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우 캐스터 목소리는 절대 잊을수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역동적인 스포츠 경기에 맞는 목소리 가진분 찾을수없고 앞으로도 없을듯 하네요 정말 많이 그리운 목소리 입니다 그 시대때 라디오에 귀를 대고 청취하던때가 많고 직접 경기를 볼수없어 답답했었는데 그래서 경기를 라디오로 듣는 즐거움이 대단했던 시절 입니다. 박준태 선수 그 당시 대단했는데 ... 2루수는 무조건 바로 아웃 세이프 상관없이 그냥 무조건 홈 승부를 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암튼 광주일고 문희수 박준태 이강철 ..
83년 광주일고는 고교최강이였죠...이대회 대통령기를 비롯해 봉황기 황사기까지 3관왕 1번 김성규(3년) 2번 서창기(3년) 3번 김선진(2년) 4번 정영진(3년) 5번 박준태(2년) 6번 이호성(1년) 7번 천상주(3년)8번 문희수(3년) 9번 김목정(3년) 고교야구에서 주로 에이스 한명이 주로던지지만 이때 2학년인 박준태와 이강철이 있어서 문희수만 의존하던 투수진도 아니였죠
@@우살아가는 이호성. 그 삶의 마지막이 많이 안타깝습니다. 왜 그런 악마 같은 행동을 했는 지.... 이호성에게 당한 피해자들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이호성이 정말 나쁜 짓을 했고 용서받지 못할 나쁜 놈이지만, 한편으로는 운동만 하고 공부와는 담 쌓고 인성 함양, 사회 경험, 대인관계 경험 등이 전혀 없던 그 당시 운동 선수들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진용-b7u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도영 캐스터가 주로 야구중계 하면서 자주 못뵙는데 한국스포츠TV 개국하면서 야구 메인 캐스터로 마지막 활동을 하셨죠 그당시 입사한 캐스터들이 한명제 임용수 김성주 조민호 등입니다 그중에 임용수 캐스터가 이장우 버전을 가장 비슷하게 흉내냈지만 톤 자체가 너무 다르다보니 ㅎ ㅎ
KBS 스포츠님.. 흑백 시대였던 79년 고교야구 경기 특히 제모교 인천고의 경기를 구입할수 있다면 돈을 얼마든지 지급해서라도 구입하고 싶습니다 79년 인천고는 최계훈이란 초고교급 투수를 보유했으면서 전국대회 4번준우승 결승전 전적 대붕기 배재고에 3:2배 봉황기 광주상고 5:0배 황금사자기 경북고에 1:0 패 전국체전 전주고와 2:2. 추첨패 이 당시 경기장면이 있다면 구입해보고 싶습니다
광주일고 10회말 공격 원아웃 만루. 김선진 친 타구가 높이 튀어 체공 시간이 길어서, 세광고 2루수가 포구하였을 때는, 3루 주자가 거의 홈 베이스에 근접했음. 그래도 홈 베이스에 무조건 빨리 던졌어야 했는 데, 순간 멈칫해서 (아마도 홈 베이스에 거의 도달하는 3루 주자를 보았는 듯) 이도저도 안 되어 너무 아쉽네요.
@@Alex-v1i3t 고교야구 스타 박노준 선수는 일찍 재능이 발달했죠. 아마츄어 야구가 너무 성적에만 급급, 조계현 투수는 너무 일찍 혹사. 그당시 김재박 선수를 일본 프로에서 스카웃 하려했고 지금보단 더 한일간 수준차, 토너먼트 단기전은 온몸 쥐어짜서 성적 낼수 있어도 긴 시즌 프로는 파워가 받쳐주지 않으면 버틸수 없죠. 선린상 스타 박노준 선수는 테크닉은 이미 고교시절 완성 파워가 부족, 프로에선 파워, 테크닉 다 가져야지 하나만 가지면 반쪽짜리 그저 그런 선수로, 그런면에서 박노준 고교야구선 천재, 프로에선 평범. 조계현 선수 혹사 안 했으면 npb에도 통하지 않았을까. 몇십년 한번 나올 투수 선동열은 병역 등 해결 했으면 메이저에 도전 본인도 굉장히 아쉬움.
