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님의 공이 크시네요. 두루 스펙트럼이 넓으셔서 이런 자리와 토론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 것 같아요. 전 감리교인입니다. 다메섹님 주장을 듣고. “아.. 나 알미니즘이었네” 싶네요. ㅎㅎ 전엔 알미니즘은 이단이라서 감리교인은 알미니안 아니야! 라고 개념도 모른채 부정했고든요. (아델포스님의 감리교 스탠스는 감리교내 소수의 칼비니즘 웨슬리안들의 스탠스인거 같고요) 오히려 다수의 감리교인들은 (다메섹님의 스탠스가 정확한 알미니즘이라면) 알미니안이 맞는거 같은데요. ㅎㅎ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감리교회 안에서 목사님들께 이런 비유로 많이 설명을 들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려면 물밖에서 손을 뻗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도 내민 손을 붙들어야 건짐받을 수 있다. 그런데 건짐받은 놈이 뭍에 나와서는 내가 당신 손을 잡은 덕에 나왔다며 으스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공로없는, 죄에 빠져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인에게 손내밀어준 거 자체로 이미 “은혜”이고. 그것을 붙드는 믿음은 “자유의지”라고. 그리고 감리교인들은 대개 교리에서 “만인구원론”을 배우거든요. 그런데 “만인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만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라는 정의로서 만인구원론을 배워요. 그에 반해 우림님 말씀하신 교정적 형벌에 관한 주장은 아마 과거에 “사랑이 이긴다” 였나? 랍벨이란 목사님이 쓰신 책에 있던 내용과 같은 걸로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림님 말씀하신대로 구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역겨운 죄인이면서 동시에 외롭고 불쌍한 약자들이니까요 ㅠㅜ
제가 발제할 때 밝힌 목적이 달성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학문적 필요에 따라 웨슬리-알미니안주의라고 묶어 부를 정도로 둘은 종이한장 차이 밖에 안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대다수 감리교인들은 알미니안이에요. 알미니우스는 어쩌면 웨슬리보다 훨씬 위대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신학사에서 가장 억울하게 매도당한 사람 중 하나죠. 아, 사실 그것도 장로교 교세가 쌘 한국 한정이긴 합니다.
난상토론 방식의 가장 큰 단점은 몇개의 논제에 대한 여러 관점들의 견해들을 공유하고 그것들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것이 불가능하고, 서로 다른 전제들을 가지고 반박을 하다보니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처럼 결국 신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없고 누가 더 설득력있게 말을 잘하냐를 가리는데에만 초점이 가는것 같습니다. 이에대한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것이 성경적인지에 대한 물음과와 대화는 계속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므로 항상 마음속으로 응원합니다^^ 저도 완벽한 사람이 결코 아니기에 오해할 수 있지만 저는 처음 작은거인님이 다메섹님에게 한 질문과 다메섹님의 답변에 대해 부족한 글을 남겨보려 합니다. 먼저, 작은거인님의 질문의 의도는 하나님이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예수님을 믿을지 안믿을지를 기준으로(조건적으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한다면 그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될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것같았고, 이에 대한 다메섹님의 답은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면서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은것이 그녀의 용기였고 그래서 그 여인을 구원자라고 보는 사람이 없듯, 믿음의 주체가 인간이라는것이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말과 상반되지 않고, 믿음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이 무언가를 믿을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으신다는 내용이었던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칼빈주의는 믿음의 주체가 인간인것과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으신다는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단순히 하나의 시점이나 사건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태초전부터 재림까지의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로 본다면(구원의서정), 믿음은 거듭난 신자가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위해 삶의 근간으로 삼기위해 갖게 되는것으로 칼빈주의는 보는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이 그의 예지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그들의 믿음을 미리보시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보는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가진 각자의 전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구원받은 이후(더 정확히는 중생된 이후)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보고 알미니안주의는 어떤이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보는것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이해한것이 어느정도 맞다고 가정하고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예정할때,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으므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 그렇다고 무작위적으로 선택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만의 기준(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믿음을 가지게 될지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고 말 할 수 없으며,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분도 하나님이시요 기르시는분도, 그 열매를 거두시는분도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여전히 죄성을 가진 피조물은 그분의 뜻과 역사하심을 다 헤아릴 수 없으며, 그저 그분이 주신 조건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 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시로 드신 (오토바이 사고 이야기) 사람들을 향한 아픈 마음들이 이어져서 지금의 결론에 다다르셨을 것을 생각하니.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귀하시단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그리스도인이서 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서울대생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1퍼센트라고 하던데. 서울대 기독연합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해요. 진리 위에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 이루어가 주세요~
@@Nathan-nm5oc제가 알기론 '영원한'을 다르게 해석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만인구원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영원한'이라는 단어의 원문을 보면 무한한 게 아닌 유한한 것에 쓰이는 단어라고 근거를 삼고 있고, 초기 기독교때 이미 그것을 주장한 교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은 존재한다고 보는 만인구원론자들은 거기서 일정기간까지 처벌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더라구요.(참고로 저는 만인구원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좋은 취지와 의도로 컨텐츠를 진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 분들이 보면서 많이 배울 것 같습니다. 다만 참석자 분들에게 몇 가지 채워졌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구원론을 다루려면 신론과, 인간론, 기독론, 성경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상대에게 구원론을 비판받을 때 말문이 막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자가 알미니안이나 만인구원론 같이 경험주의적 신학의 공격에 답변하려면 명제적 교리의 문장만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교리의 근거가 되는 조직신학적, 성경신학적 토대들이 있어야 합니다. 칼빈주의는 경험에 근거한 논증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상대의 페이스(경험에 근거한 논증)에 자꾸 말려 보였습니다. 그게 부족해 보여 아쉬웠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성들이 전제되어야 전택설과 예정, 영원구원이 설명될 수 있고 인간의 존재 목적과 영혼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기초 교리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믿음이 왜 필요한지 그게 왜 선물인지, 왜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개입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성경해석학이 다르다는 것도 중요한데, 언약신학에 대한 견해 차이는 성경해석학의 차이를 만들고 특히 구약 본문들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본문을 증거로 인용하면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다른 구원관을 가진 사람과 소통을 할 때는 단순히 구원 교리들을 설명해주는 걸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구원관은 다른 신학체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며 다른 신학체계는 다른 성경해석학적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소통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다른 성경관의 문제와 다른 신학체계의 문제 전반을 다루며 대화하는 게 좋습니다. 필요한 부분들을 더 많이 공부 하셔서 유익한 사역들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런모습의 자유로운 신학적 발상을 서로 공유하는것은 너무도 건전하고 좋은 모습인것 같습니다 지금껏 종교적관점에서의 지지학파간의 갈등이나 교단간의 교류가 아닌 교전만을 봐오다가 정상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해 좀더 이해하고 가까워지며 상호검증/보완을 하는모습은 중앙집권화에 대항할수있는 탈중앙의 답안지가 아닐까 생각되어지는 좋은 예능이었다 생각되네요 앞으로의 다메섹의 미친기획력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다니면서 칼빈주의적 설명만 들었기에 이것 외 다른 해석이 가능한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 토론을 통해 더욱 풍성하고 깊이있게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칼빈의 시대적 한계도 있겠지만,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만 함몰되어 여러 오해와 실수를 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생각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며 더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어졌습니다 :) 감사합니다!
1:02:09 하나의 ‘XX주의’가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이해되게 하기 위해선 부분만으로 전체 교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 같네요🥹 단적인 예로 TULIP을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나 칼빈주의의 꽃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에서도, 사실 TULIP은 칼빈주의 전체를 해석하는 개념이 아니라, 당시의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주장한 5가지 논의를 반박하고자 설명한 반박문인데 그걸 “칼빈주의” 전체로 해석하는 오류를 보게 됩니다. “단적인 문장 하나만으로 칼빈주의의 교리가 빈약하다 혹은 모순적이다’ 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겠죠. 칼빈주의 전체를 다 이해하는 선 안에서 올바르게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갈님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심판때 최종적으로 그 행위에 의해 확정된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정말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기쁨마저 누릴 수 없다면 이것이 성경적인가?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땅에서는 다른 즐거움이 없을지라도 생명책에 기록된 기쁨을 허락하시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두번째 질문은 개인적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행함없음을 늘 탄식하고 반대의 경우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에 만족합니다. 새관점을 가진다면, 오히려 자신의 행위에 겸손한자는 구원의 기쁨보다는 심판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행위에 만족하는 교만한 자는 구원의 기쁨까지도 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메카니즘인가? 어떻개 생걱하시는지요?
안녕하세요. 갈입니다. 최종적 심판때에 구원이 확정되는건 꼭 새관점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칼빈주의 같은 경우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겠죠. 하지만, 내가 이미 종말의 심판까지도 결정되었다는걸 어떻게 아는걸까요? 하나님만이 아시는것 아닌가요? 즉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해봤자 그게 실제 믿음이 아닐수도 있는거죠. 칼빈주의 세계관조차도요. 그리고 최종적 심판때에 구원이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기쁨의 이유가 안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때 그 사람이 되갚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 많이 따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아무 조건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었죠. 그 선물이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선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떤 존재가 나를 조건없이 바라봐 준다는 것은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세상을 주관하신 하나님이 그러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바울 조차도 본인이 도중에 탈락될까봐 두려워 하기도 했습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4-27) 바울이 복음전파를 계속하는 이유는 바로 상(종말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심지어 도중에 버림 받을 가능성 까지 제시하지요. 그럼 바울도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걸까요? 다른 말씀도 제시해 드릴게요.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0-14) 바울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잡았다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구원)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했을 뿐이죠. 하지만 바울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최종적 심판이 유보됐다고 하더라고 기쁨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를 봐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그리고 새관점을 가진다고해서 본인의 행위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차피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일일 뿐인데 그게 어떻게 교만한 마음으로까지 이어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새관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에서도 그런 양상은 똑같이 나타나죠. 본인은 이미 믿었으니 구원은 확정된 것이고 교만한 마음이 나타날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칼빈주의는 진짜 믿으면 그런마음 안나타난다고 하잖아요? 새관점도 비슷하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진짜 믿으면, 본인의 행위로 거들먹거리지 않아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했던 부분이 바로 그부분이니까요. 율법 조항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실제로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냥... 딱히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엔 저도 우림님과 비슷하게 만인구원론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긴 합니다. 좀더 정확히는 만인구원가능성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제 구원관에는 행위가 필수입니다. 바울이 말했듯, 그 선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인간이 마땅히 도달해야할 의의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경주를 현생에서 마저 채우지 못하면 죽어서 채우게 되는, 어찌보면 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과 같은 기능을 하는것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자가 적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갈 자가 적다는 의미는 아닐까 싶어요. 연옥이 뭐 불지옥 같은 곳이 아니라 남은 경주를 채워야하는, 하나님의 공평, 공정하심을 실현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곳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분을 품는 분은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해볼때 천국에 바로 들어가지 못해도 나중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성경의 여러 의문들이 해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솔직히 우리중에 그 상급을 그렇게까지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습니다.천국은 분명 고통이 없는 곳일텐데 상급의 많고 적음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근데 성경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순서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 상급의 의미가 천국에 좀더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고통스러운 곳에서의 시간을 좀더 단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선한 행위는 구원에 있어서 그 의미가 큽니다. 근데 만인구원론인것은 아니에요. 만약 누군가가 끝까지 완악하게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의 자의로 영원히 고통스러운 곳에 머물게 될 수도 있겠죠. 원의 기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겠구요.
