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자들의 추종하는 일제의 낙랑 평양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 오순제 교수의 낙랑군 조작에 대한 강좌 1부

Поделиться
HTML-код
  • Опубликовано: 10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23

  • @sanghwanoh200
    @sanghwanoh200 Год назад +1

    응원합니다

  • @단기4357-l8f
    @단기4357-l8f 2 года назад +4

    👍👍👍👍👍👍

  • @msk8224
    @msk8224 2 года назад

    재미있습니다^^

  • @kibumkim3073
    @kibumkim3073 2 года назад +4

    강의를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합니다..... 어서빨리 이런 의견이 제도권의 주류가 되어야할텐데요....

  • @갈기-c1e
    @갈기-c1e 2 года назад +4

    그렇습니다.
    이 놈, 저 놈 하시니 듣기 너무 좋습니다~

  • @동그란세모
    @동그란세모 2 года назад +3

    교수님!
    훌륭하십니다.
    존경합니다.

  • @서호찬-r2t
    @서호찬-r2t Год назад

    점쟎은 말투완 반전의 사이다 역사강의!!

  • @antibody_algorithm
    @antibody_algorithm 2 года назад +3

    👍👍👍👍

  • @하늘가을-o1y
    @하늘가을-o1y 2 года назад +2

    일제시대보다 현재가 정보기술 과학기술 교통 통신이 발달했는데 지금하는 고증이 더 실증적이죠
    군국주의 적들의 하수인들이 만든 우리나라의 역사를 우리가 아무 검증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불가입니다
    자신들이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관해 쓰다 머시기 같은 사람보다 못한 학자라고 자처하는 못난 꼴도 못 봐주겄어요

  • @하늘가을-o1y
    @하늘가을-o1y 2 года назад +3

    저는 교수님이 쓰다나 이마니시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보다 우리나라 역사에 관해 더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하시고 있다고 봅니다

  • @타미드LOG
    @타미드LOG 2 года назад

    요하문명->요서의 왕검조선->전기진국(북진한 주도)->열국-후기진국->삼국...이렇게 고대사를 이해하고 싶다.

  • @seahawk7893
    @seahawk7893 Год назад

    식민사학자라는 말도 우습지만 명백하게 유적 유물이 발굴되었는데도 일제의 농간 취급하면서 학계를 우롱하는 이런 유.사. 역사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발전은 가로막는 큰 장애물임

  • @suhminsuk
    @suhminsuk 2 года назад +5

    교수님~ 이놈저놈 부르게 너무 좋습니다...

  • @bamas26
    @bamas26 4 месяца назад

    2009년에 낙랑에서 인구조사를 하는 호구부가 발견됐어요.
    이건 한나라 번률에 의해 인구 변동을 조사하는 문서입니다.
    그외에도 논어 죽간도 같이 발견됐어요...
    사실상 낙랑연구는 끝난셈입니다.
    뭐가 더 남았을까요?
    15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한 우리나라에 낙랑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네요.
    우리의 고대사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왜.. 황해도 평안도외에는 문명에 수준이 보이는 유물이 안 나올까요?
    심지어 한자는 우리민족이 만들었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 @의통제일
      @의통제일 Месяц назад

      죽간 가짜라고 나온 것같은디요....일제가 쓰던 용어가 발견된 걸로......식민사학은 부정하겠징요.

  • @내곰돌이
    @내곰돌이 Год наза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등록된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낙랑군이 평양이다 라고 나와 있네요)
    시대 고대/초기국가
    건립시기 낙랑시대
    성격 성곽, 토축성
    유형 유적
    소재지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
    분야 예술·체육/건축
    요약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에 있는 낙랑시대의 토축성.
    내용
    현재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성 안에 건물터·도로·하수구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대동강 남쪽의 언덕에 있으며, 성 안의 땅은 고르지 않지만 북쪽으로 강줄기가 나고 동쪽으로도 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어 천연적인 참호구실을 하게 되어 있다. 또, 주위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평지에 성을 쌓는 중국식 터잡음[城基]을 엿볼 수 있다.
    토성은 동서 약 709m, 남북 599m의 크지 않은 정방형으로 이루어졌는데, 보루의 붕괴가 심하다. 성 안에서는 집터·관청·도로·하수도 등의 자취가 발굴되었고, 유물로는 막새기와·벽돌·봉니(封泥)·거울·화폐와 화폐를 주조하였던 틀, 구리화살촉·장신구 등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글자가 새겨진 기와·벽돌·거울·도장 등이 많이 나왔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성은 낙랑의 중심지이자 조선현(朝鮮縣) 지역의 땅으로서 낙랑군청과 조선현청이 모두 이 성 안에 있었고, 후기낙랑 시대에는 동부도위(東部都尉)와 남부도위(南部都尉)의 모든 현까지도 관할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성을 중심으로 동서 20리, 남북 10리 주변에는 약 1,300기의 크고 작은 고분들이 흩어져 있는데, 중국 한대(漢代)의 묘제를 따른 목곽·토곽묘들이 대부분이며, 화려한 장신구들을 포함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문화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