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으로 비용이나 제도상 과거시험은 양반 아닌 양인들은 볼 수 없던 시험임. 일단 과거시험 응시가 일단 보단자와 공직자 추천인이 있어야 함. 양반 가문 외에는 이미 시험도 보기 전에 탈락. 조선 후기에 오면 대리시험이 판을 치고 돈으로 과거를 합격했다고 함. 사관들이 짜고 일찍 시험지를 내는 사람을 부정합격 시키자 나중엔 눈치 챈 응시자들이 서둘러 답안지를 일찍 내는 일도 있었다고 함. 과거시험이 가문의 영광이던 시대도 있겠지만 저 누적 합격자 수는 부정과 부폐의 증거이기도 하고 조선 몰락에 책임이 있는 순서이기도 하고 일제 앞잡이 순서와 비슷하기도 함
@@wondong313 손인보님이 댓글에 적으신 현실문제 돈 시간이 가장 컸구요. 제도상으로도 문과는 양인이 보기 어려웠대요. 지금으로 치면 신원보증인 같은걸 받아야 하는데 이게 양반 끼리끼리라서 조선중기까지 해준 사례가 적다고 합니다. 문과에 비해 무과는 양인이 많이 붙었는데요. 이순신의 예를 보면 현직 군인들이 다수 있고 이순신처럼 청춘을 공부에만 매진한 케이스는 금수저에 속합니다. 양반들도 이순신처럼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급제하면 늦은게 아니라 평균 정도 되나 그래요. 시험도 자주 있는게 아니구요. 과거시험에 쓰는 종이도 비싸서 가난하면 양반도 그걸 미리 사서 연습하는게 부담이 컸다고 합니다.
추천 제도를 넣은거는 과거 응시 자격이 없는 노비나 서얼 등 과거 자격이 없는 자가 신분을 속이고 과거 응시하는걸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양반 가문이 아니더라도 양인임이 인정되면 추천받아 과거 보는데 문제는 없었습니다. 양반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상민에겐 추천장 안써줬을거다 운운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뇌피셜이고, 추천장의 의미는 과거 응시 자격이 있는 양인임을 보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제적 지원 받으며 어릴적부터 과거 공부한 사대부 자제들과 어릴적 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짬짬이 공부한 경우는 경쟁 자체가 어렵다는 겁니다. 더우기 과거 시험 문제들이 교과서나 달달 외워서 풀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라 시사, 수학, 과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건 역시 고위층과 교류가 활발한 양반 계층들로 국한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민들은 문과 보다는 비교적 허들이 낮은 기술직 하급 관료가 되는 잡과를 보는 경향이 많았지요. 경제적 여유가 좀더 있는 상민이라면 기마술과 궁술을 연마해서 무과에 응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상무-n3y 이게 제가 알기론 왕자들의 일가가 생기고 한세대씩 흘러갈때마다 신분이 하향이 된다고 합니다. 그냥 정확하진 않으나 그냥 예시로 아버지가 '대군'이면,아들은 '군' 작위로 낮춰지고 그게 5대쯤 내려가면 왕족의 신분에서 방계로 내려 가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여담으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본인이 양녕대군의 후손인데도 불구 조선왕가에 대해 악감정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1909년 조선후기 양반의 비율은 1.9%였습니다. 양반가문을 넓게 봐도 10%수준일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본관을 쓰게되어 좋은 가문의 후순으로 착각하고 살지만, 백성의 절대다수는 상민이하 계층이었던 것입니다.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강제적으로 모든 국민이 본관을 등록해야 했고, 조선이 망한 후 신분제도가 철폐되니 너도나도 족보를 만드는 것이 유행되어 1920년대 인쇄물의 50%이상이 족보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대가 지나고 보니 자신이 쓰고 있는 본관의 조상이 자신의 조상으로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위조는 조선시대에는 국법으로 처벌되었으니, 조선시대 족보에 4대조 할아버지가 계시면 양반일 확률이 큽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족보를 구경도 못해봤거나, 일제시대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족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 잘난 과거급제의 흔적이 현대의 사시행시외시로 내려오고 거기에 붙으면 과거급제처럼 똑같이 5급 벼슬부터 주고 대단한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 결국 현대 한국은 아직 조선시대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지 못함. 조선시대의 강력한 입신출세에 대한 갈망의 업은 그렇게 아직까지 굴러내려오고 있죠. 그걸 깰려고 노통이 사시를 없앤 것이고... 진짜 저런 종류의 시험을 없애고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공무원제도가 생겨야합니다. 시험하나 붙었다고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검사들을 보면 모르나요??
@@새라리언초이 사실 저희 집안 어르신들에게서, 예전부터 고려를 멸망시킨 이씨 조선에겐 벼슬을 받지 않는다하여, 일부러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조선 초기 얘기고, 중/후기부터는 그런 선조들의 유훈을 잘 지켜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런 유훈도 변명꺼리는 되지 못하리라 봅니다.
실력 보다는 당파와 귀족집안인지 여부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죠. 채점관들이 다 당파에 소속되어 있잖아요. 노론 쪽에서 거의 독식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1차 2차 채점하잖아요. 그 채점관들이 다 당파에 소속된 사람들 이잖아요? 조선은 당파의 폐해가 심각했으니까요. 자기들끼리 해 먹었다고 봐야겠죠.
맞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 청주한씨 파평윤씨 이 성씨는 왕비를 무지 많이 배출함과 동시에 외척세력으로 나라를 쥐고 흔들던 가문이지요 상위권을 차지하는데 가문의 힘이 들어간거지요 전주이씨도 당연한거구요 조선시대 실력으로 과거급제를 많이 한 3대 가문이라고 해서 달성서씨 광산김씨 연안이씨를 꼽지요 이들은 왕비나 빈이 거의 없던 가문이죠
전주이씨가 1등인 것은 왕족인 전주이씨들만을 위한 과거시험제도가 있었음. 왕족이 벼슬을 하면 국정이 문란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는 벼슬은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놀고 먹게만 하여 무식자를 만들 수가 없어서 과거시험을 통해 명예직이나 권력이 적은 관청에 근무하였으며 이를 관리하는 관청이 종친부로 정승들이 근무하는 의정부와 동격이었음. 따라서 일반 문과급제자들과는 수준이 다른 시험이었고 여기에는 외척도 포함되었음. 그래서 외척을 치마양반이라고 하였던 것임.
