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풍부해서 좋겠다. 이순신은 명량에서 단 한 번 교전하고 나포당해 죽다살아 이후 명량에 있는 방어목표인 전라우수사를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군 진영이 있는 충청도까지 보름어 걸쳐 토낀다, 도도는 무사 하나와 졸개 50의 인명피해로 전라우수영을 점령해 전남해역을 토벌하는 또 한 번의 승리를 한다. 진린은 자신의 전공을 위해 약속을 어기고 순천을 고립시킨다. 당연히 조선수군 지휘권도 진린이 가지게 된다. 순천의 고니시군을 구하기 위해 시마즈군이 선봉으로 출격하나 노량해협이 얕아 시미즈가 탄 기함도 좌초죄어 꺼내느라 죽네사네 고전하나 시마즈군은 화력으로 밀어 조선수군을 궤멸시킨다. 이순신등 다수의 지휘관들이 사살당하고 다수의 함선이 나포된 조선 수군은 와해된다. 명수군은 숫자로 밀어 버티나 등자룡도 사살당하고 진린 자신도 쥭다살아 토낀다. 하지만 일수군도 오랜 전투로 지치고 화약도 소진되어 일단 퇴각한다. 이걸 이겼다고 사기치는 국뽕들. 히지만 거기있다가 다음날 2차 공격을 받으면 다죽는다는걸 인지한 진린은 포위를 풀고 전면 퇴각한댜. 일수균의 승리다. 다음날 순천의 고니시군은 그어떤 저항도 받지않고 유유히 남해 외해를 돌아 거제로 퇴각해 집으로 돌아간다. 시마즈군은 포위망안으로 뛰어들어 수만 일군을 구한 전공으로 일본에서 유명해지고 적인 이에야스도 시마즈의 전공을 인정해 세끼가하라전투에서 미쓰나리편에 선 시마즈의 항복을 받아주고 막부도 메이지유신까지 시마즈의 영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명나라로 돌아간 진린은 지가 이겼다고 사기쳤겠지만 개뻥이야.
@@Qipao_park 울돌목에서 전투한 역사가 없다. 조선선비들의 막장 소설에 지나지않아. 거기는 전투불가 지역이다. 가서 보고 씨부려라. 울돌목 입구 진도해협에 13척의 대형 판옥선으로 전라우수영 방어 최후저지선을 치고 있던 이순신과 직접 33척의 중헝 쾌속함을 이끌고 추격해온 도도와의 교진이 벌어진다. 이순신이 독려하나 조선함대는 꽁무니빼고 이순신 기함 혼자 덩그러니 적진에 남아 일군은 이순신을 포위해 나포하느라 혈안이었고 이순신은 도망가는 졸개들을 향해 니들 다뒈진다며 북을 울리고라고 쓰고 살려주세요한다. 이에 도망가던 조선함선들이 반전해 이순신을 구하게 되고 (이순신이 나포되면 전부 참수니 구하러 가야지) 이 혼전 와중에 상대적으로 작은 일쾌속함 몇척이 피해를 입고 무사 하나도 실족사하고 졸개 수십의 인명피해가 나고 함선피해가 없는 조선함대가 이날의 승자였다. 이순신을 구한 조선함대는 울돌목을 넘어 방어 목표인 전라우수영을 버리고 토낀다. 함대를 재정비한 도도는 뚜껑열려 추격하나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보고 추격을 포기하고 본대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음날 백척의 본대가 오고 척후가 이순신이 우수영을 버리고 토켰다는 보고를 하자 울돌목을 넘어 우수영을 무혈점령하고 목포로 추격하나 이순신은 이미 군산으로 튄 다음이라 추격을 포기하고 전남해역 토벌전을 종료한다. 이순신은 보름에 걸쳐 충청도 명군 진영까지 토껴 살아남는다. 도도는 명군에 밀려 전남해안으로 퇴각하는 고니시군을 엄호하며 같이 순천으로 퇴각한다. 명군이 일군을 몰아낸다. 명군따라 다시 떨레떨레 폐허가 된 전라우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허위 장계를 올리나 선조에게는 이미 다른 장수들이 올린 장계가 올라와 있었다. 이순신은 토끼고 신들이 죽자고 싸웠으나 세불리해 전남 해역이 일군 수중으로 들어갔나이다. 어쩐일인지 이순신이 군산에 와있나이다. 등의 장계가 올라와 있어서 선조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안죽고 살았으니 되었다며 무마한다. 이게 명랑한 명량해전이다. 국뽕 국사교수애들은 이순신만 장계를 쓸 줄 아는 줄...,
@@Qipao_park 노량에서 이순신등 다수의 조선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등자룡도 사살한 시마즈군은 무사는 하나도 안죽고 졸개 50정도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많은 조선 함선들도 나포되어 조선함대는 초전에 와해되어 사라진다. 시마즈는 이에야스에게도 전공을 인정받아 살아남는다. 도도는 농사꾼출신으로 무사가 된 자로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모두에게 인정받은 유능한 자다. 임란에 3만석으로 3천을 출병시켜 전공을 인정받아 재란대 7만석으로 승급해 일만벙력으로 일종의 호위함대를 구성해 삼도수군을 궤멸시킨다. 히데요시가 오야가할복해 스스로 중이된 도도를 다시 불러 중용하고 그 판단이 주효했던거다. 이에야스도 도도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하고 사후 20만석을 받는다.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상하신망이 높고 원칙적인 전술을 구사하는자다. 한산전투때의 만석짜리 조무래기 와키자카와는 급이 다른 자다. 일본 상황을 보면 이순신은 조선선비들이 창작한 소설이라는걸 알 수가 있다.