@@tur7321 굉장한 야구팬이시네요👍 단기간 토너먼트인 아마야구와 달리 장기간 레이스인 프로에서는 체력이 중요하죠 박노준선수는 그게 아쉬웠죠 전 개인적으로 박노준이 해태로 가서 92년 플레이오프때 홈런도 치고 활약한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롯데가 완전 미쳐서 우승까지 해버렸지만요 그리고 선동열은 82년 세계대회 우승으로 병역면제 받아서 군대문제는 해결했지만 당시 광주의 민심이 해외진출을 용납안했어요 극성팬들이 선동열 집에서 시위를 할 정도라 해태에 주저앉았죠 저도 요즘 야구보단 80년대 야구가 더 낭만적이고 기억에 남네요 프로든 아마든 말이죠
이 경기는 당초 광주일 문희수 - 세광 송진우의 멋진 투수전을 예상했지만 예상외의 타격전으로 엎치락 뒤치락 전개가 됐고 다음 대회인 청룡기 결승 천안북일 - 포철공 경기는 멋진 타격전을 예상했지만 의외의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가 됐었습니다. 이게임을 보면 세광시절의 최동창 선수가 상당한 포스가 있던 선수였고 투수, 타자 심지어 신입생시절엔 포수도 봤던 만능 선수인 박준태 선수의 활약이 돋보입니다. 마지막 순간 세광 2루수는 무조건 홈에 던졌어야하지만...어린 고교생임을 감안하면 그 찰나의 순간에 머리속이 무척 복잡했을것 같아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홈 던지긴 좀 늦은거 같은데 병살을 노려야하나...그러다 이도저도 아니게 된거죠..귀한 자료 재밌게 잘 봤습니다.
본 게임 출전 선수들의 이후 송진우, 이강철 : 대박, 오랜 선수 생활. 팀의 중추적 역할 문희수, 이호성 : 중박. 그럭저럭 성공적 선수 생활. 이호성은 비극적 종말. 김선진 : LG에서 꾸준히 활약. 주전은 아니었고 성적은 미미했음. 서창기 : 성균관대 재학시, 중추적 역할. 대학교 때 대박. 프로땐 거의 출전 못 하다가 얼마후 사라짐. 박준태, 최동창, 김성규 : 대학교때 준수한 활약. 프로에서 초반 반짝하다 사라짐. 특히. 박준태는 동국대 재학시절. 대학야구 최고 타자였고. 프로때도 시즌 초반에는 정말 대단했으나. 시즌 중후반에는 사그러짐. 천상주, 정영진 : 이름도 없이 사라짐. 김목정 : 공부를 아주 잘 해서 학력고사 치르고 연세대에 일반 학생으로 진학함. 세광고 나머지 선수들 : 이후 알려진 바 없음.
광주일고 김선진 타구가 높이 튀어 체공 시간이 길어서 아버님이 포구하셨을 때는 (개인적으로 아버님과 동시대 사람으로, 당시 본 게임 자세히 관람했었음) 광주일고 3루 주자가 이미 홈 베이스에 근접한 상태였고 포구후 바로 홈 송구했어도 세이프 가능성 큼. 아버님 잘 못이 아니고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최선을 다했는 데, 인생이 다 그런 것인 데.
