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신공양은 유럽이나 남미를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나오는 현상이긴 합니다 중국은 명나라때까지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을 묻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이거말고도 폐우물에서 인신공양된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기도 했고 , 초중기까지 순장을 했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에밀레종 전설은 그냥 단순히 전설이긴 했지만 인신공양 이야기가 나오는걸봐서 나중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어느정도 있던 사회풍조라고 봅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반월성에 많이 놀러갔었는데 반월성 일부는 밭이었습니다 농사로 많이 망가졌고 그전에는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에는 집들도 있었고 나무나 잡목들도 자라서 그냥 숲이었을것 같습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몽골군들이 들어와서 고려의 주요 도시였던 경주를 완전히 파괴 하였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이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강화도로 숨어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왕은 최우의 권력을 위한 허수아비 인질일뿐이고 .. 침입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은것들 조차 임진왜란때 또한번 대규모 파괴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후에 지은 민가나 밭 또는 숲으로 변해 버렸지요
제가 어릴때만 해도 반월성에 많이 놀러갔었는데 반월성 일부는 밭이었습니다 농사로 많이 망가졌고 그전에는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에는 집들도 있었고 나무나 잡목들도 자라서 그냥 숲이었을것 같습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몽골군들이 들어와서 고려의 주요 도시였던 경주를 완전히 파괴 하였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이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강화도로 숨어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왕은 최우의 권력을 위한 허수아비 인질일뿐이고 .. 침입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은것들 조차 임진왜란때 또한번 대규모 파괴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후에 지은 민가나 밭 또는 숲으로 변해 버렸지요
어찌 보면 토속적인 신앙과 믿음의 행위 같지만 실상은 타인을 희생 시킴으로서 자신들의 미래와 안녕을 도모한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지키고자 타인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드라마지만 왜, 오수재인가를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법을 넘어선 짓을 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모르는 파렴치한 일들이 쉬임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반월성에 많이 놀러갔었는데 반월성 일부는 밭이었습니다 농사로 많이 망가졌고 그전에는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에는 집들도 있었고 나무나 잡목들도 자라서 그냥 숲이었을것 같습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몽골군들이 들어와서 고려의 주요 도시였던 경주를 완전히 파괴 하였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이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강화도로 숨어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왕은 최우의 권력을 위한 허수아비 인질일뿐이고 .. 침입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은것들 조차 임진왜란때 또한번 대규모 파괴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후에 지은 민가나 밭 또는 숲으로 변해 버렸지요
무지함은 현대라고 없을까요? 그 시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그 시대를 당대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또 현대의 기준에서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다르니까요. 아프리카 초원의 숫사자가 싸움에서 이긴 후 이전 숫사자의 새끼들을 잔인하게 물어죽이는 것 하이에나나 리카온이 사냥감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장을 뜯어먹는 잔인한 습성... 인간 기준으로 시비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겁니다. 고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람을 제물로 삼았는지...를 따지기 앞서 고대 사람들은 현대인만큼의 과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해석하는 자체가 전혀 다른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ᄀᄋᄒ 동감합니다. 저도 가족동반자살 뉴스 볼때마다 동정이 아니라 화가 납니다. 특히 어린 자식들까지 죽이는 것 말입니다. 각자의 몸엔 각자의 영혼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는 부모에게서 분리해 나온 이상 더이상 아이는 부모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개체라는 겁니다. 자신이 죽어 아이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던 그건 아이의 인생이고 아이가 감당할 몫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식들까지 저승에 끌고 가는 부모의 심리는 아이들의 앞날이 걱정되서라는 건 핑계고 실은 자식을 자신의 소유로 여겨 자식들의 인생까지도 자신이 통제하려는 욕망과 자신의 사후 자식들이 자기를 원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기제가 작용해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 같습니다. 무책임하게 스스로 죽을 생각 했으면 자식들의 원망도 감수해야지요. 더 화가 나는 건 언론과 대중들의 반응입니다. 명복을 빈다느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했으면.... 이런 동정여론이 자꾸 그런 현상을 부추키거나 자녀살인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짜 이건 자신의 죽음에 자녀들을 순장 시키는 겁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데려가는 겁니다. 대중도 그렇고 특히 언론에 화가 납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목조건물이 대다수라 어쩔수없습니다. 오래 남아있을 건물이 대다수 사찰인데.... 1차적으로 고려때 원나라 침공으로 한번 초토화 2차로 조선시대로 오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대다수 사찰이 방치되버렸고 그나마 남은건 3차로 남쪽은 임진왜란 북쪽은 청나라침공으로 또한번 박살나고 마무리로 육이오전쟁나면서 다박살난거...... 이정도로 털리면서 여지껏남아있는게 신기한겁니다.
그 의미 부여가 쫌 그렇다. 일단 당대에 삶을 살았던 신라인에게 명복을 빌어 두립니다! 경주 토박이 인데요, 축성을 하다가 불의의 죽음이 발생 했을 때,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곳에 안장 해 주었을 수도 있다꼬 봅니다. 순장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잖을 까요?
