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조광조의 화려한 등장 [역주행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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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4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27

  • @식당장사재밌나요
    @식당장사재밌나요 2 года назад +5

    어려운 역사를 만화스러운 인물로 표현해주시는 게 더 편하게 볼 수 있는 거 같아요~~

  • @오르희
    @오르희 2 года назад +9

    정말 설명 잘해주셔서 좋아용

  • @김태수-d2u
    @김태수-d2u 2 года назад +5

    잼나게 보고 갑니다

  • @ASCAIND
    @ASCAIND 2 года назад +22

    *조광조가 쏘아올린 무지막지하게 큰 공*

    • @samgukjilover
      @samgukjilover 2 года назад

      @@afta-u8g 그리고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는….사망하게 되죠….ㅎ

  • @아델바르트슐츠
    @아델바르트슐츠 2 года назад +5

    빨리 다음 편이 보고싶네요 ㅋㅋ

  • @Twoyell11._.
    @Twoyell11._. 2 года назад +4

    7월이군요!무더운더위에영상을만드시는
    역주행조선왕조실록님 홧팅!

  • @식당장사재밌나요
    @식당장사재밌나요 2 года назад +2

    너무 재밌어요~~

  • @강태윤-j4u
    @강태윤-j4u 2 года назад +8

    제가 지난 영상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조광조의 등장은 화려함 그 자체였네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사림의 수장격이 되어 버린 조광조는 그 당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 동원하여 조선을 개혁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은 매우 순수했을 것입니다. 이번 영상도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 @jin-i9g3x
    @jin-i9g3x 2 года назад +5

    조선의 토머스 페인 조광조.. 그런데 매우 급진 과격파 and 원리원칙 주의자. 영상 감사합니다.

  • @samgukjilover
    @samgukjilover 2 года назад +1

    5:43 이때 폐비를 복권시키고자 하려는 노력이 주변에서 있었고 장경왕후가 훗날 인종이 되는 왕자를 낳고 죽음으로써 단경왕후 신씨에게 궁궐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생겼으나 정작 중종은 후계자 문제로 태클 걸면서 부정합니다 그래서 단경왕후 신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지 못한 채 친정에서 사람들에게 감시당하는 일생을 보내다가 왕비 자리서 폐출된 지 약 30년 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 @겸둥이빈이
    @겸둥이빈이 2 года назад +1

    케릭터들 너무귀여워요

  • @sh-nz8sr
    @sh-nz8sr 2 года назад +4

    👏👍

  • @초리-s4y
    @초리-s4y 2 года назад

    조광조는 원리원칙으로 대의명분을 잡았네요! 문제는 너무 원리원칙 주의자였죠!

  • @식당장사재밌나요
    @식당장사재밌나요 2 года назад +1

    그냥 딱 !!!

  • @ht30
    @ht30 2 года назад +4

    토사구팽..
    조광조도 결국엔 중종의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음.

