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령위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들이 잘못된경향이 대다수인데 철령위를 특정 지명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경도 안변으로 넘어가는 철령과 혼동을 하는 것입니다. 철령위는 지명이 아닌 기구입니다. 그 기구를 설치하는 목적은 당연히 고려를 길들이고 압박하기 위한 수단인데 대략 요령성 본계시 근처로 보는 설이 있고 저도 그 설을 지지합니다. 그 지역에다가 철령위라는 군사적 성향의 기구를 설치하고 이 기구가 관할하는 지역은 아마도 요동을 포함한 요령성지역으로 추측합니다.
이런게 한국 역사학자들의 문제임.. 명나라 역사 따라.. 고려 역사 따로 가르치니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서 제대로 모름.. 요동은 이미 유익의 귀부이후 명이 접수해서 15여년간 요새화한 지역임. 이미 12위 설치해서 수비병력만 6만이 넘던 시절임. 나하추가 이곳을 공략할려고 여러번 침공했다가 개발리구서 포기했었는데 먼 육로로 통해서 요동을 명이 가던게 아니라 수군통해서 요동에 보급해서 요새화 했던거였슴. 그래서 풍승+남옥이 20만 끌고 나하추 치러갈때 요동에서 보급받으면서 나하추 포위해서 항복받아냈던거였슴. 그뒤 남옥이 15만 이끌고 북상해서 북원 치러가서 고려에 소문나돈게 요동이 텅텅 비었다였는데.. 요동에 주둔군만 최소 6만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2주 기다릴동안 북원은 남옥에게 기습받아 전멸하구 북원 자체가 멸망해버렸슴. 이게 위화도 회군하기 딱 일주일전일임.
위화도 회군은 출발전부터 계획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런 큰병력을 동원할 기회?혹은 위기?에 이성계, 정도전 등이 아무런 모의가 없었을 것 같지는 않고 결국 회군으로 결론내린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군명분을 쌓기위한 작전들도 구상했겠네요. 아군이 아닌 장수들까지 설득하려면 장마에 맞춘 시간지연이 필수였고 아마 출발조차도 지연시키려고 애쓰지 않았을까 싶네요. 단순 4불가론이 교수님말씀을 들으니 현실적인 모습으로 연상되는게 신기합니다. 물론 상상이기는 하지만...
고려에 최고 명장은 최영이 였다 .젤 많은 전장 전투를 많이 한장군이다 ,요동전략 시에 최영의딸이 왕후로 있 었기에 왕을보위키위해 궁성에서 요동출젼지휘를 했다 , 이성계의 실회군은 막을수는 없는것은 자명하 고 어쩔수없는 현실이되여 최영은 스스로 채포되여 형을 받게된것이다 ,
우리는 역사에 문서자료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만 문서자료라는것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라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른 유투버들보면 문서자료를 절대적진리로 전제하고 역사를 보는데 여윽시 임용한님은 다른채널보다 차원높은 시각을 보여주네요. 내경험으론 10여년전 주차관리를 했었는데 주차차량의 번호나 진출입시간 행선지 등을 기록했어요. 그땐 cctv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깜박하고 기록을 못하면 대충 빈칸을 채워 넣고 오류로 기재된내용은 검증할 방법이 없었어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고려사 같은 역사서도 오류나 인위적인 위증을 기록할경우 이걸 검증할 제3의 수단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개인의 인생을 봐도 크게 유명한 인물이 아닌 보통사람들은 생활기록부나 주민등록기록,건강검진 기록등 인생에 있어서 문자로 기록되는 부분은 일부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일부가 문서화되었을 뿐이죠. 주차를 할때도 모든 부분이 아니고 절반이상 사각이 있어 보이는 부분도 있고 안보이는 부분도 있기에 안보이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면 접촉사고가 나기 때문에 보이는 부분으로 안보이는 부분까지 추정하며 주차하듯 역사도 기록된 부분이 전부가 아니고 기록 안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기록을 역사를 보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할겁니다. 다른 채널은 문서기록이란 범위 안에서 그게 인류역사의 모든 전부인냥 전제로 해석하지만 이 채널에서는 문서 바깥의 모습도 가늠해가는 시각이 차별성 있습니다.
임박사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서... 명 건국시 고려가 대응했던 방식과 청 건국시 조선이 대응했던 방식을 비교부탁드립니다. 그니까 고려는 명건국시 요동정벌이라는 강수를 뒀는데 조선은 물론 임란 후라 매우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광해군의 외교외 적극적 대응이 없었던것 같아서 비교하면 고려의 위대함이 부각되지않을까 싶어 말씀드립니다
요동정벌을 하러 갔는데 왜 당시 신생국이었던 명이랑 싸울 수 밖에 없었느냐.. 라는 역사적 배경이 더 중요 하다 봅니다. 고려의 요동정벌목적이 명이 멋대로 지명을 바꿔서 옛 고려 땅을 명의 땅이라 우겨서 고려도 원이 물러가던 격동의 시기에 옛 영토를 찾기위해 요동땅을 점유하러 갔지 않았나 추정해봅니다. 그 이후로 지명이 의주 부터 해서 유학자들에 의해 지명이 한반도 내로 옮겨졌다 그런 얘기가 있다고 하는데 이게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요동정벌을 하는데 명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싸울 수 밖에 없었나 그 역사적 배경이 중요 하다 봅니다.
@@테스트-y3q 네 잘알겠습니다. 제가 이런 교양 유튭을 여러개를 챙겨 보니까 각 역사 교수님들이 하는 말씀들이 퍼즐처럼 각각이더라고요. 중국사 하시는 분이 명이 들어서면서 요동까지 중국의 고토라고 수복해야 한다고 하니, 고려조정에서 대규모로 출병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 말씀을 하신 분도 계셨거든요.
한반도가 너무 넓고 광대해서 조그만 만주땅정도는 필요가 없어 버렸고 그렇게 광대한 한반도에서 천년을 살다보니 한반도 조차도 너무너무 광대해서 다스리기 어려워 북쪽 반절정도는 버려도 충분하기에 뚝 잘라 버리고 그 남쪽에서 살고있다. 그 반절의 남쪽도 몇십년 살다보니 그조차도 너무 넓고 광대하여 다스리기 너무힘들어 동서로 나누고 갈라질 준비를 하고있다.
