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왜와 해상교역을 할 정도로 그당시 뛰어난 항해술을 보유했고 삼림자원도 풍부했지만 기마병력 육성에 너무 집중해서 나당동맹을 끊을 수 있는 함대를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백제도 사실 일찍이 해양력을 키웠지만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지 못해 호족간의 힘을 결집하는데 실패했으며 평야가 많아 삼림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서 결국 해양력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산지가 많아서 선박의 재료인 목재를 쉽게 구했고 중앙집권체제 확립 및 강화로 고구려, 백제를 해상에서 부터 눌러버렸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해상에서부터 눌러버렸다? 과장이 과한 듯하군요. 전체 전력에서 압도한다 한들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해야 했고 백제는 고구려만큼은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역시 당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었고 와코쿠(왜국)과의 교류도 필요했던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한강 유역에만 자원을 가용할 수 있는 신라의 입장이 다행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신라의 수군이 약진하는 시기는 바로 문무대왕 때입니다. 그 이전의 신라 수군은 꾸준히 발전해왔음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지요.
솔직히 고구려는 영토만 크지 실제적으로는 군대를 운용할수 있는 인구가 너무 적었으며 큰 영토에 비해서 영양가가 있는 영토가 너무 적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무너진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지요. 그리고 백제는 평야지대도 많고 지름진 영토가 많이 있었지만 나라 자체가 건국하게 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지도 못하고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제대로 무너진 경우이지요. 하지만 신라는 늦게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지만 그만큼 탄탄하게 인구도 많이 있었으며 산에 막힌 부분은 있었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절묘한 외교력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당나라와의 동맹을 하여 광대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와 문화재가 많은 백제를 순식간에 멸망시킬수 있는겁니다. 그래서 신라가 마지막에 승자가 되었지요.
@@화련의백꽃 /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지만 거두절미하고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은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절묘한 외교력이 너무 좋았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외교력이 좋은데 다음과 같이 징징대나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정관(貞觀)] 17년(A.D.643; 신라 선덕여왕 12년) 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고려(高[句]麗)와 백제가 여러 차례 번갈아 공습을 하여 수십 성(城)을 잃었는데, 두 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신(臣)의 사직(社稷)을 없애려 합니다.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어 대국에 보고를 하오니, 약간의 군사로나마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상언(上言)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신라(新羅)」 유신공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던 시점임을 감안 해도 당시 신라가 얼마나 외교든 국방이든 난맥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반면 같은 신라 사신이라도 당시로서는 일개(!) 진골 귀족이었던 김법민(훗날의 문무대왕)은 어려운 현실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외교를 보여주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 훗날 문무대왕)이 (당 고종 이치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마침내 방패와 창을 들고 번갈아 쳐들어오니 큰 성과 중요한 진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국토가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약해졌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는다면 곧 〔우리〕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쳐서 빼앗겠습니다. 단지 옛 땅만 얻으면 곧 화해하자고 청하겠습니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 의자왕(義慈王) 11년(서기 651년)」 진골 귀족 혹은 태자 시절의 문무대왕을 제외하면 신라 사신들의 아니 김춘추의 외교라는 것이 그 모양이었습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그렇고요. 문무대왕의 행동은 이미 진흥왕 이후의 여타 신라 임금들이나 사신들 그리고 김춘추와는 남달랐습니다. 우선 외교적으로 당나라 사신을 백제에 보내게 하고, 이것이 잘 안 될 경우 우선 신라군을 동원한다는 방식이지요. 밟을 단계를 다 밟은 후에 최후에 원병을 청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친 것입니다. 이러한 ‘농도 조절’이 있어야 진짜 외교인데 김춘추를 보면 이런 부분이 없다시피 하지요. 더구나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했던 짓을 보면 저 『정사삼국지』의 위 무제 조조가 장수(張繡 ? ~ 207)에게 했던 행위와 완전히 대조를 이룹니다. 정말로 삼국통일의 웅지가 있었다면 김춘추가 했어야 할 일은 소열(소정방)을 구워삶아 의자왕을 외교력으로 양도 받고 형식적으로나마 의자왕을 예우하는 자세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춘추는 그런 것 1도 없었지요. 이것을 두고 무슨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절묘한 외교력이 너무 좋았습니다’인지요? 지극히 의문입니다.
