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외교담판은 안융진의 고려군이 소손녕의 거란군을 상대로 이기면서 안융진을 잘 지켜내고 거란군이 80만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서희의 통찰력, 고려와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할 수가 없는 거란의 사정과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여진을 견제하면서 후방 안정을 통해서 송나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하고 싶은 이해관계 때문에 가능했죠. 그 결과물이 강동6주죠.
청천강 부터 압록강까지의 고려 영토화는 서희가 마무리 지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고려는 꾸준히 시도했고 상당히 효과를 보았습니다. 거란군이 1차 침공을 했을 당시에도 청천강 이북에 고려군이 쌓은 성들이 많아서 청천강에서 고려군과 대치했던 거란군도 전방에 있는 고려군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들은 바닷길에 열려 있어서 고려의 북진정책에 강력 저항을 하여 압록강까지의 영토화에 상당한 애로점이 있었죠. 이미 고려의 북진정책은 고려 왕실에 이득이 있지, 고려 호족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아서 호족들의 비협조로 난항이었죠. 거기에 광종때의 호족 대숙청과 그 아들때의 호족들의 반동 정책으로 고려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수난시대라서 그 시기에 북진정책은 집중이 안되었습니다. 고려 성종때에 비로소 안정이 잡자, 부진했떤 북진정책을 실행했지만, 여진족들의 거센 저항으로 압록강까지의 고려화는 부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소손녕과의 회담으로 압록강까지의 고려 영토되는 것을 거란이 묵인해주자, 이제까지 비협조적이었던 고려 호족들은거란 대비 라는 명분 때문에 결국 적극 협조하는 것로 바뀌었죠. 청천강 이북에 있던 기존의 고려 인프라에 고려 호족들의 대협조로 국가 역량을 총 동원하여 서희는 2년만에 결국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미 강동 6주라는 영토는 서희 이전에 어느 정도 고려인들이 마무리 지어놓은 상태에서 국가역량을 총 동원하여 서희가 2년만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청천강 이북의 강동 6주를 단 2년만에 완성하는 것은 요새화 하는 것은 고려의 국력으로 매우 힘듭니다. 고려보다 몇배의 생산력과 인구와 영토를 가진 조선도 6진 개척을 수십년이나 걸린 것을 감안하면 서희가 강동 6주를단기간에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소손녕과의 회담이 계기가 되어서 가장 빨리 강동 6주가 완성된것이지, 소손녕과의 회담이 아니래도 강동 6주는 고려 영토가 될 운명이었죠. 서희는 지지부진 하던 강동 6주의 요새화를 거란 침략을 명분 삼아 호족들의 협조하에 국가 역량을 총 동원하여 빠른 시일하에 마무리 짓었습니다.
너무 재밌어요 ㅎㅎ 서희가 정말 협상술이 뛰어나네요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
서희의 외교담판은 안융진의 고려군이 소손녕의 거란군을 상대로 이기면서 안융진을 잘 지켜내고 거란군이 80만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서희의 통찰력, 고려와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할 수가 없는 거란의 사정과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여진을 견제하면서 후방 안정을 통해서 송나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하고 싶은 이해관계 때문에 가능했죠. 그 결과물이 강동6주죠.
큰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명망 높은 개인 한 사람의 통찰력과 안목이 한 나라를 구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나라를 깊이 사랑하고 통찰력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댓글 감사해요~
청천강 부터 압록강까지의 고려 영토화는 서희가 마무리 지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고려는 꾸준히 시도했고 상당히 효과를 보았습니다. 거란군이 1차 침공을 했을 당시에도 청천강 이북에 고려군이 쌓은 성들이 많아서 청천강에서 고려군과 대치했던 거란군도 전방에 있는 고려군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들은 바닷길에 열려 있어서 고려의 북진정책에 강력 저항을 하여 압록강까지의 영토화에 상당한 애로점이 있었죠. 이미 고려의 북진정책은 고려 왕실에 이득이 있지, 고려 호족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아서 호족들의 비협조로 난항이었죠. 거기에 광종때의 호족 대숙청과 그 아들때의 호족들의 반동 정책으로 고려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우 수난시대라서 그 시기에 북진정책은 집중이 안되었습니다. 고려 성종때에 비로소 안정이 잡자, 부진했떤 북진정책을 실행했지만, 여진족들의 거센 저항으로 압록강까지의 고려화는 부진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소손녕과의 회담으로 압록강까지의 고려 영토되는 것을 거란이 묵인해주자, 이제까지 비협조적이었던 고려 호족들은거란 대비 라는 명분 때문에 결국 적극 협조하는 것로 바뀌었죠. 청천강 이북에 있던 기존의 고려 인프라에 고려 호족들의 대협조로 국가 역량을 총 동원하여 서희는 2년만에 결국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미 강동 6주라는 영토는 서희 이전에 어느 정도 고려인들이 마무리 지어놓은 상태에서 국가역량을 총 동원하여 서희가 2년만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청천강 이북의 강동 6주를 단 2년만에 완성하는 것은 요새화 하는 것은 고려의 국력으로 매우 힘듭니다. 고려보다 몇배의 생산력과 인구와 영토를 가진 조선도 6진 개척을 수십년이나 걸린 것을 감안하면 서희가 강동 6주를단기간에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소손녕과의 회담이 계기가 되어서 가장 빨리 강동 6주가 완성된것이지, 소손녕과의 회담이 아니래도 강동 6주는 고려 영토가 될 운명이었죠. 서희는 지지부진 하던 강동 6주의 요새화를 거란 침략을 명분 삼아 호족들의 협조하에 국가 역량을 총 동원하여 빠른 시일하에 마무리 짓었습니다.
정말 역사에 해박하시네요! 고려 역사 다른 영상 만들 때 참고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