위화도 회군이 말이 되나? ㅎㅎㅎ 교과서상에 고려영토가 조선보다 좁고 신라는 더 좁은데 고토회복이 말이 되나요? ㅎㅎ 상식적으로 애초에 만주지역이 계속 고려 영토가 아니었는데 철령위 설치한다고 왜 통보를 했을까? 고려는 지네 땅도 아닌데 왜 거기 반발을 할까? ㅎㅎ 말이 안되죠? 제대로 아는것도 없는데 뭘 가지고 화를 내는걸까? ㅎㅎ 역사 제대로 알아보세요 임용한같은 역사문외한 채널 보지말고
궁금한게 있는데 위화도 회군이 명에 대한 단기 무력시위에 불과했다면 왜 전 국력을 기울여서까지(심지어 회군에의해 역성혁명이 일어날 수 읺을 만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했나요? 오늘날 무력시위할 때도 그냥 위협차원의 퍼포먼스만 보여주지 거의 전면전할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지는 않지 안나요? 그냥 순수 호기심으로 물어보는겁니다
만약 지금 중국이나일본이 대한민국의 땅을 자기땅이라고 우기며 땅을반환ㄴ하지않으면 무력으로 뺏겠다고 하면 우리는 전쟁이 무서워서 그냥 땅떵어릴 그들에게 내어 줄 것인가 우리가 힘의 열세에 있다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서 목숨을걸고 싸워 지켜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고려말의 상황도 다르지않았다고 본다 이성계의 권력욕으로 이루어진 역성 쿠데타 일 뿐 이라고봅니다
과연 단기전 있엇을까요, 몽골과의 협력시대에 충선왕이 요동의 왕을 겸하였던 것을 생각하여 요동을 점령하고 요동의 왕을 겸임하는 계획이라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심양까지 점령해야 하는데. 몽골 과 명의 전투중에 비워진 만주를 차지하고 금나라 지역의 군대로 몽골과 명을 견제하고 ..... 하지만 여진족이 고려의 목적에 따라 줄가요, 윤관의 정벌에서도 엄청난 어려움을 격었는데, 이성계의 주장이 맞았다고 봐요. 오골성을 점령 하거나 요동성을 점령하거나 해도 이를 유지할수 있는 국력이 없으니.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때마다 느끼는 건데, 중간중간 가벼운듯 툭툭 던지시는 농담들이 평생역사공부를 하면서 가졌던 의문들에 대한 대답이 되는듯 합니다. 최영은 딜레마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최영 자체가 원에 충성하는 권문세족이었기에 원을 나몰라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중원의 패자가 변경 될때 중원은 가장 약한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말씀하신 것 처럼 '지배가 목적이 아닌 경고성' 전쟁을 벌임으로써 권문세족인 자신의 충절과 국가의 이익을 챙기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생을 왜구와 싸운 최영이 그로인해 얼마나 국력이 약한지를 모를리 없었을텐데도 모든 국력을 끌어다 쓴것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명이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는 다시는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할수가 없다는 판단이었을듯 합니다. 전쟁을 위해선 이성계의 군세가 절실했고 그로 인해 이성계의 눈치도 보느라 중군도 편제하지 않고, 그저 이성계의 충성심만을 바랬을 듯 합니다. 이성계는 4불가론으로 회군을 해놓고, 왜 명나라가 안정기에 든 시기에 정도전과 요동정벌을 진지하게 고려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 그 의문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강의였네요. 결국 이성계도 최영의 의도를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역성혁명의 생각 뿐이었기에 회군을 결심했단 걸 알았습니다. 드라마나 모든매체에선 최영의 요동정벌은 무리수이고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일리가 있다고 말해서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조선의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가 써졌다는데에도 격한 공감이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양에서 도보로 위화도 까지 3-4일 만에 갈수 있다는 것은 흠... 도보로 최대 하루 30km를 갈수 있을가...제대로된 길도 없었을텐데... 취사는 야외에서 솥걸고 그 많은 병사가 먹고 치우는데 소요되는 시간만 해도 하루 몇시간이 소요될텐데... 마차가 다닐 길이 제대로 닦여 있었을가... 5만명이 움직이는 행렬이 겁나기 길텐데..., 이런 저런 사항 다 감안하면 하루 20km 정도 행군이 가능하다고 보면 평양서 위화도 까지 열흘에서 약간 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게 타당함
명나라 군대들이 요동의 여러성에 3천명이상씩은 주둔하기 힘들었다고 봅니다. 주민들은 그이 없을테고 원이 패주하면서 주민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성안에 인구는 그닥 많이 않았을듯... 고려정규군이 기습을하면 5만으로도 2~3개 성은 단기전에 함락이 가능하고 남았을시기라고 봄. 명나라도 단단한 국가가 아니고 건국후 고려가 위화도 회군할때가 건국후 20년쯤인데... 계속 전쟁으로 땅을 넓히던 명나라도 상황이 좋지많은 않음. 고려가 요동을 점령해서 주둔하고 방어전하면 명나라가 대군을 쉽게 끌고 오지 못함...주변의 반군수준도 아닌 고려정규군은 450년을 버틴 왕조로써 탄탄한 민족이라... 명나라가 병사를 징병하고 많은 대군을 먹일 식량도 강제 징발해야 될텐데... 시간만 끌면 후방에서 또다른 세력이 반란이 일어날수 밖에 없음 워낙 땅이 넓어서 호시탐탐 반란을 노리는 인물도 많았을듯하고.
나하추도 20만에 항복하고 직후 바로 북원에 15만 동원해서 궤멸수준의 타격을 입힌게 명나란데 싹싹 긁어모은 5만명으로 뭘해요 정규군도 아니고 도적떼 20만한테 털려서 망할뻔한게 고려인데다가 왜구도 못막고 후방에서 지원해줄 세력도 없는게 고려 말인데 명의 20만 정규군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소설 한번 써 보죠. 최영은 단기전을 생각 했으며 이성계 혼자서라도 한달 정도면 충분히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막대한 사병 손실을 감수해야 되고 그만큼 자신의 입지도 줄어들것을 염려하여 4불가론을 강력하게 주장 했으나 조정의 실세 최영에게 밀려 할수없이 출병하게 되었는데 최영을 죽이고 회군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우왕이 최영을 몿 가게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믿었던 최영은 회군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요동 정벌이 실었던 이성계는 굼뱅이 기어가듯 위화도 까지 갔으며 회군 요청까지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차 쿠테타를 결심했다.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조민수를 협박하여 쿠테타에 동참 시켰으며 역적이 되기 실었던 병사들은 탈영을 했다. 이후 회군하여 사실상 고려를 무너뜨렸다.
교수님. 말씀드립니다..고려사 세가를 보면 압강과 압록강이 나옵니다. 우선 명확하게 압록강을 건너간겁니다...그리고 계속진군하다 압강에 이르러 건너려 할때 건너지않고 회군하였다고 나옵니다. 위화도는 압강이란 곳 인근에 있는곳입니다. 압강과 압록강은 다릅니다. 참고로 압강은 전선 70여척을 정박할수 있을만큼 당시의 대규모 해군기지입니다. 이후 서북면에 비가 많이 내려 압강에 정박한 전선이 모두 떠내려 갔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위화도 관련 언급에서는 꼭 압록강에 대한 한자가 없군요...조작인지 뭔지...ㅋ
@@GonZo9072 아직도 이런 개소리로 원균쉴드 치는 놈이있네 ㅋㅋ 원균이 이순신이 일부러 출정 안한다고 누명씌워 꼰지르면서 자기한테 지휘권주면 일본수군 본진까지 다 쓸어버릴 수 있다해서 지휘권 준건데 원균 이 폐급은 전술이 문제가 아니라 배를 운용하는거 자체를 몰라서 칠전량 대패 이전에도 배를 몰고 나갈때마다 표류하거나 왜군 정찰선한테도 털리고 바다로 나갈때마다 배 몇척씩은 잃고 오는 ㅂㅅ 이었다. 그당시 기록이 세세하게 남아있는데 원균 쉴드를 ㅋㅋㅋ
근데 5만이나 되는 병력이 제시간에 딱딱 맞춰서 공격하게 할 만한 행정력이 저때의 고려에 있기는 한 걸까? 관리들 녹봉도 때 먹는 시기라고 하던데.... 5만 병력의 병기와 군량을 제시간에 맞춰서 준비는 했으려나 몰라.... 도중에 다 떼먹어서 진군이 늦어지고 이성계는 이게 왠 떡이야 하고 태업 부렸을 가능성은 없을까?
