함께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 이슬람화하는 터키를
다시 케말파샤의 공화정으로 되돌리려했던 쿠데타 시도가 터키 국민들의 개입으로 실패하기도.
오스만투르크의 1차대전 패전 트라우마로 인해,
2차대전 초중반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거듭된 동맹 요청에도 끝까지 거부하며 중립.
갈리폴리에서 영국을 막아냈지만 결국 소수의 영국군에게 중동 지역에서 패배해 제국이 해체된 충격 때문임.
그 깟 전함 2척 때문에 1차대전 독일에 줄섰다, 오스만투르크는 제국을 해체당했다면 좀 이상하죠.
즉 한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서 그 깟 전함 2척으로 결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 다른 더 결정적 요인들이 있는.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의 중동 아프리카 정책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독일의 3B 영국의 3C 정책. 독일의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비잔티움이 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
영국에 대한 트라우마는 터키만이 아니라 스페인도 강했죠.
2차대전 초기 독일이 깃발 날릴 때, 지브롤타 점령을 위한 육상 통로를 내달라는 요청 끝까지 거부.
독일이 제 아무리 승리하고 잘 나가도,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독일과의 군사동맹과 침공로 통과 모두 거부.
이유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 트라팔가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 충격.
스페인 프랑코 총통은 중립지킨 행운으로 전후에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고.
현 그리스-튀르키에 해안 도서 살펴보길.
튀르키에 코 앞의 섬 거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 에게해 거의 전부는 그리스 차지.
---------------------------------------------> 19세기 영국의 그리스 독립 지원 +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서 서구의 공세 및 영국이 이집트 속국화하며
---------------------------------------------> 오스만은 북아프리카에서 사실상 퇴출 + 갈리폴리에서 패배 철수했지만 중동 다른 지역에 침투한 영국에게 오스만은 패배 결국 항복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리스는 에게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이 고대 그리스 문명권이었음을 내세우며 튀르키에 본토 상륙 꽤 넓은 영토 점령.
---------------------------------------------> 1차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왕정이 무너지고 케말 파샤 주도의 공화정이 성립하며 + 러시아-소련과 연합해 그리스와 투쟁 본토에서 그리스 축출
---------------------------------------------> 저런 과정 거치며 최종 종전 협정, 상징성 큰 이스탄불을 지켜내는 댓가로 에게해 연안 거의 거의 거의 모든 섬들을 포기.
---------------------------------------------> 그리스 자체 힘으로 에게해 도서들 그리스령으로 만든 것 아닌 + 사실상 영국이 배후에서 강력한 해군력으로 오스만을 바다에서 찍어 누른 결과
---------------------------------------------> 한국전쟁 정전협정 직전까지 서해 거의 모든 도서들을 점유했었지만, 정전협정과 함께 포기한 미-유엔-대한민국과 대비해보길.
---------------------------------------------> 1차대전 종전 후 그리스와 그리스를 지원한 영국은 해안 도서 점령 관해선 한국전쟁 정전 때 대한민국-미국과 달랐습니다.
---------------------------------------------> 2차대전 때도 1944년 그리스 상륙 + 공산 빨치산 토벌하며 그리스 공산화를 막아내고 + 유고 티토를 지원 탈소 중립 노선 걷도록
오스만의 1차대전 독일 동맹으로 참전 및 1차대전 이후 파멸 직전에 겨우 살아난 과정 살펴보길.
---------------------------------------------> 걸리폴리에서 승리했어도 오스만은 저렇게 되었습니다. 전투 승리와 전쟁의 승리는 다른 겁니다.
나폴레옹-프랑스 및 강력했던 1차-2차대전독일의 주특기.
---------------------------------------------> 수 많은 위대한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 전쟁에선 ( 특히 결정적 전쟁) 최종 패배
---------------------------------------------> 나폴레옹프랑스-1차2차대전독일, 100전 99승 하더라도 단 1패만으로도 전쟁을 잃을 잠재 위협에 노출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수 많은 전투 패베에도 불구하고
----------------------------------------------> 결정적 전쟁 ( 아니 사실은 거의 거의 모든 전쟁 )에서 승리.
----------------------------------------------> 전투에서 100전 99패 당하더라도 단 1승만으로도 그 1승의 성격에 따라 전쟁의 최종 승리가 가능한 행운? 실력? 아니면 둘 다???
전투는 독일처럼 하는 것이 좋지만 + 전쟁은 절대로 독일처럼 해선 안되는
갈리폴리, 아무리 위대한 전투 승리라고 해도 + 전쟁의 패배를 막을 수 없었던 전형적 사례
----------------------------------------------> 거의 거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갈리폴리급 참사를 겪고서 전쟁에서 승리하긴 어렵습니다.
오스만 1차대전 독일 쪽에 참전한 이유로, 영국의 오스만 전함 2척 인도 거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전함 2척 인도 거부만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1차대전 직전 일본에 인도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원래 브라질이 주문했었지만 브라질이 경제 위기로 포기했던 배를 오스만이 구입.
브라질이 포기하고 오스만이 새로 계약하는 시간 딜레이가 없이 브라질이나 오스만이 처음 계약자였다면 1차대전 직전에 인도되었을 가능성 무시할 수 없는.
1. 영국의 일본 공고급 순양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영국에서 1차대전 직전 건조되었습니다.
기공-1911년 1월, 진수-1912년 5월, 완공 후 일본에 인도-1913년 8월 -------------> 1914년 8월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1번함만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3척은 일본에서 영국 기술 지원하에 전부 완공되었습니다.
만일 나머지 3척도 영국에서 건조중에 1차대전 터졌다면 아마 일본 동의하에 일부는 영국해군용으로 전용되었을 수도.
영국이 브라질 주문받아 건조하던 브라질-전함
리우데자이네루, 1913년 브라질 디폴트 선언으로 인도 중지.
주인 없던 그 전함에 대해, 1914년 1월 오스만-영국-브라질 협의로 오스만과 계약.
오스만과 계약한 날짜와 영국이 인도 거부하고 오스만 승무원 퇴함시킨 날을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겁니다.
분명 계약 이후에도 건조 진행되었다고 나옵니다. 즉 시간이 좀 더 흘렀을 겁니다.
1차세계대전 발발은 1914년 7월입니다.
즉 오스만과 계약한 이후 국제 정세 급변하면서 오스만의 독일 동맹 가능성이 커진 상황 고려해야.
계약할 때 이미 전쟁 발발 가능성이 확고부동했다면 영국이 사기친 계약이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영국-독일-러시아 국왕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사촌간에 어린 시절 부터 왕래하고 교류했던 사이기도.
발칸반도 불안정성으로 강대국들이 동맹 관계로 얽혀 긴장이 커지곤 있었지만 세계대전 터질 것이라 1월에 예상???
사실 1차대전 발발 방아쇠 자체는 발칸 반도에서의 암살 사건 탓도 있었기에. 영국이 1월에 이미 전쟁 알면서도 사기쳤을지...
만일 이런 추론의 배경이 되는 사실 관계에 별 오류가 없다면, 영국은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직전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일 수도. 오스만은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을 수도.
만일 그 전함이 이미 완공되어 오스만과 계약하고 바로 인도될 상태였다면 오스만도 인도받았을 겁니다. 공고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아 브라질 디폴트 선언이 몇 달만 빨라 오스만과 계약과 인도 시점이 1913년 하반기였다면 공고 처럼 인도되었을 것.