@@윤혁-w5w 조계현은 1982년 고교 1위 투수였고, 1982년 봉황기 우승후. 한일고교야구대회에서 3연속 경기 출전하고난 후.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제대로 던지기 못 했습니다. 조계현이 연세대 진학한 후에는 타자로 출장했다가 연세대 고학년 때 투수로 나왔지만. 1982년 때 위력적 강속구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 질문있습니다. 1980.5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시민들과 운동에 참여하신분들이 문어 전두환땜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데요... 1.그당시 광주쪽 야구명문 학교들은 대회에 참가했나요? 성적들은요? 2.그 이후 억울함과 가슴 매이는 상처의 표현을, 이런 대회에서 표현할 방법 같은건 없었나요? 근래 올라오는 영상들이 그시절 즈음 것들이라 역사에 관심많은 얼라가 여쯉니다^^
전 당시 성남에 살고있었던 고교야구 광팬이었어요 5월민주화운동전인 대통령배에서는 같은 광주팀인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결승에서 만났구요 광주일고 선동렬 허세환 광주상고 김태업 이순철 청룡기에 나왔다면 두팀중 한팀이 또 우승했을겁니다 청룡기는 선린상고가 마산상고를 이기고 우승 5월에는 광주팀 모두 못나왔어요 대붕기는 세광고우승 ? 준우승 화랑기는 북일고우승 선린상고 준우승 봉황기는 북일고우승 배재고 준우승 황금사자기는 선린상고우승 광주일고 준우승
이장우 캐스터 목소리는 절대 잊을수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역동적인 스포츠 경기에 맞는 목소리 가진분 찾을수없고 앞으로도 없을듯 하네요 정말 많이 그리운 목소리 입니다
그 시대때 라디오에 귀를 대고 청취하던때가 많고 직접 경기를 볼수없어 답답했었는데 그래서 경기를 라디오로 듣는 즐거움이 대단했던 시절 입니다. 박준태 선수 그 당시 대단했는데 ... 2루수는 무조건 바로 아웃 세이프 상관없이 그냥 무조건 홈 승부를 했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암튼 광주일고 문희수 박준태 이강철 ..
83年 광주일고 고교야구
전국 대회 우승* TV 중계 보면서 정말 기뻤 읍니다
83년 광주일고는 고교최강이였죠...이대회 대통령기를 비롯해 봉황기 황사기까지 3관왕
1번 김성규(3년) 2번 서창기(3년) 3번 김선진(2년) 4번 정영진(3년) 5번 박준태(2년) 6번 이호성(1년) 7번 천상주(3년)8번 문희수(3년) 9번 김목정(3년)
고교야구에서 주로 에이스 한명이 주로던지지만 이때 2학년인 박준태와 이강철이 있어서 문희수만 의존하던 투수진도 아니였죠
가끔 가다 왼손 투수 노경호(3학년)도
나왔었습니다.
다만, 노경호 투수는 직구 스피드가 느리고 구위가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아서
약체팀 상대시, 가끔 던졌었습니다.
참말꾼 님.
대전고 나오셨군요.
당시 광주일고가 8대1로 승리.
선발 1학년 이강철.
후반에 문희수 등판.
이강철의 변화구.
문희수 강속구에 속절없이
대전고 타자들이 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기억에,
당시 대전고에
박호일 또는 곽호일 투수가 있었었듯 함.
대전고가 광주일고 유격수 김선진
실책으로 선취 득점.
광주일고 박철우 2점 홈런으로 역전.
박준태 등 집중타로 8대1로 승리.
@@우살아가는
이호성.
그 삶의 마지막이 많이 안타깝습니다.
왜 그런 악마 같은 행동을 했는 지....
이호성에게 당한 피해자들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이호성이 정말 나쁜 짓을 했고
용서받지 못할 나쁜 놈이지만,
한편으로는
운동만 하고 공부와는 담 쌓고
인성 함양, 사회 경험, 대인관계 경험 등이
전혀 없던 그 당시 운동 선수들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참말꾼 80년 대통령배 8강에서도 대전고는 일고에 8대1로 졌었지요.
LG의 박준태,김선진선수 너무 반갑네요 ^^
최동창선수는 OB에서 기대를 많이했던 선수였는데 프로에서 잘안풀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운 이장우캐스터 목소리
그나저나 야구를 가장 역동적인 스포츠로 바꿔주는 이장우 캐스터의 박진감 넘치는 멘트는
앞으로도 저런 캐스터가 나올가 하는 불세출의 캐스터입니다 ㅎㅎ
동감합니다. 8,90년대 KBS의 프로야구 중계의 이씨 트리오(이규항 이세진 이장우) 캐스터 중 가장 화끈한 중계를 했던 야구캐스터 샤우팅의 원조~^^.