@@ywl6566 우는 시베리아고 좌는 중국 위로는 고비사막과 초원 강력한 몽골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덩이가 크면 뭐합니까? 나갈수가 없는데요 한반도 주변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댓글다시죠 지금 중국이 어떤지 아세요. 땅덩이는 큰데 밖으로 나갈수가 없어요 중국의 바다는 다른 나라들에게 다 둘러 쌓여 있어요
영상 안보셨나요? 전쟁 계획대로 했으면 장마철 전에 시작했고 아마 장마철 오기 전에 끝났을 것이라는 내용은 안봤나요? 그런데 전쟁계획 무시하고 쌩깐건 이성계였음. 개인적인 생각으론 당시 고려가 내부적으로 개박살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려했다는 점이 멸망을 불러왔다고 봄.
사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을 따져 생각해보면, 최영과 이성계는 대척점에 있던 인물입니다. 나라자체가 파탄난 상황에서, 주류의 중심에 있던 무신 최영과 신흥무신의 선두주자였던 이성계는 당시 나라상황에 이성계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려를 유지하느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느냐의 문제에서 상호간은 최대정적이었습니다. 비록 명나라의 철령위를 빌미로 한 도발이었지만, 여전히 북원과 전쟁중이었던, 이전 친원출신이 많았던 고려를 경계하고 있었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에 앞서 외부 군사력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기위해 조선을 침범한 것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최영은 고려왕조의 안정적 지속을 위해 이성계가 통제하고 있는 최영이 생각하기에 따라 고려에 위협이 된 이성무력을 외부에서 소모시키려 했고, 그 시도가 요동정벌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최영의 전략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고려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최영입장에서는 내전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 수가 얼마든 상당한 손실과 그로인한 고려의 군사력 약화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최영이 숭배하는 고려왕조만 지킬 수 있다면, 유일한 해법으로 보였을것이고, 그것은 위화도를 통해 요동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이성계와 최영간 명분싸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결국, 이성계가 도박을 한것이고, 성공한 것이 역사적 진실이었습니다. 최영이 도성에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많이두지 않았던 못두었던 것과 상관없이 이섬계의 의화도 회군은 내전 등 극렬한 저항없이 고려멸망과 조선건국이 거의 시차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 전주 이씨지만 조선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고려가 요동 정벌을 했더라도 당시 만주족은 조선을 만주족의 일파(같은 고조선 계통)로 봤지만 훨씬 더 큰 조선의 영토이기에 청이 복속시켰을 수도 있고 따라서 흐름에 따라 우리도 중국인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아니면 애초에 청 말기처럼 극악까진 안 갔을 수도 있고.. 변수가 많기에.. 그런 이유들로 if는 없는 거 같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이 된 이유가 있을 거고 조선에서 대한제국, 반쪽 짜리 대한민국이 된 이유도 있다 봅니다. 거대한 흐름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들로 진행되는 거라 봅니다. 우리가 다시 도약할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을 할까요. 저는 우리나라가 북한과 평화 통일하고 갈라지는 중국에게서 옛 영토를 되찾고 동북아의 패자가 될 거라고 감히 희망합니다. 뭐 이런 말들도 무색하게 내일 당장 인류 멸망이 올 수도 있겠지만요. 결론은 인류애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추가로 최영 장군은 뭔가 더 원대한 꿈이 있으셨던 거 같고, 이성계 장군은 애민 정신이 더 강했을 거 같기도 합니다. 두분 다 전쟁터에서 많은 걸 느끼셨을 거라고 봐요. 우리 국민들도 전쟁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자기가 키워낸 사람들이 희생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을 거구요. 정치적으로 본다면 본인 세력 약화기도 하고..
교수님 말씀이 맞는것 같습니다. 여말선초를 다룬 드라마에선 언제나 최영을 꽉막힌 꼰대정도로 묘사하지만 30여년을 전쟁터에서 활약한, 그것도 80번 이상의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한 무적의 장군이었던 최영이 무작정 낙관론에 빠져 무모한 작전을 벌였을 것 같지가 않아요.
하지만 어림도없지 이성계의 보름동안 밍기적거리기작전
이성계도 무능한 장수가 아닌데 이성계가 태업(?)할거라곤 생각을 못한거 같네요
최영이 무능한건 아니지만 상황파악을 안일하게 한거 같습니다. 명나라가 고려한테 요동털렸는데 어쩔 수 없지 하면서 고려를 놔둔다고요?
@@SuperWonder어우 답답한놈아 영상에서 단기작전이었다고 설명하는데도 못알아듣네
@@박승호-q5y 한마디로 명나라한테 경고를 한다는 거잖아. 홍무제가 이걸로 극대노하면 어쩌려고.
와 박사님 강의는 항상 최고지만 이번 영상은 특히 더 좋네요❤
임용한 박사님의 강의들 중에서 최고의 명강의입니다!
철령위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들이 잘못된경향이 대다수인데 철령위를 특정 지명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경도 안변으로 넘어가는 철령과 혼동을 하는 것입니다.
철령위는 지명이 아닌 기구입니다. 그 기구를 설치하는 목적은 당연히 고려를 길들이고 압박하기 위한 수단인데 대략 요령성 본계시 근처로 보는 설이 있고 저도 그 설을 지지합니다.
그 지역에다가 철령위라는 군사적 성향의 기구를 설치하고 이 기구가 관할하는 지역은 아마도 요동을 포함한 요령성지역으로 추측합니다.
항상 역사는 완전히 극단이 아닌 그 사이 어딘가가 진실인 경우가 많음
더 웃긴 건 명과 원이 그래도 치고박고 싸울 때는 요동정벌 반대하던 정도전이 명이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에서 오히려 요동 정벌하다고 했던 것 자체가 넌센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국력이 갑자기 몇 배로 뻥 튀기 되었나?
정도전이 경국대전에서 한 말 :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같은 오랑캐 국가들은 중국의 허락도 없이 변방의 땅을 차지했다. 중국이 만들어준 조선만이 유일한 이 땅의 주인.... ㅋㅋㅋㅋ
이런게 한국 역사학자들의 문제임.. 명나라 역사 따라.. 고려 역사 따로 가르치니 당시 국제정세에 대해서 제대로 모름..
요동은 이미 유익의 귀부이후 명이 접수해서 15여년간 요새화한 지역임. 이미 12위 설치해서 수비병력만 6만이 넘던 시절임. 나하추가 이곳을 공략할려고 여러번 침공했다가 개발리구서 포기했었는데 먼 육로로 통해서 요동을 명이 가던게 아니라 수군통해서 요동에 보급해서 요새화 했던거였슴.
그래서 풍승+남옥이 20만 끌고 나하추 치러갈때 요동에서 보급받으면서 나하추 포위해서 항복받아냈던거였슴.
그뒤 남옥이 15만 이끌고 북상해서 북원 치러가서 고려에 소문나돈게 요동이 텅텅 비었다였는데.. 요동에 주둔군만 최소 6만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2주 기다릴동안 북원은 남옥에게 기습받아 전멸하구 북원 자체가 멸망해버렸슴. 이게 위화도 회군하기 딱 일주일전일임.
감사합니다~!
최영이 원정에 참여 해야되는데 우왕이 만류한다고 가지 않았던게 패착
최영은 회군할거라는 생각은 아예 못햇고 가서 싸우다 죽거나 못싸우면 명령거부로 죽일라햇음
최영이 갔다면 그때 고려 멸망임
역시 박사님..
역사에 가장 애통한 시점입니다.
개인의 욕심으로 겨레에 큰 해악을 끼친 명확한 반역 쿠데타...