@@ZaiKerizm 그것은 실화가 아닙니다 이순신이 자산이 없다니요.. 조선 전체를 대표하는 부호였는데 이순신 장군은 친가도 부유했고, 외가는 엄청난 부자였으며, 처가는 지역을 대표하는 부자였습니다 형들 다 일찍 죽어서 친가 재산 다 상속 받았고,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린 셋째 외손주에 불과한 이순신에게 노비만 20명 물려주었습니다 아버지도 무과에 합격한 아들에게 외거노비 7명과 그에 해당하는 전답을 상속 시켜줬을 정도인데 더군다나 충청도 제일 부호였던 처가의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았을 정도이고
진린이 이순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운구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순신의 영구는 11월 22일경부터 12월 초까지 10여일 간 고금도에 모셔져 있었는데, 진린은 일본군에 대한 수색 및 소탕 작전을 마친 뒤 12월 22일에야 남해에서 고금도로 퇴진하였기 때문. 따라서 고금도에서의 이순신 장례는 진린이 아니라 조선 수군과 집안 인물들의 주도 하에 바로 치러져 아산으로 운구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에서 명군이 파견되었을때....군량미 200~300백만석을 보냈는데...그 군령미를 조선이 어디다 썼는지 모르지만, 지원군으로 온 명군을 굶음....그래서 진린 및 그 휘하의 장수들이 조선 관리들을 하대했음. 이후 이순신 장군의 진영으로 갔는데, 이순신 장군이 마을 밖에서 부터 극진히 모심. 그리고 명나라 전 군사들에게 음식을 제공. 이에 진린이 고마워했고, 이후 이순신이 따로 진린과 함께 병법을 이야기하며 이순신이 그동안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들을 해줌. 승전한 이야기들과 이순신의 병법을 듣고 진린 및 그 휘하 장수들이 감탄함...명나라에서만 듣던 연전연승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을 깨달음...이에 진린이 이순신장군을 부를때 '노아' 라고 부름. 한자그대로 읽으면 늙은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당시에는 '어르신' 이라는 표현이 노아 였음.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때, 진린이 공적이 적자, 이순신이 자신의 공적을 진린에게 내어줌. (*수급 = 적의 머리 숫자로 공적을 따짐) 진린에게 자신이 벤 적의 수급을 다 줌. 이에 진린이 또 감탄하고 그를 존경하게 됨. 조선 선조와 그 밑에 관리들이 충무공이순신을 시샘하거나 모함할때, 그것을 커버해준것이 명나라 제독 진린 이였고, 그의 존재 하나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제2의 백의종군을 시키지 못함.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충무공 이순신의 공을 기려 관직을 내려달라고해서, 충무공 이순신은 명나라 관직도 부여받았음. 물론 명예직이지만...충무공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에, 대성통곡을 하며 배위에서 울었음.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 백성 200명을 데리고 후퇴하는 여진족 무리들을 쫓아가 약 60명을 구출 하였는데도 북병사 이일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투옥,백의종군 즉 해임을 당하셨죠. 그리고 왜란 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조선국왕에게 미움을 받아 고문도 당하고 파직도 당했었죠. 나라가 버릴려고 했음에도 자신이 나라를 버리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을 진린은 얼마나 살리고 싶었을까... 싶습니다.
명나라로 가자고 했는데도 이순신장군님은 가지 않았고 진린이 하늘의 별이 어두워지는걸 보고 이순신 장군님에게 당신의 별이 지는데 제갈공명처럼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이순신 장군님은 자신은 제갈공명보다 못하며 제갈공명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내말을 들어 주시겠냐며 하지 않았고 이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오열했죠...
영상 그림 설명: 조선이 명에게 선물 쬐끔 주고 회사품은 엄청 큰 거 받아가면서 “폐하 무슨 문제라도?” 라고 약올리고🤪 명황제는 😩 사실 조공관계가 원래 그래서 이득 보려고 1523 일본인끼리 서로 먼저 조공하겠다고 쳐죽이던 영파의 난도 벌어졌죠. 무로마치 막부 때는 중국에하는 조공이 10년에 1번까지만 😅 반면 조선에서는 딱히 제한을 두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중앙정부뿐 아니라 각지 다이묘가 많이 조선에 조아리고 조공하러 왔죠.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중국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조공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조선입니다. 😄 여러 여진족들에게서, 시암에게서, 필리핀에게서, 자바에게서, 류큐 왕국에게서, 일본에게서. 여진은 아예 먼저 아들들을 노비로 보낼테니 거두어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조선 개국공신 여진족 이지란의 4촌이 먼터무인데 그도그랬고요.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6대 후손이 후금의 누르하치입니다. 그리고 금나라나 청나라나 (흠정만주원류고) 자신들의 기원은 신라말 고려초에 3형제 중 혼자 나와서 산 함보/긍보라고 합니다. 특히 여진족에게서 말을 조공 받아 (수입해와) 명나라에 10배 가격 뻥튀기해서 조공 (수출) 했습니다. 여진족과 거래도 명나라와도 거래도 가격은 말 크기와 품질에 따라 자세하게 의정부에서 각각 결정했습니다. 중국에하는 조공무역은 사이가 좋으면 좋을 수록 횟수 제한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제한 넘기면서 오면 국경에서 관리가 “아 쿨타임 안 끝났다고! 조공사절단 그만보내라고! 오지말라고!” 