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우리 어머니들도 저렇게 빨 래 했었지요.요즘은 옷감에 나이론등 화학섬유가 섞여서 가볍기라도 하지만 ㅇ옛날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광목이나 면같은 섬유의 옷을 주로 입다보니 그섬유들의 특성 물에 젖으면 천근 만근 무거웠거든요.그걸 머리에 이고 강가에서 우물가에서 집으로 돌아올때 젖은손에 장갑도 없이 와야 했어니 그고통이 말로서 표현할수도 없어겠지요.그런데 21세기인 요즘에 북한의 여성들이 저런 고생을 하고 있다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제손이 아프고 시린거 같습니다.
저희집 초딩이는 학원버스 타고 학원 가는데...북한에 태어났으면 강제노역 트럭을 타고 있었겠어요...영어학원 승급했다고 신나하고 있고요.곧 있을 수학학원 정기평가에 걱정하고 있는 평범한 아이랍니다. 학원 가기 전에는 단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어요. 평범한 우리나라 초딩이들처럼 북한 아이들에게도 좋은날이 어서 오길
과거 한국도 강에나가 손빨래 했다고 하는데.. 오래 전 같지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만 봐도 밤낮없이 휴일없이 일하고 오직 좀더 잘 살아보겠다고 좋은집 사겠다고 돈만보며 달려가다보니..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졌지만 그와 비례해 마음이 병든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북한의 헐벗고 가난한 추운 겨울에도 나가 빨래를 해야하는 여성들을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14세 김일성 동상을 보니... 김일성만 없었다면.. 하는.. 이미 돌이킬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80년대 우리엄마도 저 초등학교 다닐때 한겨울에도 개울에 나가서 빨래하셨죠. 우리동네가 포천 산골이라 영하 28도까지 떨어질때가 까끔 있는데 ㅠㅠ 저도 88년 89년 초등학교 5,6학년때 학교 논에 가서 모내기했었어요. 그 쌀은 학생들 급식으로 제공되었지요. 모내기 저에게는 재밌는 추억이네요.
과거 80년대 국민학교 시절에 그래도 집집마다 텔레비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집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앞으로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집집마다 자동차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자전거를 누구나 가질수 있다면 앞으로 개혁개방으로 간다면 북한 사람 누구든지 자동차를 소유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70년대 시골에도 그랬어요. 추운 겨울 냇가에서 빨래하고 했지요. 방학이면 학교에 아침 6시까지 나와서 운동하고 도장받고. 잔디씨 할당받아서 모으러 돌아다니고 했죠. 그때는 선생님들한테 진짜 많이도 맞았네요. 운동회때면 지금도 기억나네요. 덤불링한다고 얼마나 방과후에 연습하고 잘 못하면 맞고. 고달팠던 어린시절. 중학교때부터 교련시간이라고 나무로된 총으로 제식훈련하고 했지요. 서로 감시까지는 아니여도 대통령 정부 욕하면 잡아갔지요.
그리고 강교수님이 간략하게 요점만 말하듯 표현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런 건 우리때문에 저렇게 척박하게 살아 미안하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뜻이 아니라 보기만해도 힘들고 딱하니 그래도 여유가 있는 우리 형편에서 도와줄 수 있다면 뭐라도 도와주었으면 하는 게 솔직히 마음인데 실지론 안타까워만하고 아무것도 도와줄수가 없는 상황을 놓고 푸념과 한탄이 나온다는 차원에서 미안하다 라고 이해가됩니다. 여기서도 어려운 소년소녀 가장이나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 직접 도움을 못 줄 땐 실제 그 사람들이 힘들 게 사는 게 나의 잘못도 불찰도 아니지만 사정이 딱해 보이니 뭐라도 보태주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하듯이요! 이런 부연설명이 없이 바로 죄송하다, 미안하다 반복하니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긴합니다. 당연히 원론적으로는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불행하게 살든 대한민국의 책임도 우리의 잘못도 원인제공도 아닌 순전히 김부자와 그를 따르는 그 밑의 지도부들의 원인이고 책임인데 우리가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갖는다는것도 이치에도 안맞는 얘기로 다른 의미에서의 미안함일것입니다. 오히려 미안해한다면 북한에서 저런 생활을 거의 안하고 출신토대성분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밥에 좋은 대학에 남들 군에서 10년이상씩 뺑이 칠 때 군대도 특별히 면제되며 험한 고생 없이 금수저처럼 살다 온 일부 평양시민 상류계층 탈북민들이 저런 영상을 보면서 일말의 미안함과 자괴감은 가질 순 있죠. 