홍길동도 아니고 반역을 반역이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용비어천가 찬양하니...제2,제3의 반역이 나와 또 찬양받고,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이제는 역사가 암기과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사건 진상 조사임
앞으로 우리생활의 연장!
역사는 과학이죠
과학의 발전으로인해
역사의 결과가 계속 바뀌는거죠
근데 위화도 위치는 왜 검증도 안하고 외우고 있나요?
박사님 세트장 멋있어요
위화도 회군은 출발전부터 계획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런 큰병력을 동원할 기회?혹은 위기?에 이성계, 정도전 등이 아무런 모의가 없었을 것 같지는 않고 결국 회군으로 결론내린것 같습니다. 그리고 회군명분을 쌓기위한 작전들도 구상했겠네요. 아군이 아닌 장수들까지 설득하려면 장마에 맞춘 시간지연이 필수였고 아마 출발조차도 지연시키려고 애쓰지 않았을까 싶네요. 단순 4불가론이 교수님말씀을 들으니 현실적인 모습으로 연상되는게 신기합니다. 물론 상상이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봤습니다~
조선초에 기록한
사료는 믿을수가없습니다.
전쟁사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습니다.
개인채널도 있는지 몰랐습니다.
교수님 강의 너무 좋아요
15:33 뭔가요 갑자기...
고무고무 박사님
임교수님~ 위화도의 위치가 어디인지나 다시 확인한번 해보세요.
모래톱 하중도에 태조봉이 있을수 있는지요?
인하대 허우범교수의 위화도에 관한 논문 찾아보고 공부하시기 바람
강단사학자들중 하나입니다! 아닌척 깨어있는척 할 뿐입니다!
이 아저씨 진짜 역사좆도 모르죠 ㅎㅎㅎ 군사전문가인지 모르겠지만
이성계 전담 요리사가 저녁반찬으로 회를 올렸는데 한점을 입에 넣고 눈을감고 맛을 음미하다가 눈을 뜨고 외쳤다 "위화도 회군" 그래서 고려가 망하게 됩니다
웃기는 얘기하고 있네요! 회군을 생선회 1조각으로 결정을?
@@양석채-v8v 쪼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네ㅋㅋ
위화도 회군성공후 그 요리사가 다음 작품이 회는 날로 먹다
이런 아이디어 좋음. ㅎ 이런걸 다큐로 받아들이는 분이 있다니..
이걸 바탕으로 8부작 드라마 만들면 꿀잼이겠네요.
드라마 '정도전' 에서 이미 어느정도 다뤘습니다
일리가 있네요....젊은 역사학자님이라,,, 생각이 다르네요...
이성계의 막사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그 당시의 작전을 지휘한 무장들만 알고 있습니다.
주원장과 이방원 또는 이태조의 밀약은 없었나요?
고려에 최고 명장은 최영이
였다 .젤 많은 전장 전투를
많이 한장군이다 ,요동전략
시에 최영의딸이 왕후로 있
었기에 왕을보위키위해 궁성에서 요동출젼지휘를
했다 , 이성계의 실회군은
막을수는 없는것은 자명하
고 어쩔수없는 현실이되여
최영은 스스로 채포되여 형을 받게된것이다 ,
임용한 선생님 말이 맞어 !!!
위화도 위치가 잘못됐다는 기분좋은 새로운 주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문서자료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지만 문서자료라는것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라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른 유투버들보면 문서자료를 절대적진리로 전제하고 역사를 보는데 여윽시 임용한님은 다른채널보다 차원높은 시각을 보여주네요.
내경험으론 10여년전 주차관리를 했었는데 주차차량의 번호나 진출입시간 행선지 등을 기록했어요. 그땐 cctv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깜박하고 기록을 못하면 대충 빈칸을 채워 넣고 오류로 기재된내용은 검증할 방법이 없었어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고려사 같은 역사서도 오류나 인위적인 위증을 기록할경우 이걸 검증할 제3의 수단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개인의 인생을 봐도 크게 유명한 인물이 아닌 보통사람들은 생활기록부나 주민등록기록,건강검진 기록등 인생에 있어서 문자로 기록되는 부분은 일부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일부가 문서화되었을 뿐이죠.
주차를 할때도 모든 부분이 아니고 절반이상 사각이 있어 보이는 부분도 있고 안보이는 부분도 있기에 안보이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으로 접근하면 접촉사고가 나기 때문에 보이는 부분으로 안보이는 부분까지 추정하며 주차하듯 역사도 기록된 부분이 전부가 아니고 기록 안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기록을 역사를 보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할겁니다.
다른 채널은 문서기록이란 범위 안에서 그게 인류역사의 모든 전부인냥 전제로 해석하지만 이 채널에서는 문서 바깥의 모습도 가늠해가는 시각이 차별성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과거에는 오래살기가 어렵다보니 아무리 영웅이어도 나이든 장수보다는 젊고 유망한 장수편에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장과 함께할 시간도 많지 않고 미래가 불투명하니까요. 국가경영이라는 것이 반란도 막아야 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고 쉽지 않네요.
오옷!!! 겸손하신 임용한 박사님이 " 야심작 " 이라고까지 말씀하시다뉘!!!!
임박사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서...
명 건국시 고려가 대응했던 방식과
청 건국시 조선이 대응했던 방식을 비교부탁드립니다.
그니까 고려는 명건국시 요동정벌이라는 강수를 뒀는데
조선은 물론 임란 후라 매우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광해군의 외교외 적극적 대응이 없었던것 같아서
비교하면 고려의 위대함이 부각되지않을까 싶어 말씀드립니다
교수님은 고려의 수도 위치가 어디라고 봅니까?
이성계의 헬조선 시작
이건 예전에 박사님도 얘기하셨는데 고려 시대때는 너무 전란이 많고 나라가 항상 혼탁하다 보니 좀 더 안정적인 상황을 원하게 됐고 그래서 조선이 등장하고 그랬던거라고 하셨어요 근데 문제는 나라가 안정화가 되다보니 역동성도 같이 죽어서 위기 상황때 많이 무기력 했죠
조알못
위화도 현위치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당시 사서 기록보면 압록강 위화도 아니라던데
에헤헤~ 저는 멍텅해서 그런거 멀라여~ 에헤헤~ 그냥 네이버 백과사전 보고 외웠어요~ 에헤헤 ~
상식적인 역사 외곡 속이다 시원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뭐히시는지 홧팅입니다 !!!
말씀하신 서경 위치가 어디인가요?
고려에서 서경은 평양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서경은 평양
개경은 개성이고,
남경은 서울,
동경은 경주 입니다.
임용한이나 식민사관 교과서에 따른 서경의 위치를 묻는게 아니죠. 진짜 서경의 위치를 묻는거지 ㅎㅎㅎ
요즘 북한 역사학자들도 북한평양이 고구려, 고려 평양이랑 다르다는거 인정해요. 최소 만주지역으로 봅니다.
박사님 서적 임진왜란이 상 이란 것은 중, 하도 있는데 상이 우선 출판됐다는 의미인가요?
요동정벌을 하러 갔는데 왜 당시 신생국이었던 명이랑 싸울 수 밖에 없었느냐.. 라는 역사적 배경이 더 중요 하다 봅니다. 고려의 요동정벌목적이 명이 멋대로 지명을 바꿔서 옛 고려 땅을 명의 땅이라 우겨서 고려도 원이 물러가던 격동의 시기에 옛 영토를 찾기위해 요동땅을 점유하러 갔지 않았나 추정해봅니다. 그 이후로 지명이 의주 부터 해서 유학자들에 의해 지명이 한반도 내로 옮겨졌다 그런 얘기가 있다고 하는데 이게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요동정벌을 하는데 명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싸울 수 밖에 없었나 그 역사적 배경이 중요 하다 봅니다.