2. 2차대전 프랑스 항복 직후 영국의 프랑스 함대 공격
영국측이 비시 정부에 요구한 것은 지극히 냉철한 겁니다.
얼마 전 까지 동맹이었지만 독일에 항복한 이상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 군사력에 보탬이 되어선 안된다는.
프랑스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세계대전 상황에서 영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항복 전, 프랑스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 이태리 함대
항복 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 함대 + 이태리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영국은 무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3가지 중 택하라고 요구했고, 마감시간 때 까지 답변 없자 바로 공격.
a. 함대를 영국으로 이동 대독 전쟁 계속 수행
b. 함대를 중립국으로 이동 무장 해제하고 철저한 중립
c. 함대를 자침시켜 독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
개인적으로 프랑스 주력함 다수가 비시 정부 명령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정도가 최선.
물론 프랑스 함대 거의 대부분은 탈출하지 않았고 항복한 정부에 복종했습니다. 드골 역시 비시 정부 입장에선 반역자.
이미 80년 세월이 흐른 뒤,
당사자도 아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완벽한 제3자 입장에선 뒤통수 때린 것일 수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길,
대한민국이 만일 그런 국가 운명이 걸린 순간을 맞이했을 때,
항복했지만 그 동안 동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겨눌 가능성 있는 예리한 창을,
상대방의 선의 약속만 믿고서 그냥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지켜지겠습니까?
영국은 강력하게 선포한 겁니다.
이 전쟁은 끝까지 간다, 이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만 끝나야 한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 당시 약 20년을 투쟁하면서 끝내는 승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영국입니다.
신대륙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과 영연방인 캐나다가 있고 호주 역시 준대륙급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에 강하게 요청한 겁니다.
항복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믿고 지원해달라.
물론 당시 공격당해 희생된 프랑스 해군 장병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런던에 망명했던 드골 임시정부 역시 기분 좋지 않았겠지만 그 사안으로 영국과 적이 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정리하죠.
1번 사안, 2번 사안 모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의 가치 판단이 유일하고 올바른 시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그 국가의 독자적 판단과 주권 행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냉정한 완벽한 제3자 관찰자 시점 역시 본의 아닌 편견일 수 있는 겁니다.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했던 전함 2척 인도 거부 과정 및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정리.
오스만 전함 2척 영국해군에 징발 제안, 1914년 7월 28일 (발칸에서 1차대전 방아쇠 당겨진 후군요. 아직 영-독 선전포고 없는.)
-------------------------->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징발할 것을 각의에 제의, 전쟁 확전 대응 차원.
--------------------------> 그러자 오스만은 2척 전함을 매각하겠다면서 독일 정부에 의사 타진. 즉 아직 영-독 모두 1차대전 적성국 아님.
--------------------------> 그 때 독일은 그 2척의 전함을 사줄테니, 동맹을 맺자고 요구
--------------------------> 1914년 8월 2일, 영국 각의는 오스만 전함 2척 징발.
--------------------------> 그러자 독일은 오스만에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줄테니 사용하라며 미끼 던짐.
--------------------------> 독일이 러시아 선전포고한 직후인 1914년 8월 3일, 오스만은 공식적으로 중립 선언. 아직까지는 냉철히 대처.
--------------------------> 독일이 오스만에 인도하겠다는 2척 전함은 당시 독일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지중해에 있었던.
--------------------------> 그 2척의 독일함은 러시아 깃발로 위장하고 알제리의 프랑스 해안 요새 포격, 프-러 사이 분열시키기 위한 위장 공격
--------------------------> 알제리 해안 위장 포격 후 이동 중 영국 전함과 만났지만, 아직 선전포고 없었기에 전투 없이 서로 무사 통과.
--------------------------> 위장 포격 확인 후 영국은 즉시 독일에 선전포고, 그 2척의 독일 전함 추격.
--------------------------> 영국은 그 2척이 오스만에 인도되는 것 몰랐고, 독일이 지브롤타 해협 밖으로 탈출한다고 판단 그 쪽으로 추격.
--------------------------> 결국 그 2척이 동쪽 오스만으로 갔다는 것 알고 6일간 추격전.
--------------------------> 1914년 8월 10일 독일 전함 2척은 오스만의 다다넬스 해협 진입, 거기서 추격하던 영국해군은 오스만에 저지당함.
--------------------------> 그 시점 직전 까지 오스만은 중립이었지만, 그 때 오스만은 영국해군의 해협통과를 봉쇄하며 중립 깨질 조짐.
--------------------------> 1914년 8월 16일, 콘스탄티노플 도착한 2척 전함은 이름을 술탄 셀림, 미달리로 바꿈.
--------------------------> 독일이 제공한 2척은 공식적으론 오스만 선적, 하지만 독일 함장과 승무원이 탑승한 독일 함정으로 전쟁 수행.
-------------------------->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한 함정의 가격은 당시 가격 600만 파운드.
--------------------------> 영국은 종전 때 까지 매일 1,000달러씩 지연 이자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오스만은 거부
--------------------------> 1914년 10월 27일, 독일 전함 2척 앞세워 오스만은 흑해 오데사-세바스토폴-얄타 등 러시아 항구 기습
--------------------------> 1914년 11월 1일, 그 때문에 러시아는 오스만에 선전포고.
--------------------------> 러시아의 대오스만 선전포고로 오스만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 봉쇄
--------------------------> 당시 대영국 중립 상태였던 오스만이 영국해군의 항행자유를 거부 해협봉쇄에 나서자 영국 해군 갈리폴리 포격 경고
--------------------------> 1914년 11월 11일, 오스만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대해 지하드 선포.
저 과정을 살펴본다면, 관련국들의 오해와 우연적 요소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영국은 아직 세계대전 아닌 발칸에서의 전쟁 발발로, 혹시 모를 확전 대비 차원에서 징발령.
2. 오스만은 그렇게 징발될 바엔 그냥 다른 나라에 매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독일에게 구입 요청.
-----------------------------> 즉 저 때 까지도 아직 영국-독일이 전쟁 위기라는 것 모른 오스만은 영국이 독일에게 판매할 수도 있다고 판단.
3. 오스만의 저런 상황 판단과 달리 영독은 전쟁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에, 독일측은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주겠다면서 오스만 회유.
아틀라스, 1차 세계대전 8편 - 처칠이 자초한 오스만 수렁
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0
제목 보면 알겠지만 영국 처칠에 대해 우호적 시각은 전혀 없습니다.
내용 중에는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관련 정확한 시점들이 나열되면서 소개됩니다.
내용을 보니 영어 위키 등 사진 제목 한글로 해서 첨부되기도. 이 한글 기사의 바탕이 된 해외 원본 자료 아직 못찾았습니다.
나름 영어로 검색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해군 역사 및 1차대전 때
오스만 전함들 원본 자료는 많았지만, 아직 저렇게 상세하게 날짜 별로 언급된 전함 인도 거부 및 오스만 참전 과정 원본 자료를 못 찾았습니다.
공고급 순양전함 건조와 인도 시기는 영어로 검색한 자료 참조했습니다.
공고급 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비교하면, 영국의 의도적 사기성 계약 파기 아니라는 근거 정도는 될 것.
오스만 전함 2척 관련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영국과 독일은 나름 냉정하게 판단한 겁니다.
오스만은 당시 국제정세를 오판? 했고, 독일측 회유 미끼에 걸려들었던 척?.