전문가의 해설을 전면 부인치는 않아요. 그러나 그쪽 빈달의 지개 작대기로서 어릴때 부터, 들은 바도 있고, 또 발굴 현장을 딜바다 본적도 있었어요.그때 당시는 발굴 시 테이프 디펜스도 치지 않코 기냥 파디비는 것이었어요. 한 예로 황남 대총에는 놀이터가 되어 딩굴며 놀았고, 왕릉이니까 천하의 명당은 따논 명당일끼고 릉의 상부나 이곳저곳에 , 기층 서민들이 죽게되면 인근 마을이나 먼곳에서도 시신을 가마니에 말아서 짊어지고 와 서 몰래 어둠속에서 무엄하게도 왕릉의 이곳 저곳에 파묻어 놓고 가버렸어요! 아마도 언젠가 자기들 가문에 왕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 탄생을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이건 지게작대기의 티미한 유추 판단입니다. 태양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달빛에 물들면 전설이 된다 아입니까? 거기에 倭人이 말라꼬 나옵니까? 이해 통찰 하소!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불교수용이 늦었던 나라였는데, 당시 민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토착신앙과 불교를 섞은 형태로 퍼트릴수 있었다고 어디서 읽었어요. 불교 신자가 된 사람들이 인신공양을 했다고 믿긴 어려우니 그 전의 토착신앙으로 인해서 인신공양을 할수 있었던 걸까요? 문학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개념으로 살피면 고대가 아닌 중세에도 인신공양이 있었을 것 같긴 해요. 심청전이나 전설의 고향에서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을 보면요. 유교국가에서 그런 미신을 섬겨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게 불가능할 것 같긴하지만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낙후된 곳에서는 그런 집단적인 범죄행위가 있었을 까요? 이런 걸 보면, 석가나 공자가 당시엔 있을 수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공자는 순장 풍습을 없앤 분이셨죠.
@@블레스유-y4r 그건 그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일겁니다. 사람고기가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저도 본적이 있는데, 말이 안됩니다. 사람을 묻을 때 사람모양의 인형을 넣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고 비난을 했던 게 공자였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라서 전쟁으로 농사도 짓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은 하찮게 되어 죽어가고 살기 위해선 죽은 사람의 살을 먹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이 불행하고 안타깝게 그려지는데 공자의 헛소문에서만 사람고기가 기호식품처럼 그려지는 것도, 사람고기가 없으면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먹을게 없어서 인육을 먹을만큼 가난했던 때입니다. 중국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사람고기가 인기가 있어 고급상품으로 생산되어 조달되던 때가 있긴 할까요? 제가 기억하는 이야기 중에도 안회라는 제자가 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하루는 약간의 쌀로 밥을 지었는데 밥을 푸다 땅에 떨어져 밥덩어리 중 흙이 묻은 것은 덜어내서 안회가 먹고 흙이 묻지 않은 것은 공자와 다른 제자에게 주었습니다. 부엌에서 몰래 밥을 먹고 있던 안회를 본 공자가 혼자만 무언가를 먹는 걸 꾸짖었는데 사정을 말하니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단 얘기가 있습니다. 공자는 반찬투정을 할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뭐긴 뭐여, 인신공양이지 옛날에는 흔했음.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니 충격이지 황남대총 발굴시 순장만 10 여건이 넘는 걸로 밝혀졌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하면 그 당시 최고의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도 지원을 했는데, 봉분을 조금씩 벗겨네 토양을 방사선 조사로 알아보았는데 군데 군데 사람 성인의 인골에서 나오는 인 성분이 10여구 정도 나와서 인신공양으로 추정 천마총 내부에 가도 인신공양(순장)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널(관)안에 빌굴 당시 발견된 상태를 복원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한가운데에 시신이 누웠는 듯이 금관과 드리게 발쪽에는 금동신이 놓여 있는데, 머리 우측에 금 목걸이만 달랑 이건 순장자의 목을 쳐서 목걸이와 목만 넣었다는..... 물론 왕이 죽으면 노예가 순장되는게 아니라 가징 최 측근이 관속으로 들어갔으니, 최측근이 좋은 것은 없었을 듯
희생자들은 아니라 천명합니다. 함께 발굴된 토기 머리 위 정확한 위치. 인골에서 발견된 곡옥.. 지배계층이란 뜻. 그 주위 구릉지 위쪽으로 수십구의 인골이 이전에 발굴.. 전형적인 가야식 무덤형태(대성동고분군)입니다. 부장품인 토기도 전형적인 가야식 토기. 경북대 식민사학자가 함께 발굴된 동물머리뼈가 나왔다는 이유로 '인신공희'로 몰아가려는 수작이죠.. (말머리뼈는 북방식. 전쟁전에 치르는 주술적 의미)성곽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무덤인데.. 이 시기를 따지면 4세기 이전의 무덤.. 신라 연대기에 4세기 이전은 나라로 보지 않는 식민사학자들.. 그들의 역사는 4세기 이후로 기록합니다. 그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면 모두 숨기죠.. 경주박물관 가보시면 4세기 이전 유물 없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조차 부정하는 식민사학자들의 억지와 역사왜곡 현장.
