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우랄알타이어족이라고 배웠다가 80년대 후반 우랄빼고 알타이어족이라고 배웠다가 90년대 고립어라고 배웠는데 진짜 이런 연구 결과가 그리웠음 우리 일반인에게 반도일본어설 소개되었을때도 흥미진진했었죠 한일을 연결하는 혈액형 cis AB형 나왔을때도 신기했고 김해 대성동 고분에 유골이 와장창 나왔을 때도 아주 기뻐했는데 DNA 연구가 현생인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게놈도 해독하고 하플로 그룹으로 인류의 기원을 찾을땐 곧 한국인의 기원도 밝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할듯 합니다 북한과 분단상황이고 중국의 왜곡과 비협조도 있지만 이런 연구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아주 흥미롭습니다
서영삭님, 역사기 청취자시군요^^ 너무 반갑습니다! 팟캐스트든 유튜브든 사회생활 특히 생업과 병행하기는 쉽지 않은 듯합니다...또 그래도 응원해주시는 데에서 힘을 입고, 스스로도 지적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는 보람으로 가끔씩이나마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구독 감사 드립니다~
소로리 근처 좀 더 탐사해보면 좋겠어요. 공장됐다니 아쉬워요. 저는 중국서 공부했었는데 2004년에 북경대 수업시간에 교수님도 소로리 볍씨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 때 교수님이 한국서 13000년된거 발견됐으니 앞으로 중국서도 더 오래된것 발견될 수 있다라고 했어요. 이게 중국 사람들의 생각인데 서방 학자나 일본학자들도 똑같을 것 같네요. 저는 이게 그냥 욕할게 아니라 역사학을 정말로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더 많은 연관관계를 발굴하고 입증하는 연구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과학자들은 이 입증들이 쌓이면 자신의 의견도 바꾸는데 역사학자들은 이게 잘 안되는것 같습니다. 역사 애호가들은 더 심하구요. 과학보다 현실 정치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영역이구요. 저는 이게 경제학적으로 과학은 파이를 늘려먹을수 있는 미래 먹거리지만 역사는 지구의 특정지역과 살았던 사람들을 나누어 먹어야 하는 영역이라 그렇다고 생각해요.
시청 후 고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많이 아쉽습니다. 소로리 볍씨 유적지 근처도 탐사를 해서 주변에도 비슷한 유물이 발견되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인근을 한층 높은 농경 문화로 볼 수 있을지 아닌지 여부를 확실히 판단할 수 있을 텐데요...아마 몇몇 분이나마 작업을 하셨을 거란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관련 논문도 거의 없는 등ㅜ 노력이 미비하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 싫어하는 연구자들도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네요. 일단은 일부 뜻있는 연구자분들의 족적이라도 먼저 좇아보려고 합니다.
@@islandtree7577 그것도 맞는 말씀같네요. 그래도 열심히 연구 안한것도 맞고 왜 탄화미로 나올수 있는지는 더 알아봤으면 좋았겠죠? 중국이나 일본이었음 없는것도 만들어냈을거 같아요 ㅋㅋ 일단 인력끌어올수 있는 시스템도 없고 의외의 상황에 돈 집어넣어줄수 있는 여력도 없고 그래 보입니다 저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이동 경로상에 인도와 인도차이나반도가 있지요.. 동남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인류는 10~4만년사이 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 중동 아라비아반도에 도달하였고 그곳에서 일파는 유럽으로 또 일파는 중앙아시아 몽고고원쪽으로 또 일파는 인도 인도차이나 말레지아 호주 태평양섬으로 또 일파는 중국동해안을 따라 한반도쪽으로 이동했지요.. 3~4만년전 순다랜드방면(지금은 바다지만 당시 육지였던 인도차이나 중국동해안루트)에서 한반도쪽으로 올라온 일파가 있었어요. 3~4만년전 인도 인도차이나지역에서는 언어가 비슷했을거예요..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단어가 많고 어순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에는 같이 어울려 살았으니까요.. 물론 몽고 시베리아방면에서 한반도로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남방계 북방계가 적당히 섞어 형성된 민족이 한반도 만주 일본사람들이지요.. 2~1.5만년전쯤 몽고 만주 시베리아 사람 일부는 베링육교와 알류샨열도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북미인디언의 조상이 되었고 그들은 남미대륙 최남단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언어학적인 측면으로 보면, 기존 알타이어족 가설에서도 투르크, 몽골, 퉁그스, 더 나아가, 한국, 일본의 문법이 동일하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죠. 심지어 우랄어도 유사성이 있죠. 몽골, 한국, 일본의 여러 어휘들이 동일한 기원에 있다는 것도 입증되었죠. 벼농사가 한국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한 가설은 틀린 것일 수도 맞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설 전체의 논리에는 영향이 없어요. 그건 너무 지협적?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요서 지역 기원설을 송호리 기원설로 해도 상관이 없어요.
좋은 동영상 이기에 몇 자 적어 봅니다. 이 논문의 오류를 논하기 전에 1. 유목은 농경에 비해 만년이 지난 후에 후에 나타납니다.(말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이 기원전 4천년 전 후 입니다.) 2. 터어키어는 돌궐 제2제국 후에 서쪽으로 전파가 시작되어(가장 늦은 전파인 야쿠트어를 제외하고) 지금의 튀르키예로의 마지막 정착은 셀주크투르크에 가서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쌀농사의 전파등 지엽적인 오류 등이 있더라도 위 논문은 상당히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여지며 커다란 임팩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The History of Jusen(Juchen People) in Manchuria 삼한은 본래 대륙에 있었습니다.ㅡ 진한.마한.번한이 하북성에서 한반도까지 있었습니다. 진한은 진조선.마한은 막조선.번한은 번조선이 었다가 막조선은 진조선에 흡수되었습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에 보이는 진번조선은 진조선.번조선을 말하는 것이죠. 진조선은 북부여.고구려가 되었고 번조선은 위만조선이 되었습니다.ㅡ 그리고 이들 삼한 삼조선의 잔여세력들은 막조선 마한의땅으로 내려와 마한의 삼한을 형성한것입니다.ㅡ 결론 고구려 예맥족과 삼한은 같은 민족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일부 남방계 유전자는 North East Asian Group 으로 진화하기 전의 유전적 자취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부해안선을 따라 이동한 선조의 유전적 자취이죠. 그러나 빙하기동안 한반도에서 North East Asian Group 으로 분화한 한국인의 조상은 분명 필리핀과 같이 South East Asian Group으로 분류하는 漢족과는 다르죠. 생김새 만큼이나 언어도 다르고요.
시청해주시고 또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말씀하신 해안선을 따른 주요 경로가 있고, 제가 참고했던 연구자료에서는 또 다른 경로에 대한 표현이 있어 흥미롭더군요. 먼저 해안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내륙을 통해 동쪽으로 이동한 일부 집단이 지금의 베이징 인근 전원동굴(Tianyuan)에 이르고, 여기서 또 오늘날의 동남아 지역으로 남하한 뒤에 거기서 해안선을 타고 북동쪽으로 향했다는 거죠. 전원동굴에서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향한 집단이 북방계의 한 갈래로 표현되기도 하고요. 제가 말미에 소개해드린 논문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석 가능한 샘플의 수가 워낙 소수이고, 그 소수의 샘플이 전체 결과를 크게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은 늘 주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 사견이 도리어 연구의 성과를 무시할 수도 있고....방송에 그런 내용을 너무 많이 표현하게 되면, 들으시는 분들의 맥이 풀릴까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underrated_history 지구가 더울때도 있고 추울때도 있고 그 와중에 인류가 한반도로 온 루트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오늘날 漢족과 한민족이 유전적으로 엮을려는 중공의 시도는 짜증이 납니다. 중국의 유전자공정도 눈뜨고 못보겠더군요. 오스트랄로이드로 해석해야하는 漢족과 몽골로이드인 한민족을 엮을려는 시도죠. 인류학에서도 남방계 몽골로이드라는 말보다 오스트랄로이드로 바꾸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요.
저는 부계쪽이 D계통으로(d1b1c) 나왔어요. 검사자수가 좀 소수라 구체적인 하위도 알수없어서 분화연대를 모르는데(풀시퀀싱 해야 분화연대를 더 정확히 알수있다고 들었어요ㅜㅜ) 무조건 일본이 기원이고 이게 한국인에서 나왔다는 건 역으로 넘어왔다고 보면 된다 들었는데 한반도 기원일 가능성이 많이 낮은지 여쭙고 싶어요.~최소 분화연대가 2천년전이라 하던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5000년전에 요하부근에 기후변화가 발생했는데, 거대한 지진과 같은 지각변동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거대한 홍수가 일어 났고, 홍수 이후 수자원이 고갈되는 현상이 일어 납니다. 따라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유적과 유물의 이동이 시차적으로 크게 3갈래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금주-진황도-북경-산동 방면인데 이쪽은 당시 진흙밭이라 소수가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음 하나는 태행산맥의 서쪽 대동-삭주-태주-임분-여량-서안 (가장 많은 이구의 이동으로 추정) 하나는 바이칼호수-울란바토르-카라코룸-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제 추측이지만, 갑자기 5000년 전후에 급격한 인구이동과 기후변화와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 연구의 정밀도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트랜스유라시아어라는 표현이 그다지 좋은 작명이라는 생각이 안들긴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너무 모호하다는 게 큰 단점인 것 같아요. 논문 리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후에 다른 연구를 통해 대체어를 발견한다면 그 용어를 더 자주 쓸 듯합니다.
우랄-알타이는 특정지역을 근거없이 기원지로 삼은 용어이기 때문에 마치 지금의 다양한 아시아 지역 언어가 우랄과 알타이 산맥이 있는 러시아에서 비롯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보나 넓은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 같이 중국 극혐하고 시베리아 대륙 지향하는 사람들은 우랄-알타이를 좋아하겠지만요.
