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군은 60척 정도의 중형선이다. 조선의 13척의 대형선과 일본의 60척의 중형선이 싸웠다. 승패는 거의 조수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 처음에는 조선군이 유리했지만 조수의 흐름이 바뀌자 조선군은 도망쳤다. 일본군이 추격하자 이순신은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 사실은 난중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일본군은 해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부산을 방어하기 위한 수천명밖에 수군에 배치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수만의 수군을 동원했지만 전혀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이 역사의 사실입니다.
@@이순신박사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순신이 일본을 이긴 것은 전쟁 개시 후 3개월 만에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다.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마지막으로 귀국하는 일본군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죽었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덧붙여 당시 조선 민중은 정부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환영했다. 즉 조선의 민중은 일본군의 아군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식량을 헌상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의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의 민중이었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이후 청국과의 싸움까지 거의 죽었으므로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한국인의 조상은 당시 민중이다. 즉, 한국인에게 조상의 적은 이순신이고 일본 수군은 아군이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썼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피했다. 이순신의 일기에 썼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이순신을 포함한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반격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중국의 「명사」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시작된 이래 7년, 사람에서는 10만 장병을 상실해, 백만의 병량을 소비해도 중국과 속국(조선)이 이길 전망은 없고, 단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음에 이르고, 전쟁은 종식했다”고 총평했다.
덧붙여 당시 조선 민중은 정부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환영했다. 즉 조선의 민중은 일본군의 아군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식량을 헌상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의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의 민중이었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이후 청국과의 싸움까지 거의 죽었으므로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한국인의 조상은 당시 민중이다. 즉, 한국인에게 조상의 적은 이순신이고 일본 수군은 아군이다.
다맞는 말씀이지만 선조가 무능했는가는 다툼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막을수없는 기세로 적이 쳐들어오면 수도를 전선뒤로 물리는건 흔한일아였고 평화시기의 선조는 매우 무난한 왕이였습니다. 잘하지도 모나지도 않았던 명종 중종 효종 같이요 선조의 실책은 중국으로 까지 도망치려 했던점, 침략을 예측하지 못한점(논란의 여지는 있음 다만 예측했더라고 하더라도 규모나 병력의 질을 매우 잘못판단함) 이정도네요 선조 입장에서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의 현장 지휘관 견제는 전근대사에서 당현한것이였습니다 조선 스스로도 군사쿠테타로 세운 나라니까요 그럼에도 충성한 이순신장군이 성웅이며 대체자인 원균이 지나친 무능력자였던것이죠 오히려 이순신 장군의 인망과 군사력으로 전후에 쿠테타를 하셨으면 어땟을까 싶네요 이성계급의 인물도 쿠테타를 하니 전국이 요동쳤는데 이순신 장군이셨으면 전국이 다 옹호했을껍니다
@@hjh2137 인물의 됨을 평가하는게 군주에 능력 아닐까요? 전 전선에서 패배하고 있을때 오직 자신의 장수가 승리하고 있을때 오히려 상급을 내려아죠. 본인이 서자 출신의 컴플랙스가지고 있다해서 공을 세운 자신의 자식이나 신하를 시기하는게 더 찌질해보이네요. 진정한 리더쉽은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것이니까요.
자주 이순신 영상을 보다보니.. 오래된 영상도 나오네요!! 저도 교육생들에게 교육을 하는데.. 명량의 대사중~~ 가장 와 닿는게 있습니다. 명량을 대승으로 마무리하고.. 판옥선 내부에서.. 오고가는 말~~ -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요로코롬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운것을 알랑가 모르것소? 답변 : 모르면 흐레자식이제~~ 이 대사~~ 따라서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너희들이 먼 훗날 국가가 위태로울때 이처럼 용감히 싸워 역사의 기리기리 남았으면 좋겠다...라며 교육하는데 늘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 영상 감사합니다.
@@mmm.t_당대의 최고 문신이자 책략가 유성룡을 선조가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유성룡이 추천한 이순신과 권율이 등용 되었고 유성룡이 저술한 해군 책략에 대한 책을 이순신 또한 읽고 응용하여 최고의 전술을 펼쳤습니다, 선조가 무능하기보다 일본과 명나라에 비해 조선의 땅이나 인구수는 상대가 안됩니다.. 저도 초반에는 선조가 많이 무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인재들이 꿈을 펼치게 길을 터주고 지지한거에 대해 선조의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또한 어의 허준 , 이황등 현재 역사적으로도 업적이 높은 인재들이 조선 정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선조가 인재를 보는 눈이 있었다는걸 짐작해봅니다..