  • @1_2_3_a
    @1_2_3_a 2 года назад +2

    폭주대마왕 조광조

  • @정재웅-b8u
    @정재웅-b8u 2 года назад +3

    갑자사화 배경
    대다수 사람들은 이 사건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된 연산군이 폭주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알고있으며 이거는 왕과 비 같은 유명 사극의 영향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미 재위 초반부터 폐비 윤씨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고 있었으며 이거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연산군이 일단 아들로서 어머니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약간 누르기는 했지만 훈구파 대신들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고 성종과 다르게 강력한 왕권을 추구해왔던 연산군으로서는 대간들이 약해져 이제 쓸모가 사라진 훈구대신들을 슬슬 토사구팽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무오사화를 통해 '아니 되옵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대간들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연산군이 독선적인 행보로 일관하며 사치와 방탕 등을 일삼자 처음에는 연산군과 함께 대간들을 손봐주는 일에 동참했던 훈구 대신들이 '이건 좀 심한데'라며(갑자사화 이후만큼은 아니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은 점점 씀씀이가 많아졌습니다 대간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에 연산군이 폐비 윤씨가 쫓겨나고 사사된 일을 명분으로 삼아 나머지 대간들과 훈구대신들을 모두 숙청해버린 일이 바로 이 갑자사화라는 분석도 존재합니다
    일단 연산군이 자기의 친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갑자사화 한참전인 즉위 직후입니다 연산군은 명나라에 보내기 위해 아버지 성종의 행장을 짓다가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의 기록을 보고 "여기에 판봉상시사 윤기견이란 자가 누구냐?혹시 영돈녕 윤호의 이름을 잘못 쓴게 아니냐?"라고 물었는데 신하들이 "그사람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하자 연산군은 자세한 정황을 보고받게 됐고 실록에서는 그날 연산군이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군주의 건강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왕조사회에서 왕이 밥을 안 먹었다는건 절대 가벼운 일이라 할수 없습니다 현대에도 대통령의 건강은 국가기밀로 취급될만큼 중요한데 그것보다도 넘사벽급으로 중요한 왕조사회의 국왕이 끼니를 굶는다는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들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듣게된 연산군 입장에서도 밥이 입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자기 어머니가 어쩌다 죽게 됐는지 알게 된 연산군은 일단 몇 년간은 폐비 윤씨와 관련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고[5] 묘지 이장이나 제사등 친아들이 할 만한 몇 가지 조치들만 취하고 반대자도 크게 책망하지 않고 설득하는 등 복수극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다만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시켜 폐비 윤씨의 묘 복구를 하게 하는 등 몇몇 조짐을 드러내긴 했다.
    피묻은 적삼 야사
    연산군일기에서 갑자사화의 배경으로 지목하고 있는것은 피묻은 적삼입니다 보통 연산군이 등장하는 사극을 보면 연산군이 임사홍이 모셔온 자기의 외할머니 신씨를 통해 받은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으로 그려집니다 이것은 월탄 박종화의 장편 역사소설 에 등장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현재까지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중매체에서 그리는 연산군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형성된 겁니다
    사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민간에 떠돌던 야사입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연려실기술에서 기묘록을 인용한 내용으로 더 자세히 서술하면 '폐비 윤씨가 사사되면서 흘린 피가 묻은 적삼을 자기의 어머니인 신씨에게 맡기면서 본인의 원통함을 알려달라고 했고 인수대비가 죽자 신씨는 궁궐 나인들을 통해서 폐비 윤씨의 죽음과 적삼을 알렸으며 자순대비를 친어머니로 알던 연산군은 슬퍼한후 시정기를 찾아서 대신들과 관련자를 죽였다'고 써져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실록과 모순된 기록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당장 폐비 윤씨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어난 갑자사화 때 인수대비는 살아있었고 실록에는 연산군이 즉위한지 몇달만에 폐비 윤씨의 일을 알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실제로 갑자사화 이전에도 폐비 윤씨의 제사나 무덤 이장을 여러번 시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난 기록이 없습니다 임사홍만 만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임사홍 접촉 자체가 신빙성이 부족한게 임사홍은 갑자사화때 이극균과 친분이 걸려서 죽을뻔한 사람입니다
    야사에 불과한 피묻은 적삼은 이렇듯 신뢰할순 없는 이야기지만 그 극적인 효과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설이 히트를 친데는 박종화의 역사 소설 《금삼의 피》에 등장한게 크게 작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묘사가 상당히 임팩트가 있는지 드라마 《장녹수》,《왕과 나》 등 현재까지 사극에서 써먹고 있어요 그 외에도 《왕의 남자》 등에서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실록이랑 맞지않는 점이 걸리기 때문에 '폐비 윤씨가 죽은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피 묻은 적삼과 함께 진상이 훨씬 더 끔찍했음을 알고 폭발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흐르는별빛
    @흐르는별빛 2 года назад +1

    연산군도 페위되서 얼마안되어 죽은걸로 봐서 독살했을 가능성 있읔.

  • @정재웅-b8u
    @정재웅-b8u 2 года назад +7

    중종이 조광조 숙청하지 않았으면 조선은 발전했을것

    • @dmldml4
      @dmldml4 2 года назад +4

      조광조를 안 내쳤으면 공신, 무신들이 또 반정 일으켰을거임. 무신들이 움직이는거 파악하고 중종이 먼저 손절한것

    • @jokerbard1
      @jokerbard1 2 года назад +5

      훗날 정조가 홍국영을 신임하여 전권을 줘서 마지막 개혁을 했지만 정조 사후 홍국영은 세도정치의 포문을 열어 조선을 망국의 길로 가게끔 했죠. 조선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 어느 곳에서도 개혁가가 전권을 가지게 되면 그 끝은 자신과 국가의 몰락을 부르는 길로 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조광조 역시 비운의 개혁가가 되어 칭송받는 거지 만일 끝모르게 성공했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에요

    • @dmldml4
      @dmldml4 2 года назад +4

      @@jokerbard1 홍국영, 신돈, 조광조. 참 많이 겹쳐보이죠. 중국으로 가도 상앙, 조조(전한), 왕안석 등등... 개혁가만큼 시대에 따라 달리 보이는 인물들도 없습니다.

    • @정재웅-b8u
      @정재웅-b8u 2 года назад +5

      @@jokerbard1 그래서 정조가 홍국영을 숙청했죠

  • @쌍칼-c7y
    @쌍칼-c7y 2 года назад +6

    중종도 알고 보면 대단한 성군이지만
    조광조는 휼룡한 신하로 남을 뜻 👍👍👍

  • @Dfg-j5w
    @Dfg-j5w 2 года назад +3

    2등ㄲ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