의주로 후퇴한건 이방원의 무인정사 이후입니다.
이성계/정도전은 3차 요동정벌을 진행했으니
결코 그럴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테스트-y3q 네 잘알겠습니다. 제가 이런 교양 유튭을 여러개를 챙겨 보니까 각 역사 교수님들이 하는 말씀들이 퍼즐처럼 각각이더라고요. 중국사 하시는 분이 명이 들어서면서 요동까지 중국의 고토라고 수복해야 한다고 하니, 고려조정에서 대규모로 출병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 말씀을 하신 분도 계셨거든요.
@@graycain 군사적으로 너무 기운 발언이에요.
남북을 비교하면 됩니다. 북은 국민이 ㅇrㅅr해도 핵개발 군사행동
남한은 충분히 군사행보를 할 국력이 됨에도 스스로 ㅈr폭
@@graycain 우왕은 북 김ㅈ은이고
남의 민주당과 원짜이인, 리짜이밍은 이방원이고
이ㅅ만, 박ㅈ희, 전ㄷ환은 이성계로 보면 됩니다.
어이쿠. 교수님 앞에 놓인 디오라마정보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박사님께서 원하시는거 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기 싫은 전쟁을 억지로 했네요!
정황상 당시 고려가 해야할 일은 요동정벌이
아니라 내정개혁에 의한 행정/경제 정비였습니다.
먼저 국력을 증강 시킨 후에 전쟁을 해야 하는거죠.
현재의 한국은 부국강병은 되었지만
지도부인 집권/기득권층이 너무 부패하여
5.16 군사혁명과 같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할 정도로 기득권 교체 작업이 시급합니다.
임용환 박사, 이다지는 아리송 하지만
심용환, 최태성이나 이익주 이 인물들은
역사관이 치면적이게도 친즁쫘ㅃr 적입니다.
저런 작자들이 역사관을 친즁적으로 해석하니
북진통일과 강성대국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무인정사와 같은 일이
한국에서 발생하게 되네요.
@@테스트-y3q
임용한 박사님은 믿음이 갑니다.
최소한 지금 압록강 사이의 모레섬이 위화도는 아닌게 분명하다
장마철에 그 섬에 올라가서 집단자살 할 계획이 아니었다면 ㅎㅎㅎ
거의 모든 역사가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믿을게 거의 없다
몇년전의 일도 왜곡하는데 하물며 고려시대라니...
한반도가 너무 넓고 광대해서 조그만 만주땅정도는 필요가 없어 버렸고 그렇게 광대한 한반도에서 천년을 살다보니 한반도 조차도 너무너무 광대해서 다스리기 어려워 북쪽 반절정도는 버려도 충분하기에 뚝 잘라 버리고 그 남쪽에서 살고있다. 그 반절의 남쪽도 몇십년 살다보니 그조차도 너무 넓고 광대하여 다스리기 너무힘들어 동서로 나누고 갈라질 준비를 하고있다.
위화도 회군이 말이 되나? ㅎㅎㅎ
교과서상에 고려영토가 조선보다 좁고 신라는 더 좁은데 고토회복이 말이 되나요? ㅎㅎ
상식적으로 애초에 만주지역이 계속 고려 영토가 아니었는데 철령위 설치한다고 왜 통보를 했을까?
고려는 지네 땅도 아닌데 왜 거기 반발을 할까? ㅎㅎ
말이 안되죠? 제대로 아는것도 없는데 뭘 가지고 화를 내는걸까? ㅎㅎ
역사 제대로 알아보세요 임용한같은 역사문외한 채널 보지말고
~ 공민왕 중반기 까지의 대동강
大河가 흘러서 同에서 모였다가 다시 흐름. (6600리 ). ~ 대명여지도 초중본까지는 大河, 이후부터 황하로 표기.
~ 공민왕 후반기 '우왕대의 大同江
大江이 흘러서 洞에서 모였다가 다시 흐름. (5500리 ). ~ 대명여지도 중중초본까지는 大江, 이후부터 양자강,장강으로 표기.
기병 보병 치중대의 속도가 현격히 달라서 날짜만으로 가늠할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기도 합니다. 원정경험이 부족한 고려군이 치중대를 제대로 운용했을까 하는 사정도 있을거같구요
저 피규어 얼마길래 인생에 산것중에 제일 비쌀까요😂
내가 이런 것 안샀거든요
그래서 ? 무엇을 ? 본인이 만든 [오늘도 아픔없던 어제같이] 눈뜨면, 바로 아침에 하루 준비운동 하세요 .너도 나도 모두 , 다같이 .
궁금한게 있는데 위화도 회군이 명에 대한 단기 무력시위에 불과했다면
왜 전 국력을 기울여서까지(심지어 회군에의해 역성혁명이 일어날 수 읺을 만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했나요? 오늘날 무력시위할 때도 그냥 위협차원의 퍼포먼스만 보여주지 거의 전면전할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지는 않지 안나요?
그냥 순수 호기심으로 물어보는겁니다
그래서 우왕과 최영이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지요.
땅을 그냥 다 내놓으라는데 당연히 사활을 걸어야죠. 그리고 고려시대는 불교국가, 왕이 곧 부처인 국가라 조선의 역성혁명 같은 개념이 없었을 겁니다. 무신정권 때도 왕이 되려고 한사람은 없죠.
@@성이름-m6v 무신정변은요?
이자겸의 난은요? 조선건국도 결국은 역성혁명을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역성혁명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이름-m6v 왜냐? 조선은 고종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 버렸으니까요.
@@성이름-m6v 오히려 역성혁명은 고려시대에 더 많았죠.
만약 지금 중국이나일본이 대한민국의 땅을 자기땅이라고 우기며 땅을반환ㄴ하지않으면 무력으로 뺏겠다고 하면 우리는 전쟁이 무서워서 그냥 땅떵어릴 그들에게 내어 줄 것인가 우리가 힘의 열세에 있다하더라도 그들에게 맞서 목숨을걸고 싸워 지켜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고려말의 상황도 다르지않았다고 본다 이성계의 권력욕으로 이루어진 역성 쿠데타 일 뿐 이라고봅니다
@@사과아삭-s7j 맞아요. 성계에 뒤통숩니다. 뒤통수를첬으면 고려저권보다 더나은새상을만들어야지. 그런꿈도 야망동없이그냥 정권이 만만해보이니까 뒤통수치고 뙤놈들에속국되고. 끝네일본에 넘겨준 역적이 이가조선입니다.
무슨소리신지 ㅎㅎ 임용한씨가 따르는 식민사관에 따라 영토를 보면 고려보다 조선 영토가 더 큰걸요? ㅎㅎㅎ
임용한 유튜버도 썰이나 풀줄알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영토를 엉터리로 알고 있어서 결국 하는소리가 다 헛소리가 돼 버려요
고려사 한문에 압록강은 없습니다. 압강이라고 되어있지.. 압강과 압록강은 다릅니다,, 위화도 회군은 반도나 만주에 있었던 사건이 아닙니다.
맞습니다...위치를 모르니...바보같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허준 if에서도 말씀하셨던 얘기, '요동 정벌해서 내 땅 만들 수 있으면 거기서 왕 하지 왜 내려오냐?' ㅋㅋ 최영, 우왕 입장에서도 가서 성공하면 다 이성계 세력 되는 건데 왜 보냄
@@epsdm 그러게요
당시 요동은 대기근이 터져서
요동 지배자 나하추 조차도 수습 불가능 상태로
거의 무정부 상태였기 때문에
명나라 조차도 진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하추가 명나라에 귀순한 것도 대기근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요동을 점령하려 들겠어요?