원균은 권력에 눈이 먼 장수이자 바보였고, 이순신은 정말 참된 신하이자 장수였음, 우리나라에 이순신장군같은 위인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고 한글도 사용할 수 없고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 문화를 익혔을지도 모를 일이죠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당신 나라의 성웅은 날조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일본 수군으로 격퇴됐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이순신은 부산항을 탈환해 일본군의 보급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순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보급은 건전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2주 만에 물자를 육상 수송할 수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한국인의 망상이다.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명량해전의 목적은 명량해협의 점거이다. 점거에 실패해 200km나 도망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당신 나라의 성웅은 날조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일본 수군으로 격퇴됐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이순신은 부산항을 탈환해 일본군의 보급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순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보급은 건전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2주 만에 물자를 육상 수송할 수 있었다.
철쇄설은 후대의 기록 택리지나 현무공실기에 나오는데, 특히 현무공실기는 당시 칠천량에서 전사한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의 후임으로 온 김억추의 행록에 나오는데, 김억추가 쇠사슬을 걸었다는 무슨 어벤져스급 허풍을 적어 놓은 것이라나요? 정작 난중일기에는 쇠사슬의 기록이 없으며, 이순신 장군께서는 뒤로 두마장이나 뒤처진 김억추를 만호급도 못되는 인물이라 혹평하셨지요! 철쇄설은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설로 인식한답니다.
저는 며칠 전 학교에서 임진왜란을 배웠는데 더욱더 임진왜란에 관심이 생겨서 자료를 찾아보던 도중 이 영상을 봤는데 특히 마지막 셋째 아들이 죽었을 때 쓴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저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지만 정말 이순신 장군님 우리나라를 지켜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또 존경합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울돌목의 해류는 유속이 약 10노트 정도라고 합니다. 해군의 신형급 참수리정이 최대 40노트입니다. 1800년대의 서양의 철갑선이 최대 12노트였고요. 당시의 선박들은 10노트도 못넘기는게 보통이었고 15노트만 찍어도 잘 나가는거였습니다. 사람이 노를 젓는 배는 3~4노트 잘해봐야 5노트 찍던 시절에 10노트 짜리 역 해류를 만나니 아무것도 못하고 떠내려가는거죠.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ANIMAL_FARM 인간아. 요즘 금리도 높은데 참 살기 힘들지? 그렇다고 정신줄은 놓고 살지는 말자. 힘든 시기가 있으면 또 웃는 시기도 온다. 그걸 준비하면서 살아야지. 정신줄 놓으면 이도저도 아닌게 된다. 정신줄 잡고 내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좀 돌아보고. 진정 걱정되서 하는말임.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왜란 종반의 전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투가 재미없을만큼 압도적이었던걸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은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전력 외에도 정보전에도 철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순신의 판단력을 따라갈만한 조정의 대신들이 몇 없었다는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궁금한게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압송 이후에 정말 모진 고문을 당했었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 영상매체에서 보여지는것같이 사람을 걸레짝을 만들어 놨으면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위에서의 혹독한 전투는 커녕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을거라고밖에 생각이 안들어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한국인의 망상이다.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명량해전의 목적은 명량해협의 점거이다. 점거에 실패해 200km나 도망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일단 실록기준으론 선조가 개빡쳐서 역적 취급을 한거보면 고문 자체는 약하지 않았을거임. 다만 난중일기보면 백키로 이상을 감옥에서 풀리고 곧장 내달렸는데 이걸보면 개팬건 아니고 추국이 목적이니 의식이 또렷히 남길정도로 고문했을것으로 생각됨. 애초에 잡혀서 당한게 뒤질놈이라 고문한것보다 자백이 목적이었음
쩝 고증오류 부분이 있네요. 실제역사에선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이루어진 적 없습니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에 왜군들이 달라붙긴 했으나 다른 배들이 도와서 금방 격퇴했구요. 만약 실제로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벌어져 대량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면 뒤처져있는 다른 판옥선들은 아예 안 왔을겁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jmk1278 원균은 재평가의 여지가 없는 그런 인간이죠 일단 전쟁중 전공에 눈이 멀어 수급챙기기에 급급해 조선백성들마저 목을 베어 수급으로 삼은 그런 인간인데 게다가 이순신장군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되어서 한 일이 통제영에 울타리쳐놓고 기생들 불러서 술이나 퍼마시며 부산포 진격에 대한 작전구상은 내팽겨치고 자신에게 거슬리면 장수들도 파직시켜서 자신에 말을 따르는 그런 사람들로 채운 인간인것을요
왜 불행은 한꺼번에 오는가?