@@정진용-b7u 80년대 중반 이후로 정도영 캐스터가 주로 야구중계 하면서 자주 못뵙는데 한국스포츠TV 개국하면서 야구 메인 캐스터로 마지막 활동을 하셨죠
그당시 입사한 캐스터들이
한명제 임용수 김성주 조민호 등입니다
그중에 임용수 캐스터가 이장우 버전을
가장 비슷하게 흉내냈지만 톤 자체가
너무 다르다보니 ㅎ ㅎ
"랩트 랩트. 크다 크다." 이장우 이규항 이세진 정도영 김재형 유수호 캐스터 분들은 요즘 아나운서들과 비교불가한 멋진 캐스터들였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수호.전우벽 캐스터 좋아했구요. MBC에선 송인득 캐스터 좋아했는데..고인이 되셔서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ㅠㅠ
@@jmurm2722 mbc에선 지금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양 모씨 캐스터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양진수 캐스터군요. 8,90년대에 지상파 mbc의 프로야구 전문 캐스터.
1993년 봄 프로야구 최고강타자였던 박준태 역시 고교야구때부터 슈퍼스타였군요. 송진우를 상대로 홈런을 치다니 이 대회 MVP였나요? 고교야구 MVP 2번이나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줍은 미소에 강한 손목힘 호타준족이었죠!!!
진심 1루수의 빡침과 울분이 느껴집니다 2루 어케 됐을까요
잡자마자 바로 집어던지시던데요
야구중계는 이장우 아나운서가 최고였죠....세광고 2루수는 포스아웃 상황이니까 홈에 정확히 송구했으면 아웃 확률이 컸을 것 같은데.....
댓글보니 어르신들의 추억의 장이네요^^
건강히 오래 사십쇼!
송진우 투수는 ~ 고교 시절 부터 유망주 였네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경기
저 때는 고교 야구 선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지고 치고 달렸네요.
관중들의 응원도 열광적이고....
지금은 저때에 비해 물질은 풍요해 졌으나,
저때만큼 열정과 절박함이 많이 사라짐.
요즘 선수들은 공부대신 야구를하는 분위기라 머 그냥 사회인야구수준이죠
2루타 코-스 ,,,그리운 이장우케스터
세광고 2루수는 무조건 홈송구 했어야지
그랬어야 후회가 없었을 텐데....
홈송구를 염두에 두고 전진수비 했으면 무조건 홈송구.해야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상황에선 무조건 홈으로 던졌어야죠
아니 진짜 빡침
끝내기 연장 원아웃 만루에서 1루로 전력 송구하는 꼴통이 있네,,,,^^
이 시대는 고딩 때부터 스타였다! 야구할 맛이 났을 시대!
KBS 스포츠님..
흑백 시대였던 79년 고교야구 경기
특히 제모교 인천고의 경기를 구입할수 있다면 돈을 얼마든지 지급해서라도 구입하고 싶습니다
79년 인천고는 최계훈이란 초고교급 투수를 보유했으면서 전국대회 4번준우승
결승전 전적
대붕기 배재고에 3:2배
봉황기 광주상고 5:0배
황금사자기 경북고에 1:0 패
전국체전 전주고와 2:2. 추첨패
이 당시 경기장면이 있다면 구입해보고 싶습니다
그때 만년 준우승팀이라는 불명예 스런 별칭을 얻었지요
광주일고 10회말 공격 원아웃 만루.
김선진 친 타구가 높이 튀어
체공 시간이 길어서,
세광고 2루수가 포구하였을 때는,
3루 주자가 거의 홈 베이스에 근접했음.
