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에 칠백의총에 소풍을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700명이 전사한 곳이라는 설명만 들어서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네요. 그냥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곳 이정도 의미로만요. 그런데 그들의 희생 덕분에 왜군의 호남진공이 막히게 되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극적이고 감동적인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이 영상을 안봤으면 아마 계속 몰랐을 거에요. 임용한 박사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06:55 영규 대사님의 금산전투는 비록 희생이 컸지만 단순한 패전이 아니라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았다는 점에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한 전투라는 말씀에서, 오늘도 크게 깨닫고 갑니다! 금산 전투의 경과를 자세히 알게 된 것만 해도 새로운데, 전투 현장까지 설명을 해 주시니 이해가 쏙쏙되고 전투상황이 그려져 너무 좋습니다. 조헌 부대의 성격과 생존 장수의 일화까지 알게 되어,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릴 적 봤던 금산전투의 민족기록화에서 의병들이 왜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처절하게 전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박사님의 설명(조헌 등이 방진을 구성하여 저항)을 들으니 나름 고증이 잘 된 그림이었네요~ 어렸을 때는 '왜 저렇게 포위되어서 싸우고 있지?' 라고 의아했었는데, 전투상황을 들으니 이해됩니다.
영화화 한다면 이제껏 우리 나라 드라마나 영화들이 그래왔듯이 진부한 신파에 정형적인 억지 감동을 짜내며 우려먹겠죠. 상상력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너무 밑도 끝도 없는 상상력들만 보아와서... 그냥 금산 전투를 고찰하면서 싸우셨던 분들을 느껴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일지도요....
제가 알기로 영규대사는 공주로 후퇴하거나 중 상처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질문합니다. 조헌.영규의 군대를 상대로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본군의 규모를 모른다 해도 조선군은 2000면도 안 되는데 과연 큰 피해를 입혔을까요? 금산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늘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크다 적다라는 표현은 주관적이라 우리가 판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기록에도 '우리보다 왜군의 피해가 많았다'라고 하는데 솔직히 정확한 기록은 아니고, 왜군의 피해수치를 몰랐던 것도 확실합니다. 중요한 건 조선군과 왜군의 입장이 다르다는 겁니다. 전쟁은 게임이 아니고 판정승이란 개념도 없습니다. 아군 피해가 더 컸다고 해도 왜군이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큰 피해를 입은 것이죠. 이 전투를 끝으로 왜군이 호남진공 작전을 포기하니까 전략적 의미에서 예상보다 큰, 앞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을 내린(이유가 당장 피해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희생 비율이면 호남으로 진공했을 때 전투력이 고갈되겠다고 예상해서 판단을 내렸든) 것은 분명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에 이르까지 3~4 차에 걸쳐서 치열한 근접전을 치루고 도망가거나 포로가 된거가 아니고 육박전끝에 전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웠으니 이긴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음 패한쪽이 결사항전하면 이긴쪽도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음 고바야가와 일본군 6번대가 16700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나 웅치와 이치 , 고경명과 조헌의 의병전투로 후퇴하여 한성에서 조사해보니 9000명정도 남았다고 기록된것을 고려해보면 일본군이 금산에서 패하여 물러난것과 다름없고 조헌과 영규의 분투는 일본군의 퇴각에 분수령을 미친것으로 평가됩니다
임진왜란으로 빠르게 평양으로 진군한 일본의 보급 문제가 발생하는데 보급을 해상수송하였는데 이것이 이순신에 의해 철저히 박살나서 보급이 끊김 그래서 군량확보와 이순신 해군의 배후를 치기위해 전라도로 진입할 필요가 있었슴 하나 의문은 어쨌든 저시대 일본군이 보급이 그리 중요했을까? 그냥 약탈하고 진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해군의 전쟁이 큰 비중이 있었을까? 잠깐 의문이 그런데 저기서 일본군 어떤 피해를 입었는진 미지수라고 넣어도 이후 호남지역의 일본군 점령은 많이 늦쳐졌고 결과적으로 이순신 군대와 저 전투의 결과 일본군의 장기전이 점점 꼬이면서 명이 참전하는 시간을 벌어 조선이 임진왜란을 어쨌든 이김 즉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뭐 박사님 해석을 개인적으로 맘데로 해석하면 이리될 듯
어릴적에 칠백의총에 소풍을 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700명이 전사한 곳이라는 설명만 들어서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네요. 그냥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곳 이정도 의미로만요. 그런데 그들의 희생 덕분에 왜군의 호남진공이 막히게 되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극적이고 감동적인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이 영상을 안봤으면 아마 계속 몰랐을 거에요. 임용한 박사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06:55 영규 대사님의 금산전투는 비록 희생이 컸지만 단순한 패전이 아니라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았다는 점에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한 전투라는 말씀에서, 오늘도 크게 깨닫고 갑니다!