안동 김씨는 구안동과 신안동 구분없이 인구수와 급제자 수를 파악한것 한것같은데 수정하세요 본관만 같지 혈통이 전혀 다른 집안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알고있는 안동김씨 세도가 집안은 신안동 김씨로 조선시대 대과급제자 319명, 2015년을 기준으로 47,702명입니다. 다른 집안들도 제대로한건지 의심스러운 엉터리 통계아니지 모르겠네요
조선 전기 (16세기까지) 순위 1.안동 권씨 (117) 2. 전주 이씨 (113) 3. 광산 김씨 (82) 4. 진주 강씨 (76) 5. 파평 윤씨 (74) 6. 안동 김씨 (69) 7. 남양 홍씨 (64) 8. 여흥 민씨 (62) 9. 광주 이씨 (61) 10. 문화 류씨 (60) 11. 전의 이씨 (58) 12. 밀양 박씨 (54) 동래 정씨 (54) 14. 경주 김씨 (51) 15. 청주 한씨 (50)
일반적으로 소과에서 생원 진사 각 100인씩 뽑아서 성균관 들어간 이거부터가 서울대 합격보다 어려운거구요. 소과 합격 이후에 대과합격은 순위가 바뀌기도 합디다. 한국 역대 인물 정보시스템 사이트에 가면 급제자 부친 형제 이름까지 다 나옴. 통계기때문에 세도가나 조선말기 빼더라도 유전자적 신뢰도가 쌓임. 문과 집안 무과 집안 유전자 있고 7대만 올라가도 18세기 조상들 만나니 좋은 집안은 자부심 가지고 잘 사세요. 본인 피에 우수한 유전자가 흐르는 겁니다. 불교귀족 썩은 고려 말기에는 고려가 망해서 강한 새나라 조선 백성으로 살고 세종도 나온 겁니다.
자꾸 족보를 샀네 노비가 주인 성을 따랐네 말이 많은데 저 중에서 인구 적고 급제가 많은 가문은 그냥 양반가문이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진성 이씨, 광산 김씨, 반남 박씨 같은 6대 국반 가문이나 안동 김씨, 안동 권씨 같이 오래 전부터 권세가 센 가문은 족보 위조나 매매가 불가능해요
조선시대에 족보위조나 매매는 국가에서 처벌할 정도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양반본관을 가지고 있다면 양반출신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09년 반드시 성씨와 본관을 정하도록 민적법이 시행된 이해 모든 사람이 본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동권씨라고 해도 족보에 없는 인구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안동권씨 노비들이 해방되면서 안동권씨를 쓰면서 집성촌을 형성한 사례도 있습니다.
@@윤0이다 맞습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된것은 성씨가 진짜라 하더라도 1.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과거인원은 그대로 2. 양반 남성이 평민여성 , 노비여성 첩을 데리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양반 남성의 성씨를 물려받음 그래서 서얼들의 후손들도 많은데 이 서얼들도 성씨를 사용해서 성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양반은 아님 3. 조선 후기 신분 제도가 문란해져 본관 세탁이 흔해져 쉽게 성을 구할수 있었음 그래서 진짜인지 아닌지 100% 확실한 경우는 그 가문 문중에서 조상 초상화를 가지고있다던지 가보를 가지고있는 경우 제외하고는 현시대로서는 판단하기 힘들죠
한산이가는 목은 이색이 조선조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이방원에게 본인과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고 세조조에는 사육신에 참여한 이개로 인하여 참화를 당하고 연산조와 중종조에는 조광조와 연계되어 사림파로 귀양이나 낙향을 많이 갔던 골수 반골 집안인데 의외로 많군요. 그 흔한 왕비 간택도 없고 후궁도 거의 기록에 없는데 말이죠. 왕의 외척이 많았던 집안 기록과 연계해서 본 데이터를 연구하면 유의미하지 않겠나 합니다
귀하의 의견도 충분히 일리가 있소이다.그러나 과거로 등용된 사람들은 신진사대부들이오. 고려에 주축이 되었던 사람들은 권문세족이나 문벌귀족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대대로 관직을 하거나 음서로 진출한 사람들이라 학문적 소양은 신진사대부들 보다 낮았다고 보이오만,,, 단지 불사이군의 신념으로 은거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듯싶소이다.
안동 권씨는 원래 경주 김씨입니다. 고려가 개국할 때 신라의 사직을 왕건한테 넘겨주는 걸 반대한 왕족이 있었고, 협조한 왕족이 있었는데, 안동 권씨는 고려 개국에 협조한 신라 왕족에게 왕건이 성씨를 내려준 경우에 해당합니다. 임금이 내려주는 성씨를 사액성씨라고 하죠? 바로 안동 권씨가 사액 성씨로서 본은 경주입니다. 광산 김씨도 경주 김씨입니다. 왕건한테 신라의 사직을 넘겨주는 걸 반대한 일부 왕족은 수년 간 고려와 항쟁을 벌이다 만주로 넘어갔죠. 김함보가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이 신라의 기술관료들과 무사집단, 그리고 일부 백성들을 이끌고 여진 부족 마을로 들어가서 여진족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금나라를 세웠죠. 금나라가 원나라에 망했다가 다시 후금을 세워 대륙을 정복한 후 이름을 청나라로 바꿨습니다. 천년 간 고도의 문화를 유지해왔던 경주 김씨 통치세력이 고려와 조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 정사에는 여진족을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 남부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만주의 여진족이 마치 이민족처럼 묘사된 거죠. 참고로 근대 이전의 일본은 천황과 쇼군이 이원집정제 형식으로 통치되는 나라였죠. 천황은 얼굴 사장이고, 군권을 장악한 쇼군이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였습니다. 천황은 가야계, 신라계, 고구려계, 백제계가 세력판도에 따라 돌아가며 차지했는데, 후에 백제계가 주축이 되었죠. 쇼군은 신라 혈통이 아니면 절대로 오를 수 없는 직위였습니다.
일본 내의 신라계는 대륙의 한반도를 모국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지만, 백제계는 한반도를 회복해야 할 고토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 신라를 세웠으니 일본의 신라계는 한반도를 모국을 여기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일본의 백제계는 한반도에서 신라한테 밀려나 일본으로 왔으니 한반도의 신라를 윈수처럼 여기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이것이 한일관계에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일본에서 신라계의 쇼군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 한반도와 화친관계가 유지됐고, 일본에서 백제계의 천황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 반드시 한반도를 침범했습니다. 막부의 쇼군은 정한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냉정하고 잔인하게 처단했습니다. 그러다 일본 권력이 백제계한테 넘어가자 백제계 권력자들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공했죠.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제학 얘기를 꺼내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영의정도 부러워했다던 대제학(문과 정2품)을 배출한 집안 중 3대가 자리에 오른 집안이 전주 이씨, 연안 이씨, 달성 서씨, 광산 김씨가 있습니다. 하지만, 3대가 연속(할아버지-아버지-아들)으로 대제학에 오른 집안은 연안 이씨뿐입니다. 세종대왕은 유일하게 자신의 길을 내어준 집안도 연안 이씨 집안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를 부를 때 '연리광김'(연안이씨 광산김씨)이라고 말했죠. 그러나 광산 김씨도 분명한 명가 중 한 집안입니다.