물론 영국도 전함 2척 징발로 오스만이 독일의 미끼를 물도록 재촉한 부분 있지만,
영국-오스만 관계에서 영국이 관련된 그리스 독립, 이집트 상실, 아랍봉기 등을 고려했을 때 오스만이 중립지키기는 사실상 불가능.
사실 이미 당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스만에 주둔하며 오스만군 훈련 및 보스포러스 해협 요새 건설도 지원.
오스만은 아마도 독일의 힘을 이용해 중동에서 오스만을 궁지로 몰아넣던 영국 위협을 제거하려 했을 수도 있기에 독일이 내민 미끼를
문 오판이라고 보기도 힘든.
영국이 전함 2척 이득 챙기려다 중립국을 적국으로 만들었다는 판단은 극단적으로 피상적인 겁니다.
전함 2척 인도 거부당한 분노 때문에 독일의 동맹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주장 역시 지극히 피상적인 겁니다.
영국은 발칸반도의 전쟁이 어떻게 확대될지 몰라 최악을 고려했던 것이고, 오스만 역시 기회를 잡아 자국 국가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
--------------------------------------> 오스만 전함 관련 영국의 최악은,
--------------------------------------> 오스만에 전함을 인도한 이후 + 오스만이 독일의 동맹이 되는 것
디에프 상륙 42년 8월, 어리석은 실패 자체?
1942년 8월 당시 지중해-북아프리카 및 독소전 상황을 살펴본다면,
추축국이 깃발 날리면서 진군하던 시절입니다. 영국은 지중해-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쥐어터지고 있었고, 41년 겨울 모스크바 코 앞에서 후퇴했던 독일군은 42년 하계 공세로 소련군 두들겨 패고 있었던.
저런 시기에 디에프 상륙, 정말 독일을 패배시키기 위한 대륙 침공 작전이었겠습니까?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 붕괴 위험 속에서도,
독일을 패배시킬 최종 북서유럽 침공을 위한 독일 해안 방어선 테스트라고 판단해야.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해도 전쟁 자체를 잃지는 않고 단지 자존심만 뭉개지는 정도. 이집트 잃는다고 항복하겠습니까?)
(인도를 잃는다고 해도 항복과는 거리가 먼. 대륙 크기의 캐나다와 호주가 버티고 있고 영어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이 있기에 그냥 자존심만 무너지는 정도.)
디에프 상륙, 독일 방어선 테스트. 왜 캐나다 군을 동원했겠습니까?
캐나다는 국민 구성상 영 + 프 연합 상태였고,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본토 수복에 가장 적합한 연합국.
캐나다군은 노르망디 상륙에서 상당한 역활을 했습니다. 병력 수만 적었지 맡았던 역활은 지극 중대했습니다.
영국은 나폴레옹-프랑스, 1차-2차대전독일과는 완전히 다른 전략적 이점을 가졌습니다.
전투에서 100전 99패 당해도, 전쟁에 진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는 유리함.
영국의 적들은 100전 99승 단 1패만 하는 위대한 승률을 기록해도, 그 1패 성격에 따라 전쟁에서 질 수 있는 위태로움.
워털루에서 웰링턴이 패배한다고 영국은 패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존심 한 번 더 뭉개진 정도고 다음 번 침공 준비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의 최종 승리한다는 아무런 보장 없었고, 워털루의 패배로 결국 종말.
2차대전에서 영국이 버티면 결국 독일의 최종 운명은 패배입니다.
영국은 패배가 사실상 불가능한 입장, 독일의 최선은 최대한 오래 버티다 패전.
북미 대륙 전체인 미국-캐나다 및 준대륙급인 호주를 배경으로 한 영국을 패배시킬 수단이 없는 독일.
디에프-도데카니사-마켓가든-갈리폴리,
국가 운명이 걸린 치명적 삽질 아닌, 하부 전투 전술 차원의 삽질.
그나마 다른 국가들과 비교한다면 전쟁의 패배나 전선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 삽질.
특히 갈리폴리는 규모 면에서 영국 기준으로 엄청난 삽질이었지만, 그런 삽질에도 불구하고 중동에서 오스만은 항복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삽질,
국민방위군 삽질과 비교해보길. 규모 면에서 안드로메다급 격차 확인할 것.
1951년 초 한겨울, 중공군 공세 때
보충역으로 징집된 국민방위군 병력 약 50만 중 추정 약 10만 병력이,
상상초월하는 전시 대규모 국방비리로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한겨울 후퇴 행군 도중,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영국군 최대 패배급 전투 중 하나인 마켓가든.
총 인명 피해, 영국 + 미국 + 폴란드, 총 전사 + 행불 + 포로 = 약 1만8천
특히 전사는 극도로 제한된, 영 공수부대 전사 약 1천1백 + 영 30군단 전사 약 5천5백.
영국군 인명 피해 최대는 공수부대 포로 약 6천.
사상 최대급 전투 패배를 저렇게 당하기도 쉽지 않은 겁니다.
마켓가든 패배했었어도 딱 거기서 전선이 멈추는 정도, 전선 붕괴나 전쟁 패배로 이어지지 않은.
참여한 모든 전쟁에서,
삽질 없이 + 언제나 깔끔하게 승리만 하는 국가 군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삽질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면, 벌어지더라도 부작용 최소화 교양 있는 삽질이 되어야.
처칠을 입닥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갈리폴리' ㅋㅋㅋㅋㅋㅋ
불쌍한 호주군. .
저렇게 뱃길이 모두 봉쇄되어 있으니 러시아가 광활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팽창에 몸부림치는 것 같습니다.
시험이 중요하다는건 잘 알았는데 시험 난이도가 어려울거라는걸 생각을 못한...
미스터 갈리폴리 ㅜㅜ 2차대전으로 설욕..
뭘 설욕해..?
사실상 영국은 패전국이지.
있던 식민지 다 잃고 국력 꼬꾸라지고 대신 미국이 그 자리늘 차지하는데.
전화에서 못 쓴 댓글 : 아니 전쟁이야기에 라스푸틴에 나오다니 ㅜㅜㅜㅜ
Chill chill 하지 못한 처칠이야기
칠칠한 넘 + 칠칠하지 못한 넘,
단어 자체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져야 하지만, 일상에선 둘 다 부정적 늬앙스.
좀 더 확실하게 비교하자먼, 일상의 언어는 흐리멍텅한 측면이 매우 강합니다, 논리적으로 치밀한 수학과 달리.
수학에서는 결코 겹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모든 정수는 이 3개의 카테고리 중 하나로 결코 겹치지 않습니다.
--------------------------------------------------------------> 모든 정수는, 0 이거나 + 0 보다 크거나 + 0 보다 작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에서는 겹침이 발생하며 + 심할 경우엔 모두가 동일한 의미가 되는 황당함
예를 들면,
개 + 개같은 + 개 보다 더한 + 개 보다 못한 + 개만도 못한 ...
----------------------------------------------------------------> 어떤 표현을 골라 잡아도, 그 의미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마찬가지로,
칠칠한 넘 + 칠칠하지 못한 넘, 표현 보다는 조금 더 우아? 예리? 하게 처칠 이름 살짝 변형한 삽칠을 추천합니다. 전에 어디서 보고 참신하다 느꼈던 표현.
chill 자 돌림자로 처칠-삽칠, 의미 전달의 명확성 측면에서 칠칠한-칠칠하지못한 흐리멍텅함 없는.