신라가 통일을 했던 강력한 이유는 바로 감각적인 외교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강대국 당나라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한민족끼리 하나로 뭉치면서 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가장 현실적인 첫번째 통일을 한건 정말 좋다고 말해봅니다. 다만 나중에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쪽에 같은 한민족 국가인 발해가 대조영에 의하여 건국됨으로써 분단된 통일이 된점은 정말 아쉽긴 했지만 그 덕분에 발해가 신라를 지키고 당나라가 더 이상 침략을 못한 점은 정말 절묘한 외교력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꺼라 생각합니다. 뭐 이걸 비겁한 통일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신라는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 했고 그 후 발해와 신라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지만 말기에 와서 발해가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분단되어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고려의 시조인 왕건에 의하여 삼국 재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고려가 한민족의 완전한 통일 왕조로써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은 왕건이 되는겁니다. 그리하여 고려는 한민족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는 통일 왕조로써 강력한 한민족 왕조가 됩니다. 我认为新罗之所以统一,是因为具有感性的外交能力。 虽然拉拢了强国唐朝,但我认为同为韩民族团结在一起,打败强国唐朝,实现最现实的第一次统一是非常好的。 只是后来在满洲地区和韩半岛北部同为韩民族国家的渤海被大祚荣建立,实现了分裂的统一,这一点虽然令人遗憾,但得益于此,渤海守护了新罗,唐朝再也没能进行侵略,可以说这是绝妙的外交能力的胜利。 我认为没有必要断定这是卑鄙的统一。 南北国时代的渤海和新罗发挥了自己的智慧,此后渤海和新罗长期维持和平关系,但到了末期,渤海灭亡,分裂为后三国,经过无数战争后,依靠高丽始祖王建实现了三国再统一,高丽作为韩民族的完全统一王朝而进一步成长。 最终主人公就是王建。 因此,高丽作为实现韩民族黄金时代的统一王朝,成为了强大的韩民族王朝。
고구려가 삼국 통일 했으면 우리나라 땅 만주까지 가는거 아님? 신라가 당나라 끌여들여서 고구려 백제 멸망시키고... 차라리 고구려랑 신라랑 백제랑 같이 연방국가 만들어서 당나라 멸망시키면 더 큰 나라 됐을 수도... 신라 삼국통일이 아니라 고구려가 통일 하던지 삼국이 연방국가 만들어서 당나라를 망하게 하던지 했어야 함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우리 지금 중국말 쓰고 있을거임 그 당시 같은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음. 백제는 같은 민족인 신라보다 일본이랑 더 친했고, 고구려도 잘 나갈 땐 말걀족 부리면서 신라한테 보호비로 삥뜯고 속국화 시켰음.. 땅 넓다고 센 게 아닙니다. 결국 역사에서 보듯 군사력이 강한 이미지이지만, 바보온달 이야기(그러고 보니 온달장군도 북방 이민족 출신 이민자네요)만 보더라도 고구려가 무조건 이기지도 않고 신라한테 전쟁에서 지기 시작하고 결국 연개소문 자식들 때문에 나라가 갈라져서 망했잖아요. 신라도 통일과정에서 당나라의 침공을 막았고 그 이후에도 당나라랑 사이 안 좋다가, 당나라가 발해도 신경써야해서 관계회복한 거임. 지금 봐서는 우아한 통일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신라의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던 거고요.
고구려 통일도 좋지만 그래도 강한자가 살아남은게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고!! 신라 통일로 인하여 한민족이 하나로 뭉친 계기가 된거 같아요. 물론 나중에 한반도 북쪽과 만주 지역에 발해가 건국되어서 한민족의 두 국가인 신라와 발해가 존립하게 되고 강대국인 당나라가 침략을 못하니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려의 시조이자 영웅인 왕건이 분열된 삼국을 재통일하여 고려가 진정한 한민족의 통일 왕조가 된 것을 보면 정말 역사는 알수 없다고 생각해요.