@@gbu-cu5sq 문과만 보면 그렇겠지요. 무과랑 문과랑 합하면 약 7~8%가 김해 김씨 입니다. 조선 초기 양반 비율에도 김해 김씨가 7~8% 정도 되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어요. 지금 대한민국 인구 비율이랑 크게 차이가 없지요? 족보가 집집마다 있었는줄 아세요? 무식하면 그냥 입닫고 계세요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 순위는 ruclips.net/video/ZWIPFYSzWjc/видео.html
그리고, 26위 문화 유씨는 문화 류씨가 맞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달성서씨가 아니고 대구서씨입니다..
원래 같은성씨였는데.. 조선시대때 갈라져서 지금은 족보도 다르게 씁니다.
문관배출은 대부분 대구서씨고 달성서씨는 10명도 안됩니다.
🔥🔥 김유미 = 김인성의 작은 이야기들 / 유재일 / 미래대안행동 2기 (대안연대) 🔥🔥
백만데이타님 엉터리 안동김씨 통계 수정이나하세요
아 문화 류씨 얘기할라고 했는데 이미 누가 얘기했구나
柳씨는 한글로 '유씨'이지 '류씨'가 아닙니다! 전부다 잘 못 알고 있는 것! 곧 문화, 진주유씨가 맞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참고해 주세요! ruclips.net/video/zQZUwMHsRZg/видео.html
너무 재미있었어요^_^ 영상 퀄리티가 장난이 아니네요.
현실적으로 비용이나 제도상 과거시험은 양반 아닌 양인들은 볼 수 없던 시험임. 일단 과거시험 응시가 일단 보단자와 공직자 추천인이 있어야 함. 양반 가문 외에는 이미 시험도 보기 전에 탈락. 조선 후기에 오면 대리시험이 판을 치고 돈으로 과거를 합격했다고 함. 사관들이 짜고 일찍 시험지를 내는 사람을 부정합격 시키자 나중엔 눈치 챈 응시자들이 서둘러 답안지를 일찍 내는 일도 있었다고 함. 과거시험이 가문의 영광이던 시대도 있겠지만 저 누적 합격자 수는 부정과 부폐의 증거이기도 하고 조선 몰락에 책임이 있는 순서이기도 하고 일제 앞잡이 순서와 비슷하기도 함
무슨 양인들이 왜 못봐요?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완전히 능력위주로 뽑는것을 바탕으로 헙니다. 아무리 고관대작 자제라도 과거를 통과하지 않으면 쓰지를 않음.
@@wondong313 손인보님이 댓글에 적으신 현실문제 돈 시간이 가장 컸구요. 제도상으로도 문과는 양인이 보기 어려웠대요. 지금으로 치면 신원보증인 같은걸 받아야 하는데 이게 양반 끼리끼리라서 조선중기까지 해준 사례가 적다고 합니다. 문과에 비해 무과는 양인이 많이 붙었는데요. 이순신의 예를 보면 현직 군인들이 다수 있고 이순신처럼 청춘을 공부에만 매진한 케이스는 금수저에 속합니다. 양반들도 이순신처럼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급제하면 늦은게 아니라 평균 정도 되나 그래요. 시험도 자주 있는게 아니구요. 과거시험에 쓰는 종이도 비싸서 가난하면 양반도 그걸 미리 사서 연습하는게 부담이 컸다고 합니다.
@@wondong313 님 농사 지으면서 과거 공부 ㄱㄴ? 인강도 없던 시대에?
추천 제도를 넣은거는 과거 응시 자격이 없는 노비나 서얼 등 과거 자격이 없는 자가 신분을 속이고 과거 응시하는걸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양반 가문이 아니더라도 양인임이 인정되면 추천받아 과거 보는데 문제는 없었습니다. 양반들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상민에겐 추천장 안써줬을거다 운운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뇌피셜이고, 추천장의 의미는 과거 응시 자격이 있는 양인임을 보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경제적 지원 받으며 어릴적부터 과거 공부한 사대부 자제들과 어릴적 부터 생업에 뛰어들어 짬짬이 공부한 경우는 경쟁 자체가 어렵다는 겁니다. 더우기 과거 시험 문제들이 교과서나 달달 외워서 풀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라 시사, 수학, 과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건 역시 고위층과 교류가 활발한 양반 계층들로 국한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민들은 문과 보다는 비교적 허들이 낮은 기술직 하급 관료가 되는 잡과를 보는 경향이 많았지요. 경제적 여유가 좀더 있는 상민이라면 기마술과 궁술을 연마해서 무과에 응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agm1144 정확한 통계는 불가능하지만 이미 추천제도와 합격자 수 관련 자료 연구하신 연구자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지적하신 당시 학문 교류 및 교육의 기회의 제한이 더 큰 진입장벽이었을 거란 댓글 내용엔 동의합니다
조선 중기까지의 합격자가 실제 실력자고 이후부터는 들의 나눠먹기 판이라 안동김씨, 권씨등은 그 여파라고 본다
양보다 질을 따지면 다른 성씨가 돋보일거라 봄
안동 권씨는 19세기 후반 제외하고는 조선초부터 19세기 전반까지 늘 상위권이었습니다.
전주 이씨 압도적 1위
@@graycain 지난정권에서 하던거 보면 전라도가 압도적인 1위.
공무원 시험 문의는 권성동에게 해주세요.
김이박최정같은 왕족성씨 두고
누가 19세기 몰락한 성씨 안동권을 씀?
조선 500년인데 합격자수 저정도면
정말 합격하기 어려웠구나 싶네..
어려웠죠. 과거가 평균 3년마다 열렸고 전국에서 최종 33명만 선발 했으니까요.
지금의 행정고시하고 비슷하네요
@@user-sd1xu5mv8k ㄴㄴ 없어진 사법고시에서 검판사 되는 수준보다 어렵다고 보면되죠
재밌는 자료네요..ㅋ 정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집계가 가능하다는거 자체가..ㅋ
저때 김해 김씨의 과거 급제자가 저것 밖에 안됐는데 현재의 숫자를 감안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김해 김씨로 유입 됐는지 짐작이 간다.
얼마나 역사 공부를 안했으면 ᆢ 이런 헛소리를 하실까 무식이 철철 넘치십니다요
@@smart_ant 조선읹90퍼센트는 원래비노임
@@g4df74g1h 노비는 왜란 직후에 40%까지 증가 했다가 철종 대에는 2%까지 줄고 김해 김씨가 많은 이유는 신라 왕족 성씨이기에 수가 폭발 적으로 많은것과 유입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90%는 조선후기때 가짜 족보 만든건데 진짜 이런거 보면서 뿌듯해하는 사람들 이해 안감
@@g4df74g1h 그 근거가 무엇이오? 반상제를 양반과 상민,,,,상민을 노비로 착각하시는거 아니시오?
당시의 로얄패밀리 전주 이씨가 가장 좋은교육을 받았겠지. 1위 예상했음.
좋은교육이 아니라 그냥 합격시켜 준거지
왕족이라 해도 종친 대접을 받는건 대군의 경우 5대까지 군의 경우는 3대까지입니다. 하지만 과거를 볼수 있는 인프라가 워낙 탄탄했기에 가능했던 수치죠.