😡 문전박대당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사절단의 이름 바꿔 다른 명목으로 사절단 통과시킴ㅋㅋㅋ😜) 명나라 때 1년 정기적으로 4사까지 파견이 허락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조선초기에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원나라 잔존 세력 몰아낼 때 혹시 고려/조선이 한패가 아닌지 (고려는 몽골의 칸 선출 회의인 100인 쿠릴타이까지 참석해서 서열 5위까지 간 인척이었으니까) 의심해서 3년 1사로 낮추다가,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항복하면 1년 3사로 도로 올리고, 명나라 공주를 조선에 시집보내려고 하다가 의견차이로 취소하고 또 3년 1사로 줄이다가, 2대 황제 건문제가 숙부한테 숙청당할 위기에 내전 (정난의 변)이 일어나자 다시 안타까워져서 1년 3사로 늘립니다. 시집보냈다면 장인어른의 나라라고 군대도 보냈을 텐데 홍무제 건문제 입장에서 아쉽죠, 그거 때메 결국 아들 건문제가 패하고 형제가 황제 자리를 빼앗아갔으니. 나중에 1사 하나 더 추가해서 정기적 4사 + 특별한 일 있으면 그거 명목으로 추가로 조공사절단 파견해서 한 해에 7번까지 간 적 있습니다. 싱가포르 이전의 싱가포르, 즉 원조 동남아시아 무역허브 였던 류큐 왕국은 연락도 자주 안하는 일본보다 우대 받아 2년 1사까지 허락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류큐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간에서 양쪽의 무역을 다 주름 잡던 터라 명 입장에서도 동남아를 직접 거래할 필요없이 류큐가 중개(조공)무역하면 편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실패 후 전쟁에 돈 다쓴 서일본의 사쓰마번이 만회하려고 1609년 류큐를 침공하고 파괴하고 본토 60~80% 세율보다 가혹한 90% 세율을 매깁니다. 1609년 류큐 일제강점기때부터 살기 흉흉해지고 세금 줄이려고 임산부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아기는 돌로 눌러죽이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도;됩니다. 일본이 침공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정유재란 이유 중 하나가 1596년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 사신 앞에서 단령 입고 책봉받고 “이제 무로마치 때 하다가 끊긴 짭잘한 조공무역 재개해도 될까요🥹?“ 여쭈니 ”조공은 무슨 😡이제 너도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았으니 책봉국끼리 전쟁은 안된다. 😡얼른 조선에서 철군하기나 해라“라고 해서 체면도 깎이고 이득도 못건지고 군대는 약화되니까, 예전에 내조하라며 후방 도쿠가와에 볼모로 맡겨둔 엄마와 누나도 위협받게 되니 이판사판을 정유재란 일으킨 점도 있습니다.
애초에 다국적군이 수립될 경우 합이 잘 맞기는 쉽지않음 그것도 중세시대 해군을 임진왜란은 당시 아시아문화권에서는 세계대전급 전쟁으로 보아야 함 태국과 류큐 그리고 누르하치의 여진도 대일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올 정도로 거대한 전쟁이었음 이 장군이 단순 전략에만 능했던 것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능력도 상당했음을 보여주는듯 물론 진린도 이 장군의 능력을 보고 난 뒤에 조선 조정이 이 장군을 고깝게 여긴다는 걸 알고 명으로 같이 가서 살자고 한 것을 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다른 명군장수들처럼 소인배라고 하긴 어렵겠다만
@@prohightension2000 유정 장군도 장군 능력으로서야 설왕설래가 있지만 인격적으로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조선에 가는 곳들 대부분 백성들 직접 나서 식량을 조달해서 구휼하고 군대가 민폐를 끼치지 않게 엄히 단속하는 편이었고 나중에 사르후 전투 당시에도 조선군들에게 나름 신경을 많이 써주었던 분입니다 본인을 좋지 않게 보았던 이순신도 왕에게 계속 좋은 표현을 해주면서 두둔했었고
스티븐 잡스 용병론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S급 인재끼리 모아 놓으면 엄청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합이 굉장히 잘 맞는다고 함. 인재들간의 업무만족도도 엄청나게 올라간다고 한다. 실 생활에서 이런 사례을 보기 힘든 건 단순히 S급 인재끼리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함. S급 재원들이 신경질적이고 고집스러워 지는 이유는 동료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함. 재능잇는 사람끼리 모아놓으면 팀웍이 놀랍게 잘맞고 S급 인재들은 퍼뜨려 놓지말고 모아놓아야한다고 설명함
@@davidjacobs8558 ㄴㄴ 이미 원대 이후 몽골족들이 화북지방 이후 센발음 받침발음 싹 없애버림. 명대이후 영락연간 이후 숭정연간까지 지금의 보통화랑 크게 차이는 없음. 청의 만주족들이 북경을 차지하면서 만주어의 발음과 섞여진게 지금의 베이징 동북지방 사투리에 얼화 발음
This movie has clothes and armor. The Chinese soldiers and the Chinese army did very well. Haven't you studied? Film directors, you guys should go watch the ming dynasty series movie.
상상력 풍부해서 좋겠다.
이순신은 명량에서 단 한 번 교전하고 나포당해 죽다살아 이후 명량에 있는 방어목표인 전라우수사를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명군 진영이 있는 충청도까지 보름어 걸쳐 토낀다,
도도는 무사 하나와 졸개 50의 인명피해로 전라우수영을 점령해 전남해역을 토벌하는 또 한 번의 승리를 한다.
진린은 자신의 전공을 위해 약속을 어기고 순천을 고립시킨다.
당연히 조선수군 지휘권도 진린이 가지게 된다.
순천의 고니시군을 구하기 위해 시마즈군이 선봉으로 출격하나 노량해협이 얕아 시미즈가 탄 기함도 좌초죄어 꺼내느라 죽네사네 고전하나 시마즈군은 화력으로 밀어 조선수군을 궤멸시킨다.
이순신등 다수의 지휘관들이 사살당하고 다수의 함선이 나포된 조선 수군은 와해된다.
