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신조_ 청산리 벽계수야, 청초 우거진 골에 노래_가객 예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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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сен 2024
  • 선비문화의 향기
    2. 고가신조 '청산리 벽계수야' , '청초 우거진 골에'
    초장 : 청산리(靑山裡)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중장 :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종장 :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 작자 : 황진이(黃眞伊, 생몰연대 미상).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 출신으로 조선 중종 때의 명기(名妓). 어릴 때 사서삼경을 읽고 시·서·음률에 모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했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자처했으며, 시조 6수가 전한다. 그의 시조 작품은 뛰어난 기교와 우리말을 쉽고 곱게 다룬 솜씨로 명성이 높다.
    초장 :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중장 :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남았는다
    종장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 작자 :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20). 조선 중기의 문인.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아버지는 절도사를 지낸 진(晉)이다.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1570(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하여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에 잠시 동안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죽었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검(劍)과 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 [일화와 평가]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저서]「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한편, 한문소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Комментарии • 2

  • @마산덕구
    @마산덕구 4 года назад +2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고맙습니다.

  • @Ahn_K
    @Ahn_K Год назад +1

    멋진 가락과 소리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