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추리 -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1부 / KBS 1996090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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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14 ноя 2024
- ◼︎ 1992년 11월2일. 한 이탈리아인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코레아이다. 17세기 거장 루벤스의 그림 ‘한복입은 남자’의 모델인 조선인 소년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16-17세기경 임진왜란의 영토침략전쟁이 실상 노예전쟁이었음이 입증됐다.
일본은 한국인 기술자들과 부녀자, 소년들을 강제로 납치해 일부는 자신들의 기능공으로 부리고 나머지는 유럽의 상인들에게 인신매매를 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유럽과의 무역중심지인 나가사키 항구는 일본막부의 직할령으로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다. 나가사키에는 오무라수용소라는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한국인 노예매매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들과 당시 한인들이 거주했던 고려마을을 찾아가 본다.
역사추리 34회 - 임진왜란은 노예전쟁이었다 1부 (1996.9.6.방송)
history.kbs.co.kr/
정말 좋은 다큐네요. 잘 봤습니다. 거의 방송한지 30년이 다되어가는 다큐인데 내용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감사해요 ! 😄
한반도의 피로 먹고 사는 일본...........치가 떨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한국이 반일 교육하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항변합니다..자신들의 과오를 배우지 못했으니 뻔뻔한거죠..
한반도를 방패막이와 인력창고로 이용하는 니혼!
지금도 이 땅에 일본이 지배하네요. 이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읿본에 정신을빼앗겨 노예 근성에 목메는 친일파들이 넘쳐나니. 여기 댓글러 중에도 있네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임진란 병자호란 미국에서 일어남 ㅡ 다음 검색
이성계 부터 한민족 본토는 미국?
1910년대 까지는 열도는 일본이 아니고 왜노. 왕은 한민족
다만 메이지왕부터 바지사장..
1930년대 까지 3개주는 우리말 사용 ㅡ 다음 검색
일본은 백년의 적, 중국은 천년의 적!
시대지난 반일 내려놓고 한미일 동맹 강화로 강대국이 되야 후손들이 이런꼴 안당한다. Kbs 는 정말 문제다. 실리를 추구해야 못난 조선 꼴 안된다. 지금 중국 공산당의 횡포와 악을 생각해봐라 한국을 속국으로 만드려는 중국에 속지말자
맞아 베니스의 상인 읽었는데 생각나네...
지금 읽기 시작했는데 재밌으셨어요?
기억남요.실방
어머 신기하다
일본의 역사는 한마디로 약탈의 역사!
같은 스토리가 1978년 한국일보에 기재되었고 그 때 미국에서 코레아 이름을 가진 자에게 물어보니 이태리에서 왔다고
철학자 아렌트가 말했듯
'인간이 되는 것과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동일'하겠지요
참으로 지난 조선의 역사가 눈물겹고 참혹하기 그지 없네요
한민족에게 수없이 많은 죄악을 저지른 일본인들!
그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산다니 ㅠ
역사추리을 생각하여 다짐하자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의 저 미친 짓거리를 후손들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식민지시대를 겪은 조선에서 일제의 패악질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이래서 많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왜놈들이 조선에서 강간을 하루이틀 했겠냐?? 한두번 했겠냐?? 한두놈이 했겠냐??
에휴..
최근에 밝혀진 거로는 저 사람은 명나라 사람이랍니다. 의관과 상투도 조선의 것과는 다르고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개소리 길게도 늘어놨네
@@BabyBear-tn2wh “중국 상인 이퐁” 검색해봐요. 똑같아요. 니콜라스 트리고의 초상도 검색해보고. 중국인입니다.
상고사
아픈과거 역사네요
루벤스 그림은 명나라 사람으로 이미 잘못된 이야기로 판명되었는데....아직도 이런 헛소리를 하다니 ...