똑같은 북한 국민으로 태어났는데 사람을 출신성분으로 나눠가며 누군 신분증부터 다른 걸 소지하며 배급표 받아가면서 그야말로 세상 부럼 없어라처럼 살고 누군 매일마다 하루 한끼 때울것을 걱정하며 모진 고생을 하며 사는데 실제 평양을 중심으로 북에서 괜찮게 살다 온 탈북민들 일부는 북한 전역에는 그렇게 난리들이 났는데도 고난의 행군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 대한민국에 와서야 그런 게 있었구나 뒤늦게 알 정도로 사는 형편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살아 가고 있는 곳이 북한임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얼음판위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아프네요! 나는 50년대에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마을(60가구)에 공동우물이 몇개 있어서 우물에서 빨래하고 물지게로 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하다가,60년대말부터 각 가정에 우물을 파고(지금처럼 기계로 관정을 뚫는 것이 아니라, 집 안마당에 삽과 곡괭이로 수십미터를 팠음) 작두식물펌프기를 사용했는데, 북한은 물이 부족하여 우물을 파도 물이 안나와서 안하는건지 아니면 경제적여건이 안되어서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1970년도 초까지도 서울에 말달구지.소달구지가 다녔는데..그때는 화물차도 드물어 어쩌다 지나가면 뒤에 메달리곤 했었는데..저사진들을 보니 어렵던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예전엔 웬만한 개울에선 빨래를 하곤 하였지요,,보리고개란 노래에 나오던 시절이지요.. 학교 운동장에서 물로 배채우던 시절,,
14살의 김일성의 동상이 있다니 아무 쓰잘때기 없는 동상입니다 그 자가 북한을 위해서 무었을했습니까 가난해서 굶주린것 밖에 더있나요 반면에 60~70년대 한국의 지도자는 동상을 세울 필요도 없는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가 동상이고 포항제철이 동상이고 울산의 세계1위 조선소가 동상인것입니다 이 동상들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언제나 솟아나는 불멸의 샘물입니다 이런면을 북한은 한국을 배워야 합니다
몽골 겨울 영하 40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영하 30도 진짜 견디기 힘들죠. 촬영하는 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카메라가 간당 간당 하죠. 40도에서는 카메라가 다운되서 그냥 꺼져버립니다. 몽골 가축들이 왜 떼죽음을 당하는 지 실감됩니다. 북한의 겨울은 거의 지옥일 듯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짐칸에 특히 아이들이 타고 다니는 건 안전보호 장치가 된 지정된 구역에서 캠핑같은 걸 즐기는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따금 공사현장에서 식사시간 함바집(건설현장식당)으로 갈 때 거리가 좀 떨어졌을 경우 인부들이 트럭 적재함에 올라 이동하는 장면은 간혹 있습니다. 사실 그것도 도로교통법상 불법인데 도로 큰거리로 나오지 않고 그 주변 골목으로만 돌며 목적지가 근접한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경찰 차량이 봐도 집요하게 문제 삼지 않고 그냥 관행적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물론 그러다 만약 사람이 떨어진다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일은 복잡해지죠. 일단 교통법을 위반하다 사고를 당한 경우라 보험회사에서 제대로 보상받기 어려워질수 있구요.
"우리는 하나다"🎉🎉🎉🎉 걸어서 금강산 ~~~~ 걸어서 평양 ~~~~ 걸어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그 날을 위하여 ~~~~ 남녘과 북녘이 하나가 되고 😊 휴전선이 붕괴되어 자유통일대한민국이 되는 그 날까지 😅 중고차는 유미카님 화이팅 😂 ☆한민족은 하나다☆ 🎉🎉🎉🎉🎉🎉🎉🎉🎉🎉🎉
60년대 한국에서도 트럭에 타고 다녔읍니다. 또한 여름 방학때 퇴비 할당량도있었지요. 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았었읍니다. 그리고 한국도 자전거있는집은 부자였읍니다. 지금 경제가 발전해서 잘사니까 옛날을 잊은겁니다. 요즘 북한을보면 제가 국민학교때인 60년대와 비슷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한국이 발전한거지요. 60년대에 시골 개울에서 빨래했읍니다.