@@이정환-x7p 몇명의 대군과 후손이 있었고 군은 어땠을지 알고 있나요
@@이상무-n3y 굉장히 복잡하고 방대합니다. 세종임금만해도 아드님이 18명입니다. 이들의 후손은 2대만 넘어가도 수십명에 이르고 3대가 되면 몇백명단위가 되죠. 오죽하면 이들을 관리하는 관청인 돈녕부가 있었고 목록까지 만들었겠어요?
@@이상무-n3y 이게 제가 알기론 왕자들의 일가가 생기고 한세대씩 흘러갈때마다 신분이 하향이 된다고 합니다.
그냥 정확하진 않으나 그냥 예시로 아버지가 '대군'이면,아들은 '군' 작위로 낮춰지고 그게 5대쯤 내려가면 왕족의 신분에서 방계로 내려 가죠.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여담으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본인이 양녕대군의 후손인데도 불구 조선왕가에 대해 악감정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인구수 비율로 순위를 내보는것도 필요할듯
김이박최정강조.....
오~ 조상님들 문, 무과 전부 순위에 있었네요.
전주 이씨가 숫적으로 앞도적으로 많은데다 음서제도때문에 훨씬 유리하죠. 모범답안 둘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당연 왕족 성씨 전주이씨죠.
빙고
네임드 친일파 숫자도 압도적으로 1위입니다 소름돋는건 여기에 왕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을사오적 이근택 이지용
정미칠적 이병무 이재곤
경술국적 이병무
배출한 친일파 가문 전주이씨
조상 제사모시면 뭐 인정하는데! 그외의 사람들은 개불쌍 천민보다못한 개족보있으면 뭐해 필요없겠지요???
음서제도와 과거급제자는 별개로 카운트 합니다. 전주이씨의 급제자가 많은 건.. 응시모집단이 많아서 그래요. 전주이씨는 국성이라.. 다른 성씨와 다르게 전주이씨 출신의 서얼은 과거응시에 제한이 없었어요.
전주 이씨 대단
사람수대비. 연안 이씨가 압도적 이네요
1909년 조선후기 양반의 비율은 1.9%였습니다. 양반가문을 넓게 봐도 10%수준일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본관을 쓰게되어 좋은 가문의 후순으로 착각하고 살지만, 백성의 절대다수는 상민이하 계층이었던 것입니다.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강제적으로 모든 국민이 본관을 등록해야 했고, 조선이 망한 후 신분제도가 철폐되니 너도나도 족보를 만드는 것이 유행되어 1920년대 인쇄물의 50%이상이 족보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대가 지나고 보니 자신이 쓰고 있는 본관의 조상이 자신의 조상으로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위조는 조선시대에는 국법으로 처벌되었으니, 조선시대 족보에 4대조 할아버지가 계시면 양반일 확률이 큽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족보를 구경도 못해봤거나, 일제시대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족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ㅇㄱㄹㅇ
고인이되신 우리할머니 순천박씨 박팽년의 후손이라 뜨거운것 먹을때 아시원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어렸을때 많이들었는데 이유인즉 박팽년은 사육신으로 인두로 고문당할때도 아~ 시원하다 더 지져라 이랬다고함
옛날은 혼인도 양반가문 성씨끼리하고
양반이 양반을 알아보는것이다
이젠 다 옛날 얘기인것같아요 저도 종가집 종손이지만 요즘 젊은세대는 별관심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ㅎㅎ 저도 20대인 아들한테 본관하고 파까지만 얘기하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여기 영상에 소개된 후손분들 순위가 뭐중요하겠습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비리가 너무 많았음.
특정성씨가문에 의한 사전 정보 흘리기, 돈 권력 많은 가문에서 가문 내의 시험정보 공유하기, 유명 과거선생 독차지 하기...
시험 전부터, 정보의 편중과 비리가 많은 과거제도...
조선 후기로 가면, 과거시험은 비리가 난무...
지금 시대랑 너무 많은 것이 비슷하네요
인정합니다.
사실 급제자 수만을 기준으로 명문가를 가름하기에는
너무나도 헛점이 많습니다.
심지어 조선 중후반으로 가면 대리시험과 공동시험까지도 만연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ㅎ 조건은 거의 동일
그리고 그 잘난 과거급제의 흔적이 현대의 사시행시외시로 내려오고 거기에 붙으면 과거급제처럼 똑같이 5급 벼슬부터 주고 대단한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 결국 현대 한국은 아직 조선시대의 의식구조를 벗어나지 못함. 조선시대의 강력한 입신출세에 대한 갈망의 업은 그렇게 아직까지 굴러내려오고 있죠. 그걸 깰려고 노통이 사시를 없앤 것이고... 진짜 저런 종류의 시험을 없애고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공무원제도가 생겨야합니다. 시험하나 붙었다고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검사들을 보면 모르나요??
인구비율도 봐야할듯. 성이 흔치 않아도 순위높은.
인구대비로 따지면 사천목씨가 가장 비율이 높다고합니다
저건 솔직히 급제자 많은 순위라기 보다는 세력가의 부정부패 순위로 보는 게 맞다.
저 때도 힘 있는 가문이 못 할 일은 없었으니 솔직히 현대보다 더 심하지 않았을까?
돈과 권력으로 세상을 후려치는 초능력자??....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신 분이 여기 계셨네 .
현재 정부요직 및 국회의원들 중에서 각 성씨들의 비중은 어떨까요?
당시 고려 충신 가문이나 역적으로 몰린 가문은 과거 응시 기회도 없었죠
상위 랭크일수록 시대를 풍미했던 유력 가문들이네요. 개인의 능력보다 가문의 힘이네요
가문의 힘이 능력 아닌가
@@전라도목포-q4t 능력의 국어 사전적 의미가 언제 그렇게 변했나요? ㅎㅎ
@@냥냥펀치-u3w 능력이 있어야 가문도 세우고 가문의 힘이 능력을 이루는것임
@@냥냥펀치-u3w 조선시대도 사전적 의미가 있었나 그리고 요즈음 사전적 의미를 따지는 사람도 있네 ㅋㅋㅋㅋ 언제적 세대인지 궁금하네 ㅋㅋㅋㅋ
예나 지금이나 뺶으로 ㅋㅋㅋㅋ
잘 봤습니다, 무과쪽도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무과는 이순신
잡과쪽도 해주세용 ㅎㅎㅎ 다 궁금쓰
양반은 문과무과 벼슬을한 가문입니다. 요즈음은 며느리가 누구냐가 양반을 가늠하지요? 며느리의 집안이 노비면 그성씨와집안은 모두 노비되겠습니다. 정답이죠^^
반남박씨 없으세요? 밀양박씨가 워낙 많아서 그렇지. 인구대비 조선시대 급제자수와 정승반열로 따져보면 질적으로 절대 우위인 집안인데 주변에 반남박씨 진짜 찾기 어려움.
