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9일 [영원한 지금 24]_‘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 (1) 우리가 아는 것은 이름을 알 뿐이에요. 더 나아가면 이미지를 알 뿐이지 있는 그대로는 알 수가 없어. 우리가 아는 것은 이름이요 이미지야. 그건 이름이 무슨 실체가 있겠어요? 이름일 뿐이지.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다 그러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은 “이름이냐?” 아니면 “이름을 아는 자리냐?” 이렇게 나눠볼 수가 있을 거예요. “이름이냐?” “아는 자리이냐?” 그 아는 자리는 이름이 없으니까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분별이냐?” “모름이냐?” 이렇게 나눠볼 수가 있을 겁니다.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냐? 꿈이요 그림자이냐?” 아니면 “여래냐? 있는 그대로의 생명이냐?” 그림자의 세상은 죽은 세상이라요. 생명이 없어. 그러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도 그렇게 볼 수가 있을 거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은 전부 이름일 뿐이고 실체가 없어. 그런데 그것만으로 존재일 수가 없잖아요. 거기에 아는 놈이 있어. 살아있는 놈이 있어. 그게 생명이라요. 그게 우리 불교에서는 여래다 하고 부처다 그럽니다. 그 “시간과 공간이냐?” “시간과 공간 너머 자리냐?” 시간과 공간은 이름일 뿐이야. 동서남북이 이름이고 상하좌우가 이름이고 과거현재미래가 이름이고 내 나이 70이다가 이름이고 몇 년 생이다가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제 착각하는 것은 이름에 해당하는 놈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거야. 동서남북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어왔어. 과거현재미래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어왔어. 그것은 이름일 뿐인데. 믿어온 것도 이름일 뿐이잖아요. 이름을 믿어왔던 것이지.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전부 이름일 뿐이야. 그러면 생명자리는 어디일까? 시간과 공간 중에서 찾아볼 수가 없지.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한다고 그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여기 중심도 버려야 돼. 그래서 한 발 내딛는 자리 거기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아는 자리이요 생명이고 하느님이고 부처님이다 하는 자리라요. 그러니까 “무엇 무엇이다.” 하는 세상이야. 동쪽이다. 서쪽이다. 남쪽이다. 북쪽이다. 안이다. 밖이다. 크다. 작다. 전부 “~~이다.” 하는 그림자의 세상이라요. 그런데 깨달음은 “무엇 무엇이로구나.” 하는 세상이라요. 그 자리야. “~~이로구나.”가 있어서 “~~이다.” 하는 그림자가 나타나는 거라요. 그런데 우리는 이름일 뿐인 “~~이다.”의 세상을 실재한다고 믿어왔던 거야. 그런데 조금만 우리가 바꿔보면 분명하잖아요. 우리가 아는 것이 이름을 알지. “10시 35분이다.” 하는 이름을 알지. 이름밖에는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것을 禪家(선가)에서는 一句(일구)냐 二句(이구)냐? 이름의 세상은 서로 相卽 相依 (상즉 상의)하는 개념으로 이루어졌잖아요. “있다” 하면 “없다”가 있고, “좌측이다” 하면 “우측이다”가 있고, “안이다” 하면 “밖이다”가 있어. 시간이다 하면 공간이 있어. 그것이 서로 緣起(연기)한다고 그래. 緣起해서 존재해. 혼자서는 성립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실체가 없지. 진짜 실체가 있는 고유한 自性(자성)이 있는 놈이 어찌 남한테 의존해서 있겠어요? 전부 우리가 아는 세상은 남한테 의존해서 존재할 수 있는 놈들이야. 그렇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지. 그림자지. 그래서 그것을 二句(이구)의 세상이다 그래. “~~이다”의 세상은 二句야. 二句(이구), 나눠져서 서로 의존해서 있어. 안이다 해서 밖이 있고 밖이다 해서 안이 있어. 二句(이구)의 세상이고. 一句(일구)는 그것을 넘어선 자리를 一句라고 그럽니다. “안..이..다..”도 지금 여기 일이고 “밖..이..다..”도 지금 여기다 할 때, 그 “안..이..다..”가 그 一句고, “밖..이..다..”가 그 一句입니다. 지금 여기 자리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일차원이냐 이차원이냐 삼차원이냐 사차원이냐? 그 우리가 아는 세상 아니에요? 일차원이다. 점이다. 선이다. 면이다. 입체다. 시간과 공간 사차원이다. 사차원 넘어서 오차원이 있다고 해도 이름을 알 뿐이잖아요. 그렇죠? 이름이야 그게. 이름을 알 뿐이면은 무슨 차원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 일이라요. 이름이 어디 일이겠어? “10..시.. 40..분..이..다..”가 여기 일 아니에요? “10..시.. 50..분..이..다..”가 여기 일이고, “하..느..님..” 하는 것이 여기 일이고, “부..처..님..” 하는 것이 여기 일이죠. 여기를 떠나서 한 물건도 없어. 지..금.. 여..기..뿐이라요. 