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수양딸, 식모, 머슴, 매혈, 꼴꿀이죽 등의 말들이 많았던 시대입니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술집으로 머슴으로 가서 살았던 내동무들이 떠오르네요. 군대에 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군대에 가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시절이기에 어떤 잘난 사람들은 체험하지 않하고 나름의 이상적 정의를 말하고 있네요.
60년대 이태원 시절을 생각하며 잘 보고 갑니다. 밖에서 보는 이태원과 이태원 살던 사람들이 보고 느끼던 이태원은 참 달랐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인권 찾고 민주 찾으며 별소리 (배부른 소리?) 다하지만 당시에 하루벌어 하루를 살던 사람들은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노력을 하며 최선을 다한 사람들 입니다. 누가 귀하고 누가 천하다 하겠습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울 외할머니가 저때를 말씀해 주신적이 있는데 울 엄마 업고 피난길 가시던중에 같이? 피난길 가던 다른 가족들이 울 엄마 또래의 자기 자식을 이불에 꽁꽁 싸매고서는 (얼어죽지 말라고 였을까??) 가던 길가 옆쪽으로 앉혀놓고는 또 다른 이불로 아이 머리를 숨기듯이 이불을 덮고 그대로 아이는 두고 갔다고 하시더라고요.. 버린거죠.. 울 할머니도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지만 내 새끼들 (6명)거두기 바쁘셔서 어쩔수 없이 길을 나서셨지만 할머니께서 그러시더군요. 남인 나도 한평생 살면서 그 모습이 각인 되어 지워지지 않는데 그 아이 버린 부모는 죽을때까지도 맘편히 못 죽었을거라고요.. 저도 할머니께 그 얘기 들었을때 매우 충격이었지요.. 시대의 아픔이자 지금의 우리들은 너무나도 좋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또다시 감사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가 보상을 하고 그돈을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받아야죠 기지촌 근처에서 미군아이를 벤 한국여성들은 거의다 반강제적 생계 때문이었고 대부분 흑인미군에 의해 강1간당하거나 성매매,하룻밤관계로 태어난 흑인 혼혈아들이죠 박일준,인순이,하인스워드,벤헨더슨,강수일 전부 미군 아버지가 자녀와 부인을 버린 케이스입니다 찾으면 더 있을겁니다 참 미국 식민지도 아니고 단지 보호명목으로 우리나라에 주둔한건데 예체능 유명인들만 해도 저정도니 그냥 흑인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거의다 사생아라 봐도 무방할 정도죠 잘못한건 흑인ㅇㅐ비고 책임을 안진건 미국인데, 그당시는 말할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입니다 성공한 혼혈흑인들만 미디어에서 비추지, 대부분 기지촌 근처에 사는 비참한 흑인가정의 삶은 다루지않죠 우리사회에 어두운 민낯입니다, 요새 배드파더나 코피노는 거론하고 질타하면서 지금까지 이 미군 혼혈 가정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참으로 의아합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정부에 정식으로 배상을 요구하고 흑인양아치 아버지 끝까지 추적해서 법적 처벌을 받게 해야 합니다
최치선씨, 나는 그 옛날 서정리 국민 학교 43회 였던가? 동창 김 덕만이라고 하네 그때 나는 사거리 산 600번지에 살았네, 지금은 미국 Atlanta에 살고 있다네, 자네 얼굴에 옛날 모습이 남아 있군. 어린 시절 사거리에 살다 서정리 근처로 이사해서 살다 다시 신장리에서 살았지 군 제대하고 직작 생활을 시작하며 송탄을 떠나 천안에 살다가 약 20년전에 Atlata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살고 있다네, 고향을 지키며 이렇게 고향 홍보에 열심이니 수고가 많네 그리고 고맙네... CORONA로 어려운때에 건강에 유의하고, 잘 지내시게...
반갑다 친구야~!! 자네 댓글 보고 사거리 살던 창길이한테 얘기했더니 그 시절 과수원 풍경 등등 나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더군..나는 평택문화원 부설 평택학연구소에서 기록작업을 하고 있어. 이 영상은 그 작업의 일환으로 우리 동네, 우리 삶의 기록을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어서 제작했어. 아뭏든 반갑고 친구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시기를~^^
미군위안부 여러분 응원합니다. 오래사세요. 그리고 위안부여성 모자이크하지 마세요. 외국은 선진국, 후진국할것없이 이런경우 모자이크 안합니다. 한국유교문화는 체면, 겉치레에다 편견을 조장하는 매우 기분나쁜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 고치지 않으면 한국은 매력적이고 소프트파워가 강한 선진국 될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게앞 인도에 입간판과 원통형으로된 풍선들을 무질서하게 내놓았는데 이제는 이런 무질서한 입간판과 풍선 없에야합니다. 너무 무질서합니다.