반남박씨 하이
을사오적+경술국적 박제순 배출한 가문이 반남박씨인데 본인은 친일파 후손 셀프 인증하고 친일파 후손 찾고 계시네요?
경주최가로써 가장 쪽팔린 순간은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바로 이 영상을 보고 난 이후. 쪽수는 그리 많으면서 어떻게 30위에도 못 들어가냐.
못들어간게 차라리 다행이십니다 저기 순위가 실상 나라 말아먹은 무능한 성씨 순위이자 친일파가 많이 나온 성씨들입니다 아무 의미없는 순위입니다
그래서 저도 돈 많은 노비의 후손이 아닌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가난하게 사셨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학교에서 국사 시간에 최충 나올때 괜시리 욕만 먹었네 우리와 본이 다른데 ....
사학계에서도 고려때는 왕성하게 활동하던 최씨가 조선시대에 갑자기 조용해진 게 미스테리라고..
윗 대글에서도 어느분인가 쓰셨던데, 정치적인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이 됩니다.
@@새라리언초이 사실 저희 집안 어르신들에게서, 예전부터 고려를 멸망시킨 이씨 조선에겐 벼슬을 받지 않는다하여, 일부러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조선 초기 얘기고, 중/후기부터는 그런 선조들의 유훈을 잘 지켜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런 유훈도 변명꺼리는 되지 못하리라 봅니다.
퀄리티가 권력 우선순위가 중요할듯.
안동 김씨 중에는 舊안동 김씨가 있고 新안동 김씨가 있지 않나요?
그렇지요 제가 알기로 신안동김씨 문과급제자는 160명 정도 입니다
남양홍씨도 시조가 다른 당홍계와 토홍계로 구분을 했어야 하는데
신안동김씨는 전국에 2만명정도 됩니다
여하튼 난 합격 4위 집안의 후손이오, 그래서 시험은 늘 합격입니다,
유전인가, 노력인가, 둘다인가? 학업은 뭐니뭐니해도 예나 지금이나
흙수저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분명합니다.
저도 그런데 남양 홍씨가 좀 똑똑한 편이죠.. 물론 다는 아니지만요.. 😊
잘 보았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성(姓)씨의 글자 만이라도 漢字로 표시 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이유는 한글은 글자가 같아도 한자로는 다른 글자가 여럿 있잖습니까.
[例: (柳, 劉, 兪), (張, 蔣), (任, 林), (鄭, 丁) 등등]
본관을 함께 표시하였으면 다 나온 거지요. 문화유씨면 柳, 기계유씨면 兪로 딱 구별되지요. 그걸 읽지 못하면 한자를 달아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김해김씨가 힘을 많이 못 쓴 이유는 고려시대땐 삼한갑족이라 불릴만큼 세가 대단했으나 조선 들어오면서 연산군 때 사화를 겪고 세가 많이 약해짐. 김일손을 생각하면 이유를 알 수 있음. 그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로 가면서 많은 양인들이 족보를 사기도 했고...
맞아요ㆍ그런설이있어오ㆍ소위 조선시대때 단단히잘못보여서 연좌제에따라 김해김씨는 관직안줬다고ㆍ3대를 멸한다는그거죠
실력 보다는 당파와 귀족집안인지 여부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죠. 채점관들이 다 당파에 소속되어 있잖아요. 노론 쪽에서 거의 독식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1차 2차 채점하잖아요. 그 채점관들이 다 당파에 소속된 사람들 이잖아요? 조선은 당파의 폐해가 심각했으니까요. 자기들끼리 해 먹었다고 봐야겠죠.
맞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 청주한씨 파평윤씨
이 성씨는 왕비를 무지 많이 배출함과 동시에 외척세력으로 나라를 쥐고 흔들던 가문이지요
상위권을 차지하는데 가문의 힘이 들어간거지요 전주이씨도 당연한거구요
조선시대 실력으로 과거급제를 많이 한 3대 가문이라고 해서 달성서씨 광산김씨 연안이씨를 꼽지요
이들은 왕비나 빈이 거의 없던 가문이죠
조선 전 시대가 그런건 아닙니다. 어느 문중이든 3대 모두 고관을 지낸 집안이 극히 드물어요 다만 노론집권시부터 흔들리기 시작해서 특히 고종때 여흥민씨 삼방파 가문 그리고 그 가문과 관련 있는 인척, 추종세력들이 부정부패로 과거급제자가 늘어났죠
퀄리티 죽입니당!!! 저도 입신양명해서 명문 청송심씨 가문을 빛내려구요!!!
주인님 가문이요?
치마 양반 청송심씨요
남양 홍씨 사람 으로서 기분은 좋네요.. 누가 뭐라든 간에...
지금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진짜 양반가문 후손일 확률이 높음
노비들이 족보사고 성씨 고를때 대부분 김이박최를 골랐을테니까
ㄴㄴ 진짜 양반가문은 알 수가 없음. 왜냐하면 몰락가문의 돈 받고 양아들로 들어가면 되니까. 그래서 세도정치 했던 가문도 가능함. 모든 가문인원들이 부자가 아니었으니
놀라운 사실은 노비들은 성씨가 아예 없었단 사실이죠~
성씨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양반들이죠~
@@good.things 성씨있는 노비들도 있음 ㅇㅇ 조선시대엔 성씨여부랑 신분은 무관
뭘 좀 아시는구만 .. ㅇㅔ 헴 ~~
전주이씨가 1등인 것은 왕족인 전주이씨들만을 위한 과거시험제도가 있었음. 왕족이 벼슬을 하면 국정이 문란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는 벼슬은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놀고 먹게만 하여 무식자를 만들 수가 없어서 과거시험을 통해 명예직이나 권력이 적은 관청에 근무하였으며 이를 관리하는 관청이 종친부로 정승들이 근무하는 의정부와 동격이었음. 따라서 일반 문과급제자들과는 수준이 다른 시험이었고 여기에는 외척도 포함되었음. 그래서 외척을 치마양반이라고 하였던 것임.
현재 대한민국 절반이상이 갑오개혁이후 성씨를 받은 사람들의 후손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성촌출신 아니면 솔직히 본관을 의심해 봐야 됩니다~^^
족보에 다 나오는데,
후에 가지 붙인 후손들 이라고
집성촌에 살던 노비가 주인 성씨 붙였으면?
안동 김씨는 구안동과 신안동 구분없이 인구수와 급제자 수를 파악한것 한것같은데 수정하세요 본관만 같지 혈통이 전혀 다른 집안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알고있는 안동김씨 세도가 집안은 신안동 김씨로 조선시대 대과급제자 319명, 2015년을 기준으로 47,702명입니다. 다른 집안들도 제대로한건지 의심스러운 엉터리 통계아니지 모르겠네요
풍산 홍씨는 있는데 하회 류씨는 없네요.