금강산관광 막히기 직전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젊은 안내원-신분 좋은 남녀청년-이 주위에서 이런것저런것 얘기도 해주고 그랬지요. 물론 중간중간 보위부 간나들이 있어 대화내용의 제한이 있지만 그래도 참 신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내청년들은 매일 저녁이면 총화를 한다고하더군요. 사상교육이겠지요. 금강산 뿐 아니라 호텔에서 여기저기 왕래하려면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는데-커튼을 열지말라고하지만..ㅎ- 아파트도 보이고 동네사람들도 멀리보이고.. 그런데 저녁 7시정도되면 아파트에 불이 하나도 안들어와있어요. 그래도 한국관광객들 지나다니면서 볼텐데 불 하나 안들어오더군요. 혹자는 그냥 보여주기식 아파트라 주민이 안산다고 하기도하는데... 아무튼 이때만 해도 청년들이 MP3플레이어가 있어서 건전지 부탁하는 청년도 있고 한국노래도 듣는다고 하기도 하더군요. 15년이 훨씬 넘은 옛날이지만 그나마 이때는 개성공단도 있었고 금강산관광도 했던 시기라 좀 단속이 덜할 때였나보네요.. 지금은 엄청 심하다니.. 다시 저 북쪽 땅을 가볼 수나 있을런지.. 중국여행 중에도 두만강 압록강 그리고 훈춘에서 북한을 세번 봤었는데.. 단둥과 신의주가 중국 북한 무역의 80%를 한다고하는데... 저녁이 되면 북한 건물에 불이 하나도 안들어와요. 그래도 가장 큰 무역지인데.. 여기가 압록강 건넌편이죠... 이건 8년정도 전이네요... 안타까운건 중국사람은 압록강 다리를 버스나 걸어서 건널 수 있는데 우린 적대국이라..ㅠㅠ
아이들이 영상에 소 구루마에 탈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70년대 꼬마시절 아버지가 모는 소달구지에 타고가는 내 모습이 생각이 잠시났습니다 소달구지 다음에 막바로 트럭으로 가는 형편이 안되니까 한국에서는 경운기가 나왔습니다 이런데는 60~70년대 지도자가 잘했다는겁니다 그 수준에 맞는 운반수단을 내놓았잖아요 그리고 대동경운기가 힘이좋고 성능도 좋았습니다
왜 교수님은 전편부터 우리탓인양 자꾸 미안하다 하실까... 유감이거나 안탑깝긴 하지만 우리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영하 30도.. 글쎄요.. 제가 교수님보다 5년 이상 군생활이 빠르긴 했지만... 한국전방도 많이 추우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고... 제대로 된 방한복도 없이 밤새 매복을 나가곤 했습니다. 요즘 군인들한테 똑같은 의류를 주고 핫팩도 없이 나가라고 하면 뒤집어 지겠지요. 그런 상황을 못겪어봤기 때문이지 실제로 못하기 때문은 아닌듯 합니다. 우리 때야 전방 일반 전투병도 하곤 했지만.. 요즘 특전사도 한겨울 산에서 알몸 입수도 합니다. 한겨울 강에서 빨래하는게 쉽다는건 아니지만... 마치 인간이 어떤 상황에도 못할짓인듯 설명하는건 지나친 과장인듯 하네요. 오해하지 마실게... 이게 쉽고 하는게 당연하다는건 아닙니다. 교수님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분야에 매몰되어 객관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주관에 매몰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사학자는 국뽕이 많고... 일본학자는 친일파 성향이 강하고... 영어를 공부하면 서양 사대주의가 강한 경우가 많지요. 아마도 자신이 연구에 대한 학문의 가치를 부각하려는 심리때문일텐데... 그래도 그런 점은 지양해야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교수님도 이제 그런 나이겠지만... 자신의 것에 너무 매몰되어 주관적으로 설명하면 꼰대 소리 듣고... 객관적으로 꼰대가 좋은건 아닌듯 합니다.
아이고 올해 61세인데, 어릴 때 시골은 밖에서 빨래하고 했는데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죠. 북한 주민들도 어느 정도는 살았으면 좋겠구만... 가슴아프네요.
유미님이 설명을 잘해주시네요. 북에서 태어났다는게 죄인세상이네요. 아이들이 무슨죄인지 ❤❤
강동완교수님 위험을 무릎쓰고 찍은
귀한영상과 사진을 편하게 볼수있어 감사함미더
북한현실은 한국의 전쟁후의 모습 같튼데예,
아직도 추운 한겨울에 북한여성의
강가 빨래와 어린이들 까지 강제노동에
동원돤다니 가슴아프네예
유미카님이 아픈 기억을 쳐다보니
더 슬픈것 같네예~~~
같네예~~~ 대구 경산쪽 사투리 같습니다 김천 구미 상주는 같네여 영주 예천은 했니껴 경주는 했는교
네 갱상도 사투리는 비슷비슷 함미데이~~ㅎ@@ygkim7060
@@ygkim7060구수한 갱상도 사투리는 비슷 비슷해서 잘 알아 먹심데이~~ㅎ
강동완 교수님 존경해요
북한국민 인권 관심가져야 합니다
앞장서주시니 존경합니다
화이팅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도 저렇게 빨 래 했었지요.요즘은 옷감에 나이론등 화학섬유가 섞여서 가볍기라도 하지만 ㅇ옛날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광목이나 면같은 섬유의 옷을 주로 입다보니 그섬유들의 특성 물에 젖으면 천근 만근 무거웠거든요.그걸 머리에 이고 강가에서 우물가에서 집으로 돌아올때 젖은손에 장갑도 없이 와야 했어니 그고통이 말로서 표현할수도 없어겠지요.그런데 21세기인 요즘에 북한의 여성들이 저런 고생을 하고 있다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제손이 아프고 시린거 같습니다.
살아가는게 기적이네요 어린아이 트럭에서 덜컹거리면 떨어질것같고 ~
천리길 걸어간다 조선시대에 과거시험보려가는것도 아닌데~왜 어이가없네요
추운겨울 강가에서 빨래하는것도 보기만하여도 내몸이 춥네요
북한의 실상 유미카 대표님 강동완교수님 잘보았습니다
네가 1953년생인데 내가 어렸을 때 망,소구루마 가다니고, 타면 좋아하고,, \......
트럭(젬무시. GMC)라고 따라 다녔어요.... 자전거도 아버지거하나 있어써서 부자....
개울에서도 빨래도하고.......
꼭 그때 갘아서
ㅋㅋㅋㅋㅋ 사진에 대해서 유미님 공감하면서 이야기 붙여서 해설해주니까 너무 신기하고 재밌네요... 맨날 한국것 보고 놀라는모습만 보여주다가, 반대로 북한것을 보면서 소개하고 썰풀어주시니 재밌습니다..