충무공 이순신에게 찾아온 커다란 시련
👉 ruclips.net/video/gH-TEvl1hMw/видео.html
일본 수군은 60척 정도의 중형선이다. 조선의 13척의 대형선과 일본의 60척의 중형선이 싸웠다. 승패는 거의 조수의 흐름에 따라 변화했다. 처음에는 조선군이 유리했지만 조수의 흐름이 바뀌자 조선군은 도망쳤다. 일본군이 추격하자 이순신은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 사실은 난중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일본군은 해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부산을 방어하기 위한 수천명밖에 수군에 배치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수만의 수군을 동원했지만 전혀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이 역사의 사실입니다.
수백명 지휘관과수십만 군인들, 그리고
무역상, 군민들 기술자 과학자
세계정보에 밝는 재능성과 인재들
@@hiroono1이분 희대의개소리하시네
@@이순신박사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순신이 일본을 이긴 것은 전쟁 개시 후 3개월 만에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다.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패전을 이어 마지막으로 귀국하는 일본군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죽었다.
왜 한국인은 역사를 날조하는가? 대답하십시오.
@@이순신박사 한국인은 한자를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나 난중일기에 기재된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이순신 장군님 고맙습니다....그리고 목숨 바쳐 싸워주신 많은 장수들과 수군들도....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감사해야지~
고마운건 비슷할때 써야지~.
그럼 12척 남았을 때 충신4명은 배신때린건가요? 뒤에서 지켜봤다길래 구이ㅡㅁ하여
덧붙여 당시 조선 민중은 정부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환영했다. 즉 조선의 민중은 일본군의 아군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식량을 헌상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의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의 민중이었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이후 청국과의 싸움까지 거의 죽었으므로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한국인의 조상은 당시 민중이다. 즉, 한국인에게 조상의 적은 이순신이고 일본 수군은 아군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자 애국자이자 영웅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썼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피했다. 이순신의 일기에 썼다.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이순신을 포함한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반격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중국의 「명사」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시작된 이래 7년, 사람에서는 10만 장병을 상실해, 백만의 병량을 소비해도 중국과 속국(조선)이 이길 전망은 없고, 단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음에 이르고, 전쟁은 종식했다”고 총평했다.
덧붙여 당시 조선 민중은 정부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환영했다. 즉 조선의 민중은 일본군의 아군이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식량을 헌상해 길 안내를 했다. 서울의 왕궁에 방화한 것도 조선의 민중이었다.
이순신 등 당시 조선군은 이후 청국과의 싸움까지 거의 죽었으므로 현재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한국인의 조상은 당시 민중이다. 즉, 한국인에게 조상의 적은 이순신이고 일본 수군은 아군이다.
오랜 내전으로 단련된 전쟁병기 같은 왜군 그리고 역사상 손에꼽히는 무능했던 왕 이 두개의 적과 동시에 싸웠던 이순신 그는 도덕책..... 존경할수 밖에 없는 인물
다맞는 말씀이지만 선조가 무능했는가는 다툼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막을수없는 기세로 적이 쳐들어오면 수도를 전선뒤로 물리는건 흔한일아였고
평화시기의 선조는 매우 무난한 왕이였습니다. 잘하지도 모나지도 않았던 명종 중종 효종 같이요 선조의 실책은 중국으로 까지 도망치려 했던점,
침략을 예측하지 못한점(논란의 여지는 있음 다만 예측했더라고 하더라도 규모나 병력의 질을 매우 잘못판단함) 이정도네요
선조 입장에서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의 현장 지휘관 견제는 전근대사에서 당현한것이였습니다 조선 스스로도 군사쿠테타로 세운 나라니까요
그럼에도 충성한 이순신장군이 성웅이며 대체자인 원균이 지나친 무능력자였던것이죠 오히려 이순신 장군의 인망과 군사력으로 전후에 쿠테타를 하셨으면 어땟을까 싶네요 이성계급의 인물도 쿠테타를 하니 전국이 요동쳤는데 이순신 장군이셨으면 전국이 다 옹호했을껍니다
3이죠 나중에 명나라까징
선조가 판단은 잘한거였음 다만 광해 이순신을 너무 못믿은거였지
@@hjh2137 인물의 됨을 평가하는게 군주에 능력 아닐까요? 전 전선에서 패배하고 있을때 오직 자신의 장수가 승리하고 있을때 오히려 상급을 내려아죠. 본인이 서자 출신의 컴플랙스가지고 있다해서 공을 세운 자신의 자식이나 신하를 시기하는게 더 찌질해보이네요.