안동 권가가 내 예상보다 훨씬 많네.
어떻게 분석해야 하나?
을사오적 권중현 배출한 친일파 가문 안동권씨
청송 심씨는 문관보다는 처음부터 무관으로 시작했다는 전설이 ~~♡
나도 청송 심인데 섭자 돌림
@@심의섭-u8m
아저씨군요 전 재자 돌림 ♡
반갑습니다.
전 보자 돌림요^^
어이구 여기서 노인이 되는구나
이씨 본관이 저리 많은줄은 몰랐네요
순조이후 과거 합격자는 순수히 능력에 의한 선발이라 보기힘든데 그런부분이 고려됫으면 좋겟네요
역시 옛날부터 권력층이 모든 관직을 독점해 왔네요 ㅎㅎ
무과도 궁금합니다~
조선 전기 (16세기까지) 순위
1.안동 권씨 (117)
2. 전주 이씨 (113)
3. 광산 김씨 (82)
4. 진주 강씨 (76)
5. 파평 윤씨 (74)
6. 안동 김씨 (69)
7. 남양 홍씨 (64)
8. 여흥 민씨 (62)
9. 광주 이씨 (61)
10. 문화 류씨 (60)
11. 전의 이씨 (58)
12. 밀양 박씨 (54)
동래 정씨 (54)
14. 경주 김씨 (51)
15. 청주 한씨 (50)
🥵백성들에😭고혈을👹빨아먹은🥤빨대순~~~😢
순헌철종 세도가 시기는 급제자수가 별도로 나와야 될꺼같아요 ㅋㅋ
다들 족보 사서.. 양반이 만들어진 현재.. 그리고 당시 과거시험이란 것도 대필, 첨삭 등 비리가 횡행하던 시험인데..
따라서 결론은~~ 아이고~~~ 의미없다. 쓸데없이 고퀄이네요. ㅋ
광산김씨 2:21
오.. 저희 선조님들이 공부는 잘했내요..
전주 이씨는 왕족도있어서 많은건가요?
전주이씨 네임드 친일파도 압도적입니다
소름돋는건 이중에 왕족도 있습니다
을사오적 이근택 이지용
정미칠적 이병무 이재곤
경술국적 이병무
배출한 친일파 가문 전주이씨
남양홍씨 사람으로서, 놀랍다..
저두요..
비례스텟으로보면 1위
인구대비 탑오브탑 연안이씨.. 자랑스럽네요.
그렇네요
@@이무훈-h3t 풍천임씨 입니다. 성균관 자료 에서 보면 비율로 풍천임씨 과거급제 제일많음
저..연안이씨에요~~
(딱히 잘난 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리와 광김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씨이지요
조선을 말아먹은 대표성씨
무과 시험도 궁금해지네요 ^.^
과거는 3년 단위로 33명인가 뽑습니다 지금 유튜브 보고 있는 우리와는 아예 다른 초천재들입니다.
물론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는 제외입니다
다음에는 성씨별 조선시대 청백리순위도 내주세요. 물론 이씨조선 5백년에 청백리는 백여명밖에 없었다고 하니 매우 빈약한 숫자이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명예로운 순위가 될 듯하네요.
임금이 전주이씨라 덕을 많이 봤을듯요..
얼마나 많은 자들이 급제를 한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어떤 직을 하였느냐가 중요하죠.
급제 하면 그냥 권력자 되는건데 무슨 9급 공무원 보는걸로 생각하신듯?
과거 급제 자체가 권력에 상징이야 조선시대에 공부만 지원해줄 집안이 몇 곳이 있겠냐
광산김씨는 의외구만요 족보 봤을때 디게 뒤늦게 생겼던데 8위라니
인조 이후로 사실상 권문세족이라
@@molonlabe2477 오호 마자요
일반적으로 소과에서 생원 진사 각 100인씩 뽑아서 성균관 들어간 이거부터가 서울대 합격보다 어려운거구요. 소과 합격 이후에 대과합격은 순위가 바뀌기도 합디다. 한국 역대 인물 정보시스템 사이트에 가면 급제자 부친 형제 이름까지 다 나옴. 통계기때문에 세도가나 조선말기 빼더라도 유전자적 신뢰도가 쌓임. 문과 집안 무과 집안 유전자 있고 7대만 올라가도 18세기 조상들 만나니 좋은 집안은 자부심 가지고 잘 사세요. 본인 피에 우수한 유전자가 흐르는 겁니다. 불교귀족 썩은 고려 말기에는 고려가 망해서 강한 새나라 조선 백성으로 살고 세종도 나온 겁니다.
문과급제자는 문과방목을 통해 알수 있으나, 무과는 무과방목에 전체급제자의 20%만 기록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무과급제자는 각 성씨별 대동보에 문헌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인물 정보시스템에 이름이 없는 급제자도 상당수 존재합니다.
현재인구대비 합격자로 해주셔야 공정할듯 합니다.
자꾸 족보를 샀네 노비가 주인 성을 따랐네 말이 많은데 저 중에서 인구 적고 급제가 많은 가문은 그냥 양반가문이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진성 이씨, 광산 김씨, 반남 박씨 같은 6대 국반 가문이나 안동 김씨, 안동 권씨 같이 오래 전부터 권세가 센 가문은 족보 위조나 매매가 불가능해요
안동 권씨로서 선생 말에 동의하오^^
조선시대에 족보위조나 매매는 국가에서 처벌할 정도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양반본관을 가지고 있다면 양반출신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09년 반드시 성씨와 본관을 정하도록 민적법이 시행된 이해 모든 사람이 본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동권씨라고 해도 족보에 없는 인구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안동권씨 노비들이 해방되면서 안동권씨를 쓰면서 집성촌을 형성한 사례도 있습니다.
나열한 성씨들은인구가 다 많은 성씨들이에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덕수이씨 같은 집안이 진짜 노비들이 카피하지 못한 성씨에요 신 안동김씨도 포함
그래서 인구가 훨씬 적어요 다른 성씨보다
@@윤0이다 맞습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된것은 성씨가 진짜라 하더라도 1. 조선 후기에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과거인원은 그대로
2. 양반 남성이 평민여성 , 노비여성 첩을 데리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양반 남성의 성씨를 물려받음
그래서 서얼들의 후손들도 많은데 이 서얼들도 성씨를 사용해서 성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양반은 아님
3. 조선 후기 신분 제도가 문란해져 본관 세탁이 흔해져 쉽게 성을 구할수 있었음
그래서 진짜인지 아닌지 100% 확실한 경우는 그 가문 문중에서 조상 초상화를 가지고있다던지 가보를 가지고있는 경우 제외하고는
현시대로서는 판단하기 힘들죠
인구 대비 탑 오브 탑 반남 박씨 조상님들 자랑스럽습니다!