금산 전투의 경과를 자세히 알게 된 것만 해도 새로운데, 전투 현장까지 설명을 해 주시니 이해가 쏙쏙되고 전투상황이 그려져 너무 좋습니다.
조헌 부대의 성격과 생존 장수의 일화까지 알게 되어,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릴 적 봤던 금산전투의 민족기록화에서 의병들이 왜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처절하게 전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박사님의 설명(조헌 등이 방진을 구성하여 저항)을 들으니 나름 고증이 잘 된 그림이었네요~ 어렸을 때는 '왜 저렇게 포위되어서 싸우고 있지?' 라고 의아했었는데, 전투상황을 들으니 이해됩니다.
금산전투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유튭영상은 처음인거 같아요~~ 공부 열심히 했으니 다음번에 고향 방문하면서 칠백의총 갈때는 아이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꺼같네요 ㅎㅎ
ㄲ 다 믿지마시요. 최소 3천의총이라 해야 합니다. 이유는 어느 전쟁도 무명의 용사가 많습니다만 당시는 더 심했을겁니다.
상상이 가능한 공백이 큰만큼 영화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영화화 한다면 이제껏 우리 나라 드라마나 영화들이 그래왔듯이 진부한 신파에 정형적인 억지 감동을 짜내며 우려먹겠죠. 상상력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너무 밑도 끝도 없는 상상력들만 보아와서... 그냥 금산 전투를 고찰하면서 싸우셨던 분들을 느껴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일지도요....
오늘도 감사히 잘 봤습니다~!
아 이건 마치 테르모필레의 전쟁하고
비슷하내요 300명이 전사 했다고
패한전쟁이다 라고 판단 해버렸다면
영화 300 같은 영화가 나올리가 없겠죠
그 전투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의미 없는 죽음이라 보다는 전략적으로
엄청난 성과를 낸 전쟁이겠죠
너무 슬픕니다
화이팅입니다 ^^
6:13 듣고 보니 영규대사의 인물됨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느껴지네요...야전지휘관이라..
아 참 비장하네요. 잘 배우고 갑니다.
대단하면서도 너무 안타까운 전투네요.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이었을텐데.
끝까지 듣다보니....세상 일이 참 얄궂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네요...
지난주에 외가가면서 칠백의총 한번다시 들렸다왔는데 너무많이 변해서 깜짝놀랐어요
원호장군 얘기도 주세요 ~^^
궁굼합니다
삼국지 교열상태가 생각보다 안좋네요..
2쇄 찍을때는 조금 더 꼼꼼하게 봐주셨..으면 해요
사실 이건 출판사의 역량이긴 한데 ㅜㅜ
근데요 영상하고 약간 다른 질문인데요
궁금해서 댓글 남겨요
경복궁 같은데 구경가면 왕들하고 신하들
몇백명이 생활햇잖아요 근데 그많은 사람들
화장실같은곳이 없던데
그거는 어디서 햇을까요?