진정한 리더쉽은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것이니까요.
선조는 인성이 대범하지 못했던거지 무능하진 않았음.
큰별쌤 스토리텔링 최고에요ㅠㅠ 사실 본방으로 본 적 없고 유튜브로 접했는데 오래오래 했음 좋겠어요~~~ 고3때 근현 공부하는게 수능공부 중 힐링이었는데 10년이 훌쩍 지나 새록새록ㅎㅎㅎ
큰별쌤~! 큰별쌤의 강의 예전도 지금도 몰입이 잘되어 너무 좋습니다. 정말 하나하나 새겨들었습니다. 몰입감있는 강의 정말 감사합니다.
자주 이순신 영상을 보다보니.. 오래된 영상도 나오네요!!
저도 교육생들에게 교육을 하는데.. 명량의 대사중~~ 가장 와 닿는게 있습니다. 명량을 대승으로 마무리하고.. 판옥선 내부에서.. 오고가는 말~~
-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요로코롬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싸운것을 알랑가 모르것소?
답변 : 모르면 흐레자식이제~~
이 대사~~
따라서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너희들이 먼 훗날 국가가 위태로울때 이처럼 용감히 싸워 역사의 기리기리 남았으면 좋겠다...라며 교육하는데 늘 가슴이 뭉클해지네요!!
--
영상 감사합니다.
진짜..흠이없는인물중에 한분.,
멍청한왕때문에 어머니를 잃어도 말한번 안하고
목숨걸고 싸운게 대단하다 저런걸 왕이라고
그래도 그 멍청한 왕의 파격인사로 인해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죠..
@@samueloh9026 ㅋㅋ아휴 진짜 잘햇다고해야하나 할말이없다 (..)
@@mmm.t_ 그건 절대 부정 못해요
@@qqopp-1821 다들 그러시니 저또한 뭐라할말이없네요ㅠㅠ
@@mmm.t_당대의 최고 문신이자 책략가 유성룡을 선조가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유성룡이 추천한 이순신과 권율이 등용 되었고 유성룡이 저술한 해군 책략에 대한 책을 이순신 또한 읽고 응용하여 최고의 전술을 펼쳤습니다, 선조가 무능하기보다 일본과 명나라에 비해 조선의 땅이나 인구수는 상대가 안됩니다.. 저도 초반에는 선조가 많이 무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인재들이 꿈을 펼치게 길을 터주고 지지한거에 대해 선조의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또한 어의 허준 , 이황등 현재 역사적으로도 업적이 높은 인재들이 조선 정계에 있었다는 사실은 선조가 인재를 보는 눈이 있었다는걸 짐작해봅니다..
이순신장군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부디 편안히 쉬세요!
원균은 권력에 눈이 먼 장수이자 바보였고, 이순신은 정말 참된 신하이자 장수였음, 우리나라에 이순신장군같은 위인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고 한글도 사용할 수 없고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 문화를 익혔을지도 모를 일이죠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원균따위가 1등공신이라는건 미친거임
영웅이자 성웅으로 불리우는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는 ... 그의 활약과 결과도 그렇지만....그속에서 통렬함,, 애절함, 고독함 .... ..그 온갖 역경속에 이루어낸 위대함이 더 해지기에... 들을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짐.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인에 의한 거짓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한자 원전에서 읽으면 이순신이 우세했던 것은 전쟁 초기 3개월뿐이며, 그 후 7년간은 이순신은 패전을 계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신 나라의 성웅은 날조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일본 수군으로 격퇴됐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이순신은 부산항을 탈환해 일본군의 보급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순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보급은 건전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2주 만에 물자를 육상 수송할 수 있었다.
제일 존경하는 분이고, 마음에 품고 있는 딱 한 분입니다..
눈물 이 앞을 가린다
잘봤습니다 이순신장군님께서도 얼마나 울고싶으셨을까요 었쩔수없이 꾹참으신거내요 울컥하내요
존경합니다..