토론 중에 얘기하진 못했지만, 저도 만인구원가능성론은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처벌로 사람이 회심할 수 있는가에 의문이 있어서 만인구원론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처벌로도 회심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봐요. 또한, 만인구원론의 교정적 지옥관과 가톨릭의 연옥은 또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연옥은 신자가 가는 곳입니다. 신자들이 다 갚지 못하고 회개 못한 죄만큼의 처벌을 받는 곳이죠. 가톨릭은 공식적으론 비신자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근데 반대로 구원취소 될 수 있다고 믿어도 상처줄 수 있는거 매한가지 아닐까요? 너 구원 취소 된거고 너 지옥가 그리고 구원취소 또한 안정없는 늘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애초에 믿음을 떠난 마당에 그거에 상처를 받을까요? 그래서 저는 상처 그런거 떠나서 성경에 근거한 논의가 더욱 적합하다 생각해요 누가 상처 받는다고 성경이 변하는건 아니잖아요 어떤 결과를 위해서 주장을 바꾸는건 별로라 생각합니다 인본주의도 많고요
@@DamascusLiveTV 음 저는 둘다 있다고는 생긱하는데 두 논리가 섞일 수 없어서 한 논리가 맞고 한 논리로 전부 해석 가능하다 생각해서요 근데 웨슬리는 구원취소를 말하는데 한국 감리회는 왜 구원 취소를 말하지 않나요? 장로회 색이 한국에서 강해서 그런가요? 이해해보고 싶은데 다 칼빈 같아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에서 이것은 무엇일까요? 구원인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기 때문에 구원도 되고 믿음도 됩니다.(다메섹님이 구원이 선물이고 믿음은 아니라고 했는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즉 믿지않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에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뿐만 아니라 믿음도 선물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가 믿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어야겠다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불신자가 믿음을 선택하지만 믿어지니까 믿음을 선택한 것이지요, 안믿어지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자만이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선물(거저 주는 것)이고 은혜입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어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기 선택이라면 자랑할 수 있겠죠. 엡2:8절 말씀이 선물을 강조하고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자기 선택이면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을 선택해서 구원을 얻었기에....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믿게 됩니다). 마13:10-15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비유로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잘 알아듣도록 하시기도 하지만 비유로 말씀하셔서 택함받지 못한 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이 생길수가 없습니다(신천지는 이것을 자기들 비유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36:3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보고도 믿지 않는자는 성부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닙니다. 성부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예수님께 주시고 주신 자를 예수님은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아버지가 예수님께 주신 자만이 예수님을 믿고 믿는 자는 예수님이 결코 내쫓지 않는다는 것은 주신 믿음을 뺏지 않으신다는것입니다. 알미니안들은 에베소서1장의 택하는 것이 개인이 아니라 단체(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이다고 호도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을 부정하고자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이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도 많았지만 믿지 않는 자도 많았기에 이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들 중에도 택함받는 자가 있고 불택자가 있다는 뜻입니다.(에베소서1장의 택함이 개인의 택함이요 구약에서는 민족의 택함도 같이 있다는 뜻입니다, 민족의 택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여 구원하셨습니다, 민족의 택함도 만인구원설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엡1: 5-6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거저 주시니 은혜입니다. 거저 준다는 표현이 은혜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자기의 결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알미니안은 마지막 결정은 자기가 합니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결국 결정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은혜가 될 수 없고 자랑이 됩니다. 거저준다는 말속에 믿음을 거저 주심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저 단순히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지금 시대에도 한번 아들은 아무리 망나니라도 영원히 아들입니다. 아들의 특권을 주었다가 뺏는 분이 아닙니다. 아들로 태어나면 영원히 아들의 지위가 유지되니 또한 그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고전2:4-5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지혜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때도 성령을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고 전도대상자도 자기가 이해되어서 믿는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을 통해 풀어보았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데 절대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후에 빼앗아가지는 않죠. 요10:27-28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양으로 선택된 자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믿어집니다). 그렇게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준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준 그 순간 영생의 효력은 영원합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주신 믿음을 빼앗지 않고 믿음을 빼앗을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부장의 믿음과 혈루병여인의 믿음은 구원얻는 믿음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얻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성령으로 거듭나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옷자락도 만졌고 말로서 고쳐지기를 요청했습니다. 이미 구원얻는 믿음을 가졌기에 병고침의 믿음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것은 옷자락을 만지면 병을 고침받을 것이라는 믿음대로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구원이 병고침)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믿음을 가졌지만 실제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 믿음대로 순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얻는 믿음과 약간 다른 믿음입니다. 신앙생활할 때 필요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 기도응답의 확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똑같이 구원얻는 믿음이 있었어도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이 부족했다면 그들은 병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구원얻는 믿음을 백부장과 같이 가졌지만 병고침에 있어서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기에 말만해도 된다고 말하는 백부장의 믿음이 큼을 예수님이 칭찬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얻는 믿음도 믿어지니 자기가 그 믿음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할 때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영접기도를 하게 됩니다. 영접기도 하기전에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을 선택해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영접기도전에 믿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미 그의 마음에 계신 상태입니다. 실제 계3:20절이 불신자에게 영접을 권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실 회개의 기도를 말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전도할 때 믿는 것(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영접기도문을 써도 된다고 생각은 합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큰 정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주인되었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으로 믿으면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100%일치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00%로 가기위해 힘쓰는 것이 성화이지요. 어떤 사람은 믿지만 주께 순종하는 행함이 5%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10%, 어떤 사람은 50% 어떤 사람은 89%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때는 90%인데 1년뒤에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3%일 수 있고, 즉 행함을 기준으로 구원을 정하면 우리는 도저히 그 기준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 행함을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주장하는 곳이 카톨릭이요, 칭의유보론이겠죠... 행함으로 구원얻음을 강조하면 행함을 잘할때 죽으면 천국이요, 행함이 약할때 죽으면 지옥입니다.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구원얻는 믿음을 선물로 은혜로 주시는데 그것 모르겠습니까? 그 마음에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이 영원히 거하시는데 천국문 앞에서 그가 믿음이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성령하나님이 그 사람안에 거하시며 믿음을 주고 계시는데.... 또 죄에 대해서 원죄와 자범죄로 두가지 차이를 이해해야합니다. 성령님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십자가의 피로써 원죄와 자범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원죄가 용서되었으니 원죄의 죄책인 지옥이 면제받습니다. 그런데 원죄의 죄성이 있으니 자범죄를 계속 짓습니다. 그 자범죄의 죄책은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가 껄끄러워집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범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서먹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아버지께 자백하면 아버지하나님은 우리 죄(자범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자백하지 못한 생각나지 않는 자범죄도)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됩니다. 여기서 자백은 그저 죄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죄를 슬퍼하고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까지 포함입니다. 그래서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일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 자범죄를 매일 씻어야 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이미 온 몸이 깨끗(원죄의 사함)했기에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자범죄의 씻음)). 따라서 자범죄를 많이 지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아직 회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어서 일반불신자처럼 죄를 많이 지었다고 지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다면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면(믿는 자는 성령의 인침이 있습니다) 그는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을 알미니안들이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니니 두려움으로 노력하라는 말로 이해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앞뒤구절의 의미를 잘 봐야합니다. 빌4:2절처럼 지금 빌립보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어서 1:27절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너희도 내가 없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서로 겸손히 하나되고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권면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 합당하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행위까지 완전하게 하여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구원이 확정되지 않으니 두려움으로 이루라고 이해하면 그가 어떻게 구원얻는 믿음인지 행함으로 판별해야 하는 칭의유보론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히6:5-7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딱 가룟유다가 이랬습니다. 예수님과 다니면서 빛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고 은사도 맛보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고 말씀과 능력도 맛보았으나 맛만 보았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여 세례를 주시지 않았기에 그에게 사단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지금 교회에서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예배에 은혜를 맛만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한 것처럼 죄를 뉘우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성령훼방죄는 죄를 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믿는 자는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절대 성령훼방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성령을 지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고의로 훼방하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화인맞아 사단의 사람들입니다. 히6:5절 말씀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옳은지 다 경험하고 맛보았지만 지속적으로 고의로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믿음을 배반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십니다. 여기서 알미니안은 우리를 개인적 우리로 이해하지 않고 택한 민족으로 이해합니다. 민족으로 이해해도 선택받지 못한 민족은 뭡니까? 하나님은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시고 선택받지 못한 민족이든 개인이든 구원으로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쁘신 뜻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또 알미니안은 예정을 구원의 예정이 아니라 구원받는 방법(아마 십자가)을 예정한다고 합니다. 제 입장은 말도 안되는 해석입니다. 앞뒤구절을 봐도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어서 그게 은혜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아들은 개인이고 구원받은 개인을 말하고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혼과 결합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아들로 태어나면 영원히 아들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다메섹님이 다른 영상에서 토기장이의 선택이 민족을 선택한 것이라고 개인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참... 민족 안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엄청 많았습니다. 선택이 민족이라고 해도 다른 민족을 선택하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욥의 항변에 대해 하나님은 계속 창조주의 권한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대해 우리가 그것은 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노아의 가족만 택함받아 구원받았습니다. 노아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택함받았기에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노아도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택함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는 것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다 봤는데... 이거 큰일났네 너무 재밌는 연속극 보면서 다음편 기다리듯 기다려야하나 하는 마음이 드네요. 그리고 현역 목회자나 전도사를 안끼워줘도 재미가 없을테고 끼워줘도 말을 가려서 해야하니 아델포스 짝이 날꺼고 이 부분을 고민해봐야 겠습니다. 계륵 같습니다. 교역자들이 마음놓고 말할수있는 주제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긴하는데 그런게 과연 있을까싶으네요 우림님 힘내세요. 깊은 뜻이 있어보이는데 설명을 다 못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모두가 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히 살기를 희망한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어떻게하면 여원히 살수있는가 그비법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라고 하는것을 하면 되는것이고 하지말라고 하는것을 하지않으면 된다. 이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자들이 참 많은데 예수를 믿는 모두가 주여~ 믿습니다 라고 예수를 부르고 믿는다고 하는데 당사자 예수께서는 뭐라하는지를 한번 살펴보면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__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영상 마지막 질문에서 30년동안 믿음을 잘 고수하다가 한번 삐딱선탔다 그리고 금방 저세상 가버렸는데 믿음이 없는건가 ? 라고 했는데 인간들의 조상 아담을 한번 생각해보면 그답이 금방 보일것이다. 아담은 하느님 여호와를 믿었다 그러나 딱한번 하느님의 법을 어겼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법대로 아담을 사형시켜버렸다. 이와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하느님 여호와의법은 항상 똑같다. 예수께서 알려준 비법은 이렇다 마 24:14 행1:8 계 22:12-15 계시록 22:12-15 예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12 ‘보아라! 내가 속히 오겠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으니, 각자에게 행위에 따라 갚아 주겠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고,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14 자기의 긴 옷을 빠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들로 가는 권한을 얻게 될 것이며, 문들을 통해 도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5 개들과 영매술을 행하는 자들과 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일삼는 모든 자들은 도시 밖에 있을 것이다.’__ 생각들을 해보시라! 아무리 불완전한 인간들이라도 자신들의 의지대로 예수께서 알려준 비법을 따를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지킬수있는것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지킨다면 믿음이 부족한것이고 영생은 물건너가는것이고 아담의 발자취를 따르는것이다.