이름의 세상이 實在(실재)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세상이 실재하는데, 그 이름일 뿐이니까 실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 그 佛家(불가)에서는 現存一念(현존일념)이다 그래. 지..금.. 여..기.. “10..시.. 40..분..이..다..” 하는 現存(현존)하는 一念(일념)뿐이라는 거야. 一覺(일각)이야. 보고 듣고 하는 것 여기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무슨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렇게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몰라도. 데카르트가 그랬다던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할까?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가 우리가 하는 얘기일 거야. 一句(일구)가 있어서 二句(이구)가 있는 것이지. 二句가 있어서 一句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있어서 그게 먼저 있어 가지고 시간 공간을 바라보는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있어서 시간 공간이 있는 거라요. 그걸 이제 第一義諦(제일의제)냐 第二義諦(제이의제)냐 그러잖아요. 시간과 공간의 모든 이름은 두 번째고 지금 여기가 첫 번째라요. “10..시.. 40..분..이..다..”가 첫 번째이면, 10시 50분하고 나눠지는 “10시 40분이다.”는 두 번째라요. 그러니 언제나 지금 여기 일이야. 언제나 지..금.. 여..기.. 일입니다.
소중한영상감사합니다 아는것으로터의 자유를 이해하려면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면 자유롭답니다 체험하는것 만이 존재라여기며 스스로의 존재를 가둔답니다 체혐하지 않는것도 스스로의존재라 여기면 앎의존재도 스스로의 존재감으로 인정만하면 존재감은 자동확장 한답니다 예를들어 맛있는저녁을기대하면 기분이좋아지며 존재감이 확장한답니다 체혐하지않은 앎만으로도 기분이좋아지며 스스로의 존재가 된답니다 체험하는 존재에서 체험하지않은 앎 또한 스스로의 존재란걸 인정하기만하면 존재는 확장하며 지금도 자신은 그러한 앎의 존재임을 체험하고있답니다 스스로는 앎의존재로 체험하고있답니다 더 나아가서 무.텅빈자리의 앎이 스스로의 앎의존재며 절대에의해 새로운존재로 흐른답니다
『영원한 지금』 p178-180 53. 불이(不二) 즉 이(二) 있는 그대로가 진실이다. 있는 그대로는 알고 모르고와 관계가 없다. 알았다 하는 순간, 아는 것으로 개념화되고 모른다 하는 순간, 모르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는 안다 해도 어긋나고, 모른다 해도 어긋난다. 있는 그대로로 사는 데, 노력이 필요한가? 있는 그대로를 사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노력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가야 하는 것이다. 노력을 안 한다고 해도, 이 역시 노력을 안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는, 노력을 하고 안 하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조주가 스승 남전에게 물었다. 조주 : “있는 그대로를 알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남전 : “그것은 알고 모르고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조주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남전 : “어찌하면 어긋난다.” 그렇다면 알고 모르고와는 아무 상관없이, 노력하고 노력안하고와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일상은 모두 있는 그대로이다. 우리는 하늘이 따로 있고, 땅이 따로 있고, 만물이 각기 따로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모르고의 세상이다. 안다 모른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으로, 이름의 세상이다. 그 알고 모르고의 관념을 믿다 보니, 믿는 대로 하늘이 따로 있고 땅이 따로 있고 만물이 각기 따로 있게 되었다. 관념이 세상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이다. 이름이 나누어 놓은 세상이다. 이름이 만들어 놓은 세계라면, 이는 우리의 사고가 만든 세계일 것이다. 알고 모르고의 세계, 이름이 나누어 놓은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해석의 세계다. 알고 모르고와는 관계가 없고, 이름과 관계가 없는 있는 그대로는 나누어지지 않은 불이(不二)다. 우리의 일상을 보자. 아침에 일어나 “잘 잤다.” 하고, 하늘을 보며 “푸르다.”고 한다. 이것이 이(二)인가? 불이(不二)인가? “잘 잤다.”를 보자. “잘 잤다.”가 “못 잤다.”를 두고 한 것이면 개념이요, 이름이다. 이들은 이(二)다. 제이의제(第二義諦)이다. 그러나 “잘.. 잤..다..”는 개념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이다.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푸르다.”를 보자. “푸르다.”가 “흐리다.”를 두고 한 것이면 개념이요, 이름이다. 제이의제다. 그러나 “푸..르..다..”는 개념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이다. 제일의제다. 