나라구한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한국인의 망상이다.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명량해전의 목적은 명량해협의 점거이다. 점거에 실패해 200km나 도망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당신 나라의 성웅은 날조되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으로,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일본 수군으로 격퇴됐다. 23전 23승은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이순신은 부산항을 탈환해 일본군의 보급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순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보급은 건전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2주 만에 물자를 육상 수송할 수 있었다.
ㅜㅠ살아도 산거 같지 않으셨을텐데ㅜㅜ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라를 지켜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ㅜㅠㅜㅜ
명량 전투 후 이순신 장군님이 남긴 말 : 천행이었다
모든 경우와 이길각을 보시면서 승리만을 일구어내셨지만 명량해전은 울돌목의 특성 하나만으로 모든걸 걸으셨겠죠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몇안되는 명장중에명장
넘버원
완전 공감
원균 칠천량 해전 패전 천추의 한을 남기고 속이 터집니다 선조 왕이 되지 말었어야 될놈 선조 나쁜놈
명량에서 패배한 일본군 충남 아산 이순신 고향을 습격 야비한 일본군
차라리 이억기를 통제사 자리에 앉혔으면 수군 전체가 궤멸되지는 않았을 듯
ㅇㅈ
왕족이라 .. 유비한테 땅주는 격인듯?
이억기는 이순신편이였거든 ㅋㅋ 좋게안보지 선조는
저도 울독목을 가봤는데 쇠줄로 된 동아줄이 남아있는데 그줄을
바다밑으로 내려서 바다양쪽에서 끌어당겨 왜선들이 줄에 걸려 서로엉켜 몰살 수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흔적이 남아있던데요
철쇄설은 후대의 기록
택리지나 현무공실기에 나오는데,
특히 현무공실기는 당시 칠천량에서 전사한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의 후임으로 온 김억추의 행록에 나오는데,
김억추가 쇠사슬을 걸었다는 무슨 어벤져스급 허풍을 적어 놓은 것이라나요?
정작 난중일기에는 쇠사슬의 기록이 없으며, 이순신 장군께서는 뒤로 두마장이나 뒤처진 김억추를 만호급도 못되는 인물이라 혹평하셨지요!
철쇄설은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설로 인식한답니다.
어떤 영웅도 감히 쳐다보지 못할
성웅 이 순신장군!!!!!!!
저는 며칠 전 학교에서 임진왜란을 배웠는데 더욱더 임진왜란에 관심이 생겨서 자료를 찾아보던 도중 이 영상을 봤는데 특히 마지막 셋째 아들이 죽었을 때 쓴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저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지만 정말 이순신 장군님 우리나라를 지켜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또 존경합니다.
혼자서 저 많은 병력을 상대한 성웅의모습이 그려지네요.
최재성님이 말씀하신것중에 군법에 죽고싶으냐라고 외쳐서 두척이 다가온것이 아니고 먼저 초요기를 올려서 두척이 다가온뒤 거제현령안위와 중군장김응함에게 외치신 호통이셨습니다.
최태성이다
@@이케르-y4o 그렇구먼"
리더의 중요성을 역사가 말해주네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도 똑같다. 자신들이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탁상공론식으로 정치를 펼치는 것은 선조하고 다를 바가 없고, 모함하는 것은 원균과 다를 바가 없다.
왜 눈물이 나지..ㅜㅜ
아휴 ㅠ 눈물나네
제 생각엔 영화 명량의 명량 대첩 보다는 불멸의 이순신의 명량 대첩이 더 내용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맞다고 봅니다
천년이 지난 당신의 자손은 여기서 펑펑 웁니다😭😭😭😭😭😭😭
오직 본분에충실했던 ….
김훈 님 칼의노래 읽다보면. ㅠㅠ
내 인생 최고의 동영상 ❤️
목숨에 기대지 마라 ㅜㅜ!
해군 출신 간부입니다.
원균은 까도 충무공 이순신을 까는 해군은 없습니다.
큰 사람은 그냥 큰 것 같다... 자기 자식이 죽었으면 얼마나 슬플까 근데 전쟁에 그 수많은 목숨들이 갔는데 그걸 다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한 진짜 군인.
죽늘건 두렵지 않았지만 수군이 패할거에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듯
이순신 장군님이 그립습니다
명량때 백병전은 없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했으면 이쪽도 피해크다.