개인적으로 장로교 측에서 인간의 행위? 인간의 노력과 의지? 를 인간의 '공로' 라고 부르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들리는데, 전 그것은 인간의 공로라기보다는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 마땅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기보다는 인간이 마땅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봅니다. 그리고 성경을 봤을때 구원이 한번에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날까지 이루어가는 것이라 보는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도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은 구원의 여정을 달리기에 많이 비유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약 9번에 걸쳐 달리기 비유가 나오는 것으로 알아요. 근데 경주에 참가한 것 만으로 달리기가 완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결승선까지 달려야 완성이 되죠. 근데 구원론은 진짜... 답이 안나오긴 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구원론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것이 큰 의미가 있다 보는게, 한국교회는 장로교가 압도적 주류를 이루고 있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영상의 아델포스님과 같이 감리교임에도 장로교와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예정론과 한구영구를 강조하는 장로교의 신학은 상당한 약점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되고 성경을 봤을때 그렇게만 생각이 되지는 않는 지점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것 외에 다른 생각을, 다른 주장을 못하게 되는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할때에, 이 토론은 굉장히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좋은 영상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이 진리입니다. 무슨 주의, 무슨 주의는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칼빈주의는 완전한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 하나님의 신권으로 하나님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변증학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으면 어떠한 행위도 소용이 없다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즉 신분의 변화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입니다. 그럴려면 원죄를 인정해야 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하나님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의 의를 행할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라는 것이 칼빈주의 입니다. 인류의 대표자이자 에덴동산을 대리통치하던 아담조차도 사탄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먹는 언약적 파괴로 모든 인간이 죄악아래에 놓였기에 모두가 사형수의 신분인 것이지요. 가장 예로 들 수 있는 부분이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켈리포니아 주지사로 있을때 노벨평화상 5번 후보에 올랐던 갱단의 두목이자 살인범이었던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가 사형선고 이후에 감옥안에서 아무리 착하게 행실하고 모범수로 행동을 하였지만, 결국 그의 신분은 사형수였고 아놀드가 그의 사면을 거부함으로 그는 결국 사형수로써 사형집행을 받습니다. 이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으면 어떠한 선행이라고 할지라도 본래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을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의 질문에는 요한복음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괜히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은 개인의 죄도 마찬가지이지만, 결국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개혁개정 성경에는 믿음과 신실함 이라는 단어의 뜻을 구분하여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마 현대적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안다 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까지 이며, 개혁개정에서는 구분이 없는 믿음과 신실함의 단어에서도 신실함이라는 단어의 뜻은 대체적으로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럽다 라는 뜻으로 인간 개인의 생각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셨을때의 하나님이 신뢰할만하고 순종 또는 복종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칼빈주의에서의 구원론 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말고는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는 사형수라는 신분 믿음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절대불가항력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는 사실이지요. 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단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지요. 하나님의 신권 즉 전지전능함에 근거한 구원론은 과연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할 수 없겠느냐의 문제로 봐야지. 구원을 한번 받은 신자는 그가 어떤 악한 행위를 하고 회개하지 않아도 결국 회개하게끔 하여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위격 또는 신격이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에게 없는 인격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성경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단으로 정죄한 이유도 신천지처럼 교회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에 교리가 생겨나고 교리가 발전되고 확립된 것이지. 각자 생각이 달라서 목소리 높이고 하나님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손을 들어줘서 손을 들어주지 않는 자들이 이단으로 정죄된게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고 2년이 넘어서 정탐꾼을 보냈을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보이는대로 이야기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르게 그 나머지 백성은 400년 넘게 애굽에 있으면서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방 우상숭배를 따르고 노동하게 한 하나님을 증오하고 미워했기에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어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했던 악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이 양육되어야할 땅에 38년을 지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 가 정답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의 이땅에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영혼 또한 외면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때 이스라엘 백성만 나오지 않았고,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대했거나 좋은관계를 유지했던 혹은 그 애굽 같은 민족가운데서도 외면당했던 백성들 또한 모세를 쫓아서 애굽을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십보라가 아니라 나중에 다른 여인과 결혼한 여인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애굽 여인인 이유도 모세를 쫓아 같이 애굽에 탈출한 이방인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도 그냥 그들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사랑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려 그들또한 하나님을 믿게끔 하고자 하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사명에서 스스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가이사만이 자신들의 왕이라고 이야기하며 메시야를 부인하여 유대인에게 있는 구원이 이방인에게 퍼지게 된 것이지요.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를 잘 생각해보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 것은 부인하지 못하며,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시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시조 중에 이방인인 룻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칼빈주의라고 하기에는 성경전체적인 숲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원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시면 잘 나와있고, 단7장? 인자이신 예수님을 봐도 잘 나와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아놀드 주지사 때의 예로 들 수 있겠고, 가룟유다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지만,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사역에 반하는 마음을 가진 정황들을 예로 들 수 있듯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룟유다 자신에게 있었다 라는 것이지요. 사울왕 또한 하나님이 세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을 세운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아니었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왕은 사람이 사람을 통치하는 왕이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하나님을 위해 통치하는 부왕의 개념이었고 아담때의 대리통치였습니다. 솔로몬이 고백할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백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것으로 사울왕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사람의 심중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와 택함과 계획은 대단히 성경적입니다. 다만, 그 예정과 섭리와 택함과 계획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느냐 믿지않느냐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않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진실 끝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만인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는 오직 선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어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노의자녀이며, 노의의지를 갖고 있고, 육신으로 치우치고 싶어하는 전적타락부패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신학은 변증학 일 뿐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를 변호하는 학문이지. 누가 옳고 옳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성경을 그냥 많이 읽으시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열매로 그 믿음을 안다는 것은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어느정도의 지표는 될 수 있지만, 행위의 중요성을 이야기해도 되지만, 행위 자체에 머무는 것은 깊게 들어가면 원죄를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역이 완전하지 않다라고 하는 불순함까지 이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느냐 의 개인적인 신앙에 대입해야지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원래 내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믿음을 개인이 소유한 어떤 기질이라고 혹은 개인의 노력이라고 한다면 머리카락 한 가락도 희거나 검게할 수 없다 라는 주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삶이라는 시간을 주시고, 공간을 주시고, 환경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실 뿐이지요. 다만 우리에게 인격이 있듯이 하나님에게 신격이 있음을 위격이 있음을 항상 인지해야 합니다.
칼빈주의자가 성경구절도 잘 모르고 자신이 뭘믿는지도 잘 얘기못하고 그러면 어떡하나요ㅠㅠ 칼빈주의자들이 제일 성경에 의존하고 가장 성경중심적으로 가려고 노력한다는 이미지를 갠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 성경이 어떻게 얘기하는지는 말 못하고 그냥 논리싸움만 하려고만 하고 참 아쉽네요
만인 구원론은 토론 내에서도 엄청난 맹점이 많습니다. 1. 일단 만인 구원론은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는 얘기 입니다. 2. 인본주의적 사고를 신앙에 밀어넣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금의 가족과 친구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가 아닌 하나님과 나 와의 철저한 1대1의 관계에서 이뤄집니다. 이 관계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델포스님이 홀리컴벳에서 보여주신 진중한 모습들이 하나도 없고.. 너무 장난식으로 말씀하시는게 안타깝네요.. 웨슬리안이 어떻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의 비판을 막아내고 조화를 이루었는지 전혀 나타내시지 못한거 같습니다.. ㅜㅠ 준비를 단단히하고 매치된 토론이 아닌거 같아 좀 아쉽네요. 주제는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인데..
이런 식으로...... 아들한테 화를 내면 친아빠가 아니다 친아빠라면 화내면 안된다. 아니다. 친아빠라도 화는 난다.. 화내는거가 아빠인걸 부정하진 않는다.. 화를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맴매. 이빨 빼기. 회초리. 다리부러트리기 등등... 어디까지가 아빠로 가능할까요? 이 말 어떻게 보이나요?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게 제게는 먼가 빠진것처럼 이상하게 보여요.
만인이 다 구원 받는다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판단컨대 창세 전에 구원자가 정해졌다 하는 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다.... 어차피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선 과 악 이 나뉘어있고 용서 할 수 없는 악은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판단은 창조 주 절대자 가 할 일이다 헌데-.- 인간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생각과 마음은 공감하나, 그 것을 이루려는 것은, 공감이나 이해하기 어렵다 신도 할 수 없는 불가능 이라 여겨진다 -.- 말 안되나...~!!쩝 이것도 모순이고....~~!! 쩝
구원론에 대한 개인적 생각인데, 하나님의 예지예정?은 엄격한게 아니라 유연하지 않을까요? “큰 그림”은 있어도 그 그림이 아직 다 만들어진건 아닐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다면, 그럼으로 인해 우리의 삶 속에 필연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져 있다면 어렵더라도 예정은 바뀔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지는 틀린게 아니냐? 만약 예지가 “필연”을 말하는게 아니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필연과 자유의 종합은 가능성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여부를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서 삶 속으로 투신하는 겁니다. 구원이 “필연”의 영역에 머문다면 여러 사역들은 단순 사후과정으로서 일견 의미없겠지만, “가능성”의 영역에 머문다면 구원을 “얻고자(혹은 받고자)“ 애쓰는 행동들은 모두 의미있게 될것입니다. (아직 신학적 지식이 모자랍니다. 혹 이단적이거나 비성경적이라면 문제제기 부탁드립니다.)