서기 935년 신라가 멸망하고 난 후 1975년 경주 월성을 발굴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신라의 월성은 토성이라고 한다. 잘 아시는 봐와 같이 신라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통일이 된 해는 서기 668년이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다.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옛 날에는 뭣 때문에 성을 쌓아 면서 사람을 매장 할까? 참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신공양은 유럽이나 남미를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나오는 현상이긴 합니다 중국은 명나라때까지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을 묻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이거말고도 폐우물에서 인신공양된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뼈가 발견되기도 했고 , 초중기까지 순장을 했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에밀레종 전설은 그냥 단순히 전설이긴 했지만 인신공양 이야기가 나오는걸봐서 나중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어느정도 있던 사회풍조라고 봅니다
고려 때에도 왕의 직계 가족들이 집을 지을 때 기둥이 무너지지 말라고 생사람 잡아 그 자리에 묻어서,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는 기록이 있지요.
흉노족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신라 왕족들
신라유물출토된 사실관해 동시대 존재한 나라가 아닌 명나라 관습이 왜 나와 ㅋㅋ 소설쓰세요? 고려나 조선창건 당시면 모를까
@@successmen007 중국은 그 이전 시기를 포함해서 명나라때 까지도 인신공양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신리시대 때도 중국에서는 인신공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successmen007 명나라때까지 라고 적어놨잖아 눈깔없냐? ㅋㅋㅋㅋ
저자리에서 계속 나오고 있는걸로봐서 축성의 입구이자 시작점이지않을까유?
인신공희의 흔적은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니 의외로 인류문명과 같이한 인습일수도 있겠지요
오 좋은 접근이네요~! 항상 다양한 관점에서 깊은 지식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ㄷㄷㄷ4ㄷㄷㄷㄷㄷㄷㄷ 사적돌님이 여기에
백제 성왕도 죽인 다음 목을 북청 대청 아래에 묻었다고 하죠. 중국에서도 인신공양하면서 건물을 만들던 풍습이 있기는 했는데 신라는 조금 더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던 듯 합니다.
고대 한반도에서도 인신공양의 증거가 있었군요. 매우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이네요.
이집트랑맞먹는오천년사
ㄷㄷㄷ
근디 그오천년사가 오천년내내노예사임.ㅋ
@@은가누-z8n 어쩌라고 노예섉기야 지금도 하루살이 노예로 살지?ㅋ
@@은가누-z8n지금도 신분 상승을 못하고 노예로 처사니까 모든게 다 노예사로 보이지 한심한 련아ㅠ ㅋ
@@은가누-z8n인신공양은 동이족의 나라인 상나라때부터도 있었음. 그런데, 말투가 중국인같은데 중국인은 유튜브 쓰지 말고 웨이보에서 놀기 바람.
@@은가누-z8n 뭔노예? 지금도 일본과 미국의 노예란 말인가? 뉴라이트 사고로 정답인양 말하고 있네요
인골,부장물,성벽연대측정등 과학적 증명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반월성에 많이 놀러갔었는데 반월성 일부는 밭이었습니다 농사로 많이 망가졌고 그전에는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에는 집들도 있었고
나무나 잡목들도 자라서 그냥 숲이었을것 같습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몽골군들이 들어와서 고려의 주요 도시였던 경주를 완전히 파괴 하였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이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강화도로 숨어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왕은 최우의 권력을 위한 허수아비 인질일뿐이고 .. 침입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은것들 조차 임진왜란때 또한번 대규모 파괴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후에 지은 민가나 밭 또는 숲으로 변해 버렸지요
유물 탐사는 아직도 진행중~~
수없이 많은 유물들이 이미 발견됐기에 이제 더 발굴될게 있을까? 싶어도 우리 조상님들은 끝없이 그 시대 이야기를 유물로써 남겨주시네요
역사 고증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또 보람도 큰 학문인걸 다시 느낍니다
맞습니다! 역사는 지금도 끝없이 계속 되고 있기에 항상 갈고 닦아야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새롭게 배우고 익힙니다 ^^
유익한 시간이 되셨길 바랍니다^ㅇ^🙌
순장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충격 받을 일이 있나….? 인신공양이야 고대사에 워낙 흔한 일이라….
그렇죠, 심청이도 인신공양으로 인당수에 바쳐진 것 아닌가...
인간의 마음 속에 인신공양은 그 뿌리가 깊습니다.
우리의 고대역사에 대해 한번더 생각해볼수 있는 좋은 영상이네요. 앞으로 계속 팔로업하겠습니다. 응원할게요.
제가 어릴때만 해도 반월성에 많이 놀러갔었는데 반월성 일부는 밭이었습니다 농사로 많이 망가졌고 그전에는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에는 집들도 있었고
나무나 잡목들도 자라서 그냥 숲이었을것 같습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몽골군들이 들어와서 고려의 주요 도시였던 경주를 완전히 파괴 하였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이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강화도로 숨어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왕은 최우의 권력을 위한 허수아비 인질일뿐이고 .. 침입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은것들 조차 임진왜란때 또한번 대규모 파괴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후에 지은 민가나 밭 또는 숲으로 변해 버렸지요
새로운 정보 잘봤습니다
감사 합니다
영상 시청 감사합니다😀
인신공양도 하고 바로앞에 과학적인 첨성대도 세우고 어마어마한 황룡사지 목탑도 만들고 그 시대로서는 진짜 할거 다하면서 세운 신라...!
정말 설마했는데 요즘 계속 밝혀지는것보니 사고방식이 그시대는 그랬다고.....그러면 애밀레 종도 과연 어린아이 인골을 사용했을까??? 안타깝고 슬픈 역사아닌 전설까지도 상상한다...