5세부터 칼갖고 노는 놈들인데.
그래서 근접전 피하고. 포격전으로 나간거다.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정2품이 아닌
정3품으로 삼군수군통제사가 되어서 안타깝네요
원래 명나라 장수들이 내정간섭을 안 했는데 유일하게 딱 한번 한게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의 품계를 올리라고 압박한거죠.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품계가 정3품에서 다시 정2품으로 되었죠.
@@limchaehyoung 감사합니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limchaehyoung 삼도수군 통제사가 종2품인건 맞는데 이순신 제독은 이미 정2품 정헌대부 였음 그래서 정2품임
@@이케르-y4o품계와 직책의 품계는 다릅니다.
명량해전 초반 이순신 혼자 싸워서 버틴건 놀랍다. 어떻게 이긴거지...
성웅 이순신 장군님 만쉐이~! 대한민국 만쉐이~!
현대 시대에는 이순신 장군 같이 걸출한 인물이 와도 좌우 대립 정치로 힘쓰기가 어려울듯..
우리나라 정치는 선조 이상으로 노답 수준이다
원균 초상화보고 순간 깜놀했네요ㅎㅎ
명량해전 결과
격침한 적선 31척
분멸, 격침은 아니지만 전투선의 기능을 상실한 적선 92척
물리친 왜군의 수 18466명
아군 판옥선 피해 0척
원균의 모함도 있었지만
고니시의 부하인
요시라 라는 승려가
가토가 부산으로 온다는 첩보을 주었는데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가토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거부해서 결정적으로
두번째 백의종군 하는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Jason Scott Lee 갑자기 주제랑 관련 없는 소리를 ㅋㅋㅋ
근데 그 첩보가 거짓첩보라는걸 이순신장군은 알고 있었던거죠
근데 그때 통제사는 남해현으로 시찰을
갔었는데 하필이면 풍랑에 발이 묶여버린것이었답니다.
단순히 첩보가 잘못되어서 안간것이 아니라더군요
@@ANIMAL_FARM 팩트체크 해주세요 실록기록좀 알려주세요
@@ANIMAL_FARM 뭔소리야? 뭘 알고 댓달아라
모든 분들 너무 멋져. 💙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
이순신역은 김명민이 압도적이다..명량은..불멸의이순신에 게임이 안된다
나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고뇌, 억누른 애통함을 김명민이 눈빛으로 목소리로 잘 표현해낸듯~~~
정말 진심으로 동의하기힘들다
이순신 장군은 언젠가 헐리우드 합작영화로 만들어질 것 같다
명량해전 대승이 전세계가 놀랄 대승이어서 좋지만 한가지 아쉬운점은 명나라장수 양호가 명만력제에게 받은 황명이 선조가 한번더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면 선조를 죽이고 광해군을 새왕으로 올리라고 했다고하는데 이순신장군님께서 명량에서 대승한게 일본육군들 진격을 막아서 선조가 또다시 도성버리고 도망갈일이 없어지게되어서 선조를 살린거다ㅠㅠ
만력제 아닌가요???
@@명우강-z3i명의 만력제 라는 뜻!
아니요. 명량해전은 사실 이순신장군이 이겼다고 하기에는 사실아니에요. 살작 보급 부대 공격하고 충청도로 후퇴했습니다. 사실은 사실로기록했으면 합니다.
@@cijjeehh2302 살짝 보급부대 공격하고 후퇴한 적을 왜 뒤쫓아가서 섬멸 안 한거지? 일본군은 댓글 단 너처럼 멍청이만 있었나 보네?
@@cijjeehh2302그걸 승리라 말합니다.
그때 싸웠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울돌목의 해류는 유속이 약 10노트 정도라고 합니다. 해군의 신형급 참수리정이 최대 40노트입니다. 1800년대의 서양의 철갑선이 최대 12노트였고요. 당시의 선박들은 10노트도 못넘기는게 보통이었고 15노트만 찍어도 잘 나가는거였습니다. 사람이 노를 젓는 배는 3~4노트 잘해봐야 5노트 찍던 시절에 10노트 짜리 역 해류를 만나니 아무것도 못하고 떠내려가는거죠.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ANIMAL_FARM ㅋㅋㅋ어그로
@@ANIMAL_FARM ㅈㄹ하네
@@ANIMAL_FARM ㅋㅋ 극딜당하네 이그
@@ANIMAL_FARM 인간아. 요즘 금리도 높은데 참 살기 힘들지? 그렇다고 정신줄은 놓고 살지는 말자. 힘든 시기가 있으면 또 웃는 시기도 온다. 그걸 준비하면서 살아야지. 정신줄 놓으면 이도저도 아닌게 된다. 정신줄 잡고 내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좀 돌아보고. 진정 걱정되서 하는말임.