신라가 통일을 했던 강력한 이유는 바로 감각적인 외교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강대국 당나라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한민족끼리 하나로 뭉치면서 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가장 현실적인 첫번째 통일을 한건 정말 좋다고 말해봅니다. 다만 나중에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쪽에 같은 한민족 국가인 발해가 대조영에 의하여 건국됨으로써 분단된 통일이 된점은 정말 아쉽긴 했지만 그 덕분에 발해가 신라를 지키고 당나라가 더 이상 침략을 못한 점은 정말 절묘한 외교력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꺼라 생각합니다. 뭐 이걸 비겁한 통일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신라는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 했고 그 후 발해와 신라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지만 말기에 와서 발해가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분단되어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고려의 시조인 왕건에 의하여 삼국 재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고려가 한민족의 완전한 통일 왕조로써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은 왕건이 되는겁니다. 그리하여 고려는 한민족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는 통일 왕조로써 강력한 한민족 왕조가 됩니다
감각적인 외교력? 김춘추의 증조부인 진흥왕이나 아들인 문무대왕의 경우라면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김춘추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얼치기 외교'인데요? 단적으로 말해 김춘추는 진흥왕이나 문무대왕에게 있었던 '농도 조절'이라는 것이 없다시피 합니다. 한 짓이라고는 당나라에 징징대고 X싸질러대는 짓거리가 전부이다시피 했지요. 당나라의 막대한 전력 투입과 유신공의 혈전으로 백제 수도 점령한 것 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매듭지은 것 없이 죽었습니다. 다만 후계자인 문무대왕이 수습을 잘 했고, 전시 수상인 유신공이 불퇴전의 각오로 임했기 때문에 업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절묘한 외교력을 발휘한 사람은 화전양면정책을 사용한 문무대왕이었지 김춘추가 아니었으니까요.
[#어쩌다어른] ⏳한국사 시간 여행⏳ 설민석 강의 몰아보기
🎁ruclips.net/p/PLD4pVarYYTDCSLBO8bNn-8AAmCuYSZm-o
[#어쩌다어른] 👏명강의 몰아보기👏
🌈ruclips.net/p/PLD4pVarYYTDAWPZNINDG6plKEs0ly9_kk
마지막 문장은 진짜 소름이다
강한자가 이긴게 아니라 이긴자가 강한거라고...
"강한자가 이기는게 아니고 이기는자가 강한 것"을 실천한 나라가 바로 신라라고 생각합니다 ^^
고구려가 왜와 해상교역을 할 정도로 그당시 뛰어난 항해술을 보유했고 삼림자원도 풍부했지만 기마병력 육성에 너무 집중해서 나당동맹을 끊을 수 있는 함대를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백제도 사실 일찍이 해양력을 키웠지만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지 못해 호족간의 힘을 결집하는데 실패했으며 평야가 많아 삼림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서 결국 해양력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산지가 많아서 선박의 재료인 목재를 쉽게 구했고 중앙집권체제 확립 및 강화로 고구려, 백제를 해상에서 부터 눌러버렸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해상에서부터 눌러버렸다? 과장이 과한 듯하군요. 전체 전력에서 압도한다 한들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해야 했고 백제는 고구려만큼은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역시 당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었고 와코쿠(왜국)과의 교류도 필요했던 것을 감안하면 비교적 한강 유역에만 자원을 가용할 수 있는 신라의 입장이 다행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신라의 수군이 약진하는 시기는 바로 문무대왕 때입니다. 그 이전의 신라 수군은 꾸준히 발전해왔음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지요.
솔직히 고구려는 영토만 크지 실제적으로는 군대를 운용할수 있는 인구가 너무 적었으며 큰 영토에 비해서 영양가가 있는 영토가 너무 적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무너진 나라가 바로 고구려이지요. 그리고 백제는 평야지대도 많고 지름진 영토가 많이 있었지만 나라 자체가 건국하게 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지도 못하고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에 제대로 무너진 경우이지요. 하지만 신라는 늦게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지만 그만큼 탄탄하게 인구도 많이 있었으며 산에 막힌 부분은 있었지만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절묘한 외교력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당나라와의 동맹을 하여 광대한 영토를 가진 고구려와 문화재가 많은 백제를 순식간에 멸망시킬수 있는겁니다. 그래서 신라가 마지막에 승자가 되었지요.