아니라던데요?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봐도 저 초상화 인물의 옷은 밍 왕조 ( 1368 - 1644 )당시의 옷이고 하인들의 옷은 절대 아님. 어느정도의 계급층의 옷과 갓을 볼 수가 있음
우리의영원한주적은 일본이란생각을1956년부터시작 해가갈수록더욱굳어저
1960년부터가슴에꽉세겨.평생을일제을안쓰고
지금까지평생을살고있다
30년전부터인도에살고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중공은 몽고에 300년피지배 식민지배받은 천민역사! 청여진족에 300년피지배 식민지배받은 천민역사! 청여진족은 고구려피지배받은 천민! 대한민국 대한국인! 자랑스럽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은 두번다시 일본과 중국에게 농락 당하지 않도 록 철저하게 역사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왜 우리가 저들에게 비참하게 당해야 했나요? 정말 열불이 납니다!
배울라면 좀더 알아야할듯 조선은 더 악랄한게 자국민을 노예로 썼음 ㅋㅋ
끌려간 도공들이 전쟁후 귀국를 거부 했듯이 ᆢ 차라리 인간적으로 잘 된 삶 일수도 ㅡㅡ 당시 ㆍ 세계유일 ᆢ자국민 노여로 쓴 조선 ㆍ 노비 20명에 소 1마리 ᆢ 자손대대로 노비 대물림 ㅡㅡ 소수 양반이 아니였다면ㅈᆢ 조선에 남아 있었으면 지옥 이였다
평생을 살아온 조국을 떠나 살다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셨을 텐데.. 참.. 고단.. ㅠㅠㅠㅠ 슬프다.
아신이만든나라가
본이요허허참기차서
아이그럼임진년후소들과 일쩨때도싸운거네요
ㅜㅜㅜㅜㅜ천벌요
총한자루도없는우리
참 기괴한건
삼국때도 고려때에도 조선때도
그 때의 사람들은
일본열도로 들어갔음.
특히 백제.
사실상 열도에 영향을 끼치면서도
백제가 그 특유의 문화의 백제로 되기보다
문화적인 면 이 떨어지면서
동시에 열도, 섬나라의 자연스레 흡수됨..
음.
일본을 일본으로 봐야하나
일본에 백제/삼국, 고려가 있었다.
라고 봐야하나.
패전국이니 약탈이라 봐야하는가
승전국이니 전리품을 챙기었다 봐야하나.
네덜란드 베스트스테인교수가 루벤스 그림이 중국 상인 이퐁임이 밝혀졌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이전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임진왜란때 납치되어 일본에 갔던 아동이
스페인으로 가서 신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
왔어 포교하다 잡혀 죽음을 당했다는 역사
이런 복장은 반도가 아니라 대륙풍이네요, 흠..
노애로서 한복은 불가능?
한산 용의 출현 본사람은 발을 들어주새요
@@Silla_Gates5 원균은 졸장이고 이순신은 명장임 ㅉㅉㅉ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도망자 아니고 애국자고 옥포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이겨서 명장임 ㅉㅉㅉ
고대한국인이 일본에건너가서 일본을 건국한것이죠! 고대한국식민지 일본! 수천년전부터 아버지나라 대한민국에 수천년간 약탈 도적 성폭행 고문 학살한 더러운야만족!
@@Silla_Gates5 배를 200척 300척을 침몰시켜놔도 그게 소규모 전투냐? ㅋㅋㅋ
@@Silla_Gates5 맞습니다. 졸장 원균과 충무공 이순신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죠.
암울햇던 조선의 역사를 보면 속이 꽉 막히는늦낌이다 근 현사의 역사학자들은 호손의 죄인이될것입니다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지않은 죄. 정치인의 억눌려 바른소리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정치인과 한몸이되서 역사를 왜곡한 역사가들 몇백년이지난 현제도 이어지고있는 왜곡자들이 판을 치고있는 현실 반토막이된 한반도 그 속에서도 지역마다 갈라치기가되고 있네
이씨조선 500여년 .. 절반이상이 동족노비, 그런 세상이 무한반복ㅋ
잔인한 일본이저질은 임진왜란 전쟁 피해국 대한재국 조선 다시한번 정신차려 그당시 물질적 피해 목슴일은 안녀자 목이잘인 장군 모두 법을 연구노력해서 잔이하고 이기적인 일본 정부에게 꼭청구를 지금 우리국민들이 해야할 숙재라고 생각합니다
저게 한복이야
계묘년 2023 ~현실직시 환하시옵길
썸내일 루밴스 한복
1617년 정도에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망건과 도포를 걸친 모습이 특징이다. 1617년 즈음이라면, 흔히 조선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진 박연이 조선에 상륙은 커녕 태어나기도 전인 때이다.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이 작품을 처음 수집하고 조사하던 도중 사진 구석에 조그마한 범선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배는 위의 작품 사진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림 왼쪽 중단부를 자세히 보면 그리다 만 배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바다를 건너서 온 인물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인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조사하던 도중 해당 그림속 복장이 한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인 것이다.