자동차를 탈수 있어서 좋았다니 웃음이나오며 한편 가슴이 아프네요
40년전 강원도 산골도 뜨거운물 끓여서 냇가로 갔습니다
손이 빨갛게 되어 집에와 구둘장에 손 넣던 생각납니다
북한은50~100년 한국보다 뒤쳐져 있네요 불쌍한건 국민이죠
내 어렸을적 60년대 모습이다
유미씨는 카메라가 실물을 못담네요. 진짜 인형같이 오밀조밀 화려하고 예쁜데. 실물 보고 깜놀했슈😊❤
진짜? 나도 한번 보고 싶다.
@ 네. 실물이 더 예쁘고 어려보이시고. 암튼 해외북한식당 종업원 등 많은 미녀들 오셨지만 개인적으로 유미씨가 탑이었습니다. ^^
저희집 초딩이는 학원버스 타고 학원 가는데...북한에 태어났으면 강제노역 트럭을 타고 있었겠어요...영어학원 승급했다고 신나하고 있고요.곧 있을 수학학원 정기평가에 걱정하고 있는 평범한 아이랍니다.
학원 가기 전에는 단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어요.
평범한 우리나라 초딩이들처럼 북한 아이들에게도 좋은날이 어서 오길
정말 인권이라고는 1도없는 ㅜㅜ
너무나 가엾고 너무나 가여운 ㅜㅜ
현실세계라는게 더욱 슬프네요 ㅜㅜ
계속 기도할께요 ㅜㅜ
과거 한국도 강에나가 손빨래 했다고 하는데.. 오래 전 같지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것 같습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만 봐도 밤낮없이 휴일없이 일하고 오직 좀더 잘 살아보겠다고 좋은집 사겠다고 돈만보며 달려가다보니..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풍요로워지고 넉넉해졌지만 그와 비례해 마음이 병든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북한의 헐벗고 가난한 추운 겨울에도 나가 빨래를 해야하는 여성들을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14세 김일성 동상을 보니... 김일성만 없었다면.. 하는.. 이미 돌이킬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강동완 교수님이 나오셨으니.. 곧 예향씨가 이 채널에 나올수도???
천기누설...
사진만 봐도 화가 나네요. 조선인민민주주의 맞네요. 저걸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북으로 다 보내버리고 싶어요. 진짜 가슴 아파요. 어릴 때 주 1회 야외 조회 때 쓰러지는 애들도 있었는데~~~😢😢😢
영상을 보니까
우리 60년도 우리가
하는것 하는것 하고
똑같아요
저의 어머니가 마흔둘에 저를 낳았고
제가 올해 예순다섯..
어머니가 살아계시다면 108세...
제가 어릴때 시골에서 살았는데
우물물은 그나마 땅속에 물을 퍼올리니 손이 덜 시리다고 하는데도
고무장갑없이 빨래하는 엄마의 손이 빨갛더라...
수도가 있는집으로 이사해 살때는 유미씨 얘기처럼 물을 한솥 끓여 옆에두고 손을 데워가며 빨래하셨는데
그때도 엄마의 손은 빨갛더라..
엄마도 돌아가시고
세월이 바뀌어 내가 엄마나이가 되었는데 빨래는 세탁기가
건조는 건조기가
유미카 대표님은 천재요 천재 박사님이세요^^
80년대 우리엄마도 저 초등학교 다닐때 한겨울에도 개울에 나가서 빨래하셨죠. 우리동네가 포천 산골이라 영하 28도까지 떨어질때가 까끔 있는데
ㅠㅠ
저도 88년 89년 초등학교 5,6학년때 학교 논에 가서 모내기했었어요. 그 쌀은 학생들 급식으로 제공되었지요. 모내기 저에게는 재밌는 추억이네요.
우리나라도 60~70년도 초등 학교 2학년 때 모심기도 하고 들에 나가서 물도랑도 파고 일 많이 했습니다.
북한의 이해도가 높은 남한사람과 남한의 이해도가 높은 탈북민이 소재를 공유하니 내용인 굉장히 매끄럽고 디테일해지네요! 이대로 어디 교육자료로 써도될만한 알찬 컨텐츠예요.
3:59 한국 1950년도 보는거 같네요 일본 렉서스 토요타 미츠비스 BMW 벤츠 타고 다닐 때 한국은 소달구지 타고 다녔으니 한국은 진짜 기술 하나도 없었는데 핸드폰 접는 기술 만들고 자동차 엔진 미션 만들고 진짜 한국은 최강임...
빨래터가 있었지요 ....그때 그 시절은
나이 40대인 제 고향에서 어렸을때도 도랑에 빨래터가 있었죠. 동네 안에 우물도 있었어요ㅎㅎ
@@simonpolar 내년 마흔되가는 저도 어릴때 마을에서 시멘트발라 댐 수로랑 연결해놓은 빨래터가 있었어요. 댐 수로랑 연결해놓아서 망 대고 있음 새우도 잡히고 가끔 메기도 잡히고 ㅎㅎ
@@수옷김 맞아요 저도 댐에서 그랬어요. 수심낮은 도랑에는 돌쌓고 비닐로 물막아 물고기 손으로 집어올리고 작살 만들어서 잠수해서 물고기 잡고 그랬죠. 빨래터는 없어진지 오래고 동네 안 우물도 말라 폐쇄된지 오래구요ㅎㅎ 그래봤자 30년 전인데 발전이 대단합니다 대한민국
우리도 예전엔 저렇게 살았어요. 지금은 여름에 에어컨 없이 어떻게 사나? 하지만 어렸을 땐 한 여름 꽉꽉 들어차는 버스 안에서도 그려려니...하면서 살았죠.