쪽수로 밀어 붙이는 가문이나 세도 정치로 해처먹은 가문 그리고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고인듯 ^^
족보관리가 제대로 였을때나 의미있지.조선말기에 개나 소나 족보매매 했는데.개족보.혈통관리가 괜히 있나
자기가 잘나야지 조상이 잘나면 모해ㅋㅋㅉ
몇몇 성씨는 인구 대비 너무 적은건 가짜가 많아서겠죠?
남양 홍씨 인구수가 상대적으로 적은데도 4위면 엄청나네요..
민씨한테 안돼. 대박임 ㅋㅋㅋㅋㅋ
나의 청주한씨가 6위라니 와우!!
유전의 힘.
지능의 유전.
김해 김씨는 워낙 많아서 높은 등수에 오르지 않았나 합니다.
김해김씨 현재 인구가 더 놀랍다...
김해김씨 삼현파는 조선초 지방으로 유배가는 바람에 거의 평민화되어 과거합격자가 없어짐..
@@필승-y5k 김일손의 무호사화가 치명적이었죠
창령성씨는 본이 하나인 성씨로 인구대비 합격율이 높네요
요즘에도 그 영향으로 드문 성씨 치고 정부 요직이나 교수등 많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근거가 있으면 좋으련만,,,아쉽소이다.
@@주초위왕-z6d ㅋㅋㅋㅋㅋㅋ
맞아요ㆍ주변에성씨보면 공부잘하고 고위직
@@주초위왕-z6d29위인거 안보입니까? 저기 30위 안에 못드는 성씨도 많습니다.
캬...전의 이씨
김이박 인구에 90프로는 가짜라더니 김해김씨는 압도적이네
서울대 합격자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서울대를 졸업할 때 얼마나 우수한 논문을 발표했느냐가 중요한데,
조선시대 기준으로
광산 김씨와 은진 송씨가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즉 문묘에 배양된 수가
명문에 해당.
평균적 수준이 중요하죠
국반 6대 가문
광산 김씨
반남 박씨
진성 이씨
여주 이씨
덕수 이씨
은진 송씨
은진송씨 - 중국계 성씨
한산이씨가 인구대비 최고인것 같습니다.
한산이가는 목은 이색이 조선조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이방원에게 본인과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고 세조조에는 사육신에 참여한 이개로 인하여 참화를 당하고 연산조와 중종조에는 조광조와 연계되어 사림파로 귀양이나 낙향을 많이 갔던 골수 반골 집안인데 의외로 많군요. 그 흔한 왕비 간택도 없고 후궁도 거의 기록에 없는데 말이죠. 왕의 외척이 많았던 집안 기록과 연계해서 본 데이터를 연구하면 유의미하지 않겠나 합니다
👍
고려말 이성계의 쿠테타로
집권을 하자 지조있는 학자와
양반들은 두문동으로 숨어서
은거하며 불사이군의 정신을 지켰지요~
물론 벼슬로 부터도 멀리하며
지냈습니다
단순히 숫자를 넘어 행간의 의미도 놓치지 않아야 역사를
제대로 분석할수 있을겁니다
귀하의 의견도 충분히 일리가 있소이다.그러나 과거로 등용된 사람들은 신진사대부들이오.
고려에 주축이 되었던 사람들은 권문세족이나 문벌귀족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대대로 관직을 하거나 음서로 진출한 사람들이라 학문적 소양은 신진사대부들 보다 낮았다고 보이오만,,,
단지 불사이군의 신념으로 은거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듯싶소이다.
정선전씨 전오륜 후손입니다. 두문 72현 중 한분이십시다. 그 이후 대대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 집안 대대로 높은관직에 몸 담았었음
@@주초위왕-z6d 앉아서 책이나 읽고 유교 지랄 떨다가 나라 발전은 저해되고 국운이 다 되어 국모는 낭인들에 낭자되고 왕자들은 볼모로 잡혀가고 신진사대부들이 학문적소양이 더 뛰어 나다는 건 어디서 나온 통계임...
@@소령-v7m 주초위왕님이 말하는 신진사대부는 려말선초의 개혁적인 인물들입니다....따라서 조선말과는 대략 450~500년의 시차가 발생합니다....ㅎㅎ
인구비율로 계산해야지 정확하지, 인구비율로 보면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산홍씨 남양홍씨 제일이네
인구비율로는 연안이씨가 최고네요
을사오적 권중현 배출한 친일파 가문 안동권씨 반면 김구를 배출한 명문 가문 안동김씨
승리의 남양홍씨~^^v
헐 나 전주 이씨인데;;;근데 왜 난 공부를 못하지(우리 가족들 다 전주 이씨인ㄷ..맘계정으로 보니까 ..꿀잼)
그걸 믿으세여?ㅋㅋ 조선후기때 계급사회 무너지면서 가짜 족보 만든거자나요 우리나라 90%성씨는 가짜에요~
을사오적 이근택 이지용
정미칠적 이병무 이재곤
경술국적 이병무
배출한 친일파 가문 전주이씨
우리가문이 아니고 우리 주인님ㅋㅋㅋ
ㅋㅋㅋ
실제로 성이 없는 하인들이 주인집 성씨를 많이 따랐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웃기넼ㅋㅋㄱ
90%는 조선후기때 가짜 족보 만든건데 진짜 이런거 보면서 뿌듯해하는 사람들 이해 안감
이거지 ㅋㅋㅋㅋ
@@sphinx6282저 중에 반남박씨나 연안이씨 같은 경우는 족보 매매나 위조가 불가능한 가문인데 좋아할만하지
부 한산이씨 13위,모 파평윤씨 3위 자랑스럽네요ㅎㅎ
다들 양반인가보네요 우리나라 대부분 성씨는 조선이 망하고 개족보 됐죠
지금은 다들 족보있는집안임 ㅋㅋㅋ
진주강씨가 있구나 없을줄 알았는데 ㅋㅋ
안동 권씨는 원래 경주 김씨입니다.
고려가 개국할 때 신라의 사직을 왕건한테 넘겨주는 걸 반대한 왕족이 있었고, 협조한 왕족이 있었는데,
안동 권씨는 고려 개국에 협조한 신라 왕족에게 왕건이 성씨를 내려준 경우에 해당합니다.
임금이 내려주는 성씨를 사액성씨라고 하죠?
바로 안동 권씨가 사액 성씨로서 본은 경주입니다.
광산 김씨도 경주 김씨입니다.
왕건한테 신라의 사직을 넘겨주는 걸 반대한 일부 왕족은 수년 간 고려와 항쟁을 벌이다 만주로 넘어갔죠.
김함보가 바로 그분입니다.
이 분이 신라의 기술관료들과 무사집단, 그리고 일부 백성들을 이끌고 여진 부족 마을로 들어가서 여진족과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 금나라를 세웠죠.
금나라가 원나라에 망했다가 다시 후금을 세워 대륙을 정복한 후 이름을 청나라로 바꿨습니다.