당시 조선과 유럽은 교류가 없었으므로 루벤스가 어떻게 조선인을 모델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제대로 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다가 다시 유럽으로 팔려간 노예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 옷차림새가 단정하고 풍채가 당당하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근접하고, 당시 노예시세가 하락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인 노예가 많이 풀렸기 때문에 일부가 어떻게 흘러흘러 유럽으로 건너갔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유력하게 언급되는 인물이 안토니오 꼬레아이다.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모델이기도 하지만, 부산대학교 사학과 곽차섭 교수의 책 《조선청년 안토니오 꼬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에서도 이 가설을 택하고 있다. 곽차섭 교수는 이 그림의 인물은 철릭을 입은 조선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뒤 피렌체 상인 카를레티가 구매해서 로마로 데려온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명숙과 왈라벤은 노예로 팔려와 유럽에 온 한국인이 그와 같은 벼슬아치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지적한다. 그보다는 일본에서 일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사무소 소장 자크 스펙스(Jacques Specx; 1585 ~ 1652)가 고용했던 한국인 수종(隨從)이 1615년경 로마가 아닌 네덜란드에 온 것을 스케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 다른 가설로는 명나라나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가 보내온 선교 보고서에 조선인의 그림이 실렸고 루벤스는 이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과, 아예 이 옷이 한복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돌아온 선교사의 명나라 복식을 보고 드로잉한 그림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으로는 루벤스가 외교관을 했다는 이력을 들어 그가 아시아 지역의 외교를 다녀오고 난 후 아시아 의상에 깊은 감명을 얻어 자신의 그림에 아시아적 요소를 넣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위의 드로잉을 전시하고 있는 미국의 전시관에서 큐레이터는 작품을 소개할 때 이러한 주장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자신의 아시아 외교의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기념으로 아시아 의상을 입힌 유럽의 제사장 및 해외 대사를 그렸다는 것이다. 다른 드로잉 작품으로는 중국 의상을 입힌 작품이 있는데 당시 유럽의 제사장 모습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소 루벤스가 해외 문화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관련 학계에서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1600년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흥포(興浦)'라는 명나라 상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기사, 논문) 한복과 명나라 시대 한푸(즉, 고려양)의 유사성 때문에 약 80여년간 모두 착각하고 있었던 셈. 그림의 주인공이 네덜란드를 직접 방문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동양 복식을 루벤스가 알고 그릴 수 있었냐에 대한 미스터리도 이것으로 해결되었다.
또 한 가지 증거를 뽑자면 남자가 입은 의관에 비치는 상투의 모양이 조선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식 상투는 청대 이전 한족처럼 머리를 묶어 고정하는 형태이기는 하나 상투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정수리 숱을 쳐서(이걸 "배코친다"고 한다) 그 위에 상투를 틀었기 때문에 [1] 크기가 저렇게 크게 나오지 않는다. 청나라 이후 한족들은 만주족의 강요로 변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청대 이전의 상투 트는 법이 실전되긴 했으나 저 남자의 상투크기는 조선시대 인물화나 풍속화에 나오는 상투와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크다.
@@Silla_Gates5 효종 북벌 ㅉㅉㅉ
@@Silla_Gates5 거지 노예국가 아니고 바지 노비국가 중국의 개 아니고 중국의 속국 ㅉㅉㅉ
고대한국인이 일본에건너가서 일본을 건국한것이죠! 고대한국식민지 일본! 가야 백제인이 일본에건너가 왜건국!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한민국 선조께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대한국인이 자랑스럽다!