그 환경 속에 있으면 또 그렇게 살게 됩니다.
9:34 다른 나라에서 찍힌 야생화 된 돼지들도 대체로 저렇게 생겼던데 돼지들은 바깥에 방목해서 키우거나 아예 야생에서 살아가게 되면 저렇게 멧돼지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 같더군요 (중세 시대의 돼지들은 사실상 거의 멧돼지나 다름 없었다고 하네요)
정말 우리 중고차는 유미카 님 채널 매일 미국에서 몇년째 감사하게 시청합니다!!! 사업과 건강 그리고 뜻하신 모든것에 기도합니다!!! 유미님 아름다워용!!!
유미님의 분석, 설명은 명확하고 훌륭합니다.
과거 80년대 국민학교 시절에 그래도 집집마다 텔레비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집은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앞으로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집집마다 자동차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자전거를 누구나 가질수 있다면 앞으로 개혁개방으로 간다면 북한 사람 누구든지 자동차를 소유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14살때( 배움의천리길) 귀깨지게 교육받았죠
역쉬 이유미씨는 전문가!!!
많은 경험을 하셨네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말씀을 너무 잘하십니다. 👍
사진을 꼼꼼하게 잘찍어셨네요,
사진을 보면서. 설명을 들으니
더 실감이납니다.
영상잘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천리길 , 총폭탄 마음이
아프네요)
유미카 자주 봅니다.
대한민국도 60년대 70년 중반까지만해도 시골은 나무때고, 물길으러다니고, 쌀밥도 못먹고, 논둑길이 큰길이고, 전기도 없는 시절이 있었어요. 불과 몇십년전까지는요.
모든 국민들이
지금의 풍요로움에 정말로 감사하며 살아야할겋 같아요.
우리나라 70년대 시골에도 그랬어요. 추운 겨울 냇가에서 빨래하고 했지요. 방학이면 학교에 아침 6시까지 나와서 운동하고 도장받고. 잔디씨 할당받아서 모으러 돌아다니고 했죠. 그때는 선생님들한테 진짜 많이도 맞았네요.
운동회때면 지금도 기억나네요. 덤불링한다고 얼마나 방과후에 연습하고 잘 못하면 맞고. 고달팠던 어린시절. 중학교때부터 교련시간이라고 나무로된 총으로 제식훈련하고 했지요.
서로 감시까지는 아니여도 대통령 정부 욕하면 잡아갔지요.
유미님과 강동원교수님 리얼하고 팩트방송,
너무 좋습니다.
응원합니다
🇰🇷🏃🇰🇷💃🇰🇷
🎉화이팅 🎉
에들이야 트럭 뒤에타고 친구들하고 니가면 재밌고 신나죠.
북한학 교수님과 방송 정말 좋습니다.
북 토박이 유미님을 만나 교수님이 한 수 배워 가시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전 60년대 말 태어났는데
그때는 어릴때부터 일을 도우러
논과 밭, 그리고 집에서 허리 부러지도록
일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못 살고 못 먹었던 시대에
대부분 힘들게 일했지요...
그리고 강교수님이 간략하게 요점만 말하듯 표현해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런 건 우리때문에 저렇게 척박하게 살아 미안하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뜻이 아니라 보기만해도 힘들고 딱하니 그래도 여유가 있는 우리 형편에서 도와줄 수 있다면 뭐라도 도와주었으면 하는 게 솔직히 마음인데 실지론 안타까워만하고 아무것도 도와줄수가 없는 상황을 놓고 푸념과 한탄이 나온다는 차원에서 미안하다 라고 이해가됩니다.
여기서도 어려운 소년소녀 가장이나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 직접 도움을 못 줄 땐 실제 그 사람들이 힘들 게 사는 게 나의 잘못도 불찰도 아니지만 사정이 딱해 보이니 뭐라도 보태주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하듯이요!
이런 부연설명이 없이 바로 죄송하다, 미안하다 반복하니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긴합니다.
당연히 원론적으로는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불행하게 살든 대한민국의 책임도 우리의 잘못도 원인제공도 아닌 순전히 김부자와 그를 따르는 그 밑의 지도부들의 원인이고 책임인데 우리가 미안해하거나 죄책감을 갖는다는것도 이치에도 안맞는 얘기로 다른 의미에서의 미안함일것입니다.
오히려 미안해한다면 북한에서 저런 생활을 거의 안하고 출신토대성분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이밥에 좋은 대학에 남들 군에서 10년이상씩 뺑이 칠 때 군대도 특별히 면제되며 험한 고생 없이 금수저처럼 살다 온 일부 평양시민 상류계층 탈북민들이 저런 영상을 보면서 일말의 미안함과 자괴감은 가질 순 있죠.