명수군은 숫자로 밀어 버티나 등자룡도 사살당하고 진린 자신도 쥭다살아 토낀다.
하지만 일수군도 오랜 전투로 지치고 화약도 소진되어 일단 퇴각한다.
이걸 이겼다고 사기치는 국뽕들.
히지만 거기있다가 다음날 2차 공격을 받으면 다죽는다는걸 인지한 진린은 포위를 풀고 전면 퇴각한댜.
일수균의 승리다.
다음날 순천의 고니시군은 그어떤 저항도 받지않고 유유히 남해 외해를 돌아 거제로 퇴각해 집으로 돌아간다.
시마즈군은 포위망안으로 뛰어들어 수만 일군을 구한 전공으로 일본에서 유명해지고 적인 이에야스도 시마즈의 전공을 인정해 세끼가하라전투에서 미쓰나리편에 선 시마즈의 항복을 받아주고 막부도 메이지유신까지 시마즈의 영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명나라로 돌아간 진린은 지가 이겼다고 사기쳤겠지만 개뻥이야.
상상력 풍부해서 좋겠다
@@Qipao_park 울돌목에서 전투한 역사가 없다.
조선선비들의 막장 소설에 지나지않아.
거기는 전투불가 지역이다.
가서 보고 씨부려라.
울돌목 입구 진도해협에 13척의 대형 판옥선으로 전라우수영 방어 최후저지선을 치고 있던 이순신과 직접 33척의 중헝 쾌속함을 이끌고 추격해온 도도와의 교진이 벌어진다.
이순신이 독려하나 조선함대는 꽁무니빼고 이순신 기함 혼자 덩그러니 적진에 남아 일군은 이순신을 포위해 나포하느라 혈안이었고 이순신은 도망가는 졸개들을 향해 니들 다뒈진다며 북을 울리고라고 쓰고 살려주세요한다.
이에 도망가던 조선함선들이 반전해 이순신을 구하게 되고 (이순신이 나포되면 전부 참수니 구하러 가야지) 이 혼전 와중에 상대적으로 작은 일쾌속함 몇척이 피해를 입고 무사 하나도 실족사하고 졸개 수십의 인명피해가 나고 함선피해가 없는 조선함대가 이날의 승자였다.
이순신을 구한 조선함대는 울돌목을 넘어 방어 목표인 전라우수영을 버리고 토낀다.
함대를 재정비한 도도는 뚜껑열려 추격하나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보고 추격을 포기하고 본대가 오기를 기다린다.
다음날 백척의 본대가 오고 척후가 이순신이 우수영을 버리고 토켰다는 보고를 하자 울돌목을 넘어 우수영을 무혈점령하고 목포로 추격하나 이순신은 이미 군산으로 튄 다음이라 추격을 포기하고 전남해역 토벌전을 종료한다.
이순신은 보름에 걸쳐 충청도 명군 진영까지 토껴 살아남는다.
도도는 명군에 밀려 전남해안으로 퇴각하는 고니시군을 엄호하며 같이 순천으로 퇴각한다.
명군이 일군을 몰아낸다.
명군따라 다시 떨레떨레 폐허가 된 전라우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허위 장계를 올리나 선조에게는 이미 다른 장수들이 올린 장계가 올라와 있었다.
이순신은 토끼고 신들이 죽자고 싸웠으나 세불리해 전남 해역이 일군 수중으로 들어갔나이다.
어쩐일인지 이순신이 군산에 와있나이다.
등의 장계가 올라와 있어서 선조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안죽고 살았으니 되었다며 무마한다.
이게 명랑한 명량해전이다.
국뽕 국사교수애들은 이순신만 장계를 쓸 줄 아는 줄...,
@@Qipao_park 노량에서 이순신등 다수의 조선 지휘관들을 사살하고 등자룡도 사살한 시마즈군은 무사는 하나도 안죽고 졸개 50정도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많은 조선 함선들도 나포되어 조선함대는 초전에 와해되어 사라진다.
시마즈는 이에야스에게도 전공을 인정받아 살아남는다.
도도는 농사꾼출신으로 무사가 된 자로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모두에게 인정받은 유능한 자다.
임란에 3만석으로 3천을 출병시켜 전공을 인정받아 재란대 7만석으로 승급해 일만벙력으로 일종의 호위함대를 구성해 삼도수군을 궤멸시킨다.
히데요시가 오야가할복해 스스로 중이된 도도를 다시 불러 중용하고 그 판단이 주효했던거다.
이에야스도 도도의 능력을 알아보고 중용하고 사후 20만석을 받는다.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상하신망이 높고 원칙적인 전술을 구사하는자다.
한산전투때의 만석짜리 조무래기 와키자카와는 급이 다른 자다.
일본 상황을 보면 이순신은 조선선비들이 창작한 소설이라는걸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역사의 출처는?
니뽕 소설 작가
이순신 전사하고 장례를 유족들이 치룰 자산이 없자 진린은 개인의 사비를 통해 이순신의 장례를 치뤄주고 명으로 복귀하고도 자주 이순신의 무덤을 방문했다고 함
진짜 브로맨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네요 저는 진린이 명나라로 돌아와고 한 3일동안 우울증 수준으로 울었다고는 배웠는데
@@ZaiKerizm 그것은 실화가 아닙니다
이순신이 자산이 없다니요.. 조선 전체를 대표하는 부호였는데
이순신 장군은 친가도 부유했고, 외가는 엄청난 부자였으며, 처가는 지역을 대표하는 부자였습니다
형들 다 일찍 죽어서 친가 재산 다 상속 받았고,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린 셋째 외손주에 불과한 이순신에게 노비만 20명 물려주었습니다
아버지도 무과에 합격한 아들에게 외거노비 7명과 그에 해당하는 전답을 상속 시켜줬을 정도인데
더군다나 충청도 제일 부호였던 처가의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았을 정도이고
출처가 어디죠
진린이 이순신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운구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순신의 영구는 11월 22일경부터 12월 초까지 10여일 간 고금도에 모셔져 있었는데, 진린은 일본군에 대한 수색 및 소탕 작전을 마친 뒤 12월 22일에야 남해에서 고금도로 퇴진하였기 때문. 따라서 고금도에서의 이순신 장례는 진린이 아니라 조선 수군과 집안 인물들의 주도 하에 바로 치러져 아산으로 운구된 것으로 보인다.
