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 주저리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는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이다.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만큼 보상받는다'는 언뜻 보면 공정하다고 느껴진다. 그래 능력주의가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 우리 사회가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지 않으며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나오던, 즉 50-60대들은 운이 좋았다. 학점이 낮아도, 자격증 하나도 없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착했다. 반면,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하다'는 20-30대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치열한 입시와 학점 경쟁, 끝없는 자기계발 뒤에도 원하는 취업이 어렵다. 젊은이들은 능력주의 사회의 보상이 정말 능력에 따른 것인지 의심한다. 간단한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세대가 요직을 차지하는 게 부당하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말 능력만큼 보상받는가? 언뜻 보면, 맞는 거 같다. 우리나라는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 임원의 25%가 소위 '스카이(SKY)대학' 출신이다. 이 점을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소위 스카이(SKY)에 운 좋게 간발의 차이로 합격한 학생과 불합격한 학생의 시험 점수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유일한 차이는 커트라인이다. 그 커트라인 안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는 인생의 성취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러니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운에 의해 이루어진 명문대 입학이 고소득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보면, 사회에서의 보상이 결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내가 흥분하거나 불안해 하면, "그건 감정의 문제이야(Ca, c'est le problem de sentiment.)"라고 말했다. 감정과 팩트에 의한 합리적 사유와는 구별해야 한다. 임명묵에 의하면, 1990년대 생들이 공정에 민감한 것은 "그들이 느끼는 불안 속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국가 시스템, 즉 정서적 안정의 최소한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시스템에 손을 대서 예측 가능성을 교란하여 불안을 키우기보다는 차라리 능력주의라는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좀 합리적이지 못하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거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니, 너무 걱정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걱정과 두려움이 불안을 낳는다. 그러면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두려운 게 하나도 없다. 그래 자유다. 어서 많이 들어 본 거다. 기회가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결과의 차별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기회가 공정하지 못하면, 결과는 당연히 공정하지 못한 사기꾼들이 가져간다. 왜 우리 MZ 세대들이 공정을 이야기하는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안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스템의 개선 보다는 현재의 과대한 경쟁 시스템을 받아들이며, 현재의 모순을 차라리 능력에 따라 결과를 나누고, 그 결과의 차별까지 받아들이는 거다. 그 건 감정의 문제이다. 차분하게 더 나은 세계를 꿈꾸지 않는 거다. 기성 세대들은 공정을 말하는 MZ 세대들의 불안에 대해 경청을 해야 한다. '공정?'이라는 질문에 '공정!'이라는 답으로 응수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근원적 병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증상만 관리하는 대증요법에 가깝다. 살다 보면, 원인은 제거하지 않고, 대증요법만 논의할 때 짜증이 난다. 대증요법이란 병의 원인을 찾아 없애기 곤란한 상황에서, 겉으로 나타난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를 하는 치료법이다. 열이 높을 때에 얼음주머니를 대거나 해열제를 써서 열을 내리게 하는 따위가 이에 속한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불안을 이용하면 안 된다. '공정한 경쟁'에서 승자는 승리의 정당성까지 가져갈 수 있지만, 패자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경쟁이 공정하면 그 결과로서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청년들의 막막한 불안보다는 경쟁이 낫다는 것일까? '졌지만 잘 싸웠다'는 것만으로 삶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무리 많아져도, 그것이 경쟁인 한, 누군가의 패배의 횟수와 눈물의 양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그 삶이 살아질 수 있는 가치와 제도가 주어져야 한다. 전범선이 그의 칼럼에 환기한 것처럼, "공정은 거래나 싸움을 수식할 때나 쓰는 말"일 뿐이다. 전범선은 이런 예를 든다. "공정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만이 사랑이다. 공정한 부모나 국가는 무섭다.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꿈꾼다.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는 대한민국을 원한다"
남친이 있건 말건 신경 쓰지도 않는데.
저런 이상한 여자에게 돈 시간 쏟지 말고 현실을 열심히 살기를 바랍니다.
여캠 대부분 남친은 있다
그들도 인간인데 남자 안 만나고 안 사귀겠냐?
그얼굴에 그몸매에 남자가 없다는게 애초에 이상한거지!
길거리에 많고 많은 이쁜 여자분들은 죄다 남친이 있는데 여캠들만 남친이 없다!!!
돈 호구짓하지말고 정신 차려라
남친이 있던 없던 사심 열혈충들ㅋㅋ 없으면 사겨줄거같냐 그냥너희는 atm기계인데ㅋㅋㅋ
ㄹㅇㅋㅋ 차라리 업소가는애들이 났지 여캠한테 쏘는새끼들은 이해 존나안됨
댓글이하나도 없네요 영상열심히 만든것같은데 힘내요
여캠중 일부는 비밀연애 하고 그러는건 이미 알자나
이동영상 .. 마지막에 논리 가 안맞네...
아... 어제 방송 봤다 왁싱 제대로 하고 해라...