똑같은 북한 국민으로 태어났는데 사람을 출신성분으로 나눠가며 누군 신분증부터 다른 걸 소지하며 배급표 받아가면서 그야말로 세상 부럼 없어라처럼 살고 누군 매일마다 하루 한끼 때울것을 걱정하며 모진 고생을 하며 사는데 실제 평양을 중심으로 북에서 괜찮게 살다 온 탈북민들 일부는 북한 전역에는 그렇게 난리들이 났는데도 고난의 행군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 대한민국에 와서야 그런 게 있었구나 뒤늦게 알 정도로 사는 형편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져 살아 가고 있는 곳이 북한임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얼음판위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아프네요! 나는 50년대에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마을(60가구)에 공동우물이 몇개 있어서 우물에서 빨래하고 물지게로 물을 길어 식수로 사용하다가,60년대말부터 각 가정에 우물을 파고(지금처럼 기계로 관정을 뚫는 것이 아니라, 집 안마당에 삽과 곡괭이로 수십미터를 팠음) 작두식물펌프기를 사용했는데, 북한은 물이 부족하여 우물을 파도 물이 안나와서 안하는건지 아니면 경제적여건이 안되어서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너무 재밌어요. 교수님이랑 북한 얘기 좋아요.사진도 좋고
1970년도 초까지도 서울에 말달구지.소달구지가 다녔는데..그때는 화물차도 드물어 어쩌다 지나가면 뒤에 메달리곤 했었는데..저사진들을 보니 어렵던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예전엔 웬만한 개울에선 빨래를 하곤 하였지요,,보리고개란 노래에 나오던 시절이지요.. 학교 운동장에서 물로 배채우던 시절,,
14살의 김일성의 동상이 있다니 아무 쓰잘때기 없는 동상입니다 그 자가 북한을 위해서 무었을했습니까 가난해서 굶주린것 밖에 더있나요 반면에 60~70년대 한국의 지도자는 동상을 세울 필요도 없는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가 동상이고 포항제철이 동상이고 울산의 세계1위 조선소가 동상인것입니다 이 동상들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언제나 솟아나는 불멸의 샘물입니다 이런면을 북한은 한국을 배워야 합니다
아뇨. 본받으면 안되죠. 저러다 망해야지 어설프게 심폐소생기 달고 120살까지 장수하는 노인마냥 오래오래 삽니다.
그래도 동대구역 박정희광장의 동상건립 문제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혜산시에 친애하는 리유미님 동상을 만드는게 낳겠다😅
@@ygkim7060 참 지혜로운 말씀 공감하며 평양 일성이 앞에 유미카님 동상을 세우면 더욱 빛이나고 좋겠습니다
태교부터 김일성 3대를 찬양하는걸로 배우니 우리의 지식과 사상만으로 그들을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그저 불쌍할뿐...
유미씌 안녕~
유미카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한국에 60년대에 살고 있네요 여성인권 아이들 혹사시키는 마음 아픕니다 강동완교수님 귀한 영상감사하며 당연한게 아니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6~70년대 우리 어머님들도 빨래를 저렇게 했지요.
항상잘보고있읍니다감사합니다
1960.70.80년대에 한국보다 선진국들 당신
같은말 다했요
당신부모.부조모부에게
이분 다른 은하에서 오신듯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저렇게 사셨어요~~ㅠ
한국은 영하 30도 까지 춥지는 않았죠~
80년대 중후반까지도 마을마다 있는 개울가 빨래터에서 빨래하시던 어머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 후에 짤순이 보고 엄청 신기하고 놀라웠던 기억이 새롭게 나네요. 모든 것이 한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단계 단계 넘어 온 것이지요..
이분은 의도는 알겠는데 예전에는 우리들도 다저렇게 살았어요
이분은 예전 대한민국을 살아보지 못하신분 이라 완전 미계인처럼 ...
몽골 겨울 영하 40도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영하 30도 진짜 견디기 힘들죠. 촬영하는 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카메라가 간당 간당 하죠. 40도에서는 카메라가 다운되서 그냥 꺼져버립니다. 몽골 가축들이 왜 떼죽음을 당하는 지 실감됩니다. 북한의 겨울은 거의 지옥일 듯 합니다.
나도 어릴때 모심기도하고... 공부 겸했었다~
버스탈 돈이 없어서 걸어서 학교갔다.
지금나이 50이 지났다~
30년이 지났네요 ~
트럭 타는거는 70년대 초등학교 1,2학년 다닐때 생각남
와 이런 건 추천을 안할수가 없네... 대단!!!
남한도 1950년대에는 저런그림?
7~80년대도 그랬을걸요.
80년은 아니고 60 70년대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는 1950년대에 한강에서 빨래하고 어린애들은 느리게 가는 차에 올라타기 좋아했고, 지방에서는 6~70년대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었겠지요.