우림님께 질문드립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믿지 않고 죽은 아빠에 대해 묻는 어이에게 우림님은 진실하게 '너희 아빠는 지옥에 가셨지만 결국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게 되실거야'라고 답하신다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목회적 차원에서 옳은 것은 어닌 것 같습니다. 첫째, 일단 지옥에 갓다고 말하는 것. 둘때, 결국 천국에 갔다고 말하는 것. 아이는 첫째 대답에 우울할 수 있고, 이어진 둘째 대답에 그럼 저도 안 믿다가 죽어서 믿을게요.라고 답할 수 있다는 거죠. 결국 '영벌을 인장하지 않는 만인구원론'은 이런 문제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칼빈주의 예정론으로 해결됩니다. '너희 아빠가 살아계셨을때 믿지 않으셨다해도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면 눈감기 직전에라도 믿음을 선물 받으셨을거야. 걱정하지말고.. 아마 너같이 착한 아이를 가지신 걸 보니.. 아빠는 선택받으셨을 거라 선생님은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예수님 잘 믿자. 천국가서 아빠 만나야지..알았지?' 이 대답이 더 낫지 않을까요? 굳이 성경을 뒤틀지 않아도,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만 우리가 잘생각해본다면....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말씀해주신다면 저와 크게 다르지않은 목양적 관심사를 갖고 계신것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이(예정) 우리가 소망을 가질 근거이기때문입니다 두번째 말씀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선 저는 죽기 전에만 회심할수있다는 입장일 때에도, 사람이 언제죽을지 모르니 빨리 회심해야한다는 논리에 반대합니다 회심의 긴급성은 언제 죽을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된 기쁨의 길이자, 우리의 깊은 필요가 채워지며,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피조물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첫번째 말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아이가 낙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낙심할 일들이 참많고, 비가역적인 상실과 실패의 경험이 있지만, 성도가 소망을 가질수 있는 것은 그러한 상실과 실패보다 최종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더크다고 가르치기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상실, 슬픔, 악을 외면하지도, 패배하지도 않게 됩니다. 저도 만인구원론이 많은 문제들. 특별히 심판주이신하나님의 엄위하심을 훼손할 여지나, 전통적 해석과의 충돌등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잘 주고받는 이야기가아닙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들, 이웃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무수한 죽음앞에서 그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한 소망을 생각할때에, 연역적으로 갖게 되는 견해인것같습니다 선생님처럼아이에게 조언하시는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림님은 아니지만, 좋은 반론이신 듯 합니다. 허나, 칼빈주의 또한 동일하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이를 기만할 수 있다는 것. 나중에 천국에서 목사님이 우리 아빠 천국 갔을거라 했는데 왜 없냐고 절망할 수 있죠. 그걸 떠나서, 그저 순간을 넘기기 위해 목회적 거짓말을 하는게 옳은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빈주의 입장이라면 차라리 모른다는게 정직한 답입니다. 둘째로, 아이가 이 경우에도 "평소에 안 믿어도 어차피 내가 선택된 사람이면 죽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거죠? 그럼 나도 안 믿을래요. 방금 목사님이 저보고 착한 아이라 하셨으니 저는 당연히 선택받은 사람이겠죠?"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토론 중에도 제가 말했지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성경적 근거는 없거나, 있어도 아주 애매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메섹님. 답변 감사합니다. 첫째, 우리는 타인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소망을 담아 '~라고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전혀 기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중에 천국가서 절망할 일은 없습니다. 천국은 절망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죠. 둘째, 좋은 지적이십니다. 아이가 이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때,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됩니다. 착한아이는 왜 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착하다는 게 뭔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뭔지.. 이렇게 아이를 신앙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해야죠. 다메섹님은 믿음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만..질문이 있습니다. 다메섹님도 이런 감사기도 하시지 않나요? '하나님, 제게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퍼 칼비니즘이 문제이지, 이렇게 자신의 믿음마저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이게 더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완전한 예정보다는 고백적 예정을 취하는데요. 그래도 예정을 전혀 안믿는 것보다는 이 편이 더 신앙적인 것 같아요.~
@@grim_wonyi 우림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린 것은 굳이 만인구원론이라는 이단성의 오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정통신앙안에서 이 목양적 문제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훼손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면서 목양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오해받을 수 있는 스탠스를 취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OJCKYG네, 말씀주신대로 저도 신앙적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믿음마저도 그분이 주신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개인의 신앙고백, 말하자면 감사에 따른 수사적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쎄' 혹은 '내가 지금 이렇게 밥 먹고 사는 건 완전히 부모님 덕분이야' 같은 사랑을 담은 수사적 표현이죠.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 내에서 고백될 것들을 너무 기계적인 공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칼빈주의의 문제라 봅니다. 믿음이 선물이란 말이 하나의 공식이 되는 순간, 엄밀히 말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뒤틀리고 기괴해지고 말죠. 또한 이것을 교리로 세웠을 시 남들에게 적용하게 되며, 그 적용은 누군가에겐 희망이겠으나 다른 이들에겐 너무 폭력적이고 절망적인 선언이 됩니다. 누군가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믿을 수 없단 소리거든요. 마지막으로, 만약 믿음이 선물이라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일부러 유기하신 건가? 하나님은 오직 일부만 사랑하시는가?' 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고민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하나님을 악마보다 못하게 만드는 교리라고 강하게 비판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하이퍼칼비니스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엄밀한 칼빈주의자와 물탄 칼빈주의자만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칼빈주의는 내적 논리들이 서로를 상호보완하며 거대하게 구축된 하나의 논리 탑과도 같습니다. 이는 분명히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합니다. 중간에서 몇 가지를 맘에 안 든다고 빼면, 마치 젠가처럼 칼빈주의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정말 인간의 반응을 완전히 배제하고 사람에게 불어넣어주는 것이라면, 그게 곧 자동으로 하이퍼칼비니즘의 모든 논리를 끌고 들어옵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한 세트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믿음이 선물이란 말을 절대 남들 앞에서 쓰지 않습니다. 또한 논리적, 성경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구원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하면 모순이 발생한다는 생각이듭니다 1. 김영현 전도사님에의하면 예지예정에 의해 예정된 자가 구원을 못받는 경우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예지예정도 구원받을자 못받을자 차이가 없다면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전도를 해야한다는 구호?가 모순입니다 2. 예지예정은 하나님이 그 사람이 미래에 순종할것을 미리 아시고 현재에 잠깐의 성령의 비추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을 믿었다가 돌이켜 떠나는 경우 즉,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에 의해서 예수님을 떠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가 배신할것을 아시고 구원을 안 하셨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한구영구'가 예지예정과 모순이 되는 지점입니다. 어떤사람은 배신할것을 아시고 구원을 안 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하시는 거죠. 3. 죄를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구원이 취소될수 있다는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전체 여정에서 자신의 죄 전체를 전부 깨닫고 회개하는 지점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내면은 양파껍질같아서 한가지 죄를 회개해도 더 깊게 들어갈수록 몰랐던 죄와 문제들을 더 발견하게 되는게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거의 '성장'을 하면서 일어납니다. 즉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내 죄와 나약함을 깨닫게 된다는것입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현재 가지고있는 나의 모든 죄와문제를 알지 못할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올바르게 걸어야 그나마 조금씩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짖고 늘 회개해야만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관점에서 바라보는게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 매우 좁은 시각으로 보는것입니다. 내가 어느정도의 죄인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현재 나의 회개의 행위의 유무가 구원을 흔들수 있는 큰 영향력이있다는것은 아전인수격 착각입니다
다시 한번 모여서 시청자 Q&A를 합니다. 해소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해소되길 바랍니다!
ruclips.net/video/Zu556DLWOQM/видео.html
ㅋㅋㅋㅋ아 진짜 웃기넼ㅋㅋㅋ 패배하면 아단행이라닠ㅋㅋㅋㅋ
이 토론 너무 좋습니다. 약간 처음엔 재미 없는데 억지로(?) 봤는데... 평생 동안 대충 생각하고 넘겨 짚고 묻어 두었던 질문들 다 꺼내서 서로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재미있었고 유쾌해서 좋았습니다.
이렇게 각자 입장끼리 토론하는거 너무 재밌네용ㅋㅋ 그리고 보면서 칼빈주의는 확실히 이런 토론에서는 약점이 너무 명확해서 두들겨 맞는(?) 느낌이 강한거같음ㅋㅋ
우림님 덕에 너무 좋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너무 큰 감동이며,늘 먹먹했던 부분이 무언가 풀립니다. 그 고민을 많이 하심에 감사합니다.
아 너무 어렵다.
이렇게 오픈된 컨텐츠 너무 좋은데...
이단조차도 대중에게 너무 합리적으로 느껴질 것 같아서 무섭다.
라이브 봤고 다시 보기도 또 봤네요
듣다보니 각각의 주장이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반박되는 부분도 있고. 너무 재미있습니다
리얼 꿀잼이네요 기독교적 컨텐츠로 이렇게 유익하고 재밌을수가... 아델포스님 유쾌하네요..ㅎㅎ
각 주의를 대표하는 초고수들 섭외해서 하면 교육과 재미를 챙길 수 있는 역대급 컨텐츠가 될 것 같네요
다메섹님의 공이 크시네요. 두루 스펙트럼이 넓으셔서 이런 자리와 토론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 것 같아요.
전 감리교인입니다. 다메섹님 주장을 듣고. “아.. 나 알미니즘이었네” 싶네요. ㅎㅎ 전엔 알미니즘은 이단이라서 감리교인은 알미니안 아니야! 라고 개념도 모른채 부정했고든요. (아델포스님의 감리교 스탠스는 감리교내 소수의 칼비니즘 웨슬리안들의 스탠스인거 같고요) 오히려 다수의 감리교인들은 (다메섹님의 스탠스가 정확한 알미니즘이라면) 알미니안이 맞는거 같은데요. ㅎㅎ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감리교회 안에서 목사님들께 이런 비유로 많이 설명을 들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려면 물밖에서 손을 뻗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도 내민 손을 붙들어야 건짐받을 수 있다. 그런데 건짐받은 놈이 뭍에 나와서는 내가 당신 손을 잡은 덕에 나왔다며 으스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공로없는, 죄에 빠져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인에게 손내밀어준 거 자체로 이미 “은혜”이고. 그것을 붙드는 믿음은 “자유의지”라고.
그리고 감리교인들은 대개 교리에서 “만인구원론”을 배우거든요. 그런데 “만인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만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라는 정의로서 만인구원론을 배워요. 그에 반해 우림님 말씀하신 교정적 형벌에 관한 주장은 아마 과거에 “사랑이 이긴다” 였나? 랍벨이란 목사님이 쓰신 책에 있던 내용과 같은 걸로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림님 말씀하신대로 구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역겨운 죄인이면서 동시에 외롭고 불쌍한 약자들이니까요 ㅠㅜ
제가 발제할 때 밝힌 목적이 달성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학문적 필요에 따라 웨슬리-알미니안주의라고 묶어 부를 정도로 둘은 종이한장 차이 밖에 안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대다수 감리교인들은 알미니안이에요. 알미니우스는 어쩌면 웨슬리보다 훨씬 위대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신학사에서 가장 억울하게 매도당한 사람 중 하나죠. 아, 사실 그것도 장로교 교세가 쌘 한국 한정이긴 합니다.
다마스커스 TV
최고로 유익한 채널입니다!!
늘 감사해요^^
토론이 아주 재미있네요..ㅎㅎ
2차 가즈아~~^^
너무 재밌습니다
다음 편 꼭 부탁드립니다
작거님 홧팅!
우림님 만인구원론에 동의하진 않지만, 정말 논리적으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모습이 최고인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정적
와우 진짜 재밌게 잘 봤습니다^^ 친밀함에서 나오는중간중간 예능 포인트까지 조화롭네요. ㅎㅎ 교리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해도 재밌겠어요.
저 아델포스님 책 샀어요ㅎㅎ 언제 다 읽을지~2024년 여름까지 읽는 게 목표입니다.ㅎㅎㅎ
❤
저는 서로가 의견을 내고 하는 모습들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 모두들 화이팅입니다 🎉🎉😊😊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그것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난상토론 방식의 가장 큰 단점은 몇개의 논제에 대한 여러 관점들의 견해들을 공유하고 그것들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것이 불가능하고, 서로 다른 전제들을 가지고 반박을 하다보니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처럼 결국 신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없고 누가 더 설득력있게 말을 잘하냐를 가리는데에만 초점이 가는것 같습니다. 이에대한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것이 성경적인지에 대한 물음과와 대화는 계속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므로 항상 마음속으로 응원합니다^^
저도 완벽한 사람이 결코 아니기에 오해할 수 있지만 저는 처음 작은거인님이 다메섹님에게 한 질문과 다메섹님의 답변에 대해 부족한 글을 남겨보려 합니다.
먼저, 작은거인님의 질문의 의도는 하나님이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예수님을 믿을지 안믿을지를 기준으로(조건적으로) 인간을 구원한다고 한다면 그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될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것같았고,
이에 대한 다메섹님의 답은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면서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은것이 그녀의 용기였고 그래서 그 여인을 구원자라고 보는 사람이 없듯, 믿음의 주체가 인간이라는것이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말과 상반되지 않고, 믿음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이 무언가를 믿을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으신다는 내용이었던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칼빈주의는 믿음의 주체가 인간인것과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으신다는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단순히 하나의 시점이나 사건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태초전부터 재림까지의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로 본다면(구원의서정), 믿음은 거듭난 신자가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기위해 삶의 근간으로 삼기위해 갖게 되는것으로 칼빈주의는 보는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이 그의 예지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그들의 믿음을 미리보시고 그들을 구원한다고 보는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가진 각자의 전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구원받은 이후(더 정확히는 중생된 이후)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보고 알미니안주의는 어떤이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보는것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이해한것이 어느정도 맞다고 가정하고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예정할때, 인간을 구원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으므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 그렇다고 무작위적으로 선택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만의 기준(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믿음을 가지게 될지의 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고 말 할 수 없으며,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분도 하나님이시요 기르시는분도, 그 열매를 거두시는분도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여전히 죄성을 가진 피조물은 그분의 뜻과 역사하심을 다 헤아릴 수 없으며, 그저 그분이 주신 조건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 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믿음이 있어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견지하시는 건가요?