I'm flattered that you used clips of my videos. However, please reference my RUclips channel. Clips=17:44 to 27:20 and 23:40 to 23:55. I don't monetize but I have many videos of ROK during my time there. 1980's to 1990. I was stationed in Shinhung-ri near Daecheon Beach in 1974-75. 내 비디오의 클립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제 유튜브 채널을 참고해주세요. 클립=17:44 ~ 27:20 및 23:40 ~ 23:55. 나는 수익을 창출하지 않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한국에 대한 많은 비디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1990년까지. 나는 1974-75년에 대천해수욕장 근처 신흥리에서 주둔했다.
반갑습니다. 귀하의 유튜브 채널에 있는 평택, 특히 송탄과 안정리 영상을 보았습니다. 1987~1989년 영상물 중 일부가 사용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사용을 허락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귀하의 영상물은 평택미군기지 관련 지역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생모님은 기지촌 여자셨다는 64년생으로 아는데 생월생시는 모르고요!내가 태어나서 4살(?)까지 살았던곳~ 3살때 트럼펫 4살땐 알토섹스폰 배웠던 그곳~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기억의 모퉁이에 한부분이라도 있기나 할려나!홍성역 플랫폼에 도착해서 what a wonderful world 불렀던 기억이! 생모가 이녀석 자기 위험을 알고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차장앞에서 부른다고!차장아저씨와 주변분들 박수쳐주시고 내가 가지고있던 카라멜 나줘주었던 기억이~ 택시안에서 엄마품안겨서 시골집에 도착후 몇 일간의 풍요로움과 나만한 애들과 놀았던!!!!!생모와 어떤 할머니와 심한 말다툼이 있었고 외국지폐 한뭉치 손에 쥐어주시면서 이돈이면 좋은 논 4마지기 반에서 5마지기 살수있다고!잘보관했다가 나이가 들면 잘사용하라고! 고등학교는 꼭 졸업하라고 가능하면 대학까진 졸업하라고 넌 똘똘하니까 꼭 살수있을꺼라고 아들딸낳코 잘살라고 하시고 젖한번 물려주시고 목매달고 자살한 생모! 무덤 옆에 있던 소나무가지가 자라서 무덤을 가릴거니 자른다고해서 내가 목매달았던 가지보고 기억하지 어떻케 기억을할수있겠냐고 그냥 자르지말라고 말했던 기억!생모데려갈려고 왔던 털이 달린 가죽코트를 입은 잘생긴 신사아저씨(저승차사)와 멋진 늑대개 2마리.아이 놓아두고 자살했다고 머리채잡고 죽인다고 야단하던 아저씨를 내가 발로차고 그냥 조용히 모시고가라고 말했던 기억이~할아버지(염라대왕)한테 혼날꺼라고 야단하시는 신사아저씨(저승차사). 아무말 못하시고 따라가시는 생모께 안녕히가시라고 인사드리니 왜 바보같이 돈빼앗겼냐고 무섭게 화내시던 모습! 산에서 내려와서 메뚜기잡아먹고 일벌잡아먹고 야밤에 잠자다가 납치(보쌈). 엄마 아빠 형 누나만나서 사랑받으며 살았었네요! 양아빠 양엄마가 실제 부모로 알고 살았고 몇년전에 두분 다 돌아가셨음.천국에 가셔서 행복하세요.🎉
혹시 이 기록물을 끝까지 보셨는지요. 저희 평택문화원은 지역의 역사 중 기지촌과 관련한 삶의 기록을 다양한 분들의 증언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정치나 이념의 해석을 배격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았습니다. 미군'위안부'란 용어는 1951년 부터 1980년대 까지 한국정부와 언론에서 다룬 공식명칭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급부상하면서 미군'위안부'란 용어 사용에 논란과 오해가 생겼습니다. 미군'위안부'와 일본군'위안부'는 당연히 다른 성격의 제도와 용어입니다. 따라서 요즘은 미군'위안부'를 '기지촌 여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희는 과거에 공식적으로 규정하고 표현됐던 용어를 차용한 것 뿐입니다. 본 영상에 관심 가져 주시고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치선-q8s 네 제의견은 저기 등장하시는 기지촌 일명 전 양공주 분들은 피해자가 아니고 자신들의 의지로 당시 어려운시기에 달러많이모이는 기지촌으로 스스로 들어가신분들이란 말씀입니다. 당시 대다수의 여성들은 우리어머니들처럼 기지촌에안가고 정상적으로 장사하고 결혼하고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시며 사셨습니다.