이순신 장군님 ㅠ..ㅠ
원격포맷 최적화은 지룡자💯
원연 장군은 존경합시다 의병장으로 활약 하시다 정유재란때 전사하셨으니... 형인 원균보다 100배는 멋있습니다
100배가 아님. 그 사람은 전쟁 활약도 있지만 목민관으로서 백성도 잘 다스려서 백성으로부터 존경도 받는 위인이었음.
국회의원 원유철은 원균이 아니라 원연의 직계후손이라는데 왜 원균을 그렇게 빨아대는지 모르겠음
원씨 가문에 인물이 없는줄 알았는데 있었군요.
쓰레기 왕에 그 신하들...
우리나라가 무슨 복이 있어 이순신장군이 계셨는지.......
배 12척 남았을때 충신 장군 4명은 배신 때린건가요???
혼자 싸웠다고 하길래요
위대한 인물을 이나라에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세상이 억까한거지
다 이겼는데 갑자기 몇만씩 쓸어버리고 보급 안되고..세상한테 억까당한 느낌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겠어요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홍범도 장군의견 궁금합니다
왜란 종반의 전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투가 재미없을만큼 압도적이었던걸 생각하면
이순신 장군은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전력 외에도 정보전에도 철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순신의 판단력을 따라갈만한 조정의 대신들이 몇 없었다는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궁금한게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압송 이후에 정말 모진 고문을 당했었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 영상매체에서 보여지는것같이 사람을 걸레짝을 만들어 놨으면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위에서의 혹독한 전투는 커녕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있을거라고밖에 생각이 안들어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한국인의 망상이다.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명량해전의 목적은 명량해협의 점거이다. 점거에 실패해 200km나 도망친 이순신이 이겼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일단 실록기준으론 선조가 개빡쳐서 역적 취급을 한거보면 고문 자체는 약하지 않았을거임. 다만 난중일기보면 백키로 이상을 감옥에서 풀리고 곧장 내달렸는데 이걸보면 개팬건 아니고 추국이 목적이니 의식이 또렷히 남길정도로 고문했을것으로 생각됨. 애초에 잡혀서 당한게 뒤질놈이라 고문한것보다 자백이 목적이었음
@@Niri_0
이순신이 지고만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백의병에 빠진 것이다. 고문을 할 가치도 없다.
고신의 강도가 약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미디어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예 사람 잡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는 분석이 꽤 많기는 하더라고요
@@Niri_0 서울에 압송되고 40일 정도 옥에 있었으니 나중에 몸 좀 회복할 시간은 쪼매 있었겠죠
장군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쩝 고증오류 부분이 있네요. 실제역사에선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이루어진 적 없습니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에 왜군들이 달라붙긴 했으나 다른 배들이 도와서 금방 격퇴했구요. 만약 실제로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벌어져 대량의 사상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면 뒤처져있는 다른 판옥선들은 아예 안 왔을겁니다.
님이 현장에 있었음? ㅋ 고증타령은
@@휀라디언츠 난중일기 한번 읽어보시지요..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은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육지에서도 일본으로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이순신의 목적은 전라우수영 확보를 통해 부산에 대한 공격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200km나 퇴피한 이순신의 완전한 패배인데 한국인은 이를 이기기로 평가하고 있다. 우스꽝스럽다.
조선군은 일본한테 근접전으론 안됌
@@김유승-f9d조선군도 근접전으로 몇번 이겼음
역사계의 show doctor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 잘되는 꼴은 못보는건 똑같네
원균이 모함한것은 맞습니다만. 선조임금이
일을 그렇게 끌어나갔다고 봅니다. 하긴 원균이 선조를 오판하게끔 장계를 올린것도 사실이네요.
조선사에 영원히 바꾼 군인..충무공 여해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명량해전이 아닌 명량대첩으로 해줘야하는거
아닌가 한산대첩보다도 더 어려운 전쟁인데
말이 필요없는 영웅
해병대 사단장, 사령관 보세요. 유능한 지휘관 하나 만들어지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지금...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ㅜㅜ
이순신장군님이 없었으면 진짜. 지금의 대한민국 한글은 없었을것이다
유해 컨텐츠 안보려는데 자꾸 보여요. 어떻게 하죠?