경제 재건 정책을 10여년은 진행해야 할 판인데
그걸 하려면 명이든? 고려든? 어느 하나라도 기반이 있어야죠?
이성계는 고려를 기반으로 하여
요동을 점령할 계획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요동은 사실상 요나라 이후 관리가 안되어서
무주공산 상태였다고 보는게 맞지요.
❤
트럼프 암살 미수....
박사님 쉴 시간이 없으시네요
드라마에서 뭘 배울까마는 이성계가 터무니없이 미화...땅을 넓히라고 보냈는데 쿠데타 일으킨 찌질한 인간 그후 영토는 줄어들고 중국을 떠받들고 그들의 철학을 신을 섬기듯이 해서 결과적으로 고려이후 한국의 쇠퇴기를 열지 않았나
애초에 왜구한테 수도 개경까지 털리던 망하기 직전 고려였음. 그걸 그나마 산소호흡기 달아서 유지 시킨게 이성계고. 이성계 없었으면 더 빨리 망한게 고려임.
신분 노예제도 현재 북한 김씨같은 세습의 시작@@MrQjxjths
과연 단기전 있엇을까요, 몽골과의 협력시대에 충선왕이 요동의 왕을 겸하였던 것을 생각하여 요동을 점령하고 요동의 왕을 겸임하는 계획이라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심양까지 점령해야 하는데. 몽골 과 명의 전투중에 비워진 만주를 차지하고 금나라 지역의 군대로 몽골과 명을 견제하고 ..... 하지만 여진족이 고려의 목적에 따라 줄가요, 윤관의 정벌에서도 엄청난 어려움을 격었는데, 이성계의 주장이 맞았다고 봐요. 오골성을 점령 하거나 요동성을 점령하거나 해도 이를 유지할수 있는 국력이 없으니.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때마다 느끼는 건데, 중간중간 가벼운듯 툭툭 던지시는 농담들이 평생역사공부를 하면서 가졌던 의문들에 대한 대답이 되는듯 합니다.
최영은 딜레마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최영 자체가 원에 충성하는 권문세족이었기에 원을 나몰라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중원의 패자가 변경 될때 중원은 가장 약한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말씀하신 것 처럼 '지배가 목적이 아닌 경고성' 전쟁을 벌임으로써 권문세족인 자신의 충절과 국가의 이익을 챙기려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생을 왜구와 싸운 최영이 그로인해 얼마나 국력이 약한지를 모를리 없었을텐데도 모든 국력을 끌어다 쓴것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명이 안정기에 접어든 후에는 다시는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할수가 없다는 판단이었을듯 합니다. 전쟁을 위해선 이성계의 군세가 절실했고 그로 인해 이성계의 눈치도 보느라 중군도 편제하지 않고, 그저 이성계의 충성심만을 바랬을 듯 합니다.
이성계는 4불가론으로 회군을 해놓고, 왜 명나라가 안정기에 든 시기에 정도전과 요동정벌을 진지하게 고려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 그 의문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강의였네요.
결국 이성계도 최영의 의도를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역성혁명의 생각 뿐이었기에 회군을 결심했단 걸 알았습니다. 드라마나 모든매체에선 최영의 요동정벌은 무리수이고 정도전의 요동정벌은 일리가 있다고 말해서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조선의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가 써졌다는데에도 격한 공감이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판단하기로는이성계가나쁘다지금대한민국은이승만이나쁘다
평양에서 도보로 위화도 까지 3-4일 만에 갈수 있다는 것은 흠...
도보로 최대 하루 30km를 갈수 있을가...제대로된 길도 없었을텐데...
취사는 야외에서 솥걸고 그 많은 병사가 먹고 치우는데 소요되는 시간만 해도 하루 몇시간이 소요될텐데...
마차가 다닐 길이 제대로 닦여 있었을가...
5만명이 움직이는 행렬이 겁나기 길텐데..., 이런 저런 사항 다 감안하면 하루 20km 정도 행군이 가능하다고 보면 평양서 위화도 까지 열흘에서 약간 넘는 시간이 걸린다는 게 타당함
진짜 거짓말은 지금의 위화도
위치입니다
대군을 이끌고 장마철에 강 중간에 진을 치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이것을 가르치는 본인이
부끄러움을 가지길
3천평이면 1개 중대,1개 대대도 주둔하기 힘든 넓이다. 그런데 5만명이 그곳에 진을 쳤다고? 그 섬엔 어떻게 건너갔고? 이상하죠?
현재의 압록강 위화도에 20만 대군이 머무를 수가 있습니까? 고려때도 그리 큰 곳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던데. 실제 위화도는 그보다 훨씬 더 북쪽 송화강 지류쪽에 3면이 강에 둘러싸인 곳이라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명나라 군대들이 요동의 여러성에 3천명이상씩은 주둔하기 힘들었다고 봅니다. 주민들은 그이 없을테고 원이 패주하면서 주민들도 뿔뿔히 흩어져서 성안에 인구는 그닥 많이 않았을듯...
고려정규군이 기습을하면 5만으로도 2~3개 성은 단기전에 함락이 가능하고 남았을시기라고 봄.
명나라도 단단한 국가가 아니고 건국후 고려가 위화도 회군할때가 건국후 20년쯤인데...
계속 전쟁으로 땅을 넓히던 명나라도 상황이 좋지많은 않음.
고려가 요동을 점령해서 주둔하고 방어전하면 명나라가 대군을 쉽게 끌고 오지 못함...주변의 반군수준도 아닌 고려정규군은 450년을 버틴 왕조로써 탄탄한 민족이라...
명나라가 병사를 징병하고 많은 대군을 먹일 식량도 강제 징발해야 될텐데... 시간만 끌면 후방에서 또다른 세력이 반란이 일어날수 밖에 없음 워낙 땅이 넓어서 호시탐탐 반란을 노리는 인물도 많았을듯하고.
전쟁은 성을 점령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거점을 점령해야 하죠. 강변 성 2~3개 정도 점령해봐야 아무 의미 없습니다. 방어가 안되는데요
나하추도 20만에 항복하고
직후 바로 북원에 15만 동원해서 궤멸수준의 타격을 입힌게 명나란데 싹싹 긁어모은 5만명으로 뭘해요
정규군도 아니고 도적떼 20만한테 털려서 망할뻔한게 고려인데다가 왜구도 못막고 후방에서 지원해줄 세력도 없는게 고려 말인데 명의 20만 정규군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lIlIllIIlIlIlllIIlI 요동을 아무생각안하고 공격할려고 했을까요. 요동이 거점으로 고려의 최전방이 되는건데. 주변을 다 지배하기위함인데. 일단 요하를 경계로 방어전을 오랫동안해야 우리영토로 편입이되고 백성들도 이주하고 정착하는게 오래 걸림.
@J Kim
역사서 보면 아무리 우왕을 이쁘게 보려 해도
진짜 요동정벌은 아무 생각없이 움직인
그런 어리석은 전략이었습니다.
@@jkim949 4만따리로 공격 시도한 건 아무 생각 없는 거 맞습니다. 심지어 보급 대안이라는 게 현지 보리 약탈인데요
설명을 잘 하셨지만...고려시대 개경이 지금의 개성이 아니고...텐진 근처입니다...지금의 압록강은 조선시대 부쳐진 이름입니다...그때의 압록강은 하북성, 산서성에 존재했습니다.