@@없다12 하던말 답변 못하고 다른화제로 돌리냐?? 친일파 새끼들....꼴깝들을 떠는구나.... 내용봐라 미성년자를 꼬득여서 데리고 간거는 당시 일본 현행법에도 어긋나는 범죄행위다... 열마리(10)새꺄... 이춘재 조두순 고유정이 같은 범죄자들도 본인들이 안그랬다고한다 범죄자의 주장을 믿는거냐? 니집안이 범죄자구나....
주한미군이 지역경제 발전에 미친 영향이 엄청났구나.....
보릿고개, 수양딸, 식모, 머슴, 매혈, 꼴꿀이죽 등의 말들이 많았던 시대입니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술집으로 머슴으로 가서 살았던 내동무들이 떠오르네요. 군대에 가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군대에 가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시절이기에 어떤 잘난 사람들은 체험하지 않하고 나름의 이상적 정의를 말하고 있네요.
평택과 추억 있으신 분들이 많네요
제고향 평택 팽성읍
부용국민학교
어디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생생한 기록이네요.
존경합니다!
평택문화원에서 제작했습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 존경합니다
저도 송탄 신장동이 고향이에요 20년 넘게 살다가 이제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데 영상으로 보니 너무 반갑네요. 영상 감사합니다.
미국을 욕할것이 아니고
이조시대를 잘못살아온 탓을 알고
한국국민이 강대해져서 남에게
도움받지 않고도 살수있는 길을
모색해야한다.
나라가 잘살아야 남의 나라에서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정신차려 자유민주주의로 강대국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이 더러운 놈들에 야망도 알아야 하고 일뷴 놈들. 소련놈들 어느나라도 우리가 올바로서야 함을 알아야합니다
이조시대? 그런 명칭을 가진 시대는 없습니다.
조선시대가 맞습니다.
이씨 조선시대를 옜날사람들은 그렇게 말햇어요.
@@민들레-b5f 이조시대라는 말을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서 쓴것이 아닙니다
일제에서 왜인들이 비하의 목적으로 쓴 단어이고,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퍼진겁니다
우린 혈맹국가입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준 미군에 감사드립니다
한미동맹강화하자
올소!!!!~~
!!!
60년대 이태원 시절을 생각하며 잘 보고 갑니다. 밖에서 보는 이태원과 이태원 살던 사람들이 보고 느끼던 이태원은 참 달랐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인권 찾고 민주 찾으며 별소리 (배부른 소리?) 다하지만 당시에 하루벌어 하루를 살던 사람들은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노력을 하며 최선을 다한 사람들 입니다. 누가 귀하고 누가 천하다 하겠습니까...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치선 선생님 아픈역사도 우리역사이기에 남겨야하는데 그 작업을 꾸준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송탄 지산동 출신이고 아버님이 송탄 K-55 지을때부터 근무 하셔서 돌아 가실때까지 33년 근무 하셨던 곳 입니다. 이제 옛일 이네요
저도 지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기만요...
벼보고 쌀나무라 그랬었고...
초가집 지붕위로 금방 이륙한 전투기 조종사 얼굴이 보였지요.ㅎ
지게, 소여물, 아궁이, 가마솥, 호롱불, 화로...
서울에서 자란 서울촌놈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동네입니다.
송북국민학교 동문일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훌륭한 영상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고향 송탄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김시덕 교수의 책을 읽다가 보게
됐습니다. 영상과 내용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려서 안정리 에 살았어 요 고향 이야기 한것 같아요 반가웠어요
아~그러셨군요. 반갑습니다.
아 ! 그리운 내 고향 .송탄 신장동 .복창동 너무나 변해서 못알아 보겠습니다...모두 건강하세요.
쑥고개 내고향!
현재 정문 앞 상권이 너무 어려워요.
지역경제가 속히 회복하기를!
우리아빠도 안정리에서 양복만드시며 엄마는 운동복만드면서 우릴 키우셨지... 지금도 안정리에서 그일을 하십니다
저도 안정리가 고향 입니다
나도 안정리서 직장다녔는데
지금은마니변했겠지.