우리 선조님의 지혜는 아주 대단하죠~~🤩
성덕대왕 신종은 당시 역사스페셜 제작진과 문화재청에서 성분 분석을 진행했던걸로 알고있습니다 분석 결과를 보면 인골이 들어간건 아닌걸로 나왔던게 기억이 납니다
식민사학자가 민족사를 말살하기 위해 만든 계략.
조선인을 부끄럽게 만들어 그들의 민족사를 스스로 파괴하여 제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함
에밀레종ㆍ 고려장
일본 문화를 조선 식민지 지배하면서 덮어 씌우기 한거라던데ᆢ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것도 일종의 인신공희.
인식의 뿌리가 아주 길고 질긴 것 같아요...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이해못할부분이 적지않네요.
지금으로서는 그렇죠..하지만 저 시대 ㅏㅏ ㅏㅏㅏㅏ 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많이 달랐다는걸 알수 있죠..사람들의 사고 방식에서부터 ..말이죠.
시대가 다를뿐
삽교천방조제 건설때도 이런 비슷한 소문이 있었죠.
시대에따라 믿음과 사고가 다른건데.. 현재의 사고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않되는거지요...
원하는것을 얻기위해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행위죠. 신께 값진 무언가를 바쳐 자신들의 안위를 바라는 의식행위 입니다
역사는 누가 우월하다 말할수없다. 우리의 역사도 아픈 부분이 많고, 인류사에 보면 똑같다.
역사는 한 시대가 살아온 기록이라고 볼 수 있죠 :)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저희의 일이구요~😉
좀 배운 사람이 하는 말이네요. 배웠는데 영악한 사람은 지배논리로 이용해먹고 못배워 무식한것들은 선동질에 놀아나는 숙주역활 자처하는 개돼지들
몇해전 뒷산 고려때 건축물 시굴 발굴 중
1차 조선후기 근대 매장 묘지 개장
2차 조선중기 고려초 묘지 시굴 발굴
3차 고려대 건물터 약 천여평
축조물 멸실 폐허 세월지나 풍화 토사 퇴적층
이후 묘지화 담장 구들장 기와장 파나고 매장
묘지 위에 묘지 1천년이면 묘지 3단가능.
1:00 경주 월성 설명
4:10 인신제사 순장
신라 지증왕때 순장풍습을 폐지했으니 적어도 유골이 순장된 시기는 서기 500년 이전이 되겠군요
순장이랑은 다른 경우인데.
영상에서 교수와 연구자들이 지금까지 발견되던 순장과는 다른 목적성을 가진 인신공희의 증거라고 말하는데 뭔말 입니까?
만리장성도 축조공사 하다 죽은 노동자 시체를 성벽에 같이 묻었다고 하던데...
인신공양이 아니라 건설중에 돌아가신분 제사지낸건 아닐까요?
저도 그 말 하려고… 노동력 하나가 중요한데 왜 죽여요. 그 당시 영양상태, 의료수준, 기술수준을 봤을 때 성벽 축조 과정에서 사망자가 계속 나왔겠죠.
감사합니다
지영이...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jonberlinch9798 넌 누구냐?ㅎㅎ
@@박지영-k5f7m 어허~
@@jonberlinch9798 어허~ 언능 불어라 ㅎㅎ
어찌 보면 토속적인 신앙과 믿음의 행위 같지만 실상은 타인을 희생 시킴으로서 자신들의 미래와 안녕을 도모한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지키고자 타인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드라마지만 왜, 오수재인가를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법을 넘어선 짓을 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모르는 파렴치한 일들이 쉬임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반월성에 많이 놀러갔었는데 반월성 일부는 밭이었습니다 농사로 많이 망가졌고 그전에는 조선시대에나 고려시대에는 집들도 있었고
나무나 잡목들도 자라서 그냥 숲이었을것 같습니다 신라의 유물들이 몽골군들이 들어와서 고려의 주요 도시였던 경주를 완전히 파괴 하였습니다 당시 무신
정권이었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강화도로 숨어들어가 나오지도 않았고 왕은 최우의 권력을 위한 허수아비 인질일뿐이고 .. 침입으로 불타고 파괴되어 많이
사라졌고 남은것들 조차 임진왜란때 또한번 대규모 파괴가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고 그후에 지은 민가나 밭 또는 숲으로 변해 버렸지요
인신제사는 전세계 고대사회에 다 있었음..심지어 중국 명.청대에도 있었음
우리가 알게모르게 지금도 있을 수 있고..
소름이네 .~
뼈가 그대로 남아있다니 놀랍다
두개골을 그대로 해서 얼굴복원했으면 좋겠네
옛말에 댐이나 둑을 막을때
사람을 그곳에 묻으면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다고
전래되는 말이 있는데 그와 관련된것 아닌지 !!!!
인신 공양이라고 추측할 뿐 정확한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단정지어서는 안될것 같다. 역사라는 것은 추측이 아니라 정확한 기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신라 에밀레종 만들때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았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래서 종소리에서 엄마를 찾는 아이의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고 불렸다.
참 끔찍하고 충격적이지 않을수 없다
고대 사람들은 왜그렇게 사람들을 제물로 삼았는지 그 무지함이 충격적이다.
그건 거짓이라고 밝혀진지가 언제인데 당신의 무지함처럼 예전 사람들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일들이죠
무지함은 현대라고 없을까요?
