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 소모량이 너무 심각했다. 화약 대비 살상력이 떨어졌던 대신기전에 들어가는 화약량은 천자총통의 3배 이상이었다. 유황과 염초를 전량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던 조선군의 입장에서 신기전이 소모하는 화약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결국, 고려와 조선은 실제 전투에서는 화포(총통)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보병을 잡는 주력화기의 역할은 직사화기들이 맡았고, 신기전은 어디까지나 중장거리 목표를 제압하는 역할을 맡는 타격 로켓으로서 설계된 무기였다.
조선시대에 유황광의 채굴이 국가의 정책적인 뒷받침을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로서, 병기용 화약제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국내에서의 유황생산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황의 국내 생산을 서두르게 되어 광산을 발견 보고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는 시상법까지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661년에서 1712년 사이에 발굴된 전국의 유황지는 무려 20여개나 되었고, 유황산지는 경내의 오군문, 비변사와 지방의 병영에서 설점수세하였으며, 이들 관아는 광산의 운영자금을 마련해주고 광산의 운영은 광산을 발굴한 감관에게 의뢰하였습니다. 유황군의 노동은 일부의 부역 노동과 임금노동의 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유황점에 대한 군아문의 설점수세체계는 18세기 초·중엽에 화약 수요가 격감되고 화약의 제조권이 공인에게 이속됨으로써 붕괴되었습니다.
다 좋은데 실험자분들 기둥에 묶어놓고 테스트 할 때부터 몸에 보호장구도 없이 맨손으로 화약통 분리하고 만지고 고흥에서 테슽 할 때도 폭발물인데 어디로 튈지 어떤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바로 코앞에서 보호장구없이 맨몸으로 실험하네...그러다 사람하나 다치거나 죽으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방어전과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사용한 로켓으로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류성룡이 자신의 문집인 《서애집》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중기 쯤에는 신기전이 야전에서는 신호용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조선의 국경선이 안정되자, 야전에서 적의 기지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대형 타겟을 폭파하기 위한 전술 로켓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너무 큰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시대에도 장거리 타격 미사일에 비해서는 일반적인 포탄이 같은 파괴력 대비 수백배 저렴하다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중세시대에도 화약을 먹는 괴물과도 같았던 중장거리 타격 로켓 자산은 영토 분쟁이 안정된 이후 점점 축소되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었다. 해상전투에서는 조선중기에도 조선해군이 적의 전함을 불태우는 목적으로 꾸준히 사용했다. 이순신이 활약했던 시대에도 신기전은 적의 선박을 불태우고 격침하는 목적으로 자주 쓰였다고 한다. 다만, 육상에서는 임진왜란 초창기까지 신기전과 같은 화약로켓을 육상전투에서 많이 활용한 군대는 돈이 많았던 명군이었다. 특히, 2차 평양성 전투(1593년 1월 5일~8일)에서 명군의 다발화전이 큰 역할을 했다. 다만, 현대 시대에는 조선군이 진주성 전투 1차에서 김시민의 방어전 성공,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이 신기전 화차를 방어전에서 사용하여 크게 성공한 승리가 워낙에 통쾌한 이미지로서 알려지는 바람에, 현대인들은 조선군의 신기전을 수비에만 사용되며 보병에 효과가 뛰어난 야전포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현실에선 보병 살상 목적에는 신기전 화차보다는, 대중 미디어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오르간 건을 장착하여 근접한 보병방진을 제압할 수 있는 총통 화차가 사용되었다.)
이미 한국은 로켓 무기를 수백년전에 사용했고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한국은 활과 활공무기와 조선과 칼에는 뛰어난 민족이다. 말리지만 않는다면 미국을 추월할수있다.거기에 불울 사용하는 도자기 기술도 세계최거였고....
포방부의 시작은 그 때 부터 였군요.
화약 소모량이 너무 심각했다. 화약 대비 살상력이 떨어졌던 대신기전에 들어가는 화약량은 천자총통의 3배 이상이었다. 유황과 염초를 전량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던 조선군의 입장에서 신기전이 소모하는 화약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결국, 고려와 조선은 실제 전투에서는 화포(총통)에 더욱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보병을 잡는 주력화기의 역할은 직사화기들이 맡았고, 신기전은 어디까지나 중장거리 목표를 제압하는 역할을 맡는 타격 로켓으로서 설계된 무기였다.
당시에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유황을 채취할 순 없었을까요?
조선시대에 유황광의 채굴이 국가의 정책적인 뒷받침을 받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로서, 병기용 화약제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국내에서의 유황생산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황의 국내 생산을 서두르게 되어 광산을 발견 보고하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는 시상법까지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661년에서 1712년 사이에 발굴된 전국의 유황지는 무려 20여개나 되었고, 유황산지는 경내의 오군문, 비변사와 지방의 병영에서 설점수세하였으며, 이들 관아는 광산의 운영자금을 마련해주고 광산의 운영은 광산을 발굴한 감관에게 의뢰하였습니다. 유황군의 노동은 일부의 부역 노동과 임금노동의 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유황점에 대한 군아문의 설점수세체계는 18세기 초·중엽에 화약 수요가 격감되고 화약의 제조권이 공인에게 이속됨으로써 붕괴되었습니다.
