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을 읽다보면 너무 어려운데 한가지 확실한건 진짜 하느님 말 안듣다 혼난다 였던거 같아요. ㅋ 왜케 말을 안 듣고 계속 정신 못차리는지 ~~ 역사나 문화등을 이해하고 성경을 접하면 더 쉽게 이해한다는 신부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 오류를 항상 알려주시고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게끔 길을 알려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성경책을 읽을수록 어렵습니다 나름 찾아본다고 찾아보고 이해하려하지말고 그냥 덮어놓고 믿어야하나 할수록 더더욱 반감이 듭니다 궁금한거있으면 물어보라는 신부님 말씀에 용기내서 여쭤봅니다 1. 아벨의 제사는 즐겨받으신 하느님께서 왜 아벨은 지켜주지 않으시는지요? 그럼 우리는 어떤마음으로 주님을 모셔야하는 건가요? 2.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알겠는데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아브라함의 나이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자손을 낳는것으로 기록되어있고 사라도 그나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취할정도의 미모와 매력을 지닌 부분은 왜 떼어놓고 모든 강의에서 불가능한 상황만을 강조할까요? 제가 순수하지 못한 문제일까요? 차동엽신부님 강의도 다 들었는데도 막상 성경책을 읽으려면 이런 쓰잘데기없는 궁금증에 진도가 나아가지도 깊은 울림도 없어 답답합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네 질문 감사합니다. 일단 창세기라는 책의 특성을 알아야 나머지 문제가 풀릴 듯 합니다. 먼저 창세기는 하느님의 계시의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그 내용은 신화적인 방식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사회상이나 세계관 안에서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야하고 그 당시의 세계관도 생각해야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또한 창세기는 세상의 기원과 이스라엘 선조들의 기원, 팔레스티나 지역의 종족들의 기원들을 설명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러한 커다른 사실들을 생각하시는 가운데 읽어야 합니다. 1.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카인의 아벨의 제물은 안 받으셨다는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제물은 받았다가 안 받았다가 아니라, 카인이 어떻게 제물을 드렸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이를 본다면 카인은 먼저 옳지 못한 행동 속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제사는 값비싼 제물을 바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제사는 하느님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정의와 공정의 흐르도록 하는 제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카인과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의 모습이 들어가 있습니다. 카인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형벌을 짊어지기 힘들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표식을 남겨 주시어 그의 목숨을 지켜 주십니다(참조 창세 4,13~15). 2.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모든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시간의 개념과 지금의 시간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계시 헌장의 한 대목을 통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12항)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을 지고 가실적에 그분들 곁에는 여인들만 있었던것 같은데 제자들은 숨어있었던걸까요? 그 당시에 여성은 사람의 수에도 들지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어떤 보복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였을텐데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의 곁을 지키고 함께하던 그들의 모습에 감동이 전해져 오더라구요. 복음서 저자들은 제가 느낀것 처럼 그들의 용기를 기록하고 싶었던걸까요?
일단 자매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 때, 제자들은 숨어 있었고 여인들만이 그 길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이는 역사적으로 확실하니까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고 썼을 것 같습니다. 또한 자매님의 말씀처럼 여인들의 용기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이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힘이 없는 소외 받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세상에 소외 받은 이들이 더욱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해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부님 궁금합니다.^^ 마르코 복음 9장23절 " '하실 수 있으면'과 14장35절 '하실 수만 있으면'이 같은 뜻으로 읽혀서 어리둥절했었습니다. 후에 14장의 '하실 수만 있으면'이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으로 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부분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바른 해석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마태 27,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루카 23, 46)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 30)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때에 하셨던 말을 마태,마르,루카와 요한복음의 저자는 왜 다르게 전하고 있는건가요? 번역의 차이인가요?
일단 번역의 차이가 아니라 각 복음서마다 각자의 신학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십자가 위에서의 내용을 다르게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서를 읽는 대상과 십자가의 의미를 각자 다름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오의 내용은 시편 22편의 말씀 안에 담긴 한탄과 신뢰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루카는 영을 아버지께 맡김의 모습을 전해주고 했고,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사랑의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 그 사명을 살아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정리해 보자면,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달이 주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각자의 숙고 안에서 그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23장에 강도이야기가 나오잖아요. 한 강도가 주님께 "예수님,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길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는 부분을 읽고 저는 고민이 들었어요. 강도나 살인자 학살자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목회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정말 회심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서요.. 답답했어요. 이것은 주님이 판단하시는건가요..? 같은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라고 생각은 들어요 그래도 주님을 섬긴다면 자신의 행동이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는것을 왜 모르는건지 전 좀 답답하더라구요.
루카 3장을 보시면 회개라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물음에 세례자 요한은 각자의 삶 속에서 변화된 삶을 살도록 알려 줍니다. 결국 회개라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합당한 열매라고 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서 변화된 목회의 삶을 통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면 상관 없지만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안드레아 신부님
충분한 설명 으로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구약을 읽다보면 너무 어려운데 한가지 확실한건 진짜 하느님 말 안듣다 혼난다 였던거 같아요. ㅋ 왜케 말을 안 듣고 계속 정신 못차리는지 ~~
역사나 문화등을 이해하고 성경을 접하면 더 쉽게 이해한다는 신부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
오류를 항상 알려주시고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게끔 길을 알려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아악...알림이 왜 늦게 온 것인가 ㅠㅠ
신부님 ~~성경책을 읽을수록 어렵습니다 나름 찾아본다고 찾아보고 이해하려하지말고 그냥 덮어놓고 믿어야하나 할수록 더더욱 반감이 듭니다 궁금한거있으면 물어보라는 신부님 말씀에 용기내서 여쭤봅니다
1. 아벨의 제사는 즐겨받으신 하느님께서 왜 아벨은 지켜주지 않으시는지요? 그럼 우리는 어떤마음으로 주님을 모셔야하는 건가요?