@@선달이-g5p
저는 팽성요 ㅎ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울 외할머니가 저때를 말씀해 주신적이 있는데 울 엄마 업고 피난길 가시던중에 같이? 피난길 가던 다른 가족들이 울 엄마 또래의 자기 자식을 이불에 꽁꽁 싸매고서는 (얼어죽지 말라고 였을까??) 가던 길가 옆쪽으로 앉혀놓고는 또 다른 이불로 아이 머리를 숨기듯이 이불을 덮고 그대로 아이는 두고 갔다고 하시더라고요.. 버린거죠.. 울 할머니도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지만 내 새끼들 (6명)거두기 바쁘셔서 어쩔수 없이 길을 나서셨지만 할머니께서 그러시더군요. 남인 나도 한평생 살면서 그 모습이 각인 되어 지워지지 않는데 그 아이 버린 부모는 죽을때까지도 맘편히 못 죽었을거라고요.. 저도 할머니께 그 얘기 들었을때 매우 충격이었지요.. 시대의 아픔이자 지금의 우리들은 너무나도 좋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또다시 감사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감성적인 글 눈물이 나네요
그아이가 살아있는지 궁금하네여
증언에 의하면 피난길에 아이를 버리고 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 정부도 그녀들(소위 달러 벌이 양공주)에게 보상을 해 줘야 하는게 아닌가?
무슨보상 오히려 돈벌이하도록 묵인해줬을뿐이지 강제외화벌이 시켰냐 정부에 감사는 못할망정 무시기 보상같은소리하고 자빠졌더냐
정확히 말하면 정부가 보상을 하고 그돈을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받아야죠
기지촌 근처에서 미군아이를 벤 한국여성들은 거의다 반강제적 생계 때문이었고 대부분 흑인미군에 의해 강1간당하거나 성매매,하룻밤관계로 태어난 흑인 혼혈아들이죠
박일준,인순이,하인스워드,벤헨더슨,강수일 전부 미군 아버지가 자녀와 부인을 버린 케이스입니다 찾으면 더 있을겁니다 참 미국 식민지도 아니고 단지 보호명목으로 우리나라에 주둔한건데 예체능 유명인들만 해도 저정도니 그냥 흑인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거의다 사생아라 봐도 무방할 정도죠
잘못한건 흑인ㅇㅐ비고 책임을 안진건 미국인데, 그당시는 말할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입니다 성공한 혼혈흑인들만 미디어에서 비추지, 대부분 기지촌 근처에 사는 비참한 흑인가정의 삶은 다루지않죠
우리사회에 어두운 민낯입니다, 요새 배드파더나 코피노는 거론하고 질타하면서 지금까지 이 미군 혼혈 가정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참으로 의아합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정부에 정식으로 배상을 요구하고 흑인양아치 아버지 끝까지 추적해서 법적 처벌을 받게 해야 합니다
어릴때 안정리에 살았던 사람으로써 좋은 영상이네요.
안정리, 팽성, 당진, 군포, 음봉 ,계양
어릴때 저의 놀이터 동네였습니다.
매우 새롭습니다.....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군포가 아니라 혹시 둔포 아닐까요? 팽성 바로 옆동네 충남 아산시 둔포..
@@taewonkim124
마자요~~
둔포. 저는 팽성에살았지요
아는분 일수도~~
Thank you!🙏
자유 행복 ~~~~
5:19 송탄초등학교에서도 근무하셨던 이대성 선생님 아니십니까?
반갑네요👏👍
75 - 76 camp humphreys에서 근무하였는데 그때의 안정리부대 정문앞 모습이 여기에 남아 있네요..
최치선씨, 나는 그 옛날 서정리 국민 학교 43회 였던가?
동창 김 덕만이라고 하네 그때 나는 사거리 산 600번지에 살았네, 지금은 미국 Atlanta에 살고 있다네, 자네 얼굴에 옛날 모습이 남아 있군. 어린 시절 사거리에 살다 서정리 근처로 이사해서 살다 다시 신장리에서 살았지 군 제대하고 직작 생활을 시작하며 송탄을 떠나 천안에 살다가 약 20년전에 Atlata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살고 있다네, 고향을 지키며 이렇게 고향 홍보에 열심이니 수고가 많네 그리고 고맙네... CORONA로 어려운때에 건강에 유의하고, 잘 지내시게...
반갑다 친구야~!! 자네 댓글 보고 사거리 살던 창길이한테 얘기했더니 그 시절 과수원 풍경 등등 나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하더군..나는 평택문화원 부설 평택학연구소에서 기록작업을 하고 있어. 이 영상은 그 작업의 일환으로 우리 동네, 우리 삶의 기록을 이렇게라도 남기고 싶어서 제작했어. 아뭏든 반갑고 친구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시기를~^^
유튜브 채널이 있었네요 ㅎㅎ 구독하고갑니다!
반가워요 ~^^
그리운 평택 신장동 ...평택
그립다..송탄..지금은 군대에 있으니..
