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김보경 등 몇몇 종도들이 상제님을 시좌하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라고 말씀하자, 김보경이 상제님께 그 연고를 여쭈어 물었더니, 상제님께서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가 도주님께서 9세 되시던 해였고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時有其時 人有其人(때에도 그때가 있고, 사람 중에도 그 사람이 있노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궁벽한 장탯날 초빈지에서 13년 동안 도통을 이어갈 도주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속 기다리셨고, 마침내 1921년(신유년)도주님이 오셨으니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오죽하셨으면 성궤에 9. 5.쯤에 반쯤 핀다는 국화(반개국)을 그려 놓으셨을까요?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않을까요? 그래서 칠월식과에서 "달구나! 달구나!"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1921년(신유년) 9. 5.은 아주 뜻깊은 날입니다. 두 분이 인세에서 처음으로 만나신 날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하셨던 상제님 말씀을 생각해보면 개벽공사가 늦는다며 불평했던 종도들을 생각해보면... 상제님은 도통 계승자인 도주님께서 하루빨리 나오시길 얼마나 기다리셨을까요?
[2023. 9. 5. 추가 사항 - 어찌하다보니 양력 9월 5일이네요.] 1:25:50~1:33:45 구간 상제님 성골 부분에서 PPT 자료를 너무 압축적으로 기재함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킨 부분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1927년 강순임 명의로 보천교를 상대로 성골 반환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였고, 다시 1929년 정씨부인 명의로 다시 소송하였으나 반환을 받지 못하다가, 1949. 4. 8. 강순임께서 차경석 동생 차윤경의 협조로 성골을 인도받아 증산법종교로 성골을 모셨습니다. 그 후에도 상제님 양자이신 강석환께서 양자로서 증산법종교를 상대로 인도소송을 제기하신 적이 있긴 했으나, 법원에서 증산법종교의 소유를 인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러 저러한 잡다한 경과를 모두 생략하고 간략히 기재하다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었네요. 동영상 후단에 상제님 성골은 1948. 4. 8. 이장하던 당시 사진과 증산법종교 사진 한 장을 실었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도주님께서 상제님을 종통을 천부적으로 계승하신 진주로서 초빈을 헐고 성골을 모신 중대하고도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주가 아니면 상주도 아니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초빈을 하도록 하신 것이고, 진주가 직접 와서 성골을 수습하도록 하셨던 것이 상제님의 숨은 뜻이었습니다. 후세에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수교자들이 온갖 음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시비를 삼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정리 말씀드리면, 도주님께서는 진주로서 1921(신유년) 8.경 선정대모님(상제님 모친), 선돌부인(상제님 동생), 강순임(상제님 따님) 등 유가족들과 상의 하신 후 9. 5. 장탯날 초빈을 헐고 성골을 수습하셔서 통사동 재실로 모셔서 삭망절사에 따라 성골을 모시고 있던 중 문공신이 폭력으로 강도 짓을 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미륵불교 활동을 하던 김형렬은 이 사정을 모른채 와서 보니 초빈이 헐어져 있어 일단 경찰서에 고소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경찰에서는 도주님과 문공신을 체포하였으나 조사 결과 도주님은 무혐의로 판명되었고, 문공신의 강도상해 혐의가 인정되어 7년 형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세의 법으로써 유가족들의 동의로 하신 일인데 무슨 죄가 된단 말입니까? 그리고 도의 본체가 성골에 있지 아니하고, 상제님께서 뜻과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찌 성골에 도가 있답니까? 머리털이 중요한가요? 머리털 밑에 있는 것이 더 중하지 않는가요?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성골을 모시고 도통하련다"는 도무지 도를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입니다.