68년국민학교 입학보니 마치낡은 창고같은 교실이엇습니다. 그리하여 새로 짓는 학교에 건설동원돼서 벽돌나르고 학교주변에 나무심고 그리하여 이쁜 교실에서 공부하던 기역이 새록새록 나네요.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저렇게 짐칸에 특히 아이들이 타고 다니는 건 안전보호 장치가 된 지정된 구역에서 캠핑같은 걸 즐기는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따금 공사현장에서 식사시간 함바집(건설현장식당)으로 갈 때 거리가 좀 떨어졌을 경우 인부들이 트럭 적재함에 올라 이동하는 장면은 간혹 있습니다. 사실 그것도 도로교통법상 불법인데 도로 큰거리로 나오지 않고 그 주변 골목으로만 돌며 목적지가 근접한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경찰 차량이 봐도 집요하게 문제 삼지 않고 그냥 관행적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물론 그러다 만약 사람이 떨어진다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일은 복잡해지죠.
일단 교통법을 위반하다 사고를 당한 경우라 보험회사에서 제대로 보상받기 어려워질수 있구요.
유미님의 설명을 들으니, 더 이해가 잘 되네요. 혹시 한국사람 패널을 한명 더 추가하면, 탈북민이 생각 못하는 한국사람의 궁금증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패널은 고정보다. 그때그때 섭외해서.
아이고 트럭은 정말 위험해 보이네요.
"우리는 하나다"🎉🎉🎉🎉
걸어서 금강산 ~~~~
걸어서 평양 ~~~~
걸어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그 날을 위하여 ~~~~
남녘과 북녘이 하나가 되고 😊
휴전선이 붕괴되어 자유통일대한민국이 되는 그 날까지 😅
중고차는 유미카님 화이팅 😂
☆한민족은 하나다☆
🎉🎉🎉🎉🎉🎉🎉🎉🎉🎉🎉
저 정도 추위면 그냥 안빨아입고 말 것 같아요. 남한 사람들은 결코 저기 나가서 빨래 못할 거예요 ㅠ
60대인데 울 엄마 개울가에서 빨래하시다 90년대 세탁기 사용함
그러한것들이 틀린것이아닙니다 79후반80초 그셰대들 같아공감해습니다 이전세대분들은 더역사의시대를 보고격었겧지요
1994년쯤 한국육군 ㅡ 특수부대 외에는 천리행군 없었습니다.
100km급속행군 정도했죠.
1985 1988년도 그랬구요.
특전사, 특공연대는 천리행군 했었고 보병수색대?는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중국개방전 보는느낌 옛날 어릴때 중국에서 사는모습똑같
아요(70년대)
400키로를 걸으면..
그아이들은 어디서 자고 먹나요?
북한에서 삶은 너무나도 고되고 힘드네..
웃을 일이 없을듯 싶네요
60년대 한국에서도 트럭에 타고 다녔읍니다. 또한 여름 방학때 퇴비 할당량도있었지요. 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았었읍니다. 그리고 한국도 자전거있는집은 부자였읍니다. 지금 경제가 발전해서 잘사니까 옛날을 잊은겁니다. 요즘 북한을보면 제가 국민학교때인 60년대와 비슷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한국이 발전한거지요.
60년대에 시골 개울에서 빨래했읍니다.
아이고.. 애기들 짠하네..
북한 지방사람말고 평양사람이 어떡게 사는지 알아야 북한 붕괴를 얼추 해 보는거지 교수님 ~ 평양이 붕괴되야 통일이 되지않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척하면 척, 모르시는 게 없구나!!
금강산관광 막히기 직전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젊은 안내원-신분 좋은 남녀청년-이 주위에서 이런것저런것 얘기도 해주고 그랬지요.
물론 중간중간 보위부 간나들이 있어 대화내용의 제한이 있지만 그래도 참 신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내청년들은 매일 저녁이면 총화를 한다고하더군요. 사상교육이겠지요.
금강산 뿐 아니라 호텔에서 여기저기 왕래하려면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는데-커튼을 열지말라고하지만..ㅎ-
아파트도 보이고 동네사람들도 멀리보이고.. 그런데 저녁 7시정도되면 아파트에 불이 하나도 안들어와있어요.
그래도 한국관광객들 지나다니면서 볼텐데 불 하나 안들어오더군요. 혹자는 그냥 보여주기식 아파트라
주민이 안산다고 하기도하는데...
아무튼 이때만 해도 청년들이 MP3플레이어가 있어서 건전지 부탁하는 청년도 있고 한국노래도 듣는다고
하기도 하더군요. 15년이 훨씬 넘은 옛날이지만 그나마 이때는 개성공단도 있었고 금강산관광도 했던 시기라
좀 단속이 덜할 때였나보네요..
지금은 엄청 심하다니.. 다시 저 북쪽 땅을 가볼 수나 있을런지..
중국여행 중에도 두만강 압록강 그리고 훈춘에서 북한을 세번 봤었는데..
단둥과 신의주가 중국 북한 무역의 80%를 한다고하는데... 저녁이 되면 북한 건물에 불이 하나도 안들어와요.
그래도 가장 큰 무역지인데.. 여기가 압록강 건넌편이죠... 이건 8년정도 전이네요...
안타까운건 중국사람은 압록강 다리를 버스나 걸어서 건널 수 있는데 우린 적대국이라..ㅠㅠ
남한도6~70년대에는 어린학생들도 노동에많이 동원되었어요.학교화단을 만들기위해 돌을나르고 농촌에는 남자애들은 농사를도우고 여자애들은 어린동생을 돌보고
저 어릴때만 해도 탈수기 있는 집도 있는 집이였고 세탁기도 없던 적 있었어요. 빨래터에서 빨래방망이로 두드리며 손빨래하고 했는데. 요새 애들이 그런 모습조차 상상도 못한다니 신기하네요 ㅎㅎ
평양은 우리네 8090년대, 그외는 5060.