만물의 근원을 신(神)이라고 하자. 신을 피조물인 만물을 상대로 두고 한 말이면 개념이요, 이름이다. 제이의제이다. 그러나 “신..이..다..”는 개념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이다. 제일의제다. “잘.. 잤..다..”, “푸..르..다..”, “신..이..다..”가 불이(不二)이자 이(二)인 것이다. 불이(不二)와 이(二)가 따로 있지 아니하다. 그래서 이(二)에서 불이(不二)로 가는데, 한 걸음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영원한 지금』 p175-177 52. 불이(不二) 중도(中道) 500원짜리 동전이 “나는 앞면이다. 또는 뒷면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면은 앞면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앞면이고, 뒷면은 뒷면이 아니라 그 이름이 뒷면이다. 즉 앞면은 이름일 뿐 앞면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뒷면도 이름일 뿐 뒷면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아니한다. 앞면과 뒷면은 서로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허망한 이름이요, 모양일 뿐이다. 그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망상이다(皆是虛妄). “앞..면..입..니..다..”가 통째인 동전의 드러남이고, “뒷..면..입..니..다..”가 통째인 동전의 드러남이다. 바위가 “나는 바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자기가 자갈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자갈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모래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모래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먼지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먼지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분자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분자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원자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원자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위도, 자갈도, 모래도, 먼지도, 분자도, 원자도 허망한 이름이고 모양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허망한 이름과 모양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바..위..다..” “나..는.. 자..갈..이..다..” “나..는.. 모..래..다..” “나..는.. 먼..지..다..” “나..는.. 분..자..다..” “나..는.. 원..자..다..” 뿐이다. 물은 모양에 따라 자기를 물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얼음이라고 하였다가, 수증기라고 하였다가, H₂O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물도, 얼음도, 수증기도, H₂O도 허망한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물..입..니..다..” “얼..음..입..니..다..” “수..증..기..입..니..다..” “H..₂..O..입..니..다..” 뿐이다. 우주는 둘이 아니다(不二). 우주에는 무생물도 있고 생물도 있다. 그 생물 중에는 나를 포함한 인간도 있고 동식물도 있다. 우주가 “나는 홍길동이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생명체이다. 나는 무생물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허망한 이름이요, 모양일 뿐이다(皆是虛妄). 그러나 “나..는.. 홍..길..동..이..다..”가 우주이고 “나..는.. 인..간..이..다..”가 우주이고 “나..는.. 생..명..체..다..”가 우주이고 “나..는.. 무..생..물..이..다..”가 우주이다. 이와 같이 허망한 모양에 이름이 더해지면서, 이름에 해당하는 사물이 따로 있다는 착각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허망한 이름이요, 모양일 뿐이다. 허망한 이름과 모양만 따르지 않는다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불이(不二)이다. 불이(不二) 앞에 둘로 나누어진 동서남북, 상하좌우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불이 앞에 둘로 나누어진 과거 현재 미래, 1시 2시 3시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불이 앞에 둘로 나누어진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선생님, 귀하신 법문, 두 손 모아 감사 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감사드립니다🙏🙏🙏
2023년 11월 19일 [영원한 지금 24]_‘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선재 박준수 선생님 법문 중에서 (1)
우리가 아는 것은 이름을 알 뿐이에요.