@@underrated_history 그리고 소로리 볍씨 연대는 공인된 적 없고 재배종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인정 안 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나 뭔가 한반도에서 인류 문화의 커다란 요소가 기원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갖고 관심있게 보고 과학이랍시고 연대치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지만 학계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유튜브에서 아무리 과학이랍시고 떠들어 봤자 전문 학계는 일개 크리에이터의 사견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자부하는 학자들도 무의식적으로 정치적 현실에 시야가 경도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 조차도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데 외국인의 시선에는 당연히 한국은 예외일 것입니다. 한줌도 않되는 유목민족은 과대하게 평가되고 동북아에서 가장 강건하게 체제를 잘 유지한 한국은 참고 조차도 제대로 안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전근대 시절 거대한 문화를 창출했던 것을 이유로 모든 것의 기원을 자신들에서 찾는 것 같고 다수의 학자들도 합리적 의심이 이전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남겨주신 말씀을 보니...역사의 주도권이라는 게 너무 이른 시기에 확립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였든 본인이 결정 불가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는 인간의 커다란 부조리가 새삼 씁쓸하게 느껴지네요. 역사적 경험의 명암이라는 게 있다고 느껴져요. 한국의 다수 집단은 상대적으로 미시적 변화에 민감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장점이 있는 한편, 더 기저에 놓인 조건들을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의심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우리 집단이 더 발전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부터서도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역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요즘 다시 한국인들의 잠재력이 빌휘되고 있읍니다. 역사는 돌고돈다고는 말이 맞는것 같아요. 통일만 된다면 ( 혼란기가 꽤 있겠지만)강대국이 될수있어요. 중국은 청나라 덕분에 땅도 거대해졌지만 신라의 후예인것을...당나라도 유명하지만 선비족...그런데 당나라 청나라 한족이 아닌데 중국 역사로 치는것이 맞는건지 혼동이 되기도 하는데요. 만약 우리나라가 없어지고 일개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이 되었다면 삼국시대 통일 신라 고려 조선 다 중국역사로 흡수되었겠죠. 참 ~ 대단한 대한민국 ☆
시청 감사 드립니다! 혹시 "소로리 볍씨는 농경으로 볍씨 보다는 양생볍씨라는 주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이나 참고문헌 공유가 가능하실까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말씀 드린 가능성은...인류의 대 이동에 비추어 시점 상으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타 논문의 연구도 감안했을 때 이동 경로가 충분히 다변화된 시점이라고 판단해 제기해보았습니다. 야생형 벼의 발상지에서 농사도 먼저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높다고 생각되지만, 또 소로리 볍씨가 '최고(最古)의 볍씨'란 인증된 연대 추정 결과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 있기도 하고요. 사실 이 논문에서 얼마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나 기대했었는데, 사실 제 입장에서는 너무 빈약한 근거에 기대 결론을 정해두고 이야기를 맞춰간다는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underrated_history 제가 자료는 없고 어느 학자분 주장인데 그분 이름 기억 못하는데 설득력있더라구요. 호모사피언스 이동경로상 한반도까지 온 경로와 벼 원산지로 부터 전파 경로를 고려해 보면 우리나라가에서 잘견된 볍씨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객관적 자료가 있지만 유리나라에서 벼농사를 처음해서 다른 지역으로 농업이 전파되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농경사회 시작 농업혁명을 고려 해 보면
그렇습니다. 일단 영상 매우 유익하게 잘봣읍니다. 황하세력이 한반도까지 영향력을 키운거로 비논리적 근거는 중국과 일본의 고고학적 유전적 왜곡이 국제학계에 영향을 미친거로 보입니다. 사실상 모르는이들은 인류의 자산이 어디에서 기원이 시작됐는지가 얼마나 큰 댓가가 그나라에 미치는지 몰라서 등한시하고 별거아닌거로보지만 아는 사람들은 엄청 중요하다는걸 알게됩니다. 중국의 입김과 자본으로 각종 기원이나 민족적 유형을 왜곡하는지는 조금만 들어가보면 압니다. 일본은 태생이 사생국가라 열등의식속에 한반도에서 문화나 언어 기술(벼농사등)이 일본에 앞선다는걸 애써외면하는등 두 위아래 국가가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는지가 보입니다. 가까운 예로 하버드 백돼지 렘지어놈이 일본 극우 돈 받아처먹고 조작왜곡된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는것만 봐도 알수있지요. 이런쪽 로비는 돈으로 일본 중국이 젤 잘하는것이고 우기면된다고 보며 서양 국제학회도 이들의 돈에 놀아나는겁니다. 순 엉터리 논리지요. 황하문명이 확실한 중국의 문명일까요? 그런 확실한 논문이 있나요? 단지 현재 중국땅이라 중국문명이라하는거지 한족문명인건 아니지요. 그리고 한족이 있긴한가요? 대부분의 중국왕조는 이민족의 왕조였는데. 아 물론 일반 피지배층은 한족이라 보면될듯합니다. 국제적논문은 그저 중국측 관점에서 맞추려니 억지추론만 하는겁니다. 소로리 볍씨와 산동 요하의 벼농사는 무려 1만년의 시간차가나는데 그동안 한반도는 벼농사발전시키지않고 어느날 갑자기 요하 산동으로 넘어가 거기서 벼농사를 발전시켰다? 웃기지않습니까? 식민사관으로 만든 고조선 역사를 보더라도 신석기 청동기시절 유물들을 보더라도 한반도에는 이미 서기전 4000년경에 이미 벼농사를 짓고 있었을거로보니다. 환웅께서 고조선을 세운게 과연 현재 말하는 서기전 2333년일까요? 이 주장은 식민사관 역사학계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산동에서 한반도로 벼농사가 이전된 시기가 고조선이 세워지기전일가요? 벼농사가 이전되기전부터 음식을 담는 그릇이나 음식도구 등 수많은 유적이 나왔는데 벼농사가 중국으로부터 이전되어왓다? 얼마나 논리적이지 못합니까? 유전적으로는 더이상 다른 의견 낼만한 근거가 없고 변두리님의 논설에 수긍하며 보고 있읍니다만 모든게 중국으로부터 유입이란 국제논문에에는 문제가 있고 수긍하기가 곤란하네요. 힘있는쪽을 위한 개논리가 아닐까합니다. 영상 잘봤고 수고하셨어요~^^ 담 영상 기다려집니다 ^^
우선 유익하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국제 학술 논문의 의의는...학술지의 수준에 따라, 논문이 '기대하는 특정 수준 이상'임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번에 리뷰해드린 논문은 네이처라는 저널 수준이나 수많은 동북아 국가 연구자들의 동참한 걸 감안하면, 가설의 신빙성이나 논증의 엄밀성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학문을 융합한 결과물을 선보인다고 한 것이...도리어 논문의 논리에 여러 공백을 만들게 됐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전에 리뷰해드린 한국인, 흉노, 훈 등에 대한 집단 유전학 연구들은 부족한 샘플 수를 지적할 수 있을지언정, 분석한 샘플에 대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이고 무리한 의미 부여 없이 전개했다고 보입니다. 도리어 제가 저자 입장에서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추정을 덧붙이기도 했죠. 이제 와 생각해보면 과학자인 그들이 왜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 문장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의 가치에 대해서 새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논문이었습니다.
요즘 논문에 모두가 남쪽 순다래드에서 올라온 남방계가 주류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논리는 모두 아프리카계 라는 논리와 깉다. 심지어 한국 사람은 제주도에서 출발했고 마고신앙의 장소는 제주도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빙하기 시대에 다양한 경로로 올라온 고대인류가 북방스텦지역에 진출해서 기온의 변화에 따라 빙하지대의 이동으로 몇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했고 그들이 동서 남북으로 섞인 상태에서 히말라야 티벳고원의 수계를 따라 양자강지역 홍콩지역 메콩캉지역 태국.미얀마 지역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한 사람을 지금에 남방계이고 또 그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유전자가 섞였는데 그들 유전자 일부만 추적하면 아메리카에서도 나타난다. 현재의 유전자 분석은 개략적인 분석에는 용이하나 어느 유전자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판이하게 나온다. 지금 나온 고인골의 개채수가 미미하고 그것으로 모든 이동을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사람 생김새와 역사기록,언어, 유물을 통해 볼때 현생 동아시아 주류는 북방에서 분화해 다른 방향으로 내려왔고 남방계라는 것도 다른 경로로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후대에 항해술의 발전으로 유입된 사람들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소위 순다랜드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동남아와 오서아시아 섬에 곳곳에 화석처럼 있는데 우리와 닮았는가 묻고 싶다. 일본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조몬인이 티벳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류의 유전와 친연성이 높다고 하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홋가이도 지방에서 서쪽 열도로 남하했다고 하고 우리 남해안 욕지도를 비롯해서 그일대 에만 같은 유전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타당성이 높아 보이므로 순다랜드에서 지속적으로 올라와서 우리민족의 주류유전가 남방계라는 학설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거슨 목사의 dna를 가진 아들을 낳은 여자가 성령이 깃들어 낳은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말이네요. 친자, 후손 확인에 dna 비교 분석 만큼 정확한 수단은 없어요. 물론 이 dna 분석 결과를 역사와 비교하여 해석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음.. 지배자, 정복자, 왕족 중심의 역사에서 지배층이 피지배층보다 매우 적은 경우도 많은 데.. 이럴 경우 시간이 많이 지나면 애초 지배층의 dna는 많이 희석되죠. 따라서 현대인의 dna와 왕족의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죠. 이런 경우 유물,유적, 문화와 유전자 분석 기법으로 연구한 결과로 보완하여 해석을 하는데, 사람마다 해석결과가 다를 수 는 있음. 하지만 일단 유전자 분석결과는 명백한 fact 임.. 이결과를 거스르거나 설명하지 못 하거나 반하는 이론이나 주장은 개소리.
소로리 볍씨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도 폄훼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게 한중일 역사학계의 방식이죠. 한국 역사학계는 토착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동조하는거고 서양학계는 당연히 그런 분위기를 따를수 밖에 없음. 앞으로 빅테이터와 AI가 역사 흐름을 제대로 정리할거라 봅니다.
시청해주시고 또 고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한중일은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고, 역사적 실체를 밝히려면 서로가 가진 것들과 보는 것들을 진솔하게 오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적 실체가 밝혀진다고 해서, 땅을 도로 달라고 하는 일까지 발생 안한다는 생각을 했다가......꾸준히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더 어마어마한 소동이 날 거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 갈등의 조정과 중재를 담당하는 국제기구의 역할이 유명무실해보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진실의 추구를 위한 국제적 비영리 공인 기구가 조성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현재로서는 이 연구의 주관 기관인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그나마 가장 큰 국제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엄밀한 역사적 진실보다는 '큰 연구'에 집착해서 자의적 결과물을 낸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네요...