그렇다면 정말 처칠은 삽칠이기만 했을까요?
처칠의 흑역사..
미스터 갈리폴리 ㅋㅋ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한테 갈리폴리 얘기 한마디 꺼내니까 처칠 바로 부들거리면서 멘탈 나간거 생각나네여
바로 극대노 ㅋㅋㅋ
갈리폴리~갈리갈리폴리~
어디서 감히!!!로 ㅂㄷㅂㄷ ㅋㅋㅋㅋㅋ
긁? ㅋㅋ
말그대로 발작버튼임ㅋㅋ
마치 저 지형을보니 강화도 지형이랑 비슷한거 같아요.
갈!!
크악
처칠과 말싸움할때 갈리폴리 한마디면 조용해진다는 일화가 생각나네
나타났다. 실패한 상륙작전. 미스터 갈리폴리
갈리폴리 전투 영국 🇬🇧 윈스턴 처칠 왜 무리수를 했을까😤🤔🤨?!
터키를 좃으로본거지
우리 무적영국군이 오면 다 꽁지빠지게 도망갈거라고
역사를 알면 알수록 세계 정치는 선악보다는 실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게 명확해지네요
마지막 한올까지...
아 궁금해ㅠㅠ
이슬람 제국의 마지막 불꽃
아타 튀르크...
갈리폴리 , 새만금 잼버리
40:53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이름 딱 나오는데 소름 쫙..
그렇게 20세기에 유럽에 털려서 오스만은 21세기에 제대로겐세이를...하고았구나
케말 파샤! 위대한 장군이자 애국자이며, 히틀러는 미친놈임을 한눈에 꿰뚫어 본 통찰력의 소유자!
오스만 1차대전 독일 쪽에 참전한 이유로, 영국의 오스만 전함 2척 인도 거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전함 2척 인도 거부만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1차대전 직전 일본에 인도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원래 브라질이 주문했었지만 브라질이 경제 위기로 포기했던 배를 오스만이 구입.
브라질이 포기하고 오스만이 새로 계약하는 시간 딜레이가 없이 브라질이나 오스만이 처음 계약자였다면 1차대전 직전에 인도되었을 가능성 무시할 수 없는.
1. 영국의 일본 공고급 순양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영국에서 1차대전 직전 건조되었습니다.
기공-1911년 1월, 진수-1912년 5월, 완공 후 일본에 인도-1913년 8월 -------------> 1914년 8월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1번함만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3척은 일본에서 영국 기술 지원하에 전부 완공되었습니다.
만일 나머지 3척도 영국에서 건조중에 1차대전 터졌다면 아마 일본 동의하에 일부는 영국해군용으로 전용되었을 수도.
영국이 브라질 주문받아 건조하던 브라질-전함
리우데자이네루, 1913년 브라질 디폴트 선언으로 인도 중지.
주인 없던 그 전함에 대해, 1914년 1월 오스만-영국-브라질 협의로 오스만과 계약.
오스만과 계약한 날짜와 영국이 인도 거부하고 오스만 승무원 퇴함시킨 날을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겁니다.
분명 계약 이후에도 건조 진행되었다고 나옵니다. 즉 시간이 좀 더 흘렀을 겁니다.
1차세계대전 발발은 1914년 7월입니다.
즉 오스만과 계약한 이후 국제 정세 급변하면서 오스만의 독일 동맹 가능성이 커진 상황 고려해야.
계약할 때 이미 전쟁 발발 가능성이 확고부동했다면 영국이 사기친 계약이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영국-독일-러시아 국왕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사촌간에 어린 시절 부터 왕래하고 교류했던 사이기도.
발칸반도 불안정성으로 강대국들이 동맹 관계로 얽혀 긴장이 커지곤 있었지만 세계대전 터질 것이라 1월에 예상???
사실 1차대전 발발 방아쇠 자체는 발칸 반도에서의 암살 사건 탓도 있었기에. 영국이 1월에 이미 전쟁 알면서도 사기쳤을지...
만일 이런 추론의 배경이 되는 사실 관계에 별 오류가 없다면, 영국은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직전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일 수도. 오스만은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을 수도.
만일 그 전함이 이미 완공되어 오스만과 계약하고 바로 인도될 상태였다면 오스만도 인도받았을 겁니다. 공고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아 브라질 디폴트 선언이 몇 달만 빨라 오스만과 계약과 인도 시점이 1913년 하반기였다면 공고 처럼 인도되었을 것.
2. 2차대전 프랑스 항복 직후 영국의 프랑스 함대 공격
영국측이 비시 정부에 요구한 것은 지극히 냉철한 겁니다.
얼마 전 까지 동맹이었지만 독일에 항복한 이상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 군사력에 보탬이 되어선 안된다는.
프랑스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세계대전 상황에서 영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항복 전, 프랑스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 이태리 함대
항복 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 함대 + 이태리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영국은 무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3가지 중 택하라고 요구했고, 마감시간 때 까지 답변 없자 바로 공격.
a. 함대를 영국으로 이동 대독 전쟁 계속 수행
b. 함대를 중립국으로 이동 무장 해제하고 철저한 중립
c. 함대를 자침시켜 독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
개인적으로 프랑스 주력함 다수가 비시 정부 명령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정도가 최선.
물론 프랑스 함대 거의 대부분은 탈출하지 않았고 항복한 정부에 복종했습니다. 드골 역시 비시 정부 입장에선 반역자.
이미 80년 세월이 흐른 뒤,
당사자도 아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완벽한 제3자 입장에선 뒤통수 때린 것일 수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길,
대한민국이 만일 그런 국가 운명이 걸린 순간을 맞이했을 때,
항복했지만 그 동안 동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겨눌 가능성 있는 예리한 창을,
상대방의 선의 약속만 믿고서 그냥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지켜지겠습니까?
영국은 강력하게 선포한 겁니다.
이 전쟁은 끝까지 간다, 이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만 끝나야 한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 당시 약 20년을 투쟁하면서 끝내는 승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영국입니다.
신대륙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과 영연방인 캐나다가 있고 호주 역시 준대륙급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에 강하게 요청한 겁니다.
항복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믿고 지원해달라.
물론 당시 공격당해 희생된 프랑스 해군 장병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런던에 망명했던 드골 임시정부 역시 기분 좋지 않았겠지만 그 사안으로 영국과 적이 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정리하죠.
1번 사안, 2번 사안 모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의 가치 판단이 유일하고 올바른 시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그 국가의 독자적 판단과 주권 행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냉정한 완벽한 제3자 관찰자 시점 역시 본의 아닌 편견일 수 있는 겁니다.
희대의 영웅 케말파샤가 등장합니다...ㅋㅋㅋ
영미권에서는 대차게 말아드신 프로젝트나 흑역사급 작전들을 일컬을때 많이쓰는 그전투 갈리폴리
심소령, 화장실 가셨을지도..,😅
떳다 ㅋㅋㅋㅋㅋ 내야동 ㅋㅋㅋㅋ
드디어 나의 영웅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
오스만군은 진인사대천명했으니 행운이 온거고 영프군은 동네북처럼 털려왔던 그 나라가 우스워보이니 적군도 허접이겠지 하며 방심해서 뼈아픈 대가를 치뤘다.