죽지도 않고 또 온 환단고기충 ㅋㅋㅋㅋ
@@btatbb7586 땟넘...아즉 안죽었고 빠나~~ㅋ
@@btatbb7586 환단고기는 고조선 이전 역사고 빙구야
위화도회군과 피규어회군 어디가 진실?
이런 걸 학교에서 보여줘야 하는 건데...
한시간 동안 이 내용만 다를 순 없으니
지리정보가 엉터리라 보여주면 안됩니다 ㅎㅎ
1388년 이전의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는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전한 고려의 안전지대
중국본토 정벌이 아닌 왜 요동이었을까요?
고려말까지는 요동이 북경쪽입니다.
현재의 요동은 고려말까지도 고려 영토였습니다.
그건 진짜 중국이랑 맞짱 뜨자는건데...그랬다간 한민족의 역샤는 14세기에서 끝났을겁니다.
소설 한번 써 보죠.
최영은 단기전을 생각 했으며
이성계 혼자서라도 한달 정도면 충분히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막대한 사병 손실을
감수해야 되고 그만큼 자신의 입지도
줄어들것을 염려하여
4불가론을 강력하게 주장 했으나
조정의 실세 최영에게 밀려
할수없이 출병하게 되었는데
최영을 죽이고 회군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우왕이
최영을 몿 가게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믿었던 최영은
회군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요동 정벌이 실었던 이성계는
굼뱅이 기어가듯 위화도 까지 갔으며
회군 요청까지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차 쿠테타를 결심했다.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조민수를 협박하여 쿠테타에 동참
시켰으며 역적이 되기 실었던 병사들은
탈영을 했다.
이후 회군하여 사실상
고려를 무너뜨렸다.
역적
프레디 머큐리가 부릅니다. 위화도 챔피언~ 위화도 챔피언~~
2차 요동정벌의 문제점은 최영 장군이 팔도 도통사로 좌우도통사 조민수, 이성계와 함께 요동정벌군을 이끌지 않았다는 거죠. 그리고 타협안으로 가을 출병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문제죠.
제일 큰 문제는 정도전의 3차 요동정벌 계획처럼
한반도 지방 행정 시스템과 군사 방어 태세를
정비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진행했던 거죠.
우왕이 정도전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먼저 내정개혁과 한반도 행정개혁을 하고
정도전이 행한 물류/유통망 구축과 전제개혁을 통한
확실한 경제 재건 정책을 시행했다면
정도전, 윤소종, 남은, 조준 같은 인재들이
이성계에게 붙는 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왕이 묘호 그대로 어리석어서 일어난 일
가장 큰 문제는 이성계가 역심을 품었떤거죠...어떤 조건 떄문에 역심을 가지지 않았다가 다시 역심을 품었다?
@@jerries8884 애초에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인물에게 대군을 맡기는게 문제죠.
이성계 중국계 역적임 국가의 치욕
넌 앞으로 짱깨말만 써라
그냥 반역을 꿈꾸던 역적들이 성공한거지 뭐 구국의 결단이니 뭐니로 쉴드칠 이유는 없는듯
고려사에 이미 나옵니다.
권문세족들은 토지가 넘처나서
산과 강으로 경계를 나누지만
농부들은 농사지으려 해도
송곳 하나 꼿을 땅하나 없었고
들판에는 ㅇrㅅr 한 시신으로 넘처났죠.
이렇게 국민들이 죽어나가는데도
그런걸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권문세족들의 이권만 다투며 정복전쟁이라니?
현재 북조선 상황과 똑같다고 보시면 되죠.
국민들은 죽어나가는데 곧 죽어도 핵! 핵! 거리고 있으니...
@@테스트-y3q뭐 조선은 안그랬나요 ㅋㅋ....
그냥 이성계 왕 하고 싶어서 말머리 돌린거임.. 우왕도 아주 똘아이가 아니고 역사 의식 가지고 요동 옛날땅 회복 할려고 했고 충분이 가능성 있어음..
고려말 조선초 위화도는 평안도 용천 앞바다에 있었다 아이가, 초토 시바루... 혼일강니도 참조.....
와.
"철령위부터 정도전이 명나라하고 기획했다" 이거 와....
정도전 이야기는 못들었는데 어디서 나오죠?
그당시 이성계가 위화도 그니까 미국에 왔더니 내가 여기를 정벌해야되나 뭐 그런생각이 든거임 고려를 정벌해야 될꺼 같은되 완전 내 생각임
요동에 명나라 군대가 있었을까
교수님. 말씀드립니다..고려사 세가를 보면 압강과 압록강이 나옵니다. 우선 명확하게 압록강을 건너간겁니다...그리고 계속진군하다 압강에 이르러 건너려 할때 건너지않고 회군하였다고 나옵니다. 위화도는 압강이란 곳 인근에 있는곳입니다. 압강과 압록강은 다릅니다. 참고로 압강은 전선 70여척을 정박할수 있을만큼 당시의 대규모 해군기지입니다. 이후 서북면에 비가 많이 내려 압강에 정박한 전선이 모두 떠내려 갔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위화도 관련 언급에서는 꼭 압록강에 대한 한자가 없군요...조작인지 뭔지...ㅋ
우리가 아는 압록강의 위화도는 위화도가 아닐겁니다. 정확한 위화도는 다른 곳일겁니다.
거짓을 가지고 진실을 따지는 갓은 아무 의미 없음
당시 상황을 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더욱이 china의 한반도 흡수/병합 전략이
진행되는 이때에 더욱더 필요하지요.
수고하신데요
혹시라도원균미화사업
동참마세요부탁합니다
칠천량에흉악하고
무능한간신💀☠️👽🦴 원균때문에몽땅전몰한분들의기념사업을 추진합시다
🫰🙏👍🔥🔥🔥
😍😊😎❤️💙🧡
보낸놈들이 문제지. 원균이라고 죽을줄 뻔히 아는데 가고 싶었겠냐? 원균도 이순신처럼 계속 출정 명령 거부했고 권율한테 곤장도 맞았다. 어쩔 수 없이 간거지
@@GonZo9072
아직도 이런 개소리로 원균쉴드 치는 놈이있네 ㅋㅋ
원균이 이순신이 일부러 출정 안한다고 누명씌워 꼰지르면서 자기한테 지휘권주면 일본수군 본진까지 다 쓸어버릴 수 있다해서 지휘권 준건데
원균 이 폐급은 전술이 문제가 아니라 배를 운용하는거 자체를 몰라서 칠전량 대패 이전에도 배를 몰고 나갈때마다 표류하거나 왜군 정찰선한테도 털리고 바다로 나갈때마다 배 몇척씩은 잃고 오는 ㅂㅅ 이었다. 그당시 기록이 세세하게 남아있는데 원균 쉴드를 ㅋㅋㅋ
성공한 쿠데타
이성계는 우리나라의 3대 역적입니다.
개 성개???
니가 역적 같은데
이성계 김대중 문재인 이 세놈이 최대역적임
근데 5만이나 되는 병력이 제시간에 딱딱 맞춰서 공격하게 할 만한 행정력이 저때의 고려에 있기는 한 걸까? 관리들 녹봉도 때 먹는 시기라고 하던데.... 5만 병력의 병기와 군량을 제시간에 맞춰서 준비는 했으려나 몰라.... 도중에 다 떼먹어서 진군이 늦어지고 이성계는 이게 왠 떡이야 하고 태업 부렸을 가능성은 없을까?