강의하실때
복직되실때
정2품이 아닌 정3품된 내용
12척썰 13척썰 관련된 내용도 설명해주시면 좋겠네요
11척 썰도 있고 종이였습니다 원래
복직전에도 정2품은 아니었습니다
통제사는 종2품입니다
최태성 선생님이 예전에 원균 커버한
내용을 영상찍을것봐서 이번영상은 쪽은 살짝거부하네요
제가 알고있는게 얄팍하고 적을수 잇지만
원균재평가썰이라니 ...
@@jmk1278 원균은 재평가의 여지가 없는 그런 인간이죠
일단 전쟁중 전공에 눈이 멀어 수급챙기기에 급급해 조선백성들마저
목을 베어 수급으로 삼은 그런 인간인데
게다가 이순신장군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되어서 한 일이
통제영에 울타리쳐놓고
기생들 불러서 술이나 퍼마시며
부산포 진격에 대한 작전구상은
내팽겨치고 자신에게 거슬리면
장수들도 파직시켜서 자신에 말을 따르는
그런 사람들로 채운 인간인것을요
게스트들 모르는 척 하기도 힘들었겠네 ㅋㅋ
감히 나를~?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그 중에서 명량해전은 역사로 적혀있지만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선조 지가 뭘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하노
저기서나오는 선조가 우리회사 사장이랑비슷한거같음 ㅋㅋㅋ 알아서 할건데 꼭 입을댐 암틈 저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이기는건 진짜 미쳣지
전쟁에서 원균같은 상관이 있으면 적보다 먼저 죽여야 내가 산다고...ㅠ
명량해전은 일본 군수지원함까지 합치면 13:330의 전투였다한다. 우리 대한민국 군대가 이순신 정신을 잊고있는것같아 안타깝지만 그래도 믿는다. 대한민국 국군 화이팅!!!
몇대가 지났는데도 후손 국민의힘 원유철과 똑같네
원균같은 우두머리만나면 어느집단이든지 너무힘들고 고통스러움
원균 같은 인간 많지 아니 원균보다 더한 인간들 많지
근데 본인은 스스로 이순신 같은 상사인줄 앎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균 같은 팀장, 선조 같은 임원.
우리나라 ㅈ소기업에 널리고 널렸죠.
이순신의 후손은 소식이 없고/ 원균의 후손은 기득권이 되었구나/
아///의인은 죽이고 악인과 무능한 이는 높은자리에서 거들먹거리는 이 나라///어쩔 것인가
원균도 바보는 아님... 임금의 명을 받고 내려갔지만 원균도 답 없다고 느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선조한테 곤장을 맞기까지하고...어쩔수없이 한거니깐...
👍
이순신 장군이 이끈 수군 사망자들 중에 전사자보다 처형자, 처형자보다 병사자가 더 많았다가 사실인가요?
원래 예전군대는 전투사망자보다
내부 규율이나 질병 굶주림 등
인재 및 자연재해로 더 많이 죽습니다
통곡
원균의 후손들은 반성하고 사죄하라.
반성안하고 추모하더라구요 ㅋㅋㅋ
칠천량
133척과 싸운게 아니고 300여척과 싸워서 133척을 궤멸시킨게 아닌가요?
실제로 어선 100-200톤짜리를 어부협회의 도움을 받아 실험해보라 명량에 떠서 수전이 가능했겠는가?
재임명시 삼도수군통제사 직책만 해군참모총장이지 군단장이랑 똑같은 계급줬다는거 주면서 중국 죄인이랑 비교했던거 재임명 이후 이순신장군님은 망궐례를 안하셨다지요 이건 중요한거 같은데...
영화에선 구선1척이 불타 12척만으로 싸우던데 실제는 13척인가요?
그리고 주민들이 배를 끌어당기고 치마를 풀어흔들고 이런장면들은 만들어낸 얘기죠?
무능한 사람이 왕이 되면 벌어지는 일… 지금 우리나라엔 뭐가 남았나… 바뀐게 없는데…
아무도 안와서 군법에죽고싶냐고 한게아니라 부하 안위가 탄배 한척이 도와주러오니 안위에게 하신말씀입니다.
근데 일본군은 이순신의 고향과 가족들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던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