지형적 불리함을 감내하고도 갈리폴리로 상륙한것도 따지고보면 기뢰 맞고도 정신 못차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인천상륙작전도 좋은 지형은 아니었으나 사전에 준비를 잘했으니 성공한거였지 갈리폴리처럼 북한군을 옐로우몽키로 보고 막무가내로 밀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스만 1차대전 독일 쪽에 참전한 이유로, 영국의 오스만 전함 2척 인도 거부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전함 2척 인도 거부만으로 내릴 수는 없을 겁니다.
1차대전 직전 일본에 인도된 공고급 순양전함과 원래 브라질이 주문했었지만 브라질이 경제 위기로 포기했던 배를 오스만이 구입.
브라질이 포기하고 오스만이 새로 계약하는 시간 지연 없이 브라질이나 오스만이 처음 계약자였다면 1차대전 직전에 인도되었을 가능성 무시할 수 없는.
1. 영국의 일본 공고급 순양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일본의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영국에서 1차대전 직전 건조되었습니다.
기공-1911년 1월, 진수-1912년 5월, 완공 후 일본에 인도-1913년 8월 -------------> 1914년 8월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1번함만 영국에서 건조되었고, 나머지 3척은 일본에서 영국 기술 지원하에 전부 완공되었습니다.
만일 나머지 3척도 영국에서 건조중에 1차대전 터졌다면 아마 일본 동의하에 일부는 영국해군용으로 전용되었을 수도.
영국이 브라질 주문받아 건조하던 브라질-전함
리우데자이네루, 1913년 브라질 디폴트 선언으로 인도 중지.
주인 없던 그 전함에 대해, 1914년 1월 오스만-영국-브라질 협의로 오스만과 계약.
오스만과 계약한 날짜와 영국이 인도 거부하고 오스만 승무원 퇴함시킨 날을 확인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겁니다.
분명 계약 이후에도 건조 진행되었다고 나옵니다. 즉 시간이 좀 더 흘렀을 겁니다.
1차세계대전 발발은 1914년 7월입니다.
즉 오스만과 계약한 이후 국제 정세 급변하면서 오스만의 독일 동맹 가능성이 커진 상황 고려해야.
계약할 때 이미 전쟁 발발 가능성이 확고부동했다면 영국이 사기친 계약이겠죠.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영국-독일-러시아 국왕들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사촌간에 어린 시절 부터 왕래하고 교류했던 사이기도.
발칸반도 불안정성으로 강대국들이 동맹 관계로 얽혀 긴장이 커지곤 있었지만 세계대전 터질 것이라 1월에 예상???
사실 1차대전 발발 방아쇠 자체는 발칸 반도에서의 암살 사건 탓도 있었기에. 영국이 1월에 이미 전쟁 알면서도 사기쳤을지...
만일 이런 추론의 배경이 되는 사실 관계에 별 오류가 없다면, 영국은 파렴치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 직전 상황에서 모든 국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일 수도. 오스만은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을 수도.
만일 그 전함이 이미 완공되어 오스만과 계약하고 바로 인도될 상태였다면 오스만도 인도받았을 겁니다. 공고와 마찬가지로.
운이 좋아 브라질 디폴트 선언이 몇 달만 빨라 오스만과 계약과 인도 시점이 1913년 하반기였다면 공고 처럼 인도되었을 것.
2. 2차대전 프랑스 항복 직후 영국의 프랑스 함대 공격
영국측이 비시 정부에 요구한 것은 지극히 냉철한 겁니다.
얼마 전 까지 동맹이었지만 독일에 항복한 이상 강력한 프랑스 함대가 독일 군사력에 보탬이 되어선 안된다는.
프랑스가 기분이 좋건 나쁘건 세계대전 상황에서 영국의 국가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항복 전, 프랑스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 이태리 함대
항복 후 멍 때리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 함대 + 이태리 함대 >>> 영국 지중해 함대
영국은 무리했지만 어쩔 수 없이 3가지 중 택하라고 요구했고, 마감시간 때 까지 답변 없자 바로 공격.
a. 함대를 영국으로 이동 대독 전쟁 계속 수행
b. 함대를 중립국으로 이동 무장 해제하고 철저한 중립
c. 함대를 자침시켜 독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
개인적으로 프랑스 주력함 다수가 비시 정부 명령 따르지 않고 개별적으로 영국으로 탈출하는 정도가 최선.
물론 프랑스 함대 거의 대부분은 탈출하지 않았고 항복한 정부에 복종했습니다. 드골 역시 비시 정부 입장에선 반역자.
이미 80년 세월이 흐른 뒤,
당사자도 아닌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완벽한 제3자 입장에선 뒤통수 때린 것일 수도.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길,
대한민국이 만일 그런 국가 운명이 걸린 순간을 맞이했을 때,
항복했지만 그 동안 동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겨눌 가능성 있는 예리한 창을,
상대방의 선의 약속만 믿고서 그냥 방치한다면 대한민국 국가 안보가 과연 제대로 지켜지겠습니까?
영국은 강력하게 선포한 겁니다.
이 전쟁은 끝까지 간다, 이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만 끝나야 한다.
이미 나폴레옹 전쟁 당시 약 20년을 투쟁하면서 끝내는 승리를 했던 경험이 있는 영국입니다.
신대륙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강력한 미국과 영연방인 캐나다가 있고 호주 역시 준대륙급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에 강하게 요청한 겁니다.
항복한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투쟁하고 있으니 믿고 지원해달라.
물론 당시 공격당해 희생된 프랑스 해군 장병들과 프랑스 국민들의 배신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런던에 망명했던 드골 임시정부 역시 기분 좋지 않았겠지만 그 사안으로 영국과 적이 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정리하죠.
1번 사안, 2번 사안 모두에서 완벽한 관찰자 시점의 가치 판단이 유일하고 올바른 시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일에 대해,
그 국가의 독자적 판단과 주권 행사에 대해,
극단적으로 냉정한 완벽한 제3자 관찰자 시점 역시 본의 아닌 편견일 수 있는 겁니다.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했던 전함 2척 인도 거부 과정 및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정리.
오스만 전함 2척 영국해군에 징발 제안, 1914년 7월 28일 (발칸에서 1차대전 방아쇠 당겨진 후군요. 아직 영-독 선전포고 없는.)
-------------------------->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징발할 것을 각의에 제의, 전쟁 확전 대응 차원.
--------------------------> 그러자 오스만은 2척 전함을 매각하겠다면서 독일 정부에 의사 타진. 즉 아직 영-독 모두 1차대전 적성국 아님.
--------------------------> 그 때 독일은 그 2척의 전함을 사줄테니, 동맹을 맺자고 요구
--------------------------> 1914년 8월 2일, 영국 각의는 오스만 전함 2척 징발.
--------------------------> 그러자 독일은 오스만에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줄테니 사용하라며 미끼 던짐.
--------------------------> 독일이 러시아 선전포고한 직후인 1914년 8월 3일, 오스만은 공식적으로 중립 선언. 아직까지는 냉철히 대처.
--------------------------> 독일이 오스만에 인도하겠다는 2척 전함은 당시 독일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지중해에 있었던.
--------------------------> 그 2척의 독일함은 러시아 깃발로 위장하고 알제리의 프랑스 해안 요새 포격, 프-러 사이 분열시키기 위한 위장 공격
--------------------------> 알제리 해안 위장 포격 후 이동 중 영국 전함과 만났지만, 아직 선전포고 없었기에 전투 없이 서로 무사 통과.
--------------------------> 위장 포격 확인 후 영국은 즉시 독일에 선전포고, 그 2척의 독일 전함 추격.