@@망고-n3p8c 나무위키 진린 항목 2.2 마지막 문단 그대로 긁어올거면 출처라도 좀 적으시지요
명나라에서 명군이 파견되었을때....군량미 200~300백만석을 보냈는데...그 군령미를 조선이 어디다 썼는지 모르지만, 지원군으로 온 명군을 굶음....그래서 진린 및 그 휘하의 장수들이 조선 관리들을 하대했음. 이후 이순신 장군의 진영으로 갔는데, 이순신 장군이 마을 밖에서 부터 극진히 모심. 그리고 명나라 전 군사들에게 음식을 제공. 이에 진린이 고마워했고, 이후 이순신이 따로 진린과 함께 병법을 이야기하며 이순신이 그동안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들을 해줌. 승전한 이야기들과 이순신의 병법을 듣고 진린 및 그 휘하 장수들이 감탄함...명나라에서만 듣던 연전연승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을 깨달음...이에 진린이 이순신장군을 부를때 '노아' 라고 부름. 한자그대로 읽으면 늙은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당시에는 '어르신' 이라는 표현이 노아 였음.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때, 진린이 공적이 적자, 이순신이 자신의 공적을 진린에게 내어줌. (*수급 = 적의 머리 숫자로 공적을 따짐) 진린에게 자신이 벤 적의 수급을 다 줌. 이에 진린이 또 감탄하고 그를 존경하게 됨. 조선 선조와 그 밑에 관리들이 충무공이순신을 시샘하거나 모함할때, 그것을 커버해준것이 명나라 제독 진린 이였고, 그의 존재 하나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제2의 백의종군을 시키지 못함.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충무공 이순신의 공을 기려 관직을 내려달라고해서, 충무공 이순신은 명나라 관직도 부여받았음. 물론 명예직이지만...충무공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에, 대성통곡을 하며 배위에서 울었음.
명예직 아님. 명나라에서 볼때, 조선은 명나라의 일부였고, 조선왕은 명나라 황제의 신하 였씀.
이순신은 대명제국 수군 도독의 관직을 받은거고,
그당시 진린은 부도독 이었씀.
다시말해 이순신이 진린의 상관이 된거임.
그리고, 명나라가 군대를 보낼때, 은화를 군자금으로 보내서, 그걸로 조선에 가서 식량을 돈주고 사라고 했는데,
조선에 와보니, 조선이란 나라에선 은화로 식량을 구한다는게 불가능한 경제 라는걸 깨닫고,
그후에 수백만석의 군량미를 보내게 된거임.
@@davidjacobs8558 ?
월급을 받음? 그에 맞는 일을함? 순수 말그대로 명예직임
수송을 못함....
녹둔도 전투에서 조선 백성 200명을 데리고 후퇴하는 여진족 무리들을 쫓아가 약 60명을 구출 하였는데도 북병사 이일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투옥,백의종군 즉 해임을 당하셨죠.
그리고
왜란 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조선국왕에게 미움을 받아 고문도 당하고 파직도 당했었죠. 나라가 버릴려고 했음에도 자신이 나라를 버리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을 진린은 얼마나 살리고 싶었을까... 싶습니다.
명나라로 가자고 했는데도
이순신장군님은 가지 않았고
진린이 하늘의 별이 어두워지는걸 보고
이순신 장군님에게
당신의 별이 지는데 제갈공명처럼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이순신 장군님은
자신은 제갈공명보다 못하며 제갈공명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내말을 들어 주시겠냐며 하지 않았고
이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오열했죠...
영상 그림 설명: 조선이 명에게 선물 쬐끔 주고 회사품은 엄청 큰 거 받아가면서 “폐하 무슨 문제라도?” 라고 약올리고🤪 명황제는 😩
사실 조공관계가 원래 그래서 이득 보려고 1523 일본인끼리 서로 먼저 조공하겠다고 쳐죽이던 영파의 난도 벌어졌죠.
무로마치 막부 때는 중국에하는 조공이 10년에 1번까지만 😅 반면 조선에서는 딱히 제한을 두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중앙정부뿐 아니라 각지 다이묘가 많이 조선에 조아리고 조공하러 왔죠.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중국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조공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조선입니다. 😄 여러 여진족들에게서, 시암에게서, 필리핀에게서, 자바에게서, 류큐 왕국에게서, 일본에게서. 여진은 아예 먼저 아들들을 노비로 보낼테니 거두어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조선 개국공신 여진족 이지란의 4촌이 먼터무인데 그도그랬고요.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6대 후손이 후금의 누르하치입니다. 그리고 금나라나 청나라나 (흠정만주원류고) 자신들의 기원은 신라말 고려초에 3형제 중 혼자 나와서 산 함보/긍보라고 합니다.
특히 여진족에게서 말을 조공 받아 (수입해와) 명나라에 10배 가격 뻥튀기해서 조공 (수출) 했습니다. 여진족과 거래도 명나라와도 거래도 가격은 말 크기와 품질에 따라 자세하게 의정부에서 각각 결정했습니다.