더 나아가면 이미지를 알 뿐이지 있는 그대로는 알 수가 없어.
우리가 아는 것은 이름이요 이미지야.
그건 이름이 무슨 실체가 있겠어요?
이름일 뿐이지.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다 그러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은 “이름이냐?” 아니면 “이름을 아는 자리냐?”
이렇게 나눠볼 수가 있을 거예요.
“이름이냐?” “아는 자리이냐?”
그 아는 자리는 이름이 없으니까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분별이냐?” “모름이냐?” 이렇게 나눠볼 수가 있을 겁니다.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냐? 꿈이요 그림자이냐?” 아니면 “여래냐? 있는 그대로의 생명이냐?”
그림자의 세상은 죽은 세상이라요. 생명이 없어.
그러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도 그렇게 볼 수가 있을 거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은 전부 이름일 뿐이고 실체가 없어. 그런데 그것만으로 존재일 수가 없잖아요. 거기에 아는 놈이 있어. 살아있는 놈이 있어. 그게 생명이라요.
그게 우리 불교에서는 여래다 하고 부처다 그럽니다.
그 “시간과 공간이냐?” “시간과 공간 너머 자리냐?”
시간과 공간은 이름일 뿐이야. 동서남북이 이름이고 상하좌우가 이름이고 과거현재미래가 이름이고 내 나이 70이다가 이름이고 몇 년 생이다가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제 착각하는 것은 이름에 해당하는 놈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거야.
동서남북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어왔어. 과거현재미래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어왔어. 그것은 이름일 뿐인데. 믿어온 것도 이름일 뿐이잖아요. 이름을 믿어왔던 것이지.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전부 이름일 뿐이야.
그러면 생명자리는 어디일까?
시간과 공간 중에서 찾아볼 수가 없지.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한다고 그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여기 중심도 버려야 돼. 그래서 한 발 내딛는 자리 거기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아는 자리이요 생명이고 하느님이고 부처님이다 하는 자리라요.
그러니까 “무엇 무엇이다.” 하는 세상이야. 동쪽이다. 서쪽이다. 남쪽이다. 북쪽이다. 안이다. 밖이다. 크다. 작다.
전부 “~~이다.” 하는 그림자의 세상이라요.
그런데 깨달음은 “무엇 무엇이로구나.” 하는 세상이라요. 그 자리야.
“~~이로구나.”가 있어서 “~~이다.” 하는 그림자가 나타나는 거라요.
그런데 우리는 이름일 뿐인 “~~이다.”의 세상을 실재한다고 믿어왔던 거야.
그런데 조금만 우리가 바꿔보면 분명하잖아요. 우리가 아는 것이 이름을 알지.
“10시 35분이다.” 하는 이름을 알지. 이름밖에는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것을 禪家(선가)에서는 一句(일구)냐 二句(이구)냐?
이름의 세상은 서로 相卽 相依 (상즉 상의)하는 개념으로 이루어졌잖아요.
“있다” 하면 “없다”가 있고, “좌측이다” 하면 “우측이다”가 있고, “안이다” 하면 “밖이다”가 있어. 시간이다 하면 공간이 있어.
그것이 서로 緣起(연기)한다고 그래. 緣起해서 존재해. 혼자서는 성립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실체가 없지.
진짜 실체가 있는 고유한 自性(자성)이 있는 놈이 어찌 남한테 의존해서 있겠어요?
전부 우리가 아는 세상은 남한테 의존해서 존재할 수 있는 놈들이야. 그렇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지. 그림자지.
그래서 그것을 二句(이구)의 세상이다 그래. “~~이다”의 세상은 二句야.
二句(이구), 나눠져서 서로 의존해서 있어. 안이다 해서 밖이 있고 밖이다 해서 안이 있어.
二句(이구)의 세상이고.
一句(일구)는 그것을 넘어선 자리를 一句라고 그럽니다.
“안..이..다..”도 지금 여기 일이고 “밖..이..다..”도 지금 여기다 할 때,
그 “안..이..다..”가 그 一句고, “밖..이..다..”가 그 一句입니다.