그 시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그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그 시대를 당대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또 현대의 기준에서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다르니까요.
아프리카 초원의 숫사자가 싸움에서 이긴 후
이전 숫사자의 새끼들을 잔인하게 물어죽이는 것
하이에나나 리카온이 사냥감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내장을 뜯어먹는 잔인한 습성...
인간 기준으로 시비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겁니다.
고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람을 제물로 삼았는지...를 따지기 앞서
고대 사람들은 현대인만큼의 과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해석하는 자체가 전혀 다른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잔혹함을 알려 대한민국 역사를 왜곡, 훼손하려 드는 식민사학자들과 그 추종자. 선동꾼들..
반민특위 부활해서 모두 처벌해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ᄀᄋᄒ 동감합니다.
저도 가족동반자살 뉴스 볼때마다 동정이 아니라 화가 납니다.
특히 어린 자식들까지 죽이는 것 말입니다.
각자의 몸엔 각자의 영혼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는 부모에게서 분리해 나온 이상
더이상 아이는 부모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개체라는 겁니다.
자신이 죽어 아이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던 그건 아이의 인생이고 아이가 감당할 몫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식들까지 저승에 끌고 가는 부모의 심리는
아이들의 앞날이 걱정되서라는 건 핑계고
실은 자식을 자신의 소유로 여겨 자식들의 인생까지도 자신이 통제하려는 욕망과
자신의 사후 자식들이 자기를 원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기제가 작용해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 같습니다.
무책임하게 스스로 죽을 생각 했으면 자식들의 원망도 감수해야지요.
더 화가 나는 건 언론과 대중들의 반응입니다.
명복을 빈다느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늘나라에서는 행복했으면....
이런 동정여론이 자꾸 그런 현상을 부추키거나 자녀살인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진짜 이건 자신의 죽음에 자녀들을 순장 시키는 겁니다.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데려가는 겁니다.
대중도 그렇고 특히 언론에 화가 납니다.
무지한게아니고 그시대의 논리는 지금의잣대로봐선 이해가 안됩니다
그시대는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 삶에대한 사고가 전혀달랐지요
내용은 흥미로운데 편집이 아쉬워요 크게는 나레이션, 자막이 너무 딱딱합니다. 딱 박물관에서 나오는 동영상 느낌?
그리고 순장아닙니다. 순장은 무덤에, 인신공희는 건축물에 하는경우의 명칭입니다.
인신공희? 수장자에게 발견되는 곡옥.. 최고지배층만 가질 수 있는 유물.
대성동고분군에서 나온 유물과 동일한데.. 인신공희? 기가차다..
가야식 토기와 곡옥.. 전형적인 가야 유적.
신라가 이주해 오기 이전의 가야무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sunnyan151 금관 금대 칼 동경 등은 없고 곡옥만 나왔다는건 더더욱 인신공양임이 분명해지는거다.
편집 진짜 잘 했음 짝짝짝👏
근데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 등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이집트나 그리스는 훨씬 더 오래전 시대인데도 신전같은 건물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많던데
일단 기본적으로 목조건물이 대다수라 어쩔수없습니다. 오래 남아있을 건물이 대다수 사찰인데.... 1차적으로 고려때 원나라 침공으로 한번 초토화 2차로 조선시대로 오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대다수 사찰이 방치되버렸고
그나마 남은건 3차로 남쪽은 임진왜란 북쪽은 청나라침공으로 또한번 박살나고 마무리로 육이오전쟁나면서 다박살난거...... 이정도로 털리면서 여지껏남아있는게 신기한겁니다.
목조건물인것도 중요한이유이겠죠.돌로하면 보관이좀되었을텐데
중국땅에 있죠 ㅋ 아무리 전쟁으로 성이 불타 없어 져도 성터 축조물 흔적은 있어야 되는데 없는 이유는 삼국은 중국 동부에 있었어요 더 찾아보시면 아실꺼예여
바보야.
신라가 3국 통일 했다는 단순한 진리를 모르냐?
통일국이 적국의 역사적 흔적을 남기냐?
에라이 바보천치..
@@jonberlinch9798 표현이 좀 공격적이긴한데, 저 의식을 정말 중요하게 여겼다면 신라인들이 파해쳐서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있긴할듯. 고구려와 백제의 저런 인신공양한 유골들을 없애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생각할수도 있으니..
0:46 머리 옆에 토기를 보라.
적봉시 홍산문화박물관 사진전 142장 - 북경반점
(영상속 3:25 사진의 토기)
그 의미 부여가 쫌 그렇다. 일단 당대에 삶을 살았던 신라인에게 명복을 빌어 두립니다!
경주 토박이 인데요, 축성을 하다가 불의의 죽음이 발생 했을 때, 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곳에 안장 해 주었을 수도 있다꼬 봅니다. 순장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잖을 까요?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전문가의 해설을 전면 부인치는 않아요. 그러나 그쪽 빈달의 지개 작대기로서 어릴때 부터, 들은 바도 있고, 또 발굴 현장을 딜바다 본적도 있었어요.그때 당시는 발굴 시 테이프 디펜스도 치지 않코 기냥 파디비는 것이었어요. 한 예로 황남 대총에는 놀이터가 되어 딩굴며 놀았고, 왕릉이니까 천하의 명당은 따논 명당일끼고 릉의 상부나 이곳저곳에 , 기층 서민들이 죽게되면 인근 마을이나 먼곳에서도 시신을 가마니에 말아서 짊어지고 와 서 몰래 어둠속에서 무엄하게도 왕릉의 이곳 저곳에 파묻어 놓고 가버렸어요! 아마도 언젠가 자기들 가문에 왕의 위상을 가진 인물이 탄생을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이건 지게작대기의 티미한 유추 판단입니다.