똑바로 얘기해라
전량 수입한게 아니고 화약통감이 있었으나 각종 비리등으로 수입을 하였을 뿐이다
화약 연마도 못 하면서 미사일을 쏘았겠느냐
화약 단단하게 하는 작업할때 쇠로 때리면 마찰에 화약 폭발안하는가?
그게. 딱총
다 좋은데 실험자분들 기둥에 묶어놓고 테스트 할 때부터 몸에 보호장구도 없이 맨손으로 화약통 분리하고 만지고 고흥에서 테슽 할 때도 폭발물인데 어디로 튈지 어떤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바로 코앞에서 보호장구없이 맨몸으로 실험하네...그러다 사람하나 다치거나 죽으면....
화약재료 그중에서도 염초가 잘 나오지 않는 우리로써는 어떻게든 화약을 아껴야했다...심지어는 취토군이라는 남의집까지뒤집어서 바닥흙까지파내야했던 조선시대에는 더이상 말할필요가 없었겠지..다른분들말대로 대신기전은 화약소모량이 너무많았다..실제로는 총통등을 썼을것이고 저런 신기전같은것은 한번에 싹쓸어야할때 썼을것이다...
빠름의민족이 로켓도 남들보다 초고속으로 가는걸 만들어야지. 화성가는데 남들보다 절반타임에 가는 스크럼젯우주발사체 어때?
공기없는 우주에서 뭔 스크럼제트 ㅋㅋㅋㅋㅋ
@@facetusjin2766 그냥 그렇다고 해주라 ㅋ
이제 현대화해라.
적들이 죽겠어
저런 무기를 가지고 인조는 중국에게 두번당함
마지막 멘트 '잊고있던 민족의 잠재력' 에서 생각난 사실은 우리 역사엔 항상 두종류의 인간들이 있었지. 그 위대한 잠재력을 개발하는 인간들과 그 잠재력을 위대하게 잠재우는 인간들ㅋㅋㅋ
소국이 대국을 앞서면 안되지 훠훠훠~
그 훠훠훠가 미사일 주권 찾아오고 SMR 완성으로 원잠 보유 계획 했다는것만 기억해 주시고 문통 재임시 국방력 순위가 12위에서 6위까지 퀀텀점프했음 ᆢ 그래서 룬굥 찍었수 ??
KBS 수신료 폐지 또는 분리징수 찬성.
KBS 직원 절반 이상 억대 연봉.성과급 잔치 반대.
여기 와서 이런 걸 쓰는 이유가 뭐죠?
그러면 로켓 발명자도 브라운이 아니네...조선이네 조선...!!! 이런 무기를 가지고도 왜 명나라에게.....
약통이 무거웠다. 가벼웠더라면 더 오래 채공하며 하늘에서 2단이 터졌을거다.
썸네일 국뽕채널인줄
저걸 왜 임진왜란 땐 뭐 했노
더럽게비싸서 거의 못씀... 신기전이나겨우 행주산성에서 몰빵해서 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방어전과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사용한 로켓으로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류성룡이 자신의 문집인 《서애집》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중기 쯤에는 신기전이 야전에서는 신호용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조선의 국경선이 안정되자, 야전에서 적의 기지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 줄어들었고, 따라서 대형 타겟을 폭파하기 위한 전술 로켓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너무 큰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시대에도 장거리 타격 미사일에 비해서는 일반적인 포탄이 같은 파괴력 대비 수백배 저렴하다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중세시대에도 화약을 먹는 괴물과도 같았던 중장거리 타격 로켓 자산은 영토 분쟁이 안정된 이후 점점 축소되는 것이 당연한 현상이었다.
해상전투에서는 조선중기에도 조선해군이 적의 전함을 불태우는 목적으로 꾸준히 사용했다. 이순신이 활약했던 시대에도 신기전은 적의 선박을 불태우고 격침하는 목적으로 자주 쓰였다고 한다. 다만, 육상에서는 임진왜란 초창기까지 신기전과 같은 화약로켓을 육상전투에서 많이 활용한 군대는 돈이 많았던 명군이었다. 특히, 2차 평양성 전투(1593년 1월 5일~8일)에서 명군의 다발화전이 큰 역할을 했다. 다만, 현대 시대에는 조선군이 진주성 전투 1차에서 김시민의 방어전 성공,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이 신기전 화차를 방어전에서 사용하여 크게 성공한 승리가 워낙에 통쾌한 이미지로서 알려지는 바람에, 현대인들은 조선군의 신기전을 수비에만 사용되며 보병에 효과가 뛰어난 야전포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현실에선 보병 살상 목적에는 신기전 화차보다는, 대중 미디어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오르간 건을 장착하여 근접한 보병방진을 제압할 수 있는 총통 화차가 사용되었다.)
저때까지도 역사국뽕이 많았구나. 현실에 머 내세울께 없으니.
그래서 멍청한 사대부들 욕먹는거임 세종대왕때 저모든것은 정형화 했으면 일본에 침략당하는 수모 당했을까? 아마도 동아시아 강국으로 입지 만들어졌을건데
본인들 욕심에 눈이 멀어서 국가을 좀먹게하는 뼈아픈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