이런 컨텐츠 너무 좋네요. 교단별, 신학노선별 구원론에 대한 폭넓은 볼 수 있는 영상이네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만큼, 나와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에큐메니칼을 향한 좋은 출발점인 거 같습니다^^
에큐메니칼로 떨어지면 육신적인 삶으로 이단인데... 안돼요^^
@@곽성민-g9i 애큐메니컬의 교회일치에 대한 출발자체와 정신은 이단이 아니나 선을 넘어서 종교 다원주의까지 가는 에큐메니컬은 이단이죠
이 토론 너무좋아 내용은 차치하고 너무재밌어요. 드림팀 입니다.
ㅋㅋㅋㅋㅋㅋ
아 근데 이번 영상은 진짜 재밌네요ㅋㅋㅋㅋㅋ 킬포가 너무 많음ㅋㅋㅋㅋㅋ
변증이 신학이다 구입했습니다^^
❤
변증?신학? 어렵다
기본지식이 있어야할것같아요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오해'네요 ㅋㅋ
아델포스가 괜히 우승자가 아님..ㅋㅋ
감사합니다 👍 👍 👍
유익하네요. 굿!!
다메섹님 볼수록 공부량이 느껴지시네요 대단하십니다👍
너무 유익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네요 ㅎㅎ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컨텐츠 많이 부탁드려요!
끝장토론 필요해보입니다!!!
반대로 감리교회 목사님들도 칼빈에서 볼 수 있는 한구영구 주장이나 용어를 자주 사용하시는 걸 넘어서 교육자료로 출판까지 하셔서.. 실제로 목회현장에서는 어떤 구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을 때도 있습니다
거 참 이상하네요..
토론하되 좋은 분위기에서 서로 존중하며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젊은 신앙인들이라 다른 것 같네요. 친절로 옷 입고 서로의 믿음에 대한 고민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이런 대화 문화가 확산되고 믿음이 더 성장하게 되기를 바래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펠라기안 이츠학도 껴주셈여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우림입니다 혹시나해서 덧붙입니다. 위 영상에서 제 발언들은 제 개인의 의견이고, 제 출신단체들과는 무관합니다. 출신단체들은 전통적 교리들을 지지합니다
예시로 드신 (오토바이 사고 이야기) 사람들을 향한 아픈 마음들이 이어져서 지금의 결론에 다다르셨을 것을 생각하니.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귀하시단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그리스도인이서 너무 기쁘고 좋습니다. 서울대생들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1퍼센트라고 하던데. 서울대 기독연합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해요. 진리 위에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 이루어가 주세요~
만인구원론에서는 한번 지옥이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는 걸까요?
@@Nathan-nm5oc제가 알기론 '영원한'을 다르게 해석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만인구원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영원한'이라는 단어의 원문을 보면 무한한 게 아닌 유한한 것에 쓰이는 단어라고 근거를 삼고 있고, 초기 기독교때 이미 그것을 주장한 교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지옥은 존재한다고 보는 만인구원론자들은 거기서 일정기간까지 처벌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더라구요.(참고로 저는 만인구원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00lee 지식공유 감사합니다😍
감탄한건 아델포스님과 우림님 이 두분의 발설에서 감탄했네요(좋은의미로
좋은 취지와 의도로 컨텐츠를 진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 분들이 보면서 많이 배울 것 같습니다.
다만 참석자 분들에게 몇 가지 채워졌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다면,
구원론을 다루려면 신론과, 인간론, 기독론, 성경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상대에게 구원론을 비판받을 때 말문이 막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자가 알미니안이나 만인구원론 같이 경험주의적 신학의 공격에 답변하려면 명제적 교리의 문장만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교리의 근거가 되는 조직신학적, 성경신학적 토대들이 있어야 합니다. 칼빈주의는 경험에 근거한 논증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상대의 페이스(경험에 근거한 논증)에 자꾸 말려 보였습니다. 그게 부족해 보여 아쉬웠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속성들이 전제되어야 전택설과 예정, 영원구원이 설명될 수 있고 인간의 존재 목적과 영혼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기초 교리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믿음이 왜 필요한지 그게 왜 선물인지, 왜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개입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성경해석학이 다르다는 것도 중요한데, 언약신학에 대한 견해 차이는 성경해석학의 차이를 만들고 특히 구약 본문들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본문을 증거로 인용하면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다른 구원관을 가진 사람과 소통을 할 때는 단순히 구원 교리들을 설명해주는 걸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구원관은 다른 신학체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며 다른 신학체계는 다른 성경해석학적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소통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다른 성경관의 문제와 다른 신학체계의 문제 전반을 다루며 대화하는 게 좋습니다.
필요한 부분들을 더 많이 공부 하셔서 유익한 사역들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런모습의 자유로운 신학적 발상을 서로 공유하는것은 너무도 건전하고 좋은 모습인것 같습니다
지금껏 종교적관점에서의 지지학파간의 갈등이나 교단간의 교류가 아닌 교전만을 봐오다가
정상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해 좀더 이해하고 가까워지며 상호검증/보완을 하는모습은 중앙집권화에 대항할수있는 탈중앙의 답안지가 아닐까 생각되어지는 좋은 예능이었다 생각되네요
앞으로의 다메섹의 미친기획력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정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다니면서 칼빈주의적 설명만 들었기에 이것 외 다른 해석이 가능한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 토론을 통해 더욱 풍성하고 깊이있게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칼빈의 시대적 한계도 있겠지만,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만 함몰되어 여러 오해와 실수를 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생각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며 더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어졌습니다 :)
감사합니다!
행위에 대한 의견입니다.
태어나서 장애를 가지고 예수를 믿지만 한평생 그어떤 행위적 요소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어떻게 판단 할까요?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그럼그는 행위로 구원받은건가요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은건가요?
믿음=행함
믿음으로 번역된 원문 에므나는 충성충직신실진실의리
믿음은 지적동의가 아닙니다
넘어져 쓰러져 있는 나에게,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날 힘이 없는 나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내가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서 입니까? 아니면 내가 그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까?
옳소!
유익하네요. 한국교회 만세!
모두 멋지십니다 🎉
1:02:09 하나의 ‘XX주의’가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이해되게 하기 위해선 부분만으로 전체 교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 같네요🥹
단적인 예로 TULIP을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나 칼빈주의의 꽃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에서도, 사실 TULIP은 칼빈주의 전체를 해석하는 개념이 아니라, 당시의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 주장한 5가지 논의를 반박하고자 설명한 반박문인데 그걸 “칼빈주의” 전체로 해석하는 오류를 보게 됩니다.
“단적인 문장 하나만으로 칼빈주의의 교리가 빈약하다 혹은 모순적이다’ 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겠죠. 칼빈주의 전체를 다 이해하는 선 안에서 올바르게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네.. 도르트신조강해라는 책을 보면 될거같아요..
어차피 골수까지 칼빈주의자들은 알마니안 웨슬리안 이단시 하지않나ㅋㅋㅋㅋ
웨슬리안을 좀 더 괜찮게 평가하고 알마니안은 아예 이단취급하고 상대도 안해주는데 재밌네요 ㅋㅋㅋㅋ
박지성이 칼빈주의였다니..
갈님께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심판때 최종적으로 그 행위에 의해 확정된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정말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기쁨마저 누릴 수 없다면 이것이 성경적인가?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땅에서는 다른 즐거움이 없을지라도 생명책에 기록된 기쁨을 허락하시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두번째 질문은 개인적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행함없음을 늘 탄식하고 반대의 경우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에 만족합니다.
새관점을 가진다면, 오히려 자신의 행위에 겸손한자는 구원의 기쁨보다는 심판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행위에 만족하는 교만한 자는 구원의 기쁨까지도 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의.메카니즘인가? 어떻개 생걱하시는지요?
안녕하세요. 갈입니다.
최종적 심판때에 구원이 확정되는건 꼭 새관점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칼빈주의 같은 경우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겠죠. 하지만, 내가 이미 종말의 심판까지도 결정되었다는걸 어떻게 아는걸까요? 하나님만이 아시는것 아닌가요?
즉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확신해봤자 그게 실제 믿음이 아닐수도 있는거죠. 칼빈주의 세계관조차도요.
그리고 최종적 심판때에 구원이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기쁨의 이유가 안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때 그 사람이 되갚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 많이 따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아무 조건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었죠. 그 선물이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선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떤 존재가 나를 조건없이 바라봐 준다는 것은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세상을 주관하신 하나님이 그러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바울 조차도 본인이 도중에 탈락될까봐 두려워 하기도 했습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4-27)
바울이 복음전파를 계속하는 이유는 바로 상(종말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심지어 도중에 버림 받을 가능성 까지 제시하지요. 그럼 바울도 올바른 믿음을 소유하지 않은 걸까요? 다른 말씀도 제시해 드릴게요.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0-14)
바울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잡았다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구원)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했을 뿐이죠. 하지만 바울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최종적 심판이 유보됐다고 하더라고 기쁨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를 봐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그리고 새관점을 가진다고해서 본인의 행위에 대해서 기뻐하거나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차피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일일 뿐인데 그게 어떻게 교만한 마음으로까지 이어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졌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지 새관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에서도 그런 양상은 똑같이 나타나죠. 본인은 이미 믿었으니 구원은 확정된 것이고 교만한 마음이 나타날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칼빈주의는 진짜 믿으면 그런마음 안나타난다고 하잖아요?
새관점도 비슷하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진짜 믿으면, 본인의 행위로 거들먹거리지 않아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했던 부분이 바로 그부분이니까요. 율법 조항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실제로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적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적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을 뿐이며 구속을 받아들인 자들에겐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었을 뿐 입니다 구원은 최종적 인 겁니다
23:52 하나님 급하게 개입!!
저만 쏙 빼고 하셨네요... 양시무스가 그렇게 무서우셨나요!
오늘 보니까 칼빈주의가 최약체던데 복수전 가는건가요?ㅋㅋㅋㅋ
@@김응원-t4y 거창하게 복수까지는 가지 않고요, 그냥 칼빈주의의 진짜 힘이 뭔지 그냥 한 번 보여드린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보여만 주는거야?
@@fidelity12 그걸로도 충분합니다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랰ㅋㅋ
알미니안 주의와 관련된 책 추천 해주실 수 있나요??
얇은 입문서로 밀드레드 와인쿱의 '칼빈주의와 웨슬레신학' 추천합니다. 너무 오래된 책이라 절판되었겠지만 도서관 같은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칼빈, 알미니우스, 웨슬리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과 교리를 잘 정리해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추가로 바울의 새 관점 책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user-ou2hn4ct3g감은사에서 나온 제임스 던의 새관점 입문서가 있습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상황이네요 감격 스럽네요^^
완전 재미있어요!