태양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달빛에 물들면 전설이 된다 아입니까? 거기에 倭人이 말라꼬 나옵니까?
이해 통찰 하소!
@ᄀᄋᄒ 일본에가봐 그들 왕이 어디서 도래해 왔는지.
법치국가 신라에서 안장? 기록에도 없는 일.
가야토기와 곡옥이 발견.지배계층.
성곽 축성전의 가야식 무덤.
일제식민 사학에 물든 강단 사학자들 할말이 궁하니 별 미친 소리를 만들어서 떠들고 있네. 딱 봐도 공사하다 죽은 사람들 달래주려고 제사지낸 흔적이구만 그래야 열심히들 일하지.
천손강림사상의 나라였으니.. 하늘 태양 달 북극성을 섬기는 나라였으니.. 마야도 그렇고 신라도 그렇고 북방이주민 지배층이었으니 비슷한 모습이 나타날수밖에.. 가야도 마찬가지.
그러게요? 자연을 숭배하는 나라일수록 인신공양을 하는 특성이 있네요 뭐가 이유일까요 진짜 궁금해지네요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더 벌을 받을것 같음...
백제 고구려등 부여족도 신처럼 축성 때 인신공양을 했을까요? 신라는 흉노족이라고 해서
경주에 까마귀가 많은 이유는 시신이 많아서인가요?
백제 성왕과 좌평들의 인골이겠네. 신라가 성왕을 잡아 죽인 후에 그 목을 북청계단에 묻어서 신라인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했는데 인골출토 상황을 보니 성왕의 목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아예 잡아 끌고 와서 신라 왕궁 내에서 참수를 한 후에 계단에 파 묻어 버린듯.
아니면 건물 자체에 주술적인 힘을 넣으려는 수단이였을수도 있구요
매우 흥미롭네요
흥미로운 이야기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고대사의 역사는특히 지금의논리로 그시대를판단해선안된다 백제 고구려도인신공양있었고 그시대는 그시대의논리가있다 동서고금의 고대사가 인신공양은 다있었다 그시대는그시대의 논리로 판단해야된다
😢자기가평서에
키운던 동물 또.
좋아허던 허인들
순장헌데요 세상
혹시.갑곡.성지가.아닌.가요?제.생각은.갑곡.성지.갇은대요?
천년이상 지났는데 인골이 안썪고 나오는건가요? 놀라운데....
고조선 이야기해주세요 외국사람도 알수있게 영어 제목으로요.
고조선이랑 이거랑 뭔 상관? 고조선 유적이랑 유물은 대부분 중국이나 북한에 있어서 이 채널에서 딱히 할게 없음
@@TheJinNK 그냥 뭐 나중에 고조선 이야기'도' 영상으로 올려달라는게 아닐까
80년대에 이미 27구중에 20구가 발견됐다며..? 왜 2021년 추가 3구 발견한게 인신공양 결정적 단서얐나?
인신공양은 그시대의 자연스레 받아드린문화였을겁니다 바다를 건너가거나 전쟁,가뭄,전연병등등 하늘에 바친 의식같은거죠ㅜ ㅜ 현시대 사람들한테는 충격받을만해요
제목만 보고 순장인줄 알았네. 신라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죠. 가야도 마찬가지.
💝💝💖💖👍👍👍
미스테리네요.어찌이런일이있을까요..참.이해불가네요.
신라가 삼국 중 가장 불교수용이 늦었던 나라였는데, 당시 민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토착신앙과 불교를 섞은 형태로 퍼트릴수 있었다고 어디서 읽었어요. 불교 신자가 된 사람들이 인신공양을 했다고 믿긴 어려우니 그 전의 토착신앙으로 인해서 인신공양을 할수 있었던 걸까요?
문학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개념으로 살피면 고대가 아닌 중세에도 인신공양이 있었을 것 같긴 해요. 심청전이나 전설의 고향에서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을 보면요.
유교국가에서 그런 미신을 섬겨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게 불가능할 것 같긴하지만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낙후된 곳에서는 그런 집단적인 범죄행위가 있었을 까요?
이런 걸 보면, 석가나 공자가 당시엔 있을 수 없는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공자는 순장 풍습을 없앤 분이셨죠.
공자는 순장은 없앴는지모르지만 인고기가 상에오르지 않으면 밥을 먹지않았다고함 그리다 저일사랑하는 제자가 전쟁에서
죽어을때 그고기를 가저다줌으로 다시는 인고기를
안먹었다고합니다
@@블레스유-y4r 그건 그저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일겁니다. 사람고기가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저도 본적이 있는데, 말이 안됩니다. 사람을 묻을 때 사람모양의 인형을 넣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고 비난을 했던 게 공자였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라서 전쟁으로 농사도 짓지 못하고 사람의 목숨은 하찮게 되어 죽어가고 살기 위해선 죽은 사람의 살을 먹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이 불행하고 안타깝게 그려지는데 공자의 헛소문에서만 사람고기가 기호식품처럼 그려지는 것도, 사람고기가 없으면 입에 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먹을게 없어서 인육을 먹을만큼 가난했던 때입니다. 중국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사람고기가 인기가 있어 고급상품으로 생산되어 조달되던 때가 있긴 할까요?
