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전쟁이냐 외교냐 갈림길의 신라, 관문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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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1 ноя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30

  • @joshuacho1200
    @joshuacho1200 8 месяцев назад +6

    1:37 작금의 외교 현실을 보면 경덕왕의 치세가 정말 필요한 때 같습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역사는 항상 반복되지요. 작금의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지궁금합니다🤔

  • @향원익청
    @향원익청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후원 감사드립니다,😄 큰힘이 됩니다, 매번 큰 신세를 지는것 같습니다😌

  • @송하나라
    @송하나라 8 месяцев назад +3

    대단한 관문이었군요. 국경으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성한 천리장성을 떠오릅니다. 삼면이 바다여서 얻은 혜택(무역과 해산물)과 함께 해외로부터 침략하는 적과의 국경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큰 걱정거리였을까 싶습니다.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선조님들의 고뇌가 오늘까지 전해지는듯합니다😌

  • @향원익청
    @향원익청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며칠 전 기장에 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올라오면서 저번에 영상만들어주셨던 천룡사지와 이차돈 묘에 들러보았습니다 돌산고허촌에 가는 길 관문성 녹동리 성문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빚을 많이 집니다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항상 즐겨 시청 해 주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녹동리성문지는 잘 안가는 곳인데 다녀오셨군요😄 코스가 강행군이었겠습니다😮

  • @solgga_history
    @solgga_history 8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외교는 총칼없는 전쟁이고 전쟁은 총칼로 하는 외교라고 하죠.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에게는 외교가 특히 중요합니다.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우리에게 외교는 항상 키잡이였지요, 곰곰 생각해보니 안그런적이 없는것 같습니다🤔

  • @ggondigi
    @ggondigi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지자체에서 '장성'의 발굴연구를 지원하고 '장성 따라걷기 길'같은 걸 조성하는 게, 다른 화려한 관광자원개발보다 돈도 덜들고 지역특색도 있을 것 같네요.
    장성의 길이가 13km였나요? 등산로를 포함한 13km의 길은 쉽지않아도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ㅎㅎ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주 동의합니다. 고창읍성이나 남한산성, 상당산성 같이 걷기 좋게 시설해주면 경주 관광의 또다른 축으로 만들수 있지요😄 어서 발굴정비가 진행되어야겠습니다.

  • @npcmin
    @npcmin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영상 후반 11분 27초 에 보면 우축 하단에 같은 모양에 (낡아보이는) 단층 건물이 주욱 보이는데, 예전 공장(농장) 기숙사 같은 걸까요? 그냥 호기심 발동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러게요 아시는분 계실까요?🤔

    • @브로젠
      @브로젠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과거 태화방직이란 회사의 사택으로 알고있습니다. 폐건물이 된지 20년 넘었습니다.

  • @백제근초고왕-o3t
    @백제근초고왕-o3t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왕건이 896년에 개경에 쌓은 발어참성과 비슷하네요 성곽이
    어쩌면 백제 나성의 영향을 받을수도요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가능하지요, 가보고싶은 성입니다😄

    • @백제근초고왕-o3t
      @백제근초고왕-o3t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사적돌 저도 발어참성이랑 개경 나성을 보고싶네요

  • @신효상-v9e
    @신효상-v9e 8 месяцев назад +2

    이 영상을 보니 경주가 일본의 교토같아보입니다. 천년의 고대역사가 잠들어있는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고대 시가지가 남아있고 한옥들이 현존하여 고느넉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몇몇 도시들이 있습니다.
      경주나 전주, 남원이 대표적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사각의 구획과 신라발해시대유물들이 나왔지요, 나중에 이를 주제로 영상 만들어 보겠습니다😌

  • @MrLimpsoul
    @MrLimpsoul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보다보면 저 성벽의 돌들은 어디서 가져오는건지.. 엄청난 숫자네요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래서 산성 축조시 돌이 풍부한곳을 선정합니다, 물론 외부에서 반입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 @jinyumin99
    @jinyumin99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사적님!!😮
    (1)
    760년 즈음에 일본이 침공을 가맹했다면..!! 그 규모가 어느정도였을까요? 인구 기준으로 궁금합니다!!
    (2)
    만일 침략을 당했다면..!! 신라가 "단독"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고 보시나요?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알수없지요, 그당시 군사력과 동원병력 생각하면 수천 정도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내치용 과시책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막아낼수 있지요, 경덕왕 치세 군제개혁 직후입니다. 수도방위부대는 6기정으로 개편되었고, 특히 일본에 대응하여 부산부터 경주에 이르는 방어시설을 모두 손보았습니다.

    • @d-dung
      @d-dung 4 месяца назад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신라를 침공할 수는 있는데, 수만명단위는 어려울 겁니다. 백제가 존망의 갈림길인 백강전투는 모든 국력을 다 쏟아부었겠지만, 다른 침략의 경우에는 대부분 수천명이지요. 진짜 국가존망을 걸고 하는 전쟁이 아니라서 만명을 넘기는 어려웠다고 봅니다. 그리고 원정군을 전성기의 신라가 못막을 하등이 까닭이 없지요.

    • @jinyumin99
      @jinyumin99 4 месяца назад

      정말 감사드립니다!🙃
      혹시...!! 저 시점 보다 후세에 일본이 또 한번 발해를 끌어들여 신라 침공계획을 세웠죠!! 그때의 규모도 짐작가는 부분 있으신지 여쭤보고싶습니다! @@d-dung

  • @LBY0210
    @LBY0210 8 месяцев назад +2

    많이 허물어졌어도 성벽 구간이 울산과 경주의 경계선이라 대략적으로 추정이 가능해서 다행이죠^^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다행이지요, 언제고 시간나면 글자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 @수아레즈1919
    @수아레즈1919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신라는 본래 자신의 힘과 사이즈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백제와 고구려를 당의 도움을 받아 먹었으니 늘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게다가 일본은 본래 백제가 세운 식민국가나 마찬가지였으니 신라와 일본관계는 원수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 @사적돌
      @사적돌  8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서로 전쟁을 준비했지요, 신라가 내치를 회복한 이후에는 균형이 무너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