갈수가없네
내가 어려서 크던 동내다
치선은 나와 초등학교 친구인것같다 입모양이 어려서 그대로다
이곳에 오니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어 반갑다
@@최치선-q8s 나와 한반이었고 회장을 하였던 친구같은데 41회로 기억을 합니다황순호도 같은반이었고 지금은 서정리를 더난지가 오래되서 친구들 소식은 많이 모르고 삶니다 나는 작은교회 목사입니다
@@이대운-q2e 그래 맞아.. 미안해 친구야~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않아서.. ㅠㅠ
이렇게 여기서 만나게되다니 반갑다 친구야~ ^^
@@최치선-q8s 그래 친구란걸 알으니 반갑다 사진을 보니 입모양이 어렸을때 모습을 보게되었어 전교 회장을 하던 똑똑함은 여전하네
평택에 이런역사가있었다는것을
이영상을 보고 더많이알았습니다
그당시에 기지촌에서는 외화획득을
많이했네요
그시대에도 상업을하는 사장님들이
외화를벌고 가계운영을 꽤잘했네요
사람은 지금이나 그때나 열심히
노력하는사람이 살아남는다는게
절실한 영상이고 가난을딛고
여락한환경에서도 악착같이
살아준부들이 애국했네요
영상 잘보고갑니다
초딩시절...뽀빠이슈퍼, 엘간만두, 쌍용미용실, 신장동 시장 한가운데 자리 잡으셨던 호떡,식혜,묵 할머니...
안정리 제2의 고향인데 어릴때 추억이 다 있는곳 노성대 한태진 친구들 그리고 부용초등학교 근처 양옥집에 살던 이름도 잊은 소녀 청담중고 뒤에 수위아저씨네서 살았었는데 그립네
나도 부용국민학교 출신
한광여중.여고 졸업하고 지금은 뉴욕
너무 그립습니다
저도 팽섬읍 신궁리에서 자라면서 안정리 논길로 많이 다녔네요..
평택국민학교 출신 한광여중 여고 출신 지금은 하와이에 거주 합니다...
참 세상 좋아졌어요... 모두 건강하세요
눈물도 나네요... 그리운 고향 벌써 50을 바라보는 중년인생이 되었네요
@@hyonchongcho6499 저때 부용초등학교 교장님께서는 유난히 아침 연설이 기셔서 쓰러지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어제같은데 사십년이 흘렀네요 어른들이 마음은 십댄데 이러시던게 피부로 와닿네요
@@MiraKyung 가을이면 안정리 미군부대에서 아이들만 부대안으로 초청해서 카니발을 했었는데 너무 그립네요
평택에서 꼬꼬마때 홍성으로 내려와서 전혀 기억못하내요.넓은 신장로로 트럭에 딴 미군들이 동전던져 주던 기억이. 64년생으로만 기억을.이름도 확실하지않코요.찰리 또는 찰스로 불렸고요. 웃겼던건 대위였던 새끼가 저 군생활할때 부대장이었음.대위때도 양아치 짓거리했던 놈이 준장달고도 개양아치 짓거릴하는거보고 인성은 절대로 안변한다는걸 느꼈내요.
미군위안부 여러분 응원합니다. 오래사세요. 그리고 위안부여성 모자이크하지 마세요. 외국은 선진국, 후진국할것없이 이런경우 모자이크 안합니다. 한국유교문화는 체면, 겉치레에다 편견을 조장하는 매우 기분나쁜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 고치지 않으면 한국은 매력적이고 소프트파워가 강한 선진국 될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게앞 인도에 입간판과 원통형으로된 풍선들을 무질서하게 내놓았는데 이제는 이런 무질서한 입간판과 풍선 없에야합니다. 너무 무질서합니다.
왜 놈 - 야지 - 아베 - 백 선엽은 성우 회 초대 회장 을 지냈고,
강남 역 인근에 지하 5 층 · 지상 16 층 대형 빌딩을 소유했던 재산 가로,
평소 벤츠 S 클래스 차량을 이용했다.
평택미군부대에 인연으로 평택에 산지가 어언 20년이 다되가네요.
고마운 영상 잘 봤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겠죠^^?
1977~1980 평택 기지에서 카투사로
군생활 했는데 감회가 새롭네요
그 시절에 몰랐던 걸 이제 알게 된
사례들이 많구려
69 수송대에서 운전병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전우들은 어느곳에서 무얼
하는지 궁금하네요
안정리 핫테잉!!
반갑습니다 ~*
장리쌀 ㅡ봄에 영농자금 빌려서 가을추석후 이자랑 원금 갚는 50년전 시골대부분
부친이 미8군 802공병대에 근무하셔서 팽성면송화리에서 살았는데 매일 전투기와 중무장 헬기가 뜨고 내리는것을 보면서 자랐는데 안정리 부대 k6 앞에 가서 놀고 그랬는데 8군사령부가 옮겨가고 나서 많이 발전했내요 ,성동국,평중 ~가본지가 오래되었네요 🙆
반갑습니다. 기억과 추억이 가득한 평택이시군요^^
@@최치선-q8s방학때 마다 부친이
파견나가서 공사하던 현장에
따라가서 놀던 많은 추억 ~학교 운동장공사 , 그리고 천혜보육원 아직도 있는지 궁금하네요 !