@@화련의백꽃 /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지만 거두절미하고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은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절묘한 외교력이 너무 좋았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외교력이 좋은데 다음과 같이 징징대나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정관(貞觀)] 17년(A.D.643; 신라 선덕여왕 12년) 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고려(高[句]麗)와 백제가 여러 차례 번갈아 공습을 하여 수십 성(城)을 잃었는데, 두 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신(臣)의 사직(社稷)을 없애려 합니다.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어 대국에 보고를 하오니, 약간의 군사로나마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상언(上言)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신라(新羅)」
유신공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던 시점임을 감안 해도 당시 신라가 얼마나 외교든 국방이든 난맥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반면 같은 신라 사신이라도 당시로서는 일개(!) 진골 귀족이었던 김법민(훗날의 문무대왕)은 어려운 현실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외교를 보여주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 훗날 문무대왕)이 (당 고종 이치에게) 아뢰어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마침내 방패와 창을 들고 번갈아 쳐들어오니 큰 성과 중요한 진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국토가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약해졌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는다면 곧 〔우리〕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쳐서 빼앗겠습니다. 단지 옛 땅만 얻으면 곧 화해하자고 청하겠습니다.’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 의자왕(義慈王) 11년(서기 651년)」
진골 귀족 혹은 태자 시절의 문무대왕을 제외하면 신라 사신들의 아니 김춘추의 외교라는 것이 그 모양이었습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그렇고요. 문무대왕의 행동은 이미 진흥왕 이후의 여타 신라 임금들이나 사신들 그리고 김춘추와는 남달랐습니다. 우선 외교적으로 당나라 사신을 백제에 보내게 하고, 이것이 잘 안 될 경우 우선 신라군을 동원한다는 방식이지요. 밟을 단계를 다 밟은 후에 최후에 원병을 청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비친 것입니다. 이러한 ‘농도 조절’이 있어야 진짜 외교인데 김춘추를 보면 이런 부분이 없다시피 하지요. 더구나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했던 짓을 보면 저 『정사삼국지』의 위 무제 조조가 장수(張繡 ? ~ 207)에게 했던 행위와 완전히 대조를 이룹니다.
정말로 삼국통일의 웅지가 있었다면 김춘추가 했어야 할 일은 소열(소정방)을 구워삶아 의자왕을 외교력으로 양도 받고 형식적으로나마 의자왕을 예우하는 자세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춘추는 그런 것 1도 없었지요. 이것을 두고 무슨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는 절묘한 외교력이 너무 좋았습니다’인지요? 지극히 의문입니다.
e학습터에서 온사람
신라가 통일을 했던 강력한 이유는 바로 감각적인 외교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강대국 당나라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한민족끼리 하나로 뭉치면서 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가장 현실적인 첫번째 통일을 한건 정말 좋다고 말해봅니다. 다만 나중에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쪽에 같은 한민족 국가인 발해가 대조영에 의하여 건국됨으로써 분단된 통일이 된점은 정말 아쉽긴 했지만 그 덕분에 발해가 신라를 지키고 당나라가 더 이상 침략을 못한 점은 정말 절묘한 외교력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꺼라 생각합니다. 뭐 이걸 비겁한 통일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신라는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 했고 그 후 발해와 신라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지만 말기에 와서 발해가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분단되어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고려의 시조인 왕건에 의하여 삼국 재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고려가 한민족의 완전한 통일 왕조로써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은 왕건이 되는겁니다. 그리하여 고려는 한민족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는 통일 왕조로써 강력한 한민족 왕조가 됩니다.
我认为新罗之所以统一,是因为具有感性的外交能力。 虽然拉拢了强国唐朝,但我认为同为韩民族团结在一起,打败强国唐朝,实现最现实的第一次统一是非常好的。 只是后来在满洲地区和韩半岛北部同为韩民族国家的渤海被大祚荣建立,实现了分裂的统一,这一点虽然令人遗憾,但得益于此,渤海守护了新罗,唐朝再也没能进行侵略,可以说这是绝妙的外交能力的胜利。 我认为没有必要断定这是卑鄙的统一。 南北国时代的渤海和新罗发挥了自己的智慧,此后渤海和新罗长期维持和平关系,但到了末期,渤海灭亡,分裂为后三国,经过无数战争后,依靠高丽始祖王建实现了三国再统一,高丽作为韩民族的完全统一王朝而进一步成长。 最终主人公就是王建。 因此,高丽作为实现韩民族黄金时代的统一王朝,成为了强大的韩民族王朝。
클래스팅으로온사람 손
설씨는 은나라 설임금에서 유래
레오코큰루삥뽕
고구려가 삼국 통일 했으면 우리나라 땅 만주까지 가는거 아님?
신라가 당나라 끌여들여서 고구려 백제 멸망시키고...