안녕하세요 영상 잘보고있습니다 제가 동아시아인의 기원이 궁금해 찾다보니 지난 영상들에서 나온 논문들도 읽었었습니다. 지금까지 중앙아시아 스텝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동쪽으로 이동하는중에 추위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한중일몽 인구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지만 제가 관련 연구들을 보니 일부는 동진한 인원들이 있을수 있지만 구성원의 절대다수는 동남아쪽에서 올라온 집단이 조상이다 라고 하는걸 알게되었습니다. 즉 동아시아인의 특성이 추위적응의 결과는 아니다라는게 제가 낸 결론인데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아시안이 빙하기의 추위로 지금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하니 제가 잘못 해석한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빙하기에는 북위 40도 윗지역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고 적도 인근에서 겨우 멸종위기를 벗어났다는 연구와 추위적응의 사례로 꼽히는 몽고주름이 아프리카의 코이산족이나 나일로트계 종족들에게서도 흔하다는 연구들이 동아시아인이 지닌 특성이 시베리아를 지나는 중 얻은 추위적응이라는 설을 부정하게 하는데요. 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소개해드린 연구의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논증하는데 불친절한 편이라, 말씀하신대로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저도 좀 설명이 부족했던 거 같긴 하고요. 다만 지금은 토착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조몬인도 빙기에 일본과 연결됐었던 아시아 대륙을 통해서 일본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다수의 연구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간 지점으로서 다수의 집단이 한반도를 거쳤을 거고요. 물론 일부는 말씀대로 현재의 일본 열도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기도 했겠죠. 하지만, 거시적, 근원적으로는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더 먼저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개해드린 연구에서는 더 근원적인 이동을 이야기하기보다 한반도의 유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이동'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 것 같습니다. 물론 후대에 일본 열도로 이동한 야요이인은 더 높은 확률로 한반도 유래 집단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예전에는 야요이 인이 일본열도로 이주후 조몬인과 혼혈화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혼혈화된 야요이인도 있었다는게 밝혀졌죠 한반도 남쪽 해안가에서는 이미 조몬인과 혼혈화된 야요이인이 살고 있었다는거죠 가덕도 에서 발굴된 유골도 조몬인이고요
동북아 역사가 대륙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열도로 문명의 이동경로가 뚜렷하다. 대륙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반도로 건너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고, 반도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열도로 넘어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모든 역사에는 "뿌리역사"가 있고 동북아시아의 뿌리역사는 12환국에서 시작하고 구리배달국으로 넘어가며 동북아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가장 큰 사건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사이의 10년 전쟁인 "탁록대전"에서 시작한다. 12환국이 여러개의 소국으로 쪼개지는데 그중 지배세력이 다스리던 지역에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리배달국"이 세워진다. 구리배달국은 중원지방과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으로 수도는 백두산 "신시"였다. 구리배달국의 지방정권으로 황하강 유역을 다스리던 제후국의 왕이 바로 중국의 삼황오제인데 그들은 중국 한족의 조상이 아닌 한민족의 일파였다. 제국의 수도인 신시를 환웅이 다스리고 지방정권인 황하강 유역은 환웅의 아들중 하나가 다스리던 체계였다. 그런데 서자인 치우가 적자인 환웅의 큰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환웅이 되는데 동북아 최초의 반란사건이었고 이에 적자인 헌원과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는데 10년간의 전쟁에서 치우는 100번 승리하고 마지막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그당시 제국의 수도는 신시에서 요하강 유역으로 옮긴 상태라 요하강을 중심으로 하는 구리배달국과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황제헌원이 다스리던 지역(하나라), 이렇게 둘로 쪼개진다. 즉, 동북아시아 문명권이 홍산문명과 황하문명으로 나뉜 것이다. 요하강 중심의 구리배달국이 나중에 왕조가 교체되어 단군이 다스리는 고조선이 되었고 황하강 유역은 삼황오제를 거쳐 하나라>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등을 거쳐 지금의 중국이 된 것이다. 즉, 홍산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이고 황하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인 것이다. 황제헌원의 큰아들인 현효가 왕권을 이어받아 "소호금천"이 되는데 이때 모계쪽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다음 황제는 모계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소호금천이 양보하여 전욱고양이 왕이 되는데 당시 모계계승 전통은 거의 사라져가는 추세였다. 소호금천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소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나중에 "훈누제국"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다. 한편 전욱고양은 "하늘과 땅의 교류를 끊었다"라고 나와있는데 쉽게 말해서 제사를 폐지한 것이다. 샤먼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늘의 신탁이 매번 전욱고양의 왕권찬탈의 부당함을 고하니 포악한 전욱고양은 아예 제사를 폐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소호금천의 아들인 제곡고신이 전욱고양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 그때부터 부계계승 전통을 확립한다. 삼황오제의 역사가 바로 하나라의 역사이고 제곡고신의 후손이 새롭게 연 왕조가 은나라이다. 당시 요하문명권은 구리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고 은나라와 단군조선 이렇게 두개의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양분하였다. 그당시 중국 한족의 조상인 화하족은 서쪽 산간지역에서 화전농이나 짓고 살던 시대였고 먹고사는데 급급한 그들에게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할리 없었는데 하나라, 은나라를 다스리던 한민족이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그들에게 문명을 전수하여 주고 그들도 그들의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주나라"이다. 은나라 주왕이 달기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어 주나라에게 망하는데 주나라 무왕은 자신들에게 문화를 가르켜준 은나라 지배세력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은나라 지배세력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단군이 다스리던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살게된다. 이때부터 한민족은 중원땅을 잃게되고 동남아 계열의 남방민족인 화하족, 즉 한족이 중원땅을 차지하게 된다. 고조선에 망명하여 살던 은나라 지배세력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다. 즉 기자조선은 은나라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춘추전국 말기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지배계층이 기자조선에 망명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여는데 이것이 바로 "위만조선"이다. 이때 기자조선의 세력은 한반도 남부로 밀려나는데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진"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진나라를 멸하고 기자조선이 그대로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마한/진한/변한)이다. 원래 고조선은 삼한체계로 다스리던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바로 기자조선인 것이다. 한반도 북부는 위만조선, 그리고 남부는 삼한(기자조선)으로 왕조가 나뉜 것이다. 춘추전국이 끝나고 한나라가 강성하여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위만조선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진한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사로국이다. 당시 소호금천이 세운 작은 나라인 소호국은 북방 유목민족을 규합하여 거대한 제국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훈누제국"이다. 훈누제국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는데 한무제의 훈누정벌이 시작되면서 일부는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밀려나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며 로마제국을 침략하는 "훈족"이 되었다. 한무제에 사로잡힌 일부는 바로 훈누제국 이치사 선우의 손자들인데... 이치사 선우의 태자인 좌현왕 휴도왕(휴저왕?)이 살해당하고 두 아들이 곽거병에 사로잡혀 한무제의 노예가 되는데 나중에 한무제에 중용되어 김씨성을 하사받고 한나라의 실세가 된다. 전후한 교체기에 왕망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때 왕망의 편에 가담한 김씨세력이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할때 광무제의 추격을 피해 산동성에서 배타고 한반도로 이동하는데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여 일부는 변한지역을 접수하여 "6가야"를 세우고 일부는 사로국으로 들어가서 사로국을 지배하던 석씨세력을 몰아내고 김씨왕조를 확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망의 "신"나라와 신라의 "신"자가 둘 다 새로울"신"이라는 한자이다. 치명적인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좌우지간 대륙의 왕조교체가 있을때 일단의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 사건이 두어번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할때 은나라 지배세력이 단군조선을 몰아내고 기자조선을 세운 사건과,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에 밀려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게 된 사건, 그리고 훈누족의 일파가 중국 한나라의 실세가 되어 살다가 전후한 교체기에 한반도로 이주하여 가야/신라 이렇게 두 나라를 세운 사건, 이렇게 큰 사건이 한반도 민족구성과 문화를 결정하는 중대사건들이다. 사설로 훈누제국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데... 고조선과 동맹하여 한나라를 위협하던 훈누제국이 한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한나라에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고 로마제국을 정벌하면서 로마제국 변방을 얻어 나라를 세운것이 지금의 헝가리이고... 중앙아시아에 남아있던 이들이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스스로를 "튀르크"라 명하게 되고 투르크족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고토회복을 위하여 동진하여 돌궐제국을 세우고 고구려와 동맹하여 당나라를 위협하다가 또다시 당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당나라에 밀려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서진하여 서유럽과 마찰을 일으킨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고 동로마 제국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셀주크투르크>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나중에 터키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이다.
원래 언어는 하나였죠.성경 하나님들이 인류가 바벨탑짓는거 싫어 언어를 흐트렸다죠.특히 악마가 말을 거꾸로 말하도록 가르쳐서 서로 다르게 말하며 싸우며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종족처럼 착각하고 살며 서로 죽고 죽이며 자멸해가게 하는 중이죠.왜?인류가 번성하는게 싫은거죠.하나님들의 종자들이 번성하기 바라는거고 그 하나님들이 성경속 주님이라죠?