ㅣㄴ
식민사관이 만들어 놓은 쌍성총관부, 철령위 위치가 엉터리로 되 있다 보니, 온갖 소설이 난무한다. 철령위 위치도 양국이 서로 모르고 전쟁하려고 했을까? 코메디도 아니고....
니스기 초토 모린다 아카노...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말만나와도 울화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 합니다 우리나라가 한반도에 쳐박힌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된건 이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위화도 회군했으면 베트남 호 왕조 꼴 났을겁니다.
고려때는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었나보군요
@@장기태-q6c 고려는 백제 고구려 신라 를 합친 나라 입니다. 그리고 동서 즉, 좌에서 우의 거리가 고구려 보다도 훨신 더 컸다고 고려사에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광대 했을지 생각해 보세요
@@ywl6566
우는 시베리아고
좌는 중국 위로는 고비사막과 초원
강력한 몽골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덩이가 크면 뭐합니까?
나갈수가 없는데요
한반도 주변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댓글다시죠
지금 중국이 어떤지
아세요.
땅덩이는 큰데 밖으로
나갈수가 없어요
중국의 바다는 다른
나라들에게 다 둘러
쌓여 있어요
위화도 회군 일주일전 벌어진게 북원이 남옥한테 기습받아 멸망했슴... 요동치러갔다면 남하하던 남옥의 15만대군하고 상대해야했었슴.. 게다가 명나라는 종특이 수성전임. 최무선이 화약무기 만들어 왜구들 격퇴했듯이 명나라 주특기가 화약무기였슴. 당시 고려역시 명나라한테 화약무기 재료인 염초랑 유황 전량을 수입해서 쓰던 시절이고..
중국에 철령위가 존재합니다.
거짓의 민족!
거짓의 역사!
유방 잡는 항우처럼 왔습니다
왜 그때 전쟁을 하러가나. 젤덥고 장마철인데 첨부터 싸울생각없었던거. 아닌가. 그냥가만있기도더워 힘든데 그먼길을걸어서 전쟁하러갖다고 가다가 더위에지쳐 싸울힘이나있었겠나.침략받았다면. 할수없지만 처들어가는걸 계절계산도않고. 음직이나 . 어린애도 그때계절에는 안가겠다. 그시절엔 그쪽이 그리덥지않았나.
저도 위화도회군은 잘했다고 보는 사람인데 가을 출발하면 다얼어죽어요 10월부터 요동은 영하 에요
영상 안보셨나요? 전쟁 계획대로 했으면 장마철 전에 시작했고 아마 장마철 오기 전에 끝났을 것이라는 내용은 안봤나요?
그런데 전쟁계획 무시하고 쌩깐건 이성계였음.
개인적인 생각으론 당시 고려가 내부적으로 개박살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려했다는 점이 멸망을 불러왔다고 봄.
조선 기득권 층이 민족성 까지 사대만 하는 소인배로 만들었지요
왕이 참 덜 떨어지고 어린 왕이었다 최영을 보냈어야지 거기서 다 절단났다 군권을 현장에서 쥐고있을때 머리가 없으면 군사들이 많아도 힘을 못쓴다
보낸다고 달라지겠어요?
최영이 있었다면 함경도 별초군인 이성계군이
그냥 죽겠습니까? 최영을 처형했죠.
최영이 너무 순진했거나 어리석었죠.
왕은 군권을 장악한 최영만 옆에 데리고 있으면 자기는 안전하다고 생각 했고, 더 나아가서는 최영이 반란할까봐 의심해서 데리고 있었다는 의견까지도 있읍니다.
한족이 요동을 차지하게 된것은 결국 이민족 덕분아닌가요? 몽골족, 청나라 만주족 등, 한족 스스로 요동의 주인이 된게 아니지 않나요? 결국 이성계때문에 요동을 차지할 마지막 기회가 날아 간셈이지요.또 조선건국으로 한글을 얻었으니 아이러니하지요.
양력 음력 음력이면 장마철
개성으로 다가오는 이성계처럼 달려왔습니다.
아버지의 회군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키는 이방원처럼 달려왔습니다
감찰사님!!! 여기예요!! 여기!!!
만고역적인가?
@@jaehoonha6 이성계는 성공해서 태조가 되었으니 역적이 아니라 주상전하임
달려왔습니다. 이런 종류 댓글의 기원이 어떻게 되요?
지금 중국에 보관중인 명나라 역사서에 의하면, 이때 이성계가 지 졸개 장수를 주원장에 보내
거래를 했다고 한다. 거래내용은 고려를 망하게 할테니까, 죄선 개업하는데 명이 훼방 놓지마라
사실 지금 여러분의 상황을 따져 생각해보면, 최영과 이성계는 대척점에 있던 인물입니다. 나라자체가 파탄난 상황에서, 주류의 중심에 있던 무신 최영과 신흥무신의 선두주자였던 이성계는 당시 나라상황에 이성계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고려를 유지하느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느냐의 문제에서 상호간은 최대정적이었습니다. 비록 명나라의 철령위를 빌미로 한 도발이었지만, 여전히 북원과 전쟁중이었던, 이전 친원출신이 많았던 고려를 경계하고 있었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에 앞서 외부 군사력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기위해 조선을 침범한 것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최영은 고려왕조의 안정적 지속을 위해 이성계가 통제하고 있는 최영이 생각하기에 따라 고려에 위협이 된 이성무력을 외부에서 소모시키려 했고, 그 시도가 요동정벌이었다고, 전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최영의 전략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고려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최영입장에서는 내전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 수가 얼마든 상당한 손실과 그로인한 고려의 군사력 약화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최영이 숭배하는 고려왕조만 지킬 수 있다면, 유일한 해법으로 보였을것이고, 그것은 위화도를 통해 요동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이성계와 최영간 명분싸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결국, 이성계가 도박을 한것이고, 성공한 것이 역사적 진실이었습니다. 최영이 도성에 가지고 있던 군사력을 많이두지 않았던 못두었던 것과 상관없이 이섬계의 의화도 회군은 내전 등 극렬한 저항없이 고려멸망과 조선건국이 거의 시차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 전주 이씨지만 조선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고려가 요동 정벌을 했더라도 당시 만주족은 조선을 만주족의 일파(같은 고조선 계통)로 봤지만 훨씬 더 큰 조선의 영토이기에 청이 복속시켰을 수도 있고 따라서 흐름에 따라 우리도 중국인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아니면 애초에 청 말기처럼 극악까진 안 갔을 수도 있고.. 변수가 많기에..
그런 이유들로 if는 없는 거 같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이 된 이유가 있을 거고 조선에서 대한제국, 반쪽 짜리 대한민국이 된 이유도 있다 봅니다.
거대한 흐름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들로 진행되는 거라 봅니다.
우리가 다시 도약할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을 할까요.
저는 우리나라가 북한과 평화 통일하고 갈라지는 중국에게서 옛 영토를 되찾고 동북아의 패자가 될 거라고 감히 희망합니다.
뭐 이런 말들도 무색하게 내일 당장 인류 멸망이 올 수도 있겠지만요.
결론은 인류애가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추가로 최영 장군은 뭔가 더 원대한 꿈이 있으셨던 거 같고, 이성계 장군은 애민 정신이 더 강했을 거 같기도 합니다.
두분 다 전쟁터에서 많은 걸 느끼셨을 거라고 봐요.
우리 국민들도 전쟁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자기가 키워낸 사람들이 희생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을 거구요.
정치적으로 본다면 본인 세력 약화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