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 미륵의 꿈. 그 장엄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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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6 авг 2024
  •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 때 창건된 것으로,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의해서 확인되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은 일제가 시멘트로 덕지덕지 발라놓는 만행을 저질렀던 과거가 있는데,
    1999년 해체보수가 결정되었고, 해체복원작업을 거쳐, 2021년 복원이 완성되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은 1962년12월20일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미륵사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서 익산시 함열읍을 잇는 도로변의 평탄한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찰의 건물은 사라졌으나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은 본래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는 일제 시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에 후지시마 가이시로에 의해 간략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15년에는 반쯤 붕괴되어 있던 석탑을 콘크리트로 보강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조사는 1974년,75년의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동탑지 조사에서 시작되었고,
    1980년부터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면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미륵사의 독특한 사찰 구조와 그 규모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탑,금당,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가람배치라 하는데,
    미륵사의 구조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3탑 3금당의 가람배치입니다.
    1910년 후지시마 가이시로는 미륵사의 구조를 한자 품자 형태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탑과 금당을 갖춘 가람 3개가 평면상에 나란히 배치된 형태로 밝혀졌습니다.
    3개의 가람들은 회랑으로 서로 이어지고 강당을 공유하고 있어 전체를 하나의 사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1탑1금당을 하나의 원으로 하여, 동원·중원·서원의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일제 시기 콘크리트로 보강한 탑은 서원의 석탑이고, 동원의 탑지가 1974년,75년에 조사되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지주가 있는 곳은 3원의 앞쪽 구역입니다.
    미륵사는 동양 최대라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백제의 사찰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719년에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만 확인됩니다.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이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고, 지명법사가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이 미륵사 창건설화에는 사실로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연못을 메운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내용은 실제 발굴결과 저수지등에서 발견되는 뻘흙이 미륵사지의 땅 속에서 발견되어,
    실제로 미륵사지는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지어졌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내용은 미륵사지의 발굴조사 결과와 일치하기도 하는 등,
    실제 사실을 반영하는 내용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또한 무왕의 왕비가 왕에게 청하여 절을 세웠다는 내용도, 2009년에 미륵사지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내용을 보면,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 깨끗한 재산을 내어 절을 지었다는 내용이 있어 사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왕의 아버지는 못의 용왕이고, 꾀를 내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절을 세울 것을 간청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2009년에 탑을 해체하면서 사리함이 발견되고, 이 사리함과 함께 글자가 새겨진 금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금판에는 사리를 안치한 시기는 639년, 무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지 40년째이고,
    사리를 봉안한 인물은 왕후인 사탁적덕의 딸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탁혹은 사택씨는 곧 사씨로, 백제 후기의 유력 가문의 성씨입니다.
    639년은 무왕 재위 40년이므로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여야 하지만,
    639년 작성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새로운 자료를 활용하여 무왕과 선화공주 그리고 사탁적덕의 딸
    3인의 관계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미륵사지 옆에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어 함께 방문하면 좋습니다.
    석탑 해체복원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와 사리장업구가 익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므로 관람 가능하고,
    기타 백제시대의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관람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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