--------------------------> 영국은 그 2척이 오스만에 인도되는 것 몰랐고, 독일이 지브롤타 해협 밖으로 탈출한다고 판단 그 쪽으로 추격.
--------------------------> 결국 그 2척이 동쪽 오스만으로 갔다는 것 알고 6일간 추격전.
--------------------------> 1914년 8월 10일 독일 전함 2척은 오스만의 다다넬스 해협 진입, 거기서 추격하던 영국해군은 오스만에 저지당함.
--------------------------> 그 시점 직전 까지 오스만은 중립이었지만, 그 때 오스만은 영국해군의 해협통과를 봉쇄하며 중립 깨질 조짐.
--------------------------> 1914년 8월 16일, 콘스탄티노플 도착한 2척 전함은 이름을 술탄 셀림, 미달리로 바꿈.
--------------------------> 독일이 제공한 2척은 공식적으론 오스만 선적, 하지만 독일 함장과 승무원이 탑승한 독일 함정으로 전쟁 수행.
--------------------------> 오스만이 영국에 주문한 함정의 가격은 당시 가격 600만 파운드.
--------------------------> 영국은 종전 때 까지 매일 1,000달러씩 지연 이자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오스만은 거부
--------------------------> 1914년 10월 27일, 독일 전함 2척 앞세워 오스만은 흑해 오데사-세바스토폴-얄타 등 러시아 항구 기습
--------------------------> 1914년 11월 1일, 그 때문에 러시아는 오스만에 선전포고.
--------------------------> 러시아의 대오스만 선전포고로 오스만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넬스 해협 봉쇄
--------------------------> 당시 대영국 중립 상태였던 오스만이 영국해군의 항행자유를 거부 해협봉쇄에 나서자 영국 해군 갈리폴리 포격 경고
--------------------------> 1914년 11월 11일, 오스만이 영국-프랑스-러시아에 대해 지하드 선포.
저 과정을 살펴본다면, 관련국들의 오해와 우연적 요소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영국은 아직 세계대전 아닌 발칸에서의 전쟁 발발로, 혹시 모를 확전 대비 차원에서 징발령.
2. 오스만은 그렇게 징발될 바엔 그냥 다른 나라에 매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독일에게 구입 요청.
-----------------------------> 즉 저 때 까지도 아직 영국-독일이 전쟁 위기라는 것 모른 오스만은 영국이 독일에게 판매할 수도 있다고 판단.
3. 오스만의 저런 상황 판단과 달리 영독은 전쟁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에, 독일측은 독일 전함 2척을 대신 주겠다면서 오스만 회유.
아틀라스, 1차 세계대전 8편 - 처칠이 자초한 오스만 수렁
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20
제목 보면 알겠지만 영국 처칠에 대해 우호적 시각은 전혀 없습니다.
내용 중에는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관련 정확한 시점들이 나열되면서 소개됩니다.
내용을 보니 영어 위키 등 사진 제목 한글로 해서 첨부되기도. 이 한글 기사의 바탕이 된 해외 원본 자료 아직 못찾았습니다.
나름 영어로 검색했는데 오스만 제국의 해군 역사 및 1차대전 때
오스만 전함들 원본 자료는 많았지만, 아직 저렇게 상세하게 날짜 별로 언급된 전함 인도 거부 및 오스만 참전 과정 원본 자료를 못 찾았습니다.
공고급 순양전함 건조와 인도 시기는 영어로 검색한 자료 참조했습니다.
공고급 전함 인도와 오스만 전함 인도 거부 비교하면, 영국의 의도적 사기성 계약 파기 아니라는 근거 정도는 될 것.
오스만 전함 2척 관련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영국과 독일은 나름 냉정하게 판단한 겁니다.
오스만은 당시 국제정세를 오판? 했고, 독일측 회유 미끼에 걸려들었던 척?.
물론 영국도 전함 2척 징발로 오스만이 독일의 미끼를 물도록 재촉한 부분 있지만,
영국-오스만 관계에서 영국이 관련된 그리스 독립, 이집트 상실, 아랍봉기 등을 고려했을 때 오스만이 중립지키기는 사실상 불가능.
사실 이미 당시 독일 군사고문단이 오스만에 주둔하며 오스만군 훈련 및 보스포러스 해협 요새 건설도 지원.
오스만은 아마도 독일의 힘을 이용해 중동에서 오스만을 궁지로 몰아넣던 영국 위협을 제거하려 했을 수도 있기에 독일이 내민 미끼를
문 오판이라고 보기도 힘든.
영국이 전함 2척 이득 챙기려다 중립국을 적국으로 만들었다는 판단은 극단적으로 피상적인 겁니다.
전함 2척 인도 거부당한 분노 때문에 독일의 동맹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주장 역시 지극히 피상적인 겁니다.
영국은 발칸반도의 전쟁이 어떻게 확대될지 몰라 최악을 고려했던 것이고, 오스만 역시 기회를 잡아 자국 국가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
--------------------------------------> 오스만 전함 관련 영국의 최악은,
--------------------------------------> 오스만에 전함을 인도한 이후 + 오스만이 독일의 동맹이 되는 것
갈리폴리 영국이 패하고 거기서 철수했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소수의 영국 파견군에게 중동 각지에서 패배하고 최종 항복.
저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 반투르크 아랍반군 봉기를 유도하면서 소수의 영국군 투입으로 승리.
저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 현 아랍 왕국들이 오스만투르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팔레스타인-시리아-이라크 등은 위임통치령으로
바뀌면서 오스만투르크는 현 터키 영토로 쪼그라 든 것. 2차대전 후에 위임통치령에서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독립.
특히 쿠웨이트는 유전 밀집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석유 이권 통제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에서 떼어내 별도록 독립시킴.
1990년 걸프전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할 때, 애초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주였다면서 원래 자기 영토 찾겠다면서 침공.
영국은 삽질해도 어지간해선 전쟁에선 안집니다.
삽질했다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 보호령에서 자치령으로 바뀌고 독립된 국가로 나아간 계기.
갈리폴리 상륙지에서 해마다 열리는 기념 행사, 영-호-뉴-터 4개국 공동 행사로 열리며 호주와 뉴질랜드 독립의 상징.
다른 국가들이었다면 갈리폴리급 대규모 삽질했다면 분명 중동에서 완전 축출되었을 것.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갈리폴리 전투를 지휘했던 오스만투르크의 장군이 바로 케말 파샤.
1차대전 패전 후 오스만투르크 왕정이 붕괴하고, 전쟁 영웅이었던 케말 파샤가 공화정 터키의 지도자가 됨.
케말 파샤는 1차대전 패전에서 서구화 방식의 근대화를 선택했고, 알파벳 사용과 이슬람의 정치 간섭을 철저히 배제.
그랬던 터키 공화국이 현 터키 대통령 취임과 함께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 이슬람화하는 터키를
다시 케말파샤의 공화정으로 되돌리려했던 쿠데타 시도가 터키 국민들의 개입으로 실패하기도.
오스만투르크의 1차대전 패전 트라우마로 인해,
2차대전 초중반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거듭된 동맹 요청에도 끝까지 거부하며 중립.
갈리폴리에서 영국을 막아냈지만 결국 소수의 영국군에게 중동 지역에서 패배해 제국이 해체된 충격 때문임.
