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틀을 벗어나 어부사시사 윤선도의 완도 보길도를 찾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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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1 сен 2024
  • 완도 보길도 윤선도의 자취를 떠난 여행...
    인조의 피난 행렬 근처에 있었으나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인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해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거부했었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경상북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영덕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 뒤 곳 전국의 아름다운 명산과 사연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 〈산중신곡〉, 〈속 산중신곡〉 등이다. 1643년에는 거금도 풍광에 대한 소문을 듣고 거금도를 찾아가 여러 날머물면서 산중신곡을 펴냈다.[19] 이후 그는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보길도로 돌아온 그는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즉,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시문과 주자학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 낭음계, 오운대, 독등대, 상춘대, 엄선대 등 주변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을 경영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 칸의 집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하여 독서와 강론을 하며 별장으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계간을 판석보로 막아 계담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단을 쌓고 세연정을 지었다. 이때 윤선도는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고금영 (古今詠), 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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