그래도 홈 베이스에 무조건 빨리
던졌어야 했는 데, 순간 멈칫해서
(아마도 홈 베이스에 거의 도달하는
3루 주자를 보았는 듯)
이도저도 안 되어 너무 아쉽네요.
9:25 느린 화면 보면 2루수가 잡고 홈으로 송구만 제대로 했으면 3루주자는 아웃입니다
@@Alex-v1i3t
네. 2루수는 타구를 잡지 마자 무조건 즉시
홈베이스로 송구해서 승부 걸었어야 했는 데,
너무 아쉽네요.
왜 저리 멈칫 주저했는 지....
박준태선수 야구를 스마트하게 하는 선수란 느낌이라 기대가 컸는데 체력이 아쉬웠네요 고교땐 문희수가 에이스였는데 프로 와서는 이강철이 더 성공했네요
문희수 투수는 아무래도 하드웨어가 스몰
@@tur7321 프로에선 하드웨어가 받쳐줘야 성공하드라구요 박준태의 재능에 김선진의 몸을 합치면 딱 이상적인 선수인데 아쉽죠
@@Alex-v1i3t 고교야구 스타 박노준 선수는 일찍 재능이 발달했죠.
아마츄어 야구가 너무 성적에만 급급, 조계현 투수는 너무 일찍 혹사.
그당시 김재박 선수를 일본 프로에서 스카웃 하려했고 지금보단 더 한일간 수준차,
토너먼트 단기전은 온몸 쥐어짜서 성적 낼수 있어도 긴 시즌 프로는 파워가 받쳐주지 않으면 버틸수 없죠.
선린상 스타 박노준 선수는 테크닉은 이미 고교시절 완성 파워가 부족, 프로에선 파워, 테크닉 다 가져야지 하나만 가지면 반쪽짜리 그저 그런 선수로,
그런면에서 박노준 고교야구선 천재,
프로에선 평범.
조계현 선수 혹사 안 했으면 npb에도 통하지 않았을까.
몇십년 한번 나올 투수 선동열은 병역 등 해결 했으면 메이저에 도전 본인도 굉장히 아쉬움.
@@tur7321 굉장한 야구팬이시네요👍 단기간 토너먼트인 아마야구와 달리 장기간 레이스인 프로에서는 체력이 중요하죠 박노준선수는 그게 아쉬웠죠 전 개인적으로 박노준이 해태로 가서 92년 플레이오프때 홈런도 치고 활약한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롯데가 완전 미쳐서 우승까지 해버렸지만요
그리고 선동열은 82년 세계대회 우승으로 병역면제 받아서 군대문제는 해결했지만 당시 광주의 민심이 해외진출을 용납안했어요 극성팬들이 선동열 집에서 시위를 할 정도라 해태에 주저앉았죠 저도 요즘 야구보단 80년대 야구가 더 낭만적이고 기억에 남네요 프로든 아마든 말이죠
2루수가 경기를 이해 못하고 있었네요 볼것도 업ㅎ이 홈송구 했어야했어
봄의 강자 야구천재 박준태 고교야구시절 정말 엄청난 스타였군요^^ 웃는 인상에 빠른 발 투수로도 잘던진 진짜 천재였네요!!!
광주일고 에이스 문희수는 80년대 고교 빅에이스들인 박동희 조규제 지연규 조계현 같은 압도적인 투수는 아니었으나 이해 광주일고는 역대 최고 성적 찍음 야구는 팀스포츠니까
kbs 자료가 맞는지.. 비디오 녹화분처럼 많이 흔들리네.. 그래도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저 시대에는 저런 실수하면 많이 맞았을텐데 무식한 시대라서..
추억의 교련복
최동창 89년부터 OB BEARS 강타자 활약. 신인시절 원래 공이 빠르나 컨트롤 나쁜 투수였다고 신문기사 기억남.
1983년 광주일고 3개 메이저 대회 우승.
1983년 해태 타이거즈 우승.