중국인이여
대단히 많이 아시는 필력!!
일본이 아니고 왜라는 해적들입니다 이 해적들과 조선인 유대인들의 혼혈이 현 일본이며 일본땅은 조선땅이었어요
의병이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노예상인때문이었다고 본다
어쩐지 유럽사람이 우리나라사람과 똑같이 생긴사람이 많더라 했네
일본을 욕하기 전에 힘이 전부인 저 야만의 시대에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추지 못했던 조선을 반성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현대에 들어와서도 돈과 권력에 따라 법과 규율이 평등하게 적용되지도 않는데, 수백년 전의 중세시대에 지금의 상식을 기대할 순 없겠지요. 일본을 욕하는데서 끝나면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저때의 어리석음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에 역사를 배우는 의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때부터 일본놈들이 식민지의 맛을 봤구나. 그 맛을 못잊어 일제강점하고 625와 지금의 끊임없는 망동이구나
썸네일의 그림은 중국인으로 판명난 그림 입니다...
저 그림 탄소연대 측정해봐라
댓글에 매금이나 장문 복붙이하는 놈이나 민페인줄 모르시나..ㅍㅍ
고대한국인이 일본에건너가서 일본을 건국한것이죠! 고대한국식민지 일본! 수천년전부터 아버지나라 대한민국에 수천년간 약탈 도적 성폭행 고문 학살한점은 안타깝습니다! 반성해야합니다
헛소리 작작해라. 애초에 신창성씨록 보아도 한국 도래인계열 성씨는 26%정도에 불과하다.
일본에 당하고 살아온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이런식으로 정신승리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근데 참.... 역사스페셜로 해서 임란 포로 관련한 영상 다 봤지만... 이 영상도 마찬가지고. 참 뭔가 씁쓸하네... 씁쓸해... 한반도는 전쟁의 피해자고, 저쪽 옆에 있는 나라는 전쟁의 피의자인데.. 뭔가 맘이 씁쓸하네... 하긴 뭐... 6.25 전쟁도 포로들이 즐비 했으니까. 6.25 전쟁도 그렇고 임진왜란 다큐 영상 보면서 느끼는 건데 진짜 전쟁은 하지 말자.. 우리...
대만에도 일제가 침략했는데 그당시 서구가 점령하고 있었는데 몰아내고 일본이 점령했죠
대만사람들이 일본이 물러나는걸 아쉬워했답니다
서구침략자가 더 악랄했다는 뜻인데 거기에 대해 재조명해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정확성 유무도 알고 싶네요
상훈아 그딴건 대만 방송에 부탁해라
그때그시대 땅은 양반들이 양민을 개돼지로 취급했을것.
베니스의 개성상인
그 소설 아주 유명하죠.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도조 히데키가 중국인이 바퀴벌레 라고 말한건 인터넷에서 퍼트려진 가짜 이야기로 밝혀졌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데 재밌어요? 후기 궁금
말도설고 글도설고
생김도특히해서
구야우ㅜㅜ다후손들
다후손들이요어책에서그렇데요 왼진
날세면 남쪽만보인다고 그기분이 이런거구니여자들이
더오고싶다고해요
다른으 ㅜ나라들은
불편하데요 다느낌이런거구나ㅡ
왜 조선임에도 꼬레아 였을까
중고등 역사시간에 안배우셨나요?
고구려 고려를 외국에서는 코레아라 불러 그렇게 이어져 불렸다고
기억나네요
조선이전 고려라는 나라를 외국에선 발음상 꼬레아라고 불렀음
상고사
내 짧은 지식으로는 일본으로 끌려가서 이탈리아 까지 갔다면 꼬래아라고 하지않았다고 보는데 러시아쪽으로가서 유럽으로 넘어간사람들이 고려라는 단어를 쓰던데요 지금도한국을 고려라고도해요 우즈배키스탄에서
고려 때 한국의 존재가 서양에 널리 알려졌고 그때부터 한국은 고려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코리아 코레 꼬레 코레아 꼬레아 등으로 불리게 되었죠.