중국에하는 조공무역은 사이가 좋으면 좋을 수록 횟수 제한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제한 넘기면서 오면 국경에서 관리가 “아 쿨타임 안 끝났다고! 조공사절단 그만보내라고! 오지말라고!” 😡 문전박대당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사절단의 이름 바꿔 다른 명목으로 사절단 통과시킴ㅋㅋㅋ😜)
명나라 때 1년 정기적으로 4사까지 파견이 허락된 나라는 조선이 유일합니다. 조선초기에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원나라 잔존 세력 몰아낼 때 혹시 고려/조선이 한패가 아닌지 (고려는 몽골의 칸 선출 회의인 100인 쿠릴타이까지 참석해서 서열 5위까지 간 인척이었으니까) 의심해서 3년 1사로 낮추다가,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항복하면 1년 3사로 도로 올리고, 명나라 공주를 조선에 시집보내려고 하다가 의견차이로 취소하고 또 3년 1사로 줄이다가, 2대 황제 건문제가 숙부한테 숙청당할 위기에 내전 (정난의 변)이 일어나자 다시 안타까워져서 1년 3사로 늘립니다. 시집보냈다면 장인어른의 나라라고 군대도 보냈을 텐데 홍무제 건문제 입장에서 아쉽죠, 그거 때메 결국 아들 건문제가 패하고 형제가 황제 자리를 빼앗아갔으니. 나중에 1사 하나 더 추가해서 정기적 4사 + 특별한 일 있으면 그거 명목으로 추가로 조공사절단 파견해서 한 해에 7번까지 간 적 있습니다.
싱가포르 이전의 싱가포르, 즉 원조 동남아시아 무역허브 였던 류큐 왕국은 연락도 자주 안하는 일본보다 우대 받아 2년 1사까지 허락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류큐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간에서 양쪽의 무역을 다 주름 잡던 터라 명 입장에서도 동남아를 직접 거래할 필요없이 류큐가 중개(조공)무역하면 편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실패 후 전쟁에 돈 다쓴 서일본의 사쓰마번이 만회하려고 1609년 류큐를 침공하고 파괴하고 본토 60~80% 세율보다 가혹한 90% 세율을 매깁니다. 1609년 류큐 일제강점기때부터 살기 흉흉해지고 세금 줄이려고 임산부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아기는 돌로 눌러죽이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도;됩니다. 일본이 침공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애초에 정유재란 이유 중 하나가 1596년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 사신 앞에서 단령 입고 책봉받고 “이제 무로마치 때 하다가 끊긴 짭잘한 조공무역 재개해도 될까요🥹?“ 여쭈니 ”조공은 무슨 😡이제 너도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았으니 책봉국끼리 전쟁은 안된다. 😡얼른 조선에서 철군하기나 해라“라고 해서 체면도 깎이고 이득도 못건지고 군대는 약화되니까, 예전에 내조하라며 후방 도쿠가와에 볼모로 맡겨둔 엄마와 누나도 위협받게 되니 이판사판을 정유재란 일으킨 점도 있습니다.
좀 까칠하고 욕심도 없진 않았지만, 유능하고 의리있는 호걸이긴 했네요....ㄹㅇ 전형적인 대륙식 따거 ㅇㅇ
상술한 안 좋은 성격도, 밑바닥에서부터 출세하다 보니 독해질 수밖에 없을 거 같고요
환관이 만연하던 명나라에 부패없이 살아남으려면 인간이 독해져야
애초에 다국적군이 수립될 경우 합이 잘 맞기는 쉽지않음 그것도 중세시대 해군을
임진왜란은 당시 아시아문화권에서는 세계대전급 전쟁으로 보아야 함 태국과 류큐 그리고 누르하치의 여진도 대일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올 정도로 거대한 전쟁이었음
이 장군이 단순 전략에만 능했던 것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능력도 상당했음을 보여주는듯
물론 진린도 이 장군의 능력을 보고 난 뒤에 조선 조정이 이 장군을 고깝게 여긴다는 걸 알고 명으로 같이 가서 살자고 한 것을 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다른 명군장수들처럼 소인배라고 하긴 어렵겠다만
명군 장수들 중에도 소인배 같은 사람들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 순천왜성이었나요 수륙협공작전 할 때 돈 먹고 뒤로 뺀 새기. 유정이었나. 그런 사람 빼고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걸로 하고 오히려 목숨 바쳐 싸운 명 장수도 꽤 있답니다
다른 명군 장수들도 소인배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장군들인 마귀, 유정 장군들도 다 인격자였고 진심으로 조선이나 조선 백성들 위했었고
우리 입장에서 그들이 답답해 보였던 것은 명나라와 우리나라가 처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prohightension2000 유정 장군도 장군 능력으로서야 설왕설래가 있지만 인격적으로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조선에 가는 곳들 대부분 백성들 직접 나서 식량을 조달해서 구휼하고 군대가 민폐를 끼치지 않게 엄히 단속하는 편이었고
나중에 사르후 전투 당시에도 조선군들에게 나름 신경을 많이 써주었던 분입니다
본인을 좋지 않게 보았던 이순신도 왕에게 계속 좋은 표현을 해주면서 두둔했었고
전후 진린의 후손들이 최후까지 명을 위해 청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고 살아남은 후손들은 조선으로 망명하여 광동진씨의 시조가 되어 현재로 광동진씨와 충무공의 후손인 덕수이씨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건 유명한 이야기죠.
@MarkMoon-mw1bh 이 병신 누가 병원좀 대려가서 대가리 수술 예약좀 잡아줘라.
영상에서도 설명하듯이 진린장군 후손이 한국에 살고있죠. 한국에서도 다큐로 방영됨.