@@e-um-land 천혜보육원은 비전동에서 송탄동으로 이전 했다가 지금은 요양원으로 전환했습니다.
평택 성동국민학교졸업후, 평택중 다닐때
안정리 쑥고개 출신 통학생들 많았어요
통복리에 살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67년도 떠나온후 50년 세월이 더 흘렀네요
평택사람들 인성좋고 심지가 깊습니다
보고싶은 친구들 다들 어디 사는지 ㅡ
@@이흥주-q6r 저와 동문이시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평택중21회입니다.
I'm flattered that you used clips of my videos. However, please reference my RUclips channel. Clips=17:44 to 27:20 and 23:40 to 23:55. I don't monetize but I have many videos of ROK during my time there. 1980's to 1990. I was stationed in Shinhung-ri near Daecheon Beach in 1974-75. 내 비디오의 클립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제 유튜브 채널을 참고해주세요. 클립=17:44 ~ 27:20 및 23:40 ~ 23:55. 나는 수익을 창출하지 않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 한국에 대한 많은 비디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1990년까지. 나는 1974-75년에 대천해수욕장 근처 신흥리에서 주둔했다.
반갑습니다. 귀하의 유튜브 채널에 있는 평택, 특히 송탄과 안정리 영상을 보았습니다. 1987~1989년 영상물 중 일부가 사용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사용을 허락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귀하의 영상물은 평택미군기지 관련 지역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 382 방공포 최치선이 십니까 미국에 친구 박용권 입니다^^
그때 미군과 계약결혼식으로 한달에 100불지불하였으며 월급날에는 1회당15불 평시에는 5불주었다고들었다 미군부대 종업원은 6.25북한포로출신들을 정부에서주선하여 많이 근무하는 것으로들었다.
저희 아버지 성함과 똑같으세요
흔한이름이 아니시죠! 전주최씨이세요
아~ 저는 경주입니다. 반갑습니다 ^^
70년대에 1인당 국민 소득이 200달러 일년에 12만원 정도 였는데 미국은 소득 2만달러가 넘었지. 1달러도 진짜 큰돈이였음. 포주집에 빚갚아주고 여자 데리고 나오는돈이 지금 돈이면 100만원.. 미군에게는 그리 큰돈 아니였지.
현재 변한 거리, 건물들. 모습도 영상을 올리면 어두웠던 과거들을 회상하지 않을꺼 같네요 일부 반발하는 분들께는. 아픈 상처일 수 가. 있을테니까ᆢ
네~참고하겠습니다. 말씀 주셔서 고맙습니다.
난 미군으로 98-2003년 까지 험프리스 기지에서 근무. 그 당시엔 한국 여자들은 없었고 거의 전부 러시아 그리고 필리핀 여자들 뿐이었죠. 지금은 어떤지요?
미군 아니었음 지금쯤 우리대한민국은 김정은 하에 짐승만도 못한 인권도 없이 가난에 찌들어 배급타먹고 목숨도 제대로 연명했을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여러분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왜 놈 - 야지 - 아베 - 백 선엽은 성우 회 초대 회장 을 지냈고,
강남 역 인근에 지하 5 층 · 지상 16 층 대형 빌딩을 소유했던 재산 가로,
평소 벤츠 S 클래스 차량을 이용했다.
@@giryongchung7886 대한민국을 북한괴뢰로부터 방어한 장군이 그정도는되야지..
@@giryongchung7886 연변놈
원본 10시간짜리는 어디가면 볼수있나요?
연구용이라 보실 수 없습니다. 관심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가 기브미 쵸코렛뜨 기브미!!!!!!!!! 하던곳인가요?
네.맞습니다...ㅎㅎㅎ
재밌네요 할머니 쿄쿄쿄
결국은 한국은 거지나라였다 이렇게 보임 나도 어릴때 연탄가스마셔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ㅠㅠ흐흑
잘봣습니다 정말 좋네요 근데 2017년 영상 맞죠?
네 맞습니다
나는 70년대초에 왜관 켐프케롤 미 543의무대에 병리실험사 카투사로 3년근무하였는데 그때 기지주변 위안부들이 약 200명이있었는데 매주 월 목
월.목요일 2틀간 설병검사를하고 주로 임질이 많았으며 페니실린 300만단위 두대씩치료하였으며 매독은 좀 더물었다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구나 어떻게 연락을 해야하는 모르 겠다
반갑다 친구야~ 메일보낼게^^
추억의 영천 나이트
기억난다 그립네 내고향인데
방공포 862포대 최치선 병장 반갑습니다.
