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대당평백제국비명'과 새긴 시기 | feat. 정림사지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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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1 ноя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10

  • @달여우-t8r
    @달여우-t8r 2 месяца назад +1

    정말...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막연하게 '이쁘다', '조상님의 기술 멋져' 이런식의 내용이 아니라 철저한 근거자료, 기록을 통해 추리하듯 들어가는 내용에 감탄만 나왔습니다. 부여석조 영상부터 연달아 2개의 영상을 본 시간이 정말 최근 유튜브에서 본 시간 중 가장 알차고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한국 국가유산의 관한 채널은 답사채널 외에 그렇게 관심가는 곳이 없었는데 오늘 영상 보는 내내 감탄만 했습니다. 다만 원본 되는 비석과 그 탑본이 언제,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가 궁금하네요. 원본이 남아있었다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텐데요.

    • @문화유산_프로파일링
      @문화유산_프로파일링  2 месяца назад

      귀한 시간 내어 영상을 봐 주신 것도 감사한데 알차고 기억에 남을것 같다는 말씀에 더 힘내서 영상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들어습니다.
      영상 재밌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 @별나무-c8e
    @별나무-c8e 3 месяца назад +4

    흥미롭네요.순서가 정림사지 오층탑에 먼저 새기고 그 이유는 이 탑이 백제 도성의 랜드마크이기 때문에 그 다음 왕궁에 있던 부여석조에 새기고 이후 유인원의 기공비가 새워졌다라고 보았는데...비석 형태의 평제비가 존재했고 유인원이 기공비가 새워질 당시에 정림사지 오층탑과 부여석조에 복각 되었다.

  • @purusha3831
    @purusha3831 2 месяца назад

    신기하지. 저기가 백제의 수도였다는 유물 유적은 없고 백제가 망한 증거만 남아있다는 거....

  • @김태영-u5o
    @김태영-u5o 3 месяца назад

    그냥 내 생각입니다만 당나라군들이 이국땅에서의 일시적인 승리로 인한 뭔가 모를 두려움 철군에 대한 불안함과 조급함으로 인해 후세에 기록이라도 서둘러 잔 뜩 남겨두려고 여기 저기 덕지덕지 복각을 잔 뜩 해둔게 아닌가 싶습니다. 왜 비근한 예로 오늘날에도 전두환 처럼 장군으로서 쿠데타를 성공한 후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념우표며 기념주화이며 자신의 치적을 기록으로 하나라도 더 남기려고 안간힘을 썻던 것과 비슷한 심경이 아니었나 합니다. 특히 사마천 이후 기록이야 말로 역사라고 생각했던 중국의 역사의식에서 그 인식이 절정에 달했던 당나라였으니 만큼 소정방 유인원 이근행을 비롯 당장들의 기록유산에 대한 유혹과 경쟁도 그만큼 치열했었다고 봅니다

  • @-Y-B-
    @-Y-B- 3 месяца назад +8

    당나라 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정식 비석 하나 못구해서 불교 탑과 유물에 낙서하듯 승리 흔적을 남겨? ㅎㅎㅎㅎ

  • @다나까야마시다
    @다나까야마시다 3 месяца назад

    배신자들이.너무많응게

  • @10simmir
    @10simmir 3 месяца назад +2

    조작된 유적을 뭘 그리 따질일이 있는지.
    제작년도 규명부터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