성인에게 감화되어 왕화되었으니 진린은 참된 유자가 맞다
유교에 감화된
조선이 유생의 나라가 되지 않았으면 임진왜란때 개털릴 일도 없었음ㅋ 쓰레기 유교 미화 하지 마라.
이순신 장군님에게 명나라 이름으로 쉴드를 쳐주신 고마우신분 따흑흑
영화 노량에서 진린이 하는 중국어가 명나라 당시의 언어였다니 처음 들었네요
광동어를 썻겠지
@@말설홍 그쵸
@@말설홍근고한어 씀
이순신장군님이 직접 교화시킨 명나라 장수죠.
첫날에 조선사람들을 하대했으나
이후 이순신장군님과 친해지며
조선사람에 대한 하대를 막을 정도로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였죠.
이후 노량해전이 끝난후 이순신장군님을 찾으려 왔다가 전사했다는 말로 오열했다는...
공적을 과하게 탐하기는 했지만 성웅 이순신한테는 진심으로 감화된 인물이죠(그와중에 공적은 계속 원해서 수급을 탐냈지만)
진공 그립습니다...
인품이 좋은 이순신은
일본 장수와 중국 장수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군아..
불멸의 이순신 보고 소송걸 사람 중에 한 명이 진린...ㅋㅋㅋㅋ
성인을 보고 감화되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듯. 바로앞에서도 감화는 커녕 적대했던 원균보단 훨씬 낫다
그건 사람새끼도 아닌데 두 사람 이름 옆에 끼우기도 싫음
아효,,
진린은 까칠하고 독한 사람
원균은 사람새끼 아님
진린 : 순신이형.. 나랑 명으로 가자.
정말 유익한 영상❤
0:56 근데 병사들입장에서는 그럴만도한게 그때는 명말이라 봉급이안나오고 나와도 짜게 나와서 어쩔수 약탈로 부수입을 얻어야했는데 그걸막으니 앙심을 품을수밖에 없었을겁니다. 물론 가혹행위를 정당화하자는건 아닙니다.
2:12 이거 고일권 작가님의 작품 칼부림인 거 같은데 허락 받고 쓰시는 건가요?
등자룡장군이 불멸의 이순신에조차안나온건 정말 실수같음 자기입장이 있기에 그정도면 감화되사 정말 최선다한거같음 자국병서가 남의땅서죽는걸 보는게 쉽지않죠 황제명이니 한거지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법이죠...
서로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앗을까 합니다 ..
3:35 ????
이건 잘못됐습니다.
지린은 뇌물 받고 공격안할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 장군님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이에 감명받고
자신이 뇌물을 받아 방심할테니 기습공격을 하겠다고 말한것입니다.
정확힌 먹튀했다가 맞겠죠
해석에 따라 달라질수 있기에 최대한 중의적인 표현으로 냅뒀습니다
1초에 나오는 이미지는
왼쪽은 임진록2+ 조선의 반격 명의 진린 (게임에서는 화승총을 사용) 이 맞으나
오른쪽은 거상 명의 1차 장수 이령이 전직한 2차 장수 불랑기포.
이미지 잘못 가져다 씀.
영화 노량에서 진린이 너무 쫄모 무능력한 장수로 묘사함 ㅜㅜ
그래서 감독이 마지막 전투씬에서 진린이 직접 월선하며 싸우는 장면을 넣으며 보여준 듯 너무 이미지 그렇게 나얼까봐
노량진에서 나오는 진린이라고 봄 ,,어우 안과가서 눈 검사 좀 받아야할듯,,,
스티븐 잡스 용병론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S급 인재끼리 모아 놓으면 엄청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합이 굉장히 잘 맞는다고 함. 인재들간의 업무만족도도 엄청나게 올라간다고 한다. 실 생활에서 이런 사례을 보기 힘든 건 단순히 S급 인재끼리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함. S급 재원들이 신경질적이고 고집스러워 지는 이유는 동료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함. 재능잇는 사람끼리 모아놓으면 팀웍이 놀랍게 잘맞고 S급 인재들은 퍼뜨려 놓지말고 모아놓아야한다고 설명함
TMI : 당시 만력제가 조선을 지원하는데 쓰인 비용은 현 미국 국방예산의 2배 이상이었다. 이걸 생각하면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얼마나 힘든 정책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현대로 따지면 미국 해군참모총장이 대한민국 참모총장을 "sir, father 이런 식의 존칭을 붙이는 것과 같겠죠
명나라 때 중국어 구현이라니 기대되네요 ㅎㅎ
광동어 가 명나라 때 중국어와 비슷함.
만다린은 만주족이 중국어를 확 바꿔논거임.
인도인들이 하는 영어 비슷한거임.
@@davidjacobs8558?
@@davidjacobs8558 ㄴㄴ 이미 원대 이후 몽골족들이 화북지방 이후 센발음 받침발음 싹 없애버림. 명대이후 영락연간 이후 숭정연간까지 지금의 보통화랑 크게 차이는 없음. 청의 만주족들이 북경을 차지하면서 만주어의 발음과 섞여진게 지금의 베이징 동북지방 사투리에 얼화 발음
한국전쟁때 중국측 선전영상보면 지금이랑 다릅니다 남방중국어의느낌이 납니다
훈련도감 도와준 낙상지 담으로 호감가는 극소수의 명나라 대단하다고 느끼네요
남의 나라 .. 전쟁 도와주러 온 명나라군인데
대다수가 호감 가야 맞는거 아닌가??
호감가는 사람이 극소수라고??