2.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알겠는데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아브라함의 나이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자손을 낳는것으로 기록되어있고 사라도 그나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취할정도의 미모와 매력을 지닌 부분은 왜 떼어놓고 모든 강의에서 불가능한 상황만을 강조할까요? 제가 순수하지 못한 문제일까요?
차동엽신부님 강의도 다 들었는데도 막상 성경책을 읽으려면 이런 쓰잘데기없는 궁금증에 진도가 나아가지도 깊은 울림도 없어 답답합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네 질문 감사합니다. 일단 창세기라는 책의 특성을 알아야 나머지 문제가 풀릴 듯 합니다. 먼저 창세기는 하느님의 계시의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그 내용은 신화적인 방식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사회상이나 세계관 안에서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야하고 그 당시의 세계관도 생각해야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또한 창세기는 세상의 기원과 이스라엘 선조들의 기원, 팔레스티나 지역의 종족들의 기원들을 설명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러한 커다른 사실들을 생각하시는 가운데 읽어야 합니다.
1. 아벨과 카인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카인의 아벨의 제물은 안 받으셨다는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제물은 받았다가 안 받았다가 아니라, 카인이 어떻게 제물을 드렸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이를 본다면 카인은 먼저 옳지 못한 행동 속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제사는 값비싼 제물을 바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제사는 하느님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정의와 공정의 흐르도록 하는 제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카인과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의 모습이 들어가 있습니다. 카인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형벌을 짊어지기 힘들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표식을 남겨 주시어 그의 목숨을 지켜 주십니다(참조 창세 4,13~15).
2.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모든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시간의 개념과 지금의 시간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계시 헌장의 한 대목을 통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12항)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문학 유형’들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
@@천주교서울대교구성서 답글 정말감사합니다
어렵고 답답해서 스스로 멀어지고 있었는데 이러나 저러나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라는 말씀이시잖아요~
제가 궁금한것은 아벨의 제사는 카인과 달리 맏배를 바치고..등등 하느님보시기에 좋은 제사였는데 그렇게 한 아벨은 악인에게 그냥 죽게 놔두시는 하느님이라면 ? ? ? 이런생각이 떠나지 않음은 전달하시는 바를 왜곡되게 생각하는거죠? 신부님? 저를 어쩌면 좋을까요?
전달하려는 바가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을 지고 가실적에 그분들 곁에는 여인들만 있었던것 같은데 제자들은 숨어있었던걸까요? 그 당시에 여성은 사람의 수에도 들지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어떤 보복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였을텐데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의 곁을 지키고 함께하던 그들의 모습에 감동이 전해져 오더라구요. 복음서 저자들은 제가 느낀것 처럼 그들의 용기를 기록하고 싶었던걸까요?
일단 자매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을 때, 제자들은 숨어 있었고 여인들만이 그 길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이는 역사적으로 확실하니까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고 썼을 것 같습니다. 또한 자매님의 말씀처럼 여인들의 용기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이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힘이 없는 소외 받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세상에 소외 받은 이들이 더욱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해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부님 궁금합니다.^^
마르코 복음 9장23절 " '하실 수 있으면'과 14장35절 '하실 수만 있으면'이 같은 뜻으로 읽혀서 어리둥절했었습니다.
후에 14장의 '하실 수만 있으면'이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으로 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이 부분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바른 해석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마태 27,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루카 23, 46)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 30)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때에 하셨던 말을 마태,마르,루카와 요한복음의 저자는 왜 다르게 전하고 있는건가요? 번역의 차이인가요?
일단 번역의 차이가 아니라 각 복음서마다 각자의 신학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십자가 위에서의 내용을 다르게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서를 읽는 대상과 십자가의 의미를 각자 다름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오의 내용은 시편 22편의 말씀 안에 담긴 한탄과 신뢰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루카는 영을 아버지께 맡김의 모습을 전해주고 했고,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사랑의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 그 사명을 살아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정리해 보자면,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달이 주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각자의 숙고 안에서 그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서울대교구성서 복음서를 다시 읽어보고 지난 강의영상들을 다시 봐야겠습니다.'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항상 부족한 저에게 늘 채움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드려요
루카복음 23장에 강도이야기가 나오잖아요. 한 강도가 주님께 "예수님,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길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나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는 부분을 읽고 저는 고민이 들었어요. 강도나 살인자 학살자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목회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정말 회심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서요.. 답답했어요. 이것은 주님이 판단하시는건가요..? 같은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라고 생각은 들어요 그래도 주님을 섬긴다면 자신의 행동이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는것을 왜 모르는건지 전 좀 답답하더라구요.
루카 3장을 보시면 회개라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 물음에 세례자 요한은 각자의 삶 속에서 변화된 삶을 살도록 알려 줍니다. 결국 회개라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합당한 열매라고 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서 변화된 목회의 삶을 통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면 상관 없지만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천주교서울대교구성서 말씀 감사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 같기도 한것 같아요. 말로만 하는 신앙을 하고있는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