1980년 5월 슬픔을 함께 겪었던 광주 시민들에게 크나큰 기쁨과 위로를 안겨주었죠. 해태 경기. 경기 끝자락. 해태 응원석에 뜨거운 합창. 목포의 눈물. 호남인들의 한과 눈물.
최동창 송진우 문희수 박준태.....옛생각에 잠겨봅니다^^
90년대 LG 17번 박준태.. 특히 92.93년도 망한 엘지에서 송구홍과 함께 이끌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이장우 캐스터의 명복을 빕니다.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아나운서였습니다.
세광 2루수는 이 경기 이후로 야구를 더이상 하지 못했을 거 같네요. 세상에 저상황에 어떻게 1루를 던질 생각을... 던져서 아웃시켜본들 뭐할건데....ㅋ 아마도 아웃카운트를 착각한게 아닐까 싶네요.
세광고 1루수 빡쳐서 글러브 던지고 투수 주저앉고.....
이 경기는 당초 광주일 문희수 - 세광 송진우의 멋진 투수전을 예상했지만 예상외의 타격전으로 엎치락 뒤치락 전개가 됐고 다음 대회인 청룡기 결승 천안북일 - 포철공 경기는 멋진 타격전을 예상했지만 의외의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가 됐었습니다. 이게임을 보면 세광시절의 최동창 선수가 상당한 포스가 있던 선수였고 투수, 타자 심지어 신입생시절엔 포수도 봤던 만능 선수인 박준태 선수의 활약이 돋보입니다. 마지막 순간 세광 2루수는 무조건 홈에 던졌어야하지만...어린 고교생임을 감안하면 그 찰나의 순간에 머리속이 무척 복잡했을것 같아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홈 던지긴 좀 늦은거 같은데 병살을 노려야하나...그러다 이도저도 아니게 된거죠..귀한 자료 재밌게 잘 봤습니다.
광주일고 김선진 친 타구가 높게 튀어
체공 시간이 길어서
세광고 2루수가 포구하였을 때는
광주일고 3루 주자 문희수가
거의 홈 베이스에 도달했음.
그래도 무조건 홈 베이스로
던졌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네요.
10회말 광주일고 공격.
노아웃 1루.
김목정 친 타구를
세광고 유격수가 타자 주자 잡는 데
집중해서 원아웃 2루가 되었다면,
실점 안 했을 수도 있는 데 ...
일고 6번타자 호성성님 ㄷㄷㄷㄷ
1:20 최동창 이번대회 16호 홈런???? 실화임???
대회 통틀어 16호
신인드래프트하고싶어요안될까요제발보내드립니다!
영광영광 세광 영원히 빛나라!
본 게임 출전 선수들의 이후
송진우, 이강철 : 대박, 오랜 선수 생활.
팀의 중추적 역할
문희수, 이호성 : 중박. 그럭저럭 성공적 선수 생활. 이호성은 비극적 종말.
김선진 : LG에서 꾸준히 활약. 주전은 아니었고 성적은 미미했음.
서창기 : 성균관대 재학시, 중추적 역할.
대학교 때 대박.
프로땐 거의 출전 못 하다가 얼마후 사라짐.
박준태, 최동창, 김성규 :
대학교때 준수한 활약.
프로에서 초반 반짝하다 사라짐.
특히. 박준태는 동국대 재학시절.
대학야구 최고 타자였고.
프로때도 시즌 초반에는 정말 대단했으나.
시즌 중후반에는 사그러짐.
천상주, 정영진 : 이름도 없이 사라짐.
김목정 : 공부를 아주 잘 해서
학력고사 치르고 연세대에
일반 학생으로 진학함.
세광고 나머지 선수들 : 이후 알려진 바 없음.
김목정 캐처 생각나네요. 천안북일 김광윤, 군산상고 장호익 등이 잘했지요
광주일고 문희수 투구폼이
역동적이고 시원시원 합니다.
상체를 앞쪽으로 약간 웅크려 힘을 모은 다음,
앞으로 힘껏 낮게 내려 던지는 투구 폼.