제가 알기로 영규대사는 공주로 후퇴하거나 중 상처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질문합니다. 조헌.영규의 군대를 상대로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본군의 규모를 모른다 해도 조선군은 2000면도 안 되는데 과연 큰 피해를 입혔을까요? 금산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늘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크다 적다라는 표현은 주관적이라 우리가 판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기록에도 '우리보다 왜군의 피해가 많았다'라고 하는데 솔직히 정확한 기록은 아니고, 왜군의 피해수치를 몰랐던 것도 확실합니다. 중요한 건 조선군과 왜군의 입장이 다르다는 겁니다. 전쟁은 게임이 아니고 판정승이란 개념도 없습니다. 아군 피해가 더 컸다고 해도 왜군이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큰 피해를 입은 것이죠. 이 전투를 끝으로 왜군이 호남진공 작전을 포기하니까 전략적 의미에서 예상보다 큰, 앞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판단을 내린(이유가 당장 피해가 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 희생 비율이면 호남으로 진공했을 때 전투력이 고갈되겠다고 예상해서 판단을 내렸든) 것은 분명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에 이르까지 3~4 차에 걸쳐서 치열한 근접전을 치루고 도망가거나 포로가 된거가 아니고 육박전끝에 전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웠으니 이긴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음
패한쪽이 결사항전하면 이긴쪽도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음
고바야가와 일본군 6번대가 16700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나 웅치와 이치 , 고경명과 조헌의 의병전투로 후퇴하여 한성에서 조사해보니 9000명정도 남았다고 기록된것을 고려해보면
일본군이 금산에서 패하여 물러난것과 다름없고 조헌과 영규의 분투는 일본군의 퇴각에 분수령을 미친것으로 평가됩니다
기존 인문채널휴 멤버십으로 공개된 영상을 시간이 될 때 보려고 했는데 멤버십이 사라지며 볼 수 없게 됐네요ㅠ 플루타르크 영웅전 페리클레스 편을 이쪽 멤버십으로 다시 올려주실 수 없으실까요?
천천히 작업할 예정입니다
@@Limyonghan-TV 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시간이.많이걸리는 작업이라 양해부탁드립니다
임진왜란으로
빠르게 평양으로 진군한 일본의 보급
문제가 발생하는데
보급을 해상수송하였는데
이것이 이순신에 의해 철저히 박살나서
보급이 끊김
그래서 군량확보와 이순신 해군의 배후를
치기위해 전라도로 진입할 필요가
있었슴
하나 의문은 어쨌든 저시대 일본군이
보급이 그리 중요했을까? 그냥 약탈하고
진군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해군의
전쟁이 큰 비중이 있었을까? 잠깐
의문이
그런데 저기서 일본군 어떤 피해를
입었는진 미지수라고 넣어도 이후
호남지역의 일본군 점령은 많이
늦쳐졌고
결과적으로 이순신 군대와
저 전투의 결과 일본군의 장기전이
점점 꼬이면서 명이 참전하는 시간을
벌어 조선이 임진왜란을 어쨌든 이김
즉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뭐 박사님 해석을 개인적으로
맘데로 해석하면 이리될 듯
이순신에게 너무 쏠린 임진왜란의 공을 위해서라면 필독해야합니다. 전쟁을 피한 장수. 전략은 승만을 위한 전략은 없습니다. 분산 교란작전도 있으며 권율의 전략하에 잘 따르지 안은 장수..
금산이 조선시대는 어디 속했었는지 몰라도,
현대에는 전라북도에 속해 있다가 1963년 충청남도 소속으로 바뀝니다.
신립의 탄금대도 전 패배라고 보지 않아요. 권력다툼의 희생이라고 봅니다.
장황한 설명 잘 들었습니다.
결론:
조헌 is 쪼다.
거 참 목숨바쳐 나라지켰던 사람한테 말이 심하네
상세하게 설명해주신거지 어떻게 장황한 설명입니까. 말좀 가려하시죠.
굳어진 머리에 남의 얘기를 보고 들을 생각이 없는데, 예수님 부처님 말씀인들 소용 있겠습니까 ㅋ 이런 노인네들을 많이 보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