다메섹님 너무너무 좋은 프로그램 민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많아서 다양한걸 볼 수 있어서 재밌는데, 시간이 한정되어서인지 발언들이 다 짧아서 아쉽네요. 다음에 또하면 좋겠어요~
그냥... 딱히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엔 저도 우림님과 비슷하게 만인구원론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긴 합니다. 좀더 정확히는 만인구원가능성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제 구원관에는 행위가 필수입니다. 바울이 말했듯, 그 선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인간이 마땅히 도달해야할 의의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경주를 현생에서 마저 채우지 못하면 죽어서 채우게 되는, 어찌보면 카톨릭에서 말하는 연옥과 같은 기능을 하는것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자가 적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갈 자가 적다는 의미는 아닐까 싶어요. 연옥이 뭐 불지옥 같은 곳이 아니라 남은 경주를 채워야하는, 하나님의 공평, 공정하심을 실현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곳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분을 품는 분은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해볼때 천국에 바로 들어가지 못해도 나중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는 성경의 여러 의문들이 해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솔직히 우리중에 그 상급을 그렇게까지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습니다.천국은 분명 고통이 없는 곳일텐데 상급의 많고 적음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근데 성경에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순서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 상급의 의미가 천국에 좀더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고통스러운 곳에서의 시간을 좀더 단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선한 행위는 구원에 있어서 그 의미가 큽니다. 근데 만인구원론인것은 아니에요. 만약 누군가가 끝까지 완악하게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의 자의로 영원히 고통스러운 곳에 머물게 될 수도 있겠죠.
원의 기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겠구요.
토론 중에 얘기하진 못했지만, 저도 만인구원가능성론은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처벌로 사람이 회심할 수 있는가에 의문이 있어서 만인구원론까지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처벌로도 회심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봐요.
또한, 만인구원론의 교정적 지옥관과 가톨릭의 연옥은 또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연옥은 신자가 가는 곳입니다. 신자들이 다 갚지 못하고 회개 못한 죄만큼의 처벌을 받는 곳이죠. 가톨릭은 공식적으론 비신자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전투력높은 칼빈주의자가 였다면..아숩😢
너무재밌습니다🎉
1:09:00
토론 내내 아델포스에게 실망한 내색이 역력한 다마스커스
근데 반대로 구원취소 될 수 있다고 믿어도 상처줄 수 있는거 매한가지 아닐까요?
너 구원 취소 된거고 너 지옥가
그리고 구원취소 또한 안정없는 늘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애초에 믿음을 떠난 마당에 그거에 상처를 받을까요?
그래서 저는 상처 그런거 떠나서 성경에 근거한 논의가 더욱 적합하다 생각해요
누가 상처 받는다고 성경이 변하는건 아니잖아요
어떤 결과를 위해서 주장을 바꾸는건 별로라 생각합니다 인본주의도 많고요
성경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말 같은게 없으니 문제죠.
@@DamascusLiveTV 음 저는 둘다 있다고는 생긱하는데 두 논리가 섞일 수 없어서 한 논리가 맞고 한 논리로 전부 해석 가능하다 생각해서요
근데 웨슬리는 구원취소를 말하는데 한국 감리회는 왜 구원 취소를 말하지 않나요? 장로회 색이 한국에서 강해서 그런가요? 이해해보고 싶은데 다 칼빈 같아요
웨슬리안이랑 알미니안이랑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웨슬리안은 칼과 알을 부분적으로 수용
칼빈의 5대 강령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르미니우스의 5대 강령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에서 이것은 무엇일까요? 구원인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기 때문에 구원도 되고 믿음도 됩니다.(다메섹님이 구원이 선물이고 믿음은 아니라고 했는데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즉 믿지않으면 구원이 없기 때문에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은 구원뿐만 아니라 믿음도 선물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가 믿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어야겠다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불신자가 믿음을 선택하지만 믿어지니까 믿음을 선택한 것이지요, 안믿어지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자만이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니 하나님의 선물(거저 주는 것)이고 은혜입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어라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기 선택이라면 자랑할 수 있겠죠. 엡2:8절 말씀이 선물을 강조하고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자기 선택이면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을 선택해서 구원을 얻었기에....
마태복음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믿게 됩니다).
마13:10-15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비유로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잘 알아듣도록 하시기도 하지만 비유로 말씀하셔서 택함받지 못한 자들은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도록... 깨닫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면 믿음이 생길수가 없습니다(신천지는 이것을 자기들 비유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36:3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보고도 믿지 않는자는 성부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닙니다. 성부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예수님께 주시고 주신 자를 예수님은 내쫓지 아니하십니다. 아버지가 예수님께 주신 자만이 예수님을 믿고 믿는 자는 예수님이 결코 내쫓지 않는다는 것은 주신 믿음을 뺏지 않으신다는것입니다. 알미니안들은 에베소서1장의 택하는 것이 개인이 아니라 단체(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이다고 호도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을 부정하고자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이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도 많았지만 믿지 않는 자도 많았기에 이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들 중에도 택함받는 자가 있고 불택자가 있다는 뜻입니다.(에베소서1장의 택함이 개인의 택함이요 구약에서는 민족의 택함도 같이 있다는 뜻입니다, 민족의 택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하여 구원하셨습니다, 민족의 택함도 만인구원설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엡1: 5-6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거저 주시니 은혜입니다. 거저 준다는 표현이 은혜를 잘 표현한 말입니다. 자기의 결정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알미니안은 마지막 결정은 자기가 합니다)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결국 결정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은혜가 될 수 없고 자랑이 됩니다. 거저준다는 말속에 믿음을 거저 주심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저 주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저 단순히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지금 시대에도 한번 아들은 아무리 망나니라도 영원히 아들입니다. 아들의 특권을 주었다가 뺏는 분이 아닙니다. 아들로 태어나면 영원히 아들의 지위가 유지되니 또한 그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고전2:4-5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지혜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때도 성령을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내가 이해되어서 믿게 된 것이 아니고 전도대상자도 자기가 이해되어서 믿는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을 통해 풀어보았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데 절대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후에 빼앗아가지는 않죠. 요10:27-28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양으로 선택된 자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믿어집니다). 그렇게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준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준 그 순간 영생의 효력은 영원합니다. 절대로 예수님은 주신 믿음을 빼앗지 않고 믿음을 빼앗을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부장의 믿음과 혈루병여인의 믿음은 구원얻는 믿음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얻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성령으로 거듭나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옷자락도 만졌고 말로서 고쳐지기를 요청했습니다. 이미 구원얻는 믿음을 가졌기에 병고침의 믿음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것은 옷자락을 만지면 병을 고침받을 것이라는 믿음대로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구원이 병고침)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믿음을 가졌지만 실제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 믿음대로 순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얻는 믿음과 약간 다른 믿음입니다. 신앙생활할 때 필요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 기도응답의 확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똑같이 구원얻는 믿음이 있었어도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이 부족했다면 그들은 병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구원얻는 믿음을 백부장과 같이 가졌지만 병고침에 있어서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기에 말만해도 된다고 말하는 백부장의 믿음이 큼을 예수님이 칭찬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얻는 믿음도 믿어지니 자기가 그 믿음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전도해서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할 때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영접기도를 하게 됩니다. 영접기도 하기전에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접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을 선택해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영접기도전에 믿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미 그의 마음에 계신 상태입니다. 실제 계3:20절이 불신자에게 영접을 권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교인들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실 회개의 기도를 말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전도할 때 믿는 것(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영접기도문을 써도 된다고 생각은 합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종교개혁의 가장 큰 정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주인되었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으로 믿으면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100%일치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00%로 가기위해 힘쓰는 것이 성화이지요. 어떤 사람은 믿지만 주께 순종하는 행함이 5%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10%, 어떤 사람은 50% 어떤 사람은 89%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때는 90%인데 1년뒤에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3%일 수 있고, 즉 행함을 기준으로 구원을 정하면 우리는 도저히 그 기준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 행함을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주장하는 곳이 카톨릭이요, 칭의유보론이겠죠... 행함으로 구원얻음을 강조하면 행함을 잘할때 죽으면 천국이요, 행함이 약할때 죽으면 지옥입니다.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구원얻는 믿음을 선물로 은혜로 주시는데 그것 모르겠습니까? 그 마음에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이 영원히 거하시는데 천국문 앞에서 그가 믿음이 있는지 모르시겠습니까? 성령하나님이 그 사람안에 거하시며 믿음을 주고 계시는데....
또 죄에 대해서 원죄와 자범죄로 두가지 차이를 이해해야합니다. 성령님으로 거듭나서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십자가의 피로써 원죄와 자범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원죄가 용서되었으니 원죄의 죄책인 지옥이 면제받습니다. 그런데 원죄의 죄성이 있으니 자범죄를 계속 짓습니다. 그 자범죄의 죄책은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가 껄끄러워집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범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서먹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아버지께 자백하면 아버지하나님은 우리 죄(자범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자백하지 못한 생각나지 않는 자범죄도)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됩니다. 여기서 자백은 그저 죄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죄를 슬퍼하고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까지 포함입니다. 그래서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으면 지옥일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 자범죄를 매일 씻어야 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이미 온 몸이 깨끗(원죄의 사함)했기에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자범죄의 씻음)).
따라서 자범죄를 많이 지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아직 회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어서 일반불신자처럼 죄를 많이 지었다고 지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다면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면(믿는 자는 성령의 인침이 있습니다) 그는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을 알미니안들이 구원이 확정된 것이 아니니 두려움으로 노력하라는 말로 이해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앞뒤구절의 의미를 잘 봐야합니다. 빌4:2절처럼 지금 빌립보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있어서 1:27절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너희도 내가 없어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서로 겸손히 하나되고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는 권면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 합당하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것을 행위까지 완전하게 하여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구원이 확정되지 않으니 두려움으로 이루라고 이해하면 그가 어떻게 구원얻는 믿음인지 행함으로 판별해야 하는 칭의유보론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히6:5-7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딱 가룟유다가 이랬습니다. 예수님과 다니면서 빛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고 은사도 맛보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고 말씀과 능력도 맛보았으나 맛만 보았지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여 세례를 주시지 않았기에 그에게 사단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지금 교회에서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예배에 은혜를 맛만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한 것처럼 죄를 뉘우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아닌 자들입니다.
성령훼방죄는 죄를 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믿는 자는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절대 성령훼방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성령을 지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고의로 훼방하는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화인맞아 사단의 사람들입니다. 히6:5절 말씀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옳은지 다 경험하고 맛보았지만 지속적으로 고의로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믿음을 배반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십니다. 여기서 알미니안은 우리를 개인적 우리로 이해하지 않고 택한 민족으로 이해합니다. 민족으로 이해해도 선택받지 못한 민족은 뭡니까? 하나님은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시고 선택받지 못한 민족이든 개인이든 구원으로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쁘신 뜻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또 알미니안은 예정을 구원의 예정이 아니라 구원받는 방법(아마 십자가)을 예정한다고 합니다. 제 입장은 말도 안되는 해석입니다. 앞뒤구절을 봐도 구원을 예정하신 것이어서 그게 은혜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아들은 개인이고 구원받은 개인을 말하고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영혼과 결합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아들로 태어나면 영원히 아들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다메섹님이 다른 영상에서 토기장이의 선택이 민족을 선택한 것이라고 개인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참... 민족 안에도 예수님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엄청 많았습니다. 선택이 민족이라고 해도 다른 민족을 선택하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욥의 항변에 대해 하나님은 계속 창조주의 권한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대해 우리가 그것은 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노아의 가족만 택함받아 구원받았습니다. 노아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택함받았기에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노아도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택함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는 것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소리높여 외칩니다.
너무 재밌는데요..?