베니스의 개성상인
상고사
방금 검색해봤는데 개소리라 합니다. 코레아라는 이름은 원래부터 있던 이름이랍니다. 또한 그림속 인물 또한 조옷선인이 아닌게 밝혀졌다네요. 아무리 무식한 시대라 해도 방송을 저따구로 만들면 안되죠
어디서 검색해야하나요? 링크부탁드려요
공영 방송이 이런 짓이나 하고 있으니... 쯧쯧~~~
출처 어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읽은 것이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조작왕조실록이곘지. 들은 것 본 것 외에 뭘 알아봤다고 아는척하냐. 노예 만들려고 서당을 세웠겠냐 억울한 노비들 외면하려고 신문고가 있었겠냐.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노예들에게 알리려고 기별을 부쳤겠냐, 뭘 알아 그냥 자시다 싼 거나 잘 누르다 가셔. 그 왕조실록 소수가 읽고 알려준것외에 누가 뭘 확인할수 있다고 믿냐. 이러니 개돼지 주사나 맞고 살지
윤석열 정부는 왜 이렇게 일본에 머리를 숙이는 건지 모르겠음!!!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에 엄청나게 조선인들이 팔려나갔군요!! 진짜 가슴 아픕니다!!!
머가리 덜깨졌누
@@Silla_Gates5 광해군 군사력 증강 시도 ㅉㅉㅉ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중립외교 ㅉㅉㅉ
석열이한태역사?
ㅋㅋㅋ무식무지무능이
괜히나온말이아니지.
문재앙이 중국몽 하는거랑 뭐가 다르냐
안토니오 꼬레아 corea,core등등...
성씨를 가진사람이 전세계적으로 분포하고있는데 무슨 노예야
미국의 지명에 corea란 지명도있다 지금은 corea라는 성씨가 많이 없어졌는데 탄압을 피해 성을 바꾼경우겠지
corea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니 core +a 코어 중심,중추적인,핵심...국가의 사람이다
중국은 corea를 뜻하는거다
조선의 영어발음은 죠션,죠선,쵸즌,쵸선...등등 choosen 조선은 말그대로 선택된 민족,자손
한국은 위로 거슬러올라가면 12한국에서 시작하지 하나님과함께 12개의 선택된 부족들 전세계로 흩어져 사람을 개화시키며 문명을 전파한것이 세계의 역사며 우리의 역사다
저 이탈리아 초상화는 조선인이 아니라고 얼마 전 밝혀졌습니다.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도 우연히 코리아(고려 Korea)와 유사한 이름일 뿐, 조선과는 관계없는 토착 이탈리안이라고 합니다.
임진란 병자호란 미국에서 일어남 ㅡ 다음 검색
이성계 부터 한민족 본토는 미국?
1910년대 까지는 열도는 일본이 아니고 왜노. 왕은 한민족
다만 메이지왕부터 바지사장..
1930년대 까지 3개주는 우리말 사용 ㅡ 다음 검색
걍 아갈 닥치고 있어 ㅈ도 모르면
이미 명나라 상인으로 판명난 그림을 아직도 조선노예라고 착각하는 수준ㅉㅉㅉ
판명 누가 했음??
@@LeadingWorshiper 나무위키 검색...
@@잭팟-l3v 저는 안 가는 곳이네요. 서너번 가봤나
DNA내 미토콘트리아 분석하면 바로 검증이 가능할텐데 굳이 사료로 추정하는 이런 영상 만들 필요있나?
와 ㅡ 행운아 였네 ㅡ 조선에 있었으면 소 1 마리에 노예 20명 값 인디 ᆢ ㅋ 하여간 끌려간 도공들도 귀국을 거부 했지 ᆢ 조선에 남아 있었으면 비참한 노비 삶 ㅡ 살았음
일본이 훨씬 발전됐는데 한국에서 뭘가져가겠어
그저 흑인노예마냥 조선인이나 노예로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