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없지요, 그당시 군사력과 동원병력 생각하면 수천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내치용 과시책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막아낼수 있지요, 경덕왕 치세 군제개혁 직후입니다. 수도방위부대는 6기정으로 개편되었고, 특히 일본에 대응하여 부산부터 경주에 이르는 방어시설을 모두 손보았습니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신라를 침공할 수는 있는데, 수만명단위는 어려울 겁니다. 백제가 존망의 갈림길인 백강전투는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었겠지만, 다른 침략의 경우에는 대부분 수천명이지요. 진짜 국가존망을 걸고 하는 전쟁이 아니라서 만명을 넘기는 어려웠다고 봅니다. 그리고 원정군을 전성기의 신라가 못막을 하등이 까닭이 없지요.
1:37 작금의 외교 현실을 보면 경덕왕의 치세가 정말 필요한 때 같습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역사는 항상 반복되지요. 작금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지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후원 감사드립니다,😄 큰힘이 됩니다, 매번 큰 신세를 지는것 같습니다😌
대단한 관문이었군요. 국경으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성한 천리장성을 떠오릅니다. 삼면이 바다여서 얻은 혜택(무역과 해산물)과 함께 해외로부터 침략하는 적과의 국경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큰 걱정거리였을까 싶습니다.
선조님들의 고뇌가 오늘까지 전해지는듯합니다😌
며칠 전 기장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올라오면서 저번에 영상만들어주셨던 천룡사지와 이차돈 묘에 들러보았습니다 돌산고허촌에 가는 길 관문성 녹동리 성문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빚을 많이 집니다
항상 즐겨 시청 해 주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녹동리성문지는 잘 안가는 곳인데 다녀오셨군요😄 코스가 강행군이었겠습니다😮
외교는 총칼없는 전쟁이고 전쟁은 총칼로 하는 외교라고 하죠.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에게는 외교가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외교는 항상 키잡이였지요, 곰곰 생각해보니 안그런적이 없는것 같습니다🤔
지자체에서 '장성'의 발굴연구를 지원하고 '장성 따라걷기 길'같은 걸 조성하는 게, 다른 화려한 관광자원개발보다 돈도 덜들고 지역특색도 있을 것 같네요.
장성의 길이가 13km였나요? 등산로를 포함한 13km의 길은 쉽지않아도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ㅎㅎ
아주 동의합니다. 고창읍성이나 남한산성, 상당산성 같이 걷기 좋게 시설해주면 경주 관광의 또다른 축으로 만들수 있지요😄 어서 발굴정비가 진행되어야겠습니다.
영상 후반 11분 27초 에 보면 우축 하단에 같은 모양에 (낡아보이는) 단층 건물이 주욱 보이는데, 예전 공장(농장) 기숙사 같은 걸까요? 그냥 호기심 발동
그러게요 아시는분 계실까요?🤔
과거 태화방직이란 회사의 사택으로 알고있습니다. 폐건물이 된지 20년 넘었습니다.
왕건이 896년에 개경에 쌓은 발어참성과 비슷하네요 성곽이
어쩌면 백제 나성의 영향을 받을수도요
가능하지요, 가보고싶은 성입니다😄
@@사적돌 저도 발어참성이랑 개경 나성을 보고싶네요
이 영상을 보니 경주가 일본의 교토같아보입니다. 천년의 고대역사가 잠들어있는
고대 시가지가 남아있고 한옥들이 현존하여 고느넉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몇몇 도시들이 있습니다.
경주나 전주, 남원이 대표적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사각의 구획과 신라발해시대유물들이 나왔지요, 나중에 이를 주제로 영상 만들어 보겠습니다😌
보다보면 저 성벽의 돌들은 어디서 가져오는건지.. 엄청난 숫자네요
그래서 산성 축조시 돌이 풍부한곳을 선정합니다, 물론 외부에서 반입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적님!!😮
(1)
760년 즈음에 일본이 침공을 가맹했다면..!! 그 규모가 어느정도였을까요? 인구 기준으로 궁금합니다!!
(2)
만일 침략을 당했다면..!! 신라가 "단독"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고 보시나요?
알수없지요, 그당시 군사력과 동원병력 생각하면 수천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내치용 과시책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막아낼수 있지요, 경덕왕 치세 군제개혁 직후입니다. 수도방위부대는 6기정으로 개편되었고, 특히 일본에 대응하여 부산부터 경주에 이르는 방어시설을 모두 손보았습니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신라를 침공할 수는 있는데, 수만명단위는 어려울 겁니다. 백제가 존망의 갈림길인 백강전투는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었겠지만, 다른 침략의 경우에는 대부분 수천명이지요. 진짜 국가존망을 걸고 하는 전쟁이 아니라서 만명을 넘기는 어려웠다고 봅니다. 그리고 원정군을 전성기의 신라가 못막을 하등이 까닭이 없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혹시...!! 저 시점 보다 후세에 일본이 또 한번 발해를 끌어들여 신라 침공계획을 세웠죠!! 그때의 규모도 짐작가는 부분 있으신지 여쭤보고싶습니다! @@d-dung
많이 허물어졌어도 성벽 구간이 울산과 경주의 경계선이라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해서 다행이죠^^
다행이지요, 언제고 시간나면 글자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신라는 본래 자신의 힘과 사이즈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백제와 고구려를 당의 도움을 받아 먹었으니 늘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게다가 일본은 본래 백제가 세운 식민국가나 마찬가지였으니 신라와 일본관계는 원수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서로 전쟁을 준비했지요, 신라가 내치를 회복한 이후에는 균형이 무너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