평소에 무엇이 성경적인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ㅎㅎ
일단 칼빈주의는 걸러야 합니다 성경과는 무관합니다
1:50분짜리 1:20분째 보고있는데 아바타보다 훨재밌고 유명강사의 심령부흥회보다 훨 은혜됩니다. 아 30분밖에 안남았는데 이걸 어째~ 2부 있나요? 마자 보기가 싫네요 😅
다 봤는데... 이거 큰일났네 너무 재밌는 연속극 보면서 다음편 기다리듯 기다려야하나 하는 마음이 드네요.
그리고 현역 목회자나 전도사를 안끼워줘도 재미가 없을테고 끼워줘도 말을 가려서 해야하니 아델포스 짝이 날꺼고 이 부분을 고민해봐야 겠습니다. 계륵 같습니다. 교역자들이 마음놓고 말할수있는 주제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긴하는데 그런게 과연 있을까싶으네요 우림님 힘내세요. 깊은 뜻이 있어보이는데 설명을 다 못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심령부흥회 ㅋㅋㅋㅋㅋ
세대주의에 관련된 것도 혹시 다뤄주실 수 있나요
칼빈주의를 부정하면 나머지는 다 세대주의로 흘러가게 되어 있음^^ 칼빈이 정리해 준 체계적인 노선 밖은 미끄러지는 낭떠러지이니 타락할 수 밖에 없죠.
잘 봤습니다. 우림님이 만인구원론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띠용 했는데 발제부터 아주 설득력 있게 말씀해주셔서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님은 역시 쎄네요. 요즘 한동안 예정론 쪽 입장이었는데 요새 다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델포스님 변증이신학.. ~ 홍보가 잼나네요. ㅎ
모두가 다 하느님을 믿고 영원히 살기를 희망한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어떻게하면 여원히 살수있는가 그비법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라고 하는것을 하면 되는것이고 하지말라고 하는것을
하지않으면 된다.
이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자들이 참 많은데
예수를 믿는 모두가 주여~ 믿습니다 라고 예수를 부르고 믿는다고
하는데 당사자 예수께서는 뭐라하는지를 한번 살펴보면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__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영상 마지막 질문에서 30년동안 믿음을 잘 고수하다가 한번 삐딱선탔다
그리고 금방 저세상 가버렸는데 믿음이 없는건가 ? 라고 했는데 인간들의 조상
아담을 한번 생각해보면 그답이 금방 보일것이다.
아담은 하느님 여호와를 믿었다 그러나 딱한번 하느님의 법을 어겼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법대로 아담을 사형시켜버렸다. 이와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하느님 여호와의법은 항상 똑같다.
예수께서 알려준 비법은 이렇다 마 24:14 행1:8 계 22:12-15
계시록 22:12-15 예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12 ‘보아라! 내가 속히 오겠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으니, 각자에게 행위에 따라
갚아 주겠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고,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14 자기의 긴 옷을 빠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들로 가는
권한을 얻게 될 것이며, 문들을 통해 도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5 개들과 영매술을 행하는 자들과 성적 부도덕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일삼는 모든 자들은 도시 밖에 있을 것이다.’__
생각들을 해보시라! 아무리 불완전한 인간들이라도 자신들의 의지대로 예수께서
알려준 비법을 따를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지킬수있는것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지킨다면 믿음이 부족한것이고 영생은 물건너가는것이고 아담의
발자취를 따르는것이다.
변증이 신학이다 구매해보겠습니다ㅋㅋㅋ
푸하하하 꿀잼 기획 감사합니다
빨리보고싶드앙 🤣🤣🤣🤣🤣🤣🤣
기다려집니다^^
개인적으로 다메섹님께서 칼뱅주의 교리와 논리를 박살 낼 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 상담쪽도 같이 다뤄주세요
그건 스텝업연구소 유튜브에 댓글달아주세요! ㅎㅎㅎ
모든 구원은 양심 구원입니다.
첫째,행한대로 심판 하십니다
둘째,율법과 양심으로 심판 하십니다
셋째,은밀한 것을 심판 하십니다
뼈속까지 칼빈주의자인 내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 무게추가 더 실리며 (> 공의의 하나님) 초점이 바뀜을 느낀다. 우림님의 만인구원론.. 그 마음.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도 갱생의 기회를 주시는 아버지.... 이거를 소망하면 죄일까요?
ㅎㅎ 기대합니다
개인적으로 장로교 측에서 인간의 행위? 인간의 노력과 의지? 를 인간의 '공로' 라고 부르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들리는데, 전 그것은 인간의 공로라기보다는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 마땅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기보다는 인간이 마땅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봅니다. 그리고 성경을 봤을때 구원이 한번에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날까지 이루어가는 것이라 보는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도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은 구원의 여정을 달리기에 많이 비유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약 9번에 걸쳐 달리기 비유가 나오는 것으로 알아요. 근데 경주에 참가한 것 만으로 달리기가 완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결승선까지 달려야 완성이 되죠.
근데 구원론은 진짜... 답이 안나오긴 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구원론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것이 큰 의미가 있다 보는게, 한국교회는 장로교가 압도적 주류를 이루고 있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영상의 아델포스님과 같이 감리교임에도 장로교와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예정론과 한구영구를 강조하는 장로교의 신학은 상당한 약점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되고 성경을 봤을때 그렇게만 생각이 되지는 않는 지점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것 외에 다른 생각을, 다른 주장을 못하게 되는 한국교회 현실을 생각할때에, 이 토론은 굉장히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좋은 영상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속과 구원을 혼동해서 오는 문제라고 봅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그러나 구원은 구속을 받아 들인 자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
로마서에서 바울은 은혜와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철저히 나누어서 얘기 합니다
49:00
1:02:50 갑분 광역 도발 어그로ㅋㅋㅋ 거기에 바로 반응하는 최종히든보스 다메섹ㅋㅋㅋㅋ
우리 조직신학 교수는 이중예정으로 구원받았는지 개인은 알 수 있대요. ㅋㅋㅋㅋㅋㅋㅋ
성경이 진리입니다. 무슨 주의, 무슨 주의는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칼빈주의는 완전한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 하나님의 신권으로 하나님의 입장을 이야기하는 변증학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으면 어떠한 행위도 소용이 없다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즉 신분의 변화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입니다. 그럴려면 원죄를 인정해야 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하나님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의 의를 행할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라는 것이 칼빈주의 입니다. 인류의 대표자이자 에덴동산을 대리통치하던 아담조차도 사탄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먹는 언약적 파괴로 모든 인간이 죄악아래에
놓였기에 모두가 사형수의 신분인 것이지요.
가장 예로 들 수 있는 부분이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켈리포니아 주지사로 있을때 노벨평화상 5번 후보에 올랐던 갱단의 두목이자 살인범이었던 스탠리 투키 윌리엄스가 사형선고 이후에 감옥안에서 아무리 착하게 행실하고 모범수로 행동을 하였지만, 결국 그의 신분은 사형수였고 아놀드가 그의 사면을 거부함으로 그는 결국 사형수로써 사형집행을 받습니다. 이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없으면 어떠한 선행이라고 할지라도 본래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구원을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럼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의 질문에는 요한복음에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괜히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은 개인의 죄도 마찬가지이지만, 결국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개혁개정 성경에는 믿음과 신실함 이라는 단어의 뜻을 구분하여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마 현대적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안다 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까지 이며, 개혁개정에서는 구분이 없는 믿음과 신실함의 단어에서도
신실함이라는 단어의 뜻은 대체적으로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럽다 라는 뜻으로 인간 개인의 생각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셨을때의
하나님이 신뢰할만하고 순종 또는 복종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칼빈주의에서의 구원론 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말고는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이야기는 사형수라는 신분 믿음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절대불가항력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는 사실이지요. 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단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지요. 하나님의 신권 즉 전지전능함에 근거한 구원론은 과연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할 수 없겠느냐의 문제로 봐야지. 구원을 한번 받은 신자는 그가 어떤 악한 행위를 하고 회개하지 않아도 결국 회개하게끔 하여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인격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위격 또는 신격이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에게 없는 인격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성경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단으로 정죄한 이유도 신천지처럼 교회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에 교리가 생겨나고 교리가 발전되고 확립된 것이지. 각자 생각이 달라서
목소리 높이고 하나님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의 손을 들어줘서 손을 들어주지 않는 자들이 이단으로 정죄된게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고 2년이 넘어서 정탐꾼을 보냈을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보이는대로 이야기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르게
그 나머지 백성은 400년 넘게 애굽에 있으면서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방 우상숭배를 따르고 노동하게 한 하나님을 증오하고 미워했기에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어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했던 악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이 양육되어야할 땅에 38년을 지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 가 정답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의 이땅에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영혼 또한 외면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때 이스라엘 백성만 나오지 않았고,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대했거나
좋은관계를 유지했던 혹은 그 애굽 같은 민족가운데서도 외면당했던 백성들 또한 모세를 쫓아서 애굽을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십보라가 아니라 나중에 다른 여인과 결혼한 여인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애굽 여인인 이유도 모세를 쫓아 같이 애굽에 탈출한 이방인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도 그냥 그들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사랑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려 그들또한 하나님을 믿게끔 하고자 하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 사명에서 스스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가이사만이 자신들의 왕이라고 이야기하며 메시야를 부인하여 유대인에게 있는 구원이 이방인에게 퍼지게 된 것이지요.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를 잘 생각해보면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 것은 부인하지 못하며,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하시고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시조 중에 이방인인 룻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칼빈주의라고 하기에는 성경전체적인 숲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구원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시면 잘 나와있고, 단7장? 인자이신 예수님을 봐도 잘 나와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아놀드 주지사 때의 예로 들 수 있겠고, 가룟유다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지만,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사역에 반하는 마음을 가진 정황들을 예로 들 수 있듯이,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룟유다 자신에게 있었다
라는 것이지요.
사울왕 또한 하나님이 세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왕을 세운 것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아니었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왕은 사람이 사람을 통치하는 왕이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하나님을 위해 통치하는 부왕의 개념이었고
아담때의 대리통치였습니다. 솔로몬이 고백할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백을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것으로
사울왕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왕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사람의 심중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와 택함과 계획은 대단히 성경적입니다. 다만, 그 예정과 섭리와 택함과 계획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진실로 믿느냐 믿지않느냐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않았느냐의 문제이고, 그 진실 끝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만인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시는 오직 선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어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노의자녀이며, 노의의지를 갖고 있고, 육신으로 치우치고 싶어하는 전적타락부패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신학은 변증학 일 뿐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를 변호하는 학문이지. 누가 옳고 옳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성경을 그냥 많이 읽으시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열매로 그 믿음을 안다는 것은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어느정도의 지표는 될 수 있지만, 행위의 중요성을 이야기해도 되지만, 행위 자체에 머무는 것은
깊게 들어가면 원죄를 부인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역이 완전하지 않다라고 하는 불순함까지 이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느냐 의 개인적인 신앙에 대입해야지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원래 내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믿음을 개인이 소유한 어떤 기질이라고 혹은 개인의 노력이라고 한다면
머리카락 한 가락도 희거나 검게할 수 없다 라는 주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삶이라는 시간을 주시고, 공간을 주시고, 환경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실 뿐이지요.
다만 우리에게 인격이 있듯이 하나님에게 신격이 있음을 위격이 있음을 항상 인지해야 합니다.
ㅋㅋ빠져듭니다..