문희수 본인 얘기로는 온 몸 모든 부위를
활용한 체력소모가 큰 투구 자세여서
오래 선수생활 못 했다고 합니다.
투수는 일단 어느정도 하드웨어가 받쳐 줘야죠,
고교야구 처럼 토너먼트용 아니고선
선수생활을 오래 하려면
저 당시 내 고장 고교 야구팀이 우승하면
전 고장 시민들이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함께 기뻐했었죠.
특히 3년전,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슬픈 일을 겪었던 광주 시민들에게
광주일고 우승은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었죠.
80년5월초순 중3때 삼촌결혼식때문에 광주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80년이면 선동렬이 광주일고 우승시키고 졸업했죠..그후 우승없다가 83년도에 3관왕 한거 같은데...맞나...
@@윤혁-w5w
네. 맞습니다.
선동열 광주일고는
1980년 대통령기 우승
광주 사건으로 청룡기 불참
봉황대기
1회전 경기고와 경기
선동열 노히트 노런
2회전 안언학 중앙고에 일격
2대3으로 패배
황금사자기
이상군 북일고를 준결승에서
4대2로 이기고 결승갔으나.
4타수3안타 홈런1개
박노준에게 통타 당하며
준우승.
문희수 투수 1학년 1981년
청룡기 4강까지 올랐으나,
성준 경북고에 4대6 패배.
문희수 2학년 1982년
광주일고 청룡기 봉황기 4강.
청룡기 때 4강때
문희수 조계현 투수전
1대0으로 군산상고 승리.
봉황기4강.
재일교포 팀에 3대6 패배.
@@윤혁-w5w
문희수 3학년 1983년
광주일고
대통령기, 봉황기, 황사기 우승
3관왕 달성.
이때 광주일고 멤버들 골고루 잘 함.
이때 광주일고 전성시대
세광2루수가 많이. 아쉽네요😊
광주일고 10회말 노아웃 1루.
김목정 친 타구를 잡은 세광고 유격수가
타자 주자 잡는 데 집중해서,
원아웃 2루가 되었었다면,
실점 안 했을 수도 있는 데...
그게 아니라 1루주자인 문희수를 확실히 태그아웃시켰어야죠
2루수가 왜 홈에 안던지고 뭐한거야??
안녕하세요 kbs스포츠 담당자님!!!
83년 대통령배 풀영상을 구하고 싶은데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나오셔서 꼭 소장하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아버님이 본 경기에 출전하신
선수였습니까 ?
정성원
네^^ 세광고 출전 선수이셨습니다.
실례지만, 아버님 성함이 ?
본 영상 속 세광고 2루수 ?
네 맞습니다 ㅎㅎㅎ;;
영상으로 보니 저때 어린나이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슴이 아프네요ㅎㅎ
아버지께서 바로 홈 송구를 염두에 두셨는데 글러브에서 공이 한번에 안잡히셨다네요.. 그래서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셔서 그랬다고 하시네요..
광주일고 김선진 타구가 높이 튀어
체공 시간이 길어서
아버님이 포구하셨을 때는
(개인적으로 아버님과 동시대 사람으로,
당시 본 게임 자세히 관람했었음)
광주일고 3루 주자가
이미 홈 베이스에 근접한 상태였고
포구후 바로 홈 송구했어도
세이프 가능성 큼.
아버님 잘 못이 아니고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최선을 다했는 데,
인생이 다 그런 것인 데.
희안하네..2루수가 왜 홈에 안 던졌을까? 던지면 백프로 아웃인데.....
조아요
일고 짱
이강철도 보이네
송진우와 국가대표로도 명성을 떨친 동국대 1년 선후배 사이임.
고교때는 문희수가 에이스고 이강철이 서브 느낌이었는데 프로 와서 이강철이 크게 성공했죠
10:07 고딩 이강철ㅎㅎ
10분8초 등번호 5번 KT 이강철감독 옛된얼굴
층북에 힘 세굉화이팅
교련복 ㅎㅎㅎ요새아이들은 모르지
2루수 홈으로 던져야지 포스아웃인데.....ㅜ 아마 볼이 손에 안잡혔을듯....