제가 기억하는 이야기 중에도 안회라는 제자가 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하루는 약간의 쌀로 밥을 지었는데 밥을 푸다 땅에 떨어져 밥덩어리 중 흙이 묻은 것은 덜어내서 안회가 먹고 흙이 묻지 않은 것은 공자와 다른 제자에게 주었습니다. 부엌에서 몰래 밥을 먹고 있던 안회를 본 공자가 혼자만 무언가를 먹는 걸 꾸짖었는데 사정을 말하니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단 얘기가 있습니다.
공자는 반찬투정을 할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재물로 쓰는 사회문화는 지속가능한 올바른 사회 규범이 없는 집단이였다
같은 공간 다른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500년전 왕정시대와 21세기 민주화 시대는 많이 다를것입니다.
Hi thank you for this new video. There are so many mysteries in the humans history.
뭐가 인류역사의 미스테리고?
지구상에서 지역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인신공양은 인습처럼 나타났는게 증명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인식을 갖게된걸까? 끔찍하다
연대 측정을 하면 진실에 가깝게 나오겠네요.
불국사에서 십자가도 나왔다는데요,뭘.
귀고리 옥은 구멍을 어떻게 뚫었을까?
흥미로운 영상~~ 재밌네요! ㅎㅎ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간에 나온 아즈텍은 뭐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다지만 고대가 아니라 중세 국가였으니 ㅋㅋ
신라를 어떻게 봐야 중세국가인가요?;;
@@jhi3384 하.... 중간에 옛 고대국가의 예시로 아즈텍의 그림이 나왔잖아.. 아즈텍은 16세기 멸망한 나라고.. 그거 말한거임
삼국시대 의 일인데 ... 오랜세월 지나면 뼈도 녹는다고 하던데..인골자체가 남아있는게 아이러니.....~
뻘이 되어서 유골이 자연 보존처리. 무덤 이후에 축성된 성곽.. 성곽 주위 해자가 조성됨에 따라 ..
그렇습니까...
그럼 공룡 화석은 대체...
나레이션 하는 분의 감정이입이 지나칩니다. 그리고 연구하시는 분들이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해야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인신공희에 몰입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요? 신중한 연구자세가 필요합니다.
👍👍👍👍👍👍
초승달과 금성!!
심청전 인당수가 바이칼이지 않을까 그쪽에 코리족이 있었다하니 재물바치는 것도 풍습이었지 않을까
그게 우리 조상의 풍습이었다는게 충격이지
심청전은 깨달음을 이야기한 불교설화집에 있는 내용을 조선시대에 누군가 바꿔 써놓은 것. 인당수 연꽃 심봉사 ...
환빠질은 하지 맙시다...
그시대에는 그게 가치관이며 관습이며 믿음이었던 하나의 살아가는 사고였고 방법 이었던거지 현재의 사고로 이해하고 달리 해석하면 않되지요...
인신제사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는 다 있었군요 지금도 몰래 어린아이들 바치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지도
인주(人柱) : 집이나 성곽과 같은 건축물을 지을때 그 건축물 밑에 인골을 묻어두면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는 다고 믿고 건축물 기반부에 사람을 죽여 묻거나 생매장하는 인신공양 행위. 동서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있었음.
그럼 그당시 기록물같은것은?
인류가 테어나서 쓰던어어를 지금도 쓰는 민족 우리임 예전에 한곳에 살던 우리였음 그러니 역사가 깊은것임
매금TV
우주선이 화성을 가는 현 시대 에도 천공 인지 머시기 인지 그 무당이 소를 산채로 껍질 벋겨 재사 지내는데
2000년 전의 의식이 무슨 화재 거리가 될런지 ...
5년안에 천공은 또 뭔짓을 벌일지
헐 우리조상분이 경주월성을 관할한적이 있다던데 혹시 관련있으려나 ㅜㅡㅜ 이런거랑 연관 없겠지
뭐긴 뭐여, 인신공양이지
옛날에는 흔했음. 지금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니 충격이지
황남대총 발굴시 순장만 10 여건이 넘는 걸로 밝혀졌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하면 그 당시 최고의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도 지원을 했는데, 봉분을 조금씩 벗겨네 토양을 방사선 조사로 알아보았는데 군데 군데 사람 성인의 인골에서 나오는 인 성분이 10여구 정도 나와서 인신공양으로 추정
천마총 내부에 가도 인신공양(순장)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널(관)안에 빌굴 당시 발견된 상태를 복원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한가운데에 시신이 누웠는 듯이 금관과 드리게 발쪽에는 금동신이 놓여 있는데, 머리 우측에 금 목걸이만 달랑
이건 순장자의 목을 쳐서 목걸이와 목만 넣었다는.....
물론 왕이 죽으면 노예가 순장되는게 아니라 가징 최 측근이 관속으로 들어갔으니, 최측근이 좋은 것은 없었을 듯
😮❤
💕(●'◡'●)
아마도 나라를 지키다가 죽었거나....훈련중 죽은 군인이거나....순국한 혼들이 성을
지켜 준다는?