그 깟 전함 2척 때문에 1차대전 독일에 줄섰다, 오스만투르크는 제국을 해체당했다면 좀 이상하죠.
즉 한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서 그 깟 전함 2척으로 결정이 되지는 않았을 것. 다른 더 결정적 요인들이 있는.
1차대전 직전 독일과 영국의 중동 아프리카 정책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독일의 3B 영국의 3C 정책. 독일의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 비잔티움이 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
영국에 대한 트라우마는 터키만이 아니라 스페인도 강했죠.
2차대전 초기 독일이 깃발 날릴 때, 지브롤타 점령을 위한 육상 통로를 내달라는 요청 끝까지 거부.
독일이 제 아무리 승리하고 잘 나가도,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독일과의 군사동맹과 침공로 통과 모두 거부.
이유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시기 트라팔가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한 충격.
스페인 프랑코 총통은 중립지킨 행운으로 전후에 전범으로 처리되지 않았고.
1차대전 미 지상군의 실전 경험은 사실 경미한 수준에 불과, 맥아더-패튼-트루먼 등 당시 투입된 모든 미군 장교들 실전 경험은 지극 짧았던.
1차대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 1917년에 했지만 + 대규모 징병과 훈련 등 대서양 건널 준비 과정이 필요했고 + 선발대는 1918년 초, 이후 축차로 대서양 건너 파병.
즉 투입된 미군이 본격 전투 참여 시작한 것은 독일 항복 전 몇 개월에 불과.
맥아더 1차대전 전 실전 경험 하기 힘들었고 + 1차대전 때 훈장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 전체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 미약했으며 + 전간기 때는 아예 실전 경험 없었음.
---------------------------------> 아버지 후광으로 필리핀에서 총독 비스무리 위세를 떨쳤던 것이 태평양 전쟁 직전 맥아더 상황.
---------------------------------> 막상 태평양 전쟁 발발하고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후 맥아더는 필리핀 탈출. 이 정도가 맥아더의 태평양전쟁 이전 전투 경력.
대한민국은 미국과 한국전쟁 특수 관계로 엮여서 냉철하게 맥아더를 보지 않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중공군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멍 때렸던 것은 치명적 + 명 때리다 중공군에 당한 다음에 핵폭???
-------------------------------> 게다가 중공군 개입은 예고 없이 갑자기 일어난 것 아니며,
-------------------------------> 지속적으로 특정 조건, 즉 유엔군이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할 경우 반드시 개입한다고 반복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그 어떤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공군에 사전 대비만 철저히 했다면 충분히 격퇴할,
-------------------------------> 군사적-경제적-과학기술 능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맥아더의 멍때림으로 치명적 후폭풍.
-------------------------------> 수학에서 유효숫자 개념, 이미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에서 오차 발생했다면 10째 100째 자리 정밀 계산은 할 필요도 없는 시간 낭비.
-------------------------------> 중공의 개입 협박을 깡그리 무시하고 멍때린 자가 + 중공군에게 충격받고 핵폭 운운하다가 + 군통수권자에게 해임당했던 것.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이 더 합리적.
1949년 즉 한국전 발발 1년 전, 소련 최초 원폭 실험 성공. 즉 미국의 핵독점 이미 깨진 현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만주 전체 + 북경-상해-남경 등 중국 핵심지역 점령 + 중국 해안선 사실상 거의 다 장악하고서도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 1949년 소련 핵무장 현실화 + 1949년 장개석이 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축출.
저런 조건에서 압록강 다리 다 부수고 + 중공군의 만주 보급기지 거점 서너 곳 폭격하면 승리 가능하겠습니까?
---------------------------------------------->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고작 1년 전 대륙 통일 완수하고 아직도 잔당 반군 소탕 와중에 한국전을 빌미로
----------------------------------------------> 미국과 장개석이 다시 대륙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차단 차원에서라고 판단해야 합리적.
----------------------------------------------> 즉 중공 입장에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미국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 방치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영국 미국은 원래 상륙 작전은 기본입니다. 또한 상륙작전 설계 및 실행 주체는 명백히 해군.
--------------------------------> 2차대전 북아프리카 횃불 상륙 + 시칠리 상륙 + 노르망디 상륙 + 남부 프랑스 엔빌 상륙, 1차대전 때 실패했지만 갈리폴리 등.
--------------------------------> 영국은 지난 수 백년, 지구 차원에서 전쟁 수행했는데 그 모두는 기본적으로 상륙을 전제. 2차대전 미영 연합국이 벌인 상륙 작전의 주도 세력은 미영 해군력.
--------------------------------> 미영의 지상군은 퍼날라지는 택배 배송품 수준의 수동적 역활이었으며,
실질적 상륙 작전 수행은 해군 + 압도적 공군의 엄호 한국전쟁 인천상륙 아닌 군산이건 어디건 일단 상륙만 하면 적에겐 치명타.
----------------------------------> 2차대전 노르망디 역시 반드시 거기여서 승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건 상륙만 성공하면 독일군은 패배할 조건.
----------------------------------> 압도적 제공권으로 독일의 방어선 정보를 사실상 모두 획득했기에 독일이 A에 방어 집중하면 A 지역 피해 다른 B,C 선택하면 그만.
----------------------------------> 롬멜전사록에서 롬멜 역시 그런 점 밝힌, 미영은 상륙 지점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 독일은 모든 해안선을 철저히 방어할 역량 없음을 인정.
----------------------------------> 따라서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 오로지 노르망디여서 성공했다고 착각해선 안되는.
즉 인천상륙 맥아더의 천재성으로 과감히 벌인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전쟁 역전했다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착각.
--------------------------------> 맥아더 아닌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 인천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상륙전 했었어도,
--------------------------------> 압도에 압도에 압도적인 해공군력으로 유엔군은 돌파구를 말들었다고 판단해야 합리적.
--------------------------------> 사실 냉정하게 본다면 인천상륙 없이 낙동강에서 북괴군을 돌파 섬멸했을 때 적의 타격이 더 컸을 수도 있습니다.
상륙작전은 애초 영국 미국과 같이 지구 차원에서 군사력 투사 적을 공격하는 세력이 취하는 것.
--------------------------------> 영불해협-지중해-대서양-북해를 건너야만 적을 공격할 수 있기에 필수적인 상륙.
--------------------------------> 한반도와 같은 좁아 터진 국지전에서 신규 상륙 병력 투입도 아닌 + 기존 투입된 병력 빼서 상륙??? 문제도 큰 겁니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 당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마 킴멜? 제독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책성 해임.
--------------------------------> 만일 니미츠가 선배여서 킴멜 제독 보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 임명되고 그 직후 진주만 기습 당했다면 니미츠도 문책 해임당했을 것.
--------------------------------> 킴멜 제독 가족과 후손들이 21세기 최근도 명예 회복시켜달라는 청원도.
( 킴멜은 41년 2월 진주만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 미 태평양함대는 원래 미 서부 해안에 위치, 하지만 루즈벨트 명령으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 )
( 일본 위협 대비한다면서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미 본토에서 진주만으로 전진 배치한 루즈벨트 + 지중해에서 영국의 타란토 기습 성공 및 영국측의 진주만 역시 타란토와 유사하기에 일본 위협에 철저 대비하란 경고 무시했던 루즈벨트 + 태평양함대 이전에 반대하던 제독을 해임하고 과거 루즈벨트가 해군성에 근무할 때 부관이었던 킴멜을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않히고선 진주만 기습당하자 해임 + 루즈벨트 자신의 멍 때림은 책임 안지고. )
---------------------------------> 맥아더 역시 필리핀에서 사실상 혼자 탈출한 책임을 물어,
---------------------------------> 진주만으로 해임된 태평양함대 사령관 처럼 해임시켰더라도 솔직히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위치.
