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24.10.20. 불러주지 않는 자(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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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5 ноя 2024
  • 불러주지 않는 자
    2024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9:27-32
    (29:27)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29:28) 대저 그가 바벨론에 있는 우리에게 편지하기를 때가 오래리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29:29)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들릴 때에
    (29:30)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31) 너는 모든 포로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스마야를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가 너희에게 예언하고 너희로 거짓을 믿게 하였도다
    (29: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을 인하여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두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와 스마야입니다. 그런데 이 예레미야는 그당시 바벨론 포로잡혀온 집단에게는 ‘자칭’ 선지자로 통합니다. 선지자도 아닌게 선지자 흉내내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스마야 선지자는 참 선지자로 통합니다. 이 스마야 선지자는 유대 백성들에게 산 맛을 줍니다.
    희망을 주는 선지자가 스마야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밝힙니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왜 그당시 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는 선지자를 그토록 신뢰하는 걸까요? 그것은 이제 자신들에게 ‘탈출’이라는 것은 더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부합니다. 이미 애굽에서 탈출을 한 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탈출의 탈출’을 해서 도달해야 할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그들은 도무지 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의 ‘약속의 땅’으로 도로 그들이 들어가게 된다면 이는 ‘탈출’에 해당되지 않고 ‘접수’에 해당되는 겁니다.
    자기 것을 당연히 돌려받는 것이 된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의 땅은 언제든지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그 약속의 결코 당연히 쟁취하는 땅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뭘 기다려야 하고 이번에서 또 무엇으로부터 탈출을 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은 신약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흔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느헬람 사람 스마야와 그 자손을 벌하리니 그가 나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을 인하여 이 백성 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 하는 선한 일을 그가 보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7:32)
    벌을 받는 대상이 곧 인간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전에 그들이 세상 이방 국가 권력의 종이었지만 신약에 오면 인간은 율법의 종이 되어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율을 외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을 율법 안에 가두어두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서 망하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망합니다.(롬 2:12)
    특히 이방인들의 아예 율법이 없으니 자신들이 무엇으로부터 탈출해야 될 하등의 이유를 모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그 이방인들 손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부터 탈출은 하나님께서 으레 미리 선조에게 약속하신 대로 당연히 자신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은 그 약속이라는 율법 자체로부터의 탈출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남은 유대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미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 못한 진실보다 거짓에 쏠려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은 자신들이 알아서 다스릴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욕망이란 비주체적이고 비인칭적입니다. 즉 욕망은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 가릴 게 없이 한결같이 작용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인간의 주인입니다. 이미 이 사실은 창세기 4:에 나오는 가인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창 4:6-7)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경우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가인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밝혀주셨습니다. 만약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열납되지 않았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인간을 장악한 욕망의 성향이 밝혀진 겁니다. 악마의 욕망으로 인해 선과 악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는 순수한 인간을 자기의 볼모를 잡았습니다.
    그 결과가 데살로니가후서 2:9-12에 나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인간에게 있어 욕망이 인간의 주인이 됩니다. 인간은 이점을 극복하고자 자신의 자율권을 동원해보지만 이는 마치 짐승이 주인이 휘두른 채찍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때린다고 해서 짐승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악마가 그 인간을 놔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0:1-3에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즉 호명입니다. 주님께서 양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양은 그때부터 자기가 그동안 지켜오고 불러왔던 자기 이름과 그 환경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환경을 주님의 환경으로 전환됨을 감사하고 놀라워합니다. 누가 성도인가요? 이 호명의 경우가 구약 사무엘상 3:3-5에서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어린 사무엘은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언제든지 엘리 제사장이 부르면 쫓아갈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어린 사무엘은 자기 자율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 제사장은 악마가 심어놓은 자율성을 그대로 잘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멸망받을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이름을 수호하고 그 가치에 매달리는 바가 호명되지 못한 자의 특징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Комментарии • 4

  • @이상희-p7b1d
    @이상희-p7b1d 25 дней назад +1

    아멘! 주님께 부름을 받은것에 더욱 깊은 말씀의깊이에 우리는 이렇게 듣게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 @sabrinabae2175
    @sabrinabae2175 26 дней назад

    아멘, 감사합니다.

  • @nothing-im1il
    @nothing-im1il 26 дней назад

    아멘.참으로 놀라고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 @전원우-w8y
    @전원우-w8y 25 дней назад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