동북아 역사가 대륙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열도로 문명의 이동경로가 뚜렷하다. 대륙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반도로 건너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고, 반도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열도로 넘어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모든 역사에는 "뿌리역사"가 있고 동북아시아의 뿌리역사는 12환국에서 시작하고 구리배달국으로 넘어가며 동북아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가장 큰 사건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사이의 10년 전쟁인 "탁록대전"에서 시작한다. 12환국이 여러개의 소국으로 쪼개지는데 그중 지배세력이 다스리던 지역에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리배달국"이 세워진다. 구리배달국은 중원지방과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으로 수도는 백두산 "신시"였다. 구리배달국의 지방정권으로 황하강 유역을 다스리던 제후국의 왕이 바로 중국의 삼황오제인데 그들은 중국 한족의 조상이 아닌 한민족의 일파였다. 제국의 수도인 신시를 환웅이 다스리고 지방정권인 황하강 유역은 환웅의 아들중 하나가 다스리던 체계였다. 그런데 서자인 치우가 적자인 환웅의 큰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환웅이 되는데 동북아 최초의 반란사건이었고 이에 적자인 헌원과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는데 10년간의 전쟁에서 치우는 100번 승리하고 마지막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그당시 제국의 수도는 신시에서 요하강 유역으로 옮긴 상태라 요하강을 중심으로 하는 구리배달국과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황제헌원이 다스리던 지역(하나라), 이렇게 둘로 쪼개진다. 즉, 동북아시아 문명권이 홍산문명과 황하문명으로 나뉜 것이다. 요하강 중심의 구리배달국이 나중에 왕조가 교체되어 단군이 다스리는 고조선이 되었고 황하강 유역은 삼황오제를 거쳐 하나라>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등을 거쳐 지금의 중국이 된 것이다. 즉, 홍산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이고 황하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인 것이다. 황제헌원의 큰아들인 현효가 왕권을 이어받아 "소호금천"이 되는데 이때 모계쪽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다음 황제는 모계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소호금천이 양보하여 전욱고양이 왕이 되는데 당시 모계계승 전통은 거의 사라져가는 추세였다. 소호금천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소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나중에 "훈누제국"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다. 한편 전욱고양은 "하늘과 땅의 교류를 끊었다"라고 나와있는데 쉽게 말해서 제사를 폐지한 것이다. 샤먼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늘의 신탁이 매번 전욱고양의 왕권찬탈의 부당함을 고하니 포악한 전욱고양은 아예 제사를 폐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소호금천의 조카인 제곡고신이 전욱고양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 그때부터 부계계승 전통을 확립한다. 삼황오제의 역사가 바로 하나라의 역사이고 제곡고신의 후손이 새롭게 연 왕조가 은나라이다. 당시 요하문명권은 구리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고 은나라와 단군조선 이렇게 두개의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양분하였다. 그당시 중국 한족의 조상인 화하족은 서쪽 산간지역에서 화전농이나 짓고 살던 시대였고 먹고사는데 급급한 그들에게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할리 없었는데 하나라, 은나라를 다스리던 한민족이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그들에게 문명을 전수하여 주고 그들도 그들의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주나라"이다. 은나라 주왕이 달기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어 주나라에게 망하는데 주나라 무왕은 자신들에게 문화를 가르켜준 은나라 지배세력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은나라 지배세력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단군이 다스리던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살게된다. 이때부터 한민족은 중원땅을 잃게되고 동남아 계열의 남방민족인 화하족, 즉 한족이 중원땅을 차지하게 된다. 고조선에 망명하여 살던 은나라 지배세력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다. 즉 기자조선은 은나라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춘추전국 말기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지배계층이 기자조선에 망명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여는데 이것이 바로 "위만조선"이다. 이때 기자조선의 세력은 한반도 남부로 밀려나는데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진"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진나라를 멸하고 기자조선이 그대로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마한/진한/변한)이다. 원래 고조선은 삼한체계로 다스리던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바로 기자조선인 것이다. 한반도 북부는 위만조선, 그리고 남부는 삼한(기자조선)으로 왕조가 나뉜 것이다. 춘추전국이 끝나고 한나라가 강성하여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위만조선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진한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사로국이다. 당시 소호금천이 세운 작은 나라인 소호국은 북방 유목민족을 규합하여 거대한 제국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훈누제국"이다. 훈누제국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는데 한무제의 훈누정벌이 시작되면서 일부는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밀려나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며 로마제국을 침략하는 "훈족"이 되었다. 한무제에 사로잡힌 일부는 바로 훈누제국 이치사 선우의 손자들인데... 이치사 선우의 태자인 좌현왕 휴도왕(휴저왕?)이 살해당하고 두 아들이 곽거병에 사로잡혀 한무제의 노예가 되는데 나중에 한무제에 중용되어 김씨성을 하사받고 한나라의 실세가 된다. 전후한 교체기에 왕망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때 왕망의 편에 가담한 김씨세력이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할때 광무제의 추격을 피해 산동성에서 배타고 한반도로 이동하는데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여 일부는 변한지역을 접수하여 "6가야"를 세우고 일부는 사로국으로 들어가서 사로국을 지배하던 석씨세력을 몰아내고 김씨왕조를 확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망의 "신"나라와 신라의 "신"자가 둘 다 새로울"신"이라는 한자이다. 치명적인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좌우지간 대륙의 왕조교체가 있을때 일단의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 사건이 두어번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할때 은나라 지배세력이 단군조선을 몰아내고 기자조선을 세운 사건과,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에 밀려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게 된 사건, 그리고 훈누족의 일파가 중국 한나라의 실세가 되어 살다가 전후한 교체기에 한반도로 이주하여 가야/신라 이렇게 두 나라를 세운 사건, 이렇게 큰 사건이 한반도 민족구성과 문화를 결정하는 중대사건들이다. 사설로 훈누제국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데... 고조선과 동맹하여 한나라를 위협하던 훈누제국이 한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한나라에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고 로마제국을 정벌하면서 로마제국 변방을 얻어 나라를 세운것이 지금의 헝가리이고... 이들이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스스로를 "튀르크"라 명하게 되고 투르크족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고토회복을 위하여 동진하여 돌궐제국을 세우고 고구려와 동맹하여 당나라를 위협하다가 또다시 당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당나라에 밀려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서진하여 서유럽과 마찰을 일으킨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고 동로마 제국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셀주크투르크>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나중에 터키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이다.
골치아프지만 한가지만 더 언급하자. 고구려에 대한 것인데... 고구려 태조 고주몽은 전욱고양의 후손이다. 고주몽이 요동지방에 살던 구이족(구리족)을 규합하여 "고구리"를 세우는데 구이족의 조상이 바로 치우천황이다. 원래 치우천황의 본거지가 요동지방이었고 탁록전쟁의 패배(혹은 무승부)로 중원땅을 황제헌원에게 빼앗겨서 치우천황의 후손이 모두 요동지방에 모여 살게된 것이다. 고구려의 뿌리가 치우천황인 증거를 몇가지 대자면... 고구려 장수들의 투구를 보면 좌우로 두개의 뿔이 나있는데 이것은 치우천황의 투구를 흉내낸 것이다. 고구려의 방패나 기와 등을 장식하던 전통문양중 도깨비 문양이 있는데 이것은 "붉은악마", 즉 치우천황을 형상화 한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중국 남부의 묘족 또한 스스로를 치우천황의 후손이라 하는데 어쩌면 그들은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쨓든 치우천황의 후손이 세운 북방의 고구려와 황제헌원의 후손이 세운 남방의 신라가 대립하던 구조가 바로 삼국시대이다.
빙하기 후 간빙기가 되면서
한반도에서 최초로 농사가 시작되었고
점차 북쪽으로 영향권을 넓히면서 요하문명도 일어났으며
요하문명의 영향으로 일이천년후 황하문명으로 이어졌다고 봄.
80년대 우랄알타이어족이라고 배웠다가 80년대 후반 우랄빼고 알타이어족이라고 배웠다가 90년대 고립어라고 배웠는데 진짜 이런 연구 결과가 그리웠음 우리 일반인에게 반도일본어설 소개되었을때도 흥미진진했었죠 한일을 연결하는 혈액형 cis AB형 나왔을때도 신기했고 김해 대성동 고분에 유골이 와장창 나왔을 때도 아주 기뻐했는데 DNA 연구가 현생인류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게놈도 해독하고 하플로 그룹으로 인류의 기원을 찾을땐 곧 한국인의 기원도 밝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할듯 합니다 북한과 분단상황이고 중국의 왜곡과 비협조도 있지만 이런 연구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트랜스유라시아어족 아주 흥미롭습니다
안녕하세요. 한참 대학생일때 역사기 모두 정주행한 사람인데. 익숙한 목소리다 싶었는데 유투브로 진출하셨네요~ 저도 다른 팟캐스트도 해본적이 있었는데 사회생활과 함께하는걸이 얼마나 힘들던지.... 건승을 바랍니다. 구독 드렸어요 ^^
서영삭님, 역사기 청취자시군요^^ 너무 반갑습니다! 팟캐스트든 유튜브든 사회생활 특히 생업과 병행하기는 쉽지 않은 듯합니다...또 그래도 응원해주시는 데에서 힘을 입고, 스스로도 지적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는 보람으로 가끔씩이나마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구독 감사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소로리 근처 좀 더 탐사해보면 좋겠어요. 공장됐다니 아쉬워요. 저는 중국서 공부했었는데 2004년에 북경대 수업시간에 교수님도 소로리 볍씨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 때 교수님이 한국서 13000년된거 발견됐으니 앞으로 중국서도 더 오래된것 발견될 수 있다라고 했어요. 이게 중국 사람들의 생각인데 서방 학자나 일본학자들도 똑같을 것 같네요. 저는 이게 그냥 욕할게 아니라 역사학을 정말로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더 많은 연관관계를 발굴하고 입증하는 연구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과학자들은 이 입증들이 쌓이면 자신의 의견도 바꾸는데 역사학자들은 이게 잘 안되는것 같습니다. 역사 애호가들은 더 심하구요. 과학보다 현실 정치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영역이구요. 저는 이게 경제학적으로 과학은 파이를 늘려먹을수 있는 미래 먹거리지만 역사는 지구의 특정지역과 살았던 사람들을 나누어 먹어야 하는 영역이라 그렇다고 생각해요.
시청 후 고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많이 아쉽습니다. 소로리 볍씨 유적지 근처도 탐사를 해서 주변에도 비슷한 유물이 발견되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인근을 한층 높은 농경 문화로 볼 수 있을지 아닌지 여부를 확실히 판단할 수 있을 텐데요...아마 몇몇 분이나마 작업을 하셨을 거란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관련 논문도 거의 없는 등ㅜ 노력이 미비하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 싫어하는 연구자들도 많이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하네요. 일단은 일부 뜻있는 연구자분들의 족적이라도 먼저 좇아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추가 발굴을 당시 사람들은 왜 깨닫지 못 했다고 생각하나요?.
주변 여러곳 발굴해도 유물,유적이 1점도 안나오고, 볍씨도 추가로 안나왔음..
그래서 아직도 재배벼가 아닌 (재베 관련 증거가 없음) 야생벼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소로리 볍씨는 야생벼, 재배벼와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유전학적으로 재배벼의 원조로 보기 어렵죠.
@@islandtree7577 그것도 맞는 말씀같네요. 그래도 열심히 연구 안한것도 맞고 왜 탄화미로 나올수 있는지는 더 알아봤으면 좋았겠죠? 중국이나 일본이었음 없는것도 만들어냈을거 같아요 ㅋㅋ 일단 인력끌어올수 있는 시스템도 없고 의외의 상황에 돈 집어넣어줄수 있는 여력도 없고 그래 보입니다 저는...
너무 재미있네요😊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한반도에 거주하는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의 이동 경로상에 인도와 인도차이나반도가 있지요..
동남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인류는 10~4만년사이 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 중동 아라비아반도에 도달하였고 그곳에서 일파는 유럽으로 또 일파는 중앙아시아 몽고고원쪽으로 또 일파는 인도 인도차이나 말레지아 호주 태평양섬으로 또 일파는 중국동해안을 따라 한반도쪽으로 이동했지요..
3~4만년전 순다랜드방면(지금은 바다지만 당시 육지였던 인도차이나 중국동해안루트)에서 한반도쪽으로 올라온 일파가 있었어요. 3~4만년전 인도 인도차이나지역에서는 언어가 비슷했을거예요..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단어가 많고 어순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에는 같이 어울려 살았으니까요..