---------------------------------> 필리핀 함락 당시 해임되어도 별 문제 없었던 맥아더가
---------------------------------> 미 해군이 사실상 주도한 태평양전쟁의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항복 받아낸 그 사실 자체가 보기에 따라선 넌센스.
---------------------------------> 냉정하게 본다면 태평양전쟁은 미 해군의 전쟁 + 태평양전쟁에서 미 지상군은 사실상 들러리 수준에 불과.
---------------------------------> 필리핀 상륙 따위는 하거나 말거나 태평양 전쟁 승패에 아무런 영향 없는, 보기에 따라선 미 육군과 맥아더 개인 위신 체면치레용 성격도.
---------------------------------> 필리핀 상륙은 미 육군 입장에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육군의 역활 존재감 과시용.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으로 검증받은 제대로 된 실전 성과 탁월함??? 의문입니다.
1차대전이전 + 1차대전 + 전간기 + 필리핀함락 + 태평양전쟁수행, 원수가 되어야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는.
----------------------------------> 그리고 맥아더 주연 패튼 조연 흑역사 잊지 말아야.
----------------------------------> 대공황 당시 생계 어려움을 겪던 1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그 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참전 보상금 지급 시위하자,
---------------------------------->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맥아더는 공산주의 시위라고 폄하하며 패튼 중령에게 무력 해산 지시.
----------------------------------> 1차대전 참전 동료들을 향해 맥아더와 패튼은 장갑차까지 동원하고 + 가족들도 함께 있던 시위대 텐트 불사르며 강경 진압 부상자 발생하기도.
현 그리스-튀르키에 해안 도서 살펴보길.
튀르키에 코 앞의 섬 거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 에게해 거의 전부는 그리스 차지.
---------------------------------------------> 19세기 영국의 그리스 독립 지원 +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서 서구의 공세 및 영국이 이집트 속국화하며
---------------------------------------------> 오스만은 북아프리카에서 사실상 퇴출 + 갈리폴리에서 패배 철수했지만 중동 다른 지역에 침투한 영국에게 오스만은 패배 결국 항복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리스는 에게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이 고대 그리스 문명권이었음을 내세우며 튀르키에 본토 상륙 꽤 넓은 영토 점령.
---------------------------------------------> 1차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왕정이 무너지고 케말 파샤 주도의 공화정이 성립하며 + 러시아-소련과 연합해 그리스와 투쟁 본토에서 그리스 축출
---------------------------------------------> 저런 과정 거치며 최종 종전 협정, 상징성 큰 이스탄불을 지켜내는 댓가로 에게해 연안 거의 거의 거의 모든 섬들을 포기.
---------------------------------------------> 그리스 자체 힘으로 에게해 도서들 그리스령으로 만든 것 아닌 + 사실상 영국이 배후에서 강력한 해군력으로 오스만을 바다에서 찍어 누른 결과
---------------------------------------------> 한국전쟁 정전협정 직전까지 서해 거의 모든 도서들을 점유했었지만, 정전협정과 함께 포기한 미-유엔-대한민국과 대비해보길.
---------------------------------------------> 1차대전 종전 후 그리스와 그리스를 지원한 영국은 해안 도서 점령 관해선 한국전쟁 정전 때 대한민국-미국과 달랐습니다.
---------------------------------------------> 2차대전 때도 1944년 그리스 상륙 + 공산 빨치산 토벌하며 그리스 공산화를 막아내고 + 유고 티토를 지원 탈소 중립 노선 걷도록
오스만의 1차대전 독일 동맹으로 참전 및 1차대전 이후 파멸 직전에 겨우 살아난 과정 살펴보길.
---------------------------------------------> 걸리폴리에서 승리했어도 오스만은 저렇게 되었습니다. 전투 승리와 전쟁의 승리는 다른 겁니다.
나폴레옹-프랑스 및 강력했던 1차-2차대전독일의 주특기.
---------------------------------------------> 수 많은 위대한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 전쟁에선 ( 특히 결정적 전쟁) 최종 패배
---------------------------------------------> 나폴레옹프랑스-1차2차대전독일, 100전 99승 하더라도 단 1패만으로도 전쟁을 잃을 잠재 위협에 노출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 수 많은 전투 패베에도 불구하고
----------------------------------------------> 결정적 전쟁 ( 아니 사실은 거의 거의 모든 전쟁 )에서 승리.
----------------------------------------------> 전투에서 100전 99패 당하더라도 단 1승만으로도 그 1승의 성격에 따라 전쟁의 최종 승리가 가능한 행운? 실력? 아니면 둘 다???
전투는 독일처럼 하는 것이 좋지만 + 전쟁은 절대로 독일처럼 해선 안되는
갈리폴리, 아무리 위대한 전투 승리라고 해도 + 전쟁의 패배를 막을 수 없었던 전형적 사례
----------------------------------------------> 거의 거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갈리폴리급 참사를 겪고서 전쟁에서 승리하긴 어렵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컵 같은 굿즈나 관련 도서를 구입하고 싶은데, 제작진분들 검토 부탁드립니다
hoi4 호주 중점 그 갈리폴리인가요?
갈리폴리 엿보기. 힌덴부르크 회고록. 루덴도르프 회고록. 호프만 회고록. 교보.
이름에서 이미 스포.ㅋㅋㅋㅋ
영화 갈리폴리 알비뇨의 아다지오 선율속 터키 기관총 참호로 돌격하기전 호주군 그걸 막으려 필사적으로 뛰는 전령 20대의 멜깁슨 그리고 실패와 절규 영화 1917은 이 영화의 마이너 아류작이라고 나는 감히 평함, 이영화 이 후 멜깁슨은 모든영화에 달리기 신을 연기하고 결국 그는 달리기 영화의 끝판왕 아포칼립토를 만듬
Mr. 갈리폴리 등장
나왔다 갈리폴리경
역시 미스터 갈리폴리 처칠... 군략은 진짜 무능함.
말싸움에선 어떻게든 이겨먹으려는 처칠이 유일하게 입다무는 사건...ㅋ
언변의 마술사 처칠을 아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의 단어 갈리폴리
저때부터엿을까 호주와 뉴질랜드의
영국군 불신의 시작이
심소령님. 다른분이 말하려는데 아는체하려고 먼저 말씀하시는 건가요?그 버릇은 고쳐주세요.
날로 들으면서 거참 깐깐하네
고치면 안되고 고치기 힘듬. 군인은 원래 뒤로 빼지 않고 나서야함. 더 나대고 하려고 하고 의욕을 보이고 맡은 임무는 뒤지더라도 수행을 하던지 판단을 하고 포기를 하던지. 직업병은 고친다고 고치는게 아님
너무 예민하신 거 같은데
도대체 이세환은 왜 웃는거죠?
류한수 교수는 전문성이 아주 떨어져 보임.
본인 보다는 전문성이 높아요 본인이 지금 누굴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합니까 ㅋㅋㅋㅋㅋ
멸망한 러시아의 상황이 지금의 대한민국하고 매우 닯았네요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는 무수한 라스푸틴이 있는 상황이죠
샤를..완전 밉상..양비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