감동적인 관점이네요🧐
심청이 ㅡ😂
인신공양
난 또
뭔가했네...
더 대단한 유골이 발견 될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신라김씨 왕족들이 스키타이
후손이라고 말하길래
그 인골의 골상이 백인처럼
생긴 골상인지 확인해보는 건가? 하고 보러왔더니만... 실망이다... 그런 건 결코 아니었구나...
신라 김씨 왕족만 스키타이 서흉노족이였음 ㅋㅋㅋ
그냥 무덤 위에 성벽이 지어진거면?
일본이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지으면 무너지지않는다 했는데
그게 다 건너건너 간거구나
지금 삼풍백화점 자리에 지어진 아파트도 그렇고
용산도 공동묘지였다지요
일본 오사카성 축성 할때도 인심공양 하던데…. 일본은 성을 하도 많이 지어서 이신공양 헌상했음.
4:40 상나라는 중공이 아니예요. 수정 요청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전쟁의 희생자들 같네요
죽어서라도 성벽을 지켜달라고 따로 묘를 안 쓰고 같이 성벽에 묻은걸로 보입니다
전쟁에 의해 파손된 부위를 복구하는데 전쟁의 희생자들을 먼저 묻고 복구를 한 것 같네요
희생자들은 아니라 천명합니다.
함께 발굴된 토기 머리 위 정확한 위치.
인골에서 발견된 곡옥.. 지배계층이란 뜻.
그 주위 구릉지 위쪽으로 수십구의 인골이 이전에 발굴.. 전형적인 가야식 무덤형태(대성동고분군)입니다.
부장품인 토기도 전형적인 가야식 토기.
경북대 식민사학자가 함께 발굴된 동물머리뼈가 나왔다는 이유로 '인신공희'로 몰아가려는 수작이죠..
(말머리뼈는 북방식. 전쟁전에 치르는 주술적 의미)성곽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무덤인데.. 이 시기를 따지면 4세기 이전의 무덤..
신라 연대기에 4세기 이전은 나라로 보지 않는 식민사학자들.. 그들의 역사는 4세기 이후로 기록합니다. 그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면 모두 숨기죠..
경주박물관 가보시면 4세기 이전 유물 없습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조차 부정하는 식민사학자들의 억지와 역사왜곡 현장.
그렇게 믿고 싶네요
0:47 이강인 등장
에밀레종에바쳐진 아기의전설도 꼭 전설로만치부하긴 어려울 듯
와ㅡ 근데 어떤 사람들이 제물로 쓰였노? 전쟁포로? 어짜피 처형당할 중죄인? 노비?
여튼 제물로 쓰이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절망감과 살고 싶어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면...에고 참
제 피셜이지만 제물은 포로 노비같은사람 아닐꺼같아요. 성스러운 의식같은거니까ㅠ 저 시대의 사람들 의식으로.. 성스러운사람? 썻을꺼같아요
소설속에서도 많이 나오는거처럼 용왕한테 바치는 처녀를 마을에서 제일 이쁜 처녀 제물로 바치는거처럼ㄷㄷㄷ
광개토왕 비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글자조차 해석 난망한 사학계의 우둔함을 믿을수 있는가
국가형성기라 얘기하는 저 학예사 수준보소 월성 축조가 언젠데 국가형성기라 말하나
인주설화는 히토바시라라는 일본설화예요 ㅋ
한국에는 그런 설화는 없어요 ㅋ
ㅇ ㅑ~~또 산재났다...퍼뜩묻어라!!
순장을 금지 시킨 게 지증왕때부터였나?? 6세기초기였을거고. 여튼 월성은 그 전에 축조되었을테니 저건 뭐... 그 당시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음.
월성은 신라의 2개수도중 1개인 동경이라고 기록에 있죠!
인신공양~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
내가 경주근무할때 이야기 남산이나 유적지에 묻어면 좋다고 옛날에 많이 묻었다는데 탄소 검사하시겠지만 **
묘지위에 대장동 아파트 지었구먼 뭐 . . .
27명 인간제물.......무섭네
경주 귀족들 27명을 묻은건가?
신라는 불교라서 남산의 낭산에서 화장 이 전통인데 과연 신라라고 믿을수있을까요?
분명한 살인자들에게 역사적 운운 그냥천인공로할뿐 뭔가치 완전범죄행위일뿐!
서기 935년 신라가 멸망하고 난 후 1975년 경주 월성을 발굴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신라의 월성은 토성이라고 한다. 잘 아시는 봐와 같이 신라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통일이 된 해는 서기 668년이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다.
신라가 성을 쌓았다는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옛 날에는 뭣 때문에 성을 쌓아 면서 사람을 매장 할까? 참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골이 의미하는 바는 모르겠으나 조선시대에도 인신제사 인당수에 처녀바치고 무슨 뱀굴에 처녀바치고 근대에는 징용도 가고 식모로도 가고 미래에 보면 현재도 인신제사라 일컬어지는 게 많을 겁니다...
생 매장으로 죽음 잔인한 시대다
신라애들은 백제성왕 포로로잡아서 목잘라죽이고 신라 왕족 귀족들다니는 계단에 묻어놨지 신라애들은 여기저기에 사람시체묻는거 취미다
신라는 성문화 부터 엽기적이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