지금 여기 자리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일차원이냐 이차원이냐 삼차원이냐 사차원이냐?
그 우리가 아는 세상 아니에요?
일차원이다. 점이다. 선이다. 면이다. 입체다. 시간과 공간 사차원이다. 사차원 넘어서 오차원이 있다고 해도 이름을 알 뿐이잖아요. 그렇죠?
이름이야 그게.
이름을 알 뿐이면은 무슨 차원이라고 해도 지금 여기 일이라요.
이름이 어디 일이겠어?
“10..시.. 40..분..이..다..”가 여기 일 아니에요?
“10..시.. 50..분..이..다..”가 여기 일이고,
“하..느..님..” 하는 것이 여기 일이고,
“부..처..님..” 하는 것이 여기 일이죠.
여기를 떠나서 한 물건도 없어.
지..금.. 여..기..뿐이라요.
이름의 세상이 實在(실재)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세상이 실재하는데,
그 이름일 뿐이니까 실재하는 것은 지..금.. 여..기..
그 佛家(불가)에서는 現存一念(현존일념)이다 그래.
지..금.. 여..기.. “10..시.. 40..분..이..다..” 하는 現存(현존)하는 一念(일념)뿐이라는 거야.
一覺(일각)이야. 보고 듣고 하는 것 여기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무슨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렇게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몰라도. 데카르트가 그랬다던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할까?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가 우리가 하는 얘기일 거야.
一句(일구)가 있어서 二句(이구)가 있는 것이지.
二句가 있어서 一句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있어서 그게 먼저 있어 가지고 시간 공간을 바라보는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있어서 시간 공간이 있는 거라요.
그걸 이제 第一義諦(제일의제)냐 第二義諦(제이의제)냐 그러잖아요.
시간과 공간의 모든 이름은 두 번째고 지금 여기가 첫 번째라요.
“10..시.. 40..분..이..다..”가 첫 번째이면,
10시 50분하고 나눠지는 “10시 40분이다.”는 두 번째라요.
그러니 언제나 지금 여기 일이야.
언제나 지..금.. 여..기..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높~으신 스~승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중한영상감사합니다
아는것으로터의 자유를 이해하려면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면 자유롭답니다
체험하는것 만이 존재라여기며
스스로의 존재를 가둔답니다
체혐하지 않는것도 스스로의존재라 여기면 앎의존재도 스스로의 존재감으로 인정만하면 존재감은 자동확장 한답니다
예를들어 맛있는저녁을기대하면 기분이좋아지며 존재감이 확장한답니다
체혐하지않은 앎만으로도 기분이좋아지며 스스로의 존재가 된답니다
체험하는 존재에서 체험하지않은 앎 또한 스스로의 존재란걸 인정하기만하면 존재는 확장하며
지금도 자신은 그러한 앎의 존재임을 체험하고있답니다
스스로는 앎의존재로 체험하고있답니다
더 나아가서 무.텅빈자리의 앎이 스스로의 앎의존재며 절대에의해 새로운존재로 흐른답니다
『영원한 지금』 p178-180
53. 불이(不二) 즉 이(二)
있는 그대로가 진실이다. 있는 그대로는 알고 모르고와 관계가 없다. 알았다 하는 순간, 아는 것으로 개념화되고 모른다 하는 순간, 모르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는 안다 해도 어긋나고, 모른다 해도 어긋난다.
있는 그대로로 사는 데, 노력이 필요한가? 있는 그대로를 사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노력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가야 하는 것이다. 노력을 안 한다고 해도, 이 역시 노력을 안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는, 노력을 하고 안 하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조주가 스승 남전에게 물었다.
조주 : “있는 그대로를 알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남전 : “그것은 알고 모르고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조주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남전 : “어찌하면 어긋난다.”
그렇다면 알고 모르고와는 아무 상관없이, 노력하고 노력안하고와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일상은 모두 있는 그대로이다.
우리는 하늘이 따로 있고, 땅이 따로 있고, 만물이 각기 따로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모르고의 세상이다. 안다 모른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으로, 이름의 세상이다. 그 알고 모르고의 관념을 믿다 보니, 믿는 대로 하늘이 따로 있고 땅이 따로 있고 만물이 각기 따로 있게 되었다. 관념이 세상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이다. 이름이 나누어 놓은 세상이다.