물론 몽고 시베리아방면에서 한반도로 내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남방계 북방계가 적당히 섞어 형성된 민족이 한반도 만주 일본사람들이지요..
2~1.5만년전쯤 몽고 만주 시베리아 사람 일부는 베링육교와 알류샨열도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북미인디언의 조상이 되었고 그들은 남미대륙 최남단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오 혼다님 새영상 선댓글 후 감상함당
두비두비님, 선댓글 후 시청이라니 너무 감사해요^^
유익한 영상이셨기를 바랍니다~
언어학적인 측면으로 보면, 기존 알타이어족 가설에서도 투르크, 몽골, 퉁그스, 더 나아가, 한국, 일본의 문법이 동일하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죠. 심지어 우랄어도 유사성이 있죠. 몽골, 한국, 일본의 여러 어휘들이 동일한 기원에 있다는 것도 입증되었죠. 벼농사가 한국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한 가설은 틀린 것일 수도 맞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설 전체의 논리에는 영향이 없어요. 그건 너무 지협적?인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요서 지역 기원설을 송호리 기원설로 해도 상관이 없어요.
좋은 동영상 이기에 몇 자 적어 봅니다.
이 논문의 오류를 논하기 전에
1. 유목은 농경에 비해 만년이 지난 후에 후에 나타납니다.(말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이 기원전 4천년 전 후 입니다.)
2. 터어키어는 돌궐 제2제국 후에
서쪽으로 전파가 시작되어(가장 늦은 전파인
야쿠트어를 제외하고)
지금의 튀르키예로의 마지막 정착은 셀주크투르크에 가서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쌀농사의 전파등 지엽적인 오류 등이 있더라도
위 논문은 상당히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여지며 커다란 임팩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값진 피드백 감사 드립니다. 남겨주신 내용 숙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설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으나,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부족했다고 생각했던 논문의 부분은 언어학적 근거였고, 다른 연구자 분들로부터도 비슷한 견해도 들은 바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시청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오랜만에 인사드렸네요^^ 최근 영상 올리신 것 봤어요~
느긋한 마음으로 시청하기엔,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점심 시간인 지금이 적기일 것 같습니다.
쪼깐 동북공정 목적 공작질 연구가 엿보이는 부분도 섞여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드네요. 5천년전에는, 서해바다는 드넓은 평원이었다 하고, 동해는 호수와 육지였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요 ^^ 그래서 강화도 마니산(마리산) 꼭데기에 참성단이 있었나 보네요^^
5천년전이 아니라 1만 2천년전입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해요~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내려는 저자의 의도도 있긴 할테지만....아무르, 황하, 조몬의 권역을 하나로 엮어내는 과정은 좀 무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히려 동북공정을 깨려고 준비하는것 일 수도 있다 생각해요.
@The History of Jusen(Juchen People) in Manchuria 삼한은 본래 대륙에 있었습니다.ㅡ 진한.마한.번한이 하북성에서 한반도까지 있었습니다. 진한은 진조선.마한은 막조선.번한은 번조선이 었다가 막조선은 진조선에 흡수되었습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에 보이는 진번조선은 진조선.번조선을 말하는 것이죠. 진조선은 북부여.고구려가 되었고 번조선은 위만조선이 되었습니다.ㅡ 그리고 이들 삼한 삼조선의 잔여세력들은 막조선 마한의땅으로 내려와 마한의 삼한을 형성한것입니다.ㅡ 결론 고구려 예맥족과 삼한은 같은 민족
@The History of Jusen(Juchen People) in Manchuria 땅이 넓다보면 사투리는 당연히 심하지 않았을까 하는데요.ㅡ 제주도 고유언어 우리도 알아듣기 힘듭니다.
혼태식이 돌아왔구나 몽골편 두번째 완주중입니다!
살라흐앗딘 형은 나가있어...ㅋㅋㅋ '해바라기'스러운 환영 감사 드리고요~ 몽골편 두번째 시청도 감사 드립니다! 꼭 언제라고 말씀드리는 건 어렵지만, 조만간 몽골편을 포함한 정통 역사 방송으로도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일부 남방계 유전자는 North East Asian Group 으로 진화하기 전의 유전적 자취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남부해안선을 따라 이동한 선조의 유전적 자취이죠. 그러나 빙하기동안 한반도에서 North East Asian Group 으로 분화한 한국인의 조상은 분명 필리핀과 같이 South East Asian Group으로 분류하는 漢족과는 다르죠. 생김새 만큼이나 언어도 다르고요.
시청해주시고 또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말씀하신 해안선을 따른 주요 경로가 있고, 제가 참고했던 연구자료에서는 또 다른 경로에 대한 표현이 있어 흥미롭더군요. 먼저 해안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내륙을 통해 동쪽으로 이동한 일부 집단이 지금의 베이징 인근 전원동굴(Tianyuan)에 이르고, 여기서 또 오늘날의 동남아 지역으로 남하한 뒤에 거기서 해안선을 타고 북동쪽으로 향했다는 거죠. 전원동굴에서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향한 집단이 북방계의 한 갈래로 표현되기도 하고요. 제가 말미에 소개해드린 논문은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석 가능한 샘플의 수가 워낙 소수이고, 그 소수의 샘플이 전체 결과를 크게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은 늘 주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 사견이 도리어 연구의 성과를 무시할 수도 있고....방송에 그런 내용을 너무 많이 표현하게 되면, 들으시는 분들의 맥이 풀릴까 자주 이야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underrated_history 지구가 더울때도 있고 추울때도 있고 그 와중에 인류가 한반도로 온 루트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오늘날 漢족과 한민족이 유전적으로 엮을려는 중공의 시도는 짜증이 납니다. 중국의 유전자공정도 눈뜨고 못보겠더군요. 오스트랄로이드로 해석해야하는 漢족과 몽골로이드인 한민족을 엮을려는 시도죠. 인류학에서도 남방계 몽골로이드라는 말보다 오스트랄로이드로 바꾸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요.
@@underrated_history 영상은 언제나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저는 부계쪽이 D계통으로(d1b1c) 나왔어요.
검사자수가 좀 소수라 구체적인 하위도 알수없어서 분화연대를 모르는데(풀시퀀싱 해야 분화연대를 더 정확히 알수있다고 들었어요ㅜㅜ)
무조건 일본이 기원이고 이게 한국인에서 나왔다는 건 역으로 넘어왔다고 보면 된다 들었는데
한반도 기원일 가능성이 많이 낮은지 여쭙고 싶어요.~최소 분화연대가 2천년전이라 하던데..
실제 전남과 경남서부 지역에 하플로 D가 2~5% 잔존해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에 한반도를 통과하여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꼭 역으로 일본에서 넘어온건 아니고 일부가 처음부터 한반도에 잔류해서 한국인으로 융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름하늘-l5c 저도 그렇게 생각 하고있는데요 하위가 이렇게 나오면 역이민일 가능성이 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hibiscussyriacus6408 자세히 보니 그렇군요 d1b1c 흔하지 않는 하위이긴 합니다 일본은 d1a2a가 주류인데요 ,,,,, 찾아보니 위키백과에 d1b까지는 나오네요 하위는 안나오고요 님 말씀대로 풀시퀀싱해서 대조작업이 필요하겠네요 괜히 아는척해서 죄송합니다ㅠ
@@여름하늘-l5c 혹시 d1b 가 구버전 표시방법인거는 아시는거죠 d1b가 d1a2로 바뀌었어요
@@여름하늘-l5c 아아 아니에용!!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5000년전에 요하부근에 기후변화가 발생했는데,
거대한 지진과 같은 지각변동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거대한 홍수가 일어 났고,
홍수 이후 수자원이 고갈되는 현상이 일어 납니다.
따라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유적과 유물의 이동이
시차적으로 크게 3갈래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금주-진황도-북경-산동 방면인데 이쪽은 당시 진흙밭이라 소수가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음
하나는 태행산맥의 서쪽 대동-삭주-태주-임분-여량-서안 (가장 많은 이구의 이동으로 추정)
하나는 바이칼호수-울란바토르-카라코룸-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제 추측이지만, 갑자기 5000년 전후에 급격한 인구이동과 기후변화와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
연구의 정밀도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트렌스 유라시아어 보다 폐기된 학설에 가까운 우랄 알타이어가 더욱 익숙하고 편하게 들리는데요. 우랄 알타이어가 요하유역에서 시작되었다면 오히려 대흥안령 알타이 우랄어가 맞지않나요.
저도 개인적으로 트랜스유라시아어라는 표현이 그다지 좋은 작명이라는 생각이 안들긴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너무 모호하다는 게 큰 단점인 것 같아요. 논문 리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후에 다른 연구를 통해 대체어를 발견한다면 그 용어를 더 자주 쓸 듯합니다.
우랄-알타이는 특정지역을 근거없이 기원지로 삼은 용어이기 때문에 마치 지금의 다양한 아시아 지역 언어가 우랄과 알타이 산맥이 있는 러시아에서 비롯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보나 넓은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물론 우리나라 같이 중국 극혐하고 시베리아 대륙 지향하는 사람들은 우랄-알타이를 좋아하겠지만요.
@@underrated_history 그리고 소로리 볍씨 연대는 공인된 적 없고 재배종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인정 안 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나 뭔가 한반도에서 인류 문화의 커다란 요소가 기원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갖고 관심있게 보고 과학이랍시고 연대치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지만 학계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유튜브에서 아무리 과학이랍시고 떠들어 봤자 전문 학계는 일개 크리에이터의 사견으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rere5861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학계나 공인이 얼마나 협소한지는 모르나, SCI 논문으로도 승인되고 개론서에서도 사실로서 게재한 내용입니다. 사견은 가지실 수 있으나 본인이 말씀하신 내용에 부합하는 연구자료도 제시하지 못하시면서 일반론을 펼치시는 건 아집으로밖에 안보입니다,
황하도 황하 나름입니다.ㅡ 황하 하류 지역은 동이족으로 요하유역과 근본적으로 같은 문화권입니다. 태호복희씨. 신농씨의 부친 그리고 치우천자도 요하유역에서 황하하류 남부지역으로 내려온 성인들입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화도 여러 층위가 있을 텐데, 제가 방송에서 말씀 드린 건 언어학과 고고학 유물에 근거한 유사도가 미미하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자부하는 학자들도 무의식적으로 정치적 현실에 시야가 경도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 조차도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데 외국인의 시선에는 당연히 한국은 예외일 것입니다. 한줌도 않되는 유목민족은 과대하게 평가되고 동북아에서 가장 강건하게 체제를 잘 유지한 한국은 참고 조차도 제대로 안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전근대 시절 거대한 문화를 창출했던 것을 이유로 모든 것의 기원을 자신들에서 찾는 것 같고 다수의 학자들도 합리적 의심이 이전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남겨주신 말씀을 보니...역사의 주도권이라는 게 너무 이른 시기에 확립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였든 본인이 결정 불가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는 인간의 커다란 부조리가 새삼 씁쓸하게 느껴지네요.
