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사건, 1987년 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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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8 мар 2024
  • #6월항쟁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1987년 1월.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깜짝 놀라 억! 죽었다며, 박종철 학생의 사망 사인을 쇼크사로 공식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건강했던 21살의 남성이, 책상 소리에 놀라 죽었다는 소리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기자들과 시민단체들에 의해 의혹이 가중되고 있을 때.
    부검의의 검사 결사에서 구타와 전기고문, 물고문의 흔적이 발견되고, 경부압박 의한 질식사가 확인되며 경찰은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명백한 증거가 기사화되자, 경찰은 사건 발생 5일 만에 고문으로 인한 사망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
    고문에 가담했던 조한경과 강진규 두 경관을 구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국적인 비판과 사회적 압박을 견디지 못했던 두 사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많은 부분 축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실제로 이 사건에는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과 관련 기관들이 조직적으로 관여되어 있었고, 고문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경찰 또한 한경과 강진규 말고도, 3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경찰이 국민을 사망에 이르는 고문을 하고, 국가기관이 연대하여 관련 내용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에 격양되게 됩니다.
    국민들은 전국적으로 전두환 퇴진과 대통령 간선제 폐지를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을 진행하게 되고,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국민들의 요구에 답하게 되는데요.
    그 답변은 다름 아닌, 호. 헌. 조. 치!
    현행 헌법을 계속 유지하겠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나며 안 그래도 좋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전두환이 호언 조치를 선언하자 시위의 규모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게 됩니다.
    전국의 대학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대규모로 시위를 진행했고, 시민들 또한 시위를 진행하는 학생들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맘때 연세대학교 학생 1,000여명도, 교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교내 집회를 끝낸 후 교외로 진출하려 했는데요.
    경찰들은 이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며 막아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경찰 이 발사한 최루탄에 이한열 학생이 후두부를 맞아 쓰러지게 됩니다.
    규정대로라면 허공을 향해 45도로 발사해야 했으나, 경찰은 이를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것이었습니다.
    이한열 학생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동료학생 이종창 학생이 겨우 부축하여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되게 됩니다. 이 장면은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 1면에 보도되며, 국내외 모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커지게 됩니다.
    인한열 학생은 그 뒤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대학생들뿐 아니라, 화이트칼라의 직장인들,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종교계 인사들, 제도권의 인사들까지 하나의 목소리를 내며 밀집되게 됩니다.
    시위는 한 두차례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았고, 1987년 6월 내도록 매일 평균 100회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같은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와 농촌지역까지, 38개의 시군에서, 최소 400만 명에서 최대 500만 명의 인원이 대통령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을 진행하게 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투입할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박종철과 이한열 학생의 소식으로 미국과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또한 쉽게 진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때는 1987년.
    88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불과 1년 전이었습니다. 군대를 투입해 자국민을 탄압할 경우, 수많은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할 가능성도 매우 높았습니다.
    결국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하던 6월 한 달 동안, 경찰은 총 67만 발의 최루탄을 사용하며, 보유한 최루탄을 거의 모두 사용하게 되었고, 경찰력이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다다라서야 전두환 정권은 타협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 정의당의 노태우 대표는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수습안을 발표.
    전두환은 바로 다음날 6.29선언을 수용하며, 같은 해 12월 진행된 13대 대통령선거부터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출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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