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전략 데리다의 글쓰기(écriture) 이래 서구 형이상학에서 문자에 대한 말의 우위는 해체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우위를 완화시킨 후설의 현상학적 기술마저도, 곧 "주목해서 봄"(Zusehen)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서술하는 현상학적 기술마저도 이제 철학에서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은 은폐를 사유하여 텍스트의 여백에 글을 쓰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초반부에서 서구 형이상학 일반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서 나타난 하이데거의 "탈구조"(Abbau)는 데리다로 옮겨 적용되면서 텍스트의 해체(déconstruction)로 나타났다. 하이데거가 지금까지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사유되지 못했던 것, 곧 그것이 발전되어 나온 기원을 사유하고자 하듯이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의 텍스트들에서 씌어진 것을 해체하면서 그것들의 여백에 다시 쓰고자 한다. 이것은 심지어 텍스트의 저자조차도 보지 못하고 무의식적적으로 넘어간 지점으로서 빈 공간의 "맹점"(point aveugle)을 의미한다. 더욱이 데리다의 해체적 전망은 많은 철학자들과 독자들에게 오해되고 있다. 해체의 전망은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되고 그것이 해체되면 또다시 달라진다. 해체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운동 속에 속해 있으며 어떤 고정된 전망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등에 대한 해체적 전략은 각기 그때마다 다른 전망을 취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이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사유하지 못했던 영역을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무의 영역으로 지정했다. 데리다는 이들을 따라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태를 평가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유를 하이데거는 존재로 가는 도상이라고 했고 데리다는 텍스트의 문자와 여백 사이에서 떠도는 의미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적 사유는 하이데거를 충실히 따라가다가 진리의 문제에서 니체에로 돌아서는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하이데거의 "은폐된 것"(Verborgenes) 안에서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Verdrängtes)를 본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이데거와 니체의 진리관을 비교하도록 촉구한다. 하이데거가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폭로하고 망각된 존재를 탈은폐한 것은 데리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하이데거는 여전히 진리를 남성중심적 사유로 보고 있다. 현존재란 개념에는 성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의 본질적인 표시로서 "실존론적 결단"(existenziale Entschlossenheit)은 남성적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진리는 죽음의 불안 앞에서 무를 보고 실존론적 결단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진리는 비진리와 분리할 수 없이 혼용되어 있으며 그렇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점에서 니체는 하이데거보다 더 멀리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서문과 서문에서 진리를 여성에 비유하고 있다. "진리는 여자이다. 남성 철학자들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진리는 자신의 깊은 심연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여자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리는 자신의 얼굴을 망사로 둘러싸고 있는 여자와 같이 보여주면서 감추는 것이다. 멀리 있을 때 드러냈다가 가까이 오면 다시 감추는 그런 것? 이런 진리관을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텍스트들에 적용시키면서 데리다는 그것들의 무의식적 전제를 폭로하고자 했다! 니체의 심연에 숨어있는 뱀이 데리다에게도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여백의 글쓰기, 흔적을 통한 맹점 찾기, 대리보충의 실체성, 원본의 의존성, 차연의 사유, 세밀한 각주 읽기, 문자의 원본성, 저자의 무의식 폭로, 서구 형이상학의 질서를 전도시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데리다의 해체적 글쓰기에서 주요 전략에 속한다. - 예도
데리다 해설서를 읽어도 혼란스러웠는데 이 강의 하나로 웃는 랍비의 모습으로, 니체가 환생한 모습으로 , 시인으로서의 데리다가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하네요 여자란 늘 보여주면서 감추는 것 ㅎㅎ 그래서 보여준 것만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곳에서 진리를 탈은폐 하려는 자세가 바른 독법이라는 것을.... 보물찾기가 떠오릅니다!! 늘 건강하세요 !!