역사적 경험의 명암이라는 게 있다고 느껴져요. 한국의 다수 집단은 상대적으로 미시적 변화에 민감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장점이 있는 한편, 더 기저에 놓인 조건들을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의심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우리 집단이 더 발전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저부터서도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역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요즘 다시 한국인들의 잠재력이 빌휘되고 있읍니다. 역사는 돌고돈다고는 말이 맞는것 같아요. 통일만 된다면 ( 혼란기가 꽤 있겠지만)강대국이 될수있어요. 중국은 청나라 덕분에 땅도 거대해졌지만 신라의 후예인것을...당나라도 유명하지만 선비족...그런데 당나라 청나라 한족이 아닌데 중국 역사로 치는것이 맞는건지 혼동이 되기도 하는데요. 만약 우리나라가 없어지고 일개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이 되었다면 삼국시대 통일 신라 고려 조선 다 중국역사로 흡수되었겠죠. 참 ~ 대단한 대한민국 ☆
영상 19분경 전원동굴인의 지역적 표시가 잘못되어있습니다.
표시된 곳은 베이징이 아니라 북한이네요.
실수하신듯 합니다.
타당한 피드백 주셔서 감사합니다. 빙하기의 지도이니...말씀하신 부분이 맞다고 보입니다. 현재 지도의 중국 해안선과 빙기의 해안선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네요;; 추후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뿌리는 한반도입니다. 책 쉽게 쓰는 글 잉글을 읽어 보시면 잘 아실 수 있습니다.
욕지도유골도 그렇고 가덕도유골도 그렇고 아무래도 우리들이 한반도에 놀러살기전에 어떤 이름모를 이민족이 골든카무이를 찍고있었나보군요
소로리 볍씨는 농경으로 볍씨 보다는 양생볍씨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벼원산지는 인도 동남아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전파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인류이동경로도 봐도 그렇죠
시청 감사 드립니다! 혹시 "소로리 볍씨는 농경으로 볍씨 보다는 양생볍씨라는 주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이나 참고문헌 공유가 가능하실까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말씀 드린 가능성은...인류의 대 이동에 비추어 시점 상으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타 논문의 연구도 감안했을 때 이동 경로가 충분히 다변화된 시점이라고 판단해 제기해보았습니다.
야생형 벼의 발상지에서 농사도 먼저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높다고 생각되지만, 또 소로리 볍씨가 '최고(最古)의 볍씨'란 인증된 연대 추정 결과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 있기도 하고요.
사실 이 논문에서 얼마나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나 기대했었는데, 사실 제 입장에서는 너무 빈약한 근거에 기대 결론을 정해두고 이야기를 맞춰간다는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underrated_history 제가 자료는 없고 어느 학자분 주장인데 그분 이름 기억 못하는데 설득력있더라구요. 호모사피언스 이동경로상 한반도까지 온 경로와 벼 원산지로 부터 전파 경로를 고려해 보면 우리나라가에서 잘견된 볍씨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객관적 자료가 있지만 유리나라에서 벼농사를 처음해서 다른 지역으로 농업이 전파되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농경사회 시작 농업혁명을 고려 해 보면
@@Dalawow 넵, 알겠습니다. 저는 다양한 견해 중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은 배제하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 편입니다. 말씀하신 부분도 충분히 그렇게 보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말씀하신 입장들과 함께 추후의 연구 결과들을 더 지켜보고 싶어지네요.
@@underrated_history 정말 잘 구독하고 있습니다 최고세요 밥이라도 사고 싶어요
@@Dalawow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 드립니다! 근래 너무 바쁜 관계로 영상을 잘 못 올려드려 송구하네요ㅜ
한국은 왕을 포함한 지배자 집단과 피지배자 집단과의 유전자가 차이가 많이 날 듯함
구석기보다는 신석기를 든 놈이 이기고
신석기보다는 청동기를 든 놈이 이기는데
중국의 황제와 치우의 결과는 청동기인 치우가 졌다고 한다
그렇습니다. 일단 영상 매우 유익하게 잘봣읍니다. 황하세력이 한반도까지 영향력을 키운거로 비논리적 근거는 중국과 일본의 고고학적 유전적 왜곡이 국제학계에 영향을 미친거로 보입니다. 사실상 모르는이들은 인류의 자산이 어디에서 기원이 시작됐는지가 얼마나 큰 댓가가 그나라에 미치는지 몰라서 등한시하고 별거아닌거로보지만 아는 사람들은 엄청 중요하다는걸 알게됩니다. 중국의 입김과 자본으로 각종 기원이나 민족적 유형을 왜곡하는지는 조금만 들어가보면 압니다. 일본은 태생이 사생국가라 열등의식속에 한반도에서 문화나 언어 기술(벼농사등)이 일본에 앞선다는걸 애써외면하는등 두 위아래 국가가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는지가 보입니다. 가까운 예로 하버드 백돼지 렘지어놈이 일본 극우 돈 받아처먹고 조작왜곡된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는것만 봐도 알수있지요. 이런쪽 로비는 돈으로 일본 중국이 젤 잘하는것이고 우기면된다고 보며 서양 국제학회도 이들의 돈에 놀아나는겁니다. 순 엉터리 논리지요. 황하문명이 확실한 중국의 문명일까요? 그런 확실한 논문이 있나요? 단지 현재 중국땅이라 중국문명이라하는거지 한족문명인건 아니지요. 그리고 한족이 있긴한가요? 대부분의 중국왕조는 이민족의 왕조였는데. 아 물론 일반 피지배층은 한족이라 보면될듯합니다. 국제적논문은 그저 중국측 관점에서 맞추려니 억지추론만 하는겁니다. 소로리 볍씨와 산동 요하의 벼농사는 무려 1만년의 시간차가나는데 그동안 한반도는 벼농사발전시키지않고 어느날 갑자기 요하 산동으로 넘어가 거기서 벼농사를 발전시켰다? 웃기지않습니까? 식민사관으로 만든 고조선 역사를 보더라도 신석기 청동기시절 유물들을 보더라도 한반도에는 이미 서기전 4000년경에 이미 벼농사를 짓고 있었을거로보니다. 환웅께서 고조선을 세운게 과연 현재 말하는 서기전 2333년일까요? 이 주장은 식민사관 역사학계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산동에서 한반도로 벼농사가 이전된 시기가 고조선이 세워지기전일가요? 벼농사가 이전되기전부터 음식을 담는 그릇이나 음식도구 등 수많은 유적이 나왔는데 벼농사가 중국으로부터 이전되어왓다? 얼마나 논리적이지 못합니까? 유전적으로는 더이상 다른 의견 낼만한 근거가 없고 변두리님의 논설에 수긍하며 보고 있읍니다만 모든게 중국으로부터 유입이란 국제논문에에는 문제가 있고 수긍하기가 곤란하네요. 힘있는쪽을 위한 개논리가 아닐까합니다. 영상 잘봤고 수고하셨어요~^^ 담 영상 기다려집니다 ^^
우선 유익하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국제 학술 논문의 의의는...학술지의 수준에 따라, 논문이 '기대하는 특정 수준 이상'임을 보장해주는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번에 리뷰해드린 논문은 네이처라는 저널 수준이나 수많은 동북아 국가 연구자들의 동참한 걸 감안하면, 가설의 신빙성이나 논증의 엄밀성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학문을 융합한 결과물을 선보인다고 한 것이...도리어 논문의 논리에 여러 공백을 만들게 됐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전에 리뷰해드린 한국인, 흉노, 훈 등에 대한 집단 유전학 연구들은 부족한 샘플 수를 지적할 수 있을지언정, 분석한 샘플에 대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이고 무리한 의미 부여 없이 전개했다고 보입니다. 도리어 제가 저자 입장에서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추정을 덧붙이기도 했죠. 이제 와 생각해보면 과학자인 그들이 왜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 문장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의 가치에 대해서 새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논문이었습니다.
@@underrated_history 맞습니다. 완전하지않은 코멘트는 결국 많은 논쟁과 불필요한 억측만 유발할겁니다. 저도 이해가 가는말입니다.
요즘 논문에 모두가 남쪽 순다래드에서 올라온 남방계가 주류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논리는 모두 아프리카계 라는 논리와 깉다.
심지어 한국 사람은 제주도에서 출발했고 마고신앙의 장소는 제주도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빙하기 시대에 다양한 경로로 올라온 고대인류가 북방스텦지역에 진출해서 기온의 변화에 따라 빙하지대의 이동으로 몇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했고 그들이 동서 남북으로 섞인 상태에서 히말라야 티벳고원의 수계를 따라 양자강지역 홍콩지역 메콩캉지역 태국.미얀마 지역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한 사람을 지금에 남방계이고 또 그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유전자가 섞였는데 그들 유전자 일부만 추적하면 아메리카에서도 나타난다.
현재의 유전자 분석은 개략적인 분석에는 용이하나 어느 유전자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판이하게 나온다.
지금 나온 고인골의 개채수가 미미하고 그것으로 모든 이동을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사람 생김새와 역사기록,언어, 유물을 통해 볼때 현생 동아시아 주류는 북방에서 분화해 다른 방향으로 내려왔고
남방계라는 것도 다른 경로로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후대에 항해술의 발전으로 유입된 사람들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소위 순다랜드에서 이동한 사람들이 동남아와 오서아시아 섬에 곳곳에 화석처럼 있는데 우리와 닮았는가 묻고 싶다.
일본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조몬인이 티벳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류의 유전와 친연성이 높다고 하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홋가이도 지방에서 서쪽 열도로 남하했다고 하고 우리 남해안 욕지도를 비롯해서 그일대 에만 같은 유전자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타당성이 높아 보이므로 순다랜드에서 지속적으로 올라와서 우리민족의 주류유전가 남방계라는 학설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거슨 목사의 dna를 가진 아들을 낳은 여자가 성령이 깃들어 낳은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말이네요.
친자, 후손 확인에 dna 비교 분석 만큼 정확한 수단은 없어요.
물론 이 dna 분석 결과를 역사와 비교하여 해석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음..