다크아칸 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졌네 ㅋㅋ
52:00
칼빈주의자가 성경구절도 잘 모르고 자신이 뭘믿는지도 잘 얘기못하고 그러면 어떡하나요ㅠㅠ 칼빈주의자들이 제일 성경에 의존하고 가장 성경중심적으로 가려고 노력한다는 이미지를 갠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 성경이 어떻게 얘기하는지는 말 못하고 그냥 논리싸움만 하려고만 하고 참 아쉽네요
만인 구원론은 토론 내에서도 엄청난 맹점이 많습니다.
1. 일단 만인 구원론은 하나님의 공의를 부정하는 얘기 입니다.
2. 인본주의적 사고를 신앙에 밀어넣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금의 가족과 친구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가 아닌 하나님과 나 와의 철저한 1대1의 관계에서 이뤄집니다. 이 관계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델포스님이 홀리컴벳에서 보여주신 진중한 모습들이 하나도 없고.. 너무 장난식으로 말씀하시는게 안타깝네요..
웨슬리안이 어떻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의 비판을 막아내고 조화를 이루었는지 전혀 나타내시지 못한거 같습니다.. ㅜㅠ
준비를 단단히하고 매치된 토론이 아닌거 같아 좀 아쉽네요. 주제는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인데..
다메섹님 우리의 삶 가운데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믿고 있는지 아닌지를 예측할 뿐이죠. 그게 열매로 나타나는거구요.
하지만 그열매가 가짜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겠죠.
이런 토론을 보고 있으면 전 왜 성경이 아무것도 아닌거 같은 생각이 들까요?? 성경에 일관된 개념이 없는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들한테 화를 내면 친아빠가 아니다
친아빠라면 화내면 안된다.
아니다. 친아빠라도 화는 난다..
화내는거가 아빠인걸 부정하진 않는다..
화를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맴매. 이빨 빼기. 회초리. 다리부러트리기 등등...
어디까지가 아빠로 가능할까요?
이 말 어떻게 보이나요?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는 게 제게는 먼가 빠진것처럼 이상하게 보여요.
만인이 다 구원 받는다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판단컨대 창세 전에 구원자가 정해졌다 하는 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다....
어차피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선 과 악 이 나뉘어있고 용서 할 수 없는 악은 존재해 왔고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판단은 창조 주 절대자 가 할 일이다
헌데-.- 인간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생각과 마음은 공감하나, 그 것을 이루려는 것은, 공감이나 이해하기 어렵다 신도 할 수 없는 불가능 이라 여겨진다 -.- 말 안되나...~!!쩝
이것도 모순이고....~~!! 쩝
너무재밌다...
비신자로써 기독교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냥 여기 댓글에다가 물어보면 되나요? 의문이 들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말이죠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를 알것 같다 😅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네요
꿀잼 ㅋㅋㅋ
구원론에 대한 개인적 생각인데, 하나님의 예지예정?은 엄격한게 아니라 유연하지 않을까요?
“큰 그림”은 있어도 그 그림이 아직 다 만들어진건 아닐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다면, 그럼으로 인해 우리의 삶 속에 필연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져 있다면 어렵더라도 예정은 바뀔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예지는 틀린게 아니냐? 만약 예지가 “필연”을 말하는게 아니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필연과 자유의 종합은 가능성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여부를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서 삶 속으로 투신하는 겁니다. 구원이 “필연”의 영역에 머문다면 여러 사역들은 단순 사후과정으로서 일견 의미없겠지만, “가능성”의 영역에 머문다면 구원을 “얻고자(혹은 받고자)“ 애쓰는 행동들은 모두 의미있게 될것입니다.
(아직 신학적 지식이 모자랍니다. 혹 이단적이거나 비성경적이라면 문제제기 부탁드립니다.)
우림님께 질문드립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믿지 않고 죽은 아빠에 대해 묻는 어이에게 우림님은 진실하게 '너희 아빠는 지옥에 가셨지만 결국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게 되실거야'라고 답하신다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목회적 차원에서 옳은 것은 어닌 것 같습니다. 첫째, 일단 지옥에 갓다고 말하는 것. 둘때, 결국 천국에 갔다고 말하는 것.
아이는 첫째 대답에 우울할 수 있고, 이어진 둘째 대답에 그럼 저도 안 믿다가 죽어서 믿을게요.라고 답할 수 있다는 거죠.
결국 '영벌을 인장하지 않는 만인구원론'은 이런 문제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칼빈주의 예정론으로 해결됩니다.
'너희 아빠가 살아계셨을때 믿지 않으셨다해도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면 눈감기 직전에라도 믿음을 선물 받으셨을거야. 걱정하지말고.. 아마 너같이 착한 아이를 가지신 걸 보니.. 아빠는 선택받으셨을 거라 선생님은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예수님 잘 믿자. 천국가서 아빠 만나야지..알았지?' 이 대답이 더 낫지 않을까요? 굳이 성경을 뒤틀지 않아도,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만 우리가 잘생각해본다면....
선생님께서 아이에게 말씀해주신다면 저와 크게 다르지않은 목양적 관심사를 갖고 계신것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이(예정) 우리가 소망을 가질 근거이기때문입니다
두번째 말씀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선 저는 죽기 전에만 회심할수있다는 입장일 때에도, 사람이 언제죽을지 모르니 빨리 회심해야한다는 논리에 반대합니다 회심의 긴급성은 언제 죽을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된 기쁨의 길이자, 우리의 깊은 필요가 채워지며,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피조물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이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첫번째 말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아이가 낙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낙심할 일들이 참많고, 비가역적인 상실과 실패의 경험이 있지만, 성도가 소망을 가질수 있는 것은 그러한 상실과 실패보다 최종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더크다고 가르치기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상실, 슬픔, 악을 외면하지도, 패배하지도 않게 됩니다.
저도 만인구원론이 많은 문제들. 특별히 심판주이신하나님의 엄위하심을 훼손할 여지나, 전통적 해석과의 충돌등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잘 주고받는 이야기가아닙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들, 이웃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무수한 죽음앞에서 그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한 소망을 생각할때에, 연역적으로 갖게 되는 견해인것같습니다
선생님처럼아이에게 조언하시는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림님은 아니지만, 좋은 반론이신 듯 합니다. 허나, 칼빈주의 또한 동일하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이를 기만할 수 있다는 것. 나중에 천국에서 목사님이 우리 아빠 천국 갔을거라 했는데 왜 없냐고 절망할 수 있죠. 그걸 떠나서, 그저 순간을 넘기기 위해 목회적 거짓말을 하는게 옳은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빈주의 입장이라면 차라리 모른다는게 정직한 답입니다.
둘째로, 아이가 이 경우에도 "평소에 안 믿어도 어차피 내가 선택된 사람이면 죽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거죠? 그럼 나도 안 믿을래요. 방금 목사님이 저보고 착한 아이라 하셨으니 저는 당연히 선택받은 사람이겠죠?"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토론 중에도 제가 말했지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성경적 근거는 없거나, 있어도 아주 애매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메섹님. 답변 감사합니다.
첫째, 우리는 타인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소망을 담아 '~라고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전혀 기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중에 천국가서 절망할 일은 없습니다. 천국은 절망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죠.
둘째, 좋은 지적이십니다. 아이가 이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때,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됩니다. 착한아이는 왜 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착하다는 게 뭔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뭔지.. 이렇게 아이를 신앙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해야죠.
다메섹님은 믿음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만..질문이 있습니다. 다메섹님도 이런 감사기도 하시지 않나요? '하나님, 제게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퍼 칼비니즘이 문제이지, 이렇게 자신의 믿음마저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이게 더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완전한 예정보다는 고백적 예정을 취하는데요. 그래도 예정을 전혀 안믿는 것보다는 이 편이 더 신앙적인 것 같아요.~
@@grim_wonyi 우림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린 것은 굳이 만인구원론이라는 이단성의 오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정통신앙안에서 이 목양적 문제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훼손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면서 목양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오해받을 수 있는 스탠스를 취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OJCKYG네, 말씀주신대로 저도 신앙적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믿음마저도 그분이 주신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개인의 신앙고백, 말하자면 감사에 따른 수사적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쎄' 혹은 '내가 지금 이렇게 밥 먹고 사는 건 완전히 부모님 덕분이야' 같은 사랑을 담은 수사적 표현이죠.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 내에서 고백될 것들을 너무 기계적인 공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칼빈주의의 문제라 봅니다.
믿음이 선물이란 말이 하나의 공식이 되는 순간, 엄밀히 말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뒤틀리고 기괴해지고 말죠. 또한 이것을 교리로 세웠을 시 남들에게 적용하게 되며, 그 적용은 누군가에겐 희망이겠으나 다른 이들에겐 너무 폭력적이고 절망적인 선언이 됩니다. 누군가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믿을 수 없단 소리거든요.
마지막으로, 만약 믿음이 선물이라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일부러 유기하신 건가? 하나님은 오직 일부만 사랑하시는가?' 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고민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하나님을 악마보다 못하게 만드는 교리라고 강하게 비판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하이퍼칼비니스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엄밀한 칼빈주의자와 물탄 칼빈주의자만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칼빈주의는 내적 논리들이 서로를 상호보완하며 거대하게 구축된 하나의 논리 탑과도 같습니다. 이는 분명히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합니다. 중간에서 몇 가지를 맘에 안 든다고 빼면, 마치 젠가처럼 칼빈주의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정말 인간의 반응을 완전히 배제하고 사람에게 불어넣어주는 것이라면, 그게 곧 자동으로 하이퍼칼비니즘의 모든 논리를 끌고 들어옵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한 세트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믿음이 선물이란 말을 절대 남들 앞에서 쓰지 않습니다. 또한 논리적, 성경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생각까지 ㅋㅋ
하나님 구원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하면 모순이 발생한다는 생각이듭니다
1. 김영현 전도사님에의하면 예지예정에 의해 예정된 자가 구원을 못받는 경우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예지예정도 구원받을자 못받을자 차이가 없다면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전도를 해야한다는 구호?가 모순입니다
2. 예지예정은 하나님이 그 사람이 미래에 순종할것을 미리 아시고 현재에 잠깐의 성령의 비추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을 믿었다가 돌이켜 떠나는 경우 즉,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에 의해서 예수님을 떠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가 배신할것을 아시고 구원을 안 하셨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한구영구'가 예지예정과 모순이 되는 지점입니다. 어떤사람은 배신할것을 아시고 구원을 안 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하시는 거죠.
3. 죄를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구원이 취소될수 있다는 주장은 그럴듯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전체 여정에서 자신의 죄 전체를 전부 깨닫고 회개하는 지점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내면은 양파껍질같아서 한가지 죄를 회개해도 더 깊게 들어갈수록 몰랐던 죄와 문제들을 더 발견하게 되는게 부지기수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거의 '성장'을 하면서 일어납니다. 즉 신앙이 성숙해가면서 내 죄와 나약함을 깨닫게 된다는것입니다. 현재의 나는 내가 현재 가지고있는 나의 모든 죄와문제를 알지 못할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올바르게 걸어야 그나마 조금씩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짖고 늘 회개해야만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관점에서 바라보는게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 매우 좁은 시각으로 보는것입니다. 내가 어느정도의 죄인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현재 나의 회개의 행위의 유무가 구원을 흔들수 있는 큰 영향력이있다는것은 아전인수격 착각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아직 거듭나지를 않아서,
예수를 아직 못만나서.
성령을 받지 못해서.
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가 성경에 어디있냐 하셨는데
고린토서에 성령의 은사 중에 있잖아요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은 은사는 선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