데리다의 전략
데리다의 글쓰기(écriture) 이래 서구 형이상학에서 문자에 대한 말의 우위는 해체되었다. 심지어 이러한 우위를 완화시킨 후설의 현상학적 기술마저도, 곧 "주목해서 봄"(Zusehen)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서술하는 현상학적 기술마저도 이제 철학에서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은 은폐를 사유하여 텍스트의 여백에 글을 쓰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초반부에서 서구 형이상학 일반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서 나타난 하이데거의 "탈구조"(Abbau)는 데리다로 옮겨 적용되면서 텍스트의 해체(déconstruction)로 나타났다. 하이데거가 지금까지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사유되지 못했던 것, 곧 그것이 발전되어 나온 기원을 사유하고자 하듯이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의 텍스트들에서 씌어진 것을 해체하면서 그것들의 여백에 다시 쓰고자 한다. 이것은 심지어 텍스트의 저자조차도 보지 못하고 무의식적적으로 넘어간 지점으로서 빈 공간의 "맹점"(point aveugle)을 의미한다.
더욱이 데리다의 해체적 전망은 많은 철학자들과 독자들에게 오해되고 있다. 해체의 전망은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되고 그것이 해체되면 또다시 달라진다. 해체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운동 속에 속해 있으며 어떤 고정된 전망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겔,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등에 대한 해체적 전략은 각기 그때마다 다른 전망을 취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이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사유하지 못했던 영역을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무의 영역으로 지정했다. 데리다는 이들을 따라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태를 평가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유를 하이데거는 존재로 가는 도상이라고 했고 데리다는 텍스트의 문자와 여백 사이에서 떠도는 의미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적 사유는 하이데거를 충실히 따라가다가 진리의 문제에서 니체에로 돌아서는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하이데거의 "은폐된 것"(Verborgenes) 안에서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Verdrängtes)를 본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이데거와 니체의 진리관을 비교하도록 촉구한다. 하이데거가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존재자와 존재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폭로하고 망각된 존재를 탈은폐한 것은 데리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하이데거는 여전히 진리를 남성중심적 사유로 보고 있다. 현존재란 개념에는 성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의 본질적인 표시로서 "실존론적 결단"(existenziale Entschlossenheit)은 남성적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진리는 죽음의 불안 앞에서 무를 보고 실존론적 결단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훨씬 더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진리는 비진리와 분리할 수 없이 혼용되어 있으며 그렇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점에서 니체는 하이데거보다 더 멀리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서문과 서문에서 진리를 여성에 비유하고 있다. "진리는 여자이다. 남성 철학자들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진리는 자신의 깊은 심연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여자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리는 자신의 얼굴을 망사로 둘러싸고 있는 여자와 같이 보여주면서 감추는 것이다. 멀리 있을 때 드러냈다가 가까이 오면 다시 감추는 그런 것? 이런 진리관을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텍스트들에 적용시키면서 데리다는 그것들의 무의식적 전제를 폭로하고자 했다! 니체의 심연에 숨어있는 뱀이 데리다에게도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여백의 글쓰기, 흔적을 통한 맹점 찾기, 대리보충의 실체성, 원본의 의존성, 차연의 사유, 세밀한 각주 읽기, 문자의 원본성, 저자의 무의식 폭로, 서구 형이상학의 질서를 전도시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데리다의 해체적 글쓰기에서 주요 전략에 속한다. - 예도
감사합니다
데리다 해설서를 읽어도 혼란스러웠는데 이 강의 하나로 웃는 랍비의 모습으로, 니체가 환생한 모습으로 , 시인으로서의 데리다가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하네요 여자란 늘 보여주면서 감추는 것 ㅎㅎ 그래서 보여준 것만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곳에서 진리를 탈은폐 하려는 자세가 바른 독법이라는 것을.... 보물찾기가 떠오릅니다!! 늘 건강하세요 !!
오늘도 시드니에서 소식 주셔서 감사해요. 최쌤^^ 방갑고 또 기쁩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한 하루 보내셔요!
명강의 감동입니다
네, 가끔 댓글로 뵈니 좋네요. 선생님^^ 평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정호님^^ 건강한 하루 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