지배자, 정복자, 왕족 중심의 역사에서 지배층이 피지배층보다 매우 적은 경우도 많은 데.. 이럴 경우 시간이 많이 지나면 애초 지배층의 dna는 많이 희석되죠. 따라서 현대인의 dna와 왕족의 역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죠.
이런 경우 유물,유적, 문화와 유전자 분석 기법으로 연구한 결과로 보완하여 해석을 하는데, 사람마다 해석결과가 다를 수 는 있음.
하지만 일단 유전자 분석결과는 명백한 fact 임.. 이결과를 거스르거나 설명하지 못 하거나 반하는 이론이나 주장은 개소리.
일본의 주장은 신뢰하기 어려움 ,특히 역사나 고고학 관련해서.
기다렸다.
또 ㅡ
긴 기다림을 드려 송구합니다ㅜ 영상 제작이 그리 쉽진 않지만 최대한 짬을 내서 담 영상도 만들어보겠습니다!
소로리 볍씨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도 폄훼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게 한중일 역사학계의 방식이죠.
한국 역사학계는 토착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으니 동조하는거고
서양학계는 당연히 그런 분위기를 따를수 밖에 없음.
앞으로 빅테이터와 AI가 역사 흐름을 제대로 정리할거라 봅니다.
시청해주시고 또 고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한중일은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고,
역사적 실체를 밝히려면 서로가 가진 것들과
보는 것들을 진솔하게 오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적 실체가 밝혀진다고 해서, 땅을 도로 달라고
하는 일까지 발생 안한다는 생각을 했다가......꾸준히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더 어마어마한 소동이 날 거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 갈등의 조정과 중재를
담당하는 국제기구의 역할이 유명무실해보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진실의 추구를 위한 국제적 비영리 공인 기구가
조성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현재로서는 이 연구의 주관 기관인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그나마 가장 큰 국제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엄밀한 역사적 진실보다는 '큰 연구'에 집착해서
자의적 결과물을 낸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네요...
안녕하세요 영상 잘보고있습니다
제가 동아시아인의 기원이 궁금해 찾다보니 지난 영상들에서 나온 논문들도 읽었었습니다.
지금까지 중앙아시아 스텝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동쪽으로 이동하는중에 추위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한중일몽 인구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지만
제가 관련 연구들을 보니 일부는 동진한 인원들이 있을수 있지만 구성원의 절대다수는 동남아쪽에서 올라온 집단이 조상이다 라고 하는걸 알게되었습니다.
즉 동아시아인의 특성이 추위적응의 결과는 아니다라는게 제가 낸 결론인데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아시안이 빙하기의 추위로 지금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하니 제가 잘못 해석한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빙하기에는 북위 40도 윗지역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고 적도 인근에서 겨우 멸종위기를 벗어났다는 연구와 추위적응의 사례로 꼽히는 몽고주름이 아프리카의 코이산족이나 나일로트계 종족들에게서도 흔하다는 연구들이 동아시아인이 지닌 특성이 시베리아를 지나는 중 얻은 추위적응이라는 설을 부정하게 하는데요.
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Super!
Turk + Korea + Manchu + Mongol + Japon = Turan!!
뭔 말도 안 되는.. 조몬인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해 혼혈됐다는 증거지 저게 어떻게 한반도에서 이동한 거라 볼 수 있는지 ?
안녕하세요. 소개해드린 연구의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논증하는데 불친절한 편이라, 말씀하신대로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저도 좀 설명이 부족했던 거 같긴 하고요. 다만 지금은 토착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지는 조몬인도 빙기에 일본과 연결됐었던 아시아 대륙을 통해서 일본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다수의 연구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간 지점으로서 다수의 집단이 한반도를 거쳤을 거고요. 물론 일부는 말씀대로 현재의 일본 열도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기도 했겠죠. 하지만, 거시적, 근원적으로는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더 먼저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개해드린 연구에서는 더 근원적인 이동을 이야기하기보다 한반도의 유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이동'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 것 같습니다. 물론 후대에 일본 열도로 이동한 야요이인은 더 높은 확률로 한반도 유래 집단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예전에는 야요이 인이 일본열도로 이주후 조몬인과 혼혈화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미 혼혈화된 야요이인도 있었다는게 밝혀졌죠
한반도 남쪽 해안가에서는 이미 조몬인과 혼혈화된 야요이인이 살고 있었다는거죠
가덕도 에서 발굴된 유골도 조몬인이고요
소로리볍씨는 보존상태가 그닥잖아서 근거로 사용하기에 역부족인 상황이죠.
현재에도 중국 광서지역의 산과 들에선 자연산 벼만해도 수백종이 있죠.
이지역이 벼원산지라는건 학계에서도 팩트고요.
소로리 볍씨는 야생벼, 재배벼와 유전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유전학적으로 재배벼로 보기 어렵죠.
요서건 반도이건 한민족 영역이다.
동북아 역사가 대륙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열도로 문명의 이동경로가 뚜렷하다.
대륙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반도로 건너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고, 반도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열도로 넘어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모든 역사에는 "뿌리역사"가 있고 동북아시아의 뿌리역사는 12환국에서 시작하고 구리배달국으로 넘어가며 동북아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가장 큰 사건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사이의 10년 전쟁인 "탁록대전"에서 시작한다.
12환국이 여러개의 소국으로 쪼개지는데 그중 지배세력이 다스리던 지역에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리배달국"이 세워진다.
구리배달국은 중원지방과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으로 수도는 백두산 "신시"였다.
구리배달국의 지방정권으로 황하강 유역을 다스리던 제후국의 왕이 바로 중국의 삼황오제인데 그들은 중국 한족의 조상이 아닌 한민족의 일파였다.
제국의 수도인 신시를 환웅이 다스리고 지방정권인 황하강 유역은 환웅의 아들중 하나가 다스리던 체계였다.
그런데 서자인 치우가 적자인 환웅의 큰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환웅이 되는데 동북아 최초의 반란사건이었고 이에 적자인 헌원과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는데 10년간의 전쟁에서 치우는 100번 승리하고 마지막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그당시 제국의 수도는 신시에서 요하강 유역으로 옮긴 상태라 요하강을 중심으로 하는 구리배달국과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황제헌원이 다스리던 지역(하나라), 이렇게 둘로 쪼개진다.
즉, 동북아시아 문명권이 홍산문명과 황하문명으로 나뉜 것이다.
요하강 중심의 구리배달국이 나중에 왕조가 교체되어 단군이 다스리는 고조선이 되었고 황하강 유역은 삼황오제를 거쳐 하나라>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등을 거쳐 지금의 중국이 된 것이다.
즉, 홍산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이고 황하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인 것이다.
황제헌원의 큰아들인 현효가 왕권을 이어받아 "소호금천"이 되는데 이때 모계쪽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다음 황제는 모계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소호금천이 양보하여 전욱고양이 왕이 되는데 당시 모계계승 전통은 거의 사라져가는 추세였다.
소호금천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소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나중에 "훈누제국"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다.
한편 전욱고양은 "하늘과 땅의 교류를 끊었다"라고 나와있는데 쉽게 말해서 제사를 폐지한 것이다.
샤먼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늘의 신탁이 매번 전욱고양의 왕권찬탈의 부당함을 고하니 포악한 전욱고양은 아예 제사를 폐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소호금천의 아들인 제곡고신이 전욱고양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 그때부터 부계계승 전통을 확립한다.
삼황오제의 역사가 바로 하나라의 역사이고 제곡고신의 후손이 새롭게 연 왕조가 은나라이다.
당시 요하문명권은 구리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고 은나라와 단군조선 이렇게 두개의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양분하였다.
그당시 중국 한족의 조상인 화하족은 서쪽 산간지역에서 화전농이나 짓고 살던 시대였고 먹고사는데 급급한 그들에게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할리 없었는데 하나라, 은나라를 다스리던 한민족이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그들에게 문명을 전수하여 주고 그들도 그들의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주나라"이다.
은나라 주왕이 달기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어 주나라에게 망하는데 주나라 무왕은 자신들에게 문화를 가르켜준 은나라 지배세력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은나라 지배세력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단군이 다스리던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살게된다.
이때부터 한민족은 중원땅을 잃게되고 동남아 계열의 남방민족인 화하족, 즉 한족이 중원땅을 차지하게 된다.
고조선에 망명하여 살던 은나라 지배세력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다.
즉 기자조선은 은나라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춘추전국 말기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지배계층이 기자조선에 망명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여는데 이것이 바로 "위만조선"이다.
이때 기자조선의 세력은 한반도 남부로 밀려나는데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진"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진나라를 멸하고 기자조선이 그대로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마한/진한/변한)이다.
원래 고조선은 삼한체계로 다스리던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바로 기자조선인 것이다.
한반도 북부는 위만조선, 그리고 남부는 삼한(기자조선)으로 왕조가 나뉜 것이다.
춘추전국이 끝나고 한나라가 강성하여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위만조선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진한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사로국이다.
당시 소호금천이 세운 작은 나라인 소호국은 북방 유목민족을 규합하여 거대한 제국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훈누제국"이다.
훈누제국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는데 한무제의 훈누정벌이 시작되면서 일부는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밀려나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며 로마제국을 침략하는 "훈족"이 되었다.
한무제에 사로잡힌 일부는 바로 훈누제국 이치사 선우의 손자들인데...
이치사 선우의 태자인 좌현왕 휴도왕(휴저왕?)이 살해당하고 두 아들이 곽거병에 사로잡혀 한무제의 노예가 되는데 나중에 한무제에 중용되어 김씨성을 하사받고 한나라의 실세가 된다.
전후한 교체기에 왕망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때 왕망의 편에 가담한 김씨세력이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할때 광무제의 추격을 피해 산동성에서 배타고 한반도로 이동하는데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여 일부는 변한지역을 접수하여 "6가야"를 세우고 일부는 사로국으로 들어가서 사로국을 지배하던 석씨세력을 몰아내고 김씨왕조를 확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망의 "신"나라와 신라의 "신"자가 둘 다 새로울"신"이라는 한자이다.
치명적인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좌우지간 대륙의 왕조교체가 있을때 일단의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 사건이 두어번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할때 은나라 지배세력이 단군조선을 몰아내고 기자조선을 세운 사건과,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에 밀려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게 된 사건, 그리고 훈누족의 일파가 중국 한나라의 실세가 되어 살다가 전후한 교체기에 한반도로 이주하여 가야/신라 이렇게 두 나라를 세운 사건, 이렇게 큰 사건이 한반도 민족구성과 문화를 결정하는 중대사건들이다.
사설로 훈누제국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데...