도병장 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1970년대 송탄에서 같이 지냈던 군대시절이 가장 좋았던 시절였던거 같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도병장님. 45년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이렇게 소식을 접할 수 있다니.. 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치선-q8s
저는 한국에서 직장생활 퇴직후 2013년부터 LA에서 개인일을 하고있습니다.
방공포전우 중 일종계 사수 성재준, 수송부 이언우, 함덕주,교육계 홍봉기, PX 이선해 가끔 연락하고 지냅니다.
참고로 저의 email 주소는 bumjindo213@gmail.com 입니다.연락처를 알려주시면 금년 가을경 한국에갈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세월이 시냇물처럼 흘러갔는디 잠깐사이 45년이나 지났군요 앞으로 종종 만나고 연락하며 지냅시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도 병장 나 박용권졍장이야 반갑다
@@최치선-q8s 치선아 박용권이다 반갑다
예전엔 동두천
미군기지 였는데
평택으로 갔지
거긴 해군기지도
있고
신장 미스리 햄버거 주인 돈 무지 벌었네요
아직도 신장동 정문앞 밤에나가면
한 50대로 보이는 양공주 몇명 서성임ㄷㄷ
ㅠㅠㅠㅠ
서정리역 뒤편이 오산미군비행장
송탄역이에요~
치선이가 맞구나 나 용권이다 연락해줘 45년 만이구나 ㅎㅎㅎ
반갑다~친구야~ 메일보냈어 ^^
생모님은 기지촌 여자셨다는 64년생으로 아는데 생월생시는 모르고요!내가 태어나서 4살(?)까지 살았던곳~ 3살때 트럼펫 4살땐 알토섹스폰 배웠던 그곳~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기억의 모퉁이에 한부분이라도 있기나 할려나!홍성역 플랫폼에 도착해서 what a wonderful world 불렀던 기억이! 생모가 이녀석 자기 위험을 알고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차장앞에서 부른다고!차장아저씨와 주변분들 박수쳐주시고 내가 가지고있던 카라멜 나줘주었던 기억이~ 택시안에서 엄마품안겨서 시골집에 도착후 몇 일간의 풍요로움과 나만한 애들과 놀았던!!!!!생모와 어떤 할머니와 심한 말다툼이 있었고 외국지폐 한뭉치 손에 쥐어주시면서 이돈이면 좋은 논 4마지기 반에서 5마지기 살수있다고!잘보관했다가 나이가 들면 잘사용하라고! 고등학교는 꼭 졸업하라고 가능하면 대학까진 졸업하라고 넌 똘똘하니까 꼭 살수있을꺼라고 아들딸낳코 잘살라고 하시고 젖한번 물려주시고 목매달고 자살한 생모! 무덤 옆에 있던 소나무가지가 자라서 무덤을 가릴거니 자른다고해서 내가 목매달았던 가지보고 기억하지 어떻케 기억을할수있겠냐고 그냥 자르지말라고 말했던 기억!생모데려갈려고 왔던 털이 달린 가죽코트를 입은 잘생긴 신사아저씨(저승차사)와 멋진 늑대개 2마리.아이 놓아두고 자살했다고 머리채잡고 죽인다고 야단하던 아저씨를 내가 발로차고 그냥 조용히 모시고가라고 말했던 기억이~할아버지(염라대왕)한테 혼날꺼라고 야단하시는 신사아저씨(저승차사). 아무말 못하시고 따라가시는 생모께 안녕히가시라고 인사드리니 왜 바보같이 돈빼앗겼냐고 무섭게 화내시던 모습! 산에서 내려와서 메뚜기잡아먹고 일벌잡아먹고 야밤에 잠자다가 납치(보쌈). 엄마 아빠 형 누나만나서 사랑받으며 살았었네요! 양아빠 양엄마가 실제 부모로 알고 살았고 몇년전에 두분 다 돌아가셨음.천국에 가셔서 행복하세요.🎉
꼬꼬마때인 1968,9년 쯤 베트남 참전했읍니다.박정희대통령과 김종필 중정부장도 베트남에서 만났었고!
어릴땐 양깔보 라고 불렀는데 미안합니다.그때 아는 누나가 클럽에 일했는데 놀러가면 조명에 오락실까지 그땐 별천지...미군들이 귀엽다고 먹을거 주고..