천년 간 고도의 문화를 유지해왔던 경주 김씨 통치세력이 고려와 조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 정사에는 여진족을 신라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 남부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만주의 여진족이 마치 이민족처럼 묘사된 거죠.
참고로 근대 이전의 일본은 천황과 쇼군이 이원집정제 형식으로 통치되는 나라였죠.
천황은 얼굴 사장이고, 군권을 장악한 쇼군이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였습니다.
천황은 가야계, 신라계, 고구려계, 백제계가 세력판도에 따라 돌아가며 차지했는데,
후에 백제계가 주축이 되었죠. 쇼군은 신라 혈통이 아니면 절대로 오를 수 없는 직위였습니다.
일본 내의 신라계는 대륙의 한반도를 모국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지만, 백제계는 한반도를 회복해야 할 고토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 신라를 세웠으니 일본의 신라계는 한반도를 모국을 여기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일본의 백제계는 한반도에서 신라한테 밀려나 일본으로 왔으니 한반도의 신라를 윈수처럼 여기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이것이 한일관계에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일본에서 신라계의 쇼군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 한반도와 화친관계가 유지됐고,
일본에서 백제계의 천황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 반드시 한반도를 침범했습니다.
막부의 쇼군은 정한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냉정하고 잔인하게 처단했습니다.
그러다 일본 권력이 백제계한테 넘어가자 백제계 권력자들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공했죠.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딴건 모르겠고 안동권씨 희대의 친일파 을사오적 권중현 배출한 가문입니다
김함보는 부안 김씨인데요. 전라도 부안이요
@@믿음소망사랑-f6p 慶州金氏경순왕 김부(敬順王金傅)의 아들은 마의태자 김일(麻衣太子金鎰)이고 김일(金鎰)의 아들은 김함보(金函普)이다. 함보(函普)는 법명이고, 그의 성명은 김행(金幸) 혹은 김준(金俊)으로 경순왕 김부(敬順王金傅)의 손자이다. 후금을 건국한 청태조 누르하치(愛新覺羅努爾哈赤:애신각라노이합적)도 함경북도 회령태생의 신라인이다. 청태조 누르하치(愛新覺羅努爾哈赤:애신각라노이합적:Nurhachi:出死1559~1626.9.30)의 성(性)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애신각라(愛新覺羅)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줴뤄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줴뤄는 겨레(族)를, 즉, 金族은 신라왕족의 성씨인 김씨(金氏) 성을 가진 족보를 뜻한다.
[출처] 금태조와 청태조는 천년역사 신라왕족 경주김씨의 후손이다.
@@믿음소망사랑-f6p 부안 김씨도 경주 김씨입니다.
조선시대 이름도 없었던 개똥이,소똥이,언년이,시월이,돌쇠는 지금 누구의 조상이란 말인가?
풍산홍씨 3만6천명에 129명이면~!
광산김씨가 실제 왕족들과 지배세력말고 순수 한 실력으로 봤을때는 거의 최고입니다
대제학을 수없이 배출한 학문의 최고봉이였지요 문반 최고 가문입니다
그 외에는 사실상 문반이기보다 세도가들이지요
? 몇 가문은 청백리로 유명한 가문들인데 세도가 취급해버리네요?
광산김씨가 최고여 이것드라 ㅋㅋ
@@오이김밥-c3b 나대는 것도 최고인가봐요 ㅎㅎ
대제학 얘기를 꺼내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영의정도 부러워했다던 대제학(문과 정2품)을 배출한 집안 중 3대가 자리에 오른 집안이 전주 이씨, 연안 이씨, 달성 서씨, 광산 김씨가 있습니다. 하지만, 3대가 연속(할아버지-아버지-아들)으로 대제학에 오른 집안은 연안 이씨뿐입니다. 세종대왕은 유일하게 자신의 길을 내어준 집안도 연안 이씨 집안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를 부를 때 '연리광김'(연안이씨 광산김씨)이라고 말했죠. 그러나 광산 김씨도 분명한 명가 중 한 집안입니다.
@@welfarestory 3대 연속으로 찾으면 가문 4개나 나오는데요 연안 이씨가 유일한 가문이 아니라 3대가 연속으로 홍문관 대제학을 한 '최초의' 가문이라고 역사자료에 나옵니다...
조선시대때 과거시험 권력을 잡은 쪽에서 자기쪽에 사람들을 심을려는 그런 요즘으로
치면 짜고치는 고스톱 같은 시험 이었을 걸로보임 게다가 출제자가 의도하지않은 답을
써내면 무조건 탈락 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흔드는 시험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세도정치 이전의 과거급제 숫자가 핵심임..세도정치 후 과거는 세도가문의 요식행위~~~
우리 엄마 집안인 경주 김씨만 있네.😢
인구를 감안하면
연안이씨
여흥민씨
한산이씨
광주이씨
연안김씨
풍산홍씨가 공부를 잘했다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연안 이씨입니다
경술국적 민병석 배출한 친일파 가문 여흥민씨
@@루디븐 재미있네요.
당시 인구수는 지금과 많이 다를겁니다. 조선후기에 족보가 달라졌지요ㅋ 지금은 노비가 없으니...
조선시대는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새 학자들 보면 정씨나 송씨가 인구수에 비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난 다른 성씨임.
전주 이씨 하나가 경상도 성씨 다 합쳐도 전주 이씨 하나를 못이김. ㅎㄷㄷ
인구수 대비 급제자 1등은 풍산 홍씨네요
전주 이씨는 벼슬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주 이씨 중 유명한 정승이 있나요?
삼전도비문을 지은 백헌 이경석이 영의정 오리대감으로 불리는 청백리표상 이원익도 전주이씨 정승입죠
유명한 친일파들은 많습니다
을사오적 이근택 이지용
정미칠적 이병무 이재곤
경술국적 이병무
소름 돋겠지만 전부 전주이씨이며 이중 왕족도 있었습니다
밀양박씨 7위..
광산김씨 화이팅~
그래도 밀양박씨 밑이네
김해김씨가 인구가 제일 많은데 29위밖에 안되네허씨가 없다는데 놀랍다 내가 반이 전주이씨니깐 위안 삼야야하나 전주이씨는 당시 왕실이었으니깐 가산점이 있었을것 같다 이순신장군 옆에 이억기장군이 있었던거 처럼
문과만 보면 그런거지요.
무과를 보세요.
@@gbu-cu5sq 문과만 보면 그렇겠지요. 무과랑 문과랑 합하면 약 7~8%가 김해 김씨 입니다.
조선 초기 양반 비율에도 김해 김씨가 7~8% 정도 되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어요.
지금 대한민국 인구 비율이랑 크게 차이가 없지요?
족보가 집집마다 있었는줄 아세요?
무식하면 그냥 입닫고 계세요
지금도 줄서기 끌어주고 하는데 저때는 말할것도 없었겠죠.
남양홍시가 최고네...
역시 왕족이 과거합격자수도 가장 많군요
출처가 어디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