고조선과 동맹하여 한나라를 위협하던 훈누제국이 한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한나라에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고 로마제국을 정벌하면서 로마제국 변방을 얻어 나라를 세운것이 지금의 헝가리이고...
중앙아시아에 남아있던 이들이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스스로를 "튀르크"라 명하게 되고 투르크족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고토회복을 위하여 동진하여 돌궐제국을 세우고 고구려와 동맹하여 당나라를 위협하다가 또다시 당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당나라에 밀려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서진하여 서유럽과 마찰을 일으킨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고 동로마 제국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셀주크투르크>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나중에 터키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이다.
남방계와 북방계의 혼합이라고 하셨는데 동남아시아 민족인 오스트랄로이드 와는 또 큰 유전적 거리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남방계는 오스트랄로이드를 말하는게 아닌가요?
요컨대, 일본 열도에서 번영 한 조몬인이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륙 중국인과 몽골인의 합한 것이 현재의 한국인입니다
고대의 요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니고 현재의 난하 입니다
한민족의 기원을 알아보려는 단서가 여러가지군요XY유전자. 언어. 농산물.
말씀대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선사시대를 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 연구자들 중 유전공학자들은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 중이지만...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등 다른 분야는 이 분야 연구에 대한 적극성이 부족한 게 아쉬운 상황입니다.
인간은 기후와 생활환경에서 진화를 거듭합니다 현재의 한국인의 모습은 남방계와는 외모의 차이가 있으나 유전자 형질은 현재의 남방계가 된 우리의 한갈래와 북방계의 혼혈입니다
현생 한국인에 대한 집단유전학의 연구 결과는 (추정 과정과 비율은 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남방계의 북방계의 혼합으로 수렴되고 있는 듯합니다.
소로리에서 벼가 재배된 이후...우리나라는 빙하기가 도래되어...벼의 재배가 단절되었다고 봐야합니다.....그리고 벼의 재배는 황하유역이 아니라 장강유역에서 먼저 시작이 되었고 벼 재배기술을 갖고 있는 장강인들이 우리나라로 건너왔다고 해석을해야하지요...
원래 언어는 하나였죠.성경 하나님들이 인류가 바벨탑짓는거 싫어 언어를 흐트렸다죠.특히 악마가 말을 거꾸로 말하도록 가르쳐서 서로 다르게 말하며 싸우며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종족처럼 착각하고 살며 서로 죽고 죽이며 자멸해가게 하는 중이죠.왜?인류가 번성하는게 싫은거죠.하나님들의 종자들이 번성하기 바라는거고 그 하나님들이 성경속 주님이라죠?
동북공정에 따라 황하문명을 끼워넣어 진실이 훼손된것이네...논문도 까보중
동북아 역사가 대륙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열도로 문명의 이동경로가 뚜렷하다.
대륙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반도로 건너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고, 반도에서 왕조교체가 있을때마다 일단의 무리가 열도로 넘어가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모든 역사에는 "뿌리역사"가 있고 동북아시아의 뿌리역사는 12환국에서 시작하고 구리배달국으로 넘어가며 동북아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가장 큰 사건으로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사이의 10년 전쟁인 "탁록대전"에서 시작한다.
12환국이 여러개의 소국으로 쪼개지는데 그중 지배세력이 다스리던 지역에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리배달국"이 세워진다.
구리배달국은 중원지방과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방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으로 수도는 백두산 "신시"였다.
구리배달국의 지방정권으로 황하강 유역을 다스리던 제후국의 왕이 바로 중국의 삼황오제인데 그들은 중국 한족의 조상이 아닌 한민족의 일파였다.
제국의 수도인 신시를 환웅이 다스리고 지방정권인 황하강 유역은 환웅의 아들중 하나가 다스리던 체계였다.
그런데 서자인 치우가 적자인 환웅의 큰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환웅이 되는데 동북아 최초의 반란사건이었고 이에 적자인 헌원과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는데 10년간의 전쟁에서 치우는 100번 승리하고 마지막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데 그당시 제국의 수도는 신시에서 요하강 유역으로 옮긴 상태라 요하강을 중심으로 하는 구리배달국과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황제헌원이 다스리던 지역(하나라), 이렇게 둘로 쪼개진다.
즉, 동북아시아 문명권이 홍산문명과 황하문명으로 나뉜 것이다.
요하강 중심의 구리배달국이 나중에 왕조가 교체되어 단군이 다스리는 고조선이 되었고 황하강 유역은 삼황오제를 거쳐 하나라>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등을 거쳐 지금의 중국이 된 것이다.
즉, 홍산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이고 황하문명도 우리민족의 문명인 것이다.
황제헌원의 큰아들인 현효가 왕권을 이어받아 "소호금천"이 되는데 이때 모계쪽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다음 황제는 모계쪽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소호금천이 양보하여 전욱고양이 왕이 되는데 당시 모계계승 전통은 거의 사라져가는 추세였다.
소호금천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소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나중에 "훈누제국"의 뿌리가 되는 나라이다.
한편 전욱고양은 "하늘과 땅의 교류를 끊었다"라고 나와있는데 쉽게 말해서 제사를 폐지한 것이다.
샤먼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늘의 신탁이 매번 전욱고양의 왕권찬탈의 부당함을 고하니 포악한 전욱고양은 아예 제사를 폐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소호금천의 조카인 제곡고신이 전욱고양을 몰아내고 왕이 되어 그때부터 부계계승 전통을 확립한다.
삼황오제의 역사가 바로 하나라의 역사이고 제곡고신의 후손이 새롭게 연 왕조가 은나라이다.
당시 요하문명권은 구리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고 은나라와 단군조선 이렇게 두개의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양분하였다.
그당시 중국 한족의 조상인 화하족은 서쪽 산간지역에서 화전농이나 짓고 살던 시대였고 먹고사는데 급급한 그들에게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할리 없었는데 하나라, 은나라를 다스리던 한민족이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그들에게 문명을 전수하여 주고 그들도 그들의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바로 "주나라"이다.
은나라 주왕이 달기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어 주나라에게 망하는데 주나라 무왕은 자신들에게 문화를 가르켜준 은나라 지배세력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은나라 지배세력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단군이 다스리던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살게된다.
이때부터 한민족은 중원땅을 잃게되고 동남아 계열의 남방민족인 화하족, 즉 한족이 중원땅을 차지하게 된다.
고조선에 망명하여 살던 은나라 지배세력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단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기자조선"이다.
즉 기자조선은 은나라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춘추전국 말기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지배계층이 기자조선에 망명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여는데 이것이 바로 "위만조선"이다.
이때 기자조선의 세력은 한반도 남부로 밀려나는데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진"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진나라를 멸하고 기자조선이 그대로 한반도 남부를 차지하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마한/진한/변한)이다.
원래 고조선은 삼한체계로 다스리던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바로 기자조선인 것이다.
한반도 북부는 위만조선, 그리고 남부는 삼한(기자조선)으로 왕조가 나뉜 것이다.
춘추전국이 끝나고 한나라가 강성하여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위만조선의 유민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진한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사로국이다.
당시 소호금천이 세운 작은 나라인 소호국은 북방 유목민족을 규합하여 거대한 제국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훈누제국"이다.
훈누제국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는데 한무제의 훈누정벌이 시작되면서 일부는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밀려나서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며 로마제국을 침략하는 "훈족"이 되었다.
한무제에 사로잡힌 일부는 바로 훈누제국 이치사 선우의 손자들인데...
이치사 선우의 태자인 좌현왕 휴도왕(휴저왕?)이 살해당하고 두 아들이 곽거병에 사로잡혀 한무제의 노예가 되는데 나중에 한무제에 중용되어 김씨성을 하사받고 한나라의 실세가 된다.
전후한 교체기에 왕망의 난이 발생하는데 이때 왕망의 편에 가담한 김씨세력이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할때 광무제의 추격을 피해 산동성에서 배타고 한반도로 이동하는데 한반도 남부에 정착하여 일부는 변한지역을 접수하여 "6가야"를 세우고 일부는 사로국으로 들어가서 사로국을 지배하던 석씨세력을 몰아내고 김씨왕조를 확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망의 "신"나라와 신라의 "신"자가 둘 다 새로울"신"이라는 한자이다.
치명적인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좌우지간 대륙의 왕조교체가 있을때 일단의 무리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 사건이 두어번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할때 은나라 지배세력이 단군조선을 몰아내고 기자조선을 세운 사건과,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에 밀려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게 된 사건, 그리고 훈누족의 일파가 중국 한나라의 실세가 되어 살다가 전후한 교체기에 한반도로 이주하여 가야/신라 이렇게 두 나라를 세운 사건, 이렇게 큰 사건이 한반도 민족구성과 문화를 결정하는 중대사건들이다.
사설로 훈누제국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데...
고조선과 동맹하여 한나라를 위협하던 훈누제국이 한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한나라에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고 로마제국을 정벌하면서 로마제국 변방을 얻어 나라를 세운것이 지금의 헝가리이고...
이들이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스스로를 "튀르크"라 명하게 되고 투르크족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고토회복을 위하여 동진하여 돌궐제국을 세우고 고구려와 동맹하여 당나라를 위협하다가 또다시 당나라의 이이제이에 당하고 당나라에 밀려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서진하여 서유럽과 마찰을 일으킨 것이 십자군 전쟁이었고 동로마 제국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셀주크투르크>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나중에 터키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터키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이다.
골치아프지만 한가지만 더 언급하자.
고구려에 대한 것인데...
고구려 태조 고주몽은 전욱고양의 후손이다.
고주몽이 요동지방에 살던 구이족(구리족)을 규합하여 "고구리"를 세우는데 구이족의 조상이 바로 치우천황이다.
원래 치우천황의 본거지가 요동지방이었고 탁록전쟁의 패배(혹은 무승부)로 중원땅을 황제헌원에게 빼앗겨서 치우천황의 후손이 모두 요동지방에 모여 살게된 것이다.
고구려의 뿌리가 치우천황인 증거를 몇가지 대자면...
고구려 장수들의 투구를 보면 좌우로 두개의 뿔이 나있는데 이것은 치우천황의 투구를 흉내낸 것이다.
고구려의 방패나 기와 등을 장식하던 전통문양중 도깨비 문양이 있는데 이것은 "붉은악마", 즉 치우천황을 형상화 한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중국 남부의 묘족 또한 스스로를 치우천황의 후손이라 하는데 어쩌면 그들은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쨓든 치우천황의 후손이 세운 북방의 고구려와 황제헌원의 후손이 세운 남방의 신라가 대립하던 구조가 바로 삼국시대이다.
환빠 어서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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