이름이 만들어 놓은 세계라면, 이는 우리의 사고가 만든 세계일 것이다. 알고 모르고의 세계, 이름이 나누어 놓은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해석의 세계다. 알고 모르고와는 관계가 없고, 이름과 관계가 없는 있는 그대로는 나누어지지 않은 불이(不二)다.
우리의 일상을 보자. 아침에 일어나 “잘 잤다.” 하고, 하늘을 보며 “푸르다.”고 한다. 이것이 이(二)인가? 불이(不二)인가?
“잘 잤다.”를 보자. “잘 잤다.”가 “못 잤다.”를 두고 한 것이면 개념이요, 이름이다. 이들은 이(二)다. 제이의제(第二義諦)이다. 그러나 “잘.. 잤..다..”는 개념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이다.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푸르다.”를 보자. “푸르다.”가 “흐리다.”를 두고 한 것이면 개념이요, 이름이다. 제이의제다. 그러나 “푸..르..다..”는 개념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이다. 제일의제다.
만물의 근원을 신(神)이라고 하자. 신을 피조물인 만물을 상대로 두고 한 말이면 개념이요, 이름이다. 제이의제이다. 그러나 “신..이..다..”는 개념이 되기 전의 있는 그대로이다. 제일의제다.
“잘.. 잤..다..”, “푸..르..다..”, “신..이..다..”가 불이(不二)이자 이(二)인 것이다. 불이(不二)와 이(二)가 따로 있지 아니하다. 그래서 이(二)에서 불이(不二)로 가는데, 한 걸음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영원한 지금』 p175-177
52. 불이(不二) 중도(中道)
500원짜리 동전이 “나는 앞면이다. 또는 뒷면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면은 앞면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앞면이고, 뒷면은 뒷면이 아니라 그 이름이 뒷면이다. 즉 앞면은 이름일 뿐 앞면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뒷면도 이름일 뿐 뒷면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아니한다.
앞면과 뒷면은 서로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허망한 이름이요, 모양일 뿐이다. 그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망상이다(皆是虛妄). “앞..면..입..니..다..”가 통째인 동전의 드러남이고, “뒷..면..입..니..다..”가 통째인 동전의 드러남이다.
바위가 “나는 바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자기가 자갈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자갈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모래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모래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먼지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먼지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분자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분자다.”라고 하였다. 다시 자기가 원자의 모임임을 알고는 “나는 원자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위도, 자갈도, 모래도, 먼지도, 분자도, 원자도 허망한 이름이고 모양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허망한 이름과 모양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바..위..다..”
“나..는.. 자..갈..이..다..”
“나..는.. 모..래..다..”
“나..는.. 먼..지..다..”
“나..는.. 분..자..다..”
“나..는.. 원..자..다..” 뿐이다.
물은 모양에 따라 자기를 물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얼음이라고 하였다가, 수증기라고 하였다가, H₂O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물도, 얼음도, 수증기도, H₂O도 허망한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물..입..니..다..”
“얼..음..입..니..다..”
“수..증..기..입..니..다..”
“H..₂..O..입..니..다..” 뿐이다.
우주는 둘이 아니다(不二). 우주에는 무생물도 있고 생물도 있다. 그 생물 중에는 나를 포함한 인간도 있고 동식물도 있다. 우주가 “나는 홍길동이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생명체이다. 나는 무생물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허망한 이름이요, 모양일 뿐이다(皆是虛妄).
그러나 “나..는.. 홍..길..동..이..다..”가 우주이고
“나..는.. 인..간..이..다..”가 우주이고
“나..는.. 생..명..체..다..”가 우주이고
“나..는.. 무..생..물..이..다..”가 우주이다.
이와 같이 허망한 모양에 이름이 더해지면서, 이름에 해당하는 사물이 따로 있다는 착각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허망한 이름이요, 모양일 뿐이다. 허망한 이름과 모양만 따르지 않는다면,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불이(不二)이다.
불이(不二) 앞에 둘로 나누어진 동서남북, 상하좌우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불이 앞에 둘로 나누어진 과거 현재 미래, 1시 2시 3시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불이 앞에 둘로 나누어진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