어린이날 전날 상황!^^
광주일고 이강철,김선진 슈퍼스타!^^
80년대 한국 저 당시 저런 실수를 하고 후에 얼마나 갈굼당했는지는 안봐도 뻔하다! 당연히 맞기도 했을걸! 무식하고 무지했던 80년대 학원 스포츠 문화!
2루수 좃나 맞았겠다
테그안해도 되는 상황에서..
사회인야구도 저렇게는 안하는데
카퍼레이드ㅋㅋㅋㅋ참 낭만있던시절이였던것같다..
거명되는 케스터 분들 추억 속의 이름.
저는 해태 구단주가 된 박? 황인용 해설 김동엽 ~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박종세 아나운서와 김동엽 감독의 해설.
구단주는 박건배
광주일고 선수들은 다른 학교 선수들보다 2~3살은 많아 보이고 약간 건달처럼 보이고 체구도 커보인다. 왜 그렇지,
느린 장면봐도 홈송구하면 충분히 아웃인데 이해안감
세광2루수 본헤드플레이네 홈으로 던졌어으면 아웃타이밍인데.홈지나가도 홈으로 던졌어야지.홈플레트 앞에서 넘어질수도있고 베이스 안밟을수도있고
박준태라는 이름은 프로야구 1군 주전까지는 하는 이름인가보네. 대단한 선수까지는 못되도
1983년 고교야구 최고 투수 문희수.
본 경기에서는 세광고 타자들에게
난타 당했네요.
10이닝. 11피안타. 6사사구.
6실점.
문희수 투수는
봉황기, 황사기 대회에서는
타자들을 압도하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보여 줍니다.
83년 고교랭킹1위 투수는 조계현 입니다.
@@윤혁-w5w
내가 알기로는 조계현은 부상으로
1983년에는 부진하였고,
따라서 군산상고도 변변한 성적
올리지 못 했습니다.
@@윤혁-w5w
조계현은 1982년 고교 1위 투수였고,
1982년 봉황기 우승후.
한일고교야구대회에서
3연속 경기 출전하고난 후.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제대로
던지기 못 했습니다.
조계현이 연세대 진학한 후에는
타자로 출장했다가
연세대 고학년 때 투수로 나왔지만.
1982년 때 위력적 강속구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UCUgZdbzrh9kWzCM1OxK-cIA 그당시 통합랭킹에서 1위라고요...제가 같은 또래라서 잘압니다
1983년 객관적 자료를 보시죠.
문희수는 광주일고를
3개 메이져대회 우승 시켰고.
조계현의 군산상고는
청룡기 4강 1회에 그쳤네요.
2루수 골때리네ㅋㅋ 바로 송구했으면 아웃인데
어르신들 질문있습니다.
1980.5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많은 시민들과
운동에 참여하신분들이 문어 전두환땜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데요...
1.그당시 광주쪽 야구명문 학교들은 대회에
참가했나요? 성적들은요?
2.그 이후 억울함과 가슴 매이는 상처의 표현을,
이런 대회에서 표현할 방법 같은건 없었나요?
근래 올라오는 영상들이 그시절 즈음 것들이라
역사에 관심많은 얼라가 여쯉니다^^
전 당시 성남에 살고있었던 고교야구 광팬이었어요
5월민주화운동전인 대통령배에서는
같은 광주팀인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결승에서 만났구요
광주일고 선동렬 허세환
광주상고 김태업 이순철
청룡기에 나왔다면 두팀중 한팀이
또 우승했을겁니다
청룡기는 선린상고가 마산상고를 이기고 우승
5월에는 광주팀 모두 못나왔어요
대붕기는 세광고우승 ? 준우승
화랑기는 북일고우승 선린상고 준우승
봉황기는 북일고우승 배재고 준우승
황금사자기는 선린상고우승 광주일고 준우승