차라리 고구려랑 신라랑 백제랑 같이 연방국가 만들어서 당나라 멸망시키면
더 큰 나라 됐을 수도... 신라 삼국통일이 아니라 고구려가 통일 하던지
삼국이 연방국가 만들어서 당나라를 망하게 하던지 했어야 함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우리 지금 중국말 쓰고 있을거임
그 당시 같은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음. 백제는 같은 민족인 신라보다 일본이랑 더 친했고, 고구려도 잘 나갈 땐 말걀족 부리면서 신라한테 보호비로 삥뜯고 속국화 시켰음..
땅 넓다고 센 게 아닙니다. 결국 역사에서 보듯 군사력이 강한 이미지이지만, 바보온달 이야기(그러고 보니 온달장군도 북방 이민족 출신 이민자네요)만 보더라도 고구려가 무조건 이기지도 않고 신라한테 전쟁에서 지기 시작하고 결국 연개소문 자식들 때문에 나라가 갈라져서 망했잖아요.
신라도 통일과정에서 당나라의 침공을 막았고 그 이후에도 당나라랑 사이 안 좋다가, 당나라가 발해도 신경써야해서 관계회복한 거임.
지금 봐서는 우아한 통일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신라의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던 거고요.
고구려가 당나라한테 쳐맞고 간신히 이겼는데 뭔 삼국통일이여 그리고 고구려가 통일했다치면 북방 유목민족이나 중국이 가만히 냅뒀겠음?
@@yongski0708 고구려 김씨인디
고구려 통일도 좋지만 그래도 강한자가 살아남은게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고!! 신라 통일로 인하여 한민족이 하나로 뭉친 계기가 된거 같아요. 물론 나중에 한반도 북쪽과 만주 지역에 발해가 건국되어서 한민족의 두 국가인 신라와 발해가 존립하게 되고 강대국인 당나라가 침략을 못하니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려의 시조이자 영웅인 왕건이 분열된 삼국을 재통일하여 고려가 진정한 한민족의 통일 왕조가 된 것을 보면 정말 역사는 알수 없다고 생각해요.
@@justinjeong813 계루부고씨임
그래봤자 신라는 나쁜넘들임
그래도 나중에 왕건이 후삼국 통일하여 고려를 강력한 국가로 만든 점이 있기에 신라 통일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
@@류관호-o3q 네 저도 신라의 자손이니 ㅎ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신기하네. 역사를 현대의 관점에서 보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찌질한 놈아 너도 신라의 후예다
신라가 통일을 했던 강력한 이유는 바로 감각적인 외교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강대국 당나라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한민족끼리 하나로 뭉치면서 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가장 현실적인 첫번째 통일을 한건 정말 좋다고 말해봅니다. 다만 나중에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쪽에 같은 한민족 국가인 발해가 대조영에 의하여 건국됨으로써 분단된 통일이 된점은 정말 아쉽긴 했지만 그 덕분에 발해가 신라를 지키고 당나라가 더 이상 침략을 못한 점은 정말 절묘한 외교력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꺼라 생각합니다. 뭐 이걸 비겁한 통일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해요.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신라는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 했고 그 후 발해와 신라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지만 말기에 와서 발해가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분단되어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 나서는 고려의 시조인 왕건에 의하여 삼국 재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고려가 한민족의 완전한 통일 왕조로써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은 왕건이 되는겁니다. 그리하여 고려는 한민족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는 통일 왕조로써 강력한 한민족 왕조가 됩니다
감각적인 외교력? 김춘추의 증조부인 진흥왕이나 아들인 문무대왕의 경우라면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김춘추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얼치기 외교'인데요? 단적으로 말해 김춘추는 진흥왕이나 문무대왕에게 있었던 '농도 조절'이라는 것이 없다시피 합니다. 한 짓이라고는 당나라에 징징대고 X싸질러대는 짓거리가 전부이다시피 했지요. 당나라의 막대한 전력 투입과 유신공의 혈전으로 백제 수도 점령한 것 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매듭지은 것 없이 죽었습니다. 다만 후계자인 문무대왕이 수습을 잘 했고, 전시 수상인 유신공이 불퇴전의 각오로 임했기 때문에 업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절묘한 외교력을 발휘한 사람은 화전양면정책을 사용한 문무대왕이었지 김춘추가 아니었으니까요.
클래스팅으로온사람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