+양호, 마귀, 해생, 송응창
사실 명장수들이 악덕한 부분도 많고 참빚같다는 소리를 할정도로 쓰레기인부분도 많았으나 어쨋거나 마귀양호 같은 명장도 있었고
명에서 지원은 많이 해준게 사실임
그래서 인조가 명을 못버린거기도 하고
명군은 6.25때 미군 급인데
@@T.T-g4g 그건아님 미군은 아예 625를 지휘했고 실제로 목숨걸고 치뤄준 편이지만
명군은 계속 방해하고 소극적이고 국민들 수탈하고 하는경우가 꽤 있었음
물론 그래도 명군 없었으면 전쟁이 끝날수는 없었고 지원해준덕에 이렇게라도 막아준거지
치파오 박님은 가문(家紋)이 히데요시랑 같네요.....
일부러 표시를 하신것???
지난 영상에서는 중국놈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여긴 일본놈 ㅋㅋㅋ
노야
2:46 그냥 능력으로 큰 사람이니 출신보다 능력을 존중해서 그런거겠지..
합치면 노량진린->노량진에 사는 사람
임진왜란이후명장수중두사충이란장수가조선에귀화한경우도있죠
This movie has clothes and armor. The Chinese soldiers and the Chinese army did very well. Haven't you studied? Film directors, you guys should go watch the ming dynasty series movie.
그래도 이자성의 난과 오삼계의 배신 같은 개막장을 안 보고 죽었네. 그것도 복이다.
거상 하는데 불랑기포가 여기로 이끌었다
그 후손이 조선에 귀화했군요 오늘도 상식이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린을 돕다가 전사?
어느 문헌에 나오는지?
왜적들이 관음포(과거는 지금보다 훨씬 깊은 포구였고, 야간 전투였으므로 탈출로로 착각함)로 들어갔다가 퇴로가 막히자 죽기살기로 탈출하려고 할 때, 날이 트고 혼전에서 전사하셨건마는...
건들건들에 나오던 그 분 채널인가요?ㅇㅅㅇ
:)
한가지 확실한건 선조보다는 100퍼 났다는거임
어르신 어찌 이소인을두고 가시오: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들은 진린이한말
첨에 게임에서 나오는 케릭터 오른쪽은 이령 (불량기포)에요 ㅡㅡ
우리도 중세한국어로 하ㅈ...
딱 저 그림만 보면 오달수가 떠오르는데
진린이 초반에 조선을 보았을 당시의 시선으로 보면 진짜 답없는 병신으로 봤을듯
진린. 지린다
뇌물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정도는 아니었나 보네 ㅋㅋㅋ
그냥 열심히 살다보니 좀 싹수가 없어진 것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남아있음
출정해서 요동에 머무를때 조선에서
선물을 보냈는데 아직 공이 없어
받을수 없다고 거절 돌려보냈음
전쟁이 끝나고 다시 조선에서 선물을
보냈는데 지필묵만 받고 나머진
돌려보냈음 일부러 주는것도 거절한
기록이 있는데 뇌물을 밝혔을리가 없지
@@parksanggyu1280근데 수급에는 미쳐있던 ㅋㅋ
@@노야진린의바다 적 수급은 당시로 치면, 성적표, 실적표라 본인이 아니더라도 휘하 장병들을 위해서라도 수급은 필요했음.
진린 도독.. 김채원 도독이..
칼의 노래에서 김훈 작가가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명나라 군함이 조선의 판옥선보다 크다고 묘사하는 사대주의를 보여주죠 실제는 조선의 판옥선이 한중일 삼국중 가장 크고 튼튼했습니다
@@DoJM-y 소설이어도 사실로 쓸건 써야하는거임
김훈 그자는 경상도 출신 김완장군(촐싹 방정 캐릭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게 한 ㅂ ㅅ 임.
좋은
고마운
말이 너무 빨라요.
진린이 노량에서 연락선 하나 걍 눈감아줬다는데 그러면 뇌물을 안받았을거같지는 않고 약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네요
이순신한테 바로 갔다 했으니 받긴 받았는데 먹튀했다가 맞겠죠
그 만력제는 좀... 우리입장에선 ㄹㅇ 천자라서...
음? 내가 아는 역사에서는 진린이 뇌물 받아서 일본수군이 도망가게 길을 터 줬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이런 역사의 출처는?
진짜 명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은 아군이 된 적 보정이네요ㅋㅋ
적일적인 고구려때는 그렇게 잘 싸우더니 같은 편이 된 조선은 일본에 개쳐발리는ㅋㅋㅋ
200년동안 북방빼곤 정규군이랑 싸워본적이 그리 많지 않았을텐데 그정도 비빈거면 대단한거지요 ㅋㅋ
그래도 이탈리아에 비하면 양반... 조선은 적어도 자기가 힘 없다는 거 알고 안 나가려고 하는데 이탈리아는 프랑스 침공했다가 산악부대한테 막힘 당연히 히틀러한테 계속 도움요청
실록외 야사가 포함된거 같은데
백윤식님도 좋지만 성우 김기현님이었으면 하는 아쉬움
미화를 많이 해놨네... 노량해전 때는 고니시 뇌물은 일단 받았고, 인질로 조카를 포함한 500명의 병사들을 고니시의 배에 태움... 그 500명은 이후의 기록이 없음...
진도도도독
좌도독? 우리에겐 김도독 김채원이 있다
진린은 황명거역으로 말리다가 죽은거지.
그게 아니면 둘다 죽을 이유가 있을까?
아마 항명거부로 결국 참수했겠지. 그동안 참았던 부관들도 팍쳐서 진린을 쳐바르고 바다에 던졌겠지.
한국에서만 진린을 의리남이라고 구라치고
죄송한데 어디 이세계 이야기인가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분 뭐라고 하는지 저만 못 알아듣는 거 어니죠?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은데
충무공 전사하고 3일 밤낮을 통곡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