🎉😅🎉
감사합니다
좋은교화잘세기면서
큰히이됩니다
고맙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공부가 되겠습니다
방송 감사합니다 🎉🎉🎉
1903년 김보경 등 몇몇 종도들이 상제님을 시좌하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라고 말씀하자, 김보경이 상제님께 그 연고를 여쭈어 물었더니, 상제님께서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가 도주님께서 9세 되시던 해였고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時有其時 人有其人(때에도 그때가 있고, 사람 중에도 그 사람이 있노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궁벽한 장탯날 초빈지에서 13년 동안 도통을 이어갈 도주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속 기다리셨고, 마침내 1921년(신유년)도주님이 오셨으니 얼마나 반가우셨을까요?
오죽하셨으면 성궤에 9. 5.쯤에 반쯤 핀다는 국화(반개국)을 그려 놓으셨을까요?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않을까요? 그래서 칠월식과에서 "달구나! 달구나!"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1921년(신유년) 9. 5.은 아주 뜻깊은 날입니다. 두 분이 인세에서 처음으로 만나신 날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이 어찌 이렇게 더딜까!"하셨던 상제님 말씀을 생각해보면 개벽공사가 늦는다며 불평했던 종도들을 생각해보면...
상제님은 도통 계승자인 도주님께서 하루빨리 나오시길 얼마나 기다리셨을까요?
❤❤❤🎉🎉🎉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
바보 뱌보 그렇게 설법해주시고 아르켜 줘도 모르겠으요
[2023. 9. 5. 추가 사항 - 어찌하다보니 양력 9월 5일이네요.]
1:25:50~1:33:45 구간 상제님 성골 부분에서 PPT 자료를 너무 압축적으로 기재함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킨 부분을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1927년 강순임 명의로 보천교를 상대로 성골 반환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였고, 다시 1929년 정씨부인 명의로 다시 소송하였으나 반환을 받지 못하다가, 1949. 4. 8. 강순임께서 차경석 동생 차윤경의 협조로 성골을 인도받아 증산법종교로 성골을 모셨습니다. 그 후에도 상제님 양자이신 강석환께서 양자로서 증산법종교를 상대로 인도소송을 제기하신 적이 있긴 했으나, 법원에서 증산법종교의 소유를 인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러 저러한 잡다한 경과를 모두 생략하고 간략히 기재하다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었네요. 동영상 후단에 상제님 성골은 1948. 4. 8. 이장하던 당시 사진과 증산법종교 사진 한 장을 실었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도주님께서 상제님을 종통을 천부적으로 계승하신 진주로서 초빈을 헐고 성골을 모신 중대하고도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진주가 아니면 상주도 아니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초빈을 하도록 하신 것이고, 진주가 직접 와서 성골을 수습하도록 하셨던 것이 상제님의 숨은 뜻이었습니다.
후세에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수교자들이 온갖 음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시비를 삼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정리 말씀드리면,
도주님께서는 진주로서 1921(신유년) 8.경 선정대모님(상제님 모친), 선돌부인(상제님 동생), 강순임(상제님 따님) 등 유가족들과 상의 하신 후 9. 5. 장탯날 초빈을 헐고 성골을 수습하셔서 통사동 재실로 모셔서 삭망절사에 따라 성골을 모시고 있던 중 문공신이 폭력으로 강도 짓을 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미륵불교 활동을 하던 김형렬은 이 사정을 모른채 와서 보니 초빈이 헐어져 있어 일단 경찰서에 고소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경찰에서는 도주님과 문공신을 체포하였으나 조사 결과 도주님은 무혐의로 판명되었고, 문공신의 강도상해 혐의가 인정되어 7년 형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세의 법으로써 유가족들의 동의로 하신 일인데 무슨 죄가 된단 말입니까?
그리고 도의 본체가 성골에 있지 아니하고, 상제님께서 뜻과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찌 성골에 도가 있답니까?
머리털이 중요한가요? 머리털 밑에 있는 것이 더 중하지 않는가요?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성골을 모시고 도통하련다"는 도무지 도를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여기는어디신지요?
여긴 상제님께서 천하를 대순하신 진리를 공부하는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