힘 없는 민족의 설움이다...이제와서 미국 원망한들 뭐하랴....자주국방해야된다
왜 미국을 원망하지~ ? 똥돼지 할배 일성이놈을 원망해야지... 물에 빠진놈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란더니...
필요악
미국이 아니였다면 아직도 거지들 뿐이겠지
왜 놈 - 야지 - 아베 - 민족 반역 자 - 백 선엽 은 성우 회 초대 회장 을 지냈고,
강남 역 인근에 지하 5 층· 지상 16 층 대형 빌딩을 소유했던 재산가로,
평소 벤츠 S 클래스 차량을 이용했다.
이게 뭐가 좋은영상이라고 내놓는거야
나어릴때 거기살았어
거기서 더러운거만보고살았지
못살은 죄
이프로그램 제작사가 어디죠? 무슨 미군위안부라고 표현한거죠? 무슨 양공주라 불리는사람들 자신들이 돈벌려고 한거지 무슨 위안부라는 표현을 합니까? 반미목적의 프로그램이란게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네요.
혹시 이 기록물을 끝까지 보셨는지요. 저희 평택문화원은 지역의 역사 중 기지촌과 관련한 삶의 기록을 다양한 분들의 증언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정치나 이념의 해석을 배격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았습니다. 미군'위안부'란 용어는 1951년 부터 1980년대 까지 한국정부와 언론에서 다룬 공식명칭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급부상하면서 미군'위안부'란 용어 사용에 논란과 오해가 생겼습니다. 미군'위안부'와 일본군'위안부'는 당연히 다른 성격의 제도와 용어입니다. 따라서 요즘은 미군'위안부'를 '기지촌 여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희는 과거에 공식적으로 규정하고 표현됐던 용어를 차용한 것 뿐입니다. 본 영상에 관심 가져 주시고 의견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치선-q8s 저기지촌 여성들은 돈때문에 스스로 기지촌으로 돈벌러 들어간여성들이지 국가가 아니면 미군이 강제동원한게 아닌데 이영상을보면 자칫 용어에서나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TheDavidc1 말씀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최치선-q8s 네 제의견은 저기 등장하시는 기지촌 일명 전 양공주 분들은 피해자가 아니고 자신들의 의지로 당시 어려운시기에 달러많이모이는 기지촌으로 스스로 들어가신분들이란 말씀입니다.
당시 대다수의 여성들은 우리어머니들처럼 기지촌에안가고 정상적으로 장사하고 결혼하고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시며 사셨습니다.
@@TheDavidc1 네~ 선생님 말씀 잘 이해했습니다.
미군위안부도 손해배상 청구하세요. 피해자라고 계속 떠들면 승소합니다.
미국에 의지하지말자
범죄자에 당한 보상은없나??????????
기지촌주변 정리깨끗히해라 뭔데 유곽을 왜 만드는데
유곽을 누가 만든게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생긴 거지요
@@bigdig81 노점아주머니에게 물었어요 월얼마 버세요 천만원버세요 그것가지고되겠어요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길이 없어서 나라 전체가 내일 먹고 살 양식이 없어서 그렇게 유곽이 자발적으로 형성이 된겁니다 저때는 부자들도 밥상에 계란이나 고기반찬이 매끼마다 올라 오지 않을 때입니다.
'미군 위안부'가 모냐?
구지 "일본제국주의"의 추한 산물이었던 단어를
피해자 국가에서 따다가 여기저기 아무데나 붙여서 써야 되겠냐?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가 모하는데냐?
친일파냐?
정신나간 자막들 제정신으로 만든거냐?
고향소식 보러 왔다가 놀래 자빠지겠네...
@@없다12
위안부 (慰安婦) [명사]
1. 주로 전쟁 때 남자들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군대에 강제로 동원된 여자.
2. [역사 ]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한국, 대만 및 일본 여성을 이르는 말.
@@없다12
정신나간 열마리(10)새꺄
얼마나 욕쳐먹어야 정신차릴래?
강제성의 유무를 가지고 단어 선별을 해야지....
@@없다12
하던말 답변 못하고 다른화제로 돌리냐??
친일파 새끼들....꼴깝들을 떠는구나....
내용봐라 미성년자를 꼬득여서 데리고 간거는 당시 일본 현행법에도 어긋나는 범죄행위다...
열마리(10)새꺄...
이춘재 조두순 고유정이 같은 범죄자들도 본인들이 안그랬다고한다
범죄자의 주장을 믿는거냐?
니집안이 범죄자구나....
@@없다12
개호로 새꺄
니 새끼들이 당해도 개소리하고 다녀라
이제 미군은
미련을 버리고 한국을 떠나라!
전시작전통제권 환수해서,
대한민국의 자주,자립정신을 드높이자!!
양녀들많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