뭔솔?
남친있든 말든 무슨상관이냐 사생활까지 ㅇㅂ이네
남친이 한둘이 아니니까 ㅋ
자든가 말든가 ㅋㅋ
워워진정해 흥분하니 진짜같잖아
bj한테 남친은 뭐다??
소시지다
뭐 성인이 하겠다는데 알빤가 ㅋㅋㅋㅋㅋㅋㅋ
하은 이사람 파투랑 예전에 합동먹방 한 여자인가
여자분이 여캠에 관심많아시네요 ㅎ
마지막 논리가 억지인데?
약간 수정하자면 유출된게 글만이 아니고 사진도 포함입니다.
그럼 이성없겠냐
주저리. 주저리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는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이다.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만큼 보상받는다'는 언뜻 보면 공정하다고 느껴진다.
그래 능력주의가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 우리 사회가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지 않으며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나오던, 즉 50-60대들은 운이 좋았다.
학점이 낮아도, 자격증 하나도 없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안착했다.
반면,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하다'는 20-30대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치열한 입시와 학점 경쟁, 끝없는 자기계발 뒤에도 원하는 취업이 어렵다.
젊은이들은 능력주의 사회의 보상이 정말 능력에 따른 것인지 의심한다.
간단한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세대가 요직을 차지하는 게 부당하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말 능력만큼 보상받는가? 언뜻 보면, 맞는 거 같다. 우리나라는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 임원의 25%가 소위 '스카이(SKY)대학' 출신이다.
이 점을 보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이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소위 스카이(SKY)에 운 좋게 간발의 차이로 합격한 학생과 불합격한 학생의 시험 점수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유일한 차이는 커트라인이다. 그 커트라인 안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는 인생의 성취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그러니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운에 의해 이루어진 명문대 입학이 고소득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보면, 사회에서의 보상이 결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내가 흥분하거나 불안해 하면, "그건 감정의 문제이야(Ca, c'est le problem de sentiment.)"라고 말했다.
감정과 팩트에 의한 합리적 사유와는 구별해야 한다.
임명묵에 의하면, 1990년대 생들이 공정에 민감한 것은 "그들이 느끼는 불안 속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국가 시스템, 즉 정서적 안정의 최소한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시스템에 손을 대서 예측 가능성을 교란하여 불안을 키우기보다는 차라리 능력주의라는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좀 합리적이지 못하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거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니, 너무 걱정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
걱정과 두려움이 불안을 낳는다. 그러면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두려운 게 하나도 없다. 그래 자유다.
어서 많이 들어 본 거다. 기회가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결과의 차별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기회가 공정하지 못하면, 결과는 당연히 공정하지 못한 사기꾼들이 가져간다.
왜 우리 MZ 세대들이 공정을 이야기하는가?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불안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시스템의 개선 보다는 현재의 과대한 경쟁 시스템을 받아들이며, 현재의 모순을 차라리 능력에 따라 결과를 나누고, 그 결과의 차별까지 받아들이는 거다.
그 건 감정의 문제이다. 차분하게 더 나은 세계를 꿈꾸지 않는 거다.
기성 세대들은 공정을 말하는 MZ 세대들의 불안에 대해 경청을 해야 한다. '공정?'이라는 질문에 '공정!'이라는 답으로 응수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근원적 병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증상만 관리하는 대증요법에 가깝다. 살다 보면, 원인은 제거하지 않고, 대증요법만 논의할 때 짜증이 난다.
대증요법이란 병의 원인을 찾아 없애기 곤란한 상황에서, 겉으로 나타난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를 하는 치료법이다. 열이 높을 때에 얼음주머니를 대거나 해열제를 써서 열을 내리게 하는 따위가 이에 속한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불안을 이용하면 안 된다. '공정한 경쟁'에서 승자는 승리의 정당성까지 가져갈 수 있지만, 패자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경쟁이 공정하면 그 결과로서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청년들의 막막한 불안보다는 경쟁이 낫다는 것일까? '졌지만 잘 싸웠다'는 것만으로 삶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무리 많아져도, 그것이 경쟁인 한, 누군가의 패배의 횟수와 눈물의 양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그 삶이 살아질 수 있는 가치와 제도가 주어져야 한다.
전범선이 그의 칼럼에 환기한 것처럼, "공정은 거래나 싸움을 수식할 때나 쓰는 말"일 뿐이다.
전범선은 이런 예를 든다. "공정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만이 사랑이다. 공정한 부모나 국가는 무섭다.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꿈꾼다.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는 대한민국을 원한다"
이거 순 좌빨 마인드구만
조정화 ㅋㅋ
떡 좋지 ㅋㅋㅋ
맛있게생겼네
있던가말던가..ㅋㅋ 그냥 벗은거나 보면서 좋아하면되지~ 없으면 니네랑 만나주냐? 그냥 신경꺼라~~ㅋ
머하는 사람들인가요?
섹x가 어때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