남한도 초등 어린이들을 70년대만해도 농촌동원 수시로 나갔지요 어른들은 도로 부역많이 했지요 참가 안하면 벌금부과 되지요
압록강 에서 영화25도 에 맨손빨래 하는 꽃제비 같은 어린 인민들이 걱정이되시어 쪽잠에 제기밥만 드시고사시는 친근하신 유미카님만세 🎉 사랑하자 💐 배달 😢😂😅
제가 어렸을때 저렇게 빨랫터에서 빨래했었는데
딱 그시절!
1960년대 나의모습!
우리도 한번 삐꺽하면
저시절로 돌아가려나 ㆍ ㆍ ㆍ
근데 썸네일에 유미카님이 잔뜩 삐진것처럼 입을 뽀루퉁하게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이 귀엽게 나왔네요()()
아이들이 영상에 소 구루마에 탈려고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70년대 꼬마시절 아버지가 모는 소달구지에 타고가는 내 모습이 생각이 잠시났습니다 소달구지 다음에 막바로 트럭으로 가는 형편이 안되니까 한국에서는 경운기가 나왔습니다 이런데는 60~70년대 지도자가 잘했다는겁니다 그 수준에 맞는 운반수단을 내놓았잖아요 그리고 대동경운기가 힘이좋고 성능도 좋았습니다
70년 개띠... 강원도 강릉 출신입니다. 국민학교 들어갈 때쯤이었던 77년 78년 쯤 중앙시장 쩍에서 옥천국민학교 쪽으로 가는 큰길에서 벽돌을 쌓아 싣고 가던 말 달구지 뒤에 몰래 올라타서 가다가 들켜서 도망가곤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진들 보니 북한 인민들은 정말 친환경에서 생활하네요
남한의 환경팔이들이 보면 서로 월북하려 하겠네요
천리행군 하는 부대도 많습니다.
특수부대 외에 라고 말씀하셨네요
저가 59년생인데.전 말씀하신것 다 믿습니다.내가 보기에 북한은 우리나라 전쟁몇년후 보다 더 못살고 있어 보여요.
40여년 전에는
서귀포 강정에서도 저렇게 빨래 해습니다
일'빠다 .... 야 기분 좋다 ...
세상에나 나라도 아니고 저건 지옥중의 지옥 근데 더 잔인한건 그들은 그걸 모른다는거 행복하고 ㅈㅇ이를 우상화
교수님 찐반응 ㅋㅋㅋ 자동차를 탄다고 행복하..아..아..아하..
저휘도 그랬어요. 그런데. 현대화가 들어서면. 변한다는거에요
잘보갑니다 대한민국에서도 80년대까지도 강원도 촌에서는 개울까에 가서 얼음깨고 빨래하고 그랬어요 .. 잘보고가용~
엄복동의 나라. 자전거는 못참지
한국 70년.80년대 시절이네
북한이 못사는거 보다 주민들의 노력이 김일성일가 하나만을 위하니 앞으로도 잘살 희망이 없다는게 더 절망스럽네요 북한이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한 남북격차는 점점 더.커지고 그러면 통일도 그만큼.멀어지는군요 ㅠㅠ
왜 교수님은 전편부터 우리탓인양 자꾸 미안하다 하실까... 유감이거나 안탑깝긴 하지만 우리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영하 30도.. 글쎄요.. 제가 교수님보다 5년 이상 군생활이 빠르긴 했지만... 한국전방도 많이 추우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고... 제대로 된 방한복도 없이 밤새 매복을 나가곤 했습니다. 요즘 군인들한테 똑같은 의류를 주고 핫팩도 없이 나가라고 하면 뒤집어 지겠지요. 그런 상황을 못겪어봤기 때문이지 실제로 못하기 때문은 아닌듯 합니다. 우리 때야 전방 일반 전투병도 하곤 했지만.. 요즘 특전사도 한겨울 산에서 알몸 입수도 합니다. 한겨울 강에서 빨래하는게 쉽다는건 아니지만... 마치 인간이 어떤 상황에도 못할짓인듯 설명하는건 지나친 과장인듯 하네요. 오해하지 마실게... 이게 쉽고 하는게 당연하다는건 아닙니다. 교수님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분야에 매몰되어 객관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주관에 매몰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사학자는 국뽕이 많고... 일본학자는 친일파 성향이 강하고... 영어를 공부하면 서양 사대주의가 강한 경우가 많지요. 아마도 자신이 연구에 대한 학문의 가치를 부각하려는 심리때문일텐데... 그래도 그런 점은 지양해야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교수님도 이제 그런 나이겠지만... 자신의 것에 너무 매몰되어 주관적으로 설명하면 꼰대 소리 듣고... 객관적으로 꼰대가 좋은건 아닌듯 합니다.
그러니까요
점점 이상한 의미로 변질되서 들리더라구요
🎉🎉🎉🎉🎉
쓰